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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리투아니아 공화국(Republic of Lithuaina) 역사]
문화: 폴란드, 대마-삼베, 저마-모시, 아마-린넨(이 나라긍지) 면적: 6만 5300㎢(3국 가장 큼), 인구: 약 369만,
민족: 리투아니아 83%, 폴란드 7%, 러시아, 화폐: 유로(€),
역사: 이 나라는 최근 소련에서 독립한 작은 나라로 알고 있으나 역사를 알면 한때는 동유럽의 강국으로 대단한
역사를 가진 나라인데 이 나라 역사는 폴란드어로 기록되어 폴란드 역사 속에 묻혔기 때문이다.
리투아니아는 약 2천개의 호수와 숲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나라로 발트3국 중 유일하게 튜턴기사단이 나라를
세우지도 않았고, 처음부터 독립된 자기 나라 역사를 가졌으며, 자기들은 리에투바(Lietuva)라고 한다.
리투아니아의 시작은 1253년 슬라브족에 가까운 발트족이었던 ‘민다우가스’가 국왕에 즉위하여 통일국가이었을
때이며, 국왕과 아들이 살해됨으로 소멸 되었고, 1316년 비테니스의 형제인 게디미나스가 뒤를 이었다.
게디미나스 대공(재위1316~41)이 게디미나스 왕조를 열었고, 집권 초기에 수도를 트라카이에서 빌니우스로
옮겼으며, 우크라이나와 드네프르 강에 이르는 백러시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1341년 게디미나스가 죽자 아들 야우누티스가 뒤를 이었고, 1345년 알기르다스와 케스투티스가 결탁하여 대공을
몰아냈고, 알기르다스(Algirdas 재위1345~1377)는 케스투티스의 동의를 얻어 대공이 되었다.
그는 케스투티스와 공동 통치자가 되었으며, 1377년 알기르다스가 죽자 그의 아들 요가일라(Jogaila)가 대공이
되었으나 1381년 케스투티스(Kestutis, 재위 1381~82)는 요가일라를 체포하여 대공이 되었다.
그는 목재이던 트라카이 성을 돌로 다시 시작했으며, 1382년 드네프르 강 너머 러시아 땅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러 갔을 때 요가일라는 탈출하여 트라카이를 점령하고 있다가 돌아오는 케스투티스 부자를 체포했다.
케스투티스는 감옥에서 살해했으나 비타우타스는 탈출하여 2년 뒤에 요가일라와 화해하였고, 그 전에 다스리던
영지를 돌려받았으며, 요가일라는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12세 된 폴란드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했다.
1386년 부아디수아프 2세로 폴란드 왕위에 올라 리투아니와 폴란드 연합 된 야기에우오 왕조를 열었는데
이때부터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역사가 혼합된 것 같지만 그러면서도 리투아니아는 독립된 역사도 있다.
야기에우오 왕조는 1447~1572년까지 존속했으며, 1410년 리투아니아의 비타우타스(재위1392~1430)는 독일
튜턴기사단과 중세 유럽에서 가장 큰 전투 중 하나인 타넨베르크 전투(Tannenberg)에서 승리했다.
타넨베르크는 독일에서 부르는 이름이나 본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연합군이 진을 쳤던 곳이며, 폴란드에서는
구룬 발트(Grunwald) 전투라고 부르지만 이곳은 독일 기사단이 진을 친 곳이다.
리투아니아는 구룬 발트 전투를 잘기리스(Zalgiris) 전투라고 부르며, 야기에우오 왕조는 1569년 귀족들이
선출하는 선거 군주제로 바뀌어서 세습왕조는 종말을 고하였다.
1569년 루블린 조약(Lublin Union)으로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연방을 정식으로 구성하였고, 1610~12년
모스크바를 점령했으며, 남쪽엔 크림반도 동편까지 다스리는 유럽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졌다.
1651년의 무장 반란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쇠퇴시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지배로 넘어 갔고 1665년
스웨덴의 침략으로 약체 된 연방은 신성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어 오스만 제국을 물리쳤다.
그 덕에 ‘기독교 세계의 방파제’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으나 그 후 16년간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치렀으며,
1795년 주변의 강대해진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제국에 의해 3차례 분할되었다.
1918년 1차 세계 대전 때 독일이 점령했으나 1919년 독일의 패배로 독립했으나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었으며, 1940년 소련이 발트 3국을 점령했고 1941 독일이 점령했다.
1944년 독일의 패전으로 소련에 다시 편입되어 소련의 공화국이었고, 1991년 8월 소련에서 독립하였으며,
2004년 나토와 유럽연합에 가입했고, 발트3국 중 발전이 뒤졌다.
물가는 가장 저렴하며, 농업의 비중이 크고, 공업은 식품과 경공업이 주요부문이고, 근년에 기계, 화학공업이
발달하고 있으며, 국토는 주로 평지이고, 가장 높은 주아자핀 지역이 294m 이다.
북쪽 라트비아, 남동쪽 벨로루시, 남서쪽 폴란드, 서쪽 러시아연방 칼리닌그라드와 국경을 접하고 있고, 민족은
러시아인 9%이며, 소수의 우크라이나 인, 벨라루시인, 유태인, 타타르인이 있으나 민족분규는 없는 편이다.
종교는 90%가 로마가톨릭 신자이고, 소수의 루터교와 러시아정교회 신자도 있다.
※야기에우오 왕조(Jagiellon dynasty): 1386년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는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하여 열게 된 야기에우오 왕조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군주의 결혼을 통해 통합되었다.
1392년 자기 대신 리투아니아를 통치할 비타우투스 대공을 임명했고, 1440년 헝가리 왕위까지 차지하여 이로써
1447~1569년 사이 중동부 유럽에서 강력한 왕조가 탄생했다.
1506년 알렉산드르가 왕위에 올랐을 때 왕국은 외세의 침략과 내정의 부패로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고, 1572년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는 상속자 없이 죽음으로 야기에우오 왕조는 종말을 고했다.
[시아울리아이(샤울랴이, Siauliai) 역사] 인구 12만 명
샤울레이는 리투아니아의 4번째로 큰 도시로 14세기말 가톨릭은 이 나라의 국교가 되었으며 18세기에 직물
중심지로 발달했고 19세기 이르러 가죽산업이 도입되었으며 인구는 14만 7천명(2017)이다.
제1, 2차 세계대전 동안 심한 피해를 입은 후 다시 공업 중심지로 재건되었고, 가죽과 신발류 산업, 식품가공업,
금속세공업, 정밀공업, 가구제조업도 발달했으며, 교육대학, 과학기술전문학교, 의과대학 등이 있다.
십자가 언덕은 샤울레이 시내에서 약12km 떨어진 넓은 평원 위의 작은 언덕에 있는 십자가 숲은 처음엔 종교적
의미로 십자가가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14세기쯤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세워진 것은 1830년 이후 반러시아 민중반란으로 전사했거나 시베리아로 유배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세우기 시작했고, 1918년 리투아니아 독립전쟁 희생의 계기로 민족 전체의 성지로 여겼다.
이에 소련은 3차례에 걸쳐 불도저로 철거하고, 밤에는 또다시 십자가를 세웠으며, 1943~45년까지 나치에 의해
수용됐던 명단도 있는데 이제는 작은 소망들을 적은 십자가들로 채워지고 있다.
아이의 영세를 받는 날이나 결혼식 같은 가족의 특별한 날을 기념할 때 통과의례로 찾아와 십자가를 심으며,
이 십자가 언덕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름 없는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과 같은 날이 있는 것을 상기하는 장소인데 규모가 작은 동산에 10만여
개의 십자가가 빽빽이 들어서 있고, 전 세계 사람들이 십자가를 심으러 오고 있다.
[십자가 언덕(Hill of Crosses)]
룬달레 식당에서 출발한지 꼭 1시간 만에 십자가 언덕의 주차장에 도착 했는데 기념품가게에는 이곳에 심을
수제품 십자가를 작으면 1유로 아주 크면 15유로에 팔고 있는데 가격이 싸서 2배 쯤 올려야 한다고 했다.
이곳에 십자가를 세우면 그것이 바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것이고 하며, 1993년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이곳에 방문했을 때 함께하던 추기경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십자가 언덕을 마치 예수님이 돌아가신 골고다 언덕처럼 끈질기게 잘 지켜왔기에
이 땅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영원한 미래를 가지게 된다.’
이제는 러시아에 대한 한뿐 아니라 미래를 위한 희망 때문에 결혼을 한 후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고 하며,
가는 길에는 거리의 악사도 있었고, 7분 쯤 걸어가면 어마어마한 십자가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이드는 십자가 언덕은 오래 되어서 언제 누가 왜 세웠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러시아와의
전쟁인데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를 러시아가 쳐들어왔을 때 싸운 사람들은 스웨덴이라고 한다.
한때 유럽에서 제일 강국이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끝없이 끈질기게 맞서 싸웠다고 하는데 이 나라는 2천여
개의 호수와 국토의 70%가 숲이어서 사람들은 숲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했다고 한다.
소련은 숲을 태워 버려서 전쟁이 끝났을 때 숲은 30%로 줄어들 만큼 끈질기게 항거했다고 하는데 이 때 죽은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러시아 황제의 명에 의해 장례를 치룰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대신 십자가 언덕에 세우기 시작한 것이 가장 유력한 학설이라고 하며, 이 나라 사람들은 국토가 평지이기에
‘십자가 산’이라고도 하며, 러시아인들에 대한 한 매친 곳이기도 하다.
종교는 공산당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엔 나무 십자가는 뽑거나 부셔버렸으며, 돌이나 철은 땅에 묻어
버렸지만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밤에 몰래 찾아와 복구하기를 3년간 반복했다고 한다.
그러자 러시아인들은 불도저를 가져와 언덕을 파서 물이 고일 정도로 해 놓아도 또 리투아니아 인들이 다시
복구를 계속하여 마지막 방법이 전염병이 돈다는 핑계로 KGB를 통해 못 들어오게 지켰다고 한다.
2014년도 마지막으로 추산한 통계로는 10만 5천개가 된다고 하며, 이제 한국여행도 시작한지 10여년 되어서
한글로 적힌 십자가도 눈에 띄었으며, 10분간 자유 시간을 가진 후 카우나스로 향했다.
[카우나스(Kaunas) 역사]
빌뉴스에서 서쪽 128㎞, 네무나스(네만) 강과 네리스(빌리야) 강의 합류 지점에 인구 29만 명(2017)이 되는
리투아니아의 제 2도시로 1030년 요새로 건설되었고, 1317년 시가 되었다.
1795년 제3차 폴란드 분할 때 러시아에 넘겨졌고, 1812년 나폴레옹에게 폐허가 되었다가 재건되었으며 19세기
후반 철도가 가설되면서 공업이 발달하여 1920~40년 사이 독립국이었을 때 리투아니아의 수도였다.
1940년 소련에 합병되어 제2차 대전 때 큰 피해를 입었고, 1972년 소련에 대항해 분신자살한 학생의 장례식 때
민족주의자들의 폭동이 이곳에서 일어났으며, 네만 강 수력발전소에서 동력이 공급된다.
강 합류지점에 있는 카우나스 성과 그 옆의 구시가지에는 1400년 비타우타스 교회가 있고, 1634년 성삼위일체
교회가 있으며, 1666년 세운 예수회 교회가 있는데 전 인구 369만 명 중 75%가 가톨릭 신자라고 한다.
1993년 처음으로 교황 성 요한 바오르 2세가 발트 3국을 방문했다.
도시 이름은 옛날 설화에 네로황제의 광기에 두려움을 느끼고 로마를 떠난 팔레몬 귀족이 이곳에 도착했고, 그가
죽으면서 영토를 바르쿠스, 쿠나스, 스페루스라는 아들 3명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 지역은 쿠나스가 차지했다.
