㈡ 권선구(勸善區)
1988년 7월 1일 구제실시로 권선구와 장안구를 설치한 구로서 권선구는 수원시청 앞 공원부터 금곡동 칠보산까지 수원시 서남부지역에 위치한 자연친화적 환경에 둘러싸인 도(都) 농(農) 복합지역으로 안산시, 화성시, 의왕시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 권선구의 명칭은 고려말, 조선초 문신 직제학이었던 이고(李皐)가 벼슬을 버리고 수원의 탑산(지금의 팔달산)에서 은거(隱居)하며 망천(忘川) (지금의 수원천)에 내려와 사람에게 어질고 착하게 살 것을 권하였는데 그의 높은 인품에 감화되어 모두가 착한 사람이 되었다는데 에서 유래하여 권선구라는 구명(區名)을 택하게 되었다,
① 세류동(행정동)✚(법정동) 1, 2, 3동(행) ② 장지동(법정동)
③ 평동(행정✚법정동) ④ 고색동(법정동) ⑤ 오목천동(법정동)
⑥ 평리동(법정동) ⑦ 서둔동(행정동✚법정동) ⑧ 탑동(법정동)
⑨ 구운동(행정동✚법정동) ⑩ 금호동(행정동) ⑪ 금곡동(법정동)
⑫ 호매실동(법정동) ⑬ 권선동(행정동 1, 2동✚ 법정동)
⑭ 곡선동(행정동) ⑮ 곡반정동(법정동) ⑯ 대황교동(법정동)
⑰ 입북동(행정동✚법정동) ⑱ 당수동(법정동)
① ☞ 세류동(細柳洞) 동명유래는 세리(細里)의 세(細)자와 상류천(上流川)의 류(柳)자를 따서 세류라 붙여진 것이다, 세리의 원래 이름은 세곡리(細谷里)로 가는 골짝기에 형성된 마을 이라는 뜻이며 상류천은 수원천 하류를 통과하는 냇가에 버드나무가 많아서 상류천이라 불리었다,
1789년 수원부의 읍치(邑治)가 옮겨오기 전 이지역은 수원부에 속하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1789년(정조 13) 9월 수원부의 읍치를 팔달산 동쪽기슭으로 옮기고 1796년 화성 신도시를 건설한 후 팔달산 주변지역을 남부와 북부로 나누면서 세동 상류천 하류천 지역이 남부에 속하였다,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의 동리 변경 때 상류천과 세동지역은 세리로 하류천 지역은 장지리에 편제되어 안용면 관할이 되었다, 1936년 10월 1일 세리 지역이 수원읍으로 편입되면서 세류정이란 일본식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1949년 8월 15일 수원읍 지역이 수원시로 승격되고 동제를 체택 할 때 세류동이 되었다, 이후 1966년 1월 1일 세류동은 세류1동과 세류2동으로 분동되었으며 1983년 10월 1일 세류2동이 다시 세류2동과 세류3동으로 분리되어 법정동인 동시에 행정동이 되었다,
② ☞ 장지동(長芝洞) 동명유래는 장짓골 이라 불리우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1789년 수원부의 읍치가 옮겨오기 전 이 지역은 수원부에 속하는 한적 한 시골 마을이었다, 1789년(정조 13) 9월 수원부의 읍치를 팔달산 동쪽 기슭으로 옮기고 1796년 화성 신도시를 건설한 후 팔당산 주변 지역을 남부와 북부를 나누면서 남부에 속하였다,
이후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의 동리 명칭 및 구역변경 때 향목동, 장지동 하류천 등을 합쳐 장지리라 하여 안용면 관할하에 두었다, 해방 이후인 1949년 8월 15일에 수원읍 지역이 수원시로 승격되었을 때 화성군 안용면 장지리에 편제되었다, 1963년 1월 1일 세류동이 세류1동과 세류2동으로 분동 될 때 세류2동에 속하게 되었다,
③ ☞ 평동(坪洞) 평동이라는 이름은 평야와 관계되는 것으로 너를 벌판 가운데 이루어진 마을이라는 데서 옛 부터 벌말, 벌리, 들말 평리 등으로 불리우던 것을 이어 받은 것이다, 평동이란 평평한 벌판에 이루어진 마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1789년(정조 13년) 9월 수원부의 읍치를 팔달산 기슭으로 옮기고 1796년 화성 신도시를 건설한 후 팔달산 주변 지역을 남부와 북부로 나누었다, 이 때 남부의 14개 마을중 벌리가 현재의 평동에 해당될 것으로 추정된다,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의 동리 명칭 구역 변경 때 평촌, 중보리 지장동 일부를 통합하여 평리라 하여 안용면 관할 하에 두었다,
