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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중요한 변형을 겪고 있다. 사실들을 쏟아 넣는 비교적 외적인 과정에서, 그것이 점점 더 개인 내면에 있는 더 깊고, 생성적인 가능성들을 불러 일으키는 과정으로 되고 있다.”
— H. A. 오버스트리트
인류를 현재의 계발 지점까지 가져온 많은 요인들 중에 하나는 교육 방법과 체계의 성장과 완성이었다. 처음에는 이것이 조직화된 종교들의 수중에 있었지만, 지금은 사실상 종교 단체들의 통제로부터 분리되어서, 국가의 손에 놓여 있다. 과거에는, 교육이 대체로 신학으로 채색되었으며, 그 방법들은 교회 사람들과 성직자들에 의해 지시되었다. 지금은 방대한 규모의 교사들이 국가에 의해서 훈련을 받는다; 많은 분화된 종교 단체들 때문에 어떤 종교적인 편견이라도 무시되며, 그 가르침의 추세가 거의 전적으로 물질적이고 과학적이다. 과거에는, 동양과 서양 모두에서, 인류 가족의 더 고도로 진화된 구성원들의 교육을 가졌었다. 오늘날 우리는 대량 교육을 가지고 있다. 미래와 (우리는 믿는다) 고등 교육에 대한 이해에 다가갈 때, 이 두 가지 사실들이 기억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두 가지 방법—개인 교육과 대량 교육—종교와 과학—의 총합에서 그 출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과도기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처럼, 우리의 교육 체계도 흐름과 변화의 상태 속에 있다. 인간 마인드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많은 것을 해왔다는 전반적인 느낌이 그 결과들에 대한 불만족의 깊은 저류와 함께 모든 곳에서 발견된다. 우리는 우리의 교육 체계가 가장 폭넓은 선을 달성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200년 동안 이루어진 엄청난 진보에 감사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결국 적합한 훈련 체계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많이 삶에서 얻고 있는지에 대하여 의아해하고 있다. 우리는 지식에서 우리의 성장, 정보의 축적, 자연의 힘에 대한 우리의 통제에 대하여 자부심 있게 만족하면서도, 그럼에도 우리가 진정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하여 대학생 같은 토론을 갖는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엄청난 양의 사실들을 암기하도록 가르치고, 폭넓게 다양화된 방대한 양의 세부사항을 흡수하도록 가르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가끔 우리가 그들이 더 만족스럽게 살도록 가르치고 있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대학을 짓고 증여하는데 수십억 달러를 사용하지만, 우리의 가장 선견지명이 있는 교육자들이 이 조직화된 교육이 실제로 일반 시민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있는지에 대하여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유별난 아이와 재능 있는 남녀에서 그것의 임무가 확실히 실패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청소년을 훈련하는 방식이 단호하게 판단의 기준 앞에 서 있다. 개인의 문화가 교육을 통한 대중의 문명화와 함께 진행될 수 있는 어떤 탈출구를 찾아야 하는지 오직 미래만이 해결할 수 있다.
과학의 성취와 인간 지식의 모든 부문에서 사고의 통합을 이루는 시대에, 우리의 교육자들 중에 한 명인 루퍼스 M. 존스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이런 성취들 중에 어떤 것도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 은행 잔고와 선량함 사이에는 등식이 없다. 지식은 지혜 혹은 영의 고귀함과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세계는 그런 굉장한 다수의 교육자들이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일하는 것을 이전에 본 적이 없으며, 세계 역사상 초등 교육과 고등 교육을 위해서 그렇게 아낌없이 교육비를 지출한 적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전체적인 효과는 실망스럽고, 중심점을 놓쳤다. 우리의 학문 기관들은 훌륭한 학자들을 배출하고 과학적인 사실들의 몸통을 많은 사람에게 제공한다. 그러나 인격의 형성, 영의 문화, 혼의 건설이고 그래야 하는 교육의 주된 임무에서 안타까운 실패가 있다.”[1]
고대의 어머니 아시아와 유럽은, 18세기까지, 개인을 훈련시켰고 양성하였다. 강화된 훈련이 소위 상류층과 영적인 문화에 현저한 적성을 보인 사람에게 제공되었다. 동양의 브라만 체계 하에서, 그리고 서양의 수도원에서, 특화된 문화가 그것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졌고, 오늘날까지 인간의 사상에 그들의 표시를 놓은 희귀한 사람들이 배출되었다. 우리의 현대 서양의 세계가 이것을 대중 교육으로 대체하였다. 처음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들의 마인드를 사용하는 것을 배우고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개체성을 주장하고, 그들 자신의 아이디어를 공식화하기 시작하고 있다. 인간 사상의 자유, (종교적 또는 과학적) 신학의 통제로부터의 해방은 현재의 전쟁 외침이며, 그것으로 많은 것이 획득되었다. 