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의 카슈가르지역(탁스쿠르칸, 칼라쿨리호수, 백사 호수, 오이탁, 카슈가르)]
(중국은 중국어가 아니면 소통이 어려움이 있으니 참고로 많이 쓰는 단어를 모아보았다.)
구매: 1. 가격이 얼마입니까?(뚜오 샤오 치엔?) 2. 비싸니 깎아주세요(타이 꾸이더, 피엔디 이디알바)
돈: 일원(이콰이), 이원(량 콰이), 삼원(싼 콰이), 사원(쓰콰이), 오원(우콰이), 십원(스콰이), 이십원(얼스콰이),
삼십원(싼스콰이), 100원(이빠이 콰이), 200원(량빠이 콰이)
개수: 하나(이거), 두 개(량거), 세게(싼거), 네 개(쓰거), 다섯 개(우거), 여섯 개(리우거)]
부탁: 1.물 주세요(칭 께이워 슈이) 2.밥 더 주세요(칭 께이워 슈이) 3 맥주2병 주세요(짜이 라이 랑핑 피지우)
4.차가운 것 주세요(야오 삥더) 5.맛있는 것 주세요(칭 께이 워 하오 츠 더 짜이 쩔) 6.냅킨 주세요(칭 게이워
찬팅 즈) 7.맛좋다!(헌 하오) 8.젓가락/숫가락 주세요(워 야오 콰이 쯔/싸오 쯔) 9.한 접시 더(짜이 라이
이 펄 쩌거 차이 10.향채 빼주세요(부야오 시앙 차이) 11.화장실?(쳐소 짜이 날?) 12.미안!(뚜이 부 치)
13.감사해요(시에 시에) 14.안녕하세요?(니 하오) 15.환전해 주세요(워 라이 환 치엔)
음료: 음료수(인리아오). 콜라(커크컬러), 커피(카페이), 사이다(치 슈이), 차(차 슈이), 맥주(피지우)
신장(新疆): New Border 즉 새로운 국경을 말하며, 국토 강(疆) 자의 의미는 우루무치 편에 기록되어 있다.
[중국 출입국 관리소(이미그레이션, immigration)와 탁스쿠르칸]
파키스탄 소스트에서 3시간쯤 달리고 차의 오름이 끝나면 해발 4688m에 자리한 군자랍 패스로 중국
첫 검문소에 도착했는데 건방지고 오만불손한 젊은 중국공안(인민해방군)들이다.
그들은 힘들어 찾아온 손님을 고맙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고, 짐짝 같이 대접했으며, 볼일도 밖에서
아무데나 보게했는데 그래도 눈 내리는 경관은 볼만 했다.
입국절차를 마치고 중국공안으로부터 나쁜 인상을 안고 136km 떨어진 탁스쿠르칸으로 향했다.
중국이 얼마 전만 해도 우리를 우러러 보았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5,000년 역사 중에 우리 세대가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벌써 이런 신세가 되었으니 다음세대들은 중국의 눈치를 얼마나 보고 살아야 할지...
<1. 쿤자랍 패스의 중국 출립국 관리소 2. 눈 내리는 관리소 앞의 풍경>
이곳부터 길 양쪽에는 대평원의 평지는 자갈이 많은 척박한 땅이지만 개간만 하면 얼마 던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널러져 있으며, 그 뒤로는 파미르 고원의 아름다운 설산이 평풍처럼 펼쳐진다.
가끔은 보이는 새로 지은 건물은 농사꾼인지, 목축업자 것인지 아니면 국가기관인지 알 수가 없었으며, 검문소가
가까운 공에는 시멘트공장 같은 보이는 삼일중공(三一重工)이라는 공장도 보인다.
2시간 반쯤 이동하여 탁스쿠르칸에 도착했는데 이 도시는 타지크 족이라 생활풍습도 다르다고 하며, 위구르족은
이란인을 닮았다고 하고, 타지크 족은 동유럽인과 닮았다고 하지만 여행자는 분간할 수 없다.
다만 같은 몽골 족으로 가장 동쪽인 우리 얼굴과 가장 서쪽인 터키의 유럽인 얼굴과 중간쯤 얼굴이 아닐까?
검문소에 들러서 여권과 짐 검사를 마치고, 호텔에 들어갔는데 방은 크고 시설은 괜찮으나 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불편했고, 외화내빈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이곳부터 고산병에서 해방된다.
☆탁스쿠르칸(Tashikorgan): 이 도시는 타쉬코르간 타지크 자치현으로 세계의 지붕인 파미르 동쪽에 위치하며,
평균해발고도 3100~3500m 이고, 위구르족도시 카슈가르와의 거리는 225km이다.
타지크 족(유목민족)이 이동할 때 사용하는 집을 몽골이나 파키스탄에서는 게르라고 하고, 우즈벡과 같은 중앙
아시아는 유르트(yurt)라고 하며, 또는 파오(bao, 빠오, 包)라고 한다.
터키(투르크)어인 유르트 어원은 ‘고향’이란 단어에서 기원했으며, 러시아어는 유르타(юрта)라고 한다.
<1. 삼일중공 전경과 파미르고원 풍경 2. 탁스쿠르칸 검문소 변소와 주위의 풍경
3. 파미르 고원에 보이는 유르트>
[9일] 14년 6월21일 토요일
●일정: 탁스쿠르칸→ 칼라쿨리호수→ 백사 호수→ 오이탁→ 카슈가르 도착(6h)→ 호텔(은서림)
<파미르 고원(Pamir Plateau)의 이야기>
호텔에서 바라보는 파미르 고원의 아름다움을 한 번 더 느끼고, 9시 30분에 출발했으며, 탁스쿠르칸은 미루나무
가로수가 서 있는 거리는 넓고 깨끗했으나 집들이 똑 같은 구조이라 북한 거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번여행에서 가장 마음이 설래 던 것은 학생시절에 세계의 지붕이라고 배웠던 파미르 고원을 먼발치에서만 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는데 그저 멀리 보이는 하나의 아름다운 설산이었다.
<1~2. 탁스쿠르칸 시가지 풍경>
파미르 고원을 지날 때 카이두(?~1301) 딸이 생각났는데 그녀는 현재 아프칸의 마자르이샤리프에 왕국을 세워
다스렸던 카이두의 외동 공주로 체격이 장대하고 용맹하며 힘도 세 당해낼 남자가 없었다고 한다.
카이두는 공주를 이기면 공주를 주고 지면 말 100필을 바쳐야 한다고 이웃 나라들에게 광고를 하였고, 1280년
미남의 파미르 왕자가 말 1,000필을 걸고 도전해 왔다.
카이두은 사윗감으로 욕심이 생겨 공주에게 져줄 것을 권하였지만 공주는 이기고 말 1000필을 얻었는데 이렇게
벌어들인 말 1만 마리로 무장하여 마자르이샤리프를 일대 강국으로 만들었다는 공주이다.
<호텔에서 본 파미르 고원의 설산>
☆파미르 고원: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파미르(빠미르) 고원(Pamir Mountains)은 옛 페르시아어로 ‘태양신의
자리’를 뜻 한다고 하며, 평균 높이 6,100m 이상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줄기들이 모여서 이루어졌다.
북동쪽엔 톈산(천산, 天山) 산맥이 있으며, 동쪽엔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고, 남동쪽에 쿤룬(곤룬, 崑崙,) 산맥은
티베트고원의 북쪽 경계를 이루며, 남쪽엔 히말라야산맥의 일부인 카라코람산맥과 힌두쿠시산맥이 있다.
가장 높은 산은 타지키스탄 이스모일소모니 봉으로 7,495m이며, 그 외 레닌 봉(7,165 m)과 코르체네프스키 봉
(7,105 m)이 있으며, 파미르고원의 많은 빙하 중에 페드첸코 빙하가 72km로 가장 길다.
일 년 내내의 설산과 길고 매서운 겨울과 짧은 여름이 있으며, 연중 강수량은 130mm로 풀과 나무가 자라기 힘든
기온이며, 양을 키우는 것이 주요 수입원이다.
파미르 고원 주위의 나라로는 동쪽엔 중국, 서쪽엔 중앙아시아의 타지키스탄, 남쪽엔 아프가니스탄, 북쪽엔
키르기스스탄이 있으며, 727년 혜초가 파미르고원과 톈산 산맥을 건너 쿠차에 도착했다.
