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목사님 설교
(요일 4:7-10)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원어중심 성경 강의 45번째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나누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랑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고 있죠? 요한일서 앞부분에서도 사랑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왔는데 오늘 본문은 더욱 더 하나님의 사랑이 강조되고 있죠. 사도 요한의 별명이 있죠? 사도 요한의 별명이 사랑의 사도라고 하죠. 사도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고 부른다는 거는 그만큼 사랑에 대한 언급을 많이 했다는 거고 또 우리 성경 독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있게 잘 전했다는 그런 의미가 되는 거죠.
요한일서의 앞부분에서도 사랑을 언급했다고 하는데,
(요일 2: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여기에서 사랑은 참빛과 연관돼서 언급되고 있죠. 두 번째 언급되는 곳은 3장 11절부터에요. 18절까진데 3장 11절만 보면,
(요일 3:11)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여기 3장에서 나오는 사랑은 영생과 연관되어서 언급되고 있죠. 이러한 언급들이 다 중요하지만 앞에서 나온 것들은 전부 세 번째,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사랑에 대한 언급을 위한 준비였다고도 볼 수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는 사랑을 하나님이시라는 하나님의 본성 자체와 연결되고 있죠? 그 앞에서처럼 빛이나 생명과 연관되지 않고 사랑이신 하나님의 본성 자체와 연관되고 있어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하잖아요? 이 구절은 16절에도 나오지만 이 구절들이 요한일서의 가장 핵심이 되는 구절이라고 할 수가 있는 거죠. 그리고 우리 성경 전체에서도, 어떻게 보면 성경 전체를 한마디로 요약한 그런 구절이 될 수도 있죠. 그만큼 중요한 구절인 거죠.
내용은 어렵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가 다 공부한 내용이고 다 아는 내용이라서 특별히 파악하기 어려운, 까다로운 그런 구절은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는 그런 구절인 만큼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한 번 더 느끼고 그리고 은혜를 감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하는 자들. 아가페토스라고 합니다. 아가페토스는 복음서에 전부 여덟 번 나오죠. 근데 여덟 번 전부 주님에 대해서 쓰였어요. 그중에서 두 번은 주님이 비유로 말씀하실 때 나오고 그렇지만 내용은 주님을 가리키는 그런 내용이고요. 그리고 한번은 구약을 인용할 때 나오죠. 그리고 다섯 번은 세례를 받거나 변화산 장면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주님을 가리켜서 말씀하신단 말예요. 아가페토스. 내 사랑하는 자라고 하시죠. 이렇게 그 복음서에서 여덟 번이 나오는데 전부 주님에 대해서 쓰인 그런 단어인 거예요.
제가 표에 담아서 소개해놨죠? 한번 읽어보시고요.
(마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12:18)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막 1: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막 9: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막 12:6)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눅 3: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눅 20:13)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하나님이 주님을 향해서 직접적으로 ‘내 사랑하는 자‘, 라고 말씀하신 그 단어 아가페토스를 요한이 성도를 부르는 표현으로 썼단 말이에요. 이거는 하나님이 주님을 사랑하시듯이 성도 또한 주님처럼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 주님처럼 성도를 사랑하신다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는 표현이란 말에요. ’내 사랑하는 아들‘ 이라고 하시잖아요. 성도 또한 내 사랑하는 아들이 되는 거란 말이에요.
이 아가페토스가 성경에서 60번 정도 나오는데요, 요한일서에서는 6번 나와요. 제가 또 그 구절들을 모아놨죠. 6번 나오는데 이것도 한번 읽어보시고요. 사도 요한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라고 한단 말이에요. 서로 사랑하자, 라는 그 권고죠? 권고가 3장에선 두 번 나왔는데 이게 4장에서는 7절, 11절, 12절에 세 번 반복 돼요. 오늘 7절에서도 나왔죠. 이렇게 세 번이나 거듭 반복한다는 거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하는 거죠.
(요일 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바 말씀이거니와
(요일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요일 3: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요일 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요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도가 서로 사랑하라! 라고 하죠? 그 이유가 뭐겠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거는 분명한 사실인거고 영원히 변치 않을 진리란 말이죠. 문제는 우리란 말에요. 사랑을 한다는 거는 성도가 사랑이신 하나님을 아는 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랑이신 하나님을 알아서 그 사랑에 화답을 하지 않게 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대상이 없는 헛된 일이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짝사랑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바르게 알아야 되는 거죠.
물론 하나님께서 사랑을 부어준 자, 하나님의 영을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주신 자는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죠.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을 아직 잘 모르는 그러한 때, 그때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깨달음을 얻어가자고 사도가 말하는 거죠.
그러니까 사랑을 알게 되면 당연하게도 성도에게서는 기쁨과 감사의 찬송이 나오게 되는 거죠. 근데 우리는 일상에서 말씀으로 오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오직 기쁨과 감사로 받고 있냐는 말에요. 그래서 즐거워하고 그 사랑을, 그 은혜를 찬송하느냔 말이죠. 그러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가 서로 사랑하는 게 맞아요. 그렇지만 그러지 못할 때가 있죠? 그래서 사도가 다음과 같은 구절을 서술하고 있는 거죠?
