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6:3(구1262) /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세상 학문에서 가르치는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세상을 다스리는 힘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을 죽음에서 살리는 생명의 권세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 길은 생명 없는 멸망의 길입니다.
엡 4:18~20 그들은 지각이 어두워져 있고 무지함과 완악함이 그들 속에 있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으며 (19) 그들은 감각 없는 사람들이 되어 자신을 방탕에 내준 채 정욕으로 갖가지 더러운 일을 행하였지만, (20) 그러나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느니라.
우리가 먼저 할 일은 우리 자신부터 하나님을 잘 알고 예수님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을 힘써 알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만큼 하나님을 잘 아는 백성들이 없습니다. 왜 힘써 알자고 호소할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 광야 생활을 거쳐서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까지는 그나마 하나님이 아는 지식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멈추시고 모든 기적의 손길을 거두신 후부터는 그들이 하나님을 점점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해 보면 잘 되고 형통할 때는 하나님을 믿지만 어려울 때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사와 선지자들을 보내서 사랑하는 백성들이 나에게 돌아오라고 외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자라고 외치는데 여기서 안다는 것은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고 경험하여 아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지식이 부족하면 살아가는 데 불편이 좀 있는 정도이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생명을 잃고 멸망의 길을 가게 됩니다.
세상 지식을 많이 쌓으면 살아가는 데 유익이 있지만 문제는 자기의 능력이 강해질수록 교만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는 지식은 많아질수록 하나님이 더 커지고 자신은 더욱 낮아지고 겸손해집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시고 교만한 자는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낮은 자를 높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될까요?
1절에 호세아의 외침대로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는 세상 적인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더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지금 당장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한가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지내다가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할 때는 그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우리가 손에 꽉 쥐고 놓지 못하는 것을 놓아야 합니다.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 돌아와서 가까이 나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뜨거워집니다.
굳어있던 마음이 녹아서 부드럽게 됩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고 생각만 해도 내 마음이 굳어지던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의 마음으로 다가가게 됩니다.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드리고 헌금드리며 나 할일 다했다고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행하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힘쓰라고 하십니다.
로마서 12:2(신256) / 하나님의 선하신 뜻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당시 그 세대는 힘을 중시하고 지혜를 중시하고 표적을 중시하였습니다. 이해관계를 중시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돈과 쾌락과 명예를 중시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세상의 가치관이 목적이 되거나 그것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음란한 가치나 자기를 왕으로 섬기는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을 따르지 말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세상에서 인정받고 높임 받고 출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세상을 본받지 말고 겸손하고 온유하신 우리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주위에 모든 것은 낡아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도 심지어 마음도 어느 순간부터는 점점 늙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워지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님, 성령님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날마다 새 일을 하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딛 3:5) 우리는 우리의 올바른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시고 성령으로 새롭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통해서 내면이 새로워지면 현실의 문제를 올바로 직시할 수 있고,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은 교만의 죄입니다.
때로는 순간순간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경외하지 못하는 것도 죄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가족이나 물질이나 또 다른 우상숭배의 죄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여 불평과 원망하는 것은 탐심의 우상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내가 중심이 되고 내가 주인이 되어 생각하고 행할 때, 자신이 우상이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열중하다 보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성경은 옛것, 낡은 것이라고 하고, 또 죄악이라고 합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자기 생각에 갇혀버려서 현실을 올바로 보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그냥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워질 수 없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어 더 큰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길은 지금까지의 실수와 허물과 죄를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와 같은 죄를 씻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우리의 그리스도요 왕으로, 주인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함몰되지 말고 보이지 않는 성령님을 믿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령님 안에서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하십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한다는 말씀은 이런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회사와 사장님을 비롯하여 우리 모두가 오늘 주신 말씀의 길을 따라 살기를 축복합니다.
마태복음 6:10 / 기업인을 위한 기도
(마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샬롬!
성경 주석가 ‘바클레이의 기도 모범’이라는 책에는 기관에서 일하는 분들을 위한 기도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항상 명랑하고 친절하며 봉사함에 있어 기쁘게 하도록 도우소서. 내가 봉사하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웃음 짓고 돌아가도록 하소서” 사업하는 성도들을 위해서도 이처럼 기도하고 싶습니다.
