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래정씨의 시조
신라의 전신인 사로(斯盧)의 6부 촌장으로 정씨의 성을 하사받았던 지백호의 원손이며 안일 호장인 정회문(鄭繪文)을 시조로 받든다. 그는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냈다.
그런데 ‘경신보(庚申譜)’ 세록(世祿)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을미보(乙未譜)’에서는 정회문(鄭繪文)을 시조로 하여 기세(起世)하였으나 그뒤 문안공(文安公) 정항(鄭沆)의 묘지(墓誌)가 알려졌는데, 묘지(墓誌)에는 보윤공(甫尹公) 정지원(鄭之遠)까지의 3세만 적혀 있다. 따라서 ‘경신보(庚申譜)’에서는 보윤공(甫尹公)을 1세조로 하고 정회문(鄭繪文)은 권수(卷首)에 따로 기록한다.-
다시 말하면, 문안공(文安公)의 묘지(墓誌)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정회문을 시조로 기세(起世)해 왔으나 묘지 내용에 따라 계대가 확실한 보윤공(甫尹公) 정지원을 기세조(起世祖)로 하고 시조는 정회문으로 하되, 그 사이의 소목(昭穆)이 분명치 않아 책머리에 실린 것이다.
따라서 기세조(起世祖)는 보윤호장(甫尹戶長)을 지낸 정지원이다.
정지원과 정회문 사이의 세계(世系)는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정지원의 아들 정문도(鄭文道)는 안일호장(安逸戶長), 손자 정목(鄭穆)은 상서좌복사태부경(尙書左僕射太府卿) 등 자손들이 현달하게 되어 그의 세거지인 동래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 본관지 동래
동래(東萊)는 부산직할시와 경남 양산시의 일부 지역을 차지했던 지명으로, 본래 장산국( 山國) 또는 내산국(萊山國)인데 신라 때 점령하여 거칠산군(居漆山郡)으로 고치고, 경덕왕 때 동래군으로 개칭하였다가. 고려 현종 때 울주(울산)에 편입시켰다가 1547년(명종 2) 부(府)로 승격시키고 1895년(고종 32) 관찰부(觀察府)를 설치, 1896년 부윤(府尹)으로 삼았으며, 1903년 군으로 고쳤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부산부에 딸리고, 부산부에 속하지 않는 구역과 기장군 일원을 병합하여 동래군을 이루었다. 그 후 대부분이 부산에 편입되고 나머지는 양산군(지그므이 양산시)에 편입됨으로써 동래군의 행정구역 명칭은 소멸되었는데, 부산직할시에 편입된 대부분은 동래구에 속해 있다.
동래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는 동래정씨 외에 동래김씨, 동래판(判)씨, 동래송씨 동래조(曹)씨 등이 있다.
한자가 다른 정(丁)씨 중에도 동래를 본관으로 하는 것이 있어 혼선을 안겨 준다.
□ 이거와 분파
시조 정회문은 신라 탈해왕 때 성을 하사받고 12세손 정규(鄭規) 전서공(典書公)은 천안으로 이거하고, 정구(鄭矩) 시(諡) 정절공(靖節公) 호(號) 설학재(雪壑齋)는 서울 망우동으로 이거하고, 정부(鄭符) 한성부윤(漢城府尹)은 충주로 이거하니 정절(鄭節)은 동래에 그 후손이 거주하고 있다.
정구 정절공의 아들 정선경(鄭善卿), 동평군(東平君)의 둘째아들 정종(鄭種)이 이시애의 난과 이징옥의 난을 토평하고 동생 참판공(參判公)(1450)과 하령남(下嶺南) 고령군 덕곡면(德谷面) 오노곡(吾老谷)에 내가 늙는 고을이라 하여 그 후손이 거주하고 있다.