747년 고선지 장군은 쿠차를 출발하여 파미르고원과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서역을 원정했다.
<파미르 고원 지도>
[무즈타크 아타 산(Muztagh Ata mountain, 7546m)과 콩구르(Kongkoerh, 7719m) 산]
탁스쿠르칸에서 40분 쯤 이동하면 파미르고원의 동쪽과 쿤룬(곤륜)산맥 서쪽 끝 사이에 있는 무즈타크(우즈타거)
산이 보이는 곳에서 내렸는데 웅장하고 아름다운 산이 구름 속이라 더 신비하게 보였다.
무즈타크의 Muz(얼음)+tagh(산) +Ata(아버지)는 위구르의합성어로 ‘얼음산의 아버지’라는 뜻이며, 좌우로
도열된 나무 없는 설산과 풀만 있는 대평원을 사열하면서 가노라면 가끔은 경작지도 있고, 동네도 보인다.
태양전지를 갖춘 깨끗한 동네도 있었지만 사람이 보이지 않아 전시용 같아 보이기도 했고, 1시간 쯤 더 이동해서
내렸는데 이곳은 기억엔 없지만 산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었으니 콩구르(공거얼) 산 밖에 없다.
지도상으로는 칼라쿨라 호수를 지나야 거리가 가깝지만 아마도 조망하기엔 이곳이 더 좋은 것 같았으나 거리가
멀고 구름 때문에 산의 모습을 보기엔 2%만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무즈타크는 남성적이고, 높이는 더 높아도 콩구르는 여성적이라고 했지만 확인할 수 없는 것이 많이 아쉬웠으며,
25분 쯤 이동하면 칼라쿨라 호수에 도착한다.
<1.무즈타크 산 2. 설산과 마을 3. 태양전지가 있는 마을 4. 콩구르 산>
[칼라쿨리 호수(Kala Kule Lake) 관광]
Kala Kule는 타지크어로 ‘검은 호수’라는 뜻이지만 주민은 키르키즈 족이라고 하며, 해발 3,100m의 이 호수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티티카카 호(3,812m) 보다 조금 낮지만 백두산(2,750m)보다는 높다.
만년설의 녹은 물이 모여서 된 호수로 ‘타미르의 눈물’이라는 별명을 가졌으며, 인터넷 사진에는 물이 많았으나
지금은 갈수기인지 물이 적었으나 호수에 잠긴 산들은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우편의 산이 무즈타크 산이며, 도로 뒤로 멀리 보이는 집들이 특이하게 생겼는데 사람이 사는 집인지는 알 수는
없었고, 인터넷에서는 백사 호수와 더불어 서유기의 삼장법사, 손오공, 사오정의 일행이 만났다고 했다.
<1. 칼라쿨리 호수 2. 호수에서 본 무즈타크 산 3. 뒤에 보이는 독특한 건물 >
[백사(白沙 호수 관광]
칼리쿨리 호수를 지나면 강시와 강(康西瓦河, Kangxiwa River)은 물도 많아지고 폭도 넓어 강 건너의 동네가 잘
안보일 정도인데 강을 따라 도열해 있는 절벽 같은 바위산이 수십 폭의 평풍그림 같다.
오후 1시 10분쯤에 도착한 이 호수는 주위가 백사 산이라 아마도 바닥이 흰모래일 것이라는 추측은 쉽게 할 수
있는 곳으로 초록색의 물 색깔이 너무 조화롭게 잘 어울린다.
호수는 주위의 눈 녹은 물과 강시와 강 본 지류는 산 뒤를 돌아가고, 일부는 호수로 흘러들어 오는데 이 호수를
사산호(沙山湖)라고도 하며, 발전을 위해 만든 인공 호수라고 한다.
담수호이라 염분이 있다고 하여 확인하려 했으나 잊어버렸으며, 칼라쿨리 호수보다는 훨씬 아름다워 이곳을 먼저
보지 않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키르키즈 족 일 것 같은 아이가 돌 몇 개와 목걸이를 팔고 있었다.
그중 제일 예쁜 목걸이를 샀는데 나중에 사진작가분이 자기가 사려고 했지만 놓쳤다며 목걸이를 하고 다니라고
권해서 자주하고 다녔으나 무거운 것이 흠이었지만 목걸이 장사꾼을 물리칠 때 필요했다.
겔 옆 자동차 타이어에 앉아 있는 원주민 가족을 처음 보았는데 이렇게 험한 환경에서 어떻게 사는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사람들을 걱정하게 해 주었으며, 차는 올라가기 시작했다.
☆강시와 강: 이 강은 칼라쿨리 호수를 지나면 중국국도 G314(카라쿤룬궁루, 喀喇崑崙公路)와 만나 강줄기가
작아지면서 게이즈[Gaizi(Ghez)] 강으로 이름이 바뀌어 카슈가르까지 만나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G314 도로와 연결된 N35 도로를 파키스탄에서는 카라코람하이웨이라고 불렀고, 이 도로를 따라가는 강은
인더스 강이라면 중국은 강시와 강이 G314 도로와 같이 간다.
<1. 강시와 강의 풍경 2. 백사호수 3. 가난한 사람들 4. 목걸이 5. 강시와 강 건너 아주 큰 마을>
[파미르 고원을 넘기 위한 전초기지]
차가 내리막을 달리면 도랑 건너 편 비탈에 돌담들이 길게 늘어선 것이 보이는데 그곳은 예전에 파미르 고원을
넘기 위해 숙소로 사용되었던 전초기지라고 한다.
생각 외로 넓은 지역에 돌담과 무너진 돌집들이 널려 있고, 그 중 한 구석에는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으며,
그곳엔 빨래가 널려 있는데 어떻게 사는 궁금했다.
이 길을 이용한 사람은 유럽과 인도를 오가는 대상들과 정복을 위해 넘었던 군인들로는 고선지장군과 티무르가
있었고, 인도로 성지순례를 떠났던 사람으로 혜초와 삼장법사 현장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넘었는데 그들은 이슬람을 믿는 회족이라고 불렀던 위구르 족으로
그들은 15~16세기 때 사우디의 메카를 순례하기 위해 파미르 고원을 넘었다고 한다.
그들이 순례를 하고 돌아오는 데는 1년 반이 걸렸다고 하며, 파미르 고원을 넘은 사람보다 돌아오는 사람이 더
적었다는 위구르 족은 예전 우리에게 이슬람교 대신에 회교(回敎)라는 어원이 되어준 사람들이다.
전초기지에서 조금만 가면 또 검문을 위해 차에서 내려 걸었는데 길 왼편에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중에
전갈이 들어 있는 큰 호박 보였으나 워낙 가짜를 잘 만드는 사람들이라 그 솜씨를 보는 것 같았다.
<1.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천초기지 2. 검문소가 있는 마을>
[게이즈 계곡(Ghez valley)의 붉은 황토 산]
검문소에서 출발해서 게이즈 강을 따라 1시간 쯤 가면 이제는 강 건너편의 계곡에는 웅장한 붉은 산들이 도열해
있는데 이 산들은 철분이 많아서 그렇게 아름다운 색깔이 된다고 한다.
이산보다 더 아름다운 칠채 산은 그럼 얼마나 아름답다는 것인지! 이해가 안됐지만 지금 이 산만해도 아름다움을
글로 나타내기 힘들 정도이었으나 조금 얄미운 것은 너무 한곳에 모아둔 것이다.
중국에는 세상 모든 풍경이 다 있다고 하니 그저 부러워할 뿐이었는데 이 풍광이 끝날 때쯤이면 식당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나가르 빙하를 보지 못했기에 대신 오이탁 빙하를 보기위해 출발했다.
<1. 게이즈 계곡의 아름다운 산들 2. 식당부근의 풍경으로 단풍이 든 것 같다.>
[오이탁(Oytagh) 빙하공원 관광]
지금까지 본 산들의 풍경은 훈자에서 군자랍패스까지는 설산과 빙하 그리고 날카롭고 뾰족하며 잘 생긴 산을
구경했다면 군자랍패스에서 백사 호수까지는 설산과 경사가 완만한 백사 산의 구경했다.
