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여기에 수록하지 않았다가 이제 그 眞本을 입수하였기에 비로소 수록한다
정몽주(鄭夢周)
자(字)는 달가(達可) 호(號)는 포은(圃隱) 연일사람 시호는 문충(文忠) 동방(東方) 이학(理學)의 종주(宗主)이다
김 주(金 澍)
호(號)는 농암(聾庵) 선산 사람. 공양왕(恭讓王)때에 예판(禮判)으로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다가 압록강에 이르러 고려의 멸망을 듣고 부인(夫人)에게 조복(朝服)을 벗어 보내면서 편지를 보내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하였으니 부인은 별세(別世) 한 뒤에 이 조복을 들고 합장(合葬)하고 이 글을 발송한 날을 기일(忌日)로 삼도록 해주오. 하고는 드디어 중국으로 들어가 절강(浙江)에서 살았다
이존오(李存吾)
경주(慶州)사람 호는 석탄(石灘) 공민왕(恭愍王) 9년에 등과(登科) 감찰(監察)로서 어지러운 시사(時事)를 규정(糾正)하다 울분으로 병을 얻어 죽었다 뒤에 대사성(大司成)으로 추증(追贈)되고 사우(祠宇)에 향사(享祀) 되었다
정추(鄭樞)
청주(淸州) 사람 시국(時局)이 변해가자 울분으로 등창이 나서 죽었다 시호는 문간(文簡)
최양(崔瀁)
會州사람 號는 소육(昭六) 외숙(外叔) 포은(圃隱)에게 수학(受學)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태조(太祖)가 용흥(龍興)한 뒤에 그의 손을잡고 이르기를 나의 벗 최양이 왔단 말인가하고 田土와 祿을 내렸으나 받지 않고 죽었다 (西山祠)에 향사(享祀)되고 있다
도응(都膺)
성주(星州)사람 초 휘(諱)는 유(兪) 字는 자예(子藝) 진사(進士)로 좌평(左平)에 이르렀다태조가 등극(登極)한 뒤에 다섯 차례나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경창미(京倉米) 1백70곡을 내렸으나 받지 않으므로, 태조가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청송당(靑宋堂이란 호(號)와 아울러 시(詩) 1절을 내렸으니 이르기를푸른 솔나무 곧은 절개 사랑스러워, 곧은 줄기 손으로 어루만지네 찬 뫼부리 천길되는 산마루에는 찬서리 눈마져도 꺽지못하네라고 하였다
길 재(吉 再)
字는 재부(吉夫) 호는 야은(冶隱) 선산(善山)사람 御賜田에 대나무를 심었고, 국화로 佰夷에게 祭를 드렸다고려가 망하려 하자, 注書로서 벼슬을 버리고 歸鄕하여 金烏山에 숨었다賜額書院이 있다
남을진(南乙珍)
임선미(林先味)
원천석(元天錫)
조의생(曺義生)
맹유(孟 裕)
溫陽사람 文科에급제, 상서(尙書)를역임(歷任)그 아들과 함께 隱居하였다
이사지(李思之)
碧珍사람 호는 여은(麗隱) 벼슬이 郞將에 이르다그 아버지 희경(希慶)은 고려의 원수(元帥)로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남정(南征)하고 돌아오다 잔적(殘賊)에게 해(害)를 입었다혁명(革命)초기에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었다
도동명(陶東明)
호(號)는 쌍희당(雙檜堂)문학(文學) 효행(孝行)으로 남대장령(南坮掌令)이 되었다가 고려의 국운(國運)이 다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여러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명의록(名義錄)에 자세히 기록(記錄)되어 있다