이후 1936년 10월 1일 수원읍이 확장 될 때 수원군지역이 수원시로 승격되었을 때는 평동으로 제 이름을 되찾았고 1963년 1월 1일 안용면 6개 마을이 수원시에 편입될 때 고색리, 오목천리, 평리 등이 평동 관할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후 1987년 1월 1일 화성군 매송면 호매실리 5리 일원이 평등으로 편입되었으며 1987년 9월 1일 탑동 일부가 편입되어 평동, 고색동, 오목천동 등 편리동 일원 호매실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이 되었다,
④ ☞ 고색동(古索洞) 동명유래는 도고산 및에 있으므로 도고산, 고색골, 고샛골 대촌(大村), 큰말, 삼거리 중붓골 증보평 이라 불리우던 것에 유래한다, 이 지역은 벌래 수원부 용복면에 속한 곳이었다,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의 동리 명칭 및 구역 번경 때 용복면의 고색리, 중보평과 남부면의 지장동을 합쳐 고색리라 하여 안용면 관할이 되었다,
해방 후인 1949년 8월 15일 수원읍 지역이 수원시로 승격되었을 때는 화성군 안용면 고색리로 편제되었다, 그리고 1963년 1월 1일 수원시로 편입되었는데 이 때 행정동인 평동의 관할구역이 되었다,
⑤ ☞ 오목천동(梧木川洞) 동명의 유래는 이 지역을 흐르는 하천이 오목한 곳을 흐르기 때문에 오목내 또는 오목천이라 불리던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 지역은 본래 수원부 용복면에 속한 곳이었다,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의 동리 명칭 및 구역 변경 때 용복면의 오목천, 고사촌을 합쳐 오목천리라 하여 안용면 관할이 되었다,
해방 후인 1949년 8월 15일 수원읍 지역이 수원시로 승격되었을 때 화성군 안용면 오목철리로 편제되었다, 이후 1963년 1월 1일 수원시로 편입되어 평리, 고색리와 함께 행정동인 평동의 관할구역이 되었다,
⑥ ☞ 평리동(坪里洞)벌말, 평촌, 평리라 하며 벌말은 평야와 관계있는 지명으로 서호천 아래 물이 풍부한 벌판이 있고 그 가운데 마을이 형성 되었기에 벌말이라고 전해진다, 1798년(정조 13) 9월 수원부의 읍치를 팔달산 동쪽 기슭으로 옮기고 1796 화성 신도시를 건설한 후 팔달산 주변 지역을 남부와 북부로 나누었다, 이 때 남부의 14개 마을 중 벌리에 속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의 동리 명칭 및 구역 변경 때 평촌 중보리 지장동, 일부를 통합하여 평리라 하여 안용면 관할 하에 두었다, 이후 1936년 10월 1일 수원읍이 확장되어 수원군 일형면 평리 일부가 수원읍으로 편입될 때 이 지역은 화성군 일용면 평리로 남아 있었으며. 1963년 1월 1일 수원시에 편입되면서 행정동인 평동의 관할로 들어오게 되었다,
⑦ ☞ 서둔동(西屯洞)이라는 동명 이름은 정조가 화성을 축조할 때 그 서쪽주(註)1 여기산(麗妓山)쪽에 주(註)2 축만제(祝萬提)를 만들고 그 물을 이용하여 둔전(屯田)(군사요지에 주둔한 군대의 군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설친 한 토지)을 경영하였던 것에서 유래한다, 즉,, 서둔(西屯)(축만제에 서쪽)이 설치되고 경영되었던 곳이므로 서둔동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1796년 화성 신도시를 건설한 후 팔달산 주변 지역을 남부와 북부로 나누었을 때 이 지역은 북부에 속하였다, 이후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의 동리 명칭 및 구역 변경 때 서둔촌과 매산리 일부를 합쳐 서둔리라 하여 일형면 관할이 되었다,
