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浮石寺) 기행(紀行)
죽마(竹馬)의 벗 하성룡(河成龍)군이 영주에 부임한 것은 넉 달 전 일이다.
함께 부석사에 오르자는 화신(花信)을 받고 하정(荷亨) 지준모(池浚模)군과 여정(旅程)에 올랐다.
가는 이와 보내는 이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역두(驛頭) 표정은 문자 그대로 백인백상(百相)이다. 반야월을 지날 무렵에는 山의 선과 하늘을 분간하기 어려워졌다. 멀리 인가의 등불이 별처럼 깜박이는데 나는 내미는 손에 적선(積善)하는 기회를 가진 기쁨을 느낀다. 칠흑(漆黑)을 달리는 차창 밖에는 꼭 같은 또 하나의 전등의 영상(影像)이 표출된 나의 심안(心眼)처럼 밝다.
안동을 지나자 기차는 급행으로 달리고 산과 들과 하늘과 언덕과를 알아볼 수 있도록 달이 높이 더 있었다.
그 동안의 적회(積懷)를 손잡고 나눈 두 자리에 누운 것은 3시를 넘어서였다. 河군은 친절히 부석사 안내장을 펴놓고 대강의 설명을 한다.
지질이 풍화한 사석(沙石)이고 이곳에는 천연기념물과 희방사(喜方寺), 소수서원(紹修書院)등의 고적과 국보가 있으며 풍기 인삼과 산삼일화(逸話) 그리고 민심이 혈연적(血緣的)인 단결이 강하다는 등 그동안에 파악한 군내의 실정을 들려주었다.
날이 밝아 아침 8시. 부석사에 가는 버스에 올랐다. 젖빛 구름을 거느린 소백산(小白山) 연봉은 잔설(殘雪)이 희고 가까이 낮은 산들은 어디를 여행해도 볼 수 있는 발가숭이 그대로다. 풍화하고 사태가 나서 어쩌면 이집트의 민속무용을 보는 그런 形의 산자(山姿)다. 모래땅에 물이 고였고 보리를 간 논이라고는 전혀 볼 수가 없다. 죽령(竹嶺)이 바라보이는 지점에서 河군은, 풍기(豊基)는 풍기(風起)로 통하는데 전에는 비단의 수공업(手工業)으로 유명했고 인삼은 한동안 잠잠하다가 요즘에 와서 다시 활기를 띄었다고 한다. 풍기를 지나면서 휘몰아친 바람에 견디다 못해 나무 가지들이 南으로 휘어져 있음을 확인한다. 길가 집 울안 홍도화 古木에 진분홍 꽃이 방장 만개(滿開)다. 참나무 울바자로 둘러싸인 삼포(蔘圃)를 좌우로 물리치고 목쉰 소리로 기어오르는 고개 마루에 허물어진 서낭당(城#堂) 금줄이 새삼스럽다. 맑은 냇물을 건너 우리나라 서원(書院)의 효시(嚆矢)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오른쪽으로 줄곧 달린다. 여기는 순홍(純紅) 땅이다. 「신제(愼齊) 주세붕(周世鵬) 선생이 풍기 군수로 있을 때 회헌(晦軒) 안유(安裕) 선생의 고향인 이곳 죽계(竹溪) 백운동(白雲洞)에 중국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본 따서 소수서원을 창건했노라」고 하정(荷亨)은 설명조로 나온다. 그래서 나도 아는 체,
「竹嶺南 永嘉北 小白山前 千載興亡 景幾 어떠하니이꼬」
했더니 河군도 재치있게
「海千重山萬疊 關東別境 爲巡察 景幾何如」라고 받아넘긴다.
세 사람은 크게 웃고 즐겼다. 이것은 근제(謹齊) 안축(安軸)의 죽계별곡(竹溪別曲)과 관동별곡(關東別曲)의 첫머리를 딴 것이다.
사상사(思想史)에 끼친 유학(孺學)의 영향이나 문학사(文學史)에 끼친 한문의 공죄(功罪)를 따지기보다 고인(古人)이 성인의 도를 존숭하며 사람을 멀리 중국에 보내어 화상(畵像)과 육경(六經)을 가져와 제생(諸生)을 가르친 업적과 유유한 자연에 대한 호연의 기풍은 우리가 본받을 바 있다.
외딴집에서 산나물을 안주로 목을 적시고 돌층계를 밟아 올라 봉황산 부석사의 현판 아래서 옷깃을 여미고 거금(去今) 천 삼백 여 년 전의 신라의 하늘을 우러러 본다. 신라 문무왕 16년에 의상조사(義湘組師)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세우고 아미타불을 봉안(奉安)한 것이다 .부석사의 유래는 의상조사가 입당(入唐)할 때에 高州(만주땅)에서 유숙할 제 설법을 들은 바 있는 처녀 선묘(善妙)가 법복(法服)을 봉정(奉呈)할 기회를 놓쳐 바다에 투신하여 용으로 변하였는데, 이 기지(基地)에서 화엄경(華嚴經)을 선양(宣揚)한 근본 도장을 정하려 할 때 이교도(異敎徒)의 방해가 있으므로 선묘용이 거암(巨岩)을 허공에 뜨게하여 무리를 쫓았다고 전한다. 선비화(禪扉花)와 더불어 신화같은 전설이기에 믿기 어려우나 이 사찰에는 무량수전, 석등(石燈) 조사당(組師堂) 및 그 벽화, 당간지주, 여래좌상, 삼층석탑등의 국보를 가진 비마라사(比摩羅寺), 낙산사(洛山寺), 범어사(梵魚寺), 화엄사(華嚴寺)등의 화엄사상의 근본 사원이라 한다. 안내자의 설명이 끝나자 저마다의 사색에 잠긴다.
