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김정태가 쓴 적설기등반보고
조장빈·이강승(譯) / 근대등반사팀
(클라이머 외솔 최현배, 등산 강사 위당 정인보 , 열성 산악회원 함석헌...그들의 등산 기록은 당시 어느 잡지 한 귀퉁이에 채 한 줄도 안된다. 외솔 선생은 주말 인수봉 등반을 마치고 다음날 조선어학회 모임에서 인수봉 정상의 감흥을 으쓱대며 얘기했으리라. “三角山 仁(壽)峰 독바위 꼭대기 오른 것 - 그보다는 釜山서 木船을 타고 더구나 數多의 學生을 거느리고서 夜中二時頃에 蔚山 長生浦로 到達한 일은 참 시방 생각하면”이라고. 어쩌면 조선어대사전에 당시 일상적으로 사용되지 않던 등산용어가 있다면 이는 그 때문이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선구적 등반기록에 대한 자료 검토가 끝나고 나면, 이 땅의 알피니즘의 여명기인 1935년 경 서울근교의 암봉을 오르던 평범한 조선인 클라이머들의 얘기를 발굴하여 글로 남기고 싶다. 글 재주가 없는 것에 다들 손사래를 치겠지만. 무레사네 자료 몇을 더 살필 것이 있어 뒤로 미루고 김정태 선생이 쓴 적설기등반에 관해 먼저 글을 올린다.)
우리나라 근대등반 초기에 있어 적설기 등반은 임무를 비롯한 조선산악회의 몇몇 산악인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것은 적설기 스키등반으로 형태였다. 그리고 등반이 이루어진 것은 1929~30년의 (舊)조선산악회의 첫 적설기 금강산 비로봉 원정이었으며, 그 기록은 1931년 10월 창립된 조선산악회의 회지인 『朝鮮山岳』에 등반기가 남아 있어 암벽등반 기록과는 달리 등반사 정리가 쉬운 편이다. 이후 이즈미 세이이치(泉靖一)의 경성제대 적설기 등반과 1930년대 후반 이후 김정태와 백령회의 적설기 등반 또한 기록이 명확하며 당시 최고의 적설기 등반이었던 1941~2년 마천령종주 백두산 등반 또한 총독부가 발행한 『登行』에 상세이 남아 있고 조선의 적설기 등반에 큰 영향을 미친 일본 경도제대(京都帝大) 등반 또한 보고서가 충실하다.
먼저 김정태가 적설기 등반사에 대해 쓴 두 편의 글을 싣고 이어서 세부 등반기록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인 적설기 최초 등반인 1929~30년의 (舊)조선산악회의 첫 적설기 금강산 비로봉 원정과 그 이듬해 초등정 기록 그리고 김정태의 화악산과 금강산 비로봉 등반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Ⅰ. 김정태의 「조선의 적설기등산사」
이 글은 김정태가 1939년 4월 일간지에 기고한 글(日語)로 당시 공식 매체에 기록된, 지금까지 유일하게 발굴된 그의 자료로 소속은 ‘朝鮮山岳會員 金鼎泰’로 적고 있다. 처음 공개하며, 전체 글 중에 적설기 등산보고에 관한 부분의 번역문이다.
김정태의 이 보고는, 당시 조선인 클라이머들은 서울근교 암봉의 기존 코스를 피켈로 걸고 오르거나 하는 등반 수준이었고 등반 장비가 필요한 적설기 등반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해 조선인은 물론 본인의 적설기 등반에 대해서도 언급한 것이 없다. 다만, 이 글에서 우리나라 근대등반사 초기 기록에 참고할 만한 몇 가지 사항을 보면 첫째, 근대등산의 유입은 1926년을 전후한 시기로 지리적 혹은 탐험적 혹은 탐승적 등산이라고 하였고 스키, 등산 양식은 일본 양식을 그대로 배웠으며 1928~29년 경에 초보적인 조선등산의 첫걸음이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둘째, 조선산악회가 창설을 조선의 등산의 개척자로 이이야마(飯山達雄), 시모이데(下出繁雄)는 금강산 비로봉 스키등산 등 조선등산 초기부터 항상 선구적인 활동을 하였고 그 공로와 많은 업적은 조선등산사 그 자체라고 하였다. 셋째, 1932년 성대(城大, 註 : 경성제대)의 이즈미(泉靖一), 하라(原正典) 두 사람의 금강산 채하봉 밸류에이션 코스 암벽등반으로 인해 학교 산악부 활약은 집선봉, 관모봉 등에서 1935년까지 조선 산악계의 미증유의 성황을 이루어 조선에 있어서 등산에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도 김정태는 임무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듯하고 우리나라 근대등산의 시작을 1920년대 후반에 일본에서 유입되었다고 보고 있다.
「조선의 적설기등산사」
조선등산사에 대해, 나에게 상세한 평론을 고찰하여 쓰길 바라며 지면을 할애해 주었지만, 단지 참고를 위해 그 발전상을 일괄해 보자. 앞서 각종 등산의 형태를 서술했지만, 그 외에 일찍이 등산 육성을 했던 내지로부터 이주해 온 산악인들의 등산과 그리고 또 하나는 내지에서 모든 산을 등반한 왕성한 등반 의욕의 발전방향은 새로운 대상을 추구하여 머나먼 조선의 산에 매력을 느껴 원정을 오는 산악인들의 등산이 있었다.