그는 현재의 자리에 요새를 세웠고 마을이 성장 하면서 ‘쿠나스’라고 부른 것이 지금의 카우나스라고 한다.
참고로 팔레몬 귀족의 이름인 '팔레모나스(Palemonas)'는 카우나스 시 동쪽 끝 철도역이 있다.
[카우나스 성(Kauno pilis)]
아울리아이 십자가 언덕을 출발한지 1시간 30분 만에 카우나스 성 앞에 도착하여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는데
먼저 성 앞에 있는 말 탄 기사 이름을 인터넷에서 찾지 못해 궁금해서 물었다.
그는 어느 특정인물이 아니고 리투아니아 문장에 나오는 ‘비티스(Vytis, 추격자 뜻)’로 이 동상은 러시아에서
독립한지 100주년 기념되는 올해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리투아니아는 이 나라에서는 ‘리에투바’인데 어원은 ‘리에투스(비의 뜻)’이라고 하며, 탈린이나 리가는 해변에
있어 좀 더 화창하지만 카우나스나 빌니우스는 내륙이어서 비가 많이 오기에 나라의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역설적이게도 이 나라는 화창하면 춥고 구름이 끼면 포근하다고 한다.
1410년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독일과 구룬 발트/잘기리스(The of battle Grunwald/Zalgiris, 초록 숲 전쟁)의
전투에서 졌다면 이 나라와 유럽의 역사가 바뀔 번했다고 하는데 잘기리스는 이 나라 말이라고 한다.
중세기 때 레모나스 강이 성 앞까지 왔고, 이 작은 곳이 팽창하여 오늘날의 구 시가지가 된 것이라고 하며,
성은 독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직사각형으로 건축되었지만 지금은 다 무너지고 한 쪽 면만 남았다.
그것도 2010년에 복원하여 작은 박물관으로 사용한다고 하며, 붉은 깃발은 국가 문장기라고 하고, 러시아와
전쟁을 준비하면서 성벽을 2중으로 하기 위해 한 번 더 쌓았다고 한다.
발트 3국은 지진이나 태풍 등 자연재해가 없었지만 카우나스는 2강의 홍수 피해가 컸다고 하며, 4계절 중에
어느 계절인지 물었을 때 눈 녹는 봄이라고 했더니 정확하게 맞았다고 한다.
눈 녹은 물은 강이 얼어 물이 흐르지 못한 이유라고 하며, 그 흔적은 비타우타스 교회에서 볼 수 있다고 했다.
※네리스 강과 레모나스 강: 총길이 511㎞인 네리스 강(Neris River)은 벨로루시 민스크 북쪽에서 발원하여
카우나스에서 레모나스 강(Nemunas River)에 흡수되어 서쪽으로 흐른다.
리투아니아와 러시아 영토인 칼라닌 그라드와 리투아니아 국경을 이루며, 흐르다가 발트 만과 연해에 있는
쿠로니아 석호로 흘러 들어가 소멸되는데 리투아니아 영토를 흐르는 235㎞를 네리스 강으로 부른다.
리투아니아에서 레모나스 강(Nemunas River)이라고 부르는 이 강은 벨로루시 수도인 민스크 서남부에서
발원하는 총 길이가 937㎞인데 지도에는 네만 강(Neman River)으로 기록되어 있다.
[시청사(Kaunas Town Hall, City Hall)]
시청사로 가는 도중에 멀리 있는 건물은 ‘성 조지 순교자 성당(St. George the Martyr Church)이라고 하며,
가까이 있는 건물은 ‘성 삼위일체 성당(Church of Holy Trinity)’라고 하는 곳을 지나갔다.
시청사 광장에서 시청사를 정면을 바라보면 ‘하얀 백조’라는 별명을 더 실감할 수 있다고 했으며, 높이가 53m인
교회건물 같은 시청사는1542년 시작할 때는 1층 밖에 없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한 층씩 올라갔다고 한다.
러시아 황제가 카우나스에 왔을 때 임시숙소로 사용되면서 아름답게 치장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으며, 재판소로
사용할 때는 지하는 감옥이었고, 러시아 정교회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한때는 탄약장소로 사용하다가 1869년 시청으로 사용 되면서 시청사라고 부르게 되었고, 고딕 양식, 르네상스
양식, 바로크 양식이 어우러졌으며, 1973년 대대적인 수리를 마쳤고, 지하는 도자기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1층 웨딩홀은 결혼뿐 아니리 귀빈 행사장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시청사 광장은 중세 시대에 교역, 축제, 범죄자의 처형 등이 이뤄졌다고 한다.
시청 광장에는 1993년 9월23일에 교황 성 요한 바오르 2세가 방문했을 때 9만 명 정도가 모여 광장이 넘쳐
났다고 하며, 시청사 좌측에는 이 나라 국기가 걸려 있었다.
이 국기는 신호등의 색인 노란, 초록, 빨간색으로 순서만 다르다고 했는데 노란색은 태양을, 초록색은 이 나라의
초록빛 땅이며, 빨간색은 이 나라의 아픈 역사인 피를 뜻한다고 한다.
농담으로 노란색은 일조량이 적기 때문에 태양이 아니고 이 나라에 많이 나는 호박을 뜻한다고 했으며, 청사
우측으로 성 삼위일체 교회(Church of Holy Trinity)가 보인다.
시청사 옆의 분홍색 건물은 1722년 성 프란체스코(사비에르)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성당으로 1824년 러시아
정교회로 사용하다가 1924년에는 잠시 예수회 교회였으나 공산당이 집권한 소련에 합병되었다.
이후 기술학교로 사용하다가 1990년 다시 예수회가 주인이 되면서 1992년 대대적인 보수를 마쳤고, 이 건물은
바로크 양식이라고 하며, 앞의 큰 나무가 보리수(린덴바움)이라고 한다.
[페르쿠나스 집(House of Percunas)]
리투아니아는 독일 튜턴기사단을 잘 막아내어 유럽에서 가장 늦게 가톨릭을 받아 드린 나라인데 이 나라를
침입하기 위해 만든 명분이 ‘가톨릭을 받아 드리라’는 것이라고 한다.
1386년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는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할 때 세례를 받아 이미 기독교가 되었는데
튜턴 기사단은 침입의 명분으로 삼았던 것은 거짓이기에 진심으로 ‘가톨릭을 받아 드리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1410년 잘기리스(구룬 발트) 전투에 승리해서 기독교를 막아냈으며,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이 나라는
페이건(pagan, 이교도) 즉 물, 불, 태양 등의 자연 신을 믿는 토속적인 종교를 가졌다고 한다.
그 중에 최고의 신은 비의 나라답게 천둥의 신으로 현지 말로 ‘페르쿠나스’인데 1818년 보수 공사 때 벽안에서
이 신의 조각상이 발견되어 건물 이름이 되었고, 현재 이 조각상은 전면 상단에 있다.
가이드는 스핑크스와 비슷하다고 했지만 전혀 그런 모습은 찾을 수 없었으며, 이는 각자가 판단할 일이다.
이 건물은 옆에 있는 레모나스 강에 배가 정박하여 무역 상인들이 세금을 내고 통과했던 세무서라고 했으나
인터넷에서는 처음 한자상인들이 건설하여 1440~1532년까지 길드 연합회 건물이었다고 한다.
무역이 쇠퇴하면서 폐허가 되었고, 그 후 예수회에 팔렸으며, 9세기 말 러시아 점령 때 폴란드에서 유명한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가 구매하여 재건해서 학교 겸 드라마 극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 건물은 붉은 벽돌로 건축한 중세 건물로 고딕양식을 잘 보여주며, 현재 예수회의 소유로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박물관이며, 뒤편의 검은 건물은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제주이투 김나지자(JEZITU GIMNAZIJA)라는 학교이다.
이 학교는 초, 중, 고등학교가 같이 있는 12년제 학교라고 하며, 학교 앞 정원에는 구멍 안에 조각으로 만든 새
3마리가 머리를 내 밀고 있는 기둥도 보았으며, 1분 쯤 걸어서 비타우스 교회에 도착했다.
[비타우타스 성당(Church of Vytautas the Great)]
교회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는데 결혼을 마치고 웨딩 사진을 찍으러 온 신혼부부이었으며, 가이드가 재혼 부부
같다고 한 것은 친구도 없고, 신혼부부와 그리고 사진사 딱 3사람뿐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이드도 결혼식 후 사진작가와 3명만 웨딩 카를 타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다고 해서 숫자만 가지고는
알 수 없다는 것을 새로이 알았으며, 사진 찍는데 만 길게는 8시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탈린만 빼고 다 돌이 귀하기에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이 많다고 하며, 잘기르스 전투(1872~78)에서 이긴 사람이
비타우스 대공인데 가이드는 우리가 다녀할 남은 여행지 전부를 확장시킨 사람이라고 했다.
대공은 발트 해에서 흑해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고 했으나 리투아니아 역사에서 비타우타스의 재위는 1392~
1430년 이고, 모스크바까지 영토를 넓인 때는 1612년 ‘폴란드 연방’이라고 했으니 어느 것이 맞는지?
그리고 비타우스는 외국인을 환영해 주기 위해 네만 강가에 자기 이름으로 성당을 짓게 했으며, 지금도 결혼식도
많이 하는 성당인데 성당 서쪽 끝 하단에는 흰색으로 홍수수위를 나타내는 눈금이 있다.
네만 강의 비타우타스 다리를 건너자마자 좌측에 1400년 건설한 카우나스에서 가장 오래된 비타우타스 성당은
게디미나스와 함께 리투아니아 역사상 최고의 영웅인 비타우타스가 건축했고, 그는 트라카이 성도 완성했다.
이 교회는 여러 번 홍수의 피해를 입었고, 나폴레옹군대에 의해 소실되기도 했으며, 제정 러시아 때 폐쇄되기도
했고, 동방정교회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독일군은 창고로 사용하기도 했다.
1903년 천주교 성당으로 되돌아 왔고, 1982~84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으며, 이제는 시청사 광장의 요나스
동상과 카우나스 대성당을 보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요나스 빌에이씨스(Jonas Vileisis) 동상]
독립운동가 이자 시장이었던 ‘요나스 변호사’의 걸어가는 동상은 본래 보행자 거리인 자유 로에 있었으나 공사
중이어서 임시로 시청사 광장으로 왔지만 그는 잠시 직장으로 돌아 왔다고 한다.
1921~31년까지 요나스가 카우나스 시장이었던 시기는 1920~40년까지 잠시 독립국으로 있었던 리투아니아의
임시 수도이었기에 수도의 시장이라고 하며, 카우나스는 가장 리투아니아다운 도시라고 한다.
빌니우스는 60만 인구 중에 40%가 외국인이지만 인구 30만 명인 카우나스는 90%가 리투아니아 사람이라고
하며, 동상 바닥판에는 그의 이름과 1921~1931년 카우나스 시장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카우나스 대성당(Kaunas Cathedra)]
시청사 광장 동쪽 모서리에는 붉은 벽돌로 건축된 ‘성 베드로와 바울 성당’은 옛 이름이며, 성당 입구에는
대단이 큰 자작나무는 우리가 생각하던 기둥이 흰 나무가 아니다.
밑둥치도 검은 색이고, 위의 줄기도 검은 색이지만 일부분만 자작나무를 닮은 흰색이어서 자작나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했는데 가이드는 이렇게 된 이유는 환경 맞추어 살기 때문이라고 했다.
성당 입구 왼편에는 2018년 9월 22~25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러시아로부터 독립 100주년 되는 해를 기념하여
발트 3국을 방문 했을 때 교황이 들린 것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이 성당의 오부는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큰 고딕양식이지만 내부는 바로크 양식으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다고
하며, 1624년 성당으로 건축되었고, 1800년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성당의 길이 84m, 넓이 28m, 높이 34m인데 겉은 어설퍼도 내부는 대단한 전형적인 외빈내화(外貧內華)의
모델이며, 우리는 10분 정도의 자유 시간을 가졌는데 내부는 정말 화려해서 넉 나간 시간이 됐다.