대중들이 그들 자신의 사고를 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대중적인 사고이고, 우연한 대중 여론이 신학이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사고를 형성한다. 선구적인 개인은 과거처럼 현재의 사고와 노력의 세계에서 자신을 느끼는데 여전히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아마도 삶의 거대한 순환에서, 우리는 특별한 개인을 위한 전문화된 고대 훈련 방법으로 다시 돌아갈 예정이다—대중 교육의 폐기를 수반하지 않는 복귀로.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궁극적으로 과거와 동양의 방법들을 현재와 서양의 방법들과 통합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방법을 검토하기 전에 교육을 정의하고, 그것의 목표를 스스로 표현해서, 우리의 모든 노력 앞에 놓인 목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명확히 하려고 시도해보자.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 흥미롭지 않은 측면에서 볼 때, 교육은 간략하게 학생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대개는 조금도 흥미를 주지 않는 수많은 정보더미를 받는 원치 않는 학생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무미건조함과 재미없음이 인상을 준다; 우리는 이런 제시가 주로 기억력 훈련, 소위 사실들의 전달, 그리고 학생에게 광대한 수의 관련 없는 주제들에 대한 약간의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다룬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 단어의 글자 그대로 의미는 “이끌어 벗어나게 하다” 혹은 “이끌어 내다”이며, 이것이 가장 교훈적이다. 이 생각에 잠재된 생각은 우리는 아이를 의식의 한 상태에서 또다른 그리고 더 넓은 상태로 이끌기 위해서 아이의 내재하는 본능들과 잠재력을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예를 들어 단순히 살아있는 것을 의식하는 아이들을 자의식의 상태로 이끈다; 그들은 자신과 그들의 그룹 관계를 인식하게 된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독립적이고, 이렇게 사회의 자립하는 구성원들로 되기 위해서 특히 직업 훈련을 통해서 힘과 역량을 개발하도록 배운다. 우리는 그들을 지식의 길로 이끌기 위해서 그들의 자기 보존 본능을 이용한다. 그들을 지성의 길로 이끌기 위해서 우리가 그들의 본능적인 장치의 활용으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것이 사실일 수 있지만, 그들을 여기까지 데려와서 우리가 선한 작업을 계속하고 그들에게 지성의 실재 의미를 직관이 해방되는 훈련으로서 가르쳐주는지 의문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인간사의 외부 세계에서 자기 보존 장치의 일부로서 그들의 본능과 지성을 활용하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순수 이성의 사용과 자기 보존과 주관적인 실재 세계에서 의식의 연속성과 자기 보존의 작업에서 직관에 의한 마인드의 궁극적인 통제가 아직은 소수의 선구자들의 특권의 지식에 불과하다.
만약 H. 윌던 카르 교수가 직관에 대한 그의 정의에서 옳다면, 그러면 우리의 교육 방법들은 그것의 발전을 향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마인드가 실재를 직접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으로 정의하며, 인식 혹은 개념의 형태가 아니고, 그리고 아이디어 혹은 이성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며, 이것 모든 것은 대조적으로 지적인 이해이다.”[2]
우리는 마인드 혹은 (힌두교인이 그것을 부르는 것처럼) 사고하는 원리의 변형태의 과학을 엄격하게 인간적인 것으로 평가하고, 인간의 논증적인 반응들을 동물들과 공통적으로 그가 공유하는 특질들로 강등시킨다. 지성이 본능적인 기능과 갖는 관계처럼 직관의 과학, 명확한 통합적 시각의 예술이 언젠가는 지성과 같은 관계를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옥스퍼드의 디블리 박사는 본능과 직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주석을 말하는데, 더 높은 인식 기능의 계발을 위한 본서에서 이것이 우리의 호소 때문에 여기에 어울린다. 그가 말한다:
“...본능과 직관 모두 현지어로 말하면 우리 자신의 초-의식적인 부분 속에서 시작되고, 마찬가지로 예상치 않게 일상 의식의 빛 속으로 나타난다… 본능의 충동들과 직관의 촉구들이 완전한 비밀 속에서 발생된다. 그것들이 나타날 때,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거의 완전하며, 우리 의식 속으로 그것들의 출현은 갑작스럽다.”[3]
그리고 그는 또다른 곳에서 직관은 본능에 대한 이성의 다른 쪽에 있다고 덧붙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흥미로운 삼중성—본능, 지성, 그리고 직관—을 가지며, 본능은 의식의 경계 아래에 놓여있고, 말하자면, 지성은 인간으로서 인간에 대한 인식에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며, 직관은 그것들 둘 너머에 놓여있어서, 우리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의 재능인 진리에 대한 갑작스러운 깨달음과 인식 속에서 그것의 실재를 가끔 느낀다.