그리고 게이즈 계곡의 붉은 산을 구경했으며, 오이탁 공원까지는 조각을 한 것 같은 웅장한 바위산이 도열해 있어
또 다른 산의 경치를 구경할 수 있었는데 산들은 표현력이 부족해서 잘 표현하지 못하겠다.
'키르키즈족의 마을'을 구경하면서 빙하공원 주차장에 차가 멈추면 오토바이 부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한명씩 나누어 타고 빙하로 향했으며, 오토바이에서 내려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전망대 아래는 거대한 석탄 저장소가 있었는데 이 석탄이 빙하라고 해서 많이 실망했으며, 이것을 보려고 이런
시설을 갖춘 것도 의문인데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 더욱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자료가 적었지만 궁금증을 풀 수가 있었는데 그 내용은 7월~8월의 정오가 되면 빙하사태가
일어나고, 빙하사태로 내려온 빙하들이 이곳까지 밀려 내려온다고 한다.
이 빙하사태로 생긴 동굴과 빙하들이 장관이라고 했는데 하여튼 지금같이 검은 모래 덮인 빙하가 아니고, 흘러
내린 하얀 색의 빙하라고 하면 이렇게 실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빙하는 해발 2000m로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노르웨이의 브릭스달 빙하도 매우
낮다고 생각했는데 글쎄? 어느 것이 더 낮은지? 궁금해지네.
무즈타크에서 이야기했지만 tagh은 산을 뜻하며, 이 공원은 한문으로 극주빙천공원(克州冰川公园)이고, 영어는
‘Giacier Park of Kizilsu Kirghiz prefecture’로 ‘키르키즈 자치현의 빙하공원’이다.
☆빙하(Glacier): 눈이 계속 쌓이면 만년설이 되고 만년설이 압력에 의하여 얼음으로 변한 것이 빙하이고, 눈은
초록색을 띄지 않으며, 빙하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해면상 5m 이상인 경우를 빙산이라고 한다.
그 이하는 빙암이라고 하는데 참고로 남극, 북극, 고산의 빙하가 다 녹으면 해면은 현재보다 60m 정도 상승할
것으로 추산되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매우 높다.
<1. 오이탁으로 가는 길에 있는 아름다운 산들 2. 빙하가 석탄 같다. 3. 돌아오는 길에 본 붉은 산>
[카슈가르[Kashgar kashi, 카쓰, 객십(喀什)] 도착]
오이탁을 보고 나오는 길에 규모가 작은 붉은 산이 또 있었으며, 2시간 쯤 달려 9시에 카슈가르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호텔로 향하는 길에 호수의 야경이 아름다웠고, 우리가 2일 동안 묵을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이름은 은서림국제대주점(銀瑞林國際大酒店)으로 규모도 크고 지내기도 편했으며, 호텔에서 멀리 하얀
타워와 큰 위성안테나가 있는 건물, 그리고 큰 굴뚝이 있는 화력발전소도 보인다.
<호텔에서 보이는 카슈가르의 전경>
★카슈가르: 카스 지구의 행정 중심지이며, 실크로드 교차지역으로 우루무치로부터 남서쪽 약 1,500km 지점에
있고, 카슈가르는 Kashi의 옛날이름이며, 카스는 중국인들이 부르는 약칭이다.
카슈가르는 ‘여러 색깔(각양각색)의 집’이라는 뜻이고, 이 도시는 동호(東湖), 남호(南湖), 북호(北湖)가 있으며,
베이징을 출발한 기차가 이곳까지 운행하고, 인구는 35만 명 중에 위구르족 75%이라고 한다.
AD631경 기독교 네스토리우스파(이성설, 二性說)가 전파되었고, AD1271년 마르코 폴로가 이곳을 지날 때도
있었다고 하며, 1290년 일한국으로 시집가는 원나라 왕녀 코카친을 대동해 주고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1759년 몽골을 물리친 청나라가 지배하다가 1884년 중국의 한 지방으로 공포했으나 1910년 청나라가 몰락한
후 잠시 동안 동 투르케스탄 위구르 공화국을 건립했으나 1949년 중국공산당의 지배로 오늘에 이르렀다.
부를 가진 대만, 홍콩, 중국 한족의 투자가 늘어나고 인구가 유입되면서 위구르인은 변방으로 밀려 날 것이고,
종교심이 강한 민족이 무신론 공산당에 대응하여 1962년 대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20만 명이 소비에트의 중앙아시아로 도망가 살게 되었고, 1990년 50명, 1995년 80명, 2009년 170명이
반란으로 사망하였으며, 면적은 166만㎢로 중국 영토의 6분의 1(17.3%)에 해당한다.
석유와 천연가스 등 에너지 자원의 보고인데 타림 및 중가르 분지에 중국 석유 추정 매장량의 30%, 천연가스
34%, 석탄 40%가 매장돼 있다.
<카슈가르 동호의 시성시규획전시관(市城市規划展示館) 야경과 지도>
[10일] 14년 6월22일 일요일
●일정: 전일 카쉬가르 관광[가축시장→ 옥 판매장→ 중식→ 일요시장→ 올드타운→ 호텔]
[가축시장과 옥판매장 탐방]
11시 반쯤 가축시장에 도착했지만 동물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물을 살 것도 아니라서 시간만 때우라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차라리 이곳보다는 사람 사는 모습이 있는 인민공원이 더 좋지 않을 까?
여기에 있는 양은 엉덩이 양쪽에 큰 덩어리가 달려있는 것 좀 특이했는데 아마도 이 덩어리는 양도 낙타처럼
어려운 환경에 살아가려고 낙타의 육봉대신 이 굳기름 덩어리를 가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먹거리 장소에는 중앙아시아에서 맛있게 먹었던 큰 빵 ‘난’도 있었고, 또 강하기로 명성이 있는 휴대용 칼을 파는
곳에서는 칼을 가는 그라인더를 가죽 끈으로 돌려주는 모습이 좀 색달랐다.
이제는 밖으로 나와 미루나무 아래서 더위를 피하면서 갈 때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사람들이 모였을 때 TC가
사준 수박과 멜론은 다 맛있지만 멜론이 좀 더 맛이 있었다.
이제는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옥판매장에 도착하여 옥을 가공하는 것을 구경했고, 이곳지형을 모형으로 만든 것도
있었으며, 각자 다니면서 옥을 구경했는데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었다.
비단 파는 곳에서 선물을 골라볼까 했으나 모두들 구경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포기했고, 이제는
점심을 먹으려 식당으로 향했다.
<1. 카슈가르의 가축시장 2. 우리가 먹었던 수박과 멜론 3. 인간 모터 그라인더 4. 옥 판매장>
가는 길에 커다란 모택동의 동상도 보였으며, 어제 저녁 먹은 식당에 도착하여 2층에 자리를 잡고 식사를 할 때
아래층 중앙에서는 남자 2명이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들었다.
<1. 인민공원광장에 있는 모택동 동상 2. 전통악기의 연주>
[일요 바자르((Sunday Bazar) 탐방]
오늘이 마침 일요일이라 일요 바자르를 구경하기엔 좋은 날이었는데 4시 반에 버스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조금 뒤 떨어져 가는데 앞에서 오토바이하고 사람이 충돌하여 넘어졌다.
그 바람에 시간이 잠간 지체된 사이에 일행들이 보이지 안했으나 같이 갈 필요도 없기에 혼자 시장을 헤매면서
구경을 했는데 먼저 일요일에만 열리는 장마당의 난장을 구경했다.
두꺼비와 자라 같은 한약제도 팔았으며, 그 중에 특이한 것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열매인데 한 2m 정도의 길고
굵은 자루에 많이도 매달려 있는 검은 열매는 크기가 큰 자두만 했다.
이곳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물건들도 팔고 있었는데 어디에 쓰이는지는 모르지만 부서진 이어폰도
있었지만 심지어는 타이어도 조각을 내서 팔았으며, 안파는 것이 없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한글로 효자손이라고 쓴 대나무로 만든 등을 끌은 제품을 여기에서 구경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그들은 효자손이라는 한글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을 가 궁금해 졌다.