(요일 4:7-8)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하는 자,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 자의 대조가 나오죠? 사랑하는 자, 파스 호 아가포온이라고 해요. 아가파오의 분사형이에요. 사랑하는 모든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났다. 에크 호 데오스라고 했죠? 에크 호 데오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자. 근원이 하나님인 자.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났고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 그가 사랑하는 자다, 라고 하는 거죠.
그렇지만 사랑하지 않는 자, 호 메 아가포온이라고 해요.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라고 해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그런 구별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내용 자체는 다 이해가 되신단 말이에요. 어려운 구절은 없어요. 근데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자는 사랑할 수가 있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사랑 못한다고 한단 말에요. 이거는 당연한 말씀인 거고 쉽게 이해가 되는 구절이에요.
안다는 것도 야다라고 했잖아요? 하나 되는 거. 하나 되는 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거죠? 그리고 십자가 진리를 안다는 거예요. 십자가 진리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는, 가르쳐주는 그러한 일인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는 자, 하나님과 하나 된 자만이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할 수가 있는 거죠.
그런데 이 말씀을 표면적으로 보면 은혜를 받은 성도와 또 은혜에서 유기되는 자의 대조를 보이고 또 대부분의 주석서들이 그렇게 설명하고 있기도 하단 말이죠. 그렇지만 우리는 지난 시간에도 봤지만 이것이 전부 내 안의 일이라고 했죠? 내 안의 일을 가르쳐주시는 그러한 내용인 거고, 그리고 호라는 관사 자체가 호 아가포온, 또 호 메 아가포온이라고 하는데 사랑하는 자, 사랑하지 않는 자, 이거를 내 밖의 인물이나 존재로 제한해서 보지 말자고 했죠? 이러한 차원에서 이 구절을 본다면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자. 진리를 아는 자. 그러니까 나의 새 사람인 거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나의 옛사람이 되는 거죠.
사랑을 안다, 그리고 알지 못한다고 할 때 기노스코라는 단어가 쓰였단 말에요. 그런데 이 사랑을 ’안다‘ 라고 할 때 기노스코는 현재형이에요. 사랑을 아는 자, 라고 할 때 기노스코는 현재형으로 쓰였단 말에요. 그런데 사랑을 알지 못한다고 할 때 기노스코는 과거형이란 말에요. 그러니까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는 사랑을 알지 못했던 자라고 번역해야 맞는 거고요. 그 사랑을 알지 못했던 자는 바로 아직 율법에 묶여 있던 나의 옛사람인 거죠. 나의 옛사람이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죠. 그 옛사람을 향해서 사도 요한이 서로 사랑하자, 라고 우리에게 권면을 하고 있는 거죠.
우리가 일상에서 주시는 말씀들, 그 사랑의 말씀들에 대해서 사랑으로 받지 못하고 여전히 옛사람의 행태를 보이기도 하잖아요? 이거는 불행이야, 고난이야. 하나님 나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라고 원망도 하고. 이러한 그 옛사람의ㅡ 행태가 나온단 말에요. 이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아닌 거죠? 사랑이신 하나님을 깨닫지 못한 거니까. 율법에 묶여 있던 나의 옛사람을 향해서 사도 요한이 권고하고 있는 그러한 내용인 거죠.
(마 7:21-23)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퀴리오스, 퀴리오스한다고 하는데 레고에요. 퀴리오스, 퀴리오스를 말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파스 호 레곤이에요. 주여, 주여라고 말하는 자. 그러니까 주여, 주여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게 아니에요.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주여, 주여라고 말만 하는 자. 그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대조가 나오고 있는 거죠. 아버지의 뜻. 델레마라고 하죠. ’아버지의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라고 했죠? 대격이라고 했어요. 아버지의 뜻을 포이에오, 행하는 자. 행한다는 거는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거죠? 창조하는 자, 행하는 자.
주여, 주여 말하는 자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 선택과 유기의 두 부류로 나누지 말자고 했잖아요? 여기 관사 앞에 호가 있는데 주여, 주여 말만 하는 자와 뜻을 알아서 행하는 자. 나의 옛사람과 새 사람의 대조가 나오고 있는 거예요.
