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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도 밤도, 하늘도 땅도, 어둠도 빛도, 지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단 하나(ONE), 혹은 브라흐마이자 품스(Pumis) (영)이고 프라드하나 (조잡한 물질)인 그것(THAT)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없었다;” (베다. “비쉬누 푸라나 주석”); 혹은 글자 그대로: “하나의 프라드하니카(Pradhanika) 브라흐마 영: 그것(THAT)이 있었다.” “프라드하니카 브라흐마 영”은 물라프라크리티이고 파라브라흐맘이다.
비쉬누 푸라나에서, 파라사라가 그의 제자인 마이트레야에게 말한다: — “나는 탁월한 무니, 그대에게 이렇게 여섯 창조를 설명하였다. . . 아르박스로타스(Arvâksrotas) 존재들의 창조가 일곱 번째였고, 인간의 창조였다.” 그리고 나서 그가 계속해서 주석가들이 다양하게 해석한 두 가지 추가적인 매우 신비스러운 창조에 대하여 말한다.
오리게네스가 그의 반대자인 셀수스가 쓴 책에 대하여 논평하면서—신중한 교부들이 모두 파괴한 책들—분명하게 그의 반대자의 반대에 답하고 동시에 그의 체계를 드러낸다. 이것은 분명히 칠중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통기, 별 혹은 행성의 발생, 소리와 색의 발생, 모두가 대답으로 비꼬았고, 더 나은 것이 없었다. 보다시피 셀수스는 “그의 학식을 자랑하고 싶어서” 일곱 개 문이 있는 창조의 사다리에 대하여 말하고, 그 꼭대기에 여덟 번째가 영원히 닫힌 채 있다. 페르시아인의 미트라(Mithras) 신비가 설명되고 “게다가 음악적인 이유들이 추가된다.” . . . 그리고 이것들에다가 그가 다시 “음악적인 고려사항과 연결된 두 번째 설명을 덧붙이려고 한다”[1] — 즉 일곱 음계, 별들의 일곱 영 등등.
발렌티누스는 위대한 일곱(Seven)의 힘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며, 그들은 그 이름이 일곱 글자로 구성된 형언할 수 없는 존재(Ineffable) 혹은 아르헤토스(Arrhetos)가 첫 번째 헤브도마드(hebdomad)를 나타낸 후에 이 우주를 낳기 위하여 호출되었다. 이 이름 (아르헤토스)은 하나(로고스)의 칠중 성질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티마이오스”에서 (p. 121) 프로클루스가 말한다: “여신 레아(Rhea)는 모나드(Monad), 듀아드(Duad) 그리고 헵타드(Heptad)로,” 그녀 속에 모든 타이탄들(Titanidae)을 포함하며, “그들은 일곱이다.”
일곱 창조는 거의 모든 푸라나에서 발견된다. 그것들 모두는 윌슨이 “비분리적 원리(indiscrete Principle)”로 번역한 것이 선행되며, 이것은 감각의 대상과의 관계가 무엇이건 독립적인 절대적 영이다. 그것들은—
(1) 마하따뜨바(Mahattattwa), 보편 혼(Universal Soul), 무한한 지성, 혹은 신성한 마인드(Divine Mind);
(2) 부타(Bhuta) 혹은 부타사르가(Bhutasarga), 엘리멘탈 창조, 보편의 비분리적 질료의 최초 분화;
(3) 인드리야(Indriya) 혹은 아인드리야카(Aindriyaka), 유기적 진화. “이 셋이 푸라크리타 창조이고, 비분리적 원리가 선행하는 비분리적 성질의 계발이다”;
(4) 묵기야(Mukhya), 지각 가능한 사물들의 근본적인 진화는 활기 없는 체들의 진화이다;[2]
(5) 타이리아교냐(Tairyagyonya), 혹은 티리약스로타스(Tiryaksrotas)는 동물들의 창조이다;
(6) 우르드와스로타스(Urdhwasrotas), 혹은 신성들의 창조[3] (?);
(7) 아르박스로타스(Arvaksrotas)는 인간의 진화이다. (비쉬누 푸라나 참조.)
이것이 대중 문헌에서 주어진 순서이다. 비의 가르침에 따르면, 1차 일곱 “창조”와, 2차 일곱 “창조”가 있다; 전자는 하나의 원인 없는(causeless) 힘에서 스스로 진화하는 거대한 힘들이다; 후자는 이미 분화된 신성한 원소들로부터 발산하는 현현된 우주를 보여준다.
비의적으로 그리고 대중적으로, 위에 열거된 모든 창조는, 브라흐마의 “낮(Day)” 혹은 “시대(Age)” 후이건, 진화의 일곱 기간을 나타낸다. 이것은 오컬트 철학의 탁월한 가르침이지만, 오컬트 철학은 “1차(primary) 창조에 대하여” 결코 “창조(creation)”라는 단어나 심지어 진화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 모든 힘들을 “원인 없는 거대한 힘의 측면들(aspects of the Causeless Forces)”로 부른다. 성서에서 일곱 기간들이 창조의 6일과 일곱 번째 휴식일로 축소되었으며, 서구 사람들은 그것을 글자 그대로 고수한다. 힌두 철학에서, 활동적인 창조자가 신들의 세계, 미분화된 모든 원소들의 씨앗과 미래 감각들의 기초를 만들었을 때 (간단히 말하면, 본체의 세계), 우주는 “브라흐마의 낮” 동안, 즉 4,320,000,000년 동안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 이것이 활동적인 진화의 여섯 기간 후에 따라오는 동양 철학의 “안식일” 혹은 일곱 번째 수동적인 기간이다. 사타파타 브라흐마나에서 “브라흐마” (중성), 모든 원인들의 절대적 원인이 신들을 발산한다. (내재하는 성질을 통해서) 신들을 발산한 후에, 그 작업이 중단된다. 마누의 서 1권에서 말하길, “매일 밤 (프랄라야)이 끝나면, 잠자던 브라흐마가 깨어나고, 그리고 운동 에너지만을 통해서 자신으로부터 그 본질적에서 존재하는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영을 발산하게 만든다.”
카발라의 창조의 서, 세페르 제지라(Sepher Jezirah)에서, 저자가 마누의 말씀을 분명히 반복한다. 그 속에서 신성한 질료(Divine Substance)가 절대적이고 무궁한 영원부터 홀로 존재하여 온 것으로 그리고 자체인 영에서 발산하여 나온 것으로 나타내어진다. “하나(One)는 살아 있는 신의 영(Spirit)이다, 영원히 사는 그의 이름에 축복이 있기를! 목소리(Voice), 영(Spirit) 그리고 말씀(Word), 이것이 성령이다.” (세페르 제지라, 1장, 미쉬나 IX.) 그리고 이것이 교부들이 버릇없게 의인화시킨 카발라의 추상적 삼위일체이다. 이 삼중 하나(ONE)에서 전체 우주가 발산하였다. 먼저 하나로부터 둘 혹은 창조적 엘리멘트, 공기가 발산하였다; 그리고 셋, 물이 공기로부터 나왔다; 에테르 혹은 불이 신비한 넷, 아르바-일(Arba-il)을 완성한다. 동양의 가르침에서 불이 첫째 엘리멘트이다—(그것이 모든 것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를 통합하는 에테르이다.