1936년 10월 1일 수원읍이 확장될 때 이 지역은 수원읍으로 편입되면서 서둔정이란 일본식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해방 후인 1949년 8월 15일 수원읍 지역이 수원시로 승격되면서 서둔동으로 바뀌게 된다, 1963년 1월 1일 동 통합 때 서둔동과 화성군 일왕면 구운리와 탑리를 관할하는 행정동이 되었다, 그리고 1991년 9월 5일 서둔동이 서둔동과 구운동으로 분동되면서 서둔동과 탑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이 되었다,
화서역에서 구운동 삼거리로 넘어가는 도로옆 권선구 서둔동 1003-5번제에 여기산 공원은 2003년 9월 3일 공사를 시작하여 2004년 11월 25일에 완공한 여기산공원은 다목적 경기장, 축구장, 엑스 게임장 및 인라인장, 데니스장, 배드민터장, 게이트 볼장, 모든 운동시설을 갖춘 여기산 체육공원이며 근처에는 서호저수와 일월저수지가 있어 백로가 서식(棲息)하고있다,
주(註)1 여기산은 101m 의 야트막하고 작은 산이지만 아름답고 고운 기생(妓生)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여기산으로 불린다, 이곳 여기산 에서는 청동기 시대와 철기시대의 토기와 집터가 발견되었다, 특히 부뚜막이 있는 굴 모양의 화덕 자리가 발견되어 옛날에도 지금의 온돌과 비슷한 시설을 하고 생활하였음이 확인 되어 약 2000 년 전부터 사람들이 이곳 주변에서 살았을 유적지를 통해 알 수 있는 곳이다,
주(註)2 축만제는 1799년(정조 23)에는 또 하나의 제언 축만제를 화성의 서쪽 5리의 평지에 축조한다, 축만제는 길이 1246척 너비 20척 높이 8척 두게 7척5푼 깊이 7척이며 2개의 수문이 설치된 대교모 저수지로 이를 통해 농업용수의 해택을 받는 전답은 234석(石落 *섬지기)에 이른다, 축만제도 만석고와 만찬가지로 관리 인원으로 감관(監官) 1명 감고(監考) 1명을 두었다,
축만제는 후에 서호(西湖)로 개명되어 화서2동의 서호공원으로 조성되어있고 축만제의 남쪽에는 서호의 경관과 풍치를 한층 아름답게 돕보이게 항미정(杭眉亭)(경기도 향토 유적지 제1호이다 한미정은 1831년(순조 31년)에 당시의 화성유수 박기수(朴綺秀)공이 건립한 정자로 석양에 비치는 소동파(蘇東坡) 시(詩)의 서호는 항주(杭州)의 미(美)를 따서 지었다 한다, 현재의 축만제에는 농업과학기술원의 행정 및 연구실이 인접하여 있다, 서울대학교 농생대 캠퍼스도 위치하여 한국농업 연구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⑧ ☞ 탑동(塔洞)은 본래 이 지역에 탑이 있었기 때문에 탑골 탑동등으로 불리던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이 지역은 본래 수원부 형석면에 속한 곳이었다,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의 동리 명칭 및 구역 변경 때 답동이라 불리던 것을 탑리라 하여 일형면 관할이 되었다,
해방 이후인 1949년 8월 15일 수원읍 지역이 수원시로 승격되었을 때는 화성군 일왕면 탑리가 되었다 1963년 1월 1일 이 지역이 수원시로 승격되었을 때는 화성군 일왕면 탑리가 되었다, 이 때 서둔동, 구운리와 함께 서둔동에 편입되었고, 1991년 9월 5일 행정동 서둔동에 구운동이 불리 되어 나갈 때에도 그대로 서둔 관할의 법정동으로 남았다,