22절에 보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라고 해요. 그 날에. 헤메라죠. 히브리어로 하욤이란 말이에요. 그 날. 심판의 날. 욤은 낮이고 빛이죠? 빛을 낮이라고 했으니까. 빛이 비추는 때, 진리를 알게 된 때가 그 날이잖아요? 그 나의 옛사람이 죽는 날인 거예요. 심판의 날은 나의 옛사람이 죽는 날이에요.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라고 할 때 이거는 폴뤼스라고 해요, 폴뤼스. 많은 것이에요. 율법이란 말에요. 율법이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말씀이죠? 주의 이름은? 말씀으로 선지자 노릇 하고. 말씀 전했다는 거죠. 그리고 귀신 쫓아내고. 율법을 쫓아낸 거죠? 그리고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능력 있는 어떤 일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런데 많이 할 필요가 없는 거죠? 하나님의 일은 하나밖에 없으니까. 많은 일을 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게 되는 거죠. 모든 일은 다 사랑이고 사랑은 전부 성전 만드는 사랑이란 말에요. 그래서 모든 일을 성도는 하나로 본단 말에요. 진리를 아는 자는 모든 일이 하나로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한 가지 일을 하느 거란 말에요. 성전으로 지어지는 한 가지 일. 그런데 많은 일을 했다는 거는 그 일을 모른다는 게 되는 거죠. 하나님의 뜻 모르는 그 일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바꿔서 얘기하면 우리 일상에서도 많은 일들이 있는 것 같지만 그것들은 전부 하나의 일이란 말이죠. 그것들은 전부 십지가 진리를 담고 있고 그 일들은 전부 나를 죽이러 오는 말씀인 거예요. 그러니까 그 일들의 의미를 알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돼요? 자기부인의 십자가 죽음을 죽을 수가 있게 되는 거죠? 그러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그 진리로 오시는 그 아들과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 나라, 성전으로 지어진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 말씀은 나의 옛사람을 죽이러 오는 거죠. 나를 죽이러 오는 것처럼 들린단 말에요. 그 말씀이.
그러니까 모두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가르쳐주시는 거예요. 이게 믿음이야! 하면서 주를 말하기만, 부르기만 하는 거. 이게 우리 안의 옛사람이고 율법인 거고 아버지의 뜻을 알고 십자가 죽음이라는 행함, 그 행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것이 우리 안에 새 사람, 진리라는 것. 그걸 가르쳐주는 거죠. 그래서 서로 대조가 되고 있는 거란 말에요. 그걸 확인시켜주는 말씀이 뭐냐면,
그때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라고 하죠? 밝히 말한단 말에요. 밝히 말한다는 말이 뭐냐면 뭔가를 밝혀서 악당들과 의인을 구별하는 그런 차원의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니라 호몰로게오라는 말이에요, 밝히 말하는 게. 그때 내가 약속한다, 시인한다, 선포한다. 그 악당들에게 뭘 약속하고 선포를 하겠어요? 나란 말에요. 내 이야기를 하는 거란 말에요. 그 악당, 그 나의 옛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 그 뜻을 선포해서 가르쳐서 그래서 그 뜻을 알게 해주겠다고 하시는 거죠. 그래서 호몰로게오라고 하시는 거예요. 약속하는 거예요. 시인하고 선포한단 말이죠.
그때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난 너와 관계없다고 하는 게 아니라. 우데포테, 전혀 아니다, 전혀 기노스코하지 않는다고 하는 거죠. 기노스코가 또 과거형이에요.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하는 거예요. 옛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란 말에요.
그 옛사람은 불법을 행하는 자에요. 불법을 행하는 자. 율법을 행하는 자죠? 아노미아, 불법, 죈데 율법을 행하는 자. 그 율법을 행하는 자들은 떠나가라, 라고 하는 거예요. 그 율법을 떠나가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의 이 말씀은 말만 번드르르하게 하고 일은 제대로 안 하는 어떤 자들을 비판하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성전 짓는 이야기를 하시는 거고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걸 가르쳐주시는 말씀인 거예요. 그래서 바로 다음에 성전 짓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마 7:24-25)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성전 짓는 이야기다, 라는 거예요. 우리 안에 그 옛사람 죽이고 새 사람으로 세우는. 옛 성전 무너트리고 새 성전 세우는 그 이야기라는 걸 가르쳐주고 계신 거예요. 이 뜻을,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고 사랑을 하는 자가 되는 거죠.
(출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계명을 지키는 이. 이거는 별개의 일이 아니라 같은 일이라고 했어요. 나를 사랑하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에요. 계명을 지킨다는 건 말씀을 깨닫고 간직하는 거죠. 그에게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푼다. 천은 열을 세 번 곱한 수죠? 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셋이란 말에요. 하늘로, 하늘 적으로 완성된 거. 이게 천이에요. 그래서 천년 왕국도 우리 안에서 하늘의 그 진리로 성전이 완성 되는 거.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 서는 거. 그걸 말하는 거죠. 천 년 동안 왕 노릇한다, 라고 내가 왕 노릇하는 그런 물리적 시간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천, 하늘이란 말에요. 하늘을 주시는 게 하나님의 은혜고 그리고 내가 상이다, 라고 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의 큰 상이다‘ 라고 하시죠? 그게 상인 거예요, 성도에게. 하나님이 상이란 말에요. 하나님이 상급이라고 그러면 하나님의 뜻, 진리를 온전하게 깨닫게 해주겠다고 하는 그런 말씀인 거죠? 그게 하나님을 받는 일이고 사랑이신 하나님 아는 일인 거예요.