※자작나무: 하얀 껍질을 하고 있는 자작나무의 이름은 마르지 않은 자작나무로 불을 때면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타기 때문인데 그렇게 타는 이유는 얇은 껍질에 있는 오일 성분이 있어 생나무도 잘 타기 때문이다.
얇은 껍질은 종이 대용으로 사용되며, 껍질의 오일성분 때문에 천년이 넘어도 썩지 않기에 천마총 그림이나
팔만대장경의 재료이라고 알고 있었으나 파키스탄 여행 때 룸메이트가 잘 못 알려진 것이라고 했다.
이 분은 박물관에 근무하는 분이니 믿을 수밖에 없었고, 자작나무수액은 인체수액과 비슷하며, 수액에 있는
자일리톨은 화장품의 원료이자 껌을 만드는 무가당원료로 널리 알려졌다.
러시아에서 유명한 처녀의 마지막 술이라는 보드카는 자작나무 숯이 질을 결정하며, 자작나무의 껍질 백화피는
황달, 설사, 신장염, 폐결핵, 기관지염, 편도선염, 치주염, 위염, 종기, 기침 등의 치료에 쓰인다.
껍질을 태운 재로 참기름과 개어 화상에 바르며, 껍질을 달린 물로는 암, 신경통, 류머티즘 관절염, 소화불량,
기침, 감기, 기관지 등을 고치는 만병통치약이다.
[유로파 로열 호텔(EUROPA ROYALE KAUNAS)]
호텔로 가면서 이 나라는 농구를 잘하는데 88 서울 올림픽 때 미국을 이긴 소련 팀의 선수들이 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이라고 했으며, 길 건너 유리건물이 카우나스 농구 경기장 ‘잘기리스 아레나’이라고 했다.
잘기리스(초록 숲)는 전쟁의 이름으로 농구팀 이름도 잘기리스이고, 유니폼 색깔도 초록인데 이 팀은 항상
결승전에서 붉은 색 유니폼을 입은 빌니우스 팀과 만난다고 한다.
지도엔 네만 강 섬 안에 있고, ‘잘기리오(Zalgirio) 아레나’라고 되어 있으며, 콘서트홀도 겸하고 있다.
아크로폴리스(Akropolis) 대형 백화점의 주차장을 지났는데 이 백화점 우리 호텔과 한 블록(block) 안에 있다고
하며, 1층의 대형 슈퍼마켓은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큰 회사 막시마(Maxima)가 운영한다고 한다.
막시마는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불가리아까지 진출한 회사라고 하며, 슈퍼마켓 내부 중앙에는 빙상장이 있을
정도로 크기에 가이드는 길을 잃는다고 했고, 슈퍼마켓 개장은 밤 10시이라고 한다.
백화점은 9시까지이며, 3층은 아기들의 옷과 식당이 있다고 하고, 감옥과 같이 좀 무시시한 호텔에 도착했다.
오늘 묵을 호텔은 일반 호텔과 좀 다른 것은 소련 시절 화폐도 찍어내던 인쇄공장을 개조해서 호텔로 사용하는
것으로 방도 좀 크지만 복도도 넓지만 긴 것이 흠이라고 하며, 가이드는 자기는 좋아한다고 했다.
저녁식사 후에 백화점을 가겠다면 안내해 주겠다고 하였으며, TC부터 모두가 갈 것 같이 했으나 늦은 저녁에다
중미여행에서 만났던 윤*일씨 얘기로 웃다가 아무도 가지 않았다.
※아레나(Arena): 라틴어 아레나(harena)는 모래라는 뜻으로 검투사들이 흘린 피가 잘 흡수되도록 모래를 깔은
것에서 유래했으며, 중앙을 중심으로 한 원형의 경기장이나 공연장 등을 말한다.
1만석 미만은 홀 급(Hall class), 1~2만석 규모는 아레나(Aarena class), 3만석은 슈퍼아레나(Super arena), 그 이상은
스타디움 급(Stadium class)이라고 한다.
[5일] 18년10월 21일 일요일 ●일정: 카우나스→ 트라카이[성과 박물관]→ 빌뉴스 관광[1 게디미나스 성
2 성 베드로 바울 교회 3 새벽 문 4 시청사 5 빌니우스 대학 6 대통령 궁 7 빌뉴스 대성당 8 성 안나 성당
9 호박 박물관 10 우주피스→ COMFORT(캄훠트)
[새벽 산책]
아침 7시 쯤 TC와 함께 새벽산책을 나아갔는데 온통 안개가 도시를 덮고 있어 어디로 가야할지 좀 난감했으며,
미리 가볼 곳을 찾아 놓지 않는 것이 후회가 되었지만 찾아 놓았다고 해도 오늘 같으면 소용이 없겠다.
무작정 걷다가 안개 속에 러시아 정교회 같이 생긴 건물이 보여 그래도 한건은 했다는 생각에 들었으며, 한국에
돌아와 찾아보니 천주교 성당인 ‘성 마이클 대천사 교회(St. Michael the Archangel's Church)이다.
성당 옆에는 사람이 누워 비상하는 석상이 있었고, 여기서 TC는 돌아가고 좀 다니다가 호텔로 돌아왔으며,
출발하는 9시에도 안개가 전혀 걷히지를 않아 트라카이 성을 구경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일행 한 분은 이런 경치가 너무 좋다고 했는데 카우나스는 2강에 둘러싸여 있어 안개가 많은 것으로 생각했으나
트라카이에 도착해도 여전한 것을 보고 아~ 이 나라는 2천개의 호수가 있다고 했지!
고산 윤선도의 시 하나가 생각났다.
월출산 높다 만은 미운 것이 안개로다.
천황 제일봉을 일시에 가리어라.
두어라 해 퍼진 후면 안개 아니 걷으랴.
[트라카이 성(Trakai Castle)과 박물관]
카우나스에서 1시간 달려 트라카이에 도착하여 갈베 호수로 인해 생긴 안개 속에 나무다리를 건너자 또 섬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유명한 만두 ‘키비나스(kibinas)’ 팔고 있는 할머니를 만나 2개를 사서 나누어 먹었다.
키비나스는 이곳에서 살던 타타르 족의 전통 음식인데 만두 속은 양고기, 닭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등이 있으나
우리는 돼지고기를 선택했는데 맛이 있었으며, 또 나무다리를 건너면 붉은 트라카이 성이 나온다.
아직은 안개 속이라 성의 아름다움을 느끼기는 좀 아쉽긴 했지만 제발 이곳을 떠나기 전에 걷혀주기만 바랬으며,
리투아니아 가이드이지만 러시아 사람인 따벨을 만나 성 안으로 입장했다.
13세기에는 목조 건물이었고, 14세기 백러시아까지 다스린 케스투티스(Kęstutis) 대공이 돌로 재건축하였으며,
1430년 그의 아들 비타우타스 대공이 준공하여 이곳에서 대관식을 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며칠을 남겨두고 사냥에서 낙마하여 죽었기에 애석하게도 대공으로 남았다고 했으나 인터넷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지기스문트 황제가 국왕 칭호와 함께 보낸 왕관을 폴란드의 귀족들이 탈취했다고 한다.
그래서 국왕으로 즉위하지 못했다고 되어 있으며, 본래 리투아니아 수도 ‘트라카이’는 갈베 호수 안 반도에
있었으나 두려움을 느낀 대공들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2개의 섬에 만든 궁이라고 한다.
자기 스스로 복잡하게 만든 방에 숨었기에 공작 궁이 감옥 같이 생긴 것이라고 하며, 외성에 있는 2층 박물관은
20세기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살던 가구, 동물박제, 담배와 파이프, 도장 등을 전시해 놓았다고 한다.
자유 시간에 자유롭게 보라고 했으며, 내성은 성안 마당을 지나면 높이 35m이고, 6층 규모의 천수각이 있으며,
이 건물은 방어용 기능도 있고 예배당, 생활 주거 공간도 갖추고 있고, 여러 층의 공작 궁과 연결되었다.
천수각 앞에는 당시 호수 수면이 몇 미터 높았기에 물로 2개의 섬이 나뉘어 있었던 자연 해자이었고, 이곳에
있는 모든 통로는 나무이라고 하며, 우리가 건너온 2개의 긴 다리도 중세에 있었다고 한다.
먼저 섬과 섬을 잇는 다리를 건너 성벽에 있는 철문을 지나면 또 다시 다리가 아오는데 이 다리는 유사시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만든 천수각 중앙에 있는 나무로 된 다리가 있다.
이 다리는 부산 영도다리처럼 쇠사슬을 이용해 여닫을 수 있는 도개교(跳開橋)인데 이 다리를 건너 철문을 통해
내성으로 들어가면 ‘ㅁ'자 형의 ’공작 궁‘이 나오고, 이곳 벽에 있는 계단과 회랑 통로도 모두가 나무이다.
3층으로 구성된 건물 내벽에는 회랑으로 방들을 연결해 주며, 전체 양식은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을 포함한 고딕
건축 양식으로 벽은 보수한 흔적도 보이며, 2층은 본래의 것이 많다고 한다.
17세기 모스크바 대공국과 전쟁으로 많이 파손 된 것을 1935년부터 러시아가 재건을 시작했으나 2차 대전으로
중단되었고, 1946년 종전으로 다시 시작하여 1961년 15세기 건축 양식대로 마무리했다고 한다.
이젠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으며, 이곳은 트라카이 성을 소개하는 방으로 처음 본 것은 2013년 그린 그림으로
반도 형태의 수도 성과 멀리 공작 궁의 그림으로 앞 수도 성을 지나 나무다리를 건너면 섬이다.
섬에서 다시 다리를 건너면 공작 궁인데 수도 성은 철저히 파괴되어 지금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지만 현재는
공원으로 사용되어, 축제도 열린다고 하며, 이제는 벽에 걸린 5대 공작의 설명을 들었다.
맨 좌측이 민다우가스 공작이고, 다음은 게디미나스 공작으로 수도를 빌니우스로 수도를 옮긴 사람이며, 4번째가
케스투티스 공작으로 돌로 트라카이 성을 쌓았고, 마지막이 비타우타스로 독일 기사단도 막아냈다.
그리고 트라카이 성도 완성했으며, 맨 가운데 공작은 설명하지 않았으나 알기르다스(Algirdas 재위 1345~77)
대공인데 케스투티스와 협력하여 리투아니아를 유럽에서 거대한 영토를 가진 한 나라로 만들었다.
이젠 14세기 방으로 이동했는데 이곳은 독일기사단에게 침입의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가톨릭을 받아드리고
만든 성당으로 긴 의자가 놓여 있고, 천장은 고딕식 지붕의 아취를 내부에서도 볼 수가 있다.
그림을 보기 위해 벽에 붙인 카펫트를 리투아니아에서는 고벨린(Gobelin)이라고 부른다고 했으나 프랑스에서도
똑 같이 고벨린이라고 하는데 러시아 같이 추운 곳에서는 장식과 보온효과 때문에 한다고 한다.
이곳에 있는 것은 장식용으로 붉은 옷을 입은 비타우타스가 잘기리스 전투에서 승리하고 트라카이로 돌아오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라고 하며, 이제는 15세기 방으로 이동했다.
이 방은 15세기의 무기와 생활도구 등이 진열되어 있고, 그 중 재미있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하며, 데려간 곳은
리투아니아에서 사용된 최초의 화폐(돈)인데 은을 막대모양으로 주조된 은 화폐이다.
은 막대기 하나당 108g로 당시 말 한 마리 가격이 은 막대기 2개가 필요했다고 하니 은 막대기 하나의 위력을
알 수가 있었고, 그 다음은 동전이 유통되었는데 동전과 은 막대기 옆에 비타우타스 흉상이 있다.
