숭덕지맥 3구간
2011.5.16 (월)
산길 : 봉우재~퇴강
거리 : 14.0km
구간거리
봉우재~5.6~서낭고개~2.8~금지산~4.3~군암산~1.3~퇴강 / 14.0km
Cartographic Length 14.9km Total Time: 06:50
낙동강 일출
퇴강리 강변에는 ‘낙동강 칠백리’ 표석이 있다. 상주의 옛 이름이 상락(上洛)이고, 상락의 동쪽을 흐른다고 낙동강이 되었다는 기록. 낙동강의 발원이야 태백산 황지못이지만, 작은 물이 흘러 내를 이루고, 여러 내가 어우러져 비로소 강다운 모습을 갖추는 곳이 여기 상주라. 상주에서 시작하여 부산 바다를 만나기까지가 칠백리라는 이야기다.
남강이 낙동강을 만나는 우봉지맥의 끝에서도 하룻밤을 보냈는데 그 때의 분위기는 전혀 없다. 강을 살린답시고 온천지를 뒤집어놓고 거대한 모래산을 만들어놨다. 강둑도 칼로 자르듯 일직선으로 곧게 펴놓아 물살도 빠르다. 보현지맥 마치고 아무 생각없이 물에 들어갔는데, 여기서 그러다가는 바로 떠내려 갈것같다.
자장가 같은 개구리소리도 모닝콜 같은 새소리도 여기는 없다. 저그들도 먹어야 사는데 뭐 먹을게 있다고 여기에 오겠나. 남강이 낙동강을 만나는 우봉지맥의 끝에서 본 그런 일출을 기대했다만 강 건너편 산이 너무 높고 구름이 많아 솟아오르는 해는 보지 못했다.
다섯시도 안되어 눈을 떠 어묵국에 식은밥 말아먹고 출발이다. 점심시간쯤에 마칠 것 같아 점심밥은 따로 싸지 않고 빵3, 계란3개만 넣었다. 내차를 ‘낙동강칠백리’ 표석 뒤에 세워놓고 고문님 차로 봉우재에 올랐다.
06:10 봉우재
06:47 ×234
07:15 솔티고개
08:18 서낭고개
09:17 철조망 팬스
09:56 금지산
11:03 갈미고개
11:20 마루봉기지국
11:34 용해사 갈림길
11:45 △385.1 (국사봉)
12:20 고개
12:36 군암산
13:01 퇴강리
13:15 영강합수부
봉우재
봉우재(170m)
오봉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탄탄대로였다만, 남쪽으로 지맥길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지경이다. 고개 우측(서)으로 가는 [능가정사] 팻말 따라 시멘트길로 간다. 우측 아래는 과수원이고 민가 한 채가 있는데 따로 절집은 보이지 않으므로 이 민가가 능가정사인지 모르겠다.
과수원에 설치된 수도가 있어 고문님이 확인했지만 물은 나오지 않는다. 어디서 모터스위치를 넣어야 나오는 모양이라. 10분 후 왼쪽 230봉에서 내려온 안부이고 마루금은 우측 봉우리로 올라간다만 정면에 나있는 수렛길을 계속 따라가면 ×243봉을 지난 안부에서 다시 만난다. 초장에 가뿐하게 봉우리 두 개 띵가 묵었다.
그 빼먹은 봉우리가 마을에서 말하는 봉수대인 모양이라.
신흥리(新興里) 봉수대 (성산 봉수대)
봉우재 남쪽 남산고성 안에 있다.『조선왕조실록(세종지리지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예천군조』는, 다인현 소이산 봉수대가 “북쪽으로 함창(咸昌) 쌍화산(雙花山)에 응한다.”고 한다.
넓은 밭이 펼쳐진다. 강원도 같으면 고랭지 채소밭이 되겠다만 여기 해발은 고작 200이고 아무것도 심어 놓은거는 없다. ×234봉에서 배낭 한번 내리는데 고속도로가 아주 가까워 차소리가 요란하다.