이러한 등산은 당시 각자의 의도와 조건을 적용해서 어떤 사람은 가까운 지방의 이름 있는 산을 목표로 만족하거나, 어떤 사람은 오로지 한창인 탐승등산을 하고자 열심히 북조선 오지로 달려가거나 혹은 불편과 곤란을 감수하면서까지 깊숙이 들어가, 이러한 산들을 개척에 힘쓰거나 했던 것이었지만 대개 하계 등산을 주로 하였다. 여하튼 어느 것이든 그 형태나 방법의 정도차이는 있으나 등반을 목적으로 오르는 소위 의식적 등산에서는 같은 형태의 것이다.
이 현상이 대정(大正, 1912~1926) 말년 경부터 소화(昭和, 1926~1989) 초기에 이르러 소수의 선구자들에 의해 명맥을 유지했던 조선의 초기 등산이 있었지만 이러한 선구자들에 의한 등산은 아직 지리적 혹은 탐험적 혹은 탐승적 흥미를 겸하여 있던 것이고, 등산으로써 확연(劃然)한 순정성을 인정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당시 내지(일본 본토)에서 급속히 발전한 알피니즘 등산의 일반적인 융성과 함께 적설기 등산의 진전 및 암벽 등산 재인식으로 인해 밸류에이션 코스가 대중의 등산열기를 끓어오르게 했고 그 여파는 조선에도 퍼져 그 중의 일부는 경성근교 바위산에서 암벽 등산 대상을 발견하게 되고 쉬는 날을 이용해 등산열기를 발휘하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게다가 당시 내지에서 스키와 등산이 한창 붐이었을 때, 조선에서도 슬슬 하기 시작한 스키열기는 조선에서도 가능한 스키, 등산을 꿈꾸는 등, 의식 무의식중에 내지의 등산양식을 그대로 배우며 소화 3, 4년경에는 유치하지만 각각의 의도하며 즐기는 채로 자유분만하고 활기찬 현상을 띠었고 이는 조선등산의 첫걸음의 시작으로 생각되었다.
이런 현상은 드디어 눈에 띄게 성숙해져 하나의 여론으로써 일반에게 알려졌고 지금까지의 등산 운동이 혼연일체가 되어 조선에서도 하나의 산악계를 형성였고 소화 6년에는 발기인 미야지마(宮島敏雄) 씨 외 9인에 의해 조선 산악회 창설을 보았던 것이었다. 적은 수이지만 산악회 창설 당시의 이들은 조선에서의 등산의 황무지 개척자이고, 많은 공이 있는 전문가들이다.
그런데 조선의 산에는 빙하가 없고 바위만의 산이 없는 점이 내지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등산방법이나 형식의 발전방향도 내지산악계의 양식을 추구해 스스로 정해진 듯한 것이지만, 위도(緯度)의 차이와 대륙과 연결로 인해 기상이나 지형 등의 상태로 인해 조선땅 나름대로의 독특한 것이 있고 또한 탐승 등과 같은 특수 등산대상으로써 개척한 가깝고 친숙한 유명한 산을 제외하고는 아직 도로도 없는 지방 오지, 혹은 북조선지대에 산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멀고 교통이 불편한 점은 당시 등산 대상으로써 조선의 산은 정말이지 처녀지였다.
따라서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조선의 등산 발달은 내지 산악계를 모체로 하고 있을 뿐, 내지에서 오래전부터 고생하며 많은 희생으로 얻은 연구와 수련, 자랑할 만한 방법과 형식, 기술, 장비 등을 아무런 고생도 없이 받아들이고 개량하고 활용할 수 있는 은혜를 받아 급속한 발전이 약속되어 있었지만, 그 대상이 내지와 동일시되지 않은 사정이 오늘날과 같은 등산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상당한 과정을 밟아야 했다.
그래서 당시 조선의 산악계 형성을 보자면, 아직 그 방향성에 막연한 것이 있었고, 선구자들은 그 대상 발견 혹은 개척에 오로지 노력하며 곤란과 수고를 하고 있고 등산 애호자들은 스키와 암벽등산으로 수련과 준비에 급급하여, 모두 연구 수준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화 7년(1932년) 정월, 산악회 창설 당시의 분들인 이이야마(飯山達雄), 시모이데(下出繁雄) 두 분에 의해 이루어진 금강산 비로봉 스키등산은 조선의 산악회에 일대 혁명을 초래했다, 두 분은 조선등산 초기부터 항상 선구적인 활동을 하고 당초보다 본격적인 근대적 형식의 등산을 목표로 열렬하고 변함없는 모습이었고 현재에 이르러 그 공로와 많은 업적은 조선등산사 그 자체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여름철 산이라고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탐승대상으로써는 친숙했지만 시즌 이외는 사람이 입산할 곳이 못되었던 전혀 수수께끼와 같은, 상상도 가지 않은 금강산을 결단하고 실행하여 적설기 등산에 성공했던 것은, 그 때까지 전연 처녀지로 사람들의 동경으로써 오로지 꿈에 그리던 조선 적설기 등산의 찬란한 첫 발걸음을 새긴 것이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혼돈했던 조선산악회가 오늘날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며 획기적인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내지의 산악회와 보조를 하나로 하는 것에 자신을 가지고 홀연 산사나이들로 하여금 일률적으로 내지에서 진전된 방법과 형식의 추구에 한층 더 박차를 가해 급하게 전개되었다. 이와 한편으로는 내지산악회에 항상 선구적 등산을 완수하는 학교산악부의 정예의 활약은 그 화려함도 더해지고 외부의 스포츠와 같은 의미로 이 땅 조선의 학교에도 그 풍조를 초래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때까지 조선 학교의 방향은 소수의 학생들로 인한 경성근교 암벽 등산 혹은 스키 수련으로 극소수이지만 산의 정열과 기백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산악계 선구자로 소수의 교수들도 있었다.