오늘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가운데서 기업인들을 위한 기도를 몇 가지 뽑아보았습니다.
* 먼저 기업인들은 주의 영광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9절)
우리 모두의 삶이 주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함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특히 기업인들은 기업의 목적을 분명히 세우고 ‘주의 영광’을 위해 경영해야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기도를 시작할 때 주의 이름을 높이듯 내 삶의 시작은 역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 그리고 기업인들은 주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일해야 합니다.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10절)
주의 나라가 교회 안에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 가운데도 아닙니다. 주의 나라는 분명히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 안에만, 내 가정 안에만 주의 나라가 이루어지길 원하는 기도는 편협하고 소극적인 기도입니다. 좀 더 넓게 적극적으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열방을 바라보며 기도하며 경영하는 것입니다.
기업인들은 주의 뜻이 먼저이고, 내 뜻은 나중이라는 순서를 지켜 일해야 합니다.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했습니다(10절).
하늘이 먼저이며 이 땅은 나중입니다. 이 우선순위를 놓치면 안 됩니다.
주의 뜻을 먼저 찾는 것은 약한 자의 고백이 아닙니다. 체념하는 자의 한숨도 아닙니다.
‘주님이 내 삶의 주인이며 언제나 먼저입니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이런 신앙고백이 없이 주께서 도우시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우선순위가 잘 지켜지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마6:33)
* 끝으로 기업인들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일해야 합니다.
“내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11절) 한 1년 치를 미리 구해야지 쩨쩨하게 하루 양식이 무어냐? 할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욕심 없는 기도입니다. 겸손한 기도입니다. 정직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필요한 것을 주신다고 믿는 기도입니다. 절대로 소극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께 기업을 맡기는 적극적인 의지의 기도입니다.
내 사업의 진짜 소유주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이 땅의 크리스천 기업인들이 잘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넉넉하여 큰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중에 우리 작은 건설도 포함이 됩니다.
야고보서 1:2~8(신371) / 시련을 이기는 방법
(약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약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시련을 극복하는 지혜입니다.
시련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시련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련을 만나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오느냐며 탄식하지만 사실 시련은 누구도 비껴갈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도 시련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시련을 만났을 때 어떻게 이를 대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시련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도약할 수 있고, 추락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련을 잘 대처하는 지혜를 갖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련을 극복하는 지혜를 가지려면 먼저 왜 시련이 오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시련이 왜 찾아오는 걸까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지만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첫째, 인간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세상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기치 않은 일들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련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련을 만났을 때 잘못 대처하면 상황을 더 악화시킵니다. 하나로 끝날 수 있는 문제를 두 개, 세 개로 확산시킵니다. 시련이 닥쳤을 때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련을 만났을 때 이를 지혜롭게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2절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시험을 당할 때 기뻐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기쁨의 감정은 싹 사라지고 당황스럽고 걱정이 앞섭니다. 앞이 캄캄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는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3,4절입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시험을 당했을 때 온전히 기뻐할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시련을 겪으면서 인내력이 키워집니다.
“거센 파도가 유능한 선장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온실 안에서는 유능한 인물이 나오지 못합니다. 시련을 겪을 때 ‘인내’의 힘이 키워지고 ‘인내력’이 있을 때 성장과 발전이 가능합니다. 인내력이 없이는 어떠한 일도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인내입니다.
인내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힘든 시간을 기꺼이 감수하며 목표하는 바를 이룹니다.
둘째,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내가 가져다주는 결과가 있습니다. 우리를 온전하게 하고, 부족함이 없게 합니다. 하나님은 인내의 용광로에서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온전하게 하고, 부족함이 없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케 하고 부족함이 없는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시련을 주시고, 인내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시련을 만나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분노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며 시련을 달게 받아야 합니다. 인내하며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르는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5~6(신371) /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
5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아멘.