본문으로 가서요.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호티라고 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 거죠? 하나님은 사랑의 근원이시면서 사랑 그 자체이시죠?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말은 사랑이 하나님의 뭔가 여러 가지 일 중에서 한 가지라는 그러한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은 다 사랑이다, 라고 하는 그런 뜻인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사실 많이 있죠?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도 하고 불평도 하고 또 저주도 하고 비판도 하고 이러는데 그러한 오해가 많은 이유는 바로 이 사랑에 대한 오해 때문이에요.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사랑에 대한 오해하기도 한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게 되면 하나님은 어떻게 보여요? 하나님이 막 유황불을 던지기도 하고 이러신단 말에요. 땅이 갈라지고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고 막 이런단 말에요.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자의 눈으로 그 일들을 보게 되면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 되는 거죠? 무슨 싸이코패스도 아니고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그런 무시무시한 신이 되어버린단 말이죠. 그래서 그 앞에서는 두려워 떨어야 되나 보다, 이렇게.
이게 사랑에 대한 오해 때문에.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죠? 그래서 자연재해나 사고가 나서 혹시 어린아이라도 죽게 되면 무슨 하나님이 이 죄 없는 어린아이 하나 지켜주지 못하시는가? 이러면서 원망하기도 한단 말이죠. 멀리 갈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을 돌아보잔 말이에요. 이게 사랑이 맞습니까? 라고 오해할만한 일들이 많이 있죠? 바로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사랑에 대한 오해와 직결돼 있단 말이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원하는 걸 이루어주시고 우리가 지키고 싶은 걸 지켜주시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죽이는 거라니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를 파괴하고 멸망시키는 거예요. 그게 사랑이에요. 하나님이 파괴하고 멸망시키는 거는 바로 우리의 옛사람이죠? 성도가 이게 나야! 라고 하는 것. 또는 내 것이야! 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들은 뭐예요? 전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이죠? 파님이죠? 옛사람의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그걸 떨쳐버릴 수 있게 만들어주셔야만, 그래야 새로운 성전으로 지어질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그걸 부수어주시는 거란 말에요. 이 사랑을 알지 못하면 그 사랑은 아무 이유 없이, 아무 거리낌 없이 마구마구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분, 이렇게 말한단 말이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오는데 그 사랑은 우리에게 영원의 사랑을 주심으로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는 거란 말이죠. 그리고 영원의 하나님 나라에서 함께 하면서 영원토록 함께 하면서 교제하는 거란 말에요. 같이 동거하는 거란 말에요.
이걸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뭐겠어요?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주는 거죠?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 알아야 그곳을 소망하고 그곳을 이해할 수가 있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 땅의 인생과 역사 자체는 하나님 나라 배우기라는 그 목적을 위해서 주어진 거고 그걸 위해서만 존재하는 거란 말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면 왜 우리가 인생을 사는가까지 이해하게 되는 거란 말이죠. 우리가 이걸 이해해야만 되는 거죠. 그래야만 모든 것이 또 제대로 이해가 되는 거죠.
하나님이 우리가 알기를 원하시는 거, 이걸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 필요한 게 바로 옛 것의 파괴란 말에요. 우리의 옛사람, 나의 옛 세상. 그것들의 파괴와 부정이 필요한 거죠. 무한을 가르치기 위해서 유한을 부정시켜주시는 게 하나님의 교육 방법이란 말이에요. 우리는 땅에서 하나님의 그 영원과 무한을 이해할 길이 없단 말에요. 그래서 이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그걸 배우는 거란 말에요. 하나님의 그 뜻을. 이거 아닌 게 그 나라군요!를 배우는 거란 말이죠.
자녀를 키워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자녀의 훈육을 위해서 혼을 내면서 그거 안돼! 라고 가르치시죠? 그거 돼! 라고 혼낼 일을 없잖아요. 그거 안돼! 라고 혼낸단 말이에요. 이런 부정의 방식이 하나님께 동일하게 적용되는 거란 말에요. 그러니까 그때, 이거 안돼! 라고 할 때 자녀가 따르지 않으면 회초리를 들기도 하죠? 파괴를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자녀를 주신 이유가 뭐겠어요? 남보다 훌륭하게 키워서 이 땅에서 대대손손 잘살자. 이런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마음을 알라는 거예요. 그걸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라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자녀가 말 안 듣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 말씀을 안 듣죠?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겠어요? 회초리를 들어야죠. 그럴 수밖에 없단 말이죠. 이게 이해가 되시죠? 아, 나는 맞지 않으면 안 되는구나! 이걸 이해하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내가 좋다고 하는 그 파님에서 떠날 일이 없으니까. 이게 좋아, 하고 끌어안고 이게 내 생명이지. 이게 잘 되는 게 내가 잘 사는 거지. 그러고 있으니까. 자녀를 보시란 말에요. 자녀에게 내가 어떻게 가르쳤는지. 부모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보시란 말이죠. 팰 수밖에 없는 거예요.
지난 시간에 봤잖아요. 소돔에 불 심판 내리듯이 박살을 내야 되는 거예요. 하파크란 말에요. 박살을 내서 변하여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 거죠. 이게 십자가고 이게 사랑이란 말이죠. 성도는 이 사랑을 아는 거예요. 두들겨 맞으면서 아버지, 감사합니다! 라고 찬송하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아가페토스인 거죠. 아가페토스는 이 길로 가는 거란 말에요.