김자수(金自粹)
자는 순중(純仲), 호는 촌상(村桑)경주(慶州) 사람벼슬은 대사성(大司成)충청도(忠淸道)관찰사(觀察使)로 고려가 망해가는 것을 보고 안동(安東)으로 퇴거(退居)하였고 어머니상을 만나 3년 시묘(侍墓)하였다이 사실이 알려지자 정려(旌閭) 되었다
장안세(張安世)
옥산(玉山) 사람 벼슬은 덕령부윤(德寧府尹) 나라가 망하자 은거하여 그 뜻을 이루었다
순종(純宗) 갑오(甲午)에 충정(忠貞)이란 시호(詩號)가 내려졌다
국 유(鞠 孺)
태조가 부르자 자기집에 불을 놓고 피하였다 자손은 담양(潭陽)의 이속(吏屬)에 예속되었다
정 광(鄭 侊)
호는 건천(巾川) 벼슬은 시사(侍事 고려때 감찰(監察司) 사헌부(司憲府)의 종5품 벼슬)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도망갔다
한철중(韓哲中)
호는 몽계(夢溪)벼슬은 전서(典書)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다가 죽은 뒤에 상주(尙州) 백원산(白原山)에 귀장(貴葬)되었다
나천서(羅天瑞)
안정백(安定伯)고려가 망한뒤에 그 아들인 합문지우(閤門祗候) 직경(直卿)과 함께 은거하였다
성 부(成 溥)
벼슬은 형조총랑(刑曹摠郞) 고려가 망한뒤에 태조가 대간(大諫)으로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뒤에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추증되었다
이명성(李明成)
공주(公州)사람 벼슬은 감찰어사(監察御使) 지제고(知製誥)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이천(伊川)으로 돌아갔다.
이 색(李 穡)
호는 목은(牧隱) 높은 소나무 밑에 석대(石坮)를 쌓아 놓고, 서쪽으로 창연(蒼然)한 들판을 바라보네, 저 수양산(首陽山)의 고죽(孤竹)을 가르키니, 어느 누가 그 유래(由來) 분별하려나라고 읇은 시(詩)가 있다
정 지(鄭 地)
錦城사람) 해도원수(海島元帥)로 태조의 위화도(威化島)회군(回軍)을 적극찬성 하였으나, 개국훈록(開國勳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시호는 경렬(景烈) 광주(光州)에 향사(享祀)되었다.
하목종(河目宗)
진주사람 호는 목흡(目翕) 벼슬은 재부상서(宰府尙書) 고려 말기에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이양중(李養中)
호는 석탄(石灘)廣州사람 벼슬은 형판(形判) 이조(李朝) 초에 광주(廣州)에 은둔(隱遁)하다가 찬배(竄配) 되었으나 굽히지 않았다
김진양(金震陽)
자는 자정(子靜), 호는 초옥자(草屋子) 계림(?林)사람 벼슬은 좌상시(左常侍) 이확(李擴) 등과 조준(趙俊).정도전(鄭道傳) 등을 유배(流配)토록 탄핵하였고 포은(圃隱)이 피해(被害)되자 원지(遠地)에 장류(杖流)되었다 얼마 안되어 죽었다
안 성(安 省)
한쪽 눈이 작은 때문에 태조가 성(省)자로 명명(命名)하였다 평양백(平壤伯)에 봉(封)했으나 나오지 않았고, 청백록(淸白錄)에 들어갔다
이사경(李思敬)
전의(全義) 사람 호는 송월당(送月堂)
조승숙(趙承肅)
자는 경부(敬夫), 호는 덕곡(德谷) 함안(咸安)사람 어찌 3월 무군의 탄식이 없으랴마는, 명예 구하는 일이 걸번보다 더 부끄러워라고 읇은 시(詩)가 있다
허 징(許 徵)
고려가 망하자 순검(巡檢)으로 길주(吉州)에 은둔(隱遁)하였다뒤에 광주(光州)로 물러나 살았다