솔티고개
외서면 함창읍 사벌면의 삼면봉에서 좌틀하면 ⅹ203봉이고 우틀하여 내려가면 묵은 고개가 나온다. 고개 좌우로 함창읍 솔티마을과 사벌면 원터마을이다. 솔티의 유래를 보면서 국어공부 많이 한다.
솔티고개(松峴)
목가리(木可里) 원터마을에서 함창읍 신덕리 솔티마을로 가는 고개. 고개 꼭대기에는 지금도 성황당터가 남아 있고, 고개의 남쪽에는 미륵불과 탑이 있다. 상주와 함창을 잇는 옛길이 있었다.
‘솔(細)+티(峙)=솔티’로 본다. ‘솔’은 ‘가늘거나 좁거나 뾰족한 것’을 뜻하는 말이다.
솔기 : 옷의 두 폭을 맞대고 꿰맨 줄.
오솔길 : 외지고 좁은 호젓한 길.
소(솔)나무 : 가늘고 좁은 잎을 가진 나무
솔이끼 : 잎이 바소 꼴로 비늘처럼 촘촘히 붙고, 그 끝이 뾰족한 이끼.
‘작거나 좁은 것’을 뜻하는 ‘솔’이 한자로 표기되면서 ‘송(松)’이 되었다.
나뭇잎에 송홧가루가 앉아있어 건드리면 부옇게 인다. △177.2봉 삼각점은 좀 떨어져 있는거 같고 길도 없어 관심 밖이다. 솔티마을을 아래쪽으로 휘돌아 가는 능선인데 오름길 아래 관(冠)을 쓴 커다란 비석이 있어 앞을 보니 ‘대법사 경주최공’이시다. 풀이 웃자라 묘가 다 묻혔다. 후손들이 다 이민을 떠난 모양이다. 선두대장님 안오시길 잘했나. 준희님도 경주최공 이신데, 동네와 가까워서인지 묘가 자주 나온다.
서낭고개
서낭고개(180m)
사벌에서 함창으로 가는 2차선 아스팔트 도로. 멀지 않게 4차선의 3번국도가 있어 이 길은 인근 마을사람들만 다니는 한적한 길이 되어버렸다. 고갯마루에 서낭당이 있었다고 서낭고개라는 유래쯤이야 간단히 유추가 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지만 이곳 서낭당은 예사 서낭당이 아니었다.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보러 다니던 길, 옛길 영남대로였음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영남대로
낙동강을 건너와 성골고개(상주IC)를 넘고, 사벌왕릉, 사벌초등학교 앞을 지나 덕가저수지 옆길로 해서 서낭고개를 넘는다. 금곡마을을 지나 작약지맥의 끝봉인 태봉산을 돌아 점촌역으로 간다. 내 남은 생에 지맥산줄기를 다할 여산이 안되기도 하지만, 하던짓 그만 둘 수도 없는 일이라. 혹은, 지맥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더라면 이 옛길걷기에 나서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이라도 지맥 걷어치우고 평지길로 나서 볼까?
눈에 보이지 않는 옛 흔적을 하염없이 찾고 앉았을 수만은 없다. 건너편 비탈 묘터를 쳐다보니 너무 가풀막이라, 왼편(북) 과수원 옆에 보이는 임도로 들어간다. 평산신씨 납골당 뒤로 치고 올라 230쯤 되는 봉에서 지맥에 복귀했다. 막판 길도 없는데를 들이밀고 올랐더니 다리가 후들들 거린다.
영진 지도에 두리봉으로 표기된 250봉을 거쳐 동쪽으로 나가다가 ×225봉이 갈라지는 갈림봉에서 우측(남)으로 틀어 내려오니 묘터에서 앞쪽에 금지산이 높게 솟아있다. ×225봉을 거쳐 북쪽 금곡마을로 내려가면 이안천과 영강이 만나는 합수점, 작약지맥의 끝과 마주보겠다.