정규의 6세손 정숙(鄭淑)(1740)이 벽진면(碧珍面) 자산리(紫山里)로(1816), 정종(鄭種) 동평군(東平君)의 11세손 정수열(鄭修烈.호-三悔齋)가 수륜면(修倫面) 계정리(溪亭里)로(1720), 정종의 10세손 정성교(鄭星僑)가 선남면(船南面) 소학리(巢鶴里)로(1761), 정종의 8세손 정하(鄭河)가 용암면(龍巖面) 운산리(雲山里)로(1687), 정종의 7세손 정원규(鄭元圭) 호(號) 정수암(鄭修庵)이 선남면(船南面) 소학리 및 선원리(仙源里) 등으로(1740), 정종의 9세손 정영복(鄭榮馥) 한성부서윤이 선남면(船南面) 유서리(柳西里) 및 명포리(明浦里) 등으로(1763), 정종의 10세손 정유강(鄭惟崗)이 선남면(船南面) 도흥리(道興里.침곡=砧谷)로(1770), 참판공(參判公) 12세손 정담(鄭淡)이 용암면(龍巖面) 문명리(文明里)로(1800), 8세손 정활(鄭活)이 수륜면(修倫面) 수성리(水成里)로 이거하여 현존하고 있다.
□ 인물과 파
조선시대에 정승 17명, 대제학 2명, 문과 급제자 198명을 배출했는데 상신(相臣) 17명은 왕손인 전주이씨의 22명에 버금가는 숫자이다.
동래정씨는 정지원의 6세에서 교서랑(校書郞:輔)파와 첨사공(詹事公:弼)파의 2파로 대별된다. 이들 두 파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각각 여러 파로 분화하는데 첨사공파 중에서도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와 대호군파(大護軍派)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가문의 전설 ; 온화하고 불편부당하여 남과 적을 삼지 않는다는 가통을 지켜오면서 명문거족의 지위를 굳혀온 동래정씨는 부산 양정동 화지산(華池山)에 자리잡은 2세 안일공(安逸公) 정문도(鄭文道) 묘소에 대한 명당(明堂)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정문도가 죽었을 때 맏아들 정목이 장지 문제로 고심하던 중 동래부사를 지내던 고익호(高益鎬)가 일러 준 화지산에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장례를 치른 다음날 이 곳에 와 보니 누군가가 무덤을 파헤쳐 놓았다. 기이하게 생각하고 다시 복원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분통을 참을 수 없었던 정목(鄭穆)은 밤을 세워 가면 숨어 지켜보기로 하였다. 밤이 어지간히 깊었을 때 도깨비들이 나타나 또다시 무덤을 파헤치며 하는 말이 "여기가 어딘데 함부로 건드려, 적어도 금관을 묻어야 할 곳에---" 하며 중얼거렸다. 가난하게 살았던 정목은 이 사실을 알고 걱정이 되어 한숨을 쉬고 있는데,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황금빛 나는 보릿짚으로 관을 싸서 묻으면 도깨비들이 속을 것이라고 하고는 사라졌다. 노인이 시키는 대로 하고 몰래 숨어서 봤더니 도깨비들이 그 날 밤 다시 나타나서 "과연 주인이 들어왔구나" 라고 하며 되돌아갔다는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그 후 동래정씨는 10대에 걸쳐 4백여 년이란 긴 세월 동안 가문은 번영을 누려 명문거족의 긍지를 살렸다.
■ 정목(鄭穆)
동래정씨의 1세조인 정지원의 아들 정목은 좌복야를 지냈는데, 그 후손들이 모두 현달했다.
그의 아들 정항(鄭沆)은 문종, 인종 때 우사간, 충청도 안찰사 등을 지냈고, 항의 아들은 <정과정곡>으로 유명한 정서이다.
■ 정항(鄭沆)
[1080~1136] 자 자림(子臨). 시호 문안(文安).
정지원의 맏아들 정목은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상서좌복야를 지냈다. 슬하에 아들 정제(鄭濟). 정점(鄭漸). 정택(鄭澤). 정항(鄭沆). 4형제를 두었는데, 아들 4형제중 셋째 택이 찬성사를 역임했고, 문장(文章)과 재능으로 명망을 떨쳤다. 정목의 아우 정선조(鄭先祚)는 호장을 지냈고, 그의 후손들이 동래와 양산 등지에 흩어져 살면서 명문의 기틀을 다져왔다.
