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장 1절~24절
'인류 최초의 부부 아담과 하와'
드라마처럼 한눈에 펼쳐 보이던 창세기 1장은 곧바로 여섯째 날을 보완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는 2장으로 이어집니다. 창세기 2장은 에덴동산에서 살았던 인류의 첫 번째 부부가 지음을 받은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표현 방법 및 내용과 관련하여 창세기 2장은 1장과 상당히 다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이 1장의 내용과 어긋나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은 절대 주권을 지니신 초월적인 존재로 묘사됩니다.
반면에 2장에서는 추가적으로 하나님이 어느 곳에나 계시는 인격적인 분으로 그려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 두 가지 묘사는 서로 균형을 이룹니다. 또한 하나님의 본성을 더욱 충실하고 풍부하게 알려줍니다. 나아가 창세가 1장은 인간의 왕 적인 특성을 강조합니다. 반면에 2장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제사장의 신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1절~14절
창 2: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4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 하였으며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12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14 세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고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과정을 마치셨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1장에 대한 결론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이 '안식하셨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 사역으로 말미암아 지치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힘들이지 않고 오직 말씀만으로 모든 것을 쉽게 창조하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모티브는 창조의 목적을 넌지시 알려줍니다. 고대 근동의 여러가지 이야기들에 반영되어 있듯이 하나님이 안식하신다는 것은 성전의 개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곧 땅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땅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피조물들만을 위한 장소로서, 하나님이 땅을 지으신것이 아닙니다. 일곱째 날에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마치시니, 그치시고, 안식하시니라,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모두 하나님의 땅에 거 하신다는 기쁨이 모형에 잘 어울립니다. 땅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개념은 창세기 2장 4절~25에서 더 자세하게 발전됩니다. 또한 이 개념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것은 장차 나타날 새 예루살렘성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계 21:1~22:5에서, 요한은 자신이 환상 가운데 본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해 줍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창세기 2장 3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엿새 동안 힘써 일해야 하지만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명령의 기초를 제공해 줍니다. 한편 일곱째 날에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라는 후렴과 같은 표현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 점에 근거해서 많은 이들은 일곱째 날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고 결론짓습니다(1~3절).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기서 '내력'이라는 표제어는 창세기를 구성하는 데 사용되는 용어로서 이 책에서 모두 11번 나타납니다. 구약 성경및 외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 창세기의 이름은 '게네시스'로 표기 되었습니다. 창세기의 헬라어 이름인 히브리어 단어 '톨레도트'(세대들)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또한 이 헬라어 이름에서 '제네시스'(Genesis)라는 영어 성경의 창세기 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이것이....내력이니'라는 표현 다음에 이어지는 이 절의 나머지 부분은 거울(또는 교차 대구) 형식으로 교묘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곧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하늘'(A)과 '땅'(B)이 '창조될 때에'(C),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시던 날에'(C) '땅'(B)과 '하늘'(A)이 순서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형식은 교차 대구의 두 부분을 하나로 연결시켜줍니다. 이 구조는 창세기 2:5~25를 1:1~2:3과 조화시켜주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창 1:1~2:3에서 '하나님'(히브리어 "엘로 힘")이라는 단어는 일반명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초월적인 창조자인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 곧 여호와가 소개됩니다.
('여호와'는 영어 성경에서 전통적으로 '주'[Lord]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번역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경 본문을 읽을 때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오면, 이 단어를 '아도나이'[나의 주]로 바꾸어 읽었던 오랜 전통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단락 전체에서 '여호와' 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것은 하나님이 지니신 인격적이며 관계적인 성품을 강조합니다. 영어 성경들이 '여호와' 라는 단어를 '주'(Lord)로 번역하는 선례는 70인역의 번역자들이 '여호와' 라는 단어를 헬라어 '퀴리오스'('주')로 번역한 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히브리어의 '여호와' 대신에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퀴리오스'라는 용어를 자주 인용했습니다(4절).
