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의 탄생. 뉴 올리언즈 재즈
Birth of the JAZZ
뉴 올리언즈 크레올 재즈는 금세기 초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 올리언즈(New Orleans)에 있는 홍등가 스토리빌에서 태어났다. 원래 흑인 노동자와 노예들 사이에서 불려지던 Work Song(노동요)과 spituals(흑인영가) , gospel(복음성가), 장송곡등과 서양음악이 혼입 융화되어 뉴 올리언즈 전통 브라스 밴드와 융화되어 탄생되었는데 여기에는 뉴 올리언즈에 거주하던 크레올(Creole)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역사학자들은 한참 노예 사냥이 전성기일 무렵 약 1만여 명의 흑인이 신대륙으로 잡혀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 중에 일부는 백인과 결혼해서 혼혈을 낳기도 하고 그들 중에서 유럽의 교육을 받아 문명의 혜택을 받는 혼혈 계층이 나타난다. 바로 이들을 크레올 이라고 한다. 이들은 아프리카 흑인과 유럽, 그 중에서도 프랑스 백인과의 사이에서 생긴 인종으로 재즈를 탄생시킨 종족이기도 하다. 미국의 역사 초창기에 남부지방을 프랑스가 점령했던 것은사실.바로 이 지역에 당연히 크레올이 몰려 있었고 그다지 인종차별이 없었던 프랑스였기에 크레올중에는 유럽에 건너가 고급 교육을 받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남북전쟁 이후, 크레올들이 고등 교육을 받은 사실을 모르는 북부인들은 무조건 피부색을 따져서 당시 그들을 흑인취급을 했는데, 갑자기 변화된 그들의 대접에 크레올들은 상실감에 빠져 거리와 술집 등으로 나오게 되고, 자신들의 애환을 음악으로 표출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유럽에서 공부한 여러 장르의 음악을 가지고 길거리로 나와 브라스를 연주 했던것이 바로 재즈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남부의 흑인 중에서 크레올은 거의 백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던 인텔리였던 것이다. 19세기 말의 뉴올리언즈는 유럽과의 교역으로 흥청대던 항구도시였고, 크레올 또한 많았으므로 자연스럽게 재즈라는 음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재즈는 정확히 말하면 크레올이란 인종이 자신들의 흑인 음악과 유럽 음악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건너온 각 나라의 음악을 혼합시켜 연주했던 장르인 것이다. 뉴올리언즈(New Orleans)는 미국의 영토가 되기 전에는 프랑스의 땅이었으며 프랑스 당국자들은 백인 주인과 흑인 노예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 들을 크레올이라 부르며 흑인신분에서 해방시켰다. 이들은 다른 노예들과 다르게 흑인 특유의 음악과 필링을 갖고 있으며 또한 유럽적인 쳬계적이고 고급스런 음악교육도 받았다. 뉴 올리언즈의 크레올들은 흑인음악의 특성을 유럽적인 전음계 기악 형식 으로 표현하는 초기 재즈 탄생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한편, 1910년대부터 1920년대에는 남부로부터 북부의 공업 도시(시카고의사우스 사이드)로 취업을 하기 위해 다수의 인구가 이주하였는데 이때 유능한 재즈 팬들도 시카고로 이주하여 연주 생활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를 비유하여 재즈사에서는 ‘재즈 엑소더스’라고 말하기도 한다.
초기에는 루이 ‘새치모’ 암스트롱을 중심으로 브라스 밴드에서 탈피하여 솔로 연주를 도입하는 새로운 재즈가 확립되었다. 이를 뉴올리언즈 재즈 ; 혹은;딕시랜드 재즈 스타일이라고 분류하는데 재즈사상 최초의 레코딩은 1917년에 녹음된 ODJB(Original Dixieland Jazz Band) 이었다. 이러한 백인 그룹의 역사적 녹음을 시작으로 시드니 베셰와 쟈니 도즈 형제의 레코드와 루이 암스트롱의 선배인 킹 올리버(Joe King Oliver)의 명연이 녹음 된다. 전설적인 뉴 올리언즈 스타일의 명연주자 벙크 죤슨의 연주도 이런 환경에서 녹음되어 들을 수 잇게 되었다. 그 이전의 녹음은 남아 있지 않지만 어찌되었던 재즈는 탄생되었다.