그것은 소화 7년(1932년) 7월, 성대(城大, 註 : 경성제대)의 이즈미(泉靖一), 하라(原正典) 두 분이 금강산 채하봉 밸류에이션 코스 암벽등반으로 인해, 역시 당지(조선)의 학교 산악부 활약의 지평을 열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앞서 쓴 글의 적설등산 첫 진출에 대해 경성부근 암장에서 갈 방향을 잘 모르는 일반 암벽등산 대상에게 적절한 판로와 발판을 주었던 것이다. 조선에서 성장한 암벽등산의 꽃을 파게 한 것으로써 매우 의미가 깊었던 것이다. 게다가 계속해서 같은 해 8월, 내지로부터 동경제대 산악부 일행이 금강산 집선연봉 및 세존봉 바위코스를 첫 등반을 한 것은 이러한 정세에 한 동력을 쏟은 것은 말 할 필요도 없고 게다가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움직임인 원정대상으로써의 조선의 산이 크게 부각되어 주목을 받은 것이었다.
이로 인해 몇 개의 학교 산악부의 탄생을 보았지만, 그 중에서 현저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소화 8년(1933년) 타케나카(竹中要) 교수에 의한 성대(城大) 예과 스키 산악부와 성대 산악회일 것이다. 같은 해 3월에는 집선봉 S3(동북릉 제3봉) 에 올라 조선 최초의 알피니즘에 충실한 초등반을 하였다. 드디어 학교 산악부의 존재는 학생등산에 일률적인 정신과 통제를 부여해 조직적이 되고 그 여세로 보다 큰 대상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소화 9년(1934년) 7월, 타케나카 교수가 통솔하는 성대산악회 9명과 그 외 1명이 관모봉을 집단으로 올랐는데, 지금까지의 산발적인 등반으로부터 한결 같은 동향으로 힘을 집중시켜 제일보를 내딛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정세는 소화 10년(1935년)에 이르러, 조선 산악계의 미증유의 성황을 이루어 조선에 있어서 등산에 확고한 기반을 엿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같은 해 5월, 성대의 이즈미, 고토(後藤) 두 사람이 북조선 오지를 적설기 최초의 등산이 있었다. 차일봉 등반, 같은 맥락으로 정월에 쿄토제국대의 산악부 일행이 적설기 백두산 원정 등산이 있었다, 전자는 반도의 산은 우리들의 손으로라고 하는 동기에서 한층 더 큰 곤란한 등산의 성공이고 후자는 멀리 히말라야 진출의 빛나는 시금석을 조선의 산에서 확실한 자신을 얻은 것으로 그 등산으로서 백두산은 우리나라 산악계에 부동의 등반대상지로서의 가치를 얻었다.
그 해(1935년)는 학교산악부 이외에도 일본산악계의 원로인 쿠로다(黑田正夫) 일행에 의해 정월 관모봉의 궤상봉 등반을 시도하여 주목을 받았다. 조선의 대표적 등산대상으로써 조선 알프스라고 칭하는 관모봉 적설기 등산은 앞에 기술한 소화 7년(1932년) 이이야마 씨 외에 금강산 등산 이전에 소화 7년(1932년) 3월 관모봉 산자락에 위치한 나남(羅南, 함경북도)의 한 산악인 카모(加茂進) 씨가 시도했으나 산정 주릉 아래서 무리한 계획과 준비로 부득이하게 하산하기에 이르렀다.
이 정세는 같은 해 3월 방학을 이용해 성대의 열혈아 이즈미(泉), 이토(伊藤). 코토(後藤)가 재차 달려가 2회에 실패했던 이 산의 초등정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러한 성대의 건강한 남아의 현저한 활약의 확고한 기반으로 같은 해 성대 산악부 정식 설립을 본 이래 한층 활발함을 더하고 있다. 현재에 이르러 조선의 산은 그들의 손에 의해 여름등산 또는 겨울등산 불꽃을 튀기고 더욱더 현저한 대상이 차례차례로 개척되어 그 활약은 조선등산발달 이래, 실로 한시대의 획을 그었던 것이다.