난장에서 비단 머플러와 손녀들 여름에 덮어줄 천과 향수 몇 개를 산 후 상시시장이 있는 건물로 향했는데
이곳은 생활용품인 옷과 가구 및 주방기구들을 팔고 있었으며, 일행도 만났다.
약속한 장소근방의 그늘에서 일행을 기다리다가 사진작가분이 오셔서 같이 기다렸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난 뒤 TC가 찾아와 다시 만났는데 우리 2사람만 다시 정한 장소를 몰랐는가 보다.
<1. 일요 바자르의 난장 2. 약장수와 과일 3. 향수를 파는 잡화점 4. 효자손 5. 자라 6. 개구리
7. 맹꽁이 8. 가재 9. 상설시장>
[동호공원(東湖公園, Donghu Park)]
일요 시장 앞에는 공원이 있고, 그 공원에는 동쪽의 호수라는 뜻의 동호가 있으며, 어제저녁 야경이 아름다웠던
호수가 이 호수인데 호수 중앙에는 시성시규획전시관(市城市規划展示館)이 있다.
이 전시관의 조명이 야경을 아름답게 했으며, 동호에는 시가지 중앙을 흐르는 토문 강(Tuman River)이 있으며,
이 토문 강 위에 놓인 위민교(为民橋)라는 다리를 건너면 구시가지 고대민거로 향하게 된다.
그런데 항상 힘든 것은 중국은 지도를 보아도 표기법과 한문 때문에 지명을 알 수 없는 것인데 한문지명은 우리
발음과 또 달라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지명을 알기는 더더욱 어렵다.
제니라는 분이 중국에서는 한문의 맥(麥)자를 모르면 맥주하나 사먹기도 힘들다고 했는데 가장 가까운 이웃이
먼 아프리카보다 더 소통하기 힘든 것이 중국이라는 생각이 여행할 때마다 들었다.
<1. 위민교 2. 동호의 시성시규획전시관 3. 동호주위 지도>
[올드 타운(구시가지, Old Town) 고대민거(高台民居)의 도예점(陶藝店) 탐방]
이곳은 언제 철거 될 모르는 상황이라 집들은 수리를 하지 않아 매우 낡아 있었으며, 좁은 계단을 올라 골목을
들어섰을 때 결혼식에 참여한 요란한 밴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어린 아이들이 보였다.
어느 집에 들어가 그들의 사는 모습을 둘러보았는데 난방이 없는 방들은 도배를 했으며, 험한 침대 위에 너부러진
빨래 등은 그들이 얼마나 열악한 삶을 사는지 짐작이 되었다.
이 집에 인상적인 것은 선반위에 있는 포탄인데 장난감인지 아니면 실물인줄은 몰라도 집에 정신 사납게
포탄으로 장식한 것은 너무했으며, 그리고 벽에 걸린 나무사진과 그 아래에 있는 한문이다.
이 나무는 물이 없고, 염분이 있는 사막에도 사는 호양(胡楊) 나무로 아래의 한문은 이 나무에 대한 것을 기록한
것인데 언제가 이 나무를 볼 것을 기대하며, 옮겨본다.
生而不死一千年(생이불사 일천년, 살아서 일천년), 死而不倒一千年(사이불도일천년, 죽어서 천년),
倒而不朽一千年(도이불후일천년, 누워서 천년)을 이어간다는 뜻이다.
이 마을은 옛날에는 자기를 굽는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옛 명성을 가지고 자기를 팔고 있었으며, 몇 집에 들어가
자기를 구경을 했는데 모자를 파는 곳에서 막내에게 씌워준 모자는 참 잘 어울렸다.
이곳에서 본 것 중에 특이한 것은 자기를 굽는 곳인데 우리는 규모도 크고 가마형태이나 이곳은 마당을 둥글게
아래로 파고 들어가 층을 만들어 자기를 놓을 공간을 마련했는데 크기가 작았다.
큰 것은 만들지도 못하는 구조였는데 아마도 큰 것은 다른 곳에서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이곳이
지대가 좀 높아 공원과 주위를 둘러보기엔 좀 편리했다.
공원에서 TC가 사주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오후 6시가 안 되서 호텔로 돌아와 저녁식사 시간을 기다렸는데 오늘
여행경비를 생각하면 때우기에는 너무 아까운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 일요 바자르 쪽 2. 결혼식에 춤추는 소녀들 3. 호양나무 4. 도자기 굽는 아궁이
5. 위구르인들이 사는 모습 6. 도예점>
<재미있었던 저녁식사>
황가대주점((皇家大酒店)이라는 호텔 뒤에 있는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식당 앞 흰 대리석에 적힌 글을
보면 역사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던 것 같았지만 가이드의 설명이 없으니 알 수는 없었다.
음식은 그런대로 먹을 만 했으며, 그 중에 맛있는 음식을 더 시켰으나 몇 명은 자리를 떠난 뒤 늦게 나온 음식은
먹을 사람이 없었는데 주인에게 미안하니까 어떻게든 처리하기로 했다.
그 방식은 음식을 테이블 위에 놓고 돌려서 멈춘 자리에 있는 사람이 먹기로 했는데 빈자리는 돌린 사람이 먹기로
하는 룸메이트 규정 때문에 자그마치 4번이나 걸려서 그것을 다 먹는 즐거운 고통을 겪어야 했다.
여행 중에 오늘 같이 유쾌하게 많이 웃어 본적은 일찍이 없었는데 기억에 남을 만큼 재미있는 저녁식사였다.
<1. 황가대주점 2. 역사적인 사건을 적은 대리석>
<위험한 여행>
룸메이트가 어제 이곳에 테러 있었다고 하였는데 한국에 돌아와 뉴스를 찾아보니 2014년 월 21일 “아침 일단의
폭력배들이 신장자치구 예청현 카슈가르지구 공안국 청사로 자동차로 돌진해 폭발물을 터뜨렸습니다.
즉각 반격에 나선 현지 공안은 괴한 13명을 사살했고 이 과정에서 경찰관 3명이 부상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테러가 발생한 예청현에서는 지난 4월에도 지역 공무원 3명이 흉기에 찔려 숨진 채 발견돼 테러 경계태세가
강화된 상태였습니다."
이런 기사가 났지만 우리는 전혀 몰랐으니 걱정도 안했는데 아이들은 걱정을 많이 했나 본데 사실 여행하다 죽는
것이 병원 침대위에서 죽는 것보다는 몇 배 났지 않은가?
[11일] 14년 6월23일 월요일
●일정: 카쉬가르[호자가족의 묘→ 바자르→ 이드 카흐 모스크]→ MU5634→ 우루무치 도착→ 호텔(자금대하)
10시에 호텔을 떠나면서 어제 뉴스 때문에 시내의 동정을 살폈는데 그런 사건이 있었던 것조차 의심스러울 만큼
조용했으며, 다만 군용 차량들이 많이 다니는 것이 좀 다를 뿐이었다.
[아팍 호자 가족의 묘(The Abakh Khoja Mausoleum) 탐방]
11시쯤 호자가족묘에 도착했는데 이번 중국가이드 Mr. Kuraisi는 만난 지 4일 만인 오늘 처음 가이드를 시작했고,
막내가 통역을 하였으며, TC가 거들었으나 영어 좀할 줄 아는 못난 것이 중구난방으로 떠들었다.
이슬람식 정문을 들어가면 ‘阿巴克霍加麻札(香妃墓) Abakh Hojam Tomb(Iparhan Tomb)라는 이정표가 보이는데
이것은 ‘아팍 호자 묘(향비묘)’라는 뜻이지만 한문은 ‘아파극곽가마찰(향비묘)’이라고 읽는다.
가이드가 한 이야기는 아파 후자(가이드 발음)가 아들에게 쫓겨 티베트로 갔으며, 달라이라마의 힘을 빌리려면
불교로 개종하라고 하여 그는 불교로 귀의하여 다시 왕위를 찾았다.
그래서 이곳은 이슬람식과 불교형식이 다 같이 존재하는 이유라고 했으며, 아팍 후자는 달라이라마가 지어준
이름이며, 후자는 성(性)이면서 왕이라는 뜻이며, 위구르 이름은 ‘이다이드훌라‘이라고 한다.