비쉬누 푸라나에서, 전체 일곱 기간이 주어졌고, “영-혼(Spirit-Soul)”의 점진적 진화와 물질 (혹은 원리)의 일곱 형태의 점진적 진화가 보인다. 여기서 그것들을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독자가 푸라나들 중에 하나를 숙독할 것을 권한다.
“R. 예후다가 시작했고, 이렇게 쓰였다: “엘로힘이 말했다: 물 가운데, 하늘이 있으라. . . . 성스러운 분이 . . . . 세계를 창조했을 때, 그(그들)는 위에 일곱 하늘을 창조하였다. 그는 아래에 일곱 지구(땅), 일곱 바다, 일곱 날, 일곱 강, 일곱 주, 일곱 해, 일곱 번 그리고 세계가 . . . 모든 밀레니엄의 일곱 번째였던 7천년을 창조하였다. 그래서 여기 아래에 일곱 지구(땅)가 있고, 그것들은 위에 있는 것들을 제외하고 모두 거주하였고, 그것들은 . . . 아래에. 그리고 . . . 각각 지구 사이에, 하늘이 서로 사이에 펼쳐 있다. . . . 그리고 그것들(이 지구들) 속에 서로 다르게 보이는 피조물들이 있다. . . 그러나 그대가 반대하며 세계의 모든 아이들이 아담으로부터 나왔다고 말한다면, 그렇지 않다. . . . 그리고 하위 지구들, 그것들은 어디서 왔을까? 그것들은 지구의 체인에서 오고, 아래 하늘에서 온다.” 등등.[4]
그노시스파가 진정한 비의적 의미를 매우 신중하게 베일로 가리면서 똑 같은 체계를 가르쳤다는 것이 이레네우스가 우리의 증인이다 (그리고 매우 꺼리는 증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베일로 가리는 것”이 비쉬누 푸라나와 다른 것들의 베일과 동일하다. 이렇게 이레네우스는 마르코시안에 대하여 쓴다: “그들은 먼저 사원소, 불, 물, 흙 그리고 공기가 위에 있는 1차 테트라(tetrad)의 이미지로 만들어졌고, 그리고 그것들의 작용, 즉 열기, 냉기, 건조 그리고 습기를 추가한다면, 오그도아드(ogdoad)와 정확히 닮은 것이 제시된다고 주장한다.” (B. i. 17장.)
단지 이런 “닮음”과 오그도아드 자체는 하나의 눈가림이다. 마치 비쉬누 푸라나의 일곱 창조에서, 두 개의 창조가 더 추가되고 아누그라하(Anugraha)로 부르는 여덟 번째가 “선함과 어둠의 특질을 소유한다”는 것은 푸라나 사상이라기 보다 상기아 사상처럼. 왜냐하면 이레네우스가 다시 이렇게 (b. i. 30장. 6) 말하기 때문이다: “그들 (그노시스파)은 선하고 악한, 신성하고 인간적인 비슷한 여덟 번째 창조를 가졌다. 그들은 인간이 여덟 번째 날에 형성되었다고 확언한다. 그들은 종종 인간이 여섯 번째 날에 만들어졌다고 확인하고, 다른 곳에서는 여덟 번째 날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만약 인간의 지상 부분이 여섯 번째 날에 형성되고 그의 육체 부분이(?) 여덟 번째 날에 형성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두 가지가 그들에 의해서 구분되는 것이다.”
그것들이 그렇게 “구분되었다”, 그러나 이레네우수가 제시한대로 그렇게 구분되지 않았다. 그노시스파는 하늘에 상위의 헤브도마드와 열위의 헤브도마드를 가졌다; 그리고 세 번째 지상의 헤브도마드가 물질계에 있다. 이야오(Iao), 오리게네스 차트에서 제시되었듯이, 달의 섭정자(Regent)이자 신비 신으로 이 상위 “일곱 하늘”의[5] 우두머리였고, 그래서 달의 피트리들의 우두머리와 동일하며, 그들이 그 이름을 달의 디얀-초한에게 준 것이다. “그들은 이 일곱 하늘이 지성적이라고 확언하며, 그것들을 천사들이 있는 것으로 말한다”고 이레네우스가 쓰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이야오(Iao)를 헤브도마스로 부르며, 그의 어머니를 “오그도아스(Ogdoas)”로 부른다. 왜냐하면 그가 설명하듯이 “그녀는 플레로마의 첫째로 낳은 1차 오그도아드의 수를 보존하기 때문이다.” (b. i, 5장 2)
이 “첫째로 낳은 오그도아드”가 (a) 신통기에서 두 번째 로고스였고 (현현된) 왜냐하면 그가 칠중의 첫 번째 로고스(Seven-fold first Logos)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는 이 현현계에서 여덟 번째이다; 그리고 (b) 천체 숭배에서, 그것은 태양, 마르딴다(Marttanda)이다—아디티의 여덟 번째 아들로, 그녀가 그녀의 일곱 아들들, 행성들을 지키는 반면에 그것은 물리친다. 왜냐하면 고대인들은 태양을 결코 행성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중심의 고정된 별(Star)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이 일곱 행성이 아닌 일곱 광선의 하나(Seven-rayed one), 아그니, 태양 등등에서 태어난 두 번째 헤브도마드로, 수리야의 형제들이며, 그의 아들들이 아닌, 일곱 행성들이다. 이 아스트랄(Astral) 신들은 그 우두머리가 그노시스의 일다바오스로[6]—일다(Ilda) “아이,” 그리고 바오스(Baoth) “알”에서 온—소피아(지혜)의 딸인 소피아 아카모스(Sophia Achamoth)의 아들이며, 그의 영역이 플레로마이고, 그의 (일다바오스) 아들들이었다. 그는 자신으로부터 이 여섯 별의 영을 만든다: 죠부(Jove) (여호와), 사바오스(Sabaoth), 아도나이(Adonai), 엘로이(Eloi), 오스라이오스(Osraios), 아스타파이오스(Astaphaios)[7] 그리고 두 번째 혹은 열위의 헤브도마드가 바로 그들이다. 세 번째에 대하여, 그것은 첫째 헤브도마드가 투사한, 달의 신들의 그림자들, 원초의 일곱 인간으로 구성된다. 이것에서 그노시스파는 그것을 베일로 가렸다는 것을 제외하고 비의 가르침과 많이 다르지 않는다. 여섯 번째 날에 창조되는 인간과 여덟 번째 날에 창조된 인간에 관하여, “이교도들”의 진정한 가르침을 분명히 모르는 이레네우스가 한 비난에 대하여, 이것은 내면의 인간의 신비와 관련 있다. 독자가 2권을 읽고, 비의 가르침의 인간기원론을 잘 이해한 후에만, 그것이 이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일다바오스는 마누의 복사판이다. 마누가 자랑한다. “오, 두 번 태어난 인간들 중에 최고! 저 남성 비라즈(Viraj)가 . . . 자발적으로 만든, 이 모든 세계의 창조자, 내(마누)가 그라는 것을 알아라.” (I., 33절) 그가 먼저 존재의 열 주들(ten lords), 프라자파티(Prajapatis)를 창조하며, 36절에서도 말하듯이, 프라자파티가 “일곱의 다른 마누들을 만든다.” (“마누의 법전”) 일다바오스도 마찬가지로 한다: “나는 아버지이고 신이며, 그래서 내 위에는 아무도 없다”고 그가 외친다. 그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하면서 그를 차갑게 가라앉힌다: “일다바오스, 거짓말하지 마라, 왜냐하면 만물의 아버지, 최초 인간(Anthropos)이 그대 위에 있으며, 그리고 최초 인간의 아들(Son of Anthropos)도 마찬가지이다.” (이레네우수, b. i, 30장, 6절) 이것이 (첫째에서 태어난 일곱에다가) 셋의 로고스가 있었다는 훌륭한 증거이고, 이들 중에 하나가 태양로고스이다. 그러면 일다바오스 보다 훨씬 더 높은 “인간(Anthropos)“은 누구였나? 그노시스 기록들만이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다. 피시티스 소피아에서 네 모음의 이름 IEOY 가 각각의 경우에 “원초의(Primal) 혹은 최초 인간(First man)”이라는 형용사를 수반한다. 이것은 그노시스가 우리의 고대 가르침의 메아리였다는 것을 다시 보여준다. 파라브라흠, 브라흠 그리고 마누 (최초로 사고하는 인간)에 대응하는 이름들은 단모음, 세 모음 그리고 일곱 모음의 소리로 구성된다. 그 철학이 다른 것보다 확실히 더 피타고라스 학파 철학인 마르코가 일곱 하늘이 일곱 (천사) 하이어라키들의 일곱 이름들을 발음할 때 각각의 모음 하나를 소리내는 일곱 하늘이 그에게 준 계시를 말한다.