⑨ ☞ 구운동(九雲洞)은 군돌(군골, 구운, 구운석) 공석리(空石里)라 부르기도 하며, 동명유래는 아흡개의 머리가 달려 있는 용이 이곳에서 구름을 타고 승천하였다고 해서 마을 뒷산을 청룡산(靑龍山) 또는 청룡졸산이라 하고 마을 이름을 구운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부터 수원부 형석면에 속한 곳이었다,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의 동리 명칭 및 구역 변경 때 상구운석과 하구운석을 합쳐 구운리라 하여 일형면 관할이 되었다,
해방 이후인 1949년 8월 15일 수원읍 지역이 수원시로 승격 되었을 때 화성군 일왕면 구운리가 되었다, 1963년 1월 1일 구운동 지역이 수원시로 편입 되면서 서둔동, 탑동리와 함께 서둔동 관할에 편제되었다, 1972년 동을 통폐합 하면서 탑동과 함께 행정동 서둔동에 포함되었다가, 1991년 9월 5일 서둔동이 서둔과 구운동으로 분동되면서 구운동 금곡동 호메실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이 되었다, 이후 2003년 2월 10일 구운동이 구운동과 금호동으로 분 동 되면서 구운동은 법정동과 동시에 행정동이 되었다,
⑩ ☞ 금호동(金好洞)은 2003년 2월 10일 구운동이 구운동과 금호동으로 분동되면서 법정동 금곡동 호메실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이 되었다, 동 이름은 금곡동과 호메실동의 앞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⑪ ☞ 금곡동(金谷洞) 금곡이라는 동 이름은 이 지역 서쪽에 있는 칠보산에서 쇠(중석)를 캣다고 해서 쇠일 금곡이라 불리던 것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수원부 매곡면에 속한 곳이었다,.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의 동리 및 구역 변경 때 매곡면의 도봉리와 조산리를 합쳐 금곡리라 하여 매송면 관할이 되었다,
1949년 8월 15일 수원읍 지역이 수원시로 승격되었을 때는 화성군 매송면으로 편제되었다, 1987년 1월 1일 금곡동 지역이 수원시로 편입되면서 서둔동 관할이 되었다, 이후 1991년 9월 5일 서둔동에서 구운동이 분리될 때 구운동의 관할이었다가, 2003년 2월 1일 구운동이 구운동과 금호동으로 분동되면서 금호동 관할의 법정이 되었다,
⑫ ☞ 호매실동(好梅實洞)은 칠보산(七寶山) 주(註) 아래에 위치한 이 마을에는 옛 부터 매화나무가 많이 자생한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이 지역은 본래 수원부 매곡면에 속한 곳 이었다,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의 동리 명칭 및 구역 변경 때 매곡면의 호매실과 자목리를 합쳐 호매실리라 하여 매송면 관할이 되었다,
1949년 8월 15일 수원읍 지역이 수원시로 승격되었을 때는 화성군 매송면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1987년 1월 1일 이 지역이 수원시로 편입되면서 호매실리 1~4리는 서둔동, 5리는 평동 관할이 되었다, 이후 1991년 9월 5일 서둔동에서 구운동이 분리됨에 따라 호매실동 일원은 구운동 관할의 법정동이 되었다가 2003년 2월 10일 구운동이 구운동과 금호동으로 분동되면서 호매실동은 행정동인 금호동 관할의 법정동이 되었다,
주(註) 칠보산은 권선구 호메실동, 당수동, 오목천동 일원에 있는 칠보산은 원래 화성군 매송면에 속에 있는 산이었으나 지난 1987년 1월 1일에 수원시로 편입 된 해발 238, 8m이며 면적이 120㏊인 이산은 산 능이 매우 완만(緩慢)하지만 소나무 등 수림이 울창하고 곳곳에 자연습지가 조성(造成)되어 있어 노약자와 여성들의 등산 코스로 적당하며 아이들의 자연생태 학습장으로 적당해 시민들이 즐겨 찾고 있다,