앞에서 시련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시련을 만날 때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쁘게 여길 수 있는 길은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고 합니다. 지혜가 부족하여 시련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시련과 시험을 만났을 때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은 시련을 극복하는 열쇠입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때 바른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 하나님은 바른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요행을 바라거나 한 방을 터뜨리길 원하면 시련의 날이 찾아옵니다.
인생에 왕도는 없습니다. 지름길은 없습니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목표를 향하여 가야 합니다. 수고와 땀은 자신을 속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 하나님은 바른길로 인도하십니다.
정직과 성실함으로 살아가도록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함을 따라 이 길을 걸어갈 때 시련이 서서히 걷히고 밝은 희망의 날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6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기도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함을 따르지 못합니다. 바람이 밀려 요동하는 물결처럼 마음이 흔들립니다. 7절에서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어떤 것도 얻지 못합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의심’은 두 마음을 품는 것을 의미합니다. 8절에서 ‘의심하는 사람’을 가리켜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라고 합니다.
두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불순한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직한 자의 길로 가려고 하지 않고, 빠르고 쉬운 길을 택하려 합니다.
그 방법이 옳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방법을 취하려 합니다.
이런 마음을 품는 사람은 인내를 배우지 못하고, 연단 되지 못하고, 요동하는 물결처럼 흔들리다가 죄악에 치우칩니다. 이런 길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아닙니다.
시련을 만나면 두 마음을 품지 말고,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가장 바람직한 방법으로 시련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정금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은 많은 것을 취하는 자가 아니라 감사를 알고, 은혜를 베풀며, 유익을 끼치는 시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우리는 시련을 극복하는 지혜를 배워 정금 같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 이 세상에 유익을 주고 혜택을 베푸는 시혜자의 인생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야고보서 1:12(p371) / 시험(시련)을 참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이 말씀은 시련(시험)이 올 때 그것을 극복하면 행복해진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시련은 축복을 가장한 선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스펄 존 목사님은 "시련은 우리로 하여금 좋은 목장 안에 있도록 하는 가시울타리의 역할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시련을 참고 이기면 큰 유익이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위로와 소망의 말씀입니다.
* 어느 목장에서 많은 양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종종 늑대와 여우가 내려와서 양을 헤치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사냥꾼들을 초청하여 목장 주위에 있는 맹수들을 소탕하였습니다. 그러자 양들의 피해가 줄어들었고 양들은 잘 번식하였습니다. 주인은 아주 만족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 추운 겨울이 되었습니다. 많은 양이 얼어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다른 해 보다 유난히 더 추운 것도 아닌데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생태계 학자들이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찾았습니다.
늑대와 여우 같은 적들이 없어지자 양들은 긴장을 풀었고 결국은 저항력이 약해졌던 것입니다. 맹수가 옆에 있을 때는 강인해져서 웬만한 추위를 이길 수 있었으나 천적이 사라지면서 저항력도 약해지고 추위를 이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시련은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참고 이기는 사람들에게는 유익하고 행복하게 하는 비결이 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서 우리를 보고 계실 뿐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시고 그분의 능력으로 역사하신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정직하게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나(우리)를 향한 섬세한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믿음은 순간의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줍니다.
믿음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양심에 따라 정직하게 살며 “이기심이 아니라 이타심”으로 살아가도록 돕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직면한 “어려움과 고통, 피해나 손해”를 알고 계십니다.
“나의 작은 몸짓과 선택”을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에게 정말 좋은 분이심을 믿고 “자격 없는 나에게 아낌없이 독생자를 주신 사랑의 깊이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불안과 두려워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에, 말씀에, 경륜에 기꺼이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피할 길을 주시고 마침내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3:34~35 / 다 주시는 하나님
(요 3: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요 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하나님의 보내신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셨습니다. 한량없이 주신다는 것은 무한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그 배에서 멈추지 않는 생수의 강물이 흐르게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말씀을 높여야 하고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영생하도록 솟아오르는 샘물이 되십니다.