영이 우주의 일곱 원리의 가장 미세한 원자에 스며들었을 때, 그러면 2차 창조가 위에서 말한 휴식 기간 후에 시작된다.
“창조자들(엘로힘)이 두 번째 ‘시간’에 인간의 형상을 대략 그린다”고 랍비 시미온이 말한다 (유대인의 낮과 밤). ”낯에는 12시간이 있고, 이 시간 동안에 창조가 이루어진다”고 미쉬나가 말한다. “낯의 12시간”은 축소된 복사판으로, 원초의 지혜의 희미하지만 충실한 메아리이다. 그것들은 신들의 12,000 신성년처럼, 주기적인 블라인드이다. 모든 “브라흐마의 낮”은 14마누가 있고, 유대인 카발리스트들은 칼데아인들을 따라서 “12시간”으로 가장하였다.[8]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의 낮과 밤(Nuctameron)도 같은 것이다. 카발리스트들은 “12면체가 완전한 정육면체 속에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이것의 신비적 의미는 영이 물질 속으로 들어가는 12가지 위대한 변형이 (12,000 신성년) 첫 번째 마하유가 혹은 네 가지 위대한 시대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초-인간으로 시작해서, 그것이 대우주와 인간의 물질적 순전히 인간적 성질에서 끝난다. 동양 철학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영적 물질적 진화의 선을 따라서 흐르는 인간의 여러 해들의 숫자를 제시할 수 있다. 반면에 서양의 과학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1차 창조는 빛(영)의 창조로 부른다; 그리고 2차 창조—어둠(물질)의 창조.[9] 둘 다 창세기 1장 v. 2와 2장 시작에서 보인다. 첫째가 스스로 태어난 신들 (엘로힘)의 발산이다; 둘째가 물질 성질의 발산이다.
이것이 조하르에서 이렇게 말한 이유이다: —“오, 동료들이여, 동료들이여, 발산으로서 인간은 남성과 여성이었다; 그리고 아버지 측면이자 어머니 측면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말씀들의 의미이다: —그리고 엘로힘이 말했다: ‘빛이 있으라 그리고 빛이 있었다!’ . . . 그리고 이것이 ‘두 겹의(two-fold) 인간’이다.’” 게다가 우리 계의 빛은 상위계에서 어둠이다.
“아버지 측면에 있는 남성과 여성” (영)은 1차 창조를 말한다; 그리고 어머니 측면 (물질)은 2차 창조이다. 두 겹의 인간은 아담 카드몬, 남성과 여성의 추상적 원형이자 분화된 엘로힘이다. 인간이 디얀 초한에서 나오고, 볼 수 있듯이, 망명 중인 신, “추락 천사(Fallen Angel)”이다.
인도에서 이런 창조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I.) 마하트-타뜨바 창조—왜냐하면 그것은 마하트, “의식적 지성적인 신성한 마인드(Mind)”가 되어야 하는 그것이 원초에 스스로 진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의적으로 “보편혼의 영(spirit of the Universal soul).” . . “고행자들중에 가장 훌륭한 고행자, 그 잠재성 (그 원인의 잠재성)을 통해서; 만들어진 모든 원인은 그것의 적절한 성질을 얻는다.” (비쉬누 푸라나) “모든 존재들의 잠재성이 그것 (브라흐마)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만 이해되고, 그것은 추론, 창조 등등을 넘어서 있다는 것을 보면서, 그런 잠재성은 브라흐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이 현현보다 앞선다. “최초가 마하트(Mahat)였다”고 링가 푸라나가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그것)는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라,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적으로 이 현현은 “지고의 하나(Supreme One)” (오히려 영원한 원인의 자연적인 결과)의 작업이다; 혹은 주석가가 말하듯이, 그러면 브라흐마가, 마하트, 활동적 지성 혹은 지고자의 작동하는 의지와 동일시되면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비의 철학은 그것을 “작동하는 법(operating law)”으로 표현한다.
세 가지 베단타 종파들—아드바이타, 드와이타 그리고 비시쉬타드바이타—사이에 있는 불화의 사과가 달려 있는 것이 바로 브라흐마나와 푸라나 속에 있는 이 가르침에 대한 올바로 이해이다. 아드바이타가 올바르게 주장하길, 절대적 전체로써 파라브라흐맘은 현현된 세계와 아무 관계를 갖지 않으면서—무한자는 유한자와 어떤 연결 관계가 없다—의지하거나 창조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브라흐마, 마하트, 이쉬와라 혹은 창조적 힘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건, 창조신과 만물은 단순히 상상하는 사람들의 개념 속에 있는 파라브라흐맘의 환영적 측면이다; 반면에 다른 파들은 초월적 (비인격적) 대원인을 창조자 혹은 이쉬와라와 동일시한다.
하지만 바이쉬마나들에게, 마하트 (혹은 마하-붓디)는 활동적 작용 속에 있는 신성한 마인드로, 혹은 아낙사고라스가 말하듯이, “질서정연하게 배치하는 마인드로, 그것은 만물들의 원인이었다.”
윌슨은 페니키아인의 모트(Mot) 혹은 무트(Mut) 사이의 암시적인 연결 관계를 보았고, 이것은 이집트인에게 여성—여신 마우트(Mout), “어머니(Mother)”—으로, 그것은 “마하트처럼,” 그가 말하길, “영과 물질의 혼합의 최초 산물이자, 창조의 최초 기초였다: ”그 영과의 합일에서 모트(Mot)가 나왔다 . . . . 그의 씨앗에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창조되었다”고 브럭커가 반복한다 (I., 240)—그것에 한층 더 물질적인 의인화의 색채를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르침의 비의적 의미가 원초 창조를 다루는 고대 산스크리트 본문 바로 그 표면에 있는 모든 외적인 문장을 통해서 보인다. “지고의 혼, 만물에 스며드는 (사르바가) 세계의 질료, 물질 (푸라크리티)과 영 (푸루샤) 속으로 들어가서 (이끌려서), 변이 원리와 불변의 원리를 휘저었으며, 창조의 계절 (만반타라)이 오고 있다.”[10] . . .