고려의 문신 정항은 정목의 막내아들로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양광도와 충청도의 안찰사를 역임한 후 인종 때 지추밀원사. 예부상서. 한림학사 등을 지냈다.
조부와 증조부는 모두 동래의 호장이었으나 아버지 정목이 관직에 나아가 섭대부경(攝大府卿)이 되었다. 23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숙종이 행차한 복시(覆試)에서 2등으로 급제하여 곧 내시에 속하였다가 상주사록(尙州司錄)에 임명되었다. 나이는 어려도 매사를 잘 처리하여 정극영(鄭克永), 한충(韓沖)과 더불어 사록으로는 이정일한(二鄭一韓)이 있다는 칭송을 들었다. 1116년(예종 11) 집주관(執奏官)이 되어 공평 정직하게 출납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예종 말에서 인종 초에는 당시 집권하고 있었던 이자겸에게 아부하지 않아 여러 차례 좌천되었다가 이자겸이 제거된 후에는 새로 제도를 정비하는 데 공헌함이 많았다. 경서(經書)에 밝아 임금 앞에서 여러 차례 <서경(書經)> <송조충의집(宋朝忠義集)> <예기(禮記)> 등을 강의하였다.
1132년(인종 10) 당시 왕의 총애를 받던 묘청(妙淸), 정지상(鄭知常) 등이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면서, 이어 왕이 서경에 행차하자 왕을 서경에 오래 머물게 하고자 하여 개경의 궁궐 수리를 중지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정항은 두 차례의 상소를 올려 이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궁궐 수리와 개경으로의 환어(還御)를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죽었을 때에는 30년간 근시직(近侍職)에 있으면서도 저축한 것이 없다 하여 왕의 칭송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1132년 지공거(知貢擧) 최자성(崔滋盛) 등이 시제(試題)를 잘못 내어 간관들은 과거를 무효화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정항은 사위 김이영(金貽永)이 합격하였으므로 환관(宦官)에게 간청하여 취소하지 못하게 하는 일면을 보이기도 하였다.
직제학공파의 파조 정사(鄭賜)는 세종 때 예문관 직제학을 지낸 사람인데, 아들 5명, 손자 10명을 두었다. 셋째아들 정난종(鄭蘭宗)은 동래정씨 중흥의 조(祖)라 할 수 있다. 정난종은 세조~성종 때 훈구파의 중진으로 이조판서, 우참찬을 역임하였다.
문익공파(文翼公派)로 불리는 정광필(鄭光弼)은 그의 둘째아들이다.
그 밖에 중종 때 대제학을 지낸 정사룡(鄭士龍), 선조 때 우의정 정지연(鄭芝衍), 숙종 때 우의정 정재숭(鄭載嵩), 헌종 때 영의정 정원용(鄭元容), 정조 때 우의정 정홍순(鄭弘淳) 등이 있고, 대호군파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몰락하였다.
<고려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로는 의종 때 명신 정습명(鄭襲明), 그의 6대 손인 정몽주(鄭夢周), 의종 때 무신정변을 주동한 정중부(鄭仲夫), 예종 때 학자, 문인이었던 정항(鄭沆) 등이 있다.
■ 정서(鄭敍)
정항의 아들인 정서(鄭敍)는 인종비 공예대후 동생의 남편이다.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어 문명(文名)을 떨쳤다. 그는 의종 때 폐신(嬖臣)들의 참소로 동래에 유배되었는데, 그 곳에서 정자를 짓고 오이를 심어 '과정(瓜亭)'이라 당호(堂號)를 삼고 연군(戀君)의 정을 가요로 읊은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어, 우리 나라 국문학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정서는 인종의 동서로서 벼슬이 내시낭중이었고, 문장과 묵죽화에 능하여 인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의종 때 폐신들의 참소로 고향인 동래로 장류되었다.
그가 그림을 벽에 붙여 놓고 쓴 시가 있다. 이 시는 넉으로 대나무를 그린 후에 시를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