이 가족무덤은 중앙아시아에서 아주 큰 묘지로 위구르 스타일이지만 아랍스타일이 조금 혼합되었다고 하며, 건물
귀퉁이에는 4개의 미나렛이 있으며, 중앙에는 있는 1개의 돔은 신장지구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한 개의 벽돌도 사용하지 않았고, 오직 도자기타일로만 만들었다고 하며, 너비 36m이고, 두께가 4m이며,
높이 29m인데 안에는 가족이 만나는 구멍이 있다고 했지만 무엇을 뜻하지는 모르겠다.
가족에는 최소한 2명 이상이 묻혀 있고, 일반가족묘도 있으며, 개인과 합장의 2가지 형태로 되어있고, 17~18세기
동안 이곳을 지배한 5대의 가족 중 총 72구가 묻혀 있다고 한다.
아팍 호자는 불교로 귀의 했기에 왕이 된 다음 모든 무슬림은 그를 싫어하여 각자 분할됐으며, 지금 위구르인들도
그를 좋아하지 않기에 이곳을 아팍 호자 묘라고 하지 않고, 무슬림은 향비 묘라고 부른다.
마지막 호자는 건륭황제와 정략결혼으로 겹사돈 간이었다고 하는데 이게 무슨 소리인지... 중국가이드 구라씨는
초보인지 통역할 시간을 주지 않고 혼자 중얼거렸다.
막내는 통역은 잊어버리고 궁금한 것만 물었는데 통역된 것을 연결해 보면 향비의 딸이 건륭황제와 결혼해서
겹사돈 됐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데 다들 가만히 있는 것을 보면 혼자만 답답했나보다.
영어 좀 아는 방정맞은 여편네들은 자기실력을 나타내기 위해 각자 통역하거나 아니면 알아들었다는 듯이 크게
아~~ 하여 통역할 시간을 놓치게 하거나 통역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느끼게 해서 통역을 중단시켰다.
이런 여편네들을 만나면 생각나는 옛 유머가 있는데 한문을 모르는 사내가 내 천(川)자 하나를 알게 되었는데
포고령이 붙였을 때 알고 있는 川자를 자랑하고 싶어 찾았지만 川자는 없고 석 삼(三)자만 보였다.
사내가 三자를 가리키며, 친구들을 한 말은 ‘내 川자가 여기 누워 있네.’라고 했다고 한다.
이번 여행은 통역 때문에 이렇게 고생할 줄은 몰랐는데 영어 못해서 지금까지 패키지 여행하는데 한국에 가면
혜초여행사에게 단단히 항의 하려고 했으나 그 놈의 여행가방 때문에 못했다.
<1. 아팍 호자 묘의 정문 2. 아파극곽가마찰 이정표 3. 아팍 호자 묘의 전면>
▶호자 가족의 묘: 1640~1693년 건설되었으며, 앨캔 칸국을 정복한 이슬람교의 신비주의적 분파인 카스 수피즘
(백산당)의 통치자 1대 유숩(Yusuf) 호자보다 2대 아바(아팍) 호자가 더 유명하다.
아팍 호자는 아마드 칸사니(1461~1542)의 증손자로 티벳의 달라이라마와 연합하여 위구르 전 지역을 다스리는
강력한 군주이었으며, 향비(香妃)는 그의 5대 손으로 아리화탁의 딸이라고 한다.
'향비'는 빼어난 미모이라 청 6대 건륭제의 3비였으며, 황제는 그녀를 총애하여 온갖 정성을 쏟았고,
그녀의 종교였던 모스크까지 지었지만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전해진 이야기와는 달리 황제의 사랑을 받으면 위구르 풍습대로 58세까지 잘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건륭제(1735~1796)는 1780년 70회 생일 때 연암 박지원이 사절단 간 열하일기로 인해 우리는 더 친숙하며,
호자 가족묘는 카스 시의 동북쪽 5km 지점에 있다.
<1. 아팍 호자 가족들의 묘 2. 가족들과 향비의 묘>
<향비(香妃) 이야기>
서로의 입장이 달라 중국 사람들은 아팍 호자의 묘라고 부르지만 위구르 사람들은 향비의 묘라고 부르는데
향비는 북경에서 30년 이상 살았으며, 죽기 전 고향에 묻힐 것을 황제에게 요청했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 가마를 매고 1년 6개월 걸려 이곳에 도착해서 묻혔다고 하며, 그를 매고 온 관은 2개가 있는데
하나는 운구를 하나는 그녀의 소지품을 넣었는데 가마는 4인이 매기에는 너무 컸다.
인터넷에서 향비는 처음엔 동릉에 묻혔다가 124명의 카스 사람들이 3년 6개월을 걸려 매고와 이곳에 장지를
마련했다고 되어있는데 가마의 크기나 북경과 거리를 봐서는 이 자료가 맞을 것 같다.
이곳에 안장 된 묘지는 일반적으로 큰 것은 남자 묘이고, 얕은 것은 여성 묘이며, 작은 것은 아이 묘이라고 하고,
향비의 묘는 뒤편 우측에 황금색 천으로 덮인 것이라고 한다.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문 밖에서 몇 장 찍을 수가 있었고, 묘지건물 앞에는 커다란 공동묘지는 비싼
돈을 주고 장지를 산다고 했으며, 시멘트로 된 것은 시체가 묻힌 것이라고 한다.
짚을 넣어 만든 진흙으로 된 것은 나중에 쓸 가묘라고 하는데 하나 같이 묘는 메카로 향해있는 것이 특이했는데
무슬림은 성인들 옆에 무덤을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인데 죽는 사람들이 유언을 할 정도이다.
지금부터는 각자 흩어져 사진 찍는 시간을 가졌는데 전통복장을 빌려 입고 낙타타고 사진 찍는 장소엔 액자 속에
우리가 예상했던 황비의 모습이 아닌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향비 모습이라 이상했다.
무덤 밖의 기념품매장의 모습도 똑 같아 사연이 있는 것 같아 인터넷을 찾아보았는데 향비융장상(香妃戎裝像)은
‘향비가 입은 갑옷’으로 이탈리아 사람으로서 청나라에 벼슬을 지낸 ‘카스틸리오네’가 그렸다고 한다.
향비는 신강성 남부의 왕비로 미모가 뛰어났으며, 그녀의 몸에서는 특이한 향기가 있어 사람들이 향비라 불렀고,
청나라 건륭제가 이 소문을 듣고 회부에 출정하는 장군 조혜에게 향비를 데려오도록 명하였다.
향비를 본 건륭제는 매료되어 그녀를 3비로 삼았으나 그녀는 이미 정혼한 몸이어서 끝내 마음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향비는 독살설과 자결설이 있는데 독살은 황태후가 환관들을 시켜 목 졸라 죽였다는 것이다.
자결은 비가 된 2년 뒤 건륭제의 어머니인 효성헌(孝聖憲) 황후가 건륭제가 없는 틈을 타서 그녀에게 자결토록
했다고 하는데 위구르의 자존심을 지켜준 향비는 위구르 사람들에게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향비의 ‘비(妃)’ 자는 건륭제의 비가 아니고, 신강성 남부 왕의 비(妃)이라고 한다.
이곳에 차림도 예사롭지 않은 아주 늘씬한 사람이 청소를 하고 있어 청소하기엔 아깝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분이
향비의 전속모델이라는 것을 한국에 돌아와서 알았다.
<1. 가마 2. 내부에 있는 향비융장상 3. 밖의 가게에 있는 향비융장상 4.공동묘지 5. 향비의 전속모델>
[정경당(汫涇堂, Sermon Hall) 탐방]
이제는 정경단이라는 팻말이 있는 곳으로 향했고, 이곳에서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는데 서몬 홀(Sermon Hall)은
오직 호자 가족만이 사용하던 곳으로 가족묘 건물보다 50년 더 된 건물이라고 한다.
유솝 호자와 그의 아들 아팍 호자가 종교적인 것을 가르쳐 주려고 했던 장소라고 하며, 안 홀은 겨울에 사용하고,
밖의 홀은 여름에 사용했다고 하고, 중앙 홀에 30㎝ 크기로 장식된 녹색하고 하얀 얼룩무늬 돌이 있다고 한다.