안부에 떨어지니 철조망 울타리가 앞을 막는다. 우측으로 길은 뚫려있어 진행하는데 어려움은 없다. 울타리 안쪽을 살펴봐도 뭐하는덴지 알 수 없고, 울타리는 10분간 (400m) 이어진 후 왼쪽으로 꺾여간다. 울타리 끝지점에 앉아 쉰다.
금지산(×337)
알미늄샷시로 만든 산불초소와 봉우리 한가운데 묘가 있고 그 뒤로 숲이 우거져 있는데 정상부를 한 바퀴 돌 수 있게 길이 나있어 빙 돌면서 사방으로 조망을 할 수가 있다. 어제 만큼 대기가 깨끗하지 못하다. 금지산을 상주에서는 건지산 (乾池山 또는 建芝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남쪽으로 잘 난 길을 따르면 덕가리 하산길이 된다.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왼쪽으로 약간 방향을 수정했다. 내리막이 다한 안부에는 희미한 고개 흔적이 남아있다. ×295봉을 넘고 그 다음봉을 내려가면서 고행길이 시작된다. ×237봉까지 C자로 활처럼 휘어지는 능선인데, 좌로 우로 둑 같이 생긴 능선과 골이 첩첩이 갈라져 어느게 마루금인지 애매하기 짝이 없다. 글자 그대로 빨래판, 부채살 능선이다.
길이 없다는 말은 온통 숲이라는 얘기다. 잡목을 이리저리 벌리며 진행하는데, 철쭉이야 밀고가면 그만이지만 가시 뾰족한 명감나무 줄기는 까딱 잘못 건드렸다가는 피를 보기 일쑤다. 전지가위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저께 오소리 구하느라 이빨이 다 빠지는 바람에 버리고 왔다. 산행 마치고 보니 온몸에 긁히고 찔린 자국에 선혈이 낭자했는데 모두 여기서 난 상처들이다.
그렇게 난리치기를 30분, ×237봉을 넘으니 묘가 나오고 다소 숲이 뚫리는거 같다. 윗도리 벗어놓고 쉰다. 일단은 묘 진입로가 있어 좋다.
갈미고개 (230m)
시멘트 포장이 된 고갯길이다. 축대를 쌓으려는지 굵직한 돌을 많이 갖다놨다.
묵상리(墨上里) 갈미고개
먹실 북쪽 지강골을 거슬러 올라가면 함창읍 상갈(上葛)로 통하는 갈미고개 마루에 서낭당이 있다.
갈+미(山)+고개(峴)+서낭당. ‘갈미’는 ‘산이 갈라지는 것’을 뜻한다.
마루봉기지국
갈미고개에서 봉우리 하나 넘으면 높은 송전철탑이 보이고 내려가면 오래된 건물이 있다. 열어 재쳐진 정문으로 가보면 [SK마루봉기지국] 팻말이 붙어있으나 사람은 없고 운용되지 않는듯하다. 좌우로 넘는 수렛길이 나 있는데, 여기부터는 유명산의 일반 등산로 수준이라 완전 해방된 민족이 된다. 애기똥풀이 길 양쪽으로 넓게 퍼졌는데 일부러 심은 듯하다.
용해사 갈림길
조은 길에 속도를 내며 나아가면 10분 후 우측으로 용해사 갈림길. [용해사0.3km, 정상0.5km] 정상은 △385.1봉을 말한다. 연이어 ⅹ337봉을 넘어가면 예술촌 갈림길이다. [예술촌2.4km]
예술촌은 매호리 초등학교 폐교를 이용하여 예술활동 공간을 만들었고 야영도 된단다. 매악산으로 가려면 여기서 우측으로 들어가야 되겠다.