그러나 1917년 이전의 재즈의 녹음이나 재즈에 관해서 쓰여진 구체적인 자료는 전무한 편이다. 그러나 40년대에 들어서 전술한 트럼펫의 명인 벙크 죤슨을 찾아내어 당시 재즈 스타일을 알수 있게 되었다. 이외에도 기라성 같은 백인 트럼펫티스트 제리 롤 모턴, 흑인 토마스 ‘팻츠’ 윌러, 스카트 죠플린(Scott Jopkin), 제임스 프라이 죤슨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뮤지션이 명멸해 갔다. 특히 이때의 파이노 스타일을 스트라이드 내지는 랙타임(Ragtime)이라고 하여 한 시절을 풍미하기도 했다.
킹 올리버 악단의 활약으로 재즈는 미국 각지에 넓게 확산도어 나갔으며 그 중에서도 희대의 엔터테이너 루이 암스트롱은 20년대를 통하여 뉴올리언즈에서 시카고와 뉴욕으로 진출하여 대 활약했으며 그 지역에 재즈의 뿌리를 내리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특히 20년대 말과 30년대 초까지 이끌어 왔던 밴드 ‘Hot five’ 와 ‘Hot Seven’은 뉴 올리언즈 재즈 초기의 최대 성과로서 오늘날에도 크게 호평을 받고 있다. 결국 루이를 추앙하는 재즈 아티스트들에게 원형이 되었고 현재 전 세계적인 인기를 독점하고 있는 재즈와 고전음악의 기린아 윈튼 마샬리스도 루이 암스트롱에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다.
뉴 올리언즈 재즈의 스타일을 살펴보면, 세컨드 라인으로 베이스 라인과 리듬이 특징이며 거기에 브라스 밴드의 앙상블이 가미되어 한층 더 감흥을 일으키고 있다. 이때 사용된 악기들은 트럼펫(Trumpet) 또는 코넷, 클라리넷(Clarinet), 트럼본(Trombone), 튜바, 드럼(Drum), 벤죠(Banjo), 더블 베이스(Double Bass), 피아노 등이며 중량이나 크기 문제로 거리나 페레이드에서 연주할 때는 피아노가 빠지는게 상식화되었다.
한편 루이 암스트롱 밴드와 더불어 20년대를 대표하는 악단은 제리 롤 모턴(Jelly Roll Morton, 1890 - 1941)의 ‘레드 핫 페퍼즈 (Red Hot Pepper)’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루이 암스트롱 밴드가 솔로를 중시하여 재즈에 솔로 개념을 도입했다면 제리 롤 코턴 그룹은 뉴 올리언즈 재즈의 집단 즉흥연주를 발전시켜 긴밀한 그룹 표현의 전형을 제시하였다.
