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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오프라인 학습용 영상]
팔만대장경이 있는 합천 해인사로 현장학습가요! _ 2편
1탄에 이어 2탄에서는
목판인쇄와 팔만대장경에 대해 좀 더 깊이 알아볼 거예요.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듯이
알고 보면 훠얼~~씬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요.^^
자! 그럼 팔만대장경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된 대장경 테마파크로 가볼까요?
대장경 테마파크 안에서는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인형들을 통해
대장경을 새기는 전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어요.
이제 대장경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함께 살펴볼게요.
이 스님은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요?
팔만대장경에 새겨 넣을 내용을 정하기 위해
불교 경전의 내용을 수집하고,
팔만대장경을 만드는 첫 작업인 교정을 하는 거예요.
새롭게 만드는 대장경이니 만큼 완벽한 대장경을 만들기 위해서
학자와 스님들이 심혈을 기울여
여러 판본을 보고 틀린 글자나 내용을 바로 잡는 거예요.
대장경판을 새기는 사업은
고려 고종 23년부터 38년이라는 16년 동안 진행되었는데
그 중 4년은 무엇을 새길까를 정하는 교정 기간이었으니
무척 어려운 작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러고 보니 8만 장의 경판을 겨우 12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새긴 것이네요.
엄청 고생했다는 것이 느껴지나요?
목판을 만들기 위해 웃통을 벗고 나무를 자르고 있어요.
나무를 보니 도끼질을 여러 번 해야 될 만큼 튼튼하고 곧게 잘 자란 나무지요.
30년 이상 자란 나무를 사용해야
두꺼운 목판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튼튼한 거예요.
나무를 벨 때는 성장이 멈춘 겨울에 벤 다음
바닷물과 강물을 이용해 판각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나무를 운반했어요.
이렇게 운반된 나무는 바로 목판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닷물 속에 2년 동안 담근 다음 소금물에 삶아서 말릴 때 갈라지는 일을 막았어요.
소금물에 삶은 다음에는
목재 안에 스며든 수분이 적당히 마르도록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1년 동안 건조시켰어요.
그래야 나무가 비틀어지거나 썩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나무를 벤 다음
3년 이상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목판을 만들 수 있었던 거네요.
건조된 나무를 알맞은 크기로 자른 다음 대패질을 하고 있어요.
대패로 꼼꼼하게 깎아내면 반들반들하고 평평한 판자가 만들어지겠지요?
종이를 만드는 과정이에요.
목판을 만드는 데는 종이가 아주 중요한 재료였는데,
종이 공장이 없던 옛날에는 종이도 사람의 손으로 직접 만들었어요.
우리나라의 전통 종이인 한지는 닥나무로 만들어요.
먼저 닥나무를 삶은 다음
껍질을 벗겨내고 계속 두들기면 찐득찐득한 덩어리가 되는데,
여기에 닥풀을 섞고 삶아서 묽은 종이죽을 만들어요.
그리고 묽은 종이죽에 고운 체를 넣고 조심스럽게 뜨면
체 위에 얇고 고르게 종이죽이 퍼지게 되는데 이걸 말리면 한지가 되는 거에요.
한지를 만들 때 두께가 일정하고 잘 찢어지지 않아야 좋은 종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학자가 종이에 불경을 베껴 쓰고 있어요.
이것을 판하본이라고 하는데 종이에 베껴 쓴 후에 목판에 붙이는 것이지요.
여러 사람이 판하본 작업에 참여했는데
팔만 개의 목판에 새겨진 글씨가 한 사람이 쓴 듯이 모두 일정하다고 하니
그저 감탄만 쏟아지네요.
종이에 쓴 글을 목판에 새기는 판각작업을 하고 있어요.
판하본 한 장에 글씨를 모두 쓰면 풀칠해서 판하본을 판목을 붙여요.
그런데 판하본을 목판에 뒤집어 붙이네요.
뒤집어 붙인 판하본으로 글씨를 새기니
목판에 거꾸로 된 글씨가 새겨지는데 왜 종이를 뒤집어 붙였을까요?
완성된 후에 먹물을 묻혀서 인쇄해보니 어떤가요?
글씨가 올바르게 인쇄되었지요?
이제 왜 판하본을 거꾸로 붙였는지 이해가 되나요?
도장을 찍는 원리를 생각하면 돼요.
그런데 잘 못 써진 글자가 있으면 어떻게 하나요?
경판을 도려낸 후 글자를 다시 써서 그 자리에 붙이지요.
