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문학성의 리얼리티
리얼리티(reality)란 "실제로 있는 모습 그대로 인 것"을 말한다. 비슷한 말로 사실과 진실이 있다. 전자는 '현실로 있는 일', 혹은 '실제로 존재하는 일'이라고 사전은 정의하고 있다. 사물의 존재나 내력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확실하다는 뜻으로 쓴다. 후자는 '거짓 없이 바르고 참됨'이라고 사전은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전자는 그런 일이 존재 했느냐 아니 했느냐에 촛점이 맞춰져 있다. 진실(truth)이라는 말은 철학적 관점에서는 보다 다양하게 정의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철학은 '진리란 무엇인가' 라는 과제를 규명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거기에는 삶의 가치라든지 윤리적 기준이라든지 인간의 궁극적 목표 등의 문제도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반면에 '사실'은 그런 일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시간적, 공간적 유무가 중요하다.
이에 비하여 리얼리티는 이 양자를 포괄하고 있으면서 중립적 의미를 지향하고 있다. '문학성의 리얼리티'란 과연 그런 것이 존재 하는가. 한다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그 말을 통해서 어떤 의미를 추구할 수 있는가 등이 포함되어 있다.
휘일라이트는 문학의 리얼리티를 세 가지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첫째 "리얼리티는 현존적이다(Reality is persential)"
둘째 "리얼리티는 융합적이다(Reality is coalescent)"
셋째 "리얼리티는 전망적이다(Reality is perspective)"라고 한다. 문학적 리얼리티를 밝히는 것과 문학성을 밝히는 것이 완전히 일치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문학적 리얼리티를 밝히는 일이 곧 문학성을 밝히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현존감(sense of presence)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현존으로서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은 한 덩어리의 물체로서, 혹은 일련의 과정으로서 아는 대신에 열린 마음으로, 귀 기울이고 응답하는 태도로 만나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주체성의 현존 속에서 당신이 되는 것이다(It is to become a thou in presence of his I-hood). 대부분의 우리들은 이따금, 그리고 불완전하게 당신이 된다. 그러나 개인적인 타자성의 느낌을 주고, 리얼리티의 독립된 차원으로서의 현존을 인식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며, 그 능력을 때때로 실현시키는 일이다.
훌륭한 예술품은 보는 사람에게, 혹은 듣는 사람에게 작가와 호응하는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하여 참신하고 상상적인 방법으로 그 현존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문학은 종이 위에 인쇄된 어떤 것이 아니다. 인쇄된 그 글자들이 독자의 상상력 속에서 예술적으로 실현될 때 문학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존적이 될 때만이 문학이 된다는 말이다. 현상학이 문학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이후 문학을 '문학의 행위(act of literature)'라는 말로 바꾸어서 말하는 풍조가 생겼다. 문학 작가가 지향하는 의도와 독자가 독해하는 의도가 서로 교차할 때 진정한 문학적 행위가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 맑은 날의 공기 속에 신부의 일행이 지나가요. 꽃가마 탄 신부의 나이는 신라 적 시집갈 나이니까. 그렇지. 스무살 안팍. 신부는 시방 바로 시집가는 길. 먼 신랑 집에서 베푸는 결혼식에 늦을세라 대어가는 길. 그의 탄 꽃가마는 나루를 건너서. 나룻목에 배가 매이자, 산이 우러러 뵈는 언덕길을 깁더 올라가고 있소.
-서정주[처녀의 공기]중에서
'지나간다'가 아니라 '지나가요'라고 한 것은 독자와 함께 현존 속에서 읽도록 유도하는 뜻이 담겨 있다. '그렇지' 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말투이기도 하지만, 독자와 공감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말하는 것이다. '길'이라는 명사로 문장을 끝맺고 있는 것도 현존감을 살리기 위해서 한 생략법이다. '있소'라고 한 것도 나와 그대가 이 상황에 공종하는 뜻을 담고 있다.
휘일라이트는 의미나 문맥보다는 독자의 현존감을 높이는 동의어 반복이 많은 게르투르드 스타인(Gertrude Stein)의 시를 인용하여 현존감의 예로 보여주고 있다. 스타인의 시를 설명하면서 "단어 밑에 놓여져 있는 시인성(詩人性)으로 기억되는 경험의 강렬성은 단순한 구절을 반복한다고 해서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장미는 장미라는 것은 장미(A rose is rose is rose)'라고 하는 것은 미스 스타인의 아마도 장미에 대한 생생한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 외에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현존감은 단순한 언술로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이다. "도는 말로 표현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라고 말한 노자의 말과 비슷하다. 문학은 다만 작가의 현존감을 유사한 감정으로 표현하는 길일 뿐이다.