확실히 교육 과정에는 그가 외적인 사실들과 자의적인 환경에 대처하는데 적합하도록 만드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하는가? 인류는 더 깊고 더 폭넓은 미래와 인식으로 안내되어 들어가야만 한다. 인류는 최고의 그리고 가장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하여 무엇이 오더라도 그것에 대처하고 다룰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인간의 힘을 최고의 온전한 건설적인 표현으로 끄집어내야 한다. 성취로 그들을 안주하게, 자기만족으로 그래서 정체 상태로 둘 어떤 표준화된 성취의 한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항상 낮은 수준에서 깨달은 상태에서 높은 수준으로 안내되어야 하며, 인식의 능력도 꾸준히 확장되어야 한다. 확장과 성장은 생명의 법칙이고 최대의 선을 최대 다수에게 가져오는데 인간의 다수가 적합하게 교육 체계로 들어올려져야 하며, 개인는 그의 완전한 유산을 받아야 하고, 우리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그리고 최고급을 육성하고 강화할 특별한 문화가 제공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성취 속에 뉴에이지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열등하고 뒤처진 사람들도 또한 교육자들이 설정한 높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특별한 훈련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특별한 적성과 장비를 갖추고 교육받은 등급의 대중적 기준이라는 죽은 수준까지 낮추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바로 여기서 교육을 정의하는 어려움이 분명해지고, 실재 목표와 참된 목적들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랜달 박사는 그가 쓴 글에서 이것을 인식하며, 그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교육의 정의를 개인의 명상을 위한 가능한 연습으로서 정의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각자가 ‘교육’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문해 보자; 그리고 만약 그가 그 질문에 깊이 숙고한다면, 그것에 대답하기 위해서 그는 삶 자체의 가장 깊은 의미까지 탐구해 내려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교육의 의미에 대하여 진솔하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이전에 결코 없었던 삶의 근본적인 질문들과 직면하도록 해준다. 교육의 목표는 지식인가? 확실히 그렇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지식인가? 그것의 목표는 힘인가? 다시 그렇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힘인가? 그것의 목표는 사회적인 적응인가? 현대 시대는 강조하며 그렇다고 대답하지만, 그것은 무슨 종류의 적응을 위한 것인가 그리고 무슨 이상들로 결정되어야 할 것인가? 교육이 단순한 지식이나 어떤 종류의 단순한 힘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사용을 위한 지식과 힘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 당시의 여론은 아닐지라도 가장 진보적인 교육 사상에 의해서 명확하게 인식된다...
“그러므로 새로운 교육은 위대한 목적으로 사회적 목적을 위한, 즉 인간에게 가장 큰 봉사를 위한 개인의 훈련과 계발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공통적으로 세 가지 제목—초등, 중등, 고등—하에서 분류한다. 이 세 가지에다가 나는 네 번째, 가장 높은 것을 추가하고 싶다. 최고의 교육은 종교이지만 그것은 또한 교육이기도 하다.”[4]
똑 같은 생각이 바가반 다스에 의해서 최초 아시아 전체 교육 컨퍼런스에서 표현되었다는 것을 주목하면 흥미로울 것이다. 그가 말한다:
“종교의 규칙들, 즉 더 큰 과학의 규칙들은 우리가... 모든 더 넓은 빚과 의무를 이행하도록 한다. 종교는 신의 명령 혹은 계시로서 묘사되어 왔다. 이것은 단지, 다시 말해서, 모든 종교와 모든 민족의 현자들과 과학자들의 지성적, 직관적, 영감적인 노고에 의해서 우리에게 드러난 신의 성질의 법칙들을 의미한다… 우리는 세 가지 R에 대하여 충분히 오랫동안 들어왔다. 진정한 종교의 이 네 번째 R은 그것들 모두보다도 더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주의 깊게 발견되어서 먼저 숙고되어야 한다. 모든 성실한 교육자들이 차이들 가운데서 합의를 확인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적용함으로써 이 작업에서 도울 필요가 있다.”[5]
동양과 서양 둘 다 인간을 결국에는 인간사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영적인 것들의 더 폭넓은 의식으로 들어가도록 이끌지 못하는 교육 체계는 그것의 임무에서 실패하였고 인간 혼의 원대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느끼는 것 같다. 지성에서 그치고 그리고 최고의 마인드들이 증거로 보여주는 진리를 직관화하는 재능을 무시하는 훈련은 많이 부족하다. 만약 그것이 학생들을 폐쇄된 그리고 정적인 마인드로 남겨둔다면, 그것은 그들을 위감 박사가 우리에게 말하듯이 전적으로 과학적 훈련의 영역 밖에 놓여 있는 저 무형의 가장 섬세한 ‘삶의 5분의 4’를 건드릴 수 있는 장비 없이 남겨둔 것이다.[6] 그 문이 물질계 삶과 관련하여 학문적인 마인드 훈련 너머로 갈 수 있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인류의 미래의 성공은 더 영적이기 때문에 더 거대한 것들을 성취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그런 개인들의 성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간 가족의 이런 단위들이 발견되어서 계속 나아가도록 그리고 무형의 영역을 꿰뚫고 들어가도록 격려되어야 한다. 그들은 양성되고 훈련되어야 하며 그들 속에 있는 최고와 최상에 적응될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런 교육은 개인의 성장과 지위에 대한 적절한 인식, 그리고 어떤 주어진 경우에 다음 단계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교사의 통찰력, 동감 그리고 이해를 필요로 한다.
더 진보한 교육 과정들을 향상해서 그것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순전히 분석적인 마인드의 영역에서 나와서 순수 이성과 직관적 인식의 영역으로 올릴 필요에 대하여 교육자들 사이에서 증가하는 인식이 있다. 버트란드 러셀은 “교육은 죽은 사실들에 대한 수동적인 인식에 목표를 두지 말고 우리의 노력이 창조하려는 세계를 지향한 활동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우리는 창조는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그리고 창조적인 상상력을 활용하는, 살아있는 기능하는 창조자를 단정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현대 교육 체계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마인드가 우리의 대중 체계와 기억을 잘 소화되지 않은 사실들로 밀어 넣는 방법에 의해서 표준화되고 억제되지 않는가? 만약 헤르바르트가 “교육의 주요 사업은 우주의 윤리적 계시이다”라고 말한 것이 옳다면, 그러면 아마도 모란 박사도 “우리의 물질주의 시대의 근저에 놓여 있는 원인들 중에 하나는 아마도 가장 거대한 것은 우리의 공식적인 교육에서 영적인 요소가 부족한 것이다”라고 지적한 것도 맞을 것이다.