막내는 팻말을 보면 해석을 해 주었는데 이 성스러운 돌은 치료나 나쁜 기운을 쫓아내는 힘이 있고, 돌을 만지면
안전과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했으며, 안에는 들어가지 않아 보지는 못했다.
가이드는 Holy Stone에 대해 말했으나 통역은 없었으며, 엉뚱한 이야기만 하다가 이곳에 많은 나무 이름에 대한
질문으로 영 듣지 못하게 되었으며, 나무 이름은 포플러스로 신장위구르에 많다고 했다.
<1. 정경당 건물>
[금요 모스크(Friday Mosque) 탐방]
Holy Stone의 이야기는 끝내 듣지 못하고 바로 연하여 있는 모스크에 대한 설명을 했는데 4각형의 마당이 있는
이 모스크는 1873년에 만들어졌으며, 100m의 복도엔 독특한 모양의 62개의 기둥이 있다.
이 기둥하나하나는 각기 다른 장인 목수가 훌륭하게 조각하여 위구르 목공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으며, 매주금요일
예배를 보는 것 외에도 로자나 프르반 같은 명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한다고 한다.
62개의 기둥은 코란에 있는 62번째의 성인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며, 영화 ‘연을 쫓는 아이(The Kite Runner)’
또는 ‘연을 날리는 아이’에서 모스크 모퉁이가 2~3분간 나오기에 한국에 가면 보라고 했다.
중앙은 이맘의 자리라고 하며, 그를 돕는 자가 2명 있었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더 이야기했으나 통역을 안 했는데
이곳에서 정식으로 메카로 여행을 떠나는 것은 500명 정도이지만 단체나 몰래 행해지기도 한다고 한다.
그리고 가이드가 위구르는 회족이 아니라고 해서 한국에 돌아와 다시 조사해서 아래에 기록했는데 회족은 서안
여행 때, 위구르는 이번여행에서 조사했지만 둘을 같이 비교하지 못해 보았다.
모스크 안에는 들어갈 수 없어 밖에서 인증샷만 했으며, 오래된 또 다른 건물도 있었으나 설명이 없어 사진만 찍고
밖으로 나와 안에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향비융장상’을 보고 구 바자르로 향했다.
<1. 금요 청진사 2. 설명이 없었던 건물>
<포플러스(Populus) 이야기>
훈자지역부터 이곳까지 많이 보이는 포플러스라는 백양나무는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으므로 참고삼아 적어본다.
포플러(poplar), 미루나무(cottonwood), 이태리 포플러 등 다 북아메리카에서 귀화식물로 같은 버드나무과
사시나무속으로 서로 비슷하며, 같은 과에 백양나무, 은사시 나무 등이 있다.
버드나무는 가지가 너무 많이 뻗었다고 해서 버드나무라고 했다고 하며, 늘어진 나무 가지가 너무 가늘어
실버들이라는 이름도 있는데 버드나무 학명 ‘Salix babylonica’으로 어원은 시편에서 왔다.
시편137: 1절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절 “그 중의 버드
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에서 강변은 걸트어의 Sal(강) ix(가)의 합성어이다.
바벨론의 babylonica가 합쳐서 학명‘Salix babylonica’가 되었으며, 수양버들은 수나라의 양제가 대운하를 파고
무너지지 말라고 싶은 나무이기도 하고, 운하로 인한 원성과 함께 그 나무를 수양버들이라고 했다고 한다.
수양버들의 이야기가 더 있으나 여기서는 그만 다루기로 하고, 포플러스는 한국에 10여 종이 있다고 하고,
어린 눈 포풀루스 칸디칸스(P. candicans)는 연고를 만드는 데 쓰인다고 하며, 또 수양버들나무 껍질에서
추출한 것이 진통제인 아스피린이라고 한다.
포플러는 잎이 단풍나무 잎 같고 미루나무 잎 보다 작고, 일반 나무처럼 옆으로 자라며, 포플러스라고도 하는
미루나무 잎은 3각형으로 포플러보다 크고, 위로 곧게 자란다.
미루는 미국 버드나무라는 뜻인 미류(美柳)에서 왔으나 표준말은 미루나무이며, 이태리 포플러는 품종이
처음 이탈리아에서 들어왔기에 붙은 이름이다.
백양(白楊)나무는 하얀 껍질(백화피, 百樺皮)을 가진 버드나무과로 학명은 ‘Populus davidiana’으로 아마도 다윗
왕같이 희고 잘 생겨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모르나 널리 알려진 이름은 사시나무(David Poplar)이다.
사시나무는 잎자루가 길어서 바람이 조금불어도 그 잎들이 마구 흔들려 ‘사시나무 떨듯 한다.’라는 말이 생겼다고
하며, 버드나무에 대한 전래이야기도 많이 전해진다.
그 중에 고령군 개진면의 아랑낭자와 배도령 이야기, 천안삼거리, 물을 급하게 먹지 않도록 버들잎을 물에
띄워 주는 지혜로 인해 왕비가 된 사람이 두 명이나 있다.
첫째는 태조왕건과 제2비 장화왕후 오씨로 그 장소는 전남 나주 왕사천이며, 둘째는 이성계의 제2비 선덕왕후
강씨인데 그 장소는 개경으로 우리는 그 만큼 버드나무와 인연이 깊다.
<1. 나무마다 이름들을 새겨 놓았다. 2. 정경당으로 가는 길에 있는 백양나무(중앙)>
<회족(回族)과 위구르(Uighu) 족>
위키 백과를 인용해 보면 회족은 당나라 때부터 아랍, 페르시아, 터키의 후손들이 남해무역항로와 실크로드와
등을 통해 중국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으며, 지금은 한족 화되었으나 소수민족으로 분류한다.
이들은 이슬람권의 의학, 천문학, 과학 지식과 실무 능력이 우수하였기에 원나라에 충성하고, 한족들을 수탈한
이들을 명나라는 다 죽이자니 아까워 무슬림 상류층들을 사회에 포용하였다.
그 대신 한족들과 무조건 결혼을 시켜 회족들은 한족과 신체상의 외양 차이가 나지 않으며, 중국어를 쓰는 그들은
관습에 따라 흰색이나 검은색 두건(희잡)을 쓰고 다니고, 사원을 지어 종교의식을 이어갔다.
하루 다섯 번의 예배는 드물지만 금요일은 모스크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자 묘를 숭배하는 경우도 있으며,
관혼상제와 남성의 할례는 이슬람문화를 따르고, 일부는 아랍어, 페르시아어가 다시 도입되었다.
이슬람을 신앙하지 않는 회족도 있지만 회족은 이슬람교를 믿는 9개 민족 중에서 860만으로 인구가 가장 많은
종족이고, 중국 전 지역에 분포해 살고 있으며, 북경에만 67개의 이슬람사원이 있고 한다.
역사 인물 중에 안녹산이나 양귀비도 회족사람으로 전해지고 있다.
위구르는 튀르크계 어를 사용하는 아시아 내륙지방의 민족으로 회흘(回吃) 또는 회골(回鶻이라 부르는데 현재의
신장위구르자치구 지역에 당나라에서 원나라 때까지 많은 유럽인들과 중동인들이 건너와 정착하였다.
그중에는 기독교(십자회회, 十字回回), 유대교(남모회회, 藍帽回回) 등 다양한 종교를 가진 많았으며, 이들 모두를
회회인(回回人)이라 불렀으나 명나라 때 한족화 정책으로 기독교, 유대교는 한화되었다.
한화되지 않은 이슬람 회회인을 나중에는 회회라는 어휘가 이슬람교도를 말하는 단어가 되어 우리도 어릴 적엔
회회교(回回敎)라고도 했고, 또는 회족의 종교이라고 회교(回敎)라고 했는데 이들은 수니파(派)이다.
위구르인은 중국역사에 청나라 때 등장하며, 이들은 이슬람풍속과 할례를 따르고, 그들은 600만 명 이상의 인구
중에 대부분은 중국 북서부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에 거주하고 있다.
20만 명 정도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에 살고,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에 살고
있으며, 가축도 일부 키우고, 밀, 옥수수, 수수 등 농작물도 재배한다.
그들의 고유한 사회조직은 마을 단위로 이루어지고, 결혼도 한 마을 안에서 이루어지며, 각 마을마다 마을의 제반
업무를 처리하는 조직이 있는데 주요도시로 카슈가르와 우루무치가 있다.