칠보산은 8개개의 보불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왔으나 어는 때인가 한 개의 보물인 금닭(황계(黃鷄)을 누군가 가져가 칠보산 이란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또 안산에 사는 부자(父子)가 8가지 보물 중 하나인 황계를 가져가 칠보산이 되었는데 전설에 따르며 그 부자는 큰 부자(富者)가 되었다는 설과 벌을 받아 꼽추가 되었다는 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일곱 가지 보물에 대한 견해도 각각 다르다, 보물 하나는 일제 때 원평리 우씨가 집을 짓던 중 집터에서 발견 된 종 또 하나는 용화사에 위치한 부처상이라고 하며 나머지5개는 알 수 없다, 다른 견해는 산삼, 맷돌, 잣나무, 황계 범절 장사금이라는 것이다,
⑬ ☞ 권선동(勸善洞)은 온수골(溫水洞) 용화출고개라고도 부리기도 하며, 고려 말 한림학사(翰林學士) 이고(李皐) (고려말 조선초 문신)가 벼슬을 내놓고 이곳에 살면서 백성들이 어질고 착하게 살기를 권하였는데 그의 높은 인품과 가르침에 많은 백성들이 감화되어 어질고 착하게 살고자 노력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즉 이고가 선(善)함을 권(勸)한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권선(勸善)이라 칭하게 된 것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 지역은 본래 수원부 장주면에 속한 곳이었다,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의 동리 명칭 및 구역 변경 때 그대로 권선리라 하여 태장면 관할이 되었다, 해방 이후인 1949년 8월 15일 수원읍 지역이 수원시로 승격되었을 때는 화성군 태장면으로 편제되었다,. 1963년 1월 1일 이 지역이 수원시로 편입되면서 장지리 평리 대황교리 곡반정리 등과 함께 곡선동 관할이 되었다, 이후 1995년 3월 16일 곡선동에서 권선동이 분리되면서 독립적인 행정동이 되었다, 2003년 2월 10일 곡선동이 다시 곡선동과 권선2동으로 분동되면서 권선동은 권선 1, 2동 행정동의 관할 법정동이 되었다,
⑭ ☞ 곡선동(谷善洞)은 1963년 1월 1일 화성군 태장면 권선리와 안용면 장지리 대황교리 곡반정리 등이 수원시로 편입되면서 행정동인 곡선동이 탄생되었다, 곡선동이라는 이름은 이때 곡반정리와 곡(谷)자와 권선리의 선(善)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권선동의 일부와 곡반정동, 대황교동을 관할하는 행정동 이다,
⑮ ☞ 곡반정동(谷伴亭洞)은 골반정, 고렴, 궁말(궁촌), 명당골(명단곡), 새말(신촌) 소무니(牛門里)라고도 하며 곡반정은 반정리 서쪽 골짝기에 있어서 곡반정, 골 반정이라 전해지기도 하고 수원 유수(留守)(조선시대에 수도 이외의 요기한 곳을 다스리던 정이품의 외관 벼슬 개성, 강화, 광주, 수원, 춘천등지) 가 지역 순시 중 이곳에 와서 물을 마셨는데 그 물 맛이 온수골(현재 권선동)과 달리 매우 시원하여 반(半)에 물 수(氵)를 더하여 얼음녹 을 반(泮)을 짓고, 정(井)에도 물 수(水)를 붙여 얼음물 괼 정자를 지은 후 반정이라 하였다가, 이곳은 쉬어 갈 수 있어서 정자(亭子)보다는 정자 정(亭)을 쓰는 것이 낫겠다 하여 반정(泮亭)이라 고쳐짓고 여기에 온수곡(溫水谷)의 곡(谷)자를 붙여 곡반정이라 지었다 한다, 이 지역은 본래 수원부 안녕면에 속한 곳이었다,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의 동명 명칭 및 구역 변경 때 태촌면과 장주면 일부를 통합 태장면 안녕면과 용북면 일부를 안용면이라 하였다, 중반정과 하반정을 합쳐 곡반정리 라 하여 안용면 관할이 되었다, 해방 후인 1949년 8월 15일 수원읍 지역이 수원시로 승격되었을 때는 화성군 안용면 곡반정리에 편제되었다, 1963년 1월 1일 이 지역이 수원시로 편입되면서 권선리, 장지리, 대황교리 등과 함께 곡선동 관할이 되어 오늘날까지 행정동 곡선동의 관할 법정동으로 되어있다,
