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탄호수의 사원인도네시아 발리섬.
솔로강(江) 유역에서 발견된 플라이스토세(世) 말기의 화석인류와 이와 함께 발굴된 유물은 인도네시아에 구석기문화가 발전하였음을 증명한다. 또한 자바섬의 와자크에서도 고기충적층(古期沖積層)의 표면 부근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인종과 비슷한 두개골이 발견되고 있다. 오늘날 각지의 인종들 사이에 남아 있는 멜라네시아·네그리토·베도이데계(系) 인종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 인종도 태고시대에는 이 지역의 주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시대의 유물로는 서쪽 지방에 네모꼴 돌도끼[石斧], 동쪽지방에 원통형 돌도끼가 분포되어 있는데, 전자는 대륙에서 남하해온 인도네시아형(型) 종족이 남긴 것이고 후자는 멜라네시아 지방과의 교류를 증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시대의 뒤를 이어 거석유물(巨石遺物)을 수반하는 철기문화가 펼쳐져 돌멘 모양의 분묘, 돌항아리, 돌로 만든 조상의 인물상 등이 남아 있다.
인도네시아계 인종이 이와 같은 발전을 이룩하는 동안 서쪽에서는 인도인 이주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수마트라섬 동부와 자바섬 서부지방을 개척한 데 이어 보르네오섬과 셀레베스섬까지 진출하였다. 수마트라섬의 팔렘방을 중심으로 번영을 누렸던 인도계 문화국가 스리비자야(중국의 문헌에는 室利佛逝, 나중에는 三佛齊라고 하였다)는 특히 강대한 해상세력을 형성하여 수마트라섬과 자바섬 서부, 말레이반도의 대부분을 수중에 넣었으며 남중국해 무역의 중심지로서 막강한 부(富)를 자랑하는 국가로 발전하였다.
8세기에는 자바섬의 중앙에 샤일렌다르라고 불렸던 왕조가 일어나 보로부두르와 같은 불교유적을 남겨놓았다. 이 왕조는 수마트라섬의 스리비자야 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9세기 중엽에 이 두 왕통(王統)이 합병됨으로써 한때 남중국해의 강대한 해상제국이 성립되었다. 11세기 초 스리비자야는 인도의 코로만델 해안을 지배하였던 주련국(注輦國:Colas)과 싸움을 벌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이 당시 동부 자바에 에를랑가라는 왕이 출현하여 이 지방을 통일하였으나 그가 죽은 뒤 장갈라와 카디리의 2왕조로 분할되었으며 12세기에는 카디리의 세력이 커지면서 동부 인도네시아의 여러 섬들을 정복하였다. 그때부터 1세기 반 뒤 카디리 왕조가 멸망하자 싱가사리 왕조가 새로 일어났으며 이 왕조 최후의 왕인 쿠리타나가라 시대에는 수마트라를 비롯하여 발리·순다·마두라섬을 정복하였다. 그가 죽고난 뒤 몽골군이 침입해왔으나 쿠리타나가라 왕의 사위 라덴비자야가 교묘한 술책으로 몽골군의 세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한편, 몽골군의 허점을 엿보고 있다가 기습하여 큰 손해를 입힘으로써 민족독립을 되찾고 마자파히트 왕조를 창시하였다. 이 왕조는 나중에 포르투갈 영토가 된 동인도의 대부분을 지배하여 인도계 국가로서는 최후의 번영을 누렸다. 한편 아랍인들이 남중국해로 진출해온 것은 꽤 오래된 일로 추정되는데, 10∼11세기 무렵 베트남의 참파 근방으로 유입해온 이슬람교는 13세기에 수마트라섬 북부의 사무두라와 페들라크에 이슬람 왕국을 성립시켰다.
14세기에는 말레이반도에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며 말라카가 그 중심지 구실을 하였다. 15세기에 자바로 진출한 이슬람 세력은 특히 중부지방에서 기반을 굳혔으며, 마자파히트 왕조는 북부해안 부근의 테마크를 지배하였던 이슬람교 군주에게 멸망하였다. 그 뒤 이슬람교는 서부 자바를 비롯하여 보르네오섬·셀레베스섬 등 여러 섬으로 전파되어 발리섬을 제외한 동인도제도를 휩쓸었다. 근세에 와서는 이슬람교도의 해상세력을 격파한 서유럽인들이 진출해왔다.