비의 가르침에서 디얀 초한은 신성한 지성 혹은 원초 마인드의 집합적 총합이고, 최초 마누들—“마인드에서 태어난” 일곱의 영적 대지성들—이 이들과 동일하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관-세-음”—스탠저 III에서 “일곱이 있는 황금 용(golden Dragon)”—은 원초의 로고스 혹은 브라흐마, 최초 현현된 창조 권능이다; 그리고 디야니-에너지는 마누들 혹은 집단적으로 마누-스와이얌부바이다. 게다가 “마누들”과 “마하트” 사이에 직접 연결관계를 보기 쉽다. 마누(Manu)는 어근 만(man), “생각하다”에서 나온다; 그리고 사고는 마인드에서 나온다. 그것은 우주론에서 성운 이전(pre-nebular) 기간이다.
(II.) “두 번째 창조,” “부타(Bhuta)”는 기초 원리들 (탄마트라)의 창조였고, 그래서 엘리멘탈 창조로 불리다. (부타-사르가)[11] 그것은 우주 이전 엘리멘트들 혹은 물질의 분화의 최초 호흡의 기간이다. 부타디(Bhutadi)는 글자 그대로 “엘리멘트들의 기원”이고, 원초의 “아카샤” (카오스 혹은 진공) 속에 있는 그 엘리멘트들의 분화 혹은 “창조”—부타-사르가—를 선행한다.[12] 비쉬누 푸라나에서 자아중심성(Egotism)으로 번역되지만, 오히려 번역할 수 없는 용어인 “나는 있음(I-am-ness)”, “마하트” 혹은 신성한 마인드에서 최초로 나온 그것, 아한카라(Ahankara)의 삼중 측면을 따라서 진행되고 그리고 그것에 속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아-상태의 최초의 그림자 같은 윤곽이다. 왜냐하면 “순수한” 아한카라가 “격정적(passionate)”으로 되어 결국에는 “기초적(rudimental)”으로 (시초의) 되기 때문이다; 비의 학파에서는 우리의 환영계이자 무지계를 제외하고 어떤 것이 “무의식적”이라는 사상을 거부하지만, 그것은 모든 무의식적 존재처럼 의식적 존재의 기원이다. 두 번째 창조 단계에서, 마누들의 두 번째 하이어라키, 형태 (루파)의 기원인 데바들 혹은 디얀 초한들이 출현한다: 치트라시칸디나 (밝은 깃장식을 한 존재) 혹은 릭샤—(큰곰자리의) 일곱 별의 생명을 불어넣는 혼들이 된 그 리쉬들.[13] 천문학과 우주론 언어로 이 창조는 원자들이 라야에서 나올 때, 혼돈 단계 후에,[14] 불-안개(Fire-Mist) 기간, 우주적 생명의 첫 단계를 말한다.
(III.) 세 번째 (인드리야)는 “나(I)”에 대한 개념 (“아함”에서 온 “나(I)”,) 아한카라의 변형된 형태로, 유기적 창조 혹은 감각들의 창조이다. (아인드리야카) “이 세 가지가 푸라크리타 창조로, 비분리적 원리가 선행된 비분리적 성질의 (분리의) 계발이다.” 여기서 “선행된”이라는 구절이 붓디로 “시작하는”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붓디는 분리적(별개의) 혹은 비분리적 양이 아니라, 대우주 속처럼 인간 속에서 둘의 성질에 함께 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단위—환영계에 있는 인간 모나드—로 아한카라의 세 가지 형태로부터 일단 자유롭게 되어 지상의 마나스로부터 해방될 때, 붓디가 지속 기간과 확장 속에서 진실로 지속되는 어떤 양으로 된다. 왜냐하면 붓디는 영원하고 불멸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세 번째 창조는 “선함의 특질이 풍부하며, 우르드바스로타스(Urdhvasrotas)로 불렸다; 그리고 두 세 페이지 뒤에서 우르드바스로타스 창조를 “여섯 번째 창조 . . . 신성들의 창조”로 언급되었다. (p. 75) 이것은 일반인이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하여 이전 만반타라 뿐만 아니라 나중 만반타라가 의도적으로 혼란스럽게 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인다. 이것을 동양학자들이 “불일지”이자 “모순”이라고 부른다.[15]
불멸자들의 “창조,” “데바-사르가(Deva-Sarga)”가 첫 번째 시리즈의 마지막이고, 보편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즉, 일반적으로 진화를 말하는 것이지, 구체적으로 우리의 만반타라가 아니다; 그러나 후자는 그것이 몇 가지 구분되는 칼파들을 말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반복해서 똑같이 시작한다. 왜냐하면 “과거 (파드마) 칼파가 끝날 무렵에 신성한 브라흐마가 밤 잠에서 깨어났고 우주가 텅 빈 것을 보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브라흐마가 객관계에서 첫 세 가지 창조를 반복하면서, 진화의 2차 단계에서 “일곱 창조”를 다시 한번 반복하는 것을 보여준다.
(IV.) 묵기야(Mukhya), 네 가지 창조 시리즈를 시작하는 1차(Primary) 창조. 윌슨이 번역한 “무생물(inanimate)”의 여러 체 혹은 움직일 수 없는(immovable) 사물들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산스크리트 용어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주지 못한다. 비의 철학이 어떤 원자이건 그것이 무생물(inorganic)이라는 생각을 거부하는 유일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통 힌두교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윌슨 자신도 말한다 (그의 전집, 3권, p. 381): “모든 힌두 체계는 식물체가 생명을 부여 받았다고 여긴다 . . .” 그러므로 차라차라(Charachara) 혹은 동의어 스타바라(sthavara)와 잔가마(jangama)는 “생물과 무생물,” “지각있는 존재” 그리고 “무의식적” 혹은 “의식적 그리고 무의식의 존재들” 등등으로 부정확하게 표현된 것이다. 나무들이 혼을 가지고 있다고 간주되기 때문에, “이동할 수 있는(locomotive) 그리고 고정된(fixed)”이라는 용어가 더 나을 것이다. 묵기야는 식물계의 유기적 진화 혹은 창조이다. 이 2차 시기에, 이 세계에서 세 등급의 엘리멘탈계가 진화되며, 그것은 브라흐마 활동의 1차 시기 동안 세 가지 푸라크리티 창조에 순서상 거꾸로 상응한다. 그 기간 동안에 비쉬누 푸라나에서 말한다: “첫 번째 창조는 마하트(대지성)의 창조였고, 두 번째는 탄마트라 (기초 원리들)의 창조, 그리고 세 번째는 감각들 (아인드리야카)의 창조였다”; 이것에서 엘리멘탈 힘의 순서는 이렇다: (1) 발생하는 힘 센터 (지성적 그리고 물리적); (2) 기초 원리—말하자면 신경의 힘; 그리고 (3) 발생하는 통각(apperception)으로, 특히 세 번째 등급의 엘리멘탈 속에서 계발된 하위 왕국의 마하트이다; 이것들 다음으로 객관적 광물계가 오고, 이것 속에서 그 통각이 전적으로 잠재하고 있으며, 식물 속에서만 다시 계발해야 한다. 그래서 묵기야 “창조”는 세 가지 하위 왕국과 세 가지 상위 왕국 사이의 중간 지점으로, 이것이 지구처럼 대우주의 비의적 일곱 왕국을 나타낸다.