그 중, 특히 기록 될 만한 것은, 산악계의 일편적인 경향이였던 알피니즘으로부터 히말라야니즘으로의 길을 처음으로 실현한 것은 학교 외 참가자 4명이 합류하여 총 10명이 집단 협력하여 소화 11년(1936년) 정월, 적설기 한라산 등산이었다. 당시 내지의 관서학련(오사카지역) 그룹도 서로 전후로 등산하여 한층 의미 깊었지만, 하산도중 대원인 마에카와(前川) 군이 조난되어 조선 최초의 가슴 아픈 사고를 기록했다.
실제로 바라지 않은 일이지만, 어느 등산사사에도 그런 활발한 등산 발전에는 부속물로 내지에서 조난과 같은 것이 사계절 일어나며 세상 등산자들에게 경계하고 있다. 이 일은 예전에 말했던 것과 같은 등산인 만큼 당사자들에게 한층 동정되는 것이 있고 모처럼 발전하기 시작했던 기세를 꺽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몸으로써 얻기 어려운 귀중한 체험으로 오히려 정신상으로나 실제상으로나 한층 확실한 방향으로 인도하는 동기를 이루어 소중한 마에카와군의 희생은 슬픈 기억으로써도 우리들 산악인들에게 잊기 힘든 기념이었다.
그래서 동교(同校)에서는 이런 것들에 굴하지 않고, 이 비통한 체험을 토대로 해서 그 다음해에 재차 적설기 관모봉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시도인 극지탐험법으로 등반하여 거듭 작년과 변치 않은 학내외의 대원편성을 통해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이 쾌거는 동교(同校)의 자신감을 새롭게 하고 세계의 우려에 대해서 과연 그 부동의 진로를 밝힌 것이었다. 또한 당시대도 계속해서 와세다대학 원정대 일행이 동산(同山)을 다른 코스로 올라 색채를 더했다.
이상 언급한 성대산악부의 활약은 항상 선구해 나간 화려한 업적으로서 현격한 독단의 시대를 보였고 조선의 대표적 존재였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시종 변치 않는 태도와 대단한 열의로써 조선의 독특한 대상을 향해 연구와 수련에 전념해 개척에 힘쓰고 하나의 조선등산의 일부분을 구성한 것은 그 수많은 공헌과 함께 선구자로써의 위대한 것이고 귀중 한 것이라 칭송을 꺼릴 것이 없다. 게다가 또한 조선이 나은 자랑이다.
그리하여 그 약진적 역량은 현재 전통이 오래된 내지의 일류학교 산악부에 못지않게 당당히 실록으로 남기기에 이르렀고 특히 작년 여름에는 새로운 처녀지로써 고악(高岳)원정과 함께 산악계 희망인 북지(北支) 대륙으로 몽고와 신강 학술 탐험대를 일찍이 보내어 제일선으로 무대에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 탐험대의 다양한 성과는 소오대산 등반과 더불어 이후 산악계에 주어진 의미는, 앞서 언급했던 국책원조의 의미가 더해져 매우 큰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성대 이외의 학교 등산에서는 거의 볼 수가 없었다. 각 학교에 산악부가 있었지만 오로지 여름방학을 이용한 소위 캠핑여행으로부터 한걸음도 못 나가고 있었다. 그것이 최근 한 걸음 두 걸음 행보를 보이며 장래를 기대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있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 하겠다.
금강산 세존봉 정상에서 1,351m 서북주릉을 바라보는 김정태. 그는 서북릉 코스를 1942년 10월에
백령회 이름으로 등반을 하였다. 이 사진은 1937년 10월로 금강산 세존봉 종주 등반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근대등반의 주역은 김정태와 백령회 활동임에 틀림이 없고 근대등반사는 그들의 기록으로 채워져 있다. 이마저도 한국전쟁 등으로 사료가 유실되어 김정태의 기록 외엔 거의 남아 있지가 않다. 그래서 당시 등반에 대한 새로운 기록이 발굴되어 기존의 내용의 수정이 필요한 경우가 잦은데, 그 주된 대상은 김정태와 백령회일 수 밖에 없다.
김정태의 선구적 등반기록과 그가 이끈 백령회 등 산악활동은 우리나라 초기 등반사에 비견할 산악인이 없는 큰 업적이고 해방 후의 국토규명 활동과 후배를 양성하며 우리나라 산악운동의 토대를 마련한 그의 활동은 더욱 그러하다. 그가 『登山50年』 등에서 일부 자의적 스토리텔링으로 과장되게 작성한 부분이 간혹 얘기되곤 하는데, 이는 그의 많은 등반 활동의 곁가지로 오히려 유고집의 번역 등 공론화로 이를 명확히 하여 이 선구적 산악인의 진면목을 제대로 세우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Ⅱ. 韓半島의 積雪期 登攀과 南韓의主要対象
경기고산악부에서 1956년과 1957년 발간한 회지인 『라테르네』에 실린 김정태의 일제강점기 적설기등반사 부분이다. 김정태는 여기서 1976년 발간한 『登山 50年』과 월간 산의 기록과는 달리 그의 적설기 첫등반으로 화악산과 금강산 비로봉과 비룡폭 등반이 아닌 1938年 3月에 본인과 嚴興燮(제화공), 이시이(石井吉雄)의 금강산 집선봉 동북릉 S1 등반을 기록하고 있다.