포르투갈은 암본을 차지하고 몰루카제도의 향료 무역권을 독점하였으며, 에스파냐인들은 필리핀을 세력권으로 하여 몰루카제도의 향료무역에도 손을 대었다. 그러나 이 두 나라는 식민지정책에 서툴렀기 때문에 네덜란드가 이들에게서 동인도의 해상권(海上權)을 빼앗았으며, 이때를 전후하여 이 곳으로 진출해온 영국인과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17세기 초 네덜란드의 쿤은 자카르타에서 영국세력을 몰아내고 바타비아를 건설하여 자바섬에 네덜란드 세력을 심었다. 따라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마자파하트 왕조의 뒤를 이은 마타람왕국을 잠식해 들어갔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한때 영국군에게 점령되기도 하였으나 1814년과 1824년에 체결된 런던조약에 따라 네덜란드는 아시아 대륙의 옛 영토를 포기하는 대신 영국으로부터 인도네시아 지배권을 승인받게 되었다. 이로써 자바섬의 토착 왕국은 점차 네덜란드의 무력에 굴복하게 되었고, 마침내 티모르(포르루갈령), 보르네오섬의 일부(영국령), 필리핀(에스파냐령, 나중에는 미국령)을 제외한 인도네시아의 대부분이 잇달아 네덜란드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350년이 넘는 네덜란드의 지배는 인도네시아 민족해방을 지도할 만한 민족자본가의 성장가능성을 배제해 버렸다.
그러나 19세기 후반경부터 미약하나마 문화적 활동을 지향하면서도 종족적 색채가 강한 여러 가지 운동이 일어났다. 1908년 와히딘 수디로후소도가 주도한 부디우토모당(黨)이 대표적이다. 그 후 이슬람교도들을 중심으로 한 사리카트이슬람(이슬람연합) 운동이 인도네시아 전역에 걸쳐 일어나 종교를 통하여 종족의 벽을 뛰어넘음으로써 대규모의 통일된 힘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사리카트이슬람은 마침내 급진적인 정치색을 띠기 시작하여 1920년에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탄생시켰다. 공산당은 1926년 노동조합의 통일전선(統一戰線)으로 동인도 노동조합협의회를 결성한 데 이어 공산당을 비롯한 12개 정당과 노동조합을 결속하여 반제국주의 통일전선(反帝國主義統一戰線)을 결성하였으나 1926∼1927년 전국에 걸친 무장폭동 이후 비합법화되었다. 그 대신 1927년에는 인도네시아 국민당이 결성되어 지도권을 장악하고 민족주의적 비협조를 제창함으로써 세력이 크게 확산되었다.
그러나 1931년에는 이것 역시 해산명령을 받게 되어 민족해방운동은 점차 후퇴하였으며, 단지 자치를 요구하는 선에 머물렀던 대(大)인도네시아당이 그 뒤를 이었다. 1936년에는 각종 정당 및 노동단체를 통합한 인도네시아 인민회의가 탄생하여 보통선거에 의한 완전한 의회의 획득이라는 슬로건을 정면으로 내세웠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에 바타비아를 점령한 일본군이 동인도 전역에 군정(軍政)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민족운동은 지하로 숨어들었다. 일본의 항복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민족운동 지도자 수카르노와 하타를 중심으로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식민지회복을 노렸던 네덜란드는 1947년 경찰행동(警察行動)이라는 명목으로 인도네시아에 대한 전면공격을 가해왔다. 이 사건은 국제연합(UN)의 조정에 따라 1948년 1월 15일 렌빌협정에 의해 수습되었으나 이 협정은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의 불만을 샀으며 급진세력이 공산당을 중심으로 결속하여 인민민주당을 조직하였다. 공화국 정부는 마디운사건을 계기로 이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그러나 1948년 12월 네덜란드가 제2차 경찰행동을 일으켜 공화국을 위협하자 다시 반(反)네덜란드 감정이 높아졌고 식민지 재편성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미국이 네덜란드에 압력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1949년 12월 27일 헤이그 원탁회의 결과 인도네시아 연방공화국이 탄생하였고 네덜란드와의 사이에는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연합이 성립되었다. 그 뒤 공화국 정부는 단일국가 수립에 노력하였으며 연방내 친(親)네덜란드파(派)의 반란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장애를 배제한 뒤 1950년 8월에는 1949년의 연방헌법을 폐지하고 연방을 해체하였다.
그 결과 서유럽형 의회제도를 골자로 하는 1950년 헌법에 의하여 단일독립국가로 통일되었고, 이어서 1956년 2월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연합을 폐기함으로써 완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경제적 권익은 그대로 남아 커다란 제약요인이 되었다. 국제적으로는 이른바 콜롬보 그룹에 속하여 SEATO(Sou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동남아시아 조약기구)에 반대하며 국제적 긴장완화를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1963년에는 수카르노가 군부의 지지하에 종신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독재체제를 수립하였으며, 대외적으로 UN을 탈퇴하고 소련과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였으며 대내적으로 용공노선을 지지함으로써 군부와 공산당이 대립,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에 1965년 반공적인 군부세력의 쿠데타가 발발하였으며, 1968년 수하르토 정부가 출범하였다. 수하르토 정부는 1969년 이리안바라트를, 1975년 동티모르를 합병하였으며 1992년 총선에서 집권당이 승리함으로써 연속집권의 기반을 다졌다. 1999년 8월에 UN 감시 아래 치러진 주민투표에서 동티모르의 독립이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