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임팔급(林八及)은 당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840~900년경에 신라에 와서 이부상서를 역임하고 팽성(현재의 평택시 팽성읍)에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선계를 고증할 수 없어, 고려 말 세자전객령(世子典客令) 겸 연희궁부사(延禧宮副使)를 지낸 임세춘(林世春)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는 전객령계(典客令系)와, 고려 말에 삼중대광(三重大匡)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이 된 임언수(林彦脩)를 1세조로 하는 충정공계(忠貞公系)로 나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1]
임(林)씨 중 가장 인구가 많은 나주 임씨를 제외한 대부분의 임(林)씨는 평택 임씨에서 분관하였다고 한다.
임견미(林堅味, ?∼1388) : 고려 후기의 무신. 공민왕초 다루가치(達魯花赤)에 속하여 공을 세우고 중랑장에 등용되었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이 입구하였을 때 나주도병마사(羅州道兵馬使)로 왕을 호종(扈從)하여 이듬해 대호군으로 1등공신이 되었다. 이어 진주도병마사가 되었다. 그 뒤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거쳐, 1368년 명나라 군대가 원나라의 연경(燕京)을 포위하였다는 급보가 있자 안주순무사가 되었다. 1370년 부원수로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동녕부(東寧府) 토벌에 참가하였으며, 이어 밀직부사를 거쳐 1374년 서북면도순문사가 되었다. 제주에서 목호(牧胡)의 난이 일어나자 부원수로서 토벌전에 출전하였다. 1375년(우왕 1)심양왕(瀋陽王) 터터부카(脫脫不花)의 모자가 왕위를 노리고 반역자 김의(金義)·김서(金湑)의 무리와 함께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서경상원수가 되어 출진, 이에 대비하였다. 1377년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 문하평리(門下評理)로 동강부원수(東江副元帥)·서해도조전원수(西海道助戰元帥)로 출전하였다. 1380년 이인임(李仁任)과 함께 경복흥(慶復興)과 그 일당을 숙청, 1383년에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정방제주(政房提調)를 겸임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이 되어 문하시중에 올랐다. 그러나 그 후 이인임·지윤(池奫)·염흥방(廉興邦) 등과 함께 전횡을 일삼다가 1388년 최영(崔瑩)·이성계에게 살해되었다.
임정(林整, 1356년∼ 1413년) : 향리로 입신하였고, 녹사·도염서영(都染署令)·낭장·도관좌랑(都官佐郎)을 거쳐 1385년(고려우왕 11년)에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그 뒤 판도정랑·이조정랑·의주목사를 거쳐 1393년(조선 태조 2년)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서북면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경상도도관찰출척사(慶尙道都觀察黜陟使) 등 외직을 역임하였다. 성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임건(林健, 1561년 ∼ ?) : 조선 중기의 문신. 1600년(선조 33)에 성균관 유생의 대표로, 궁중과 연결되어 기세를 부린 홍여순(洪汝諄)을 탄핵하였으며, 1606년(선조 3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9년(광해군 1) 승문원저작으로 재직하였으며, 1611년(광해군 3) 겸춘추(兼春秋)로 경연에 입시하였다. 그 뒤 『선조실록』 편찬 때 기주관(記注官)으로 참여하였으며, 1615년(광해군 7) 지평‧장령이 되고, 이듬해 『홍문록(弘文錄)』에 입록되었다. 1617년(광해군 9) 필선이 되고, 그 뒤 집의로 재직중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출에 소극적인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을 탄핵하였으며, 이어 인목대비의 폐출 논의 때 폐출을 적극 주장하였다. 그 뒤 겸보덕‧교리‧사간‧응교‧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으로 언관에 있으면서 폐모를 주장하는 등, 전후 논계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는 죄로, 남해(南海)로 유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그 뒤 인조에 의해 사면이 몇차례 시도되었으나, 언관의 반대로 좌절되다가, 1635년(인조 13)에 양이(量移)로 감형되었다.
임경업(林慶業, 1594년 ∼ 1646년) : 조선 중기의 무신. 광해군 때 무과에 급제, 병자호란 때는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용맹을 떨쳤는데 김자점(金自點)의 모함으로 피살되었다.
첫댓글 상기사항으로 보면
23세손 임병록 할아버지는 '병'자 돌림을 제대로 쓰셨고
24세손은 '규'자 돌림이어야 하나 음양오행에 따라 만듭니다.
즉, 金 水 木 火 土 인데 이름 한자에 반드시 이 부수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균자가 된겁니다(均)
저희 항렬인 25세손은 중간에 '종'자 내지 '석'자를 쓰는것이 맞습니다
저희 밑에 항렬인 26세손은 끝에 '호'자 내지 '수'자를 써야 합니다
참고하십시요
할아버지 항렬은 "희, 병"자를 아버지 항렬은 "교, 규, 균"자를 우리 항렬은 "종"이 맞고 다음 항렬이 "태"자라고 했는데 종중에서 어찌 정해 놨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