'여호와 하나님 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이 절들에서 하나님이 사람 또는 남자를 창조하신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특별히 1:26~30에 언급된 사람의 창조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여기서 주요 행위는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것입니다. 5~6절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땅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묘사해 줍니다. 여기서 '땅'이라는 단어는 땅 전체, 마른 땅, 또는 어떤 특정한 지역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 땅의 위치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땅에 아직 비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땅은 마른 상태에 있었고, 들에는 아직 나무와 풀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이 지음을 받기 직전의 상태였습니다. 땅을 일구고 물을 줄 마른 땅에 식물이 자라게 하려면 이와 같이 해야 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초목과 채소가 자라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때)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여기서 지으시고(7절)라는 동사는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특별한 형태의 토기를 빚어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7절에서 사용된 '아담'(사람)과 '아다미'(땅)라는 히브리어 단어들은 사람과 땅이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줍니다.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이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나타내게 하시려고 여기서 하나님은 사람의 코에 (신체적, 정신적, 영적인) '생명의 숨'(생기)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래서 사람은 '생명'(생명체)이 되었습니다. 생명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네패쉬 하야')는 창세기 1:20~24 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 절들에서 이 용어는 바다와 땅에 사는 생물을 뜻합니다.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 공통점을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하나님은 단지 사람에게만 왕과 제사장의 신분을 주셨습니다(5~7절).
하나님은 '동방의'(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만드셔서, 사람을 위해서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십니다. 에덴은 '즐거움' 또는 '기쁨'을 뜻합니다. 이 이름은 동산 자체보다도 훨씬 더 넓은 지역을 가리킬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여기서 동산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명사 '간'은 왕실 정원과 비슷하다고 이해한 것에 근거해서 70인역에서 헬라어 명사 '파라데이소스'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헬라어 명사로부터 영어의 'paradise'라는 단어가 유래되었습니다.
동산은 매우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가 그 정원에서 자라고 있었다는 것이 이 사실을 입증해줍니다. 이것은 창 3:6의 아이러니한 장면을 미리 엿보게 합니다. 그런데 온갖 나무들 가운데서 두 가지 나무, 곧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특별히 언급됩니다(2:9). 이 나무들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창 2~3장 특별히 3장에서 소개되는 이 나무들의 역할로부터 이 나무들에 대한 이해를 이끌어내야 합니다(8~9절).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에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개의 강을 이루었습니다. 이 표현은 에덴동산이 중심을 이루는 곳에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에덴동산이 정확히 어느 곳에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힛데겔'(티그리스) 강과 '유브라데'(유프라테스) 강은 메스포티아 지역 주변을 흐르고 있습니다. 반면에 '비손'과 '기혼' 강과 '하윌라'와 '구스'가 어느 곳에 위치해 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습니다. '금'과 '호마노'가 언급되는 것은 그 땅의 지하자원이 풍부했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줍니다. 이귀금속은 나중에 성막과 성전을 짓는데 사용되기도 합니다(10~14절).
15절~25절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에덴의 전체 모습은 커다란 정원과 같으며 하나님의 성소의 일부라는 점을 암시해줍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어', 그 동산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십니다. 경작하다(히, '아바드')는 '돌보다' 또는 '섬기다'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지키다'(히 '쇠마르')는 '보호하다'를 뜻합니다. 이 명령은 아담이 죄를 짓기에 앞서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노동이 죄의 결과로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또한 노동은 멀리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생산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미리 계획하신 선한목적 가운데 일부입니다. 나중에 이 두 히브리어 단어들은 제사상들과 레위인들이 성막에서 일하는 것을 묘사하는 데 사용됩니다.
인간의 역할은 다른 피조물을 섬기고 돌보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지키는 것입니다. 제사장으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성전의 일부로서 동산의 거룩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하나님은 아담에게 돌보고 지키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피조물을 가꾸고 섬기고 보호해야 하는 책임을 포함하여 사람에게 지도자의 역할이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이 역할은 아담이 자신의 아내 하와(참조, 창 2:18-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 ['그에게 알맞은 짝'])에 대해서도 지도자의 책임을 지니고 있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15~16절).