韓半島의 積雪期 登攀과 南韓의主要対象
먼저 積雪期登攀이란 어떠한 것이며 지금까지 우리 韓半島에서의 積雪期登攀은 어떠했었나 하는 것을 생각해 본 다음에 지금 우리 앞에 놓인 南韓의 登攀対象과 그 指向한 것이라든지 課題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저 한다.
積雪期登攀의 形態
積雪期登攀이라고 해도 그 方法과 形成에 따라 여러 가지 있을 터인데 于先 두 가지로 区别한다면 欧洲 알프스와 같이 恒雪이 있는 곳에서의 高山의 登攀과 우리나라와 같이 그것이 없는 地域에서의 登攀이었을 것이다. 近代 “알피니즘”의 発祥을 본 欧洲 알프스의 積雪期登攀에도 大別해서 두 가지 形態를 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墺地利의 H. Schunider가 先驱해서 盛行하게된 스키 登山 即 山岳스키의 発展相인데 처음에는 가벼운 스키 Turing 하는 것이 次次 스키를 極度로 活用해서 이 山에서 저 山으로 連峯을 能率的으로 踏破하거나 또는 스키를 즐기면서 登攀하는 스키 登山이 있고 또 하나는 더욱 어려운 條件으로의 登攀( schwierigkeits alpinismus)으로 알프스 地帶의 開拓的인 或은 变化있는(variation) 登攀을 指向하는 것인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스키를 登攀用具 或은 技術의 -部로써 利用해서 積雪帶以上의 登攀 卽 雪山 雪崖 氷崖 岩壁登攀을 包含하는 本格的인 登攀으로써 稜雪期中의 風雪파 여러가지 雪氷岩의 더한층 峻難한 條件을 択하여 登攀하는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오늘날 스키 為主의 스키 登山은 매우 普及 되어서 外国에는 이미 山中 施設과 集団活動과 一般運動으로 되다시피 되었는데 対하여 後者는 어느 사이에 開拓될 만큼 開拓되고 变化조차 없어지게끔 되는 反面에 漸次 “히마라야” 等地의 海外 遠征熱(Himalaya-ism Expedition System)에 따라 이를 指向하고 模倣하고 研究 修練하는 登攀으로서의 進展과 意義를 갖게 되었다. 그러면 또 하나 우리나라와 같이 恒雪의 高山이 없는 地域에서의 積雪期登攀은 어떠한가 하면 여기에도 前記한것과 같이 스키 登山이 있고 또 하나의 더욱 어려운 條件으로서의 積雪期登攀이 있다고 보겠는데 그 가장 좋은 形態를 보이고 있는 곳이 바로 우리나라와 日本이 아닐까 한다. 여기에도 스키 登山은 어디까지나 스키를 為主해서 즐기고 活用하여 登山하는것으로 오늘날까지도 盛行해서 過去 우리나라의 金剛山 三防 高台山 連山 等의 集団 스키 登攀 같은 것이 있었고 日本 알프스의 乘鞍岳, 白馬岳 스키行 等이 끝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더욱 어려운 條件으로서의 積雪期登攀은 어떠한가 하면 恒雪 없는 山에 積雪을 기다려 일부러 雪線을 択하여 스키를 话用하고 登用하지만 스카 使用 限界에서 Ski Deport를 한 후에 雪崖 氷崖、 岩壁等 을 Isen, Pickel, Seil, Haken 까지도 動員될 수 있는 登攀 印 마치 恒雪의 欧洲 “알프스”에서 어느 때나 經驗할 수 있고 追求할 수 있는 雪, 氷, 岩의 三伯條件을 갖춘 本格的인 Alpinistic한 登攀에 그 意義와 価値를 같게 되어서 이것이야말로 바로 積雪期登攀이란 語義가 알맞게 適用하게된 緣由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어느 틈에 外国山岳界의 権勢와 動向에 따라 Himalayaism을 指向하고 Expedition 形式을 取하게 되어 單純히 山顶만을 目標하지 않고 極地探險方式이라든지 어려운 商處에서의 여러 가지 形式의 登攀 方法과 이에 따르는 장비 食糧 通信 等에 対한 여러 角度의 試驗과 硏究 修練을 企図하는데 그 先驱的인 意義와 価値를 갖게끔 되었다. 오늘날 佛蘭西의 “안나뿌르나” 英国의 “에베레스트” 最近의 日本 “마나스루” 成功에 이르기까지 世界十三個의 八阡米級 巨奉中에서 이제 몇 奉 남기게 된 国際山岳界의 動向과 形勢에 따라 어느 나라 어느 民族이든 山岳運動 이 発展되고 움직이고 있는 곳이라면 擧皆가 一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히마라야” 黄金時代의 “럿슈 · 모델”처럼 Himalayaisme Expedition System하는 形態를 보이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積雪期 登攀의 가장 先驱的이요 高潔한 山岳実践과 活動의 “타잎”이 아닐까 한다. 여기서 한가지 区别 하고 싶은것이 있다면 所謂 雪景을 감상키 為해서든지 嚴冬雪寒 中에 어디를 올라갔다던지 또는 “스키”나 “Isen”과 같은 登擎具를 使用하지도 못하는곳에서 幕營을 했다던지 極地探驗式을 해보았던지 하는 類의 登山은 冬期登山 雪中登山은 될지언정 오늘날에 있어 積雪無登攀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 한다. 적어도 스키를 活用하고 雪中幕營을 했다던지 雪崖 氷崖 岩壁 等을 Isen Pickel Seil 等으로 登攀해서 雪氷岩의 세가지 條件中에서 두가지 條件以上의 登攀道程과 技術的인 處理와 運營 実践없이는 積雲期登攀이라든지 그 対象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韓半島에서의 積雪期 登攀
먼저 韓半島에서의 積雪期登攀의 움직임과 그 対象으로서의 位置 乃至는 価値를 알아보기 為하여 지금까지의 가장 代表的이고 記錄的(初登攀) 或은 開拓的인 登攀으로 規模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 登攀実績을 一括해 보기로 한다.