맹희도(孟希道)
전교령(典敎令)으로 고려가 망한 뒤에 동포(東浦)로 물러나 살았다
김약향(金若恒)
판사복사사(判司僕寺事)로 명나라에 들어가 중서랑(中書郞)과 맞서서 굽히지 않았다 뒤에 안동(安東) 금계촌(金?村)으로 물러나 살면서 대나무와 잣나무를 심고 백당(柏堂)이라 자호 하였다 흥해(興海)사람
이석지(李釋之)
영천(永川)사람 보문제학(寶文提學)으로 고려가 망하려 하자, 벼슬을 버리고 용인(龍仁) 남곡(南谷)으로 돌아간 후 남곡(南谷)이라 자호 하였다
이 행(李 行)
자는 주도(周道) 여주(驪州)사람 호는 기우(騎牛) 고려가 망한 뒤에 태조가 맨 처음 방문하였으나 나오지 않았다 시호는 문절(文節)
변 숙(邊 肅)
김광치(金光致)
낙성(洛城)사람 그 형인 상락백(上洛伯) 득배(得培)와 함께 인적(仁賊)과 倭寇를 평정하였고, 고려가 망한 뒤에 尙州로 물러나 살았다
이종학(李種學)
이양소(李陽昭)
진사(進士), 태조와 동방(同榜) 영천(永川) 청화동(靑華洞)에 물러나 살았다 태조가 그 집에 거동(擧動)하여 시주(詩酒)로서 서로 즐기고 곡산군수(谷山郡守)로 제수하자, 소(牛)를 타고 가서 부임한지 3일만에 그만두고 돌아와 은행정(銀杏亭)에서 일생을 마쳤다 태종이 은행정에 거동하여 가을비는 반쯤 개고 사람은 반쯤 취했다는 시를 부르자 그가 화답하기를 밤빛이 막 동하고 달이 막 떠오르네하였는데 달이 막 떠오른다고 한 월초생(月初生생)은 태종의 애희의 이름이었다
민 유(閔 楡)
부원군(府院君) 고려가 망하려 하자 통진(通進) 봉상리(鳳翔里)에 물러나 살았다
문익점(文益漸)
남평(南平)사람 강성군(江城君) 호는 대비재(大庇齋) 일찍이 중국에 사신으로 들어갔다, 붓대 속에 목화씨를 숨겨 가지고 돌아왔다 고려가 망한 뒤에 향리(鄕里)에 돌아와 은거(隱居) 하였고 호는 삼우당(三憂堂) 시호는 충선(忠宣)
임귀연(林貴椽)
나주(羅州)사람
조희직(曹希直)
정언(正言)으로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소(疏)를 올려 간승(奸僧) 신돈(辛旽)을 배척하다가 진도(珍島)에 찬배(竄配) 되었고, 성조가 등극 한 뒤에 가흥(嘉興) 물가에 압구정(狎鷗亭)을 지어 놓고 일생을 마쳤다
김사렴(金士濂)
김승길(金承吉)
성사제(成思齊)
조유(趙瑜)
김제(金濟)
조철(趙鐵)
범세동(范世東)
구홍(具鴻)
윤충보(尹忠輔)
김충한(金忠漢)
유 순(柳 珣)
박문수(朴門壽)
호는 송암(宋巖) 두문사람
민안부(閔安富)
채왕택(蔡王澤)
벼슬은 영호군(領護軍) 고려가 망한 뒤에 바다를 건너 임피(臨陂)에 은거하였다
송 교(宋 皎)
벼슬은 전서(典書) 여산(礪山)에 물러나 살았다
최칠석(崔七夕)
전주(全州)사람 칠석날에 마도(馬島)를 쳐서 큰 공을 세워 칠석이란 이름이 내려졌다
차원부(車原부)
沿岸사람 호는 운암(雲巖) 벼슬은 간의대부(諫議大夫) 성조(聖祖)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김자진(金子進)
광산(光山)사람 벼슬은 사평(司平) 고려가 망한 뒤에 나주(羅州)에 물러나 살았는데 그 밭과 산(山). 정자(亭子) 등을 다 여(麗)자로 이름하였다
조윤(趙胤)
* 조윤은 조연(趙捐) 또는 조견(趙狷)으로도 기록되어 있고, 또는 '趙 '자만 기록되 있기도 한다.(경산 주)
김약시(金若時)
정온(鄭溫)
이연(李涓)
송인(宋寅)
곽추(郭樞)
채귀하(蔡貴河)
다의촌(多義村)에 은거하면서 그대로 호를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