(V.) 티리약스로타스(Tiryaksrotas)—혹은 타이리야교니야(Tairyagyonya)—창조,[16] “신성한 동물”의 창조는 지구에서만 동물 창조에 상응한다. 1차 창조에서 “동물”이 의미하는 것은 지구상에 있는 어떤 민감한 식물들 속에서 그리고 희미하게 추적 가능하고 원생생물[17] 속에서 한층 더 구분되는 그것, 깨어나는 의식 혹은 통각의 씨앗이다. 우리 구체에서, 첫째 라운드 동안에, 동물 “창조”가 인간의 창조보다 선행한다. 반면에 네 번째 라운드에서 포유류가 인간에서 진화하여 나온다—물질계에서: 첫 번째 라운드에 동물 원자들이 인간의 육체 형태의 응집력 속으로 이끌려 들어온다; 반면에 네 번째 라운드에 삶 기간 동안 계발된 자성적인 조건에 따라서 그 반대가 일어난다. 그리고 이것이 혼의 이주(metempsychosis)이다. (“5년간의 신지학”에 있는 “광물 모나드,” p. 276 참조.) 대중적으로 “창조”라고 부르는 이 다섯 번째 진화 단계를 1차 기간과 2차 기간 속에서 볼 수 있다. 하나는 영적 우주적, 다른 것은 물질적 지상의 기간으로. 그것이 일곱 계에서 생명의 현현에 관한한, 아치바이오시스(Archibiosis) 혹은 생명-기원이다. 바로 이 진화 기간에 비의 철학 언어로 “거대한 대숨결(GREAT BREATH)”이라고 부르는 그것, 절대적으로 영원한 보편 운동 혹은 진동이, 원초의 최초 현현된 원자 속에서 분화시킨다. 물질 과학과 화학이 발전할수록, 점점 더 이 오컬트 금언이 지식의 세계에서 그 확증을 찾는다: 심지어 가장 단순한 물질 원소도 성질에서 동일하고 질료 입자 혹은 분자 속에 있는 원자들의 분포의 다양성 때문에만 혹은 그 원자의 진동 방식 때문에만 서로 다르다는 과학적인 가설이 매일 점점 더 확증을 얻는다.
이렇게 생명의 원초의 씨앗의 분화가 1차 창조에서 존재의 하이어라키 혹은 세 번째 그룹의 디얀 초한의 진화보다 선행하기 때문에, 그 신들이 형태로 (그들의 최초 에테르 형태로 구체화되기) 될 수 있기 전에, 동물 창조가 똑 같은 이유로 지상에서 신성한 인간보다 선행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푸라나에서 찾은 이유이다: “다섯 번째 창조는 동물 창조였다, 그리고—
(VI). 우르드바스로타스(Urdhvasrotas) 창조, 혹은 신성의 창조. (비쉬누 푸라나, 1권, 1장.) 그러나 이 (신성)은 단순히 첫째 인종의 원형, 부드러운 뼈를 가진 “마인드에서 태어난” 자손의 아버지들이다.[18] 이들이 바로 “땀에서 태어난(Sweat-born)”—2권에서 설명된 표현—진화자들(Evolvers)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여섯째 “창조”가 따라왔고, 일반적인 창조가 다음으로 끝난다—
(VII.) 아르박스로타스(Arvaksrotas) 존재들의 진화가 일곱 번째였고, 인간의 창조였다. (비쉬누 푸라나, 1권.)
언급된 “여덟 번째 창조”는 창조가 전혀 아니다; 그것은 블라인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전히 멘탈 과정을 말하기 때문이다: “아홉 번째” 창조의 인식이며, 그것은 다음으로 어떤 결과로, 1차 (프라크리타) 창조에서 “창조”였던 그것을 2차 속에서 현현하는 것이다.[19] 그러면 여덟 번째, 아누그라하(Anugraha)로 불렸는데—프라티야야사르가(Pratyayasarga) 혹은 카리카 5권 46절 146페이지에서 설명된 상기야의 지성적 창조—비의적 측면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그 창조이고” 그리고 “우리가 유기적 창조와 대조해서 지성적 동의를 하는 (아누그라하) 창조이다.” 그것은 우리가 “신들(gods)”의 전체 영역과 갖는 그리고 특히—소위 “아홉 번째 창조”로 부르는—쿠마라들(Kumaras)과 우리가 갖는 관계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으로 그것은 사실상 우리 만반타라 (바이바스바타)에서 여섯 번째의 측면 혹은 반영이다. “쿠마라 창조인 아홉 번째 창조가 있으며, 그것은 1차이자 2차 창조이다”라고 그런 문헌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비쉬누 푸라나에서 말한다.[20] 비의적 본문에서 설명하길, “쿠마라들은 지고한 원리에서 바로 유래된 디야니들로, 인류의 진보를 위해서 바이바스바타 마누 기간에 재출현한다.”[21] 비쉬누 푸라나의 주석가가 “이 성자들(sages)은 브라흐마 만큼이나 오래 산다; 그리고 그들의 세대가 바라하(Varaha) 칼파 혹은 파드마 칼파 (2차)에서 매우 공통적으로 그리고 일관성 없게 소개되었지만, 그들은 첫 번째 칼파에서 브라흐마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고 말함으로써 그것을 확언한다. 이렇게 쿠마라들은 대중적으로 “브라흐마의 마인드에서 태어난 어떤 다른 아들들의 창조, 그리고 브라흐마에 의한, 시바 한 형태, 즉 니라로히타(Nilalohita) 혹은 루드라의 창조”이다. 그러나 비의 가르침에서, 그들은 육체 인간 속에 있는 진정한 영적 자아의 조상들—상위 프라자파티—이다. 반면에 피트리들(Pitris), 혹은 하위 프라자파티는 “그들의 이미지로” 만들어진 그의 육체 형태의 유형 혹은 모형의 아버지들에 불과하다. 넷이 (종종 다섯) 대중적인 문헌들 속에서 자유롭게 언급되며, 셋의 쿠마라는 비밀이다.[22] (2권 “추락 천사”에서 말한 것과 비교해 보라.)
대중적으로 언급하는 넷은: 사나트-쿠마라, 사난다, 사나카 그리고 사나타나; 그리고 비의적 셋은: 사나(Sana), 카필라 그리고 사나트-수자타(Sanat-sujata). 이 등급의 디얀 초한들에게 다시 한번 특별한 주의를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1권에서 암시된 유전과 발생의 신비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네 등급의 천사 존재들; 스탠저 VII 주석 참조.) 2권에서는 신성한 하이어라키에서 그들의 위상을 설명한다. 한편, 대중 문헌에서 그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보자.