解放 前
1. 1931年 1月 日人 飯山達雄 外 一名 金剛山 스키初登山
2. 1932年 1月 日人 飯山達雄 外 一名 妙香山 스키初登山
3. 1932年 3月 日政下 朝鮮山岳会 金剛山 団体 스키登山
4. 1932年 3月 以后 每年 3月~4月 銀嶺行이라고 하여 例行함.
5. 1935年 1月 日本 京都帝大 登山隊 積雪期 白頭山 初登(大石沢)
6. 1935年 1月 日人 黒田正夫博士夫妻 積雪期冠帽峯, 山峯初登攀
7. 1935年 3月 日政 京城帝大 山岳部 積雪 遮日峯 (初)登挙
8. 1936年 1月 日 政京城帝大 山岳部 漢拏山 初登攀(前小 隊員조난) [積雪]
9. 1336年 1月 日本 關西学聯 Party 漢拏山 初登攀 [積雪]
10. 1937年 1月 日政 京城帝大 山岳部 積雪 冠帽峯 初登攀
11. 1938年 3月 金鼎泰, 故 嚴興变, 石井吉雄, 金剛山 集仙峯 SI 初登攀
12. 1938年 12月 金鼎泰(人夫 · 朴青松 外 二名) 冠帽峯 雪嶺 (初)登攀
13. 1939年 1月 金鼎泰, 方炫, 故 嚴興变 積雪 雪岳山 華彩峯 經由 初登攀
14. 1939年 1月 金鼎泰, 方炫, 故 嚴興变 積雪 金剛山 集仙峯 S2 (初)登攀
15. 1939年 4月 日本 大阪商大 山岳部 積雪 白頭山 鴨綠江 上流経由 初登攀
16. 1940年 1月 日本 早稻田大学 山岳部 冠帽攀 北側 経由 初登攀
17. 1940年 1月 金鼎泰, 方炫, 石井吉雄, 故 嚴興变, 積雪 北水白山 初登攀
18. 1940年 1月 日人 奧野正亥、遮部泰造、伊藤王喜 冠帽攀 渡正山 経由 初登攀
19. 1941年 1月 金鼎泰, 方炫, 石井吉雄, 故 嚴興变 積雪 蓮花山 全連峯 初登攀
20. 1941年 1月 日政 京城帝大山岳部 積雲 蓮花山 主峯(北谷) 登攀
21. 1941年 1月 日人 奥野正亥, 渡辺泰造 積雪 南北胞胎山 (初)登攀
22. 1941年 3月 金鼎泰, 方法, 金正浩 積雪 頭流山 (初)登攀(Snow Hole)
23. 1942年 1月 白嶺会 金鼎泰, 梁斗喆, 故 朱享烈 柳在善 積雪 白頭山 摩天嶺山
日人側 石井, 飯山, 石附, 黑田博士夫妻 脈運山経由 初登攀
24. 1942年 1月 日政 京城帝大山岳部 積雪 白頭山無頭峯 経由 初登攀
25. 1942年 7月 日政 京城歯專 山岳部 積雪 智異山 初登攀
解放 後
26. 1946年 3月 韓国山岳会 登攀隊(金鼎泰, 李在晬, 愼業縡, 李庸民, 蔡淑, 玄基彰, 故 朱享烈) 積雪期 漢拏山 登攀
27. 1947年 2月 韓国山岳会(金鼎泰, 李在晬, 愼業縡, 朴順萬, 高熙星 外 一名) 積雪期 智異山 初登攀
28. 1947年 1月 서울文理大·高大合同班(金得貫, 外 六名) 冬期智異山 般若峯 登攀
29. 1948年 1月 韓国山岳会登攀隊(故 田鈬, 朴鐘大, 南行秀、申邦鉉、玄基彰) 積雪期 漢拏山 登攀(田鈬 隊長 遭難)
30. 1948年 1月 韓国山岳会登攀隊(金鼎泰, 嚴翼煥, 安鐘南, 故 金日) 積雪期 울릉島 聖人峯 登攀
31. 1948年 1月~3月 한국산악회수색대(金正浩, 金鼎泰, 朴顺萬, 故 朱享烈, 朴鐘大, 卞完鐵, 高聖煥) 한라산 조난 수색등반
32. 1949年 1月 養正高等 山岳部 (金貞浩, 故 金日 外) 冬期 智異山 登攀
33. 1950年 1月 大韓스키協会調査班(金鼎泰, 白南鴻) 太白山一帶 調査 登攀
34. 1953年 1月 学術混成隊 (孫慶錫, 咸漢鎔) 冬期 五台山 初登攀
35. 1954年 1月 大韓스키協会調査班(金鼎泰, 白南鴻) 太白山一帝調查查攀
