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는 그림에 교묘한 자로 그 이름은 안지 오래다. 30년 전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회사에 속한 일은 모두 홍도로서 주장하게 하였다" (홍재전서 / 정조 24년) |
그 후에도 정조가 죽을 때까지 그의 명에 따라 그림을 그리고, 든든한 서포트를 받으며 정조의 초상을 연속해 그리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봤던 풍속화들은 그가 30대에 그린 "풍속첩"에 들어있는 그림들이에요. 참고로 이 분은 다양한 장르의 그림들을 다 소화해내는 걸로도 유명하답니다. 풍속화나 감상화, 초상화 뿐만이 아니라 산수화나 화조화나 불화 등등..... 그야말로 몇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셨던 거죠.
재미있는 건 정조가 초상화를 제작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 김홍도 외에 여러 화원들 중 "신한평"의 이름이 거론되어 있다는 겁니다. 신한평은 극중에서 의문의 사고로 부모를 잃은 신윤복을 맡아 키우는 양아버지가 되셨지만 실제로는 신윤복의 아버지로, 초상화에 기량이 뛰어났다고 해요.
이미 20대부터 이름을 날린 그는 40대에도 장안의 명사였습니다. 여러 사대부들의 모임에 초대되어 훌륭한 그림으로 자리를 빛내줬다고 해요. 그러다가 45세에 정조에게서 금강산을 그려오라는 명을 받아 선배화원이자 동료인 김응환과 함께 금강산에 가 멋진 그림을 그려낸 것까지는 좋았으나!! ....순조 때에 화재가 나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아까워라;ㅁ;
김홍도는 얼마 후에 정조의 치밀한 프로젝트 아래에서 진행되는 일을 맡게 됩니다. 바로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용주사'(경기도 화성)라는 절을 짓는 프로젝트인데, 구조가 궁궐과 같아서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또 하나의 '궁궐'을 만든 것으로 추측되고요. 그 절의 대웅전에는 특별한 그림이 하나 있으니, 바로 후불탱화. 그 그림을 김홍도가 총감독하고 그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건 그 후불탱화가 서양화법인 원근법과 명암법을 이용했다는 거에요.
대체 무슨 수로 김홍도가 서양화법을 익혀 탱화에 실사용했나 했더니, 후불탱화를 그리기 전 정조가 서양문물이 대거 유입되고 있던 청나라로 김홍도를 보내줬다는 기록이 있다고 해요. 그냥 보낸 게 아니라 아버지를 모실 절에 그리는 탱화에 서양기법을 이용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미리 계획을 하셨던 셈인 거죠. 정조의 치밀함이 만들어낸 하나의 퓨전 예술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싶습니다.
후불탱화를 퍼펙트하게 완성해낸 46세의 김홍도에게, 정조는 큰 선물을 하나 내립니다. 바로 중인출신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직책인 정 6품, 현감 벼슬을 얻게 된 거죠. 그가 맡은 곳은 '연풍'이라는 작은 산골마을이었는데, 당시 그곳은 가뭄으로 백성들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 때 관청의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눠주는 식으로 위기를 해결하다가, 안되겠다 싶자 기우제를 지냈다고 해요. 이 때 개인적으로 자식을 갖고 싶다고 빌었는데 신통방통하게 그게 이뤄져, 48세라는 나이에 건강한 아들 하나를 가지게 됩니다. 그 아들이 바로 아버지를 이어 화원이 된 김양기에요.
그런데 부임하고 몇 년 뒤에, 충청도를 감찰하던 홍대협이 그의 실정에 대해 악평을 담은 상소를 올리게 됩니다. 고을수장 주제에 중매를 하고 노비와 가축을 상납케 하며 사냥을 즐겨 원성이 크다는 내용인데, 객관적으로 봤을 때 좀 무능하다 해도 대단한 실정이라고까지 할 것들은 아닌지라 중인의 화원 나부랭이가 현감 벼슬을 하고 있는 게 거슬려 그런 게 아니냐는 의견이 있더군요. 개인적으로 동감인 부분입니다. 실제로 그 뒤에 올라온 상소 내용의 첫머리가 "저자는 비천하고 미미한 환쟁이로...."였거든요. 무능력하다는 말은 그렇다치겠는데 저런 말이 왜 필요하냐?