그것들은 많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행간을 읽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이 용어를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다른 푸라나들에 의지해야 한다”고 윌슨이 말한다. 그는 그가 “어둠의 천사(Angels of Darkness),” 그의 교회의 신화 같은 “거대한 적”이 있는 곳에 있다는 것을 단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신성들이 자손을 창조하기를 거부하면서[23] (그리고 이렇게 브라흐마에 반항하면서), 첫째의 이름이 암시하듯이, 언제나 소년들, 즉 쿠마라(Kumatas)들로 남아있었다는 것만 궁리한다: 즉, 언제나 순수하고 죄 없는, 그래서 그들의 창조가 “쿠마라”라고 불린다. (1권, 5장, 비쉬누 푸라나.) 하지만 푸라나가 약간 더 많은 빛을 줄 수 있다. “그가 태어났을 때처럼 언제나 그렇듯이, 그는 여기서 젊은이(youth)로 불린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사나트-쿠마라로 잘 알려져 있다.” (링가 푸라나. 이전 부분 LXX. 174.) 사이바 푸라나에서, 쿠마라들은 요기들로 항상 묘사된다. 쿠르마 푸라나는 그들을 열거한 후에 말한다: “이 다섯은, 오 브라만들이여, 요기들로, 격정으로부터 완전한 면제를 얻었다.” 그들은 다섯이다. 왜냐하면 쿠마나들 중에 둘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거대한 일곱 구분의 디얀 초한들 혹은 데바들 중에서, 인류가 쿠마라들보다 더 관련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그들을 경솔하게 추락 천사로 비하시켰으며, 이제는 그들을 “사탄”으로 그리고 악마로 부른다; 그리고 창조하길 거부한 이 천상의 거주자들 중에서, 대천사 미카엘—용을 정복하는 지상의 성 조지 이름과 성 미카엘의 두 가지 이름으로 동서양 교회의 가장 위대한 후원자 성인—에게 가장 두드러진 자리들 중에 하나가 허락되었다. (2권, “성스러운 용과 그 살육자들.”)
쿠마라들, 브라흐마-루드라 (혹은 시바)의 “마인드에서 태어난 아들들” 상위의 영적 지각의 계발과 내면의 영원한 인간의 성장을 언제나 방해하는 인간의 격정들과 육체 감각들의 으르렁거리는 끔찍한 파괴자로 신비적으로,[24]시바의 자손, 마하 요기(Maha Yogi), 인도의 모든 신비가들과 요기들의 위대한 후원자이다. 그들 자신이 “동정의-고행자(Virgin-Ascetics)”이기 때문에 물질 존재인 인간을 창조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이 기독교인의 대천사 미카엘, 아포피스 용(Dragon Apophis)의 “동정의 투사(Virgin Combatant),” 그 용의 희생자는 불멸의 영(Spirit)에 너무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는 모든 혼으로, 그노시스파가 보여주었듯이, 쿠마라처럼 창조하길 거부한 그 천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지 의심받을 수 있다. (2권, “신비한 용과 그 살육자들” 참조.) . . . 유대인의 후원 천사가 새턴(Saturn) (시바 혹은 루드라)을 주재하고 그리고 사바스(Sabbath)가 새턴의 날이 아닌가? 그가 그의 아버지 (새턴)와 똑 같은 본질이라고 보여주고, “시간의 아들(Son of Time),” 크로노스(Kronos) 혹은 칼라(Kala) (시간), 브라흐마 (비쉬누와 시바)의 형태로 불리지 않았는가? 그리고 큰 낫과 모래시계를 가진 그리스인들의 “옛날(Old Time)”이 카발리스트들의 “옛날부터 계신 분(Ancient of Days)”과 동일하지 않은가? 후자의 “고대인(Ancient)”은 힌두의 “옛날부터 있던 분,” 브라흐마 (그의 삼중 형태로), 그 이름이 또한 “사나트(Sanat)” 고대인(Ancient)과 동일하지 않은가? 모든 쿠마라는 사나트(Sanat)와 사나(Sana)의 접두사를 가진다; 그리고 사나이샤라(Sanaischara)는 새턴(Saturn), 사니(Sani)와 사라(Sarra) 행성, 이집트에서 그의 비서가 토트-헤르메스(Thot-Hermes) 첫째였던 새턴(Saturn) 왕이다. 그들은 행성과 신(시바)과 동일시되고, 그들은 다음으로 새턴의 원형을 보여주며, 새턴은 벨(Bel), 바알(Baal), 시바(Siva) 그리고 여호와 사바오트(Jehovah Sabbaoth)로, 그 얼굴의 천사가 미카엘 (“신과 같은”
)이다. 대니엘이 말하듯이 (5장 21절), 그는 유대인의 수호 천사이자 후원자이다; 그리고 쿠마라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이 쿠마라들을 악마이자 추락 천사로 비하시키기 전에, 로마 카톨릭 교회가 원시 그리스 교회에서 분리와 단절이후 오컬트 경향의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임자들이자 선구자들인 그리스의 오파이트파는 미카엘을 반항하고 적대하는 영, 오피오모르포스(Ophiomorphos)와 동일시하였다. 이것은 오피스(Ophis)—신성한 대지혜 혹은 크리스토스(Christos)—의 (상징적으로) 반대측면에 불과하다. 탈무드에서, 미카엘은 “물의 왕자”이고 일곱 영들의 우두머리이다. 비쉬누 주석에 따르면, 그의 원형 (많은 다른 것들 중에서) 사나트-수자타(Sanat-Sujata)—쿠마라들의 우두머리—가 암밤시(Ambhamsi), “바다(Waters)”로 불리는 것과 똑 같은 이유로. 왜? 왜냐하면 “바다”는 “거대한 심연(Great Deep)”, 공간의 원초의 바다 혹은 카오스의 또 다른 이름이고, 또한 “어머니”, 암바(Amba)를 의미하며, 보이는 우주의 천상의 처녀-어머니(Celestial Virgin-Mother), 아디티와 아카샤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범람의 바다(Waters of the flood)”는 “거대한 용(Great Dragon)” 혹은 오피스(Ophis), 오피오-모르포스(Ophio-Morphos)로 불린다.
루드라들은 2권 스탠저에 첨부된 상징에서 “불-영(Fire-Spirits)”의 칠중의 성격 속에서 주목될 것이다. 거기서 태초 형태와 후대 형태의 십자가 (3 + 4)를 검토할 것이고, 비교 목적으로 피타고라스의 수를 유대 도량형과 나란히 사용할 것이다. 자연의 근원의 수로서 칠(7)이라는 수의 엄청난 중요성이 이렇게 명백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기원전 수 천 년에 이집트에서 존재하였고, 그노시스 기록에서 다루었듯이, 우리는 그것을 베다와 칼데아 관점에서 조사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기본 수로서 그것의 중요성이 물질 과학에서 어떻게 인식하게 되었는지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고대시대 내내 숫자 칠(7)에 붙여진 중요성이 교양 없는 사제들의 공상 때문이 아니라, 자연 법칙에 대한 심오한 지식 때문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할 것이다.
[1] 오리게네스의 “셀수스에 반박하여(Contra Celsum),” b, vi, 22장.