36. 1955年 1月 서울文理大 登攀隊 (孫慶錫 外) 冬期五台山登攀
37. 1956年 1月 韓国山岳会 登攀隊 (洪鐘仁 外 20名) 積雪期 漢拏山 南北交行 登攀
38. 1956年 1月 서울工大山岳部 登攀隊(金炯実 外) 冬期 暂異山 登攀
韓半島에서의 積雪期登攀의 始初라고하면 古來부터의 山间民의 雪中 狩獵登山 或은 道僧人의 雪中 修道 登山 같은 것은 除外하고 近代的 登攀 形式으로서는 上記 1.의 日人 飯山達雄氏의 金剛山 스키登山과 妙香山 等 中級山의 스키 登山의 開拓登攀을 들 수 있다. 이것은 그 當時 金剛山의 險峻度에 一般的으로 想像할 수 없었던 雪中을 一泊하고 스키만으로 登頂 하였는데 特히 九成洞의 連속된 氷結의 巨瀑, 急溪, 上登拳의 雪壁을 스키의 壯快한 滑走로 달려 昆盧峯을 아침에 떠나서 午正 前에 温井里에 닿을 수 있었다는 것이 경이적인 사실로 알려 저 寫真 講座 等으로 널리 招介되었다.
韓半島의 積雪期 登攀과 南韓의主要対象(Ⅱ)
積雪期 登攀의 始初라고하면 古來부터의 山间民의 雪中 狩獵登山 或은 道僧人의 雪中 修道 登山 같은 것은 除外하고 近代的 登攀 形式으로서는 1931年 1月의 日人 飯山達雄氏 外 一名(註 表1)의 金剛山 스키登山이었다.
当時 嚴冬雪中의 金别山 入山이라는 것은 想像도 하기 허려운 때인데 이 一行은 内金剛으로 해서 毘盧峰에 雪中露宿하고 폭포가 많은 九成洞 溪谷과 上登峰 雪壁을 끝까지 스키로 登滑하여 世人을 놀라게 하였다. 이 登攀은 当時 日本 登山風의 한 余波로서 地方的인 開拓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后 飯山氏는 日出峰 万瀑洞 코스를 開拓하였다. 其中 가장 積雪이 많아서 運統 連續되는 瀑布를 그대로 스키로 壯快한 滑降을 할 수 있는 九成洞코스는 毘盧峰에서 朝飯을 하고 떠나서 畫食 前에 温井里 温泉에 들 수 있는 快適한 코스가 되므로 해마다 봄 3, 4월이면 日政 朝鮮山岳会主催 “銀嶺行”이라고 数十名씩의 团体 스키 登山을 하게 되었으며 每年 恒例로 自信있는 “스키어”의 登攀 初登門이 봄의 가볍고 즐거운 盛山好事가 있었다.
다음은 1935年 1月 日本京都帝大의 積雪期 白頭山遠征(註 表5)을 보게 되었는데 이 登攀은 当時 日本山岳岳界 先駆者들이 “히마라야” 速征을 뜻하고 그 前序的인 修練對象으로 또한 積雪期 初登攀(開拓的인) 対象으로 十岛列岛(氷雪技術対象 )台灣(連征O의 対象) 等地의 遠征登攀들이 連出될 무렵에 그中에서도 京都帝大의 白頭山隊는 O강 編成과 規模가 컷을 뿐 아니라 藤木九三 OOO司 等 日本山岳界의 元老들과 学生엑스퍼트들의 混成隊로서 決行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目的한 것이 白頭山의 極地性(遠距離의 OO條件) 試練을 “히마라야” 遠程의 試金石으로 삼았던 点에 있었음으로 韓半島의 山岳対象이 俄然 크게 注目되고 認識되었으며 韓半島 居住 山岳人 들에게 많은 刺戟과 影響을 주게 되었다.
京城市大 白頭山遠과 前后하여 또 하나 日本의 有名한 黑田正夫 博士 夫妻 一行이 그때 "朝鮮알프스의 別稱이 있는 咸北 冠帽峰登攀(机上峰 註 表5)이 있었는데 이들 日本山岳人들의 所謂 外地開拓登攀 進出이 活発하게 되자 日本의 各大学보다 뒤늦게 発足한 京城帝大 山岳部 가 그때까지 Rock Climbing 熱에 余念이 없다가 이들 進出에 刺戟을 받어 그해 3月에 韓半島 第 5의 高峰인 咸南 遮日峰登攀(註 表6)을 敢行하였다.