이러한 정성이 들어있기 때문에 대장경판에 새겨진 글자는
모두 5천 2백만 자 정도인데 한 글자도 틀린 글자가 없대요.
정말정말 대단한 문화유산이에요.
경판을 다 만들었으니 어떻게 하나요?
인쇄해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어요.
대장경판에 새겨진 글자는 모두 5천 2백만 자 정도인데
이 글자를 한 줄로 쭉 늘어놓으면 서울부터 부산까지를 왕복할 수 있다고 해요.
그런데 왜 팔만대장경을 만들었을까요?
지도를 보세요.
몽골족이 살던 지역은 어떤 기후였을까요?
우리나라보다 북쪽이니 춥고. 땅의 한 가운데에 있어요.
그러니 농사가 잘 안되었고 먹고 살게 넘쳐났을까요, 부족했을까요?
초원지대에 살던 이들은
유목이나 무역을 하며 살기도 했지만 항상 먹을게 부족했어요.
그래서 혹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인한 정신과 불굴의 체력으로 버터야 했어요.
그런데 개개인의 부족들이 뛰어나서
아주 뛰어난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이 부족들을 하나로 뭉치기가 힘들었어요.
이때 몽골 초원에 칭기즈칸이 나타난 거예요.
그러니 어땠을까요? .
몽골족이 동, 남, 서쪽으로 마구 영토를 넓히지요?
칭기즈칸이 워낙에 뛰어났었기 때문에
이들을 강력하게 이끌면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나라로 발전시켰어요.
게다가 몽골인은 세 살부터 말을 타기 시작하여
소년이 되었을 때면 자신의 손발처럼 자유자재로 말을 부릴 수 있었어요.
한 사람이 서너 마리의 말을 이끌고 가다가
타고 있는 말이 죽으면 옆의 말로 갈아타고
적진으로 돌격해 들어갔으니 엄청 빠르고 강했어요.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점령했던 몽골이 어디를 침략했나요?
어머머~~고려를 침략하네요.
몽골의 침입 경로를 기록한 지도를 보면 개경이 보이지요?
첫 번째 침입 때 몽골이 기세등등하게 쳐들어 왔어요.
그러니 어떡하겠어요?
이 위기를 무사히 넘기기 위해 고려정부는
몽골에게 많은 선물을 주며 강화협상을 하자고 제의했어요.
몽골은 이 제의를 받아들이고 철수했어요.
그런데 지도를 보니 고려 정부는 어떻게 하나요?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네요.
그리고는 팔만대장경을 만들었어요. 왜 그랬을까요?
부처님의 힘으로 몽골을 몰아내고자 만든 거예요.
이쯤 되면 종교가 나라를 지키는 역할도 했다는 거네요.
이것을 호국불교라고 해요.
팔만대장경을 만든 또 다른 이유도 있어요.
어떤 이유인지 볼까요?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면서 고려정부는 부려 먹을 백성들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20일 안에 강화도로 이사하지 않으면 군법으로 처리한다."
라고 하며 개경 주민들을 강화도로 이주하도록 했어요.
당시는 여름이어서 장마비가 열흘 정도나 내렸다고 하니
백성들의 모습을 보니 어떤가요?
지쳐서 말도 죽어 있고, 여기 어린 아이는 힘들어 주저앉았어요.
발목까지 진흙에 잠길 정도로
눅눅한 땅에서 짐을 싣고 이사해야 했으니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요?
그렇다면 남아있는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고려조정은 피난을 가면서 백성들에게는
지금 살고 있는 곳을 떠나 섬이나 산성으로 들어가 몸을 지키도록 했어요.
그러나 그곳에서 버틸 만큼
충분한 식량이나 물을 준비하지 못해서 백성들은 무척 힘들게 살았어요.
그뿐 아니라 몽골군이 없을 때에는 농사를 지어야 했고,
강화도로 피난 간 고려정부에 세금도 꼬박꼬박 내야 했어요.
더 힘들었던 건,
고려정부가 강화도로 피난을 가자 화가 난 몽골군이 다시 침략했던 거예요.
지도를 보세요.
몽골군은 전국토를 짓밟고 백성들을 못살게 굴어서
고려정부가 할 수 없이 개경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전략을 짰어요.
그러니 고려를 구석구석 쳐들어가야겠지요?
몽골 장군의 모습을 보면 말을 타고 있지요?
몽골말은 유럽 말에 비해 체구가 작고 느리지만
사람을 태우고 하루 100킬로미터 이상 달릴 수 있는 지구력과
스스로 먹이를 찾아내는 강인한 생명력이 있다고 해요.
