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양허씨(河陽許氏)
시조 허강안(許康安)은 가락국 김수로왕비 허황후(許黃后)의 33세손이다. 그는 고려 현종 때 호부낭장을 역임하고 말년에 호장(戶長)을 지낸 후 하주(河州) 자사(刺史)가 되었다. 그래서 본관을 하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다가 지명이 개칭됨에 따라 화성(花城)으로 개관하였다. 그 후 하양(河陽)으로 하고 있다.
*자사(刺史) : 고려때 외관(外官)의 하나.
중국의 지방관리. 한나라때에는 민정과 군정의 장관을 겸했으며, 수나라 당나라때는
주지사(州知事)이였음.
하양은 경상북도 경산군의 북부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고려 때에 하주, 1018년(현종 9)에 하양으로 개칭하였다. 1742년(영조 18)에 화성현이 되었다가 1895년(고종 32)에 하양군으로 바뀌었다. 1914년에 경산군에 편입되면서 하양면이 되었고 1973년에 읍으로 승격하였다.
허강안의 손자 허작린(許綽麟)은 고려에서 검교대장군을 지냈으며, 증손 허신(許愼)은 호부주사, 동정 등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개성 부윤 허귀룡(許貴龍)의 아들 허주(許周)는 우왕 때 지양주사가 되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구축했다. 조선 개국 후에는 한성부윤, 경기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허주 의 동생 허조(許稠))는 공양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조선 세종 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라 치사(致仕)했다.
허주의 아들 허성(許誠)은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예조와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예문관 대제학을 지냈다.
허조 의 아들 허후(許珝)는 문종 때 형조판서로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그는 단종 때 좌찬성이 되어 황보인, 김종서 등과 함께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이를 개탄하다가 거제도에 유배되어 죽음을 당했다.
중추원 부사 허척(許倜)의 아들 허계(許誡)는 밀양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 받았다. 그 뒤 병조참의와 경주부윤을 역임했다.
조선시대에 허부(許溥,1663 癸卯生):문과 숙종19년(1693)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허계(許誡,1663 癸卯生):문과 세조5년(1459) 식년시 정과(丁科), 허유(1749 己巳生):문과 영조50년(1774) 식년시 병과(丙科), 허평(許坪,1716 丙申生):문과 영조20년(1744) 식년시 병과(丙科), 허후(1716 丙申生):문과 세종8년(1426)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허수(許洙,1587 丁亥生):문과 광해군2년(1610) 알성시 을과(乙科), 허국(1812 壬申生):문과 순조29년(1829) 정시 을과(乙科), 허성(許誠,1382 壬戌生):문과 태종2년(1402)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허후(1382 壬戌生):문과 세종18년(1436) 중시 을과(乙科), 허보(許輔,1382 壬戌生):문과 중종11년(1516) 식년시 을과(乙科) 등 모두 39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13명, 무과 5명, 사마시 21명이다.
▲하양허씨는 2000년에 5,081가구 16,344명이 있다. 경북 경산군 하양읍 부호동, 전북 고창군. 정읍시 일원, 경북 경산시 와촌면 용전리, 전북 진안군 안천면 삼락리, 경남 합천군 일원이 집성촌이다.
▲허씨는 가락국 김수로왕비 허황후(許黃后)에서 비롯됐다. 그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인도의 한 나라)의 공주로서 16세(48년) 때 배에 석탑을 싣고 지금의 경남 창원군 능동면 용원리에 있는 부인당으로 들어와 정박을 했는데 김수로왕이 왕비로 맞이하였다.
수로왕은 10남 2녀가 있었는데 왕비가 자신이 죽은 후에 성씨를 전하지 못함을 슬퍼했다. 그래서 맏아들 김등(金登)은 김씨(金氏)로 정통을 잇게 하고, 두 아들은 황후의 뜻을 살려 허씨로 사성(賜姓)하였다. 이때부터 허씨가 시작된다. 한편 수로왕의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佛家)에 귀의하여 하동칠불(河東七佛)로 성불하였다. 경남 하동에는 지금도 칠불사(七佛寺)가 있다.
따라서 김해김씨는 부성(父姓), 허씨는 모성(母姓)을 각각 계승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두 성씨는 서로 결혼을 하지 않는다.
가락국이 신라에 망하고 그 자손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져 살면서 그 지역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양천허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은 지금의 경기 김포군 양천인 공암촌(孔岩村)에 자리를 잡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 후 고려의 태조가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할 때 군량을 보급해준 공로로 공암촌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고 촌주(村主)가 되었다.
고려 중기에 왕실의 외척으로 세력을 떨친 이자연(李子淵), 이자겸(李資謙) 등 인천이씨(仁川李氏)는 원래 허씨였다. 고려 때 허겸(許謙)이 소성백(邵城伯:邵城은 현재의 仁川)으로 있으면서 그의 선대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갔다가 천자로부터 이성(李姓)을 하사받은 일이 있어 이씨로 성을 바꾸었다. 인천이씨(仁川李氏)에서는 양산이씨(梁山李氏)가 갈라져 나왔다.
따라서 허씨, 김해김씨, 인천이씨, 양산이씨는 모두 같은 혈족이다. 종친회명을 '가락중앙종친회'를 조직해 유대를 다지고 있다.
허(許)씨는 총 32개의 본관에 인구는 2000년에 300,448명이다. ▲김해허씨(金海許氏) 37,788가구 121,031명, ▲시산허씨(時山許氏) 591가구 2,029명, ▲양천허씨(陽川許氏) 40,260가구 130,286명, ▲태인허씨(泰仁許氏) 2,070가구 6,472명, ▲경주허씨(慶州許氏) 2,199가구 6,774명, ▲광산허씨 547가구 1,669명, ▲김제허씨 238가구 672명, ▲김천허씨 179가구 536명, ▲남양허씨 184가구 525명, ▲남원허씨 204가구 710명, ▲대구허씨 90가구 270명, ▲대전허씨 38가구 127명, ▲밀양허씨 203가구 648명, ▲서산허씨 151가구 477명, ▲수원허씨 118가구 363명, ▲안동허씨 148가구 484명, ▲양구허씨 83가구 260명, ▲양주허씨(楊州許氏) 623가구 1,965명, ▲양평허씨 390가구 1,292명, ▲영천허씨 698가구 2,183명, ▲의성허씨 123가구 353명, ▲전주허씨 144가구 469명, ▲제주허씨 74가구 199명, ▲진주허씨 212가구 682명, ▲창녕허씨 114가구 354명, ▲청주허씨 584가구 1,898명, ▲한양허씨 206가구 658명, ▲함창허씨(咸昌許氏) 32가구 115명, ▲해주허씨(海州許氏) 89가구 302명이다.
첫댓글 허씨는 5본(하양허씨,김해허씨,양천허씨.태인허씨,한산허씨)인줄 알았는데 민들래 홀씨처럼 정말 본이 많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