어쨌든 이 상소로 그는 현감 자리에서 물러나 처벌을 받을 위기에 처하지만, 정조의 재빠른 대응으로 처벌 없이 파직만 당하는 것으로 현감생활을 마무리합니다. 그 후에는 다시 화원으로서 활동을 재개하죠. 그 재개한 첫활동이 바로 사도세자 능으로 행차하는 "능행도"를 그린 일이었답니다. 이 능행도 그림은 '화성원행반차도'라 불리는 두루마리 그림으로 남아있는데, 그림이 매우 자세하고 섬세해요. 여러가지 면에서 의미가 깊은 그림이고:)
김홍도가 중요한 나라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면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준 정조. 현감자리에서 물러나 50대가 된 김홍도에게 일부러 직책을 만들어 일을 맡기기까지 하며 그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죠. 그가 일생에서 그리 중요하게 여기던 화성건설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것도 김홍도에게 일임했고요. 이산에서는 그냥 정약용만 나오다 말았지만 김홍도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답니다.
그러나 정조라는 든든한 날개를 달고 훨훨 날던 김홍도는, 정조가 49세라는 나이로 세상을 떠나며 동시에 힘을 잃게 됩니다. 정조가 죽은 후로는 초야에 묻혀 병마와 고독으로 둘러싸여 그림으로 그것들을 승화시키는 말년을 보내죠. 그래서인지 그의 말년 그림들은 소탈하고 어딘가 초월한 듯한 느낌이 들어요. 경제적으로도 많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60세 되던 해(순조 4년)에 다시 특별 공직자로서 규장각에 복귀해 그림작업을 했는데, 61세가 되던 해에 다시 병이 생겨 규장각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정확한 사망년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충 60대 초중반에 사망한 게 아니냐는 설이 유력한 모양입니다. 마지막 그림은 '추성부도'라는 작품이니 관심 있으시거든 한 번 찾아서 보시기 바랍니다:D
그러고보면 김홍도는 당연하겠지만 스승이자 백아절현의 공감대를 나눈 강세황도 먼저 보내고, 죽을 때까지 적극적으로 자신을 지지해주고 이해해준 정조도 먼저 보내고 말년을 쓸쓸하게 보냈으니 이 부분은 인간적으로 좀 안타까운 부분이네요. 물론 그 고통이 그림의 경지를 끌어올리는데 일조한 것도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그의 재치발랄한 풍속화도 좋아하지만 말년에 등장한 그림들도 정말 좋아하거든요.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를 이끈 정조와, 그 뒤에서 조선시대 미술의 르네상스 시대를 이끈 김홍도의 관계는 이런 '사실'들만 해도 꽤 재미있어요. 뭐....쓰다보니 저는 얄팍하게 내용이 끝나버렸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좋은 이야기들이 많답니다. 드라마에서는 그저 김홍도와 신윤복의 관계로 이야기의 중점이 진행되겠지만 저는 다른 의미에서 정조와 김홍도의 그 관계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즐거웠던 것 같아요. 드라마 자체의 재미 여부룰 떠나, 과연 이 안에서 정조와 김홍도의 관계가 얼마나 심도있게 그려질지. 아니면 그냥 윤복이랑 짝짜꿍 놀다 끝날지는 조금 궁금해집니다.
참고서적 : 우리나라의 옛 그림(이동주), 화인열전(유홍준), 한국사전(KBS), 네이버 백과사전
▲ 김홍도의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견본수묵담채, 90.4 x 43.8cm, 호암미술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