더구나 몽골군은 원정을 떠날 때
1인당 5~10마리의 몽골말과 말린 고기만 가지고 가볍게 떠났어요.
이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이 지치면 갈아타고 가고,
식량이 부족하면 말을 죽여서 젖과 피로 목을 축이고 말고기를 먹고,
말의 뼈로 화살촉을 만들어 무기로 썼어요.
그러고 보니 몽골은 말로 웬만한 건 다 해결하네요.
이들은 네 다섯 살 때부터
말에서 잠을 잘 정도로 말과 친하게 지냈으니
전쟁을 할 때도 말과 한 몸이 되었어요.
지도를 보니 개경보다 훨씬 남쪽에 있던 대구까지 쳐들어갔네요.
이런이런 몽골군의 갑옷은 비단으로 되어 있는데
고려의 장군은 철로 만든 갑옷을 입고 있어요.
두 갑옷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비단을 여러 겹으로 해서 갑옷을 만들면 화살을 막을 수 있고,
철갑옷보다 훨씬 가벼웠어요.
그러니 몸이 날렵하겠지요?
게다가 이들은 말에서 달리면서 등 뒤로 활을 쏘는 궁술이 아주 뛰어났어요.
이런 몽골군이 떼거지로 말을 타고 달려들면 아주 위협적이었겠지요?
이런 모습을 하고 전 국토를 짓밟았던 거예요.
이때 대구 부인사에 있던 초조대장경이 불타서 사라지고 말았어요.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렇다고 당하고 있을 수는 없겠지요?
용인 처인성에서 승려 김윤후가 백성들을 이끌고 용감히 싸우고 있어요.
적장 살리타이가 용인의 처인성을 공격하다
승려 김윤후가 쏜 화살을 맞고 죽는 일이 벌어졌어요.
완전 대단하지요?
그러자 지휘관을 잃어버린 몽골군이 철수해서 돌아가면서 2차 전쟁이 끝이 났어요.
1234년 몽골은 세 번째로 고려를 침입했어요.
3차 침입은 예전보다 더 거세고 격렬해져서 전 국토를 짓밟고
백성들의 터전을 가리지 않고 파괴하는 것도 모자라
백성들마저 무자비하게 죽여 버렸어요.
이때 경주에 있던 황룡사 9층 목탑도 불타고 말았어요. (1357)
백성들은 어땠을까요?
몽골의 침입을 받으면서 무척 힘들게 살아야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강화도에서는 무엇을 만들고 있나요?
백성들의 마음이 흩어지면 정권을 유지하기 힘드니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할까요?
불교를 이용해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고 부처님께 고려를 보호해달라고 빌고자
팔만대장경을 새기는 사업을 시작한 것이지요.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해인사 장경판전 내부예요.
저렇게 빽빽하게 꽂혀 있으면 목판이 괜찮을까요?
창문의 크기를 조절하는 장치 말고도 목판이 썩지 않게 마구리를 만들었어요.
목판의 양 끝에 넓적한 부분이 마구리인데,
경판을 보관할 때 글자가 맞닿으면 수분이 빠져나가지 못해
썩어버리거나 마찰 때문에 글자가 뒤틀릴 수 있어서
바람이 통하도록 마구리를 댄 거예요.
그리고 다 만들어진 경판은 벌레가
경판을 좀먹지 못하게 옻칠을 한 후 보관했으니
대장경을 만들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이 필요했겠지요?
대장경판을 쌓아 놓으면 그 높이가
3천 미터가 넘는데 이 높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백두산보다도 높다고 해요.
팔만대장경의 역사는 위대한 기록의 역사이지만,
한편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전쟁의 시기에 만들어진 슬픔의 역사이기도 해요.
이렇게 슬픔 속에서도 온 마음을 다해 만들어진 대장경은
'모든 나라에서 견줄 만한 상대가 없는 대장경이다'
라는 화려한 찬사를 받고 있어요.
2. 역사동화 9와 함께 고려를 다룬 수업인 퍼즐한국사9의 수업활용영상을 보면 당시 전쟁에
관한 좀 더 자세한 이미지와 팔만대장경의 내용.
팔만대장경 만드는 과정을 성우의 목소리로 녹음한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1. 이 자료는 생각날기 목판인쇄와 팔만대장경에 자료를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2. 자료와 관련된 영상을 보시려면 생각날기 홈페이지(http://w-think.com) /수업활용영상 / 역사노리 /
이미지텔링 세계사 / 왜 우리나라의 목판이 제일 발달하게 되었을까? 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3. 궁금하신 점이 있다면 생각날기로 문의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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