흔히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원시종교와 혼합된 불교의 한 면을 보고 사람들은 우상숭배니 무격적(巫覡的)이니 하는 비난을 하지마는 그런 타력적(他力的)인 신앙성은 기독교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예수의 초상이나 십자가 또는 마리아의 상(像) 앞에서 기도를 올림으로써 사행(私幸)을 바라는 심경은 매한가지가 아니겠는가. 여호와를 절대의 神으로 모시는 것처럼 불타를 절대의 경지로 하는 것은 종교의 귀일점이라 하겠다. 그런데 기독교와 불교의 다른 점은, 전자는 우주의 창조를 신의 섭리에 두고 어디까지나 타력(他力)에 의해서(神) 영생을 얻으려는 신앙인데 비해서 후자는 불타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최고의 이념으로 하고 자력(自力)에 의하여 대도를 깨닫는 성인 다시 말하면 고(苦)에서 해탈하려는 성불(成佛)의 정신에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천당에 가려는 것이나 자비를 베풀어 극락에 가려는 것이 다 인간 본능에서 또 무상(無常)에서 온 것이라 하겠다. 현실세계를 말함에 제법무상(諸法無常)이라 하는, 불교에서는 희구하는 세계가 극락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가능의 세계일 뿐 절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극락세계는 현실세계의 상대적인 세계이며 불법(佛法)의 진리는 고락을 초월한 상대적인 세계가 아닌 절대적인 경지에 <열반> 도달하는 곧 불타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부처는 인간의 신앙이 영원한 생명의 본체(本體)를 신격화(神格化)한 것이라 하겠다. 보살은 중생을 제도하고 수도에 따다 대오(大悟)하면 누구든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점이 기독교와는 다른 점이다.
부석사의 불타상은 아미타불상이다. 물론 동상(銅像) 그 자체가 인격적 기능을 가진 神의 존재는 아니다. 그야말로 하나의 우상이라 하겠다. 부처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가상(假想)한 목표일 따름이다. 그 실례로서 양산 통도사(通道寺)는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으뜸가는 큰 가람인데 거기에는 본전에 단(壇)만 있고 불상은 없는 것이다. 부처는 수도자의 마음 가운데 있음을 암시하는 것일 게다.
제법이 무상한데 속인의 번뇌가 무진하니 어찌 귀의(歸依)하지 않으리오. <진시황>의 불사약 전설이며 <세실로오드>의 탐욕, 그리고 <대원군>의 「계아만대자손(繼我萬代子孫)」이 모두 무상함을 모르는 어리석음이 아니겠는가?
하정(荷亨)의 제안으로 즉흥 詩 백일장을 열었다.
登浮石寺
與君休沐偶連
尋訪湘師古紺宮
突兀層蠻雲遠近
嶸老塔蘇蓬茸
堂頭法杖榮枯換
殿角禪風色相空
劫界滄茫誰可道
數聲幽鳥碧林中
<하정(荷亨) 지준모(池俊模)>
그대와 더불어 쉬는날 우연히 작지를 이어
의상스님 옛절을 찾아드니
우뚝우뚝한 층만에 구름이 멀고 가깝고
높이 솟은 옛탑은 이끼만 끼었구나
법당 앞에 꽃은 작지 영고가 바뀌었는데
추녀의 바람은 색상이 비었도다.
겁계는 아득하여 그 뉘라 말할 것이냐
푸른 숲속에 그윽한 새소리여.
浮石寺에서
소백산(小白山) 봉우리에 잔설이 부시는데
그대들 반겨잡고 부석사 찾아드니
봉황산 그윽한 숲에 금란(金蘭)송이 피어라.
선묘의 신화며 선비화 석장전설(錫杖傳說)
천년(千年)을 마주하여 멀리듣는 경학(經學)소리
조사(祖師)는 어디에 가고 봄빛만이 흐르네.
선사(禪師)는 몇몇이며 중생제도 그 얼만고
고탑(古塔)은 이끼푸르고 보리수 초동(稍動)인데
불타는 무량수전에 허(虛)를 모와 계시다.
<하성룡(河成龍)>
諸法無常
찾아와도 그것은 아닌데
그것이라 찾아온 여기
연이은 봉우리며 울창한 솔숲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공간의 질서 앞에
신화의 전설이며
고풍(古風)스런 법당(法堂)
가버린 모양들이 내게로 오는
시간을 헤아리면
그것은 아닌데 그것이라 하는
어리석음이여
석탑(石塔)은 예로 돌아가려 하고
보살도 지쳤는가 像이 낡았는데
무상하거던 유상도 하련마는
나의 열반이여.
<필자의 졸작>
읽기를 마치자 池公은 한시의 장원은 <池>요. 시조의 一天은 <成龍>군이요 신시는 <牧人>이 당선이라고 가가대소(呵呵大笑)했다.
돈과 시간의 여유있는 여행도 좋으려니와 훌훌이 오가는 석화식(石火式) 여행도 진미있는 것이라 하겠다.
<1959. 3.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