⑯ ☞ 대황교동(大皇橋洞)이라는 이름은 정조가 현륭원(顯陵園)(현륭원이란1899년(광무 3)에 장종(莊宗)의 묘호(廟號)가 장조(莊祖)로 추상되면서 현륭원이라는 원호(園號)에서 능호를 융릉(隆陵)으로 바뀐 능호)에 능행차하기 위하여 돌로 놓은 다리인 대황교가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대황교리라 불렀다 한다, 대황교는 본래 소황교라 불리다가 1795년(정조 19)에 대황교로 고쳐다한다,
이 지역은 본래 수원부 안녕면에 속한 곳이었다,(안녕이란 마을 이름은 조선조 정조대왕이 아버지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능을 이곳으로 옮기고 수시로 능행차를 하였다, 이 때 정조가 능을 바라보며 아버님께 안녕히 잠드시기를 비는 마음이 지극하였다 해서 이 마을을 안녕촌(安寧村)이라 했다고 한다,)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의 동리 명칭 및 구역 변경 때 대황교와 간촌 합쳐 대황교리라 하여 안용면에 편제되었다,
해방 이후인 1949년 8월 15일 수원읍 지역이 수원시로 승격되었을 때는 화성군 안용면 대황교리에 편제되었다, 1963년 1월 1일 이 지역이 수원시로 편입되면서 권선리 장지리, 곡반정리 등과 함께 곡선동 관할이 되어 오늘날까지 행정동 곡선동의 관할 법정동으로 되었다,
⑰ ☞ 입북동(笠北洞) 이 지역이 갓뫼(笠山) 뒤에 있었기 때문에 갓뒤, 입북, 갓띠 등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이곳 마을의 지형이나 지세가 북쪽으로 삿갓(笠 삿갓립)을 쓴 모양과 같다는 데서 유래 하였다고 전해지며 옛날 한양으로 과거(科擧)를 보러가던 선비가 이곳에서 용변(用便)을 보는 중 갑자기 나타난 여인을 보고 당황(唐慌)한 나머지 삿갓으로 변을 덮고 북쪽으로 도망가 버렸다는 전설에서 유래하였다, 하기도하며, 벌말 지역에서 갓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되던 갓띄풀이 많았는데 그쪽의 북쪽이라 하여 입북리라 하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이 지역은 본래 광주군 월곡면 지역으로서 1895년(고종 32) 안산군에 편입 되어 월곡면 입북리가 되었다가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의 동리 명칭 및 구역 변경 때 수원군 반월면 입북리가 되었다, 해방 이후인 1949년 8월 15일 수원읍 지역이 수원시로 승격되었을 때는 화성군 반월면 입북리로 편제되었다, 1994년 12월 26일 반월면 입북리와 당수리가 수원시로 편입되면서 권선구에 속하는 행정동이 되어 법정동 입북동과 당수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⑱ ☞ 당수동(堂樹洞) 이란 이름은 옛날 이 지역에 아가위 당나무, 곧 당수(堂樹)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지역은 본래 안산군 월곡면에 속한 곳이었다,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의 동리 명칭 및 구역 변경 때, 오룡동과 당수리를 합하여 당수리라 하여 수원군 반월면 관할이 되었다, 해방 후인 1949년 8월 15일 수원읍 지역에 수원시로 승격되었을 때는 화성군 반월면 당수리로 편제되었다, 그리고 1994년 12월 26일 이 지역이 수원시로 편입되면서 입북동과 함께 행정동 입북동 관할하의 법정동 당수동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