제가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망한 거, 사업이 망한 거예요. 그 이후에 하나님을 알게 됐는데 가끔씩 자다가 벌떡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뭐라고 하느냐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러는 거예요. 정말 감사한 거예요, 너무 감사한 거예요. 그 일이 없었다면 제가 얼마나 교만한지를 아니까. 이렇게 교만했던 내가 그나마 낮아지고 하나님을 찾았겠습니까? 하는 거예요. 가슴이 막 서늘할 정도로 너무 감사한 거예요. 큰일 날뻔했다, 그런 마음까지 들면서 벌떡 일어나서 감사하는 거죠.
하나님의 그 사랑은 회초리로 두들겨 패서 낮아지게 만들어주시는데 어디까지 낮아지게 하시느냐면 희생제물의 자리까지 낮아지게 하시는 거예요. 주님이 본을 보여주신 것처럼. 이게 십자가란 말이죠. 더 이상 자기로 선악의 두 마음으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으로 보고 사는 자가 되는 거예요. 그걸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하고 그걸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거죠. 이 사랑을 알아야 하나님을 아는 거예요. 이 사랑을 알아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이 말씀이 이해가 되는 거란 말이죠. 그게 아니라면,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무슨 하나님이 이래? 하고 원망하게 되는 거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그 말씀처럼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선언적인 구절들이 많이 나오죠?
예를 들면 하나님은 빛이시라! 로 요한일서 1장 5절에도 나오죠?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도 있고 하나님은 영이시다, 라는 말씀도 나오죠?
(요일 1: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그리고 하나님은 불이시다, 라고도 하죠? 소멸하는 불이시다.
(히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소멸한대요. 카타날리스코에요. 소멸하다, 소모하다. 이게 성경에서 한 번만 나와요. 그래서 어떤 의미인가를 파악하기 쉽지 않은데 이게 구약을 인용한 거거든요.
(신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소멸한다는 말은 아칼이에요. 아칼은 먹는다는 뜻이에요. 삼킨다, 먹는다, 그런 의미란 말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먹어서 삼키는 불이라고 하시는 거죠? 불은 성령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를 먹는 거예요. 먹어서 삼켜서 성령화해주시는 거란 말이죠.
주님이 나는 너로 더불어 먹고 너는 나로 더불어 먹는다고 하시죠? 또 주님이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하시죠? 하나님이 우리를 먹여 삼키시면 우리가 또 하나님을 양식으로 먹게 되는 거죠. 주님이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오시지만 우리가 그 양식을 먹느냐? 마느냐로 구원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우리를 취해서 먹어주심으로 우리가 주 안에서 그 양식을 먹게 되는 거란 말이에요.
구원의 주도권은 전혀 우리에게 있지 않단 말에요. 주님이 우리를 먹어주시면, 그러면 우리는 주님을, 생명의 양식이신 그분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거예요. 먼저 먹히는 거란 말에요.
그리고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도 하죠? 칸나라고 합니다. 질투한다고 해요. 카나에서 유래한 단어인데요, 칸나는. 이게 시기하다, 질투하다는 뜻과 함께 열심히 하다, 라는 뜻도 있어요.
(겔 39:25)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사랑을 베풀지라
사랑을 베푼다고 하시죠?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해서 열심을 낸대요. 열심을 내는 게 질투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질투는 열심히라는 거죠. 내 거룩한 이름. 거룩한 이름은 말씀이죠? 거룩한 말씀을 위해서 열심을 내요. 거룩하다는 것은 코데쉬에요. 거룩한 말씀인데 거룩하다는 거는 헬라어로는 하기오스죠? 그러니까 거룩한 말씀은 하기오스 프뉴마, 성령과 닿아 있는 그런 말씀인 거죠.
야곱의 사로잡힌 자, 이게 나의 옛사람이죠? 세부트라고 하는데, 포로. 그러니까 율법의 포로였던 나를 돌아오게 하는 거죠, 슈브, 회개죠. 회개시켜주시고. 그러니까 회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돌아오게 해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회개가 되는 거죠. 둘로 보던 율법을 하나님의 선하신 한마음으로 바꿔주신단 말이죠. 그게 회개란 말이죠. 그리고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사랑을 베푼다, 라고 해요. 이게 사랑이다, 라는 거죠.
(욜 2:18)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
극진히 사랑하신다, 이게 카나에요. 그러니까 자기의 땅, 약속의 땅이죠? 우리란 말에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다. 이게 질투의 의미에요. 질투하신다는 말씀이 극진히 사랑하신다. 그래서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신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것에 마음을 뺏길 때.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 질투하시지만 그 질투의 의미는 지극히 사랑하신 거란 말이죠, 우리를.