(요 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그 손에 주셨습니다. 만물의 주인이시오. 모든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것이 다 우리의 것이 되고 하나님의 것이, 다 우리의 것이 됩니다. 예수님에게 만물을 다 주신 것 같이 우리에게도 다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불황의 때에도 하나님은 좋은 것을 다 주시고, 저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 감당할 수 있을 때, 그런 믿음과 순종이 있을 때란 전재 아래서입니다.
(36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복음의 모든 축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사람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입니다. 요한은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순종치 않는 자는 영생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믿지 않는 것과 불순종을 동일시합니다. 믿음이 있을 때 순종합니다.
우리는 믿음에 대해서 오해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마음 없는 행위입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의 문제입니다. 이들은 교회에 나오고 안식일을 지킵니다.
금식도 하고 구제도 하고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기도할 때 이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이들이 손을 들 때 눈을 감는다고 하셨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치 않은 것입니다.
이들은 마음이 없이 형식만 남았습니다. 마음에 없는 행위는 가식입니다.
둘째는 행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이런 자가 영지주의자입니다. 영지주의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말로는 예수님을 잘 믿는데 행함이 없고 순종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죽으면 입만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거짓 믿음입니다. 우리는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 집은 홍수가 나면 무너집니다. 믿음이 다 헛것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말하면서 행함이 없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구원받을 것처럼 생각하지만 죽은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십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먹을 것 주고 입을 것 줍니다.
그러나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녀에게 밥 주는 것이 아깝고 용돈 주는 것이 아깝다면 이는 거짓입니다. 사랑에는 행위가 따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믿음이 있다면 행함으로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1:16~17(p372) / 시련의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자
(약 1: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약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어떻게 보면 지금의 어려움은 사탄이 우리에게 주는 시험일지도 모릅니다.
사단은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해서 우리를 시련에 빠지게 하는 것처럼 우리를 속입니다.
여기에 속은 사람은 재기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양 좋은 은사와 선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생자를 선물로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좋은 선물인 성령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이십니다. 과거에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지금은 바뀌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고 하십니다(18).
(약 1: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하나님은 피조물 중에 성도들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여기서 첫 열매는 순서가 아니라 가장 뛰어난, 가장 좋은 최상급의 열매라는 뜻입니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도다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적인 사랑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은 우리를 아들로 인정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없다면 우리는 사생아와 같습니다.
우리는 징계하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눈물을 흘리시는 하나님의 눈길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시련의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시련이라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굶고 매 맞고 헐벗고 감옥에 갇히고 돌로 침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에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고백했습니다.
사랑으로 시련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시험(시련)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 시험을 받을 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내면이 변화되도록 기도하면서 힘써야 합니다.
시험을 기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험을 참고 견뎌야 합니다. 탐욕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시험을 통하여 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멘!
찬송가 342장 가사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1. 너 시험을 당해 죄짓지 말고 너 용기를 다해 곧 물리치라
너 시험을 이겨 새 힘을 얻고 주 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 우리 구주의 힘과 그의 위로를 빌라 주님 네 편에 서서 항상 도우시리
요한복음 8:10~11 / 용서의 힘
(요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대학에서 용서를 가르치는 교수 에버렛 워딩턴은 새해를 하루 앞두고 강도에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어머니는 일흔이 넘은 노인으로 무방비(無防備) 상태였습니다.
괴한은 두 명이나 침입해서 연약한 어머니를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이토록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훔쳐 간 돈은 단돈 60만 원이었습니다.
범인이 잡힌 후 에버렛 교수는 큰 고뇌에 빠졌습니다.
“왜 용서해야 하는지,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지?” 알고 가르쳤지만, 정작 용서를 실행하기는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교수는 몇 년 동안 고민을 거듭한 후에야 용기를 내어 강도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죽인 강도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냐?”라는 사람들의 질문에 에버렛 교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용서란 상대방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분노에서 해방되고 나 스스로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용서해야 할까요?
1) 예수님이 용서하시니까 (11절)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죄인을 보며 자신의 죄를 보아야 합니다. 나도 죄인 중에 한 사람이니까.