검은 철제의 금고는 12명이 하나씩 가지고 있는 키로 다 같이 모여 가장 긴 열쇠로 먼저 열고 뺀 다음, 다음 긴
사람이 두 번째로 여는 것을 12번해야 열수 있는 금고로 금을 보관했다고 한다.
이제는 여자 부츠가 진열된 곳에서 설명을 들었는데 신발의 주인은 16살의 여성이라고 하는데 크기가 정말 작아
당시 사람들의 키가 작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고 한다.
다음은 16세기 방으로 서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재판을 하는 관경인데 일찍이 삼권분립을
행하였다고 하며, 복장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루블린조약으로 리투아니아 왕이 폴란드의 국왕이 되었으나 리투아니아는 글자가 없어서 역사는 폴란드로
예속되었기에 대단히 강대하고 큰 영토를 지배했지만 잘 알려지지 않는 이유라고 했다.
이제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시대의 방으로 이동했으며, 이 방은 트라카이 성이 폐허로 방치되고 있을 때 집을
짓는 사람들이 돌이 귀하여 성의 돌을 가져다 지었기에 더욱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폐허된 서을 복구하는 과정을 1902~1987년까지 5단계로 구분하여 전시되어 있는데 1902~05년까지 1단계는
자료를 수집하다가 1905년 노일 전쟁으로 중단되었고, 1918년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1919년 독일의 패배로 리투아니아는 독립하여 1926년 다시 복원이 시작한 것이 2단계라고 하며,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소련이 점령하여 다시 중단됐으며, 3단계는 1940년 독일이 소련을 이 땅에서 몰아냈다.
이때 자국을 독립시켜 주는 해방군으로 착각하여 공사를 시작했으며, 1943년 소련의 승리로 다시 중단되었고,
4단계는 소련이 관광산업을 위하여 1951년에 다시 시작하여 1968년 외부는 복원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부를 채울 유물이 없어 텅텅 비어 있는 것을 당시 방문한 사람들의 증언이라고 했는데 1968년 동유럽의
'프라하의 봄'을 소련이 탄압할 때 중단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1973년부터 1987년까지 5단계는 내부를 채우는 단계이며, 1987년부터는 박물관으로 개관하여 일반사람들에게
개방하였고, 세계문화유산에 들어가려면 본래 것이 65% 이상이 현존해야 한다.
이 성은 50% 이하이어서 세계문화유산에는 들지 못했으나 잠정목록에는 들어간다고 했는데 카프카스 여행 때
조지아 쿠다이시에서 본 바그라티 성당은 지붕을 씌워서 세계문화유산이었지만 취소되는 것도 보았다.
이 방에는 복원하는 사진과 사용된 재료인 석재와 붉은 벽돌 등이 전시되었고, 복원된 사진들을 영상으로 편집한
것도 보여주고 있었으며, 여기 복원에 사용된 벽돌을 16세기 것과 똑 같이 만들어 복원했다고 한다.
옛 것처럼 만들려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가 전부 새 것을 사용했으나 세월이 흘리니 비슷해 졌다고 하며,
이제는 가이드가 이름붙인 ‘만두 방’이라고 하는 전시실로 이동했다.
이곳은 아침에 오다가가 먹은 왕 만두 키비나스는 단수인 하나일 때 부르는 이름이고, 복수인 2개부터는
키비네이라고 부른다고 했으며, 이 만두는 리투아니아가 용병으로 데려온 타타르인들 것이라고 한다.
타타르인은 키도 크고 싸움을 잘했기에 이곳에서 거주시키면서 적들이 쳐들어오면 방어도 할 수 있고, 개인
호위무사 역할도 했는데 그들은 그들만의 풍습과 문화도 가져왔으나 남은 것은 키비나스 뿐이라고 한다.
이젠 추격자라는 뜻을 가진 비티스(Vytis) 그림 앞에서 설명을 들었는데 옛날 문장에는 말의 꼬리가 내려갔으나
지금의 올라간 꼬리는 빌니우스에서 볼 수 있다고 했지만 옆에도 있었고, 이것으로 가이드의 설명은 끝냈다.
이제는 40분간 자유 시간을 가졌고, 20세기 박물관을 들어갔는데 사슴의 머리를 박제해서 벽에 장식도 하였고,
곰, 표범, 물소, 산양염소 [아이벡스(Ibex) 일명 마르코 폴로 양] 등도 박제를 해 놓았다.
그러나 표범과 곰을 통째로 머리가 붙어 있는 가죽은 인간의 잔인함을 보는 것 같아 보기가 민망했으며, 이제는
소뿔로 만든 술잔 각배(角杯)와 화약통 같은 통은 옆에 있는 담배 대를 보면 아마도 담배 잎을 넣었던 통 같다.
도장 같은 용도로 쓰였을 예쁜 모양의 조각과 이제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조각도 보았다.
식탁과 도자기 등을 보았으며, 우리와 친근한 부채도 있었고, 이제는 침대와 테이블이 있는 생활공간도 보았다.
마지막으로 성 안 전체를 보려고 혼자 올라 간 곳은 지붕 아래 있는 기념 상점이었으나 상품의 진열로 성을
내려다 볼 수 없어서 실망했으며, 산책하고도 시간이 남아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어 보았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 중간 섬에는 모야이 토템(totem) 같이 생겼지만 칼을 가진 기사인데 용도는 알 수 없었고,
아래에는 1994라는 글자는 세운 연대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식당에서 본 트라카이 성은 안개 속에 숨어있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 밖으로 나오니 안개는 간데없고, 트라카이 성이 시원하게 아니 아름답게 보였으며, 오늘
날씨가 발트 3개국 중에 최고의 날씨라고 가이드가 칭찬했는데 정말 칭찬들을 만 했다.
우리는 빌니우스로 향하지 않고 다시 성으로 향했으며, 주차할 때가 없어서 빈 곳을 찾는데 일반 가정의 마당을
빌려주고 돈을 받는 곳에서 오라고 했으나 다행히 빈 곳을 찾아 주차를 했다.
[갈베(Galve) 호수 위에 떠있는 트라카이 성]
성문 앞 선착장에서 1인당 5유로를 지불하고 25분간 타기로 했는데 물위에서 보는 성은 정말로 그림보다 더
예뻤으며, 요정들이 살고 있는 동화속의 궁전 같았고, 물만 잔잔했다면 물속에 비친 것도 보고 싶었다.
인터넷에서 보면 보통 1시간 정도 배를 타고 성을 완전히 한 바퀴 도는 여정으로 우리는 짧아서 배를 운전하는
기사가 문화센터라고 말해준 곳을 돌아 왔는데 반대편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좀 아쉽다.
한국으로 돌아와 이 아름다운 문화센터를 찾아보았는데 이 건물 뒤는 유투트라키스 티즈키에비치 마노르
공원(Uzutrakis Tyszkiewicz Manor Park)이 있는 티즈키에비치 궁전(Palace)이라고 한다.
지하실에는 티즈키에비치 가족사진이 전시되어 있고, 1층에는 객실이 있으며, 많은 콘서트와 기타 문화행사가
열린다고 하고, 이제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빌니우스로 향했다.
※타타르(Tatar): 타타르(크림, 시베리아, 카잔 등)는 중앙아시아 사막과 스텝에 살던 유목민족을 총칭했으나
10세기 경 투르크계 유목민이 러시아 남부에 유입되어 구성된 민족으로 러시아에 몽골제국을 건설했다.
14세기 이슬람 수니파로 개종하여 중앙아시아와 신장위구르에서 현재까지 믿고 있으며, 최고 통치자 칸의 가족
중에 일부는 러시아귀족이 되어 유력한 지위를 차지했는데 가이드는 키가 크다고 했으나 몽골계통이라 작다.
※트라카이 성: 14세기 초까지 리투아니아 수도의 역사를 가졌으며, 중세도시인 아름다운 ‘트라이카 성’은 갈베
(Galve) 호수 안에 있는 20개 섬 중 2개의 섬 위에 있어 동유럽, 중유럽에서 물로 둘러싸인 유일한 성이다.
수도 빌니우스와 25km 밖에 안 떨어졌기에 목조였던 성이었던 것을 1381년 대공이 된 케스투티스는 공작 성을
돌로 재건을 시작했다가 중단된 것을 1409년 대공 비타우타스가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1430년 끝냈다.
비타우타스 대공은 1410년 중세 유럽에서 가장 큰 전투에 하나였던 타넨베르그(잘기리스) 전투에서 승리하여
가장 존경 받는 인물이 되었고, 승리의 축하연회를 트라카이 성에서 7일간 화려하게 열었다.
14세기 크림반도에서 이주 해 온 타타르 족이 살던 목재 집도 있고, 그들이 먹었던 터키 음식인 고기만두와
비슷한 ‘키비나이스(Kibibnas)’도 먹어 보는 것도 관광에 하나이다.
입구 좌측은 지하 감옥이며, 성안 광장은 기사단의 축제, 음악 콘서트가 열리고, 광장에 있는 몇 개의 형틀은
관광객이 체험도 할 수 있는데 건축물들의 아랫부분과 윗부분의 색깔이 다르다.
그 이유는 1655년 스웨덴과 러시아 연합군의 침공 때 파괴된 것을 방치했다가 복원한 것이 붉은 색의 벽돌이고,
그 아랫부분은 15세기의 것이며, 1962년부터 러시아건축가들이 발굴을 시작하여 1987년에 복원을 끝냈다.
도시인구 5천 명이지만 찾는 관광객은 1년에 50만 명이며, 관광명소는 가톨릭 성당과 정교회 성당 그리고 2개의
중세 박물관이고, 남쪽 탑은 감옥으로도 사용되었으며, 높이 35m의 천수각은 방어용 기능도 있다.
그리고 예배당과 주거 공간도 갖추고 있었고, 내부의 벽 주변에 나무로 된 계단과 회랑은 통로이기도 하며,
궁전 내부로 들어가지 않고도 다양한 지원 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성의 2단계 건설구조인데 석제는 건물의 기초, 건물 상부, 탑, 벽에만 사용되었고, 나머지는 붉은 벽돌로 만든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을 포함한 고딕 양식이며,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사용되었다.
[빌뉴스(빌리우스, 빌니우스, Vilnius) 역사] 인구: 약 60만
옛 이름 빌나(Vilna)의 어원은 빌니아(빌렐네) 강으로 여겨지며, 5천 년 전 발트인들이 거주했고, 슬라브인들도
거주했으며, 11세기엔 유대인도 거주를 시작했고, 도시는 1323년 대공 게디미나스가 성을 쌓으면서 시작됐다.
리투아니아 대공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독립국 리투아니아 공화국 수도가
되었고, 인구 약 54만 중 리투아니아인 57,8%, 폴란드인 18,7%, 러시아인 13,9%, 벨라루스인 4%이다.
14세기 초 게디미나스 대공이 수도를 트라카이에서 이곳으로 이전하였고, 16세기는 동유럽의 가장 큰 도시
중의 하나로 17세기는 폴란드 황금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9세기는 중요한 유대도시가 되었다.
1991년 1월13일 리투아니아독립을 막기 위해 소련군대가 탱크와 함께 빌뉴스에 진입하여 많은 희생자를 냈다.
벨로루시 국경지대에 위치하며, 네리스 강이 흐르는 ‘대성당 광장’이 중심이고, 여러 문화가 거쳐 간 도시로
다양한 건축양식이 있으며, ‘새벽 문’으로부터 시작되는 구시가지 전체는 2009년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비록 도랑 같은 빌렐네 강(Vilnia River)이지만 빌니우스는 이 강이 어원이 되었으며, 시내 전경은 3개의 십자가
언덕, 게디미나스 성 언덕, TV타워가 좋으며, 건물들이 파스텔(화사한) 색상이다.