'한 가지 나무를 제외하고', 하나님은 너그럽게도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와 열매를 사람이 먹게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 나무의 열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이해되었습니다. (1) 성적인 지각, (2) 도덕적인 분별력, (3) 도덕적인 책임, 또는 (4) 도덕적인 경험 등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 네 견해들 가운데서 마지막 견해가 가장 그럴듯합니다. 곧 자신들의 순종 또는 불순종을 통해서 최초의 부부는 선과 악을 경험으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잠 1:7)을 통해 인간은 지혜를 얻습니다. 반면에 여호와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인간은 자신이 죄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네가 먹는 날'이라는 표현은 반드시 먹게 된다는 것보다는 만약 먹을 경우에는 확실히 죽게 된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반드시 죽으리라'(17절) 이 죽음은 어떤 죽음을 가리키는가? 신체적인 죽음, 아니면 영적인 죽음을 뜻하는가? 또는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하는가? 히브리어 단어는 이 개념들 모두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앞으로 펼쳐지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8~30에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과 더불어, 많은 신학자들은 창세기 2:16~17에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언약이라고 불릴 수 있는지 논의했습니다. 새로운 아담과 같은 인물, 곧 아담은 언약의 대표자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에서 언급된 언약들이 단지 구속의 영역에만 한정된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구절은 없습니다. 언약이라는 용어는 서로의 인격적인 신뢰 관계에 근거해서 단순히 관련된 두 대상이 서로 어떤 것을 약속하는 것을 묘사합니다. 만약 언약이 상대방이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경우에는 그것에 대한 책임이 뒤따릅니다. 이 절에서 사람(아담)은 온 인류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이 언약을 받습니다.
창세기 2:16~17에서 '네가'는 단수입니다. 이 표현은 바울이 인류의 머리로서 아담을 언급하는 것에 대해서 기초를 제공해줍니다. 곧 고전 15:22에서 아담은 그리스도와 평행을 이루는 인물로 소개됩니다(참조, 롬 5:12~19). 하지만 창 3:1~5에서 '너희'는 복수입니다. 이 단락에서 여자의 말은 하나님의 명령이 자신에게도 해당된다고 이해했다는것을 입증해줍니다. 따라서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후손은 모두 하나님의 형벌을 받습니다. 아담과 마찬가지로 아담의 후손은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죄와 절망을 물려받습니다(창 4장). (17절)
'좋지 아니 하니',라는 표현은 1:32에 '심히 좋았더라'와 대조됩니다. 분명히 지금의 상황은 심히 좋았더라의 상태에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지으리라'는 표현은 고전 11:9에 언급된 바울의 설명을 지지해 줍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모든 들짐승을 아담에게 데려오셨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자기에게 알맞은 '돕는 배필'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돕는 자'(히, '에제르')란 '도움을 받는 대상'이 갖고 있지 않거나 부족한 영역에 꼭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는 존재입니다. 이 용어는 돕는 자가 도움을 받는 자보다 더 강하거나 약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대상에게 적합하다는 것은 그 대상과 똑같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내는 남편의 복제 인간이 아니라 남편을 보완해주는 사람입니다(18절).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을 통해서 아담은 다른 모든 피조물에 대해 자기의 권위를 드러냅니다(20절).