완성도좋은 초기 재즈의 유일무이한 밴드가 앙상블을 보였으며 셉텟(칠중주단)으로도 오케스트라처럼 풍부하고 놀밀한 사운드를 창출했고 개개인의 솔로 또한 대단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한가지 부연해서 본다면 재즈에서 오케스트라라 하면 10인조 밴드까지를 일단의 캄보 밴드라 하고, 10인 이상으로 편성된 밴드를 오케스트라라고 한다. 흔히 알고 있는 고전 음악에서 심포닉 오케스트라와는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카운티 베이시 앤 히스 오케스트라’, ‘듀크 엘링톤 오케스트라’ 등이다. 솔로 (1인), 듀오 (2인), 트리오 (3인), 쿼텟(4인) , 퀸텟(5인), 섹스텟(6인), 셉텟(7 인), 옥텟(8인), 노넷(9인), 텐텟(10인) 그리고 그 이상을 오케스트라라고한다.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1900 - 1971) 1920년대 뉴 올리언즈 재즈를 비롯해 전 재즈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루이 암스트롱을 보 자. 뉴올리언즈의 불량 소년으로 소년감호소에서 6개월간 코넷(Cornet)을 배운 새치모 는 킹 올리버(King Oliver)를 스승이자 선배로 모셔 실력을 연마하게 되고 1922년 한발 앞서 시카고로 갔던 올리버의 초청으로 그 밴드의 제 2코넷을 담당하며 시카고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무렵 새치모는 올리버의 단순한 주법을 답습했지만 스타카토를 이용하는 힘 있는 연주와 함께 한번만 들어도 확연히 알 수 있는 개성을 전개했다. 이는 백인 트럼펫티스트 먹시 스패니어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던 바가 크지만 스패니어 역시 루이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런 현상을 재영향이라고 하며 재즈계에는 무수히 많은 재영향 뮤지션이 있다. 새치모는 또한 재즈 보컬 중 스캣송을 처음 부른 사람으로 이 스 캣송이 재즈 사에 끼친 영향은 보컬에 국한되지 않고 기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Scat : 의미없는 음절(두비두비 두왓 다 두두----) 등을 즉흥적인 선율에 실어 나열하는 창법, 이 창법은 관악기 소리를 인간의 목소리로 흉내내려고 한데서 비롯 암스트롱이 공연 중 가사를 까먹는 바람에 즉흥적으로 한 것이 그 시초였다고 한다...
이제 동시대를 풍미한 한 사람의 백인 트럼페터(빅스 바이더백), 혜성처럼 나타나 요절한 코넷 , 피아노 연주자로서 코넷은 대게 독학으로 배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1924년 ‘월베린즈’를 결성하여 시카고에서 연주하여 명성이 더 놓아졌고 ‘진 골드캣’악단, 1927년에 ‘폴 화이트맨’악단에서 일하였으나 풀 밴드에서는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심은 대개 앙상블을 견한 짧은 솔로(즉흥연주)에서 그의 음악적 기량을 충분히 엿볼 수 있으며 그가 1927년에 작곡한 피아노곡 ‘In a Mist’에서는 모리스 라벨의 악품으로 착 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유럽풍 음악의 편린을 느끼게 한 수작이다. 그러나 그는 28세로 요절하였다.
또다시 초기 재즈의 흐름을 간파하고 다음에 닥쳐올 스윙시대를 예고한 명 피아니스트 겸 편곡자로 또 밴드 리더로서 일세를 풍미한 그러나 결코 순탄한 생은 아니지만 후세의 스윙재즈의 정형을 제시한 ‘플레쳐 핸더슨’ 을 간단히 소개한다. 1923년에 자기의 밴드를 결성하고 그 다음해 동 밴드에 루이 암스트롱을 영입하였다. 이 무렵 암스트롱은 24세의 나이로 그의 음악적 턴셉트가 확립된 것은 바로 이들의 조우로 인해서 였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핸더슨은 피아노나 불루스 가수의 반주를 훌륭하게 해냈지만, 오히려 밴드의 리더나 편 곡자로서 재즈 계에 미친 공적이 더 높다. 1930년대 그의 밴드 출신으로 배출된 수 많은 연주자들이 재즈 계에서 활약했고 편곡면에서는 자신의 밴드를 시작으로 1935년 베니 굿맨이 스윙의 왕좌에 군림하는데 기초가 되었고 또한 스윙 스타일의 지평을 열어주게 되었다.
루이 암스트롱, 츄 베리, 베니 카터, 콜맨 호킨스, 팻츠 윌러 등이 이 악단에서 재능을 연마하고 기반을 다져서 각자 명인의 기예를 재즈 팬들에게 보여 주었지만 정작 명물 재즈 밴드의 리더인 본인은 54세의 나이로 크리스마스 종소리를 들으며 중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불운했던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