그러니까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한다는 건 어떻게 보면 어마어마하게 은혜가 넘치는, 참으로 망극한 그런 표현이 아닐 수 없는 거죠. 성도는 일상에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질투를 경험하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하면서 이건 고난이야, 환난이야, 하는데 그게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질투하시면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그러한 일인 거죠. 그걸 경험하면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감사하는 거란 말이죠. 그게 사랑이라는 걸 이해하게 되는 거예요.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파네로오, 계시하는 거예요. 우리가 깨달을 수 있게 가르쳐주시는 거죠. 그걸 계시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고 하는 거죠. 그게 사랑을 나타내신 일이라고 하는 거죠. 그 아들을 보내신 이유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고.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려고. 그 아들이 나타나는 바람에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야 되는데. 달려서 죽어야 되는데 그거는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살리려고 한다고 하는 거죠.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낸다고 하는 것. 세상에 보냈는데 우리에게 보낸 거예요. 보내서 이 우매한 나를 가르쳐주시기만 해도 감격할 일인데 그를 십자가에서 죽이기까지 하셨단 말이죠.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사랑인 거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사랑하기로 작정을 하셨다는 거예요. 완전히 결심을 하신 거죠. 사랑할 결심을. 사랑할 결심을 이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걸 우리에게 보여주시면서 나의 사랑을 보아라! 라고 하는 거예요. 그 아들을 통해서 내 사랑이 이러하다는 걸. 나는 목숨 걸었다는 거예요. 너희들 사랑하는 일에 내 목숨 걸었다는 거죠. 그 사랑을 우리에게 주고 계신 거란 말에요. 그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셔야 하는 거죠.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플레로오, 완전하다고 하는 거예요. 주님이 두 마음으로 보던 그 율법과 선지자, 구약이죠? 성경인데 우리가 둘로 보게 되면 율법과 선지자로 보이는 거죠. 그렇지만 한 마음으로 보게 되면 사랑으로 보게 되는 거죠. 하나님의 사랑, 하나로 볼 수 있게 우리 마음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죽여서, 그래서 완전케 해주시는 거죠.
(롬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이란 말에요, 아가페. 아가페는 이웃에게, 플레시온이에요. 플레시온은 주님을 뜻하는 그런 말이죠, 이웃. 레아라고 했잖아요? 풀을 뜯기고 사귀고 친구가 되는 그런 이웃. 사랑은 주님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거라고 해요. 악, 악은 율법이죠? 율법을 행하지 않는다, 라고. 말씀으로 오신 주님을 율법으로 오해하고 율법의 행위를 하는 그일. 그거 하지 않는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사랑이다! 왜? 말씀은 다 사랑이니까. 그리고 주님 또한 이웃이면서 형제인 우리에게 율법이 아니라 사랑으로 모든 걸 주고 계신 거죠. 그렇게 사랑으로 교제해주시는데 그게 서로 사랑하는, 일인 거죠.
그러므로, 운이라고 해요.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노모스, 율법의 플레로마, 충만이라는 거죠. 완전케 한다는 말. 아까 완전케 한다는 말이 플레로오라고 했죠? 명사형인 거예요, 플레로오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이 율법의 의미를 완전하게 가르쳐주시면 이전에는 불충분했던 그 율법이 사랑이라는 온전한 의미로 가득 차게 되는 거. 충만하게 되는 거죠. 이전에 우리에게 율법은 하라, 하지 말라의 명령으로 보였는데 그리스도께서 진리를 알게 하시면 율법은 원래의 의미인 하나님의 사랑으로 환원이 되는 거죠.
(고전 13:1-2)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고 해요. 사람의 방언, 방언은 글로사죠? 그리고 천사의 말, 천사는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거는 말씀이라고 했죠? 말씀으로 하나님이 우리 이 세상을 창조하셨죠?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죠.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모든 말씀은 사랑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거예요.
근데 내가 하는 그 말 속에 사랑이라는 내용이 없다고 하는 거는 사랑은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이 없다는 게 되는 거죠? 그러면 나는 하나님과 무관한 존재가 된다는 거예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라고 해요. 에케오, 소리가 난다. 이게 에코스라는 말에서 나왔어요. 소리, 소문이라고 하는데. 이 소문이라는 말 보다는 소리가 더 맞는 표현인 거예요. .
(눅 4:37)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이 구절은 주님의 공생애 초기에 주님의 명성이 커가기 시작하는 그런 일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성경의 일을 내 안의 일로 보면 어떤 내용이 되는 거예요? 주님의 에코스, 소리, 소리가 내 안에 가득 차는 거.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도행전에서 보면 오순절 날에 제자들이 다 한 곳에 모였을 때 하늘로부터 강하고 급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서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했다고 하죠? 그 소리란 말에요, 소리. 에코스는 소리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소문이 아니라.
내 안에 주님의 소리가 가득 찼는데 나는 그걸 깨닫지 못한 그러한 상태. 그래서 소리로만 들리는. 그래서 에코스라는 말은 바람 같은 소리, 파도 소리, 나팔 소리. 이런 게 들린단 말에요.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만 소문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거죠. 소리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하고요.
근처에 그 지역 사방에, 그러니까 모든 곳 안에. 에이스 파스 토포스라고 해요. 나의 그 모든 곳에 퍼진 거죠. 토포스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마콤과 같은 그런 내용이죠. 장소란 말에요, 곳, 장소. 근데 마콤이 쿰 하는 곳. 십자가의 자리. 십자가의 자리로 가는 모든 곳 안으로 주님의 말씀이 퍼졌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 말씀을 내가 깨닫지 못해서 소리로 들었다고 하는 거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서, 예언, 예언은 프로페테이아라고 해요.