신장지역에 석유가 발견되어 산업건설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19세기부터 있어 온 중국정부에 대한 반항은 현재도
진행 중이며, 우리가 있을 때에도 떠난 뒤에도 테러가 있었다.
<1. 청진사에서 기도하는 위구르인들>
[구시가지의 바자르 관광]
한 20분쯤 이동해서 내린 곳은 차가 뜸한 대로 양가에 상가가 널어선 바자르었으며, 처음 보이는 것은 도자기를
파는 곳으로 큰 옹기부터 작은 화분까지 모든 종류의 도자기가 있었는데 색깔이 예뻤다.
이곳에는 잡화, 생산부터 수리까지의 모든 철공일, 목공, 한약재료, 식품시장, 식육시장, 신발가게, 모자가게,
그리고 길거리의 먹거리도 있으며, 생활용품이라면 모든 것이 다 있는데 가면서 본 것들을 적어 보았다.
철 공예품 가게에서 손녀의 선물을 흥정하다가 일행들이 안보여 포기하고 왔는데 누가 뒤에서 당겨 쳐다보니
가게 아이가 그것을 들고 여기까지 뛰어왔는데 그 온 성의가 기특해서 사주었다.
중국국기가 걸려있는 집에는 평안가정(平安家庭)이라는 글자가 있는 곳은 게스트하우스라고 했던가?
예쁜 어린 여자아이들 만났는데 그들은 교복까지도 예뻤고, 사진을 찍은 후에 준비해 두어든 비타민을 주었으며,
빵 집에 나열해 있는 아직 찌지 않은 빵들까지도 너무 예쁘다.
신발가게에서는 좀 늦었지만 그동안 너무 더워 고생한 발을 위해 샌들을 하나 샀는데 너무 괜찮아 하나 더 못
사온 것이 후회될 정도이었으며, 철공소 거리엔 그들이 일하는 조각상이 있었다.
c-26 <1. 예쁜 도자가 상점 2. 평안가정 집 3. 구시가 거리 4. 예쁜 아이들 5. 예쁜 빵 6. 철 공사들의 조각>
길거리 음식을 파는 곳이 좀 특이해서 구경했는데 끌 수 있는 자판대위에 4개의 큰 그릇에는 옥수수를 베낀 껍질
같이 얇은 껍질로 찰진 밥을 말아서 묶은 것이 삼각 김밥모양으로 생긴 것이 있었다.
그리고 뚜껑 덮인 통에는 찬 사과 수정과 같은 것이 있으며, 다른 그릇엔 살구가 있었는데 도수 높은 안경을 코에
걸친 키 작은 아저씨가 사발에 밥을 꾹 눌러서 한쪽에 붙이고, 시럽 통에 든 양념을 쳐 주고, 살구를 얻어준다.
또 다른 사람에게는 사과 수정과에 밥에 말아주기도 하는데 주로 남자들이 즐겨먹는 음식으로 보기는 별로인데
먹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맛있는 것 같았다.
목동권사님이 돈을 몽당 소매치기 당했다고 조용히 알려주기에 필요하면 빌려주겠다고 했더니 내일이면 서울로
가기에 괜찮다고 하면서 크게 걱정하지 않아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옛날 사람들이 모여 차를 나누는 그림이 걸려있는 곳은 지금의 다방이라고 했으며, 황색과 흰색의 울퉁불퉁한
막대기는 설탕으로만 된 캔디라고 했고, 옆에는 향료와 말린 뱀 등을 파는 한약 재료상가였다.
골목 끝 첨탑 꼭대기에 초생 달이 걸려 있는 건물이 보이는 이 건물은 모스크로 1450년경에 만들어졌으며,
반대편에 왕이 살던 왕성이 있고, 그곳으로 점심 먹으로 간다고 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1. 재미있는 길거리음식점 2. 나무공예품 상점 3. 다방 있는 건물 4. 모스크가 있는 거리>
통째로 걸린 벌거벗은 양고기는 궁금했던 양쪽 엉덩이에 달린 흰 지방덩어리도 보았고, 모자가게에서 써본
TC의 털모자는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으며, 가격은 15만원이라고 했으나 8만원이면 살 수 있다고 한다.
모자를 들고 있는 여인상 옆에는 모자에 대한 야야기를 적어 놓은 것을 막내가 번역해 주었는데 모든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옷을 입을 수 있지만 모자는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모자 뚜껑은 피라미드 같이 생겼으며, 옆은 뚜렷한 테두리의 배경색은 적갈색, 진파랑, 진녹색이고, 그리고 무늬는
밝은 색이며, 성별, 나이, 취미에 따라 모자를 고를 수 있기에 모자만 보아도 성별과 나이를 알 수가 있다.
아기와 청소년의 모자는 굉장히 화려하고, 어른들은 단순하며, 어르신들은 차분한데 지식인이 좋아하는 모자는
배경색은 녹색에 빨간 꽃들이 있는 것을 선호하고, 부유층 여자들은 진주를 장식한 것을 좋아한다.
끝에 쓰인 말은 ‘너의 친구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라는 광고용 멘트로 모자를 사라는 것이었으며, 길거리에
파는 하얀 음료수는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폭포처럼 솟구치게 하여 손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딱 1시간의 걸쳐 바자르를 구경했으며, 점심을 먹으로 식당을 향하다 이드 카흐 모스크가 보았다.
<1. 살아있는 양 엉덩이 2. 죽은 양 엉덩이 3. 모자 쓴 TC 4. 광고 5. 모자가계 6. 음료수 가계>
가이드의 설명은 옛날에는 진흙으로 만든 벽돌을 사용해서 집을 지었지만 비도 많이 오고 지진도 많아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으나 정부의 지원이 없어 방치된 체로 있었다고 한다.
2,000년부터 지금은 생활수준에 따라 복구비용을 준다고 하며, 아주 가난한 사람은 60% 정도 지원하고, 나머지는
차등으로 지원해서 2013년까지 완전복구를 할 예정이라고 하지만 지금도 복구 중인 것도 있다.
내부재료는 현대식이나 길에서 보이는 곳은 옛날 것처럼 보이도록 진흙으로 다시 씌우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옛 거리를 억지로 재현하려고 하는 모습이 ‘눈감고 아웅’하는 것 같았다.
현재 이곳의 대부분 건물들이 최근에 건축한 것이라 산뜻했으며, 바자르에 거주하는 인구는 10만 명 넘는 다고
했는데 아까는 궁성이 있는 곳에서 점심을 먹는다고 했으나 여자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20분정도 갔다.
우리가 내린 곳은 우리가 처음 들렸던 그 식당이었으며, 여기서 점심을 먹고 다시 이드 카흐 모스크로 향하여
다시 바자르에 도착했는데 이곳은 가구와 철물상가가 있는 곳이다.
구리와 놋으로 만든 주방기구는 하나의 예술작품 같았으며, 이곳에 있는 익살스러운 거대한 주전자 조형물 앞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그 아래에 ‘손을 닦는 것은 예이다.’라는 글이 쓰여 있다.
<1~4. 왼편은 덧씌운 장면, 오른편은 씌우기 전 장면 5. 익살스러운 주전자 6. 예술 같은 주방기구
7. 이드 카흐 모스크 광장>
▶카쉬가르 바자르: 우리나라의 바자회가 페르시아어 바자르(bazar)가 어원으로 본래는 향료, 직물, 소금, 황금
등을 파는 가게가 모여 있는 곳이었으나 현재는 시장의 의미로 사용된다.
[이드 카흐 모스크(Id Kah Meschit) 관람]
이제는 카스의 마지막 관광지인 이드 카흐 사원 앞 광장에 도착했는데 광장의 크기가 대단했으며, 백양나무가
무성한 사원내부로 들어가 카스전도(全圖) 앞에 섰지만 알기 힘든 것이 중국지도이다.
그런데 룸메이트가 지도를 잘 보는 것은 아마도 한문 실력이 아닌가 생각했으며, 벽은 없고 지붕아래 양탄자만
깔린 건물이 있었는데 이곳도 메카를 향해 절을 하고 기도드리는 사람이 수십 명되어 보인다.