[게디미나스 성채 탑(Gediminas Castle Tower)]
1시 30분에 트라카이를 출발하여 25km 떨어진 빌뉴스에는 2시 10분쯤 도착하여 제일 먼저 간 곳이 이 도시가
시작된 게디미나스 성채인데 날씨 좋은 가을의 마지막 휴일이라서 그런지 트라카이부터 현지인이 많았다.
도랑처럼 보이는 빌렐네 강 끝에 놓인 다리를 건너 단풍으로 덮인 강 변 길을 조금 걸으면 게디미나스 성채로
올라가는 길이 나오는데 언덕이 무너져 1년 동안 폐쇄되었다가 올 8월7일부터 문을 열었다고 한다.
전에는 후니쿨라를 타고 올라갔으나 후니쿨라가 언제 운행할지 몰라서 걸어 올라가는데 길에 자갈이 박혀 있어
걷기가 불편했고, 제일 먼저 보이는 언덕 아래 있는 흰색 건물과 붉은 지붕으로 연결된 ‘ㄷ'자 형의 건물이다.
한국에 돌아와 찾아보니 푸른 지붕의 3층 건물은 옷과 생활물품이 전시된 ‘응용예술디자인 박물관(Museum of
Applied Arts & Design)’이며, 붉은 지붕의 건물은 돌 무기 등이 전시된 ‘고대 무기고(Old Arsenal)’이다.
오르다보면 아직도 발굴과 복구가 현재도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동쪽 빌렐네 강 너머에는 ‘3개의 십자가
언덕(Three Crosses on the Hill)‘이 보였는데 3개의 십자가는 성부, 성자, 성령을 상징한다고 한다.
지도자들은 14세기에 기독교를 받아드렸지만 카우나스의 페르쿠나스 집에서 보았던 것처럼 백성은 자연신을
믿고 있었는데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다가 가톨릭수도사 7명이 순교했다고 한다.
이 수도사를 기리기 위해 17세기에 나무로 십자가를 세웠다고 하며, 철로 된 십자가를 소련이 철거하면 독립 때
다시세운 것을 50년 전 소련 다시 철거한 것을 1989년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십자가 언덕서도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구 시가지에 더 가까운 곳에 올랐다고
하며, 언덕을 오르다가 보면 성은 다 무너지고 15세기 붉은 벽돌로 건축됐다는 3층의 성탑이 남았다.
성탑에 입장하면 발트 3국에서 볼 수 없었던 ‘발트의 길’의 지도와 사진들이 있었는데 이 성탑이 빌니우스의
시작이었기에 이곳에서 시작이기도 하고, 마지막이이기도 하며, 독립의 염원을 전 세계에 알리려고 했다.
1989년 8월 23일 독소불가침조약 50주년 되는 날 오후 7시에 탈린과 리가를 지나 빌니우스까지 620㎞를 200만
명이 손을 잡고 평화와 독립을 라디오에 맞추어 다 같이 15분 동안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 염원은 1991년 8월 20일에 이루어졌고, 세계문화유산에 기록되었으며, 이제는 옥상으로 올라가 빌니우스
시를 조망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우리의 구시가지 여행은 ‘새벽 문’이라고 했다.
빌니우스는 이 게디미나스 성에서 시작하여 남쪽 새벽 문까지 팽창한 것은 16세기라고 했으며, 마지막에 볼 것은
‘성 안나 성당’이라고 하고, 이제는 빌니우스 대성당과 공작 성 또는 궁전을 보았다.
게디미나스 성벽은 대성당과 공작 궁전을 둘러싸고 있었다고 하며, 그런데 공작 성은 2009년도 만들었기에
새 것이 표시가 난다고 하였고, 현재는 국립박물관이며, 이곳이 시내를 전망하기에 좋은 장소하고 한다.
네리스 강 북쪽은 신시가지인데 별명이 ‘리틀 상하이’이라고 하며, 서쪽엔 ‘Vilnius TV Tower’가 있었고, 이제는
새벽 문으로 가기 전 ‘성 베드로와 바울 성당’에 대한이야기를 했더니 가이드가 선뜻 갈 수 있다고 했다.
동상 뒤로 보이는 건물이 대공의 궁전이며, 현재는 국립박물관으로 사용하며, 궁전 뒤편 언덕에 게디미나스
성채가 있으며, 성채 위에는 3층으로 된 탑이 있는데 이곳이 시내를 전망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성 베드로 바울 성당(Petro ir Povilo baznycia, Peter & Paul Cathedral)]
우리는 동쪽으로 향하여 성당으로 가는 도중에 설명을 들었는데 이 성당은 18세기 러시아와 싸움에서 이겼을 때
이를 기념하고,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리투아니아 귀족 군주(장군)가 1668~74년에 건축했다고 한다.
3분 만에 도착했으며, 성당 정면(파사드) 중앙 맨 위에는 ‘성 모자 상’이 있고, 그 아래에는 바울과 베드로 동상
사이에 ‘레기나 파차스 훈다 노신 파스(REGNA PACIS FUNDA NOSIN PACE)' 글자가 있다.
이 중 PACIS는 성당을 건축한 군주의 이름으로 평화의 뜻이 있는데 그는 평화를 염원하면서 ‘평화의 여신이시여
평화 속에 우리를 보호 하소서’라고 라틴어로 적어 놓았는데 PACE도 평화의 뜻이라고 한다.
지금부터 5~10분간 자유 시간에 이태리 조각가 페레티(P. Perti)와 갈리(Galli)의 책임 아래 200여 명이 30년
동안 만든 2.000개의 흰 대리석의 조각 작품이 천장과 기둥 그리고 벽을 장식했다고 했다.
사진 촬영은 플래시는 끄고, 팸플릿은 헌금을 하고 가져올 것, 남자는 모자를 벗을 것을 듣고 입장하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으며, 그 아름다움이 유럽최고라고 찬사한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런데 대부분 조각은 흰 대리석이 아니고 룬달레 궁전처럼 스투코(회반죽)를 사용했는데 섬세하고 화려한 것은
똑 같은 이름을 가진 카우나스 대성당인 ‘성 베드로와 바울 교회’와 비슷했지만 규모가 더 크다.
제단 정면에는 베드로와 바울의 그림이 있고, 그 위 천장에 매달린 배 모양의 상들이에는 건축 때 후원한 어부
조합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 믿음의 닺’을 형상화 것이라고 인터넷에서 찾았다. 좌측에는
붉은 옷(홍포)을 입은 예수님 조각도 있고, 인터넷에서는 고난의 길(비아 돌로로사) 조각, 12제자 조각,
모든 사람이 죽는 다는 것을 표현한 해골조각도 있다고 했으나 여행 당시는 몰라서 찾아보지 못했다.
[새벽의 문(Gate of Dawn)]
이제는 6분간 차를 타고 이동했으며, 현지 가이드가 차를 놓쳐 우리끼리 관광을 해야 했는데 경찰이 물으면
‘빠밀리(가족)’를 외치라고 했고, 새벽 문부터 2시간 정도 내리막길을 걸으니 좀 편안할 것이라고 한다.
구시가지가 시작되는 ‘새벽 문’은16세기 성벽과 함께 만든 5개 성문 중에 성벽도 없이 유일하게 남았는데
맨 위에는 리투아니아 문장인 ‘비티스(Vytis, 추격자)’는 중세기 것이라서 말꼬리가 내려왔다고 한다.
그 아래 그림은 좀 희미하지만 ‘상업의 신’이라고 하며, 그의 좌측 손에는 들고 있는 돌은 이 문을 통과하면
내야하는 통행세로 그 만큼 이 도시는 돌이 귀했는데 이 돌로 성벽도 쌓고, 성당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새벽 문은 밖에서 성문이지만 안에서 보면 ‘성당’으로 1993년 교황 성 요한 바오르 2세가 십자가
언덕을 방문한 후 이 성당에도 방문했고, 올 9월22일 프란체스코 교황도 이곳을 방문했다고 한다.
빌뉴스 시민들에게 이 문은 출근길, 등굣길, 친구와 만나는 장소이지만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실제로 성호를 긋고 잠시 기도하고 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빌뉴스의 성당들]
빌니우스 인구의 80% 이상이 가톨릭 신자라고 할 만큼 신자도 많지만 성당도 ‘2집 건너 성당 하나가 있다’라고
할 만큼 많은데 구시가지만 26개의 성당이 있는 것은 종교개혁에 맞서기 위해 많이 지었다고 한다.
교회라는 명칭은 가톨릭 성당을 말하는데 이렇게 많은 성당을 유지할 수 없어 종교세를 걷는다고 하며, 종교세를
걷기 위해 먼저 신자로 등록해야 하고, 등록된 신자만이 성당에서 결혼식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신자가 아니더라도 문화와 풍속에 따라 신자로 등록하는 사람이 많아 종교세가 많이 걷히며, 그 돈으로 성당을
지원하고 있어 에스토니아나 라트비아처럼 박물관으로 사용하지 않고도 성당으로써 제 역할을 한다고 한다.
또 종교세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의 건물 유지보수도 한다고 하며, 새벽 문 주위만 5개의 성당이 있는데 동쪽에
4개 서쪽엔 1개가 있으며, 새벽 문 위에는 1671년부터 성모 마리아 상이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검은 오크나무로 조각했기에 ‘검은 마리아’라고도 불린다고 하며, 마리아 상은 이 나라 최고 미인 ‘바르보라
라드빌라이테’를 모티브로 했다고 하며, 이 성당의 본당이 ‘성 테레사 성당(St Theresa)’ 이다.
문 위의 성당은 치유의 기적이 많이 일어나고, 치유된 환자들이 은으로 만든 심장(하트)을 가져와 벽에 장식으로
붙여 놓아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하지만 위로 올라가지 않아 잘 보이지 않았으나 대답만 ‘예’ 했다.
성 테레사 성당 안쪽엔 한울타리 안에는 러시아 정교회인 성당 문은 1761년 로코코 양식으로 만들었고, 빌뉴스
성령 정교회(Orthodox Church of the Holy Spirit, Vilnius) 외에 2개의 정교회가 더 있다.
서쪽에는 성 삼위일체 통일교회(Holy Trinity Uniate Church)가 있지만 보지는 못했다.
[새벽길 따라 캐시미르 성당, 시청사, 니콜라스 성당]
새벽길은 내려가면 갈수록 더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건물들은 다 새것 같아 전혀 느낄 수가 없었고, 조금 더 가면
바로크 양식인 좌우대칭의 흰 건물은 비스부티스 유로파 로열 호일(Viesbutis Europa Royal Hoyel) 호텔이다.
그리고 성 캐시미르 성당(Church of St. Casimir) 앞에서 멈추었는데 이 성당은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폴란드
왕이 된 요가일라의 아들 카지미에라스((Kazimieras)를 기념하는 교회이라고 한다.
1601년 빌뉴스의 최초의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된 가톨릭 성당으로 가장 아름답지만 많은 수난을 격은 곳으로
17세기는 성당, 러시아와 전쟁 때는 밀가루 창고, 19세기 제정 러시아가 점령했을 때는 러시아 정교회였다.
독립 때에는 다시 성당으로 돌아왔으며, 다시 소련 공산당이 점령했을 때는 진화론에 관한 것을 전시한 무신론
박물관이었고, 1991년 독립한 후 가톨릭 성당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성당 맞은 편 길 건너 깃발이 있는 시청사(Town Hall) 건물로 향했으며, 시청사와 빌뉴스 대성당의 정면과
비슷한 이유는 폐허가 된 것을 같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복구해서 그렇다고 한다.
시청사 지붕 아래 삼각 공간에 있는 장식물인 페디먼트(pediment)는 빌뉴스의 문장이라고 한다.