그 이듬해 1月에 京城帝大는 每二次로 漢拏山登攀(註 表7)을 決行하였다가 猛烈한 풍설에 前川隊員을 遭難으로 잃었다 그때 日本關西学聯(山岳)의 漢拏山 “아택”도 있었으나 前記 遭難事故에 휩쓸렸으며 韓半島에서 発生한 特性은 未熟한 登攀行為의 큰 警鐘을 울렸으며 높이 1,950m가 그리 높지 않은 山이지만 海洋性의 무서운 風雪의 山으로서 漢拏山이 이러한 特殊한 條件을 간직한 対象으로써 크게 注目되었다.
漢拏山 遭難의 쓰라린 傷處를 입은 京城帝大가 이에 屈하지 않고 이듬 해 1月에 冠帽峰에 本格的인 遠征(註-表8A)을 敢行하여 贵重한 経験을 되살리고 죽은 同志의 雪辱을 하였다는 것은 当時 山岳界의 壯擧로써 높이 稲頌되었다.
그러면 韓半島의 日人의 山岳活動에 比하여 우리 韓国人은 어떠했냐 하면 겨우 近校의 岩場에서 大部分이 逡巡하며 일인들 活動에 마음만 닳고 있던 中에 서울과 金剛山 等의 록-비리에이숀 등반에 많은 業蹟으로 先駆者였든 Group의 하나가 1937年 3月에 積雪期 金剛山 集仙峰 S.I 初登攀(註 表8B 故 嚴興变, 石井吉雄 筆者)을 快行하게 된 것이 첫 進出이었다. 이들은 이듬해 連이어 1938年 12月 冠帽峰과 北雪嶺 初登攀(註 老9 筆者) 1939年 1月 積雪期 雪嶽山, 金剛山 集他峰 SⅡ 初登攀(註 表19 方炫, 故 嚴興变, 金孝中, 石井吉雄, 筆者) 等으로 蓋馬高臺 一帶의 高峰을 連結하여 漸進的이고 힘차게 꾸준한 活動을 하게 되어 注目을 끌었다.
1940年 1月 早稲田大学 冠帽峰(北画谷) 登攀(註 表 14)이 있어서 日本의 一級에 属하는 大学山岳部의 速征性의 対象으로서 韓半島의 山들이 매우 좋은 곳이요 魅力있는 対象으로 不動한 地位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一時에 活潑했든 京城帝大山岳部는 卒業 또는 中日战争出战等으로 잠잠하게 되어 前記 韓人Group의 連続的인 光躍에 比하여 오히려 日人들이 뒤떨어 지게 되자 이에 刺战이 되어서 日人의 Group 하나가(金剛山協合 奥野正亥 外 二名) 發起해서 1942年 1月 冠帽峰 全峰行(全縱走)登攀(註 表13), 1941年 1月 南北胞胎山 登攀(註表 17)으로 対応的인 実跡이 있었으며 京城帝大도 新人들이 発奮하여 前記(表 15) 莲花山全連峰 登攀과 前后하여 1941年 1月 蓮花山 主峰만의 登攀을 決行하여 前川 없이 매우 洛発한 움직임을 보여 韓半島 山岳登攀의 最盛期인듯 하였다.
그러다가 1942年 1月의 績雪期 “씨슨‘을 맞이하게 되자 이들 有力한 Group들이 一時에 韓半島 最高峰 白頭山을 目標로 集中하게 되었다. 그 中에도 白頭山만은 日人들끼리도 서로 韓半島在住山岳人으로서 先登을 战取하려고 当時의 日人 “엑스퍼트” 飯田、石井、奧野、京城帝大 等 四派 連立으로 猛烈한 計劃 調査 準備의 角逐战이 展開되었다. 그들中에 資金難、同志들의 出战 等으로 하나 둘씩 힘을 잃게되는 反面에 当時 韓人들만의 山과 스키의 Group였든 白嶺合 멤버들이 着実한 計劃 調查 準備을 追行하게 되자 前記 飯山, 石井 雨人이 協会参加를 自願해와서 実際로 우리 韓人이 이를 리드하였으며 京城帝大는 体面上 独行하기로 되여 旗雪期 白頭山에 第三派의 “엑스페디숀”이 이곳 柱住 山岳人만으로 劇的으로 決行되었다.
前者는 日政 朝鮮山岳会 登攀隊(梁斗喆, 柳在善, 故 朱亨烈, 筆者, 石井, 飯山、石附一邊中까지 參加-黑田博土夫妻)로 더욱 어려운 條件下에서의 登攀性을 爲主해서 險峻한 摩天城山脈(間白山, 小白山 增岩山, 臥獅峰 2,500~2,600米의 連峰을 캄푸 7을 거듭하여 넘어서 天泄生活을 한 “다이나믹”한 登攀을 敢行成功하여 当時 日人의 權威 黑田博士의 激讚을 받았으며 后者 京城帝大는 그들의 力量 機能에 알맞게 神武城 無頭峰의 쉬운 코스를 択하는 代身 天池測梁 學術調査에 中點을 두어 結局 天池에서 前后者가 協力해서 凍結된 天池測梁을 厂史的으로 成功한 收穫을 거두어 韓半島 積雪期 登攀의 總決算을 보게 된 느낌이 있었다.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