아프리카 “르완다”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에 두 종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벨기에가 이 나라를 지배할 때 한 종족은 노예로 한 종족은 지배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다가 1962년에 독립을 합니다. 이때 노예로 있었던 종족이 일어나서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자신들을 노예로 부렸던 종족에게 보복을 하였습니다.
1994년까지 무려 100만 명을 보복 학살했습니다.
학살과 보복을 당한 종족은 총으로 무장한 반군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차별 게릴라전을 펼쳐서 새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새 정부를 수립한 이들은 반대 종족을 무려 300만 명이나 죽였습니다.
르완다는 지금 이와 같은 분노로 인해 굶주림과 죽음의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용서를 모르고 보복하려고 하는 자들의 비참함을 현실 가운데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나라가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입니다.
이 나라는 영국의 식민지였습니다. 영국은 전 세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독립시켰습니다.
그러나,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자연환경이 좋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독립을 시킨 후에도 백인들이 계속 정권을 잡고 휘둘렀습니다. 흑인과 백인의 차별이 있었습니다.
백인들은 흑인들을 억압했고 흑인들은 자기들의 땅에서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흑인들은 데모를 했고 자신들의 인권을 외쳤습니다.
백인들은 권력과 총과 힘으로 흑인들을 계속 억압했습니다.
수많은 흑인들이 감옥에 가고 죽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흑인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지게 되어 그들의 힘으로 흑인 대통령을 선출했습니다.
그 사람이 “넬슨 만델라”입니다.
넬슨 만델라도 흑인의 인권을 위해서 투쟁을 하다가 수십 년 동안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수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자 전 세계가 걱정했습니다.
분노가 폭발하여 피의 보복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넬슨 만델라는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되자 화해와 용서를 외쳤습니다.
만델라 대통령의 화해와 용서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계속적인 번영과 안정을 누리고 있습니다. 넬슨 만델라의 마음속에 분노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고문하고 평생 감옥에서 살게 했는데 왜 분노가 없었겠습니까?
그에게도 분노가 있었지만, 그는 용서했습니다.
분노한 르완다는 죽음의 땅이 되고, 용서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평화의 땅이 되었습니다.
분노와 용서는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우리가 살면서 분노할 일이 왜 없겠습니까? 그럴 때 분노하느냐, 아니면 용서하느냐의 결과는 불행과 행복이 되고, 더 나아가 천국과 지옥이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 가운데 중요한 것은 11절입니다.
(요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아멘.
예레미야애가 3:31~34(구1146) / 하나님의 본심
(애 3:31)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애 3: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애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고초와 재난으로 낙심이 되었으나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끝이 없기에 진멸되지 않을 줄 알고 소망을 전합니다.
주님은 선하시고 성실하시니 그분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인생을 고생하게 하시는 것은 그분의 본심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은 현실에 흔들리지 않고 현실을 넘어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합니다.
현실의 고난에만 집중하던 예레미야가 그 시선을 하나님께 옮기는 순간 소망을 발견합니다. 예루살렘의 참상에 슬퍼하느라 잊었던 하나님의 끝없는 인자와 긍휼을 다시 기억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예레미야는 (24절)에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라는 희망의 고백을 합니다.
예루살렘(성도)의 고난은 하나님이 메우신 멍에이니 입을 땅에 대는 겸손함으로 잠잠히 하나님만 소망하라고 권면합니다(29절). 잠잠히 구원을 기다리는 것도 성도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잠시 징계하시지만, 영원히 버리지 않으십니다.
인생을 근심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33절).
자녀들이 속상하게 할 때 부모님들이 "그렇게 말을 듣지 않으려면 차라리 집에서 나가라" 한다고 해서 부모의 본심이 정말 집을 나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괴롭히거나 근심하게 하는 것은, 그분의 본심이 아닙니다.
그분의 본심은 우리를 사랑하여 미래에 희망을 주고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받는 것, 고생하는 것, 매 맞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시고 징계하시는 데는 목적이 있습니다. 매 맞고라도 바로 서라는 것입니다. 먼저 영혼이 잘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후에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련시켜 성도답게 하시려고 고난이라는 멍에를 허락하십니다.