이 나라 도시 문장에는 자연신을 믿었기에 자연에 관한 것이 많으나 빌뉴스는 문장은 십자가 지팡이를 짚고
아기를 업고 냇물을 건너는 성인 크리스토퍼(Christopher)라고 한다.
크리스토퍼를 문장으로 삼은 이유는 빌니우스는 종교를 받아드리고, 트라카이에서 수도를 옮긴 것 하고 시대가
딱 맞아서 문장으로 정했다고 했으나 근데 시대가 딱 맞아? 시대와는 연관성을 찾기가 모호하다.
오히려 트라카이 호수를 건너서 온 수도이라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으며, 지금은 시청사 및
여행정보를 알려주는 인포메이션(information) 센터와 미술관이 같이 있다고 한다.
빌니우스 대성당 광장이 민족의 정신과 역사의 중심지이라면 시청사 광장은 모든 생활의 중심지이라고 한다.
※성 크리스토퍼: 희랍어로 크리스토포로스(Christophoros)인데 ‘그리스도를 어깨에 메고 간다.’라는 뜻으로
전설에 그는 사람들을 어깨에 메고 강을 건너다 주는 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거인이라고 한다.
어느 날 어린 손님을 메고 물속으로 들어 갈수록 더 무거워져 강을 건널 수가 없었는데 그 아이가 말하기를 ‘난
네가 찾던 왕, 예수 그리스도이다.’이라고 했다고 하며, AD251경 시리아 안디옥(안티오크)에서 순교했다.
7월 25일이 그의 축일이고, 여행자와 운전자의 수호성인이어서 운전석 옆에 모시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고 하며,
그런데 우리는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더 잘 알고 있다.
[파차이 호텔, 성 니콜라스 정교회, 서명의 집]
시청사 광장을 벗어나면 서쪽 2층에 국기가 있는 흰 건물 파차이(PACAI) 호텔은 새벽 문 오기 전에 들렸던
성 베드로와 바울교회에 정면에 적혀 있던 평화의 뜻을 가진 파차스(PACIS)와 같은 가문이라고 한다.
이 가문은 1677년부터 시작했으나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는 가문인데 이 건물은 얼마 전에 화려하게 복원해서
5성 호텔로 사용한다고 하며, 지금은 빌니우스에서 가장 좋은 호텔에 들어간다고 했다.
이 호텔은 구시가지 중심에 있어 관광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 바로 앞 길 건너에 있는 ‘성 니콜라스 정교회(St. Nicholas Church)’는 그냥 지나가기에 얼른 TC에게
안내판에 있는 것을 부탁했더니 ‘그랜드 두크(Grand Duke) 부인 줄라나(Jullana)에 의해 1514년 새로운
고딕(Gothic) 양식과 비잔틴 양식(Byzantine style)의 요소들로 세워진 첫 번째 교회‘이라고 한다.
간판에는 니콜라스 러시아 정교회(The Russian Orthodox Church of Nicholas)라고 되어 있었으며, 이제는
건물 정면에 스그나다루 나마미(SIGNATARU NAMAVI)라고 적힌 건물은 1919년 러시아로부터 독립할 때 국기가
걸린 2층 발코니에서 서명했기에 서명의 집(The House of Signatories)인데 내년이 100주년 된다고 한다.
국기는 1년 내내 걸려있으며, 지금은 독립선언 박물관이라고 한다.
[빌니우스 대학(Vilniaus universitetas)과 성 요한교회(St. John's Church)]
바로 가면 대성당 광장이지만 대통령 궁을 보기 위해 빌니우스 대학을 끼고 돌 것이며, 스테판 바토리가 1579년
빌뉴스 대학교를 설립하여 올해가 440년 된다고 하고, 앞에 보이는 교회가 성(St. John's) 교회이다.
이 교회는 사도요한과 세례요한을 위해 만든 것으로 옆의 5층짜리 건물은 성 요한 교회의 벨 탑(Bell ower)으로
대학과 한 울타리 안에 있어 한 때는 대학교회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또한 행사도 같이 한다고 한다.
세계적인 대학은 아닌지만 이 나라 최고의 종합대학으로 국립대학인데 학생은 2만 여명이고, 교수는 2천 명이
넘으며, 우리나라 13개 대학과 1:1로 자매결연 맺어 서로 같은 수의 교환 학생이 온다고 한다.
가끔 2~3명의 학생이 입학해서 졸업까지 하는데 이 대학의 도서관 등에 중세 유적이 남아 있다고 하나 구경할 수
없었고, 벨 탑이 있는 이 거리가 빌뉴스에서 가장 부유한 거리로 전기도 제일먼저 들어왔다고 한다.
좁은 공터에 등을 들고 있는 조그마한 동상은 ‘불 키는 사람(Zibintininkas)’으로 받침대를 잡고 기도하면 램프가
희망을 이루어준다고 했는데 전에는 등이 없었으나 얼마 전부터 등을 들고 있다고 한다.
어느 건물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는데 이 건물은 러시아가 부순 것을 기억하기 위해 대학교에서 기록을 남긴
것이 직사각 안에 들어 있는 것을 가이드가 번역하기를 ‘빌니우스 대학 도서관 1570-1970’이라고 했다.
대학은 1579년 설립되었는데 도서관은 1570년 건축된 것은 대학이 설립되기 전 신학교 도서관이었기 때문이며,
1970년 러시아가 부수고 다시 지었지만 지금은 도서관이 아니나 러시아의 못된 짓을 광고한다고 한다.
[대통령 궁(Presidential Palace)]
이제는 대학로(UNIVERSITETO g) 1번지를 돌아 대통령 궁을 보기 위한 관전 포인트(Viewpoint)로 가기 위해
이탈리아 식당을 거쳤는데 이곳은 이태리 수도사를 위해 지은 이탈리아식 건물이라고 한다.
대통령 궁은 주말이면 개방을 하기에 우측에 있으나 보이지 않는 시크릿(secret) 체크포인트(검색대)를 통과하면
우리도 들어갈 수 있다고 하며, 실제로 몇 사람이 들어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당 좌측에 있는 #LT100이라는 숫자는 올해가 리투아니아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한다.
대통령 궁은 대학교 서쪽 길 건너에 있고, 중세부터 대주교들이 거주했기에 주교 궁(Bishop Palace)이라 하기도
하고, 제정러시아 시절엔 지역사령부 건물로 사용했으며, 1812년 나폴레옹이 하루 묵었다고 한다.
현재는 ‘달리아 그리바우스카이테’가 사는 대통령 궁으로 그녀는 미혼으로 2번째 연임하며, ‘철의 여인’이라고
불리며, ‘달리아(Dalia)’는 이름이고, ‘그리바우스카이테(Grybauskaite)’는 성이라고 한다.
‘그리바우스카이테’는 ‘버섯의 여자’라는 뜻이라고 하며, 리투아니아 이름엔 흰 숲, 검은 언덕, 린넨 등의 자연이
많이 들어간다고 하는데 유럽과 일본 이름이야기는 아래에 참고로 기록하기로 한다.
발트 3국 중 여성 대통령이 2분으로 달리아 그리바우스카이테 대통령은 2012년 3월25일 서울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으며, 결혼한 에스토니아 대통령 케르스티 칼유라이드(Kersti Kaljulaid)가 있다.
그녀는 2018년 2월 6일에 방한하여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고, 에스토니아가 전자강국임을 강조했다.
[유럽과 기독교 그리고 일본 이름 이야기]
1. 유럽의 이름들
유럽에도 성과 이름을 가진 역사는 200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며, 귀족들만 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요한
볼프강 폰 괴테'나 '마리 드 메데치' 등에서 볼 수 있으며, '폰'과 '드'가 성이다.
폰은 게르만 귀족, '드'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귀족, '판'은 네덜란드 귀족에 쓰였다.
천민은 직업으로 구분하며, 빵집(베커), 메츠거(정육점), 슈미트(대장장이), 뭘러(방앗간), 양복장이(슈나이더),
베컨바우어(도자기 굽는 사람), 바우어(농사꾼)이고, 목축업에는 골짜기(마우어)로 분류하여, 위 골짜기(오버
마이어), 아래 골짜기(운터 마이어)이다.
샤를레망(샤를마뉴-카알대제)대제의 이름에서 독일-카를, 프랑스-샤를, 라틴-카롤루스, 폴란드와 루마니아-
카롤, 이탈리아-카를로, 스페인-카를로스, 영어-찰스, 네덜란드-카렐 등이다.
부족의 이름으로 피에르, 한스, 헬무트, 유르겐 등이 있으며, 스웨덴에는 20만개의 성이 있으나 40%에 해당하는
사람이 끝에 슨'son'를 사용하여 요한슨'Johnson'이 가장 흔한 성이다.
2. 기독교의 이름들
성경이름이나 세례명에서도 많이 왔는데 너무 복잡하여 각 나라 별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고, 또 어느 나라
언어인지 잘 모르는 것도 있으며, 조금차이가 있는 부분도 있지만 이해가 쉽도록 정리해 본다.
[예수님의 사도(제자)들]
1. 바울: ‘작은 자’의 뜻으로 예수님이 직접 선택한 제자는 아니지만 사도로 불리며, 영어- 파울로(Paul), 존
파울로(John Paul), 독일- 요한네스 파울(Johannes Paul), 이탈리아- 파울로 (Paolo) 라틴(바티칸 공용어)-
파울루스(Paulus), 그리스- 파울로스(Paulos), 러시아- 파벨(Pavel)로 표기된다.
그 밖으로 파올리(Paoli), 파울(Paul), 파울로(Paulo), 파울루(Paulo), 파울루스(Paulus), 파울리(Pauley, Pauli,
Pauly), 폴(Paul)도 표기된다.
2. 베드로: ‘반석’의 뜻으로 영어- 피터(Peter), 러시아- 표트로(Pyotr), 포르투갈- 페드루(Pedro), tm페인-
페드로(Pedro), 독일- 페터(Peter), 페테르(Peter), 이탈리아- 페트루스(Petrus), 피에트로(Pietro), 피에로
(Piero), 프랑스- 피에르(Pier, Pierre), 그리스- 페트로스(Pertros)로 표기된다.
3. 요한: 영어- 존(John), 프랑스- 장(Jean), 네덜란드, 체크, 폴란드- 얀(Jan), 야노비치(Ivanobich), 덴마크와
노르웨이- 한스(Hans), 독일-요한(Johann), 요하네스(Johannes), 라틴- 요한네스(Johannes), 요안네스
(Joannes), 러시아- 이반(Ivan), 스웨덴- 요한(Johan), 스페인- 후안(Juan), 포르투갈- 주앙(Joao), 그리스-
이오안네스(Ioannes), 헝가리- 야노슈(J?nos)이다.
예로 미국 영화배우 존 웨인,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 핀란드 작곡가 얀 시벨리우스, 스코틀랜드 출신
영화배우 숀 코너리가 있다.
여자들 이름으로 영국- 조안(Joan), 독일- 요한나(Johanna), 프랑스- 잔느(Jeanne), 스페인- 후아니타
(Juanita), 이태리- 조안나(Joanna)라고 한다.
4. 야고보: 예수님 제자와 '주의 동생'이 있으며, 구약의 아브람의 손자 야곱도 같은 이름이다.
영어- 제임스(James), 스페인-티아고(Tiago), 하이메(Jaime), 이탈리아-자코모(Giacomo)가 있다.
파생어로 지미(Jimmy), 재클린(Jacqueline)등이 있으며, 프랑스에선 자크(Jacques)가 있다.
영어로 성 야고보(Saint James)는 지명으로 더 널리 알려졌는데 샌 디아고(San Diego)는 미국 서부
해안에 있고, 스페인에서는 산 티아고(San Tiago)라고 하는데 칠레 수도이다.
5. 안드레: ‘남자다운’ ‘씩씩한’ 뜻으로 요한의 아들이요 베드로의 형제이다.