"리얼리티는 융합적이다"는 명제는 데카르트 이후의 2분법적 사고가 지배하고 있는 사고방식을 비판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서구의 근대화는 '칼테지안 이분법( Cartesian dichotomy)' 즉 정신과 물체, 주관과 객관, 내면과 외부 등으로 명확히 구분해서 사물을 바라보는 능력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과학 문명에는 필요할지 모르지만 리얼리티를 바르게 인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What Is)의 무한성(실제와 가능성의 무한성)에서 모든 다른 종류의 것은 체계적으로 무시하고 나의 특성에만 주목"하는 것은 흔히 저지르는 오류라는 것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화가의 색감을 어떻게 이분법적으로 말할 수 있느냐고 했다. "장미꽃의 아름다움은 장미꽃 자체가 아름답기 때문인가 아니면 장미꽃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이나 마음 때문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어떻게 대답할까. 주체와 객체를 분리한 이분법적 사고에서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다. 이 질문의 답은 양자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종종 그 이름을 전용하고 있는 지적인 예술품과 구별되는 리얼리티란 객체도 아니고, 주체도 아니며, 물체도 정신도 아니고, 그것은 어떤 다른 철학적 범주로 한정될 수도 없다. 그것은 바로 '그것(That)'. 각기 이러한 범주가 지시하려고 하는 '그것', 매 철학적 언명이 기술하려고 하는 '그것'. 항상 지적인 관점에서 추구하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부적절한 '그것'이다.
나와 이 세상과 융합하지 않으면, 그 리얼리티를 찾을 수 없다. '나'를 존재론적으로 규명하지 않고는 그 리얼리티를 체험할 수 없는 것이다. 시적으로 의미있는 '나'를 관찰하려면, 이미지로 구성되어있는 시,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구조적으로 되어있는 시 속으로 들어가서 적절하게 수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이미지는 언제나 특수하게 존재하지만 그것은 그 의도에 있어서는 무한하게 암시하고 그것을 넘어선 저 쪽을 가리켜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초의 융합은 자신과 비자신 간에 일어나는 것이며, 그것은 특수한 것과 보편적인 것의 융합을 포함하는 것이다."
높은 산등이라 하늘이 가까우련만 마을에서 볼 때와 일반으로 멀다. 구만리일까, 십만리일까. 골짜기에서의 생각으로는 산기슭에만 오르면 만져질 듯하던 것이 산허리에 나서면 단번에 구만리로 내빼는 가을하늘. 산 속의 한나절은 조을고 있는 짐승같이 막막은 하나 숨결이 은은하다. 휘엿한 산등은 누워 있는 황소의 등어리요. 바람결도 없는데 쉴새없이 파르르 나부끼는 사시나무 잎새는 산의 숨소리다. 첫눈에 띠는 하얗게 분장한 자작나무는 산 속의 일색. 아무리 단장한대야 사람의 살결이 그렇게 흴 수 있을까.
-이효석 [산]중에서-
산을 둘러보면서 서술하는 정경이다. 밑줄친 문장은 누구에게 던지는 물음일까. 그것은 아마도 작가와 독자가 함께 공감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묻는 물음일 것이다. '숨결이 은은하다', '황소의 등어리요', '산 속의 일색' 등의 은유는 '나'의 느낌이 산이라는 객체와 함께 공감하는 이미지로 융합되고 있다.
머리 위에서 굽어보던 햇님이 서쪽으로 기울어 나무에 긴 꼬리가 달렸건만 나물 뜯을 생각은 않고 이쁜이는 늙은 잣나무 허리에 등을 비벼대고 먼 하늘만 이렇게 하염없이 바라보고 섰다. 하늘은 맑게 개이고 이쪽저쪽으로 둥글 피어오른 흰 꽃송이는 곱게도 움직인다. 저것도 구름인지, 학들은 쌍쌍이 짝을 짓고 그 새로 날아들며 끼리끼리 어르는 소리가 이 수풍까지 멀리 흘러내린다. 갖가지 나무들은 사방에 잎이 우겄고 땡볕에 그 잎을 펴들고 너흘너흘 바람과 아울러 산골의 향기를 자랑한다. 그 공중에는 나르는 꾀꼬리가 어여쁘고 - 노란 날개를 파닥이고 이가지 저가지로 옮아 앉으며 흥에 겨운 행복을 노래부른다. - 고오이! 고이고오이! 요렇게 아양스리 노래도 부르고 - 담배 먹고 꼴비어!
-김유정 [산골]중에서-
서술자의 시점과 '이쁜이'의 시점이 융합되어 나타나고 있다. 특히 꾀꼬리 소리를 이쁜이가 느끼는 데로 의미를 만들어 기술하고 있다. 산 속의 정경과 꾀꼬리 소리와 이쁜이 마음이 융합되어 있는 것이다. 산문으로 예를 들었지만 시에서는 더 드러나기 마련이다. 보이는 외부 세계를 시인은 그 창조적 능력에 의하여 변모시키기 때문이다. 이 변모야말로 보이는 대상과 그 자신이 융합하고 잇다는 뜻이다.