매악산 (梅岳山 사벌면 매호리)
매호장터 북쪽에 있는 높이 315m의 산. 매호초등학교 뒷산이다. 마리산의 남쪽에서 온 한 줄기가 이룬 산이다. 동쪽에는 이재 조우인(曺友仁)이 이거해 옴으로 명소가 되고, 문학과 학문의 산실인 이적정(二適亭). 임호정(臨湖亭). 어풍대(御風臺) 등의 명소가 남았다. 남쪽에 퇴우당(退憂堂) 조계형(曺繼衡)을 모신 영당과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유허지가 있다.
이제 방향이 北이 되고 산행 막바지에 이른다. 봉우리도 두 개 남았다며 널찍한 길에 흥을 내보는데 갑자기 고문님이 고함을 치신다. 동시에 내 앞쪽에서 고라니 두 마리가 나를 향해 돌진해 오는데 너무 순간적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내 옆을 스치며 지나간다.
저들도 둘이서 오붓하게 데이트를 즐기다가 갑자기 나타난 사람을 보고 놀라 방향을 바꾸지도 못하고 엉겁결에 내 옆을 그대로 짓쳐 도망간 간 것이다. 모든게 순식간이라 대처할 여유도 없었는데, 고라니가 아닌 산돼지가 공격적으로 달려들었다면 어찌되었을까?
평소 산돼지 대처법이라며 우산을 펴고, 나무에 오르고 어쩌고 하는데, 이 상황을 대입하면 말짱 헛소리이고, 그대로 들이받혀 주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일이다. 우산이든 기어오를 나무든 찾기도 전에 이미 몸은 허공에 떴을끼라. 아이고 무시라...
우측으로 낙동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조망바위가 있다. 강 살리기 사업인지는 몰라도 강둑이 고속도로처럼 일직선으로 뻗고, 풍양으로 낙동강을 건너가는 상풍교 (상주~풍양 앞 글자를 땄나?)가 보이고 그 뒤로 가물거리는 봉우리는 보현지맥 비봉산이겠다. 낙동강을 살리자는 국가적 사업 앞에서 옛날 나루터를 찾는 일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일일까?
운성진 나루터
매호리 동쪽 낙동강 가에 있는 뱃가에서 예천군 풍양면 낙상동 들마로 건너가는 낙동강 나루. 자동차문화가 발달하면서 풍양면민(豊壤面民)의 상권(商圈)이 상주에서 예천으로 바뀌었고, 이후 나루터의 기능이 줄어들다가 1995년 상풍교가 놓이면서 나루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상풍교 / 강 건너는 풍양이고 비봉산이 희미하다
국사봉 (385.1m △예천 23)
시멘트 바닥의 넓은 헬기장이다. 정상석은 없고 이정표만 있다 [예술촌2.7 매호리1.3] 그 기둥에 ‘국사봉385’라 매직으로 써놓았다.
국사봉(國師峰)
동디 마을 뒤에 있는 해발 385.1m의 산. 함창읍 하갈리와 사벌면 묵상리. 매호리와 경계를 이룬다. 산봉우리에 쇠로 만든 말이 있었다고 한다. 이재 조우인(曺友仁)선생이 십리강산을 국록(國祿)으로 받은 지역이어서 국사봉이라고 한다.
국사봉 뒤로 내려가는 길은 키높이 산죽 군락이다. 조은길도 여기서 끝인가 염려스러웠는데 산죽 가운데로 넓게 길을 내놓았다. 이 길은 매호리에서 낸 국사봉 등산로다. [추락주의] 팻말이 있고 낙동강 조망대다. 군암산에는 조망이 전혀 없으므로 여기서 실컷보고 내려갈 일이다.
고문님도 "V"
잠시 더 내려오면 우측으로 [매호리0.9km] 갈림길이 있고, 왼쪽 급비탈이 지맥인데 길이 아주 희미하다. 내림길이고 침 달린 줄기가 없어 마구잡이 미끄러져 내리니 묘터가 나오고 수렛길 따라 나가면 밭이 있는 군암산 안부다.