영어- 앤드류(Andrew), 앤디(Andy), 프랑스- 앙드레(Andre), 폴란드- 안제이(Andrzej), 헝가리- 앤드라스
(Andras), 덴마트- 안데르센(Andersen)으로 표기된다.
6. 빌립: ‘말을 사랑하는 사람’ 뜻으로 빌립을 필립보라고도 하며, 예수님의 제자와 초대교회 집사가 있다.
영어- 필립(Philip), 그리스- 필리포스(Philippos), 독일- 필리프(Philippe), 라틴어- 필리푸스(Philippus),
스페인- 펠리페(Felipe), 포르투갈- 필리페(Filipe), 프랑스- 필리프(Philippe)이다.
7. 도마: ‘쌍동이’의 뜻으로 요한복음에는 ‘디두모’로 쓰여 졌으며, 예수님의 의심 많은 제자이다.
영어로 토마스(Tomas), 톰(Tom), 토미(Tommy)가 있다.
[그 밖의 성경 인명들]
1. 엘리사벳: ‘하나님은 맹세이시다’ 뜻인데 (1)세례 요한의 어머니 (2)제사장 사가랴의 아내 (3)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친족이 있는데, 영어- 엘리자베스(Elizabeth, Elisabess), 베티(Betty), 리즈(Liz), 리사
(Lisa), 엘리사(Elisa), 엘시(Elsie), 베스(Beth) 베시(Bessie)가 있고, 스페인- 이사벨(Isabel)이다.
2. 안나: ‘은혜 또는 자비’의 뜻으로 히브리어로는 ‘한나(Hannah)’인데 (1)눅 2:36-38에 나오는 안나(Anna)로
성전에서 84년간 봉사하다가 아기예수를 만나 경배하고 기뻐하였고, 신약 성경에서 가장 오래 장수하였다.
(2) 예수의 모친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는 전설에 의하면 베들레헴 사람이며, 제사장 마단의 딸로 안나는 딸
형제를 두었고, 그 중 하나는 엘리사벳의 어머니 곧 세례 요한의 할머니이다.
희랍교회에서는 4세기경부터 안나 숭배가 시작되었으며, 영어로 안나(Anne), 고앤(Ann), 낸시(Nancy),
애니(Anny), 낸(Nan), 내니(Nanny)이다.
또 안나를 성 카타리나(Saint Catherine)라고 부르는데 영어로 캐서린(Catherine), 카렌(Karen), 캐시(cathy),
케이티(Katie), 키티(Kitty)이고, 프랑스에선 카트린느(Catherine), 러시아는
예카테리나(Catherine)이다.
3. 마리아: 1.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2.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 3. 막달라 마리아 베다니의 마리아가 있고,
구약 히브리어로는 미리암(Miriam)으로 모세 누이가 있다.
영어- 메리(Mary), 애칭으로 몰리(Molly), 스페인어- 마리아(Maria), 이탈리아어로 ‘모든 이의 어머니 뜻’인
마돈나(Madonna)가 있다.
4. 수산나: ‘백합화’의 뜻으로 눅8:3에 나오며, 주께 봉사하였는데, 영어- 수잔(Susan), 수산나(Susanna),
수지(Suzy), 수(Sue), 프랑스- 수잔느(Sazanne), 스페인- 수사나(Susana)로 표기된다.
5. 미가엘: ‘하나님과 같은 사람 누구리요’라는 뜻으로 구약에 9번 나오나 유명한 사람은 없고, 천사장
미가엘(Mihael)이 널리 알려졌다.
영어- 마이클(Michael), 마이크(Mike), 믹(Mick), 미키(Mickey)가 있으며, 스페인- 미구엘(Miguel), 러시아-
미하일(Mikhail), 미카엘(Michael)로 표기된다.
6. 스데반: ‘면류관’ 뜻으로 행 6-7장에 나오며, 스데파노라고 하고,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 뽑은 7집사 중 한
사람으로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인데, 영어- 스티븐(Stephen), 라틴- 스테파누스(Stephanus), 루마니아-
슈테판 (Stefan), 세르보크로아티아- 스테판(Stefan), 폴란드- 스테판(Stefan), 헝가리- 이슈트반(Istvan)이다.
7. 요셉: ‘그는 이김 여호와가 더하시기를 바란다.’의 뜻으로 야곱의 아들과 마리아의 남편이 있으며, 영어로
조세프(Joseph)이다.
8. 유다(Judah): ‘하나님은 찬송을 받을 지어다’ 뜻인데 성경에 8명 나오며, 예수님 제자 중에 유다서를 기록한
야고보의 형제인 다대오 유다와 가롯 유다가 있고, 야곱의 4째 아들과 예수님의 동생이 있다.
유다(Judas)는 민족이나 인명으로 유대(Judea)는 땅의 지명으로 많이 사용 된다.
3. 일본 이름들
1870년대에 일본은 납세자 명단을 전국적으로 작성하다 보니 이름만 가지고는 도저히 구별이 불가능하여 성을
만들게 하였는데 갑자기 성을 만들다보니 사는 곳을 주로 성씨가 되었다.
도요다(풍전-豊田: 풍요한 밭), 마츠다(송전-松田: 소나무 밭), 고가와(소천-小川: 작은 시내), 다나카(전중-
田中: 밭 가운데), 마쓰시다(송하-松下: 소나무 아래), 다카무라(고촌-高村: 높은 마을) 등이 있다.
[빌니우스 대학 본관(bilnius university main building)]
동판에 있는 숫자는 건물이 아니고 캠퍼스 안에 있는 13개의 마당이라고 하며, 우편으로 보이는 신 고딕양식의
5층 건물에 있는 탑은 왼쪽에는 여기서 보이지 않지만 대통령 궁 앞에서는 윗부분만 보인다.
이와 비슷한 탑이 하나 더 있어 쌍 탑인데 천문대라고 하며, 탑 아래에 있는 4층 건물 창 사이에 있는 6개의
기둥에 들어가 있는 천문기구는 다 있었지만 러시아가 지배할 때 전부 가져갔다고 한다.
지금은 교수들의 연구실로 사용하며, 그 아래 작은 나무문이 대학교 본관의 정문이라고 하였고, 너무 작아
가이드도 웃었지만 우리도 웃었는데 좌측 좀 더 큰 나무문이 현재 도서관의 문이라고 한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남아 있는 중세 유적을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으며, 이 대학교는 대통령 궁보다 오래
되었기에 자부심이 크다고 했고, 길 건너가 바로 대통령 궁의 정면으로 우리는 정문 앞 광장으로 이동했다.
[시모나스 다우칸타스 광장((Simonas Daukantas Square)]
대통령 궁 앞에는 리투아니아 대표적인 역사가의 이름을 딴 시모나스 다우칸타스 광장이 있고, 궁 정면에 4개의
국기 게양대가 있었고, 좌측 1번째가 유럽연합기이며, 2번째는 리투아니아국기 이다.
3번째가 리투아니아 국가 문장기이며, 4번째는 나토연합기이고, 맨 위에 있는 깃발은 대통령이 있을 때만 걸리는
국가 문장기인데 지금은 깃발이 있으니 대통령이 계시다고 한다.
시모나스 다우칸타스 광장에도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장식을 대리석 위에 만들어 놓았는데 위 가로 글자
'LIETUVA'는 이 나라에서 부르는 국명이며, 영어 표기로가 리투아니아라고 한다.
또 L자를 공통으로 하여 아래로 ‘LAISVA(라이스바)'는 ’자유‘라는 뜻이고, 광장 끝 길 건너에 있는 웅장한 건물은
16세기 그랜드 듀시(Grand Duchy)가 소유했던 수아젤리아이 궁전(Suazeliai Palace)이라고 한다.
광장에서 3분 정도 걸으면 그랜드(Grand) 호텔이 나오고 호텔 앞길을 건너면 대성당 광장이다.
[빌뉴스 대성당(Vilnius Cathedral)]
대성당 광장에서 게디미나스 대공이 14세기에 수도를 트라카이에서 이곳으로 이전한 이유를 설명했는데 1322년
대공이 사냥을 나갔다가 들소를 쫓다가 언덕에 갇힌 들소는 대공의 화살에 죽었다고 한다.
날이 저물어 노숙을 하게 되었고, 잠에 꿈을 꾸었는데 언덕 위에서 울부짖는 늑대에게 대공은 화살을 쏘았으나
화살이 튕겨 나와 늑대는 죽지 않아서 자세히 보니 철갑을 입은 늑대였다고 한다.
그 늑대의 울음소리는 수백 마리가 우는 것 같았는데 트라카이로 돌아간 대공은 꿈의 해몽을 사제에게 부탁했고,
사제는 꿈에 보았던 자리로 수도를 옮기면 철과 같은 도시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도시의 명성은 늑대의 울음소리 같이 널리 퍼질 것이라고 하여 대공은 언덕에 본인 이름을 딴 성을 쌓게
하였고, 수도를 옮겨 도시를 건설했으며,
가이드는 그 명성은 손자 비타우타스가 이루였다고 했으나 게디미나스 대공(재위1316~41) 때 우크라이나와
드네프르 강에 이르는 백러시아(벨로루시)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이미 명성을 날렸다.
지금은 자그마한 한 나라의 수도이지만 14세기 때는 동유럽 최강의 도시로 꿈의 해몽이 맞았다고 하며, 도시
이름유래의 2개인데 하나는 늑대를 이 나라 사람들은 ‘빌카스’라고 부른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빌렐네 또는 빌니아(Vilnia)라고 부르는 강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인데 가이드는 늑대 이름을 더
생각해 달라고 하였으며, 이젠 10분의 자유 시간을 주면서 쉬던지 성당을 다녀오라고 했다.
먼저 ‘발트의 길’을 상징하는 발자국을 찾아 나섰는데 성당 입구 오른편에서 찾았고, 대성당 정면은 꼭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하게 했으며, 일반 예배 실은 조각이 없어 웅장하게 느껴졌고, 벽에는 성화로 장식되었다.
뒤에는 파이프 오르간이 있었으며, 돔 아래 성 카시미르 기도실은 조각이 많아 화려했고, 촛불을 켜 놓고 소원을
기도하는 곳을 보고 밖으로 나와 약속장소인 게디미나스 대공 동상으로 향했다.
대공 동상은 칼을 왼손으로 잡고 있으며, 그것도 손잡이가 아니라 손잡이를 벗어난 칼날을 잡고 있는 것은
‘평화를 바라는 칼‘이기 때문이라고 했으며, 동상 우측 아래는 꿈에서 보았던 철갑을 입은 늑대가 있다.
(빌니우스 대성당과 광장)
대성당은 700년간 리투아니아인들의 신앙적 중심지이자 대공이 즉위식을 거행한 역사와 정신의 중심이라고
하며, 이 역할을 해온 대성당은 빌니우스의 중요한 행사가 열리는 ‘대성당 광장’에 있다.
1387년 게디미나스의 손자이며, 리투아니아 대공과 폴란드 왕 요가일라(Jogaila)가 세웠고, 1419년 화재 후
재건축했으며, 1769년 자연재해로 파괴된 것을 18세기 말 입찰해서 다시 세웠다.
외관은 그리스신전을 닮았고, 이오니아식 기둥 위의 3명의 성인조각은 스타니슬라우스(St. Stanislaus), 헬렌(St.
Helen), 카시미르(St. Casimir)라고 하며, 성당 정면 아래에는 6명의 조각이 있다.
이름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모세, 아브라함이라고 하며, 중앙제단은 신고전주의
양식이며, 지하는 이 나라 귀족들 무덤이 있고, 리투아니아 대공들이 대관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1950년 소련지배 때 문을 닫았으며, 창고로 이용하다가 화랑과 콘서트 홀로 사용하다가 1989년 신자들에게
돌아와 현재도 미사를 드리며,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르 2세가 방문했다.