우리 중의 어떤 사람도 윤리적인 계시보다 더 폭넓은 목표가 존재한다고 느낀다; 그리고 대중이 과거의 세계 인물들(World Figures)을 특징지었던 어떤 장엄함을 성취할 때 인류가 그 풍부함 속에서 실현될 영광과 깨달음의 관리인이라는 것이 가능하다고 느낀다. 교육의 진정한 목표가 인류를 네 번째 왕국 혹은 인간 왕국에서 이끌고 나와서 우리가 신비가들이라고 부르는 개척자들과 인종의 표준을 세우는 인물들(Figures)이 살고 움직이며 그들의 존재를 갖는 그 영적인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은 진화상의 계발과 일치하지 않는 것인가? 이렇게 인류가 객관적인 물질 세계에서 나와서 영의 영역으로 올려질 것이며, 거기서 더 진정한 가치들이 발견되고, 그 속에서 개별 자아들이 드러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저 위대한 대아(Self)와 접촉한다. 카이저링은 다음과 같은 말로 이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인식한다; 우리는 우리의 정진의 중요성을 이해한다; 우리는 자연의 주인이다. 우리는 내면 세계와 외부 세계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과학적으로 우리의 실재 의도가 무엇인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자기 기만의 희생자가 될 필요가 없다…. 지금부터, 이런 가능성이 삶의 의식적인 동기가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그것은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것이 정확하게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의식의 센터가 인간의 출발점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가 강조를 자신 속에서 어디에 두건, 거기에 그것이 실제로 놓여 있다; 인간의 전체 존재가 그것에 따라서 재구성된다... 그러므로 이해와 행동의 통합에 대한 교육이 인식에 기초를 둔 삶에 필요하다.
“동양에서 모든 교육은 순전히 감각-이해로 지향되며, 이것이 본질적 존재의 수준을 높이는 것으로 보여 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본질적인 것은 정보가 아니라, 이해이며, 그리고 이해는 개인적 창조적 적용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감각-인식은 항상 어떤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미의 차원이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는 방향에 있다. 그러므로 사실상 지식 (정보의 의미에서) 그리고 이해는 자연과 영과 같은 관계를 갖는다. 정보가 외부에서 안으로 얻어진다; 이해는 반대 방향의 창조적인 과정이다. 이런 상황 하에서, 하나의 목표에서 다른 목표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방법은 없다. 사람은 어떤 것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교육, 정보의 저장을 목적으로 하는 우리의 교육이 대다수에게 가져온 단계이다.”[7]
본서는 더 거대한 의식 속에서 기능할 수 있는 역량이 계발될 수 있으며, 인간이 더 폭넓은 이슈를 향해서 그의 존재를 재구성할 수 있는 방법을 다루고자 한다. 그것은 특화된 훈련과 자기-수양(self-culture)이 이런 더 거대한 목표를 원할 수 있는 모든 개별 단위에 의해서 적용할 수 있는 기법에 관한 것이다. 만약 그 욕망이 그의 마인드 속에서 명확하고 이성적인 형태를 취할 수 있고, 성공적인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완벽하게 합당한 목표로 인식될 수 있다면, 그는 간절히 그것을 움켜잡으려고 할 것이다. 만약 사회가 그런 계발을 위한 수단과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그 길을 찾을 것이다. 제안된 방법은 학생이 평소의 학문적 교육적 이점들과 삶의 경험들로 혜택을 보고 나서 그가 점차로 현재의 한계를 뛰어넘고 그의 마인드를 더 넓은 깨달음으로 돌릴 때까지 그의 의식을 확장할 수 있는 개별적인 기술입니다. 그는 혼을 위대한 실재(Reality)로 발견할 것이며, 이렇게 영적인 것들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얻을 것이다.