고개 (150m)
밭에 부부가 일하고 있다. 나무에 걸려있는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신나는 음악이 들린다. 아주머니께 산길을 물어보니, 여기서 올라가는 길은 없고 저 아래 마을에서 올라가야 된단다.
대충 빈곳을 골라 숲으로 들어가 올라가니 길이 조금씩 나타난다. 마지막 오름 100여m만 극복하면 오늘 고생 끝이다 생각하고 묵묵히 15분 오름짓을 하니 군암산 정상인데, 임금바우라는 이름값도 못하는 봉우리다.
군암산 안부
군암산
군암산 (ⅹ281m)
배낭에 남은 계란 세 개 먹고 가야하는데 앉을 자리도 없고, 숲이 꽉 들어차 조망도 하나 없다. 소나무 아래 누군가 ‘군암산 281’ 매직으로 쓴 납작한 돌을 세워 놓았다. 아무래도 여기서 君자는 임금을 뜻하는게 아닌 모양이다.
군암산(君岩山) 퇴강리(退江里) [임금 산]
물미 마을 뒷산으로 해발 280m로 하갈과 경계를 이룬다. 임금바위가 있다.
희미하게 나있는 길은 자연스레 동쪽으로 틀면서 광대정을 향하는데, 차를 대놓은 천주교회를 목표로 잡고 내려간다. 두세번 왼쪽으로 방향을 고쳐잡으며 내려오니 묘가 나오고 성모 마리아상이 있는걸 보니 성당부지다. 시멘길 따라 내려가면 합수점이 잘 보이고, 퇴강마을회관 퇴강성당을 지나 버스정류장이 있는 도로에 내려선다. 천주교요람지(天主敎搖籃地) 표석이 있다.
영강, 낙동강 합수부
퇴강성당
퇴강리(退江里) 물미
퇴강리에서 가장 큰 마을. 마을이 강가에 있어서 물미(물뫼)라고 한다. 퇴강성당은 1903년에 공소가 설립된지 100년이 넘었다.
차를 몰고 강둑을 넘어 합수점에 다시한번 몸을 담궜다. 강물도 들고나고 하는지 어제보다 수위가 낮아졌다.
상주에서 부산까지 칠백리
숭덕탕
퇴강리(退江里) 낙동강(洛東江)
많은 곳에 낙강(洛江)으로도 기록되고 있다. 상락(上洛, 상주의 옛 號) 즉 상주의 동쪽을 흐른다고 낙동강이라 한다고 한다. 낙동강 700리라는 말이 전해 오는데, 그것은 이곳에서부터 부산 앞 바다까지의 거리를 말한다. 근래에 낙동강 1,300리라고 하는데, 이것은 강원도 황지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다.
『경상도지지(慶尙道地志)』 계성현(桂城縣) 조에는 낙동강을 기음강(岐音江)이라 했다. 1196년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가 상주의 동쪽 낙동강에서 ‘낙동강’ 시를 남기며 선유한 뒤로 이 강은 선비들의 유상처가 되어, 1622년 7월 상주의 선비들이 남긴 『낙강범월록(洛江泛月錄)』은 171년 간 각종 낙강시회(洛江詩會) 때 창작된 시를 모은 시집으로 전한다.
『상산지』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수원(水源)이 태백산 황지에서 나와 수 백리를 흘러 우리나라의 경계에 들어오면서부터 낙동강이라 하니, 상락(上洛)의 동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주의 북쪽 30리에 삼탄진(三灘津)이 있고, 10리를 지나 회동진(檜洞津)이 있으며, 5리를 가서 비란진(飛鸞津)이 있고, 이수(伊水)가 들어오는 곳에서 5리를 지나 죽암진(竹巖津)이 되고, 위수(渭水)를 받은 10리 허에 낙동진이 있으니 동남으로 여행하는 이는 모두 이 나루를 건너게 된다. 낙동진 위에 관수루가 있고, 바다로 들어 가는 곳까지 모두 낙동강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