이게 예언, 또는 예언의 말씀이라고 하는데. 프로페튜오라고 하면 예언한다, 라고 하는 거죠.. 예언을 마치 미래의 일을 점쟁이처럼 맞추고 말하는 거, 이런 걸 뜻하는 게 아니라 예언은 하나님의 뜻, 그 진리를 바르게 깨닫고 전하는 거, 이걸 예언이라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 그걸 프로페테스라고 한단 말에요. 선지자. 그 의미가 아니라면 프로페테스는 점쟁이가 되는 거죠. 선지자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전하는 자.
(행 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오순절 날에 그들이 한 곳에 모였었다고 하죠? 소리가 날 때. 오순절 날이 이르렀다고 할 때는 플레로오, 완성이 됐다고 하는 거에요. 바로 앞 장에서, 1장에서 제자들이 가룟 유다 대신에 맛디아를 사도로 세우죠? 그래서 열둘이 되는 거죠. 아들로 완성이 되는 거예요, 열둘. 그게 완성이 되니까 오순절이 되는 거예요. 성령이 임하시는. 진리가, 진리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임하시는. 칠칠 절이라고도 하죠? 칠, 언약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그때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유다, 유다가 죽었단 말에요. 옛사람이 죽고 맛디아로 산단 말이에요. 맛디아가 하나님의 선물이잖아요. 하나님의 선물로 다시 사는 게 아들이고 그걸 구원이라고 한단 말이죠. 그러면 오순이에요. 주님이,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오시는 거죠. 열둘로 완성됐을 때. 그들이 다 한 곳에 모였다고 하는데 이거는 창세기 1장을 생각나게 해요. 창세기 1장 9절에,
(창 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한곳에 모이는 거란 말이에요. 천하의 물, 하늘 아래의 물이에요. 아직 진리가 아닌 우리 아랫물에게 한 곳, 마콤 에하드라고 하죠. 하나 되는 그 십자가. 마콤은 십자가의 의미라고 했죠? 하나 되는 그 십자가에 모이라고 하는 거예요. 카와, 기다리다. 모이라는 건데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기다리는 거란 말에요. 기대하면서 소망하면서 거기에 모여 있는데 거기에 성령이 부어지듯이 그 카와가 소망한다는 의미란 말에요.
그렇게 모인 물을 바다라고 하고 그 모인 물을 미크웨 마임이라고 했죠? 그 물들의 소망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 마임이니까. ‘그’ 라는 관사가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미크웨 하 마임, 하면 그 물의 소망. 그 믈, 아랫물의 소망. 그게 뭐라고요? 십자가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구원을 소망하는 아랫물, 마라의 쓴 물이죠? 울법이란 말에요. 그렇지만 우리에게 십자가가 던져지고 그러면 주님이 우리 안에서 십자가로 죽으시는 거죠? 그럼 마침내 성령,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다는 거죠. 그걸 오순절로 보여주시는 거죠.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엔 후토스에요. 그 안에, 그 안에 사랑이 있다. 하나님 안에요. 하나님 안에 사랑이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저 죄와 허물로 죽어 있었죠? 근데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거죠. 그리고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서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주신 거죠.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힐라스모스, 화해의 제물인 거죠.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그 아들을 보내주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 수 있게 된 거죠.
(롬 3:25-26)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이 예수를 화목제물로 세우시는 거예요. 힐라스테리온. 이거는 속죄하는 것이라는 건데 같은 내용이에요. 속죄하는 것이니까 화목제물인 거죠. 힐라스모스, 같은 의미이고요. 화목제물로 세우셨다, 프로티데미. 결정하셨다. 결심하셨다고 하는 거죠. 그를 죽이기로. 아들을 죽여서 우리를 살리려고. 자기 백성 살리기로 작정하셨다. 결심하셨다고 하는 거죠.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아노케, 오래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보지 않으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디카이로쉬네를 증명하려 하신다고 하는 거죠.
(롬 5:3-5)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졌다고 하는 거죠.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들립시스 고난, 환난이라고 하는 거죠? 성도가 고난을 느끼는 이유는 두 마음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했죠? 그 두 마음이 발동하는 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고 그게 들립시스, 고난이라는 말이죠. 그 두 마음으로 시작해서, 고난, 환난으로 시작해서 인내가 나오는 거예요.
휘포모네, 견고히 선다고 하는 거죠. 십자가를 말미암아서 십자가에서 거하는 거예요. 그걸 인내라고 하는 거예요. 단순히 참고 견디는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십자가에서, 십자가를 깨닫고 십자가에서 하나 되어서 십자가로 서는 거, 그걸 인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의 불가능을 깨닫고 그 은혜의 십자가 진리를 알아서 이 십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걸 분명하게 아는 그런 깨달음을 가지고 십자가 붙잡는 거 이걸 성도의 인내라고 하는 거예요.
이 휘포모네가 70인 역본에서 히브리어 미크웨의 역본으로 쓰이죠? 소망, 그 물의 소망. 그 휘포모네가 연단을 이루어요. 도키메. 시험이에요. 하나님 백성임을 확인하는 그 시험을 이루는 거죠. 카테르가조마이, 성취하다. 이 시험을 통해서 소망을 이루는 거란 말이죠.