이제는 좀 편히 앉아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는데 이드 카흐는 위구르어로 ‘광장의 축제’라는 뜻이라고 하며,
카슈가르의 상징적 심벌이라고 하고, 중국최대의 이슬람 사원이라고 한다.
1442년 건설하여 56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졌으며, 1872년 확장으로 지금의 모습이 되었고, 크게 5개 구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메인게이트 즉 정문이고, 두 번째는 씻을 수 장소 즉 세정소(洗淨所)이다.
이곳은 왼쪽 구석에 있다고 하며, 세 번째는 강의하는 장소 즉 예배당으로 좌우에 있고, 옛날에는 가르쳤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하였으며, 네 번째와 5번째는 물이 있는 연못 2개라고 한다.
연못물은 세정소에서 쓰기위한 것으로 옛날에는 관로가 없었다고 하며, 이곳은 하루에 5번 기도를 하고, 내부는
4천명, 외부는 2만 5천명, 명절 때는 7~8만 명이 예배할 수 있다고 한다.
<1. 모스크 광장 풍경 2. 세정소에 물을 공급하던 연못으로 백양나무가 무성하다.>
하루 다섯 번의 예배시간을 이야기해주었는데 이해가 어려워 인터넷에서 찾은 것으로 대신하며, 예배시간은
해 뜨는 시간을 기준으로 하기에 모든 나라는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1. 파즈르(새벽예배) : 해뜨기 전 미명 2. 주흐르(정오예배): 그림자가 가장 짧은 정오부터 해지기전 중간 시간까지
3. 아스르(오후예배): 정오예배 시간이 끝난 후부터 해질녘까지 4. 마그립(저녁예배): 해가 진후부터 약 1시간 30분
사이 5. 이샤(밤 예배): 저녁예배 시간이후부터 새벽 예배 전까지
5대 의무사항은 1. 알라 외에는 다른 신은 없다. 2. 하루에 5번 기도 한다. 3. 이웃에게 베풀어라.
4. 9월 라마단 때 단식하라. 5. 일생에 한 번은 메카를 순례하라. 이를 5행이라고도 한다.
이슬람의 장례문화는 누가 죽으면 이맘과 그 보조자들이 가족에게로 가서 모든 사람이 씻고 망자를 하얀 천으로
감고 로프로 묶은 다음 관에 넣고, 지하에 묻을 때 얼굴방향이 메카로 향하게 한다고 한다.
설명을 마친 후 신발을 벗고 모스크 안으로 들어갔는데 푸른 기둥은 좌우측이 56개 정도인데 진(眞)자로 청(淸)
색깔이 많아서 청진사(淸眞寺)라고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모스크 외부>
더 안쪽에도 기도실이 있었고, 이곳에는 메카방향을 알리는 미라브가 그 옆에는 이맘의 자리 민바르가 있었으며,
특이하게도 예배시간을 알리는 시계는 7개의 시계가 있었는데 예배시계5+현재시계1+1개는 무슨 시간일까?
나머지 하나는 금요일의 합동 대예배시간이라고 한다.
내부는 몇 가지 장식이 더 있었지만 의미는 알 수 없었으며, 밖으로 나왔는데 가이드는 이곳에는 들어올 수 있는
여자들은 돈을 받을 수 있는 관광객뿐이고, 현지여자들은 들어 올 수 없다고 한다.
받는 돈은 건물을 꾸미는데 사용한다고 하며, 떠들 이가 미라브를 물어보았으나 제대로 대답을 못해 주어 대신해
주었으나 영 믿지 않는 표정이었는데 mihrab 아마도 미흐랍이라고 했으면 알아들었을까?
mihrab는 주로 미라브라고 발음하지만 h를 발음하면 미흐랍이 되고 h을 발음하지 않으면 미라브가 된다.
모스크 광장에 나와 사진을 찍는 것으로 모든 일정을 마치고, 걸어가는데 오토바이들이 전부 배터리로 움직여서
조용한 것과 매연이 없는 것도 좋았는데 우리나라도 배터리오토바이만 허가 해주었으면 좋겠다.
<모스크 내부 1. 미라브 2. 예배시간을 알리는 시계 3. 민바르 >
▶이드카흐 모스크: 이곳 청진사(淸眞寺)는 위구르족의 정신적 고향이자 카스의 중심사원으로 일반 모스크와는
다르게 화려한 무늬의 타일이 없는 노란외부색이 특이하다.
18m 높이의 미나렛이 위용을 자랑하나 내부는 흰색과 청색만 있어 너무 평범하였고, 에이티 가르(이드 카흐)
모스크 동쪽엔 옛 모습을 잘 유지한 올드 시티는 입장료를 받는다.
서쪽 올드 시티는 위구르인들이 살며, 모스크 앞 해방북로(解放北路) 건너엔 야시장이 열리며, 현대적 모습으로
변해있는 인민광장과 중국은행은 인민로 남쪽에 있다.
우리가 돌아 온 뒤 2014년 7월 30일 오전 7시 이드 카흐 모스크의 수장 이맘인 쥐머 타히르(居瑪塔伊爾大毛拉
74세)가 종교적 극단주의에 물든 3명의 폭력배에 의해 살해됐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당시 그는 모스크에서 아침예배를 보고 나오다 폭도 3명의 습격을 받아 잔인하게 살해됐다고 전산망은 전했으며,
이에 따라 경찰이 대대적인 수사에 나서 용의자 2명을 사살하고 1명은 생포했다.
<이드 카흐 모스크 전경>
▶청진사와 모스크: 중국에서는 모스크를 ‘청진사(淸眞寺)’라고 부르기에 이슬람교를 청진교(淸眞敎)라고도
하며, 청진사는 불교의 절 건축 양식과 이슬람식 건축양식이 융화된 양식이다.
모스크(mosque)는 영어이며, 지역에 따라 마스지드(masjid), 스페인은 메스키다(Mezquita), 중앙아시아는
마드라사(Madrasah) 등으로 부른다.
마스지드는 '엎드리는 곳'을 뜻하며, 바닥에 깔개나 양탄자를 깔고 맨발의 남자들이 줄을 맞추어 예배하는 신앙의
중심지로 군사, 정치, 사회, 교육 등 공공행사나 도서관 또는 법원으로 사용된다.
때론 이슬람법과 교리에 대한 비정규적 강좌가 개설되기도 하며, 집단예배를 보는 대사원(자미, jami)은 한 도시에
하나뿐이고, 자미는 주마(Juma), 자마(Jama) 등으로 불리고, 영어는 Friday Mosque라고 한다.
집단예배는 금요일에 있기에 자미는 금요일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중국의 위구르나 회족은 하루에 다섯 번 드리는
예배는 거의 하지 않으나 금요예배는 꼭 지킨다.
<청진사(모스크) 이드 카흐>
[카쉬가르에서 우루무치로]
오후 5시에 모스크관광을 마치고 비행장으로 향했으며, 지금까지 같이한 파키스탄 여행사장 겸 가이드 미스터
아브두후는 자기나라로 돌아가고 우리는 비행기에 올랐는데 멀리보이는 주위 경치가 대단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산들이 마치 조각해서 도열해 놓은 것처럼 보였으며, 이런 곳에도 저런 풍경이 있는 것이
신기으며, 마침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막내와 자리를 같이해서 지루하지는 않게 되었다.
오후 7시 20분에 이룩해서 1시간 40분 비행기를 타고 마지막 여행지인 우루무치에 도착해서 가이드를 만났는데
우선 통역이 필요 없는 조선족이라 더 반가웠으며, 저녁을 먹으로 가는 도중에 들은 이야기이다.
<1. 카슈가르 공항 주위풍경 2. 공항내부 3. 비행기 안에서 본 풍경>
|
첫댓글 국경에 근무하는 공안들 대부분 냉담하고 불친절합니다. 예전에 네팔에서 중국 넘어갈 때 방송용 비디오카메라를 빼앗길 뻔한적이 있어 중국 갈 때는 큰카메라는 잘 안들고 갑니다. 긴 글이라 오늘은 반만 읽고 갑니다. 내일 다시 나머지 반 읽을 예정입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실크로드 신강성에서 카라코롬하이웨이를 넘어 파키스탄으로 가고 싶습니다.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