에버렛 딘 마틴은 우리를 위해서 교육을 “인간 삶의 영적인 재평가”로 정의한다. 그것의 임무는 개인을 새로운 방향을 향하게 하는 것이며, 그의 경험들의 더 풍부한 그리고 더 중요한 관점을 취할 수 있도록 해주며, 그를 그의 신념과 이상의 체계 속이 아닌 그 위에 놓도록 하는 것이다.”[8]
이런 정의는 필연적으로 논란의 문을 연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는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유전, 신체적 조건, 그리고 다른 많은 요인들을 토대로 각각의 특별한 문제들과 특이성들을 가지고 있다. 그에 따른 가치의 기준이 각각의 사람, 세대, 국가, 그리고 인종에 따라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교육은 우리가 (허버트 스펜서가 말하듯이) “완전한 삶(complete living)”을 살도록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 맞지만, 각자의 범위와 역량이 다르다.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저점과 최고점은 무한히 다양하며, 더구나 어느 특정한 한 영역에서 기능하도록 갖춘 사람은 다른 영역에서는 터무니없이 부적합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 따라서 그 정의가 유용하려면, “완전한 삶”에 대한 어떤 기준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원만하고 완벽한 인간의 순수한 유형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의 접촉의 범위의 총합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인간의 반응 장치의 가능성들을 규명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며, 그것이 그가 접촉할 수 있게 해주는 그 환경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기능할 수 있는 한계들은 무엇일까? 만약 오텐토트인의 인식에서부터 우리 지성인의 그것, 그리고 인간 표현의 모든 분야에 있는 천재들과 지도자들에 이르기까지, 인식의 상태가 있다면, 무엇이 그것들 사이의 차이를 구성하는가? 왜 그들의 인식의 분야가 그렇게 다양할까? 인종의 계발이라고, 어떤 사람은 대답할 것이다; 다른 사람은 분비선의 안정성 혹은 불안정성이라고 말할 것이다; 다른 사상가들 그룹들은 적절한 교육의 이점의 소유 혹은 부족, 환경과 유산의 차이가 결정할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의견의 뒤죽박죽 상태에서 인간의 인식 상태의 광범위한 영역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이 나오고, 인류가 그런 포괄적인 이해, 표현의 순수성, 그리고 크리스트, 붓다, 플라톤과 다른 많은 사람들로 증거가 되는 완성된 전세계적인 영향력의 그런 경이들을 만들어냈다는 인식의 경이가 나타나며, 그분들의 생각과 말씀이 수 천 년 동안 사람들의 마인드에 흔적을 남겨왔다. 무엇이 그들을 지금의 그들로 만들었을까? 그것들은 무한의 심장에서 나오는 기적들인가, 그래서 그들에게 필적하는 사람을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일까? 그들은 진화 과정의 산물이며, 그래서 방대한 경험과 개화를 통해서 강력하게 된 것인가? 혹은 그들은 인류의 꽃으로, 그들의 장비와 훈련에다가 그들이 대다수에게 봉인된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서, 심지어 우리의 가장 진보한 사상가들 조차도 아무것도 모르는 차원에서 기능할 수 있도록 해준 전문화된 문화를 추가한 사람들인가? 우리의 현재 교육 체계가 수 천 명들이 이런 전문화된 문화에 준비가 된 어떤 상태로 인류를 전체로서 가져왔고, 그래서 우리는 그 뿌리를 성공 속에 가지고 있는 교육 분야에서 위기에 직면하고 있으며, 인간이 새로운 어떤 것에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만약 똑 같은 선을 따라서 진행된다면 도움 대신에 해가 될 것인가? 우리 중 일부는 이것이 가능하며, 교육자들은 인간이 새롭고 신성한 경험을 위해서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을 모든 곳에서 소유하게 할 그런 놀라운 실험을 위해서 준비시키기 시작해야 할 때라고 믿는다—이것은 지금까지 신비가들과 인류의 아는 자들의 선택된 특권인 것이다. 이런 지자들은 신경의 메커니즘으로 드러난, 화학자, 물리학자 그리고 생물학자와 인류학자의 조사로 드러난 세계보다 더 폭넓은 세계를 증언하여 왔다. 그들은 보통의 감각들이 쓸모없는 접촉과 인식의 영역에 대하여 명확한 용어로 말해왔다. 그들은 이 섬세한 영역 속에서 살아왔고 움직여왔다고 주장하고, 실재에 대한 신비로운 탐구에서 나타난 인내심과 여러 시대에 걸친 그들의 증언의 유사성이 그 무형계와 그것이 접촉될 수 있는 반응 장치의 가능성을 믿게 이끌어준다. 이 “현혹된” 신비가들과 직관적인 사상가들의 대열이 인류의 수만 명에 이른다. 그들은 우리에게 월트 휘트먼의 말로 말한다: “나와 나의 동족은 논쟁으로 설득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실재로 설득한다.”[9]
교육은 또한 “사물을 충분히 생각하는 능력이 관련되는 삶의 의미에 대한 모험적인 탐구로서” 표현되어 왔다. 누가 이것을 말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신비가의 방식과 신비가가 온전하게 의식적인 지자로 되는 명상의 기법에 대한 가장 탁월한 묘사인 것 같다. 아무리 많이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더라도, 인간은 여러 시대에 걸쳐서 탐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아있으며, 그의 탐구가 그가 살고 있는 세계의 구체적인 외부보다 훨씬 더 깊은 곳으로 이끈다. 오버스트리트 박사는 진정한 신비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말로 우리에게 이것을 환기시킨다. 그가 말한다:
“대체로, 우리는 ‘사물들’을 보는 피조물들이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보지만 보통 우리가 보는 것 너머는 아니다. 세계를 단지 사물들의 세계로 경험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중요한 어떤 것을 달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확실히, 사물들에 대한 경험은 거기 까지라면 좋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게 해주며, 우리가 삶의 요인들을 어느 정도 성공으로 조작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만약 그가 또다른 마인드의 습관을 계발할 수 있다면, 그의 세계에 대한 다른 ‘느낌(feel)’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볼 수 없는 실재를 볼 수 있는 실재 속에서 보는 습관이다; 표면을 꿰뚫고 들어가서, 사물들을 관통해서 그것들의 시초의 원천까지 보는 습관이다.”[10]
사람들은 아마도 이제 표면 아래로 꿰뚫고 들어가서 자연의 외적인 형태 속에서 그들의 탐구를 그 형태의 원인인 그것으로 가져갈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는 아마도, 종교적인 정신과 신비한 탐구를 너무 쉽게 혼동하기 쉽다. 삶과 자연의 위대한 법칙들에 대한 모든 명확한 생각은 집요하게 그리고 확고하게 진행된다면, 결국에는 신비한 세계로 이어지며, 이것을 우리 시대의 최고의 과학자들이 인식하기 시작하고 있다. 종교는 보이지 않는 것과 신비로운 것에 대한 수용된 가설로 시작한다. 그러나 과학은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그리고 객관적인 것에서 주관적인 것으로 작업함으로써 동일한 지점에 도달한다. 이렇게, 말해왔듯이, 조사의 과정과 형태에서 형태로 내면으로 지나가는 과정에 의해서, 신비가는 결국에는 베일 벗은 자아(Self)에 도달한다. 모든 길이 신(God)—신을 궁극의 목표, 인간의 실재(Reality)에 대한 탐구의 상징으로 보면서—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변함없이 진실인 것처럼 보인다. 고차원과 존재의 또 다른 세계를 믿는 것이 더 이상 미신의 표시가 아니다. 심지어 “초자연적(supernatural)”이라는 단어조차도 깊게 그리고 심오하게 훌륭하게 되었으며, 언젠가 우리의 교육 체계가 개인이 그의 자연적인 한계를 초월하기 위한 준비를 전적으로 그것의 정당한 업무의 일부로서 간주할 수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로이드 모건 박사가 1923년에 기포드 강의에서 이 “초자연적”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말한 것을 주목하는 것이 흥미롭다. 그가 말한다:
“나는 신성한 목적의 현현으로 간주된 진보의 단계들의 상승하는 계층 구조에서, 각각의 상위 단계들은 차례로 그것 이전 먼저 일어나는 그것에 초(super) 자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이해 가능한 의미라고 제시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은 무기적인 것에 대해서 초자연적입니다; 생각 속에서 반사하는 이해는 순진한 비반사적 인식에 대해서 초자연적입니다; 종교적인 태도는 신성한 목적의 인정과 함께 사회 문제들에 대한 윤리적 태도에 대해서 초자연적입니다. 이 최고의 단계에 도달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종교적인 태도가 초자연적인 것의 지고의 본보기를 제공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사람의 특징입니다.”[11] 그리고, 우리의 주제에 관한 한, 그가 가장 아름답게 그리고 가장 적절하게, “우리에게 강조는 새로운 태도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기에 나타나는 것이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높고 풍부한 기쁨의 형태를 줄 수 있는 새로운 ‘비전(vision)’과 새로운 ’가슴(heart)’에 대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12]
호킹 박사의 주목할 만한 저서인 “인간의 성질과 그것의 개조”에서 그는 교육은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유형을 소통하고 그러면 그 유형 너머로 성장을 제공해야 한다. 교육은 인간을 진정으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그의 성질을 원만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만들어야 하며, 그래서 모든 인류가 나아가는 더 깊은 잠재력을 드러내고 가능하게 해야 한다. 알려는 의지(will-to-know), 그리고 나중에 존재하려는 의지(will-to-be)의 환기가 자연스러운 계발 과정을 따라야 한다. 이런 연결관계에서 명상의 방법이 뉴에이지에서 계발된 것을 보게 될 고등교육의 기법의 일부분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원만하게 계발된 인간이 한층 더 깊게 계발될 수 있으며 자연의 새로운 왕국 속으로 인도될 수 있는 수단이라는 것이 발견될 것이다. 명상은 주로 자기 주도적인 교육 과정으로, 의지의 모든 힘을 불러내고, 실재하는 장비를 기초로 하지만, 마지막에는 새로운 유형, 혼의 유형을 그것의 내적인 장치와 같이 만들어내면서, 자체 속에서 한층 더 위대한 개화의 씨앗들을 간직하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부과된 어떤 것이 되는 것에서, 새로운 교육 과정이 내부로부터 생겨나고, 그렇게 많이 오해받은 단어들인 집중, 명상, 그리고 관조로 망라하는 스스로 부과한 멘탈 수련이 된다. 기억 훈련의 한 과정이 되는 것에서, 그리고 우리를 외부 세계와 접촉하게 하는 반응 장치의 빠른 처리의 계발로부터, 교육의 기법이 마인드-컨트롤의 체계가 되어서, 결국에는 새로운 존재의 상태에 대한 내적인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마침내 무형의 보이지 않는 계에 대한, 그리고 더 섬세한 반응 장치 속에 그것의 자리를 잡는 새로운 일련의 본능적인 인식에 대한, 빠른 반응과 반응성을 만들어낸다. 마치 인간이 동물에게 하듯이, 혼의 유형은 자신을 인간의 유형에 부과하고, 인간의 유형이 대량 훈련과 본능의 산물이고 우리의 현대 교육 체계로 엄청나게 개화되었듯이, 혼의 유형은 멘탈 훈련의 새로운 방법의 산물이며, 그의 혼이 개인에게 부과하고, 그리고 탐구의 긴급성과 그의 의지의 행위로 불러낸다. 이 혼은 항상 인간의 형태 속에 잠재되어 있지만, 명상의 실천을 통해서 입증된 활동 속으로 끌어들인다.
