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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 뉴스정보 스크랩 용호동(龍湖洞)의 염전(鹽田)
박두춘 추천 0 조회 179 12.11.22 22: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남천동 금련산에서본 용호동 염전전경 

 

 

 

조선해수산조합본부건물 저멀리 보이는산이 동산과동산말 이건물지는 소랑강어구로 추정 

 

 

환경공당 용호 염전 동이에 간핀 모래를 모으고 운반하여 바닷물을부어 서슬을 받는모습 밀대를자세히보면 한쪽은 평밀대 반대쪽은 거치밀대

 

 

메트로시티부근 염전 동이의 모래를 펴는 인부들 (저멀리금련산과 남천동 비치아파트앞산)

 

 

용호동 364번지 일원의 염전 

 

 

 

 소금을 굽는 4각 가마 무연탄이나 화목으로 온도 조절하여씀

 

용호동(龍湖洞)의 염전(鹽田)

일본 침탈(侵奪)시대 염소고 방식 의 염전5곳이 있었다.

구전(舊傳)으로 전해오는 염전은 거득분.신분.강개분(광개분)보리분,등분 이며

일제(日帝)는 염소고 방식의 제염생산(製鹽生産)의 요지(要地)분개(盆浦)의 이권(利權)을 그냥 둘리가 없었다.

조선침탈(朝鮮侵奪) 직후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는 이곳에 시험제염용호출장소(試驗製鹽龍湖出張所)를 설치하여 염소고 방식(日本入演式)으로 염전(鹽田)7천1백23평에 시험생산(製鹽試驗) 을 시작 하였다.

조선시대는 염전 한 개에 동이가 5~6개정도로 동이간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1907년부터 같은 염전에30~ 40여개의 동이를 만들어 소금물 걸음통(동이)간의 거리는 사람의 힘으로 모래를 뿌릴 수 있는 거리의 두 배 거리로 하여 작업 환경을 고려하였다.

분개 염전 이권을 노린 자는 노일전쟁(露日戰爭)에 종군 했다가 제대하고 1906년3월 부산에 건너와 영도에 재제염 공장 을 설치하여 이윤을 올리고 있던 白石馬怠郞 이라는 자와 그의 동생 白石漢次浪및 星野政太浪다 .

이들은 총독부(總督府)의 권력을 이용하여 분개 염전을 손아귀에 넣고 주변을 확장하여 2만여 평의 염전을 만들었다.

염소고 방식을 전오제염법(煎熬製鹽法)이라 고도한다.

일반 천일염의 생산 과정은 바닷물을 염전에 가두어 바람과 태양에 의한 수분의 증발에 의하여 소금 결정을 얻는다. 그래서 뜨거운 햇빛과 바람이 불지 않을 때 생산한 소금이 일등급이며 ,대량생산을 위에 염전 바닥을 검은 큰 타일을 이용하여 증발열량을 높이기도 한다.

그러나 분개(용호동의옛이름)소금은 바닷물의 고 염도를 높이는 과정이 저수조가 아닌 개흙 모래를 이용하여 모래의 표면의 소금물이 염도가 높도록 곡식을 말리듯이 여러 번 소금물을 뿌려가며 수분을 증발시킨다. 이때 평 밀대와 거치 밀대를 이용하여 써레질을 하였다

분개염전은 건식 제염법이며 대량 생산 가능한 천일염의 제염 법은 습식 형이다.

(염전(鹽田) 만들기)

염전 가공법은 전답을 바다보다 높게 정지하여 평평하게 고르고 사방에는 둑을

쌓고 바닷물이 흘러갈 수 있도록 둑을 따라 사방에 도랑을 만들었다.

경지 정리한 논처럼 만든 밭에 , 체를 이용하여 돌과 자갈을 골라낸 고운 황토 흙을 약2cm~5cm정도 깔아 물을 뿌리며 다져 수평을 이루도록 하여 말린다.

타작마당을 만드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여 갈라지지 않고 단단하도록 한다.

이것이 염전이다.