우리를 때리지만 때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더 아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때리시고 우리를 복 주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우리를 복 주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것. 행복해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고 지키시고 은혜 베푸시고 평강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고난을 받을 때 불신과 원망을 쏟아 내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때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고린도후서 4:13~18 / 고난을 이기자 / 492장
(고후 4:15)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아침에 머리를 감는데 머리카락이 빠집니다. 그때마다 “머리카락이 얼마나 있다고 또빠지나...거울 앞에서 머리를 말리면서 아직도 빠질 머리카락이 있어서 감사합니다.”라고 웃었습니다.
마음먹기에 달렸다, 생각하기에 달렸다는 말이 떠 올랐습니다.
고난을 이기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도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귀도 마음을 가장 먼저 공격합니다. “근심, 걱정, 좌절, 포기, 죽음...”마귀의 뜻입니다.
우리가 가장 드러내기 힘든 것도 마음입니다.
마음을 보이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편합니다. 내 마음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를 살리실 때 마음을 먼저 소생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라고 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굴복시키려는 것은 육체를 통한 마음의 항복입니다.
우리가 육체적 고난을 당해도 마음을 내어주지 않으면 끝까지 패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음을 지키는 자는 어떤 고난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낙심한다는 말은 마음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 지키기를 포기한 사람은 도리어 사탄의 도구가 됩니다. 원수 마귀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의 삶이 황폐해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겉 사람은 날마다 후패해 가지만 속 사람을 날마다 새롭게 해 주시는 주님 때문입니다. 견고한 믿음은 마음의 회복을 통하여 만들어집니다.
고난을 이기는 두 번째는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을 앞에 두고 두려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고난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피해 갈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고난을 통하여 진정한 유익을 허락하십니다. 우리는 그 유익을 고난 없이 얻고 싶고 수고 없이 누리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적을 원하는 솔직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실 수 있지만 우리와 함께 고난의 현장을 걷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고난을 통과한 축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고난을 경험했던 바울은 선언합니다.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워하는 고난은 잠시 당하는 것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가벼운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고난보다 더 큰 영광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고난을 이기는 것이 소망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고정해야 할 대상은 고난과 원수가 아닙니다. 때로는 내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살아가느라 자아도취에 빠지고 자기 연민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에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잠깐이나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 시선을 고정하면 고난을 지나 영원한 승리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 주인공이 되기를 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0:13 / 감당할 만한 시험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 말씀은 성도들이 당하는 일반적인 시험(고난)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험은 신앙을 연단하고 훈련하여 더 큰 믿음을 갖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당할 때 용기를 내어 시험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의인 욥에게 고난을 허락한 하나님이 욥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셨나요?
욥의 무지와 작음을 가르치고 당신의 크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우리 인간에게 설명하여 이해시킨다는 것은 강아지에게 뉴턴의 만유인력을 설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한 가지는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연히나 우발적으로 일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모든 것은 그의 작정과 예정과 섭리 안에서 계획되었고 지금도 그 목표점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 삶에는 고난과 시험이 불가피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우상을 섬기다가 죽었습니다.
간음하다 죽고 하나님 시험하다 불뱀에 물려 죽고 원망하다 죽었습니다.
고전 10장에 그 사건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오늘 우리에게도 거울이 되고 경계가 되도록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이 지금도 일어난다는 말이니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도 동일한 시험과 시련이 닥칩니다. 하지만 ‘감당할 시험’만 준다고 합니다.
‘감당할 시험’이란 ‘누구나 겪는 시험’이란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고난과 시험 앞에 ‘왜 나만 이렇게 힘든 일을 겪는가?’ 하며 힘들어합니다.
자기가 겪는 시련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럽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누구나 그만큼의 고통은 있습니다. 아울러 ‘감당할 시험’이란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시험’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갓 젖병을 뗀 유아에게는 그가 견뎌낼 수 있는 만큼, 초등학교를 졸업한 어린이에게는 그만큼의 시험,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에게는 그만큼의 시험만 주겠다는 것입니다.