모든 생물들 가운데서 아담에게 알맞은 짝을 찾을 수 없자, 하나님은 아담에게서 취한 갈비뼈로 여자를 지으십니다. 이 두 젊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됨의 의미를 강조합니다. 아담은 기뻐하며 이렇게 외칩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 라"(23절) 이 용어는 다른 곳에서 혈육을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하와가 지음을 받은 이야기는 결혼이 모든 인간관계에서 가장 밀접한 것이라는 점을 드러내줍니다. 또한 하나님이 아담을 위해서 두 세 명이 아니라 오직 한 사람의 하와이 지으셨다는 점을 간파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서 두세 명의 하와들이나 또는 하와를 위해서 또 다른 아담을 지으시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한 남자와 한 여자로 이루어지는 혼인 제도를 세우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결혼하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가장 밀접한 혈육 관계가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이 관계에는 의무가 뒤따릅니다. 이 의무는 심지어 부모에 대한 책임보다 앞서는 것입니다('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3절).
고대 이스라엘에서 아들들이 결혼하면 그들은 멀리 이사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부모의 거주지 근처에서 살다가 아버지의 땅을 물려받았습니다. 부모의 행복보다도 아내의 행복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의미에서 결혼한 아들들은 부모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결)합하다' (히, '다바크')라는 용어는 다른 곳에서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따라서 성경의 다른 본문들은 결혼을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위해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은 히브리어에서 남자(히, '아쉬')와 여자(히, '이솨')를 뜻하는 단어들의 언어유회에서도 반영되어 있습니다(23~24절).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창 2:18~25에서, 마지막 절은 천진무구한 기쁨의 상태를 묘사해 줍니다. 또한 최초의 부부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전개되는 것을 이해하게 해줍니다. 이 부부가 벌거벗은 상태에 있었다는 주제는 창3:7~11에서 곧 다시 다뤄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절에서 '벌거벗은' (히, '아루밈')과 3:1의 '간교한'(히, '아룸')은 히브리어에서 발음이 서로 비슷합니다. 이것은 2:18~25에서 소개되는 말씀의 마지막을 곧바로 전개되는 상황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25절).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
1) 결혼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축복이다
고전 7:36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2) 결혼은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고전 7: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16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3) 결혼은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엡 5: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창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를지로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아들들이 결혼하면, 그들은 멀리 이사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부모의 거주지 근처에서 살다가, 아버지의 땅을 물려받았다. 부모의 행복보다도 아내의 행복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의미에서, 결혼한 아들들은 부모를 떠났다.
엄마의 따스함을 경험하지 못했던 결핍은, 자기 곁에 하나님이 놓아주신 여자 이브를 통해 충족될 수 있었다. 엄마를 떠난 모든 성인은, 그래서 그토록 자기 짝을 찾는가 보다. 인간은 어려서도 커서도 서로의 살을 비비고 느끼며 훈훈하게 살고 싶어 한다.
성서의 이 기록은 메시지이기도 하다. 지금 나와 연을 맺고 있는 배우자는 나의 몸이어야 한다는 것. 그만큼 소중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너무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는 말기를. 어떤 이유일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살다가 배우자를 잃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한다. 독신주의자도 있다. 그래도 지금 내 옆에 배우자나 연인이 있다면 한 몸처럼 아끼라는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바울도 창 2:23~24를 연결시켜서 결혼과 언약에 대해 신실하게 지키는 것으로 사용했다. (고전 6:16~17) 따라서 성경의 다른 본문들은 결혼을 '언약'이라 부른다(잠 2:17; 말 2:14). 엡 5:25~32에서 바울의 가르침은 창 2:24에 기초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위해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은 히브리어에서 남자 '이쉬'와 여자 '이솨'를 뜻하는 단어들이 언어유회에서도 반영되어 있다. 창 2:24는 한 남자가 자신의 부모를 떠나서 한 여자와 결합하면 그 두 사람은 한 몸, 곧 하나됨을 이루다고 말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하나됨을 이루는 절정은 성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창 1:27과 2:24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예수님은 결혼에 대해 말씀하신다.
마 19: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5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결혼의 3대 원리
1) 부모로부터의 독립
막 10: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더라
2) 두 인격체의 결합
고전 11: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3) 온전한 사랑의 합일
잠 5:15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16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17 그 물로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18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19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엡 5: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