(롬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소망이란 말에요. 이 소망에 의해서 아들들이 나타나면, 진리가 나타나면 피조물이 또한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그 자유에 들어가게 되는 거죠. 에이스, 영광의 자유 안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거죠.
(골 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비밀. 뮈스테리온이죠)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그 파님 속에 비유로 숨겨져 있는 것이 그리스도고 하나님의 참 빛이고 진리란 말이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성도, 하나님의 아들로 하여금 그걸 나타나게, 그 풍성함을 알게 하려 하신다고 하는 거죠. 이방인 가운데 풍성하다는 건 우리 안으로 보면 율법 가운데에서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 알게 하려 하심이다, 라고 하는 거예요. 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진리를 알게 하시고 이게 영광의 소망이 되는 거죠. 그 소망은 그리스도이시고 영광은 십자가인 거예요. 그러니까 소망은 우리 안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과 하나 되는 그 십자가의 소망을 성도가 갖게 되는 거죠.
(고전 13:12-13)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이라. 하나님의 사랑인 거죠.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거울은 에솝트론인데 고대의 거울은 유리가 아니었죠. 철이나 구리로 만들어서 희미해요. 희미하다는 의미는 엔 아이니그마라고 해요. 그래서 수수께끼 안에서 보는 것 같다는 말이죠.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볼 것이요, 라고 해요. 그때, 그때는 언제일까요? 이건 진리를 아는 때가 되겠죠? 이 구절은 조금 앞 쪽에 나와요.
(고전 13:8-10)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요. 그리고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는데 방언도 그친다는 말은, 방언은 글로사죠? 글롯사가 파우오, 해방된다고 하는 거죠. 해방되는데, 그리고 지식도 다 폐해지는데, 카타르게오, 무효가 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것들은 전부 무효가 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게 되니까. 보게 되니까.
그래서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인 하던 것이 폐해진다고 하는 거죠. 텔레이오스, 온전한 것. 완성된 것. 텔레이오스는 테텔레스 타이로 완성된 거죠? 다 이루어주신, 주님이 이루어주신 그 나라가 내 안에 서면 내가 주 안에서 하나가 되고 일치가 되니까 부분이 아니라 하나가 될 때, 바로 그때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하게 알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다. 항상 있는다, 라는 말은 메노에요. 거한다는 거죠. 거하는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죠? 그렇지만 대면하여 볼 때는 굳이 믿음이 필요 없죠? 그냥 인식하는 거죠. 소망도 마찬가지예요. 바라는 것이 아직 오지 않을 때 필요한 게 소망이죠? 아버지를 찾고 싶은 소망을 가지 고아가 아버지를 만나면 그건 더 이상 소망이 아니라 현실이 되는 거죠. 그와 마찬가지로 성도가 온전한 하나님 나라가 되면 믿음과 소망은 필요하지 않게 되는 거죠.
그런데 사도가 믿음 소망도 사랑과 함께 있을 것이다, 라고 하는 거는 우리 안의 하나님 나라를 지금 설명하고 있기 때문인 거예요.
주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시죠? 길은 생명을 찾는 길이란 말에요. 그리고 진리 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진리인 거예요. 믿음과 소망을 통해서 사랑을 찾고 길과 진리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향방을 바르게 정해야 되는 거예요. 맹목적인 믿음이 나오고 내가 신이야! 이런 곳에 기웃거리는 그러한 일들이 생긴단 말에요. 향방을 정하지 않으면. 뭐가 뭔지 어디로 가야 되는지를 바르게 알지 못하면 그러한 맹목적인 맹신 속에서 오해된 그런 장소를 기웃거릴 수가 있게 되는 거고 진리를 찾아야 된다고 하면서도 왜 찾는지를 모르면 진리를 위한 진리를 찾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소유로 삼아서 투자가 되기도 한단 말이죠. 너 이거 알아? 나는 아는데 너는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 이러면서 자랑하기도 한단 말이에요.
성도는 진리의 소유자, 진리의 부자 청년이 아니라 진리의 존재가 되는 거예요. 진리 자체가 되는 거란 말에요. 그걸 나타내고 자랑하고 할 것 없이 그냥 그 자체가 되는 거예요. 십자가 진리가 되는 거란 말이죠.
(고전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진리를 통해서 말하는 거 깨닫는 거 생각하는 것이 다 이전과 달라진단 말이죠.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게 사랑이란 말이죠. 이게 사랑이신 하나님을 아는 거란 말이죠.
(고전 13:4-5)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건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주시는 일이죠. 사랑은 하나님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 모든 일들은 사랑은 이러하다, 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거 전부 하나님을 설명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랑 대신에 하나님을 넣어서 읽어보면 하나님을 더욱 더 이해할 수 있게 되겠죠.
사랑 대신에 하나님을 넣어서 읽으면서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고 하나님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로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것이 사랑이신 하나님의 마음이고 우리를 향하신 뜻인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사랑으로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말씀을 오직 사랑으로 깨닫고 그리고 그 사랑을 감사하는 그 은혜를 날마다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