유치원 졸업생에게 대학 입시를 치르게 하지 않습니다. 혹 내게 닥친 시련이 다른 이들보다 더 큰 것같이 보인다면 내가 그만한 수준에 와 있음이니 오히려 기뻐할 일입니다.
내가 겪는 고난이 크다면 내가 그 고난을 견디고 감당할 만큼 크다는 것이니 감사할 일입니다.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피할 길까지 주신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피할 길을 주실까요?
애굽의 열 가지 재앙, 홍해를 건넘,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임, 반석의 물로 마시게 하고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갈멜산 엘리야의 승리처럼 멋지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오늘의 이 시련도 우리 유익을 위함이라는 확신으로 그의 뜻에 순종함이 피할 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 없이 바른길로 내딛는 한 발 한 발이 바로 그 피할 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고난도 허락하시지만, 또 피할 길을 주십니다. 아멘.
● 기도 :
고난을 허락하시고 감당하게 하시며 또 피할 길을 예비해 주시는 하나님,
오늘도 하나님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며 한 주간을 믿음으로 시작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잘 나가던 욥에게 시련을 허락하시고 욥의 교만과 아집을 꺾으셨지만, 그에게 감당하게 하시고 피할 길을 주시어 마침내 갑절의 은혜와 복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욥처럼 이기게 하소서.
열두 명의 정탐꾼들 가운데 정적이 열명에 의해 왕따 당했던 갈렙과 여호수아처럼 이기게 ...
여호수아와 갈렙은 ‘여호와가 우리에게 약속하셨으므로 그분의 뜻에 순종하자’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행하셨듯이 여호와가 함께하시면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라는 것이 바로 그 여호수아와 갈렙의 피할 길이었음을 깨닫고 순종하여 마침내 승리하게 하소서.
애굽의 열 가지 재앙, 홍해를 건넘,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임, 반석의 물로 마시게 하고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갈멜산 엘리야의 승리처럼 멋지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오늘의 이 시련도 우리 유익을 위함이라는 확신으로 그의 뜻에 순종함이 피할 길임을 알고 받아들여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여 마침내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옵소서.
● 주님, 저희는 한 눈 팔지라도 주님의 시선을 저희에게 고정시키시고 눈동자처럼 지켜주심을 믿습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같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계획하고 계심을 믿고 그 일을 찾아내어 행하게 하옵소서.
죽음의 골짜기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목이신 주님을 바라볼 때 끌어 올려주심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수없이 넘어지고 깨지고 부서졌지만 그래서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서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너무 힘들어 무너진 마음을 붙잡아 주시고 넉넉히 이기게 하실 것을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끝나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새로운 시작을 열게 하시고 위기조차도 기회가 되게 하옵소서.
힘들었던 지나간 일들을 떠나보내고 다시 일어서게 하시고, 다시 꿈을 꾸고, 다시 열정을 깨우시고 다시 새롭게 도전할 용기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시련을 통해 더욱더 강해지고 단단해지게 하셔서 행복한 가정, 신바람 나는 회사로 세워주옵소서.
고난 앞에 뒷걸음치지 않게 하시고 이 고난이 내게 임한 것은 내가 이 고난을 감당할 힘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께 도움을 주님의 이름으로 구합니다. 간절한 기도를 응답해 주옵소서.
이 어두운 밤이 지나갈 때까지 사장님과 가족들, 직원들과 그 가족들이 건강할 수 있도록 지켜주시고 함께하여 주옵소서. 현장에서 일하는 동료들 안전사고 나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스스로 최선을 다하게 하소서
무덥고 지루한 장마철에 건강도 지켜주옵소서.
또한 일할 수 있는 현장들이 수주되어 사장님과 모든 직원들, 그리고 가족들이 편안해 지게 하옵소서.
* 오늘도 예배드리며 준비한 예물 드립니다.
귀한 예물을 드리는 기업과 준비한 손길을 축복하사 하는 일마다 형통하게 하소서.
당면한 경제적인 문제도 잘 풀리게 하옵소서.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 된 너를 내가 책임지리라고 하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