인간을 원만하게 만들어서 그를 대중 기준으로 끌어올리고, 그리고 새로운 유형, 혼의 출현을 만들어내는 이 두 가지 방법이 서양의 교육 방법과 동양의 교육 방법 사이의 주된 구분을 구성한다.
두 가지 계발 방식의 대조가 가장 교훈적이다. 동양에서 우리는 대중은 실제적으로 어떤 교육 없이 남겨진 채 개인의 세심한 양성을 가진다. 서양에서 우리는 대량 교육을 가지고 있지만, 개인이 일반적으로 말해서, 어떤 구체적인 양성 없이 남겨진다. 이 두 가지 거대하고 분기하는 체계는 각각의 문명을 만들어 냈고, 그것의 독특한 천재성과 현현뿐만 아니라, 현저한 결함을 표현하였다. 체계들의 기반이 되는 전제들이 광범위하게 분기되며, 그것들을 검토하는 것이 가치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이해하는 속에서 그리고 그 둘의 궁극의 합일 속에서 뉴에이지에 새로운 인류를 위한 출구가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첫째: 동양 체계에서, 모든 인간 형태 속에 자아(self) 혹은 혼(soul)으로 불리는, 실체, 존재가 거주한다고 가정한다. 둘째: 이 자아는 인간의 형태를 그것의 도구로 혹은 표현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멘탈 상태와 감정 상태 총합을 통해서 결국에는 육체를 물질계에서 기능하는 메커니즘으로 활용하면서 자신을 현현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표현의 수단의 통제는 재탄생의 법칙 아래에서 일어난다. 진화 과정을 통해서 (육체 속에서 많은 생들을 앞으로 나아가면서) 자아는 점차로 현현할 적합한 도구를 건설하고 그것을 숙달하는 것을 배운다. 이렇게 자아 혹은 혼이 최고 의미에서 진정으로 창조적이고 자의식적으로 되며 그것의 참된 성질을 완전하게 드러내면서, 그것의 환경 속에서 활동하게 된다. 결국에 그것은 형태로부터, 욕망 성질의 구속으로부터, 그리고 지성의 지배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얻는다. 이 마지막 해방, 그리고 그에 따른 인간계에서 영적인 왕국으로의 의식의 센터의 이동이 폭넓게 그리고 현명하게 배양된 마인드에 포개 놓이는 명상 과정으로 불린 전문화된 교육으로 촉진되고 육성된다.
이런 집약적인 그리고 개별적인 훈련의 결과는 극단적으로 장관이었다. 동양의 방법은 모든 세계 종교의 창시자들을 만들어낸 유일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가 기원에서 아시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람들의 생각을 형성해 온 영감을 받은 세계 경전의 출현 그리고 붓다, 조로아스터, 슈리 크리슈나, 크리스트, 그리고 다른 분들 같은 모든 세계 구원자들의 출현에 원인이다. 이렇게 동양은 그 특정한 기법의 결과로서, 모든 위대한 개인들을 나타내어 왔으며, 그들은 그들 특정한 시대의 음을 소리 냈고, 사람들 마인드 속에서 신-개념의 개화를 위해서 필요한 가르침을 주었으며, 그렇게 인류를 영적인 인식의 길을 따라서 이끌어왔다. 그들의 삶의 외적인 결과가 거대한 조직화된 종교들 속에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고도로 계발된 개인들의 훈련에서, 아시아 전역의 대중들이 무시되어 왔으며, 결과적으로 (인종의 계발의 관점에서) 그 체계가 부족한 점이 많이 있다. 체계의 결함들은 공상적이고 비실용적인 경향의 발달이다. 신비가가 빈번하게 그의 환경에 대처할 수 없고, 삶의 주관적인 측면에 전적으로 중점을 두는 곳에서, 개인과 인종의 물리적인 복지가 무시되고 간과된다. 대중들이 무지, 질병 그리고 오물의 수렁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남겨지며, 그래서 우리는 소수의 호감을 받는 사람들의 최고의 영적인 깨달음과 함께 동양 전역에서 발견되는 개탄스러운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
서양에서는 그 강조점이 완전히 반대이다. 주관적인 것이 무시되고, 가설적인 것으로 간주되며, 우리의 문화가 토대를 두는 전제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이라는 실체가 있으며, 그는 마인드, 일련의 감정과 반응 장치를 소유하고 그것을 통해서 그가 그의 환경과 접촉하게 된다. 둘째, 그의 장치의 역량과 마인드의 상태, 그리고 주변 환경의 성질에 따라서, 그의 성격과 성향도 그렇게 될 것이다. 대량으로 그리고 무차별적으로 적용된 교육 과정의 목표는 훈련된 기억력, 통제된 반응, 그리고 그를 사회적 자산이자 경제에서 기여하는 인자로 만드는 성격을 제공하기 위해서, 그를 신체적으로 적합하게, 멘탈적으로 기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마인드는 전달된 사실들의 저장소로 간주되며, 모든 아이에게 주어진 훈련은 그를 품위 있고 자립하는 유용한 사회 구성원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전제들의 산물이 동양의 반대이다. 