[2] 본문에서 말한다: “그리고 네 번째 창조는 여기서 1차(primary) 창조이다. 왜냐하면 움직일 수 없는 사물들이 1차 창조라고 강력하게 알려지기 때문이다.” (피츠에드워드 홀의 정정 참조.)
[3] 어떻게 신성이 동물 다음에 창조될 수 있을까? “동물”이라는 표현의 비의적 의미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 생명의 씨앗이다. 인간을 희생적인 동물로 부르며, 신에게 희생하는 동물 창조 중에서 유일한 동물이다. 더구나 “신성한 동물”은 이미 언급했듯이 성전에서 황도대 12궁을 종종 의미한다.
[4] 마이어(Myer)의 카발라, 415~416페이지.
[5] 단지 지구의 “하늘(Heavens)” 혹은 영(Spirits)보다 우수한.
[6] “아이시스 언베일드” 2권, 183페이지.
[7] 킹의 그노시스파 참조. 다른 파는 여호와를 일다바오스 자신으로 간주하였다. 킹은 그를 새턴(Saturn)과 동일시한다.
[8] 하지만 다른 곳에서 정체성이 드러난다. 이븐-가비롤과 그의 일곱 하늘, 일곱 지구 등등에서 인용한 위 참조.
[9] 이것을 우주 이전 “암흑(Darkness)” 즉 신성한 전체(Divine all)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10] 그리스인의 누스(nous)는 (영적 혹은 신성한) 마인드 혹은 멘즈(mens), “마하트”로 물질에 똑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물질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휘젓는다:
“내면의 영이 지탱하고, 그 부분을 스며드는 마인드가,
전체를 흔들고 거대한 뼈대와 섞인다.”— 베르길리우수, 아에네이드(Aeneid) 6. 726-7
페니키아 우주론에서도, “자신의 원리와 섞이는 영이 창조를 낳는다”; (브럭커, I., 240페이지); 오르페우스의 삼중체가 동일한 가르침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파네스(Phanes) (혹은 에로스), 천연 그대로의 미분화된 우주 물질을 포함하는 카오스 그리고 크로노스 (시간), 이 셋이 협력한 원리로, “창조” 작업을 만드는 불가해하고 숨겨진 점(point)에서 발산한다. 그리고 그들은 힌두의 푸루샤 (파네스), 프라드하나 (카오스) 그리고 칼라 (크로노스) 혹은 시간이다. 윌슨 교수는 기독교 성직자처럼 그 생각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길, “지금 설명되듯이, (지고 영 혹은 혼)의 혼합은 기계적이 아니다; 그것은 결과를 만드는 중간적 대리인에 미친 영향 혹은 결과이다.” 비쉬누 푸라나에 있는 문장: “향기가 마인드 자체에 즉각 작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가까이 있어서 마인드에 영향을 주듯이, 마찬가지로 지고자가 창조 요소에 영향을 주었다,” 박학한 산스크리트 학자가 올바르게 설명하듯이: “향기가 실제 접촉해서 마인드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후각에 인상을 줌으로써 마인드에 전달하여 마인드를 즐겁게 하듯이,” 부언하면, “지고자가 영과 물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지고자와 동일시된, 영이 푸라크리티 혹은 물질속으로만 주입된 것처럼, 그것에 대한 관점보다 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파드마 푸라나에 있는 구절을 선호한다: “푸라크리티의 남성 (영)으로 부르는 그 . . . 그 똑 같은 신성한 비쉬누가 푸라크리티 속으로 들어갔다.” 이 “관점”은 성서에 있는 롯(Lot) (창세기 19장, 34-38)같은 원로에 대한 그리고 심지어 아담 (4장, 5장, 1절)과 한층 더 인격적 성질의 다른 것에 대한 어떤 구절의 유연한 성격과 확실히 비슷하다. 그러나 인류를 남근숭배로 이끈 것이 바로 그것이었고, 기독교는 창세기 첫 장부터 계시록까지 그것으로 스며 들어 있다.
[11] 이 모든 문장은 “비쉬누 푸라나,” 1권 2장에서 인용되었다.
[12] 비쉬누는 부테사(Bhutesa), “원소들과 만물의 주”이자 비스와루파(Viswarupa), “보편 질료 혹은 혼”이다.
[13] 그것의 사후-유형(post-types)에 대하여 트리테미우스(Trithemius) (아그리파의 스승, 16세기)가 쓴 논고 참조. “신을 따라서 우주를 활성화시키는 일곱 이차존재 혹은 영적 지성들에 대하여;” 세계의 과정(코스)의 칠중 단계를 주재하고 안내하는 엘로힘 혹은 지나(Genii)에 대한 어떤 사실과 믿음에다가 비밀 주기와 몇 가지 예언을 제시한다.
[14] 처음부터 동양학자들은 푸라나 창조 속에 있는 어떤 가능한 질서에 관하여 그들이 거대한 어려움으로 둘러싸였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브라흐마를 너무 자주 브라흐마와 윌슨이 혼동하였으며, 그의 후계자가 그것을 비난하였다. 비쉬누 푸라나 번역을 위하여 핏츠워드 홀 씨가 선호한 “산스크리트 원문”이 윌슨이 사용한 것보다 선호된다. “윌슨 교수가 지금 인도 철학 학생이 갖는 그런 이점을 가졌었다면, 의문의 여지없이 그가 다르게 표현했을 것이다”라고 그의 작품 편집자가 말했다. 토마스 테일러 옹호자들 중에 한 명이 플라톤 번역을 비난한 학자들에게 제시한 대답 중에 하나를 기억하게 만든다. “토마스 테일러가 그를 비난한 비평가들보다 그리스에 대한 지식이 적었을 수 있지만, 그는 그들보다 플라톤을 훨씬 더 잘 이해하였다”고 그가 말했다. 윌슨이 부인할 수 없게 매우 증대한 오류를 저질렀지만, 현재 동양학자들은 윌슨 보다 산스크리트 본문의 신비적 의미를 훨씬 더 왜곡시킨다.
[15] “대지성(Intelligence)으로 시작하는 세 가지 창조는 엘리멘탈이지만, 지성이 첫째인 일련의 창조에서 나오는 여섯 창조는 브라흐마의 작업이다.” (바이유-푸라나) 여기서 “창조”는 모든 곳에 있는 진화의 단계들을 의미한다. 마하트 혹은 “대지성” 혹은 마인드 (마나스에 상응하는 것으로, 전자는 우주계에서 그리고 후자는 인간계에 있다)는 여기서 붓디 혹은 초-신성한 대지성(Supra-divine Intelligence)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링가 푸라나에서 “최초 창조가 마하트 창조였고, 대지성이 최초 현현이다”라고 읽을 때, 그 (구체화된) 창조를 우리 태양계 혹은 심지어 우리 지구의 최초 진화로 봐야 한다. 푸라나에서는 이전 태양계 혹은 지구에 대하여 논의되거나 심지어 암시되지도 않는다.