"리얼리티는 원근법적이다(Reality is perspectival)"는 것은 어떤 특정한 시점을 통하여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리얼리티는 현존적이다"라든지 "리얼리티는 융합적이다"라는 것으로 리얼리티를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 "현존하고 융합적인 리얼리티의 전달은 유연하지 못한 의미를 가진 말에 의존해서는 불가능하다"고 그는 말했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대체로 불완전한 형태로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평범한 말과 구별되는 '적절성(discriminating suitability)'에 의해서 선택되고 문맥화 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문맥은 행위나 표현하는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참신한 문맥은 바라보는 시각, 즉 특이한 퍼스팩티브가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니크한 눈으로 바라보아야 문학적 리얼리티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독자는 [카라마조프의 형제], [햄릿],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성(城)], [보재크] 등에서 커다란 진실의 주장을 강하게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이러한 여러가지 진실의 주장을 전체적인 조직 체계에 맞추어 넣을 수 있으며, 아니, 감히 맞추어 넣으려고 시도할 수 있을까. 개인을 체계화한다는 것은 비교될 수 있는 부분적인 양상의 기준에서 서술할 수도 있고 구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학의 전 작품은 개별적인 인간처럼 부분적 양상의 정체성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카라마조프]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과 [잃어버린...]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요컨데 작품은 자기 개별적인 체험이 풍부하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작품 각자의 고유한 독립적인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문학적 리얼리티를 문맥적 퍼스팩티브에서만 본다면 그 본질을 완벽하게 파악한다는 것은 거의 불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적 리얼리티는 언제나 새로운 문제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은 우리가 알고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니, '저 너머 어떤 것(Somthing More beyond anything)'으로 물러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리얼리티가 본질적으로 잠복해 있는 것으로 치열하게 추구하고 있는 탐구자에게조차 그 내적 비밀을 드러내기를 거부하고 있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합리적으로 다양화되어 있긴 해도 그것의 부분적인 일별을 붙잡는 수밖에 없다. 그 모든 것은 불완전해서 어떤 경우는 이것에 맞고 다른 경우에는 다른 것에 적당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문체(style)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문체를 어느 범위, 어느 정도에서 적용하느냐가 문제이긴 하지만, 어떤 퍼스팩티브로 보느냐는 것은 그 작가가 어떤 문체를 어떤 문맥 혹은 상황에 따라 사용하느냐의 문제로 귀결시킬 수 있다. 평범한 상황을 전혀 다른 퍼스팩티브로 볼수 있는 시각이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말하는 비친숙화(unfamiliar)의 비전으로, 비친숙화된 표현으로 나타내는 것이 곧 "리얼리티는 전망적이다"라는 말의 골자일 것이다.
꽃은 평화의 상징이 아니다. 비생명적인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의 언어이다. 빛깔을 갖는다는 것,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거역하는 장렬한 투쟁이다. 매연의 악취 속에서도 향기를 내뿜는다는 것은 눈물겹기까지 한 생명의 데몬스트레이션이다. 꽃은 형식이 아니다. 부지런한 뿌리의 노동 속에서 가꾸어진 땀의 결정이다. 딱딱한 돌과 음흉한 땅벌레들을 피해 맑음 수분을 퍼올리고 거친 흙더미에서 양분을 획득한 그 슬기의 깃발이다.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기 표현을 위해서 밝은 색채와 유현한 향취를 갖는다. 그랬을 때만이 정말 꽃은 아름답게 필 수가 있다. 열매는 자기 표현에 대한 하나의 보상일 따름이다. 꽃은 열매처럼 먹을 수도 없으며 씨앗처럼 땅에 뿌려 몇 배의 수학을 얻을 수도 얻지도 못한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쳐다볼 뿐이다. 냄새 맡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이나 머리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서 피어난다.
-이어령 [문화의 은유법으로서의 꽃]중에서-
"꽃은 평화의 상징이 아니다"라는 말로부터 상식을 뒤엎고 있다. 꽃을 저항의 언어, 장렬한 투쟁, 생명의 데몬스트레이션, 땀의 결정, 슬기의 깃발등의 은유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상식과 다른 퍼스팩티브로 조망하는 것이다.
4. 마무리
다양한 언어 다양한 기법으로 표현하고 있는 수많은 문학 작품의 문학성을 한 묶음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더구나 그 언어와 기법은 각기 그 작품의 주체와 사상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있기 때문에 그 문학성이 살아있는 것이고 그것을 따로 떼어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문학적 리얼리티를 가지려면 이상에서 말하는 여러 조건들을 충족시켜 주어야하는 것은 틀림없다.
수필은 어떤 문학의 형식도 다 수용하여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시나 소설, 희곡보다 표현 형식에 있어서 자유로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훌륭한 수필과 그렇지 못한 수필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매체로 사용된 언어에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이다. 바로 그 언어가 바르게 쓰이지 않았거나 문학적 리얼리티를 지니고 있지 못할 때는 훌륭한 수필의 자격을 의심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어떤 장르보다 작가의 체험이 직접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감동 또한 작가와 현존하는 것이다. 단힌 언어가 아니라 열린 언어로, 다시 살아 있는 언어로 표현되는 조건을 갖추어야 하며 그것은 다시 독자와 현존해야 하며, 공감하는 자세로 대상을 조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