우리는 아시아가 만들어낸 그런 세계적 인물을 생산하기 위한 구체적인 종류의 문화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대량 교육 체계를 발전시켰으며, 우리는 계발된 사상가들 그룹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우리의 대학, 단과대학, 그리고 공립 및 사립 학교들이 있다. 이것들이 수만 명의 사람들에게 그것들의 흔적을 남겼으며, 그들을 표준화시키고 훈련시켜서 우리는 일정한 균일한 지식, 어떤 틀에 박힌 사실의 저장, 그리고 수박 겉 핥기의 정보를 가지는 인간의 산물을 생산한다. 이것은 우리가 동양에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개탄스러운 무지가 없고, 상당히 높은 수준의 일반적인 지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문명으로 부르는 것과 풍부한 문헌들과 많은 과학들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를 만들어냈고, 그리고 (인간 진화의 파도 위에서) 위대한 개인들과 구분되는 위대한 그룹을 만들어냈다. 그 대조가 조야하게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서 양 | 동 양 |
그룹 | 개인 |
문헌 | 성서 |
지식 | 지혜 |
객관적 문명 | 주관적 문화 |
기계적 발전 | 신비적 계발 |
표준화 | 독특성 |
대량 교육 | 특화된 훈련 |
과학 | 종교 |
기억 훈련 | 명상 |
탐색 | 회고 (반성) |
그럼에도 원인은 기본적으로 하나이다—즉 교육의 방법. 둘 다 모두 또한 근본적으로는 옳지만, 둘 다 서로를 보완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동양의 대중들의 교육은 해결책을 크게 요구하는 그들의 물리적인 문제들을 바로잡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다. 아시아의 문맹인 대중들 사이에 도달하는 광범위한 일반적인 교육 체계가 탁월하게 필요하다. 서양에서 개인을 양성하는 것, 그리고 동양에서 우리에게 왔듯이, 혼의 문화의 기법의 강요된 지식을 그의 체에 접목하는 것이 너무나 빠르게 파괴되고 있는 우리 문명을 들어올리고 구원할 것이다. 동양은 지식과 정보의 전달을 필요로 한다. 서양은 지혜와 명상의 기법을 필요로 한다.
이런 과학적 문화적 체계가 우리의 고도로 교육받은 인간들에게 적용될 때, 인간의 가교 역할을 하는 어떤 체를 만들어 낼 것이며, 그들이 두 반구의 성취를 통합하고 주관적이며 객관적인 영역을 연결할 것이다. 그들은 뉴에이지의 개척자로서 역할을 할 것이며, 그때 인간은 그들의 발을 지상에 단단히 세워 둔 채 실무가가 되면서 동시에 신비가와 현자가 될 것이며, 영의 세계에서도 살면서 영감과 깨달음을 일상의 삶 속으로 가져올 것이다.
이런 조건들을 가져오고 결국에는 세계를 구원할 실천적 신비가들의 거대한 그룹의 생산을 위해서, 두 가지가 필요하다: — 토대로서 폭넓은 일반적인 지식을 가진 (그리고 이것이 서양 체계가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적인 명상의 동양 체계를 통해서 성취될 혼, 즉 내재하는 신성에 대한 영적인 인식을 가진 훈련된 마인드들. 서양에서 우리의 가장 큰 필요는 우리가 혼과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직관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하는 데 있다. 이탈리아 수상인 루자티 교수는 그의 가장 가치 있고 학문적인 책, “신과 자유”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 자신 위에 있는 인간의 제국의 성장은 자연 위에 있는 인간의 제국의 성장과 보조를 맞추지 못한다는 것을 모든 것에서 알아차리게 된다.”[13]
서구 세계가 우리 자신의 제국에 대한 이런 정복을 일으킬 수 있는 방식으로 서양의 교육 체계를 완벽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본질적이다.
[1] 루퍼스 존스, [교육에서 영적인 요소의 필요성], 월드 유니티 매거진, 1928년 10월호.
[2] H. 윌던 카르, [변화의 철학], p. 21.
[3] 조오지 비니 디블리, [본능과 직관], p. 128.
[4] 존 허만 랜달, [교육과 종교], 월드 유니티 매거진, 1928년 10월.
[5] 바가반 다스, [아시아 사상의 통일성, 즉, 모든 종교에서], p. 12.
[6] 앨버트 에드워드 위감, [과학의 새로운 대화].
[7] 카운트 헤르만 카이저링, [창조적 이해], pp. 257, 216, 217.
[8] 에버렛 딘 마틴, [자유로운 교육의 의미], 서문 p. VIII.
[9] 월트 휘트먼, [풀잎], p. 10.
[10] H.A. 오버스트리트, [영원한 탐구], p. 114.
[11] 로이드 모건, [생명, 마인드 그리고 영], 서문, p. X.
[12] 로이드 모건, [생명, 마인드 그리고 영], 서문, p. X.
[13] 루이지 루자티, [신과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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