대성당 남동쪽에 이 나라 수호성인인 성 카시미르의 중요한 예배실이 있고, 갈색 대리석 기둥 사이로 들어가면
신 고전 양식과 전혀 다른 바로크 양식으로 제단 양쪽 위에는 성화와 함께 흰 조각상이 있다.
1989년 성 카시미르 유해가 빌니우스로 돌아왔고, 이곳을 방문한 교황도 이 예배 실에서 기도를 했다.
‘대성당 광장’은 1989년 8월23일 저녁 7시에 이곳에서 탈린까지 620km를 사람들이 손을 잡고, ‘발트의 길(인간
사슬)’의 출발장소이며, 15분 동안 ’자유(Laisves, 라이스베스)!'를 외치며 ‘독립의 합창’을 했던 곳이다.
‘발트의 길(Baltic Way)'은 독립열망을 전 세계에 알릴목적으로 1939년 8월23일 독.소 불가침 조약 50주년 되는
날에 있었던 비폭력 시위로 3국교회의 모든 종이 울렸으며, 2009년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광장에 붉은 벽돌이 성벽이 이었던 자리이고, 이 벽돌이 종탑으로 이어진 것은 당시 종탑은 성탑이었는데 아래
창은 포가 있었던 포탑이며, 광장 바닥은 다 회색 벽돌이지만 성벽자리는 붉은 색으로 표시했다고 한다.
[린넨(linen) 가게와 성 안나 교회(St. Anna's Church)와
성 안나 교회로 향하다가 ‘걸어서 세계 속으로’에 나왔다는 찻집(Decantus Vynine)인데 외벽 장식을 주전자와
찻잔을 박아 특이하게 장식해 놓았으며, 파란 주전자 무늬는 빌니우스의 지도가 들어 있다.
가는 길에 린넨 가계가 있었는데 린넨(linen)은 아마(亞麻)에서 추출한 섬유로 이집트에서 사용했던 인류최초의
직물이어서 호텔이나 병원에서 이불보를 보관하는 실을 린넨 룸(Room)이라고 부르는 이유라고 한다.
린넨은 쓰면 쓸수록 더 부드러워 지며, 열전도가 뛰어나 입으면 시원하다고 하며, 이 가계는 한국에도 들어가
있으며, 웹사이트도 만들어 놨다고 하고, 가격은 한국의 1/2일이라고 한다.
가계 앞 공터에는 낙엽이 아름답게 싸였으며, 길 건너에 있는 성 안나 교회와 뒤에 있는 베르나르딘 성당이
있었는데 15세기에 붉은 벽돌로 만든 건물이지만 대단히 아름답다고 했다.
성 안나 성당은 작고 아담한 사이즈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결혼하기를 원하는 장소라고 한다.
고딕양식 건축물 중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성 안나 교회는 1394년 목재로 건축했기에 1475년 소실되었고,
1495~1501년에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재건축했으며, 종탑은 19세기 고딕양식으로 건축했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하러 갈 때 이 성당에 매료되어 ‘손바닥에 얹어 파리로 가져가고 싶다’라고
했으나 패전해서 돌아갈 때는 추위로 성당기구를 땔감으로 사용하여 많이 훼손됐다고 한다.
성 안나 교회는 500년 동안 빌뉴스를 상징하는 성당이며, 이 교회는 미사를 드리고 있어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들어다 보고 있었는데 성도 한 분이 들어오라고 해서 용기를 내서 들어갔다.
외부를 그렇게 아름답다고 칭찬했으나 너무 복잡하다는 생각을 했으며, 내부도 뭘 의미하는지도 못을
뾰족하고 날카로운 나무 조각이 많아 불안한 느낌이 들었는데 교회 내부 장식으로는 처음 보는 것이다.
[호박 박물관(Amber Museum Gallery) 관람]
1998년도에 문을 연 호박박물관은 지하에 있어 입구는 볼 것이 없으며, 좁고 낮아 머리와 발을 조심하며 계단을
내려가면 입구와는 다르게 좀 넓은 공간이 나고 장식장에는 호박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호박들은 발트 해 아래에 있던 것이 비중이 물보다 작아 물 위로 떠오르는 것을 호박심마니들이 췌지한 것으로
물에 가라앉는 것은 가짜라고 했는데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호박을 넣은 항아리도 있다.
진짜 호박만한 35,000 유로짜리 호박을 들어 보고 가볍다는 것도 느껴보고, 독주에 호박알갱이를 넣어 건강에
좋은 호박 술도 먹어 보라고 했으며, 어느 것인지 모르지만 지상에 나온 지 5천년되는 호박도 있다고 한다.
이것은 이곳에 처음 거주한 발트 인이 찾은 것이라고 하며, 구멍 뚫린 호박에 막대기를 꼽아 실을 만드는 도구로
사용했고, 투명한 호박은 돋보기를 만들어 불붙이는 도구로 사용했다고 한다.
미국 서부여행 때 럭키산맥에서 송진이 돋보기 역할을 해서 산불이 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으며, 호박을
구분하는 방법은 불로 달군 바늘로 찌르면 들어가는 느낌과 송진 냄새가 난다고 한다.
또 원석끼리 비비면 열에 의해 송진 냄새가 난다고 하며, 지금은 기술이 발달해서 깜깜한 밤에 자외선 전구를
비쳐 찾는다고 하였고, 벌레가 들어간 호박은 돈 주고 살 수 없을 만큼 고가이라고 한다.
투명할수록 연대가 오래 되지 않은 것이고, 온도와 압력 그리고 혼합된 광물질에 따라 색상이 다르다고 하며,
오래되면 흰색으로 변한다고 하였고, 영어로 호박 ‘Amber’는 ‘보호하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래서 보호하라는 의미로 성인뿐 아니라 아기들에게도 해 준다고 하며, 지하 것은 판매하지 않고 전시용이며
판매는 1층에서 한다고 하였고, 지하에는 호박과 관계없는 파괴된 유적지도 함께 있었다.
지하 호박박물관에는 호박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에 철을 제련하던 유적도 같이 있었는데 불가마와 당시의
상상도가 있었으며, 이제는 게디미나스 동상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는데 혼자서 우주피스로 향했다.
[베르나르딘(Bernadins) 성당]
베르나르딘 성당의 원 이름은 ‘성 프란시스 아시시(버나딘) 로마 가톨릭 교회(St. Francis of Assisi(Bernardine)
Roman Catholic Church)’ 베르나르딘(버나딘) 성당을 튼튼하게 만든 목적이 있다고 한다.
성 안나 교회는 성을 벗어난 외각지에 있어 이 성당을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는 대신 버나딘 성당을 세웠다고
하며, 성당은 수도원과 함께 1469년 대공작과 폴란드 왕 카시미르에 의해 목축으로 건축했다.
1475년 안나 교회와 같이 소실되었으며, 15세기 고딕양식으로 건축했고, 내부 제단과 설교단은 목재 조각품으로
장식했으며, 벽은 16세기 프레스코화의 그림이 있으며, 소련지배 때 창고로 사용되기도 했다.
2001년부터 다시 성당으로 돌아왔으며, 오늘이 주일 저녁인데 베르나르딘 성당은 미사를 드리지 않았다.
베르나르딘 성당 옆에는 베르나르딘 공원이 있으며, 공원에 있는 동상은 폴란드 문호 ‘아담 미츠키에비치(1798~
1855년)’인데 이 사람은 폴란드의 유명한 시인으로 카우나스 페르쿠나스 집을 구매한 사람이다.
이 집을 재건해서 학교 겸 드라마 극장으로 사용했다는 사람이며, 그 옆에는 알 수 없는 조각들이 있다.
(교회유산 박물관, 아르칸젤로 회의 예술 센터)
호박 박물관 앞 길 건너엔 기독교회에 관한 성화나 조각 등의 유물을 전시한 교회유산박물관(Church Heritage
Museum)은 회의 및 예술 센터인 Arkangelo가 현재 기반을 두고 있는 이전 수녀원의 교회에 설립되었다.
박물관은 어린이, 청소년 및 성인을 위한 독특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주제별 여행, 퀴즈, 보물 사냥 및
생일 파티를 하며, 박물관은 매우 특별하고 잊을 수 없는 행사를 위한 완벽한 장소이다.
아르칸젤로 회의 예술 센터(Arkangelo conference and arts center)는 성화와 성물로 장식된 아늑하고 멋진
장소로 회의, 리셉션, 파티, 결혼식, 문화 등 중요한 행사하기에 이상적인 장소이다.
이 건물 중앙에는 도어 팔라다(Dore Palada) 귀금속 상점이 있으며, 길 건너 서쪽에는 교육과학기술부(Ministry
of Education, Science and Sport)가 있는데 우측 중앙에 깃발이 있다.
빌렐네 강을 건너기 전 자물통이 달린 ‘베르나르딘 틸타스(Bernardin Tiltas)’ 다리와 우주피스 다리(Bridge of
Uzupis) 사이에 '오서독스 (Orthodox 전통적) 성당’이 있다.
[우주피스(Uzupio) 방문]
2차 대전 전에는 인구 13%인 26.5만 명의 유대인이 살아 ‘북쪽 예루살렘’이라고 불렀으나 1943년 유대인
반란으로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홀로고스트)로 지금은 0.7%만 남았다고 한다.
1990년 유대인의 빈자리에 가난한 동유럽 예술인들이 들어오면서 마을에 창작과 창조의 공간을 만들었는데
구시가지와 아주 가까운 거리와 빌렐네 강으로 싸인 멋진 지역이어서 지금은 각광 받는 곳이라고 한다.
1997년 4월1일부터 단 하루만 존재하는 우주피스 공화국을 선포했고, 이날 입장하는 사람은 마을 입구인
다리에서 손에 입국도장을 찍어주며, 41개의 헌법 조항 중에 특이한 사항들만 모아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빌렐네(Vilnia) 강변에 살 권리가 있으며, 빌렐네 강은 사람 옆을 흐를 권리가 있다.
모든 사람은 실수할 권리가 있으며, 모든 사람은 게으를 권리가 있고, 개에겐 개가 될 권리가 있다.
사람에겐 행복하지 않을 권리도 있다.’라는 내용이다.
우주피스는 우주-건너편, 피스-강의 뜻으로 빌렐네 ‘강 건너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가 있으며, ‘우주피스 천사
(Angel of Uzupis)’ 까지만 보고 돌아오는 길에 성 안나 교회와 베르나르딘 성당을 들어가 봤다.
베르나르딘 공원으로 들어서니 게디미나스 성에서 봤던 ‘3개의 십자가 언덕과 게디미나스 성도 잘 보였으며,
약속 장소인 게디미나스 동상에 도착하여 길 건에 있는 관공서를 보고 호텔로 향했다.
호텔로 가다가 카라리아우스 민다우고 다리(Karaliaus Mindaugo tiltas) 좌측에 저울을 들고 있는 여신 ‘디케’
같은 동상이 보여 법원인줄 알았으나 한국에 와서 찾아보니 저울은 아니고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네오제브라 바이크 모키모 센트라스(NeoZebra Vaikų mokymo centras) 유치원이 있으니 ‘등을 든
어머니’이라고 이름을 지어보았으며, 이 건물은 기술 박물관(Energy Museum)도 있다.
서쪽엔 이탈리아 대사관(Embassy of Italy)도 있으며, 좀 더 가면 잘리아스 다리(Zalias tiltas) 좌측엔 성
아르헨젤 라파엘 교회(Church of St. Archangel Raphael)가 있다.
이젠 새벽 문 서쪽으로 1.2km 떨어진 캄훠트(COMFORT) 호텔에 도착하여 리투아니아 모든 여행을 모두
마쳤는데 6일 동안 수고하신 김수* 추기경님과는 헤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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