염전도랑 입구는 관문을 만들어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갈 수 있도록 하여 도랑에 바닷물을 가두어 염도를 올렸다.

평평하게 정지된 바닥에 자갈이나 불순물이 없는 고운 개흙 모래를 깔아 도랑에 들어온 소금물을 뿌리고 모래를 섞으며 말리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여 하얀 소금 꽃이 필 때까지 한다.

모래 표면에 하얀 소금결정이 생기면 소금물 걸 음통(盆동이)에 모래를 수집하여 모아 바닷물을 뿌려 소금성분을 씻어낸다.

씻겨 내려온 소금물은 탱크(서슬실)에 모아 가득 찰 때 까지 여러 차래 반복한다. 소금물이 빠진 모래는 다시 염전에 평삽으로 뿌려 바닷물을 뿌려가며 수분을 증발시키는 과정을 계속한다.

서슬 통에 송진을 넣어 뜨면 물 소금으로 가마로 운반 한다.

염전의 크기에 따라 수십 개의 소금물 걸 음통(盆동이)이 있어 가득모인 소금물을 4각 철통에 토기를 입힌 가마(琺瑯법랑)에 부어 불을 지펴 끓여 소금을 구웠다

그러나 주먹 무연탄 열량의 온도 굴곡이 많아 법랑 이 떨어져 철판 가마솥이 되었다. 가마솥의 높이는45cm 정도 이었으며 사방 크기는 염전마다 달랐다. 결정이 이루어지면 여망이(소금굽는기술자)는 불을 조절하여 소금이타지 않도록 하였다.

소금물 걸 음통(盆동이)은 크기가 사방4m정도이며 높이는 약 1m미만이고 내부에 자갈을 깔아 수집 통으로 소금물이 잘 흐르도록 하였으며 표면은 모래를 다져 단단하도록 하였다. 가마솥 옆 간수 통에 2개의 나무 물통이 달린 물 지개로 일꾼들이 염수를 지다 날랐다.

염전이 가마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관의 높이를 기울도록 조절하여 간수가

흘러 갈 수 있도록 삼각발의 목대를 설치하였다.

이렇듯이 일조권과 일광에 의존하여 생산하는 고 염수는 기후의 변화에 취약하고 여름 장마철과 겨울에는 휴 염전이 된다.

장마철이면 가마니 발을 염전에 덮어 침식을 방지하여 염전표면을 보호하였다.

휴 염 기간에는 염전을 수리하고 둑을 손질하여 생산가능한 시기에 성과를 올릴 준비를 개을리 하지 않았다.

북쪽지방에서는 염전고랑에 바닷물을 받아 한겨울동안 얼음을 걷어 내어 서슬을 만들어 이른 봄에 끓여 소금을 생산하기도 하였다(냉동서슬법)

 

염소고 방식으로 제염한 소금은 간수(서슬)가 없는 고밀도의 미네랄이 함유되어 단맛이 난다.

전오제염법(煎熬製鹽法)은 생산량에 비해 만은 노동력이 필요하고 가동시기가 한정되어 천일염 공정에 밀려 문을 닫았다.

1963년 철강회사 가 염전을 밀고 공장을 건설하면서 염전은 하나 둘 식 사라져 갔다

LG메트로시티 아파트 대단지 도로변과, 환경공단 용호 하수 처리장 ,그리고 용호1동 시장터가 염전이었다.

용호동 50번지일원과 364번지 일원의 두 개의 염전은 1950년 초에 염전이라기보다 운동장으로

통별 대항전 운동회와 겨울에는 물을 받아 설매와 스케이트장으로 어린이들의 놀이 터였다.

휴 염전 터와 염전 둑에는 염생식물 함초(퉁퉁마디).칠면초,나문재.해홍나물등이 번식하고

염전 둑 바다 쪽 해안가 에는 염도가 높은 소금물을 좋아하는 고둥이 있었다.

갈대밭 에는 엽낭게와,칠게,농게,말똥게등 다양한 갑각류가 서식했다.