[16] 데바에 대한 진실이 매우 분명하게 설명되었지만, 윌슨 교수는 동물들이 신성 혹은 천사보다 “창조” 등급에서 더 상위에 있는 것처럼 그것을 번역한다. 본문에서 말하길, 이 “창조”는 1차 (프라크리타)와 2차 (바이크리타) 이다. 브라흐마에서 나온 신들의 기원은 후자이다 (우리 물질 우주의 인격화된 창조자); 첫째 원리의 즉각적 생산이 루드라에 영향을 주는 전자(1차) 이다. 루드라는 시바의 칭호만이 아니라, 나중에 볼 것이지만, 창조 대리인들, 천사와 인간을 포함한다.
[17] 식물도 동물도 아닌, 둘 사이의 존재.
[18] “창조된 존재들”은 파괴 시기에 (개별 형태들이) 파괴되지만 이전 존재의 선한 행동 혹은 악한 행동으로 영향을 받으며, 그 결과들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고 비쉬누 푸라나가 설명한다. “그리고 브라흐마가 세계를 새롭게 만들 때, 그들은 그의 의지의 자손이다 . . .” “그의 마인드를 자체 속으로 모으면서 (요가 의지), 브라흐마가 존재들의 네 등급을 창조하였다. 즉, 신, 악마, 조상 그리고 인간(MEN)” . . . “조상”은 인간의 첫째 근원인종의 원형이자 진화자들이다. 조상들은 피트리스이고 일곱 등급이다. 그들은 대중 신화에서 아담 갈비뼈에서 나온 이브처럼 브라흐마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19] 윌슨 박사가 말하길, “이 개념들, 루드라와 성인들의 탄생은 시바파(Saivas)에서 빌려온 것처럼 보이고, 바이쉬나바 체계에 어색하게 접목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 가성을 세우기 전에 그 비의적 의미를 상담 받았어야 했다.
[20] 베다의 리쉬, 파라사라는 풀라스티야(Pulastya)로부터 비쉬누 푸라나를 받아서 마이트레야를 가르쳤는데, 동양학자들은 그를 다양한 시대에 놓는다. 힌두 고전 사전에서 올바르게 보이듯이: “그의 시대에 대한 추론이 기원전 575부터 1391년까지 광범위하게 다르며, 신뢰할 수가 없다.” 그렇다; 그러나 자의적인 공상으로 유명한 산스크리트학자들이 지정한 다른 날짜만큼이다 적지 않다.
[21] 그들은 진실로 “특별한” 혹은 남다른 창조를 표시한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첫째, 둘째 근원인종 그리고 상당 부분의 셋째 근원인종의 무감각한 인간 껍질 속에서 화신함으로써 말하자면 새로운 인종—사고하고, 자의식적인 신성한 인간—을 창조하였기 때문이다.
[22] “넷 쿠마라는 브라흐마의 마인드에서 태어난 아들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일곱이라고 명기한다. (힌두 고대 사전), “조물주의 아들(Maker’s Sons), 쿠마라들의 아버지 이름을 딴 이름, 이 일곱 바이다트라(Vaidhatra)가 이쉬와라 크리쉬나의 “상기아 카리카(Sankhya Karika)”에서 그것에 첨부된 샹카라차리아의 파라구루(Gaudapadacharya)의 주석과 함께 언급되고 묘사되었다. 그것은 쿠마라의 성질을 논의한다. 일곱 쿠마라들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억제하지만, 대신에 그들을 “브라흐마의 일곱 아들”로 부르고, 그들은 브라흐마에 의해서 루드라 속에서 창조되었다. 그것이 제시하는 이름: 사나카(Sanaka), 사난다나(Sanandana), 사나타나(Sanatana), 카필라(Kapila), 리부후(Ribhu), 그리고 판차시카(Panchasikha).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가명이다.
[23] 동양학자들의 어떤 번역은 너무 신뢰할 수 없어서 하리-밤사(Hari-Vamsa)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에서 “일곱 푸라자파티, 루드라, 스칸다 (그의 아들) 그리고 사나트-쿠마라가 존재들을 창조하기 위하여 나갔다” 반면에, 윌슨이 보여주듯이, 원본은 이렇다: “이 일곱은 . . . 후손을 창조하였다; 그리고 루드라도 그렇다. 하지만 스칸다와 사나트 쿠마라는 그들의 힘을 자제하면서 창조를 억제하였다.” “존재들의 네 등급”을 종종 “암밤시(Ambhamsi)”로 말하고, 윌슨은 그것을 “글자 그대로 바다(Waters)”로 표현하며, 그것이 “신비 용어”라고 믿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은 신비 용어이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비의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분명히 실패하였다. “바다(Waters)”와 “물(water)”은 아카샤, “공간의 원초적 대양(primordial Ocean of Space)”를 나타내고, 그 위에서 스스로 태어난 영, 나라야나(Narayana)가 움직인다; 그의 자손인 그것에 의지하면서. (마누 참조) “물은 나라의 체이다; 이렇게 우리는 물의 이름이 설명된 것을 들었다. 브라흐마가 물 위에서 쉬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가 나라야나(Narayana)로 불린다” (링가, 바이유 그리고 마르칸데야 푸라나) “. . . 순수하고, 푸라샤가 순수한 물을 창조하였다 . . .” 동시에 물은 물질 우주에서 세 번째 원리이고, 영적 영역에서 세 번째: 불의 영(spirit of Fire), 불기둥(Flame), 아카샤, 에테르(Ether), 물(Water), 공기(Air), 땅(Earth)이 우주적, 항성의, 심령적, 영적 그리고 신비적 원리이며, 존재의 모든 계에서 탁월하게 오컬트 원리이다. “신, 데몬, 피트리스 그리고 인간”이 암밤시 용어가 적용되는 존재들의 네 등급이다 (베다에서 그것은 신과 동의어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신비적으로) 물, 아카샤, 대양 그리고 자연에 있는 세 번째 원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피트리와 지상의 인간은 상위계에 있는 신과 데몬(영)의 변형 (재탄생)이다. 다른 의미로 물은 여성 원리이다. 기독교인의 동정녀 마리가 마레(Mare) (바다), 사랑, 자비 그리고 자선의 신의 어머니이듯이, 비너스 아프로디테는 의인화된 바다(Sea)이고, 사랑의 신의 어머니, 모든 신들의 발생자이다. 만약 비의 철학의 학생이 그 주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한다면, 그는 암밤시 용어가 하늘에 있는 동정녀(Virgin in Heaven), 연금술사의 천상의 처녀(Celestial Virgin) 그리고 심지어 근대 침례파의 “은총의 바다(Waters of Grace)”와 갖는 많은 관계 속에서 그 용어의 모든 암시를 틀림없이 찾을 것이다.
[24] 비쉬누가 보존자(preserver)이듯이, 시바-루드라는 파괴자(destroyer)이다; 그리고 둘 다 영적 물질적 성질을 갱생시키는 자이다. 식물로 살기 위하여, 씨앗은 죽어야 한다. 영원 속에 있는 의식적 실체로서 살기 위해서, 인간의 격정과 감각이 육체보다 먼저 죽어야 한다. “사는 것이 죽는 것이고,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를 서구에서는 거의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파괴자, 시바는 자연의 선한 정원사이듯이, 영적 인간의 구제주이자 창조자이다. 그는 인간과 우주 식물을 추려내고, 영적 인간의 지각을 살리기 위하여 육체 인간의 격정을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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