 

소금 창고지기 큰개(犬)를 메어두고 거위도 키워 소금 도둑을 지켰다

그래도 소금창고에 도둑이 들었다는 소문을 자주 들었다.

분개의 소금은 단순한 소금이라기보다 귀한 약 이었다.

장 담그기와 김치 등 한국 조림 음식에는 최고의 조미료(간보기) 이었다.

소금 판매는 용호동 부녀자들이 소금 장수로 소량 방문 판매하였다 ,

아침 일찍 머리에 이고“소금 사이소”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며 팔아 생활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

노동자들은 생활환경이 열악하고 고정 수입을 얻을 수 없었다.

소금은 사신(邪神)이나 마귀를 쫓는 힘이 있다고 믿어 나쁜 것을 쫓는 데 소금을 뿌리는 습관이 있다.

국가 경제가 농업에서 공업으로 전환하기 시작한다.

1961년을 기점으로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기 어렵고 제염작업에 필요한 화목의 가격이 상승하여 염전의 염수로 소금을 굽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소금을 주원료 로 하는 각종 화공 제품의 수요가 증대하자, 소금공장은 염산.황산등을 제조하기 시작 하였다. 국내에서 생산원가 가 높은 염소고 방식의 제염으로는 기업의 이윤을 낼 수 없었다.

원료는 값싼 암염(岩鹽돌소금)으로 대체하였다.

일부 제염회사는 암염을 물에 녹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재가열하는 재제염법으로 소금을 가공하여 전오제염으로 소비자를 속였다, 이렇게 가공한 소금은 미네랄이 극소수의 함량으로 식용이라기보다 공업용 소금에 적합하였다.

이때부터 용호동 소금의 방문 판매는 종지부를 찍었다.

“소금 사 잇소. 소금 분 깨소금이요”.지친 아낙내의 구성진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가가호호 밥상의 된장과 간장의 맛에 불만이 많아지고 때맞추어 메주콩 경작지도 줄어, 옛 맛을 그리워하는 가정이 늘어났다. 분개 소금 맛은 추억으로 남았다

 

염전은 맛의 추억과 동심의 추억이 공존 한다

용호동 북쪽해안은 부드러운 개흙 모래밭으로 백합조개와 맛조개, 절지동물 쏙 의집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었다. 푸른 섶자리 밭에는 각종 고둥과 꽃게가 모래톱에 숨어 있었다.

썰물 때면 목까지 차는 물속에는 잘피(거머리 말)밭이 있어 구석구석에 해마가 매달려 있었다.

잘피의 검붉은 뿌리는 입술과 혓바닥이 물들도록 씹어 달짝지근한 국물만 삼키고 건더기는 뱉었다. 아낙네들은 분개 소금으로 담군 된장을 붓에 적셔 쏙의 구멍에 넣으면 속도 장맛을 알고 구멍 밖으로 나와 잡혔다. 맛 조개도 소금의 맛을 알았다 ,럭비공과 닮은 구멍에 분개 소금을 넣으면 구멍 밖으로 나왔다.

바다 속 에서도 분개 소금은 소문이 나 있었다.

휴 염전 은 밀 물때 물 따라 염전고랑으로 들어온 다양한 물고기를 잡는 재미가 좋았다.

썰물이 되면 고기들이 물을 따라 염전 밖으로 나가기 때문에 관문에 싸리 발채나 대 발채를 통발처럼 막아 물고기의 탈출을 막아 물이 대부분 빠지고 나면 움푹 파인 곳에 고기가 모여 있어 잡기가 쉬웠다. 작은 고기는 강아지풀에 끼워들고 큰놈은 잘피 꽃대에 끼워 메고 집으로 왔다

그러나 칭찬보다는 바다에 아이들 끼리 놀다 온 것이 내심 걱정 되어 꾸지람만 하였다.

그래도 내일을 꿈꾸며 깊은 잠에 들었다.

서슬(간수) 서슬실(간수통) 간수는 일본식글

끝201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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