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왕실 연대표(高麗 王室 年表)
-고려시대(高麗, 918~1392, 473년간, 총 34대)
개성왕씨(開城王氏)
[유래]
중국 황제 헌원씨의 17세손 조명이 유누와 함께 우리나라에 와서 지금의 평양 일토산 아래에 정착하였다. 그후 조명의 후손 수극이 기자가 왕이 되었을 때 왕씨 성을 하사 받았다. 그후 수극의 57세손 왕염의 13세손 왕몽으로 이어져 왔는데 왕몽은 신라 건국초기에 시중을 지냈다. 당시 비결에 '토초가위왕'이라 하였으므로 그 화가 미칠까 두려워 왕몽이 일곱째 아들 왕림(王琳)을 데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10여년 동안 수도하면서 전, 신, 차씨 등으로 성을 바꾸었고 차무일이라고 이름을 바꾸었고 한다. 차무일의 셋째 아들 왕식시의 후손이 왕건이다.
왕건(王建, 877~943)은 송악(개성) 사람으로 901년 궁예가 신라에 반기를 들고 후고구려를 세우고 왕이되었을 때 궁예를 도와 913년 시중이 되었다. 그러나 궁예가 왕위에 즉위한지 몇년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당시 기장이었던 신숭겸, 배현경 , 유금필, 홍유 등이 왕건에게 왕창근, 송합홍 등 점술가의 예언을 설명하면서 거사를 권하여 궁예를 추출하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여 고려를 개국한 후 삼국을 통일하고 473년동안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을 개국하면서 멸족를 당하게 되자 옥(玉), 금(琴), 마(馬), 전(田), 전(全), 김(金)씨 등의 다른 성으로 행세하며 숨어 살면서 혈통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조선 정조 때에 비로소 문헌 등을 조사하여 왕씨로 다시 성을 바꾸어 세보를 만들고 왕건이 수도로 정한 송도(개성)을 본관으로 하고 왕원(王垣)을 1세 조상으로 하였다.
[인구] 18,774명이 있다.(1985년)
계파는 양양공파, 안경공파, 시중공파, 평양공파가 있다.
1代-태조(太祖, 877~943)
재위기간:918~943
성씨는 왕씨(王氏).본관(本貫)은 개성(開城).휘(諱)는 건(建). 자(字)는 약천(若天). 시호(諡號)는 신성(神聖).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위숙왕후(威肅王后:追尊) 한씨(韓氏)이다.
895년(진성여왕 9) 아버지를 따라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898년(효공왕 2)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고, 900년 광주(廣州)·충주(忠州) 등을 공취, 그 공으로 아찬(阿粲)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지방을 공략,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閼粲)에 승진되고 계속하여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 견훤(甄萱)의 군사를 격파하는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救恤)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 시중(侍中)이 되었다.
918년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궁예가 민심을 잃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하였다. 이듬해 수도를 송악(松嶽)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나갔다. 즉, 지방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935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하고 이듬해에는 앞서 항복해 온 견훤과 함께 신검(神儉)의 후백제를 공격, 이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였다. 이 해 《정계(政誡)》 《계백료서(誡百寮書)》를 저술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남겼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능은 현릉(顯陵:개성)이다
2代-혜종(惠宗, ?~945)
재위기간:943~945
자는 승건(承乾), 휘는 무(武), 시호는 의공(義恭)이다. 태조 왕건(王建)의 큰아들로, 912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어머니는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이며, 비(妃)는 대광(大匡) 임희(林曦)의 딸인 의화왕후(義和王后)이다
3代-정종(定宗, 923~949)
재위기간:945~949
왕규의 난을 평정하고 불교를 숭상함. 서경(평양)에 왕성을 쌓고 천도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
4代-광종(光宗, 925~975)
재위기간:949~975
자는 일화(日華). 휘는 소(昭). 시호는 대성(大成). 태조 왕건(王建)의 셋째 아들이고 제3대 왕 정종(定宗)의 친동생이다. 비(妃)는 태조의 딸 대목황태후(大穆皇太后) 황보씨(皇甫氏)이다. 정종의 선위(禪位)를 받아 즉위한 뒤에 그 영명(英明)한 바탕으로 많은 치적을 쌓았다. 먼저 권호강족(權豪强族)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훈신(勳臣)·장상(將相), 심지어 골육지친(骨肉之親)에 이르기까지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하였으며,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만들어 노주(奴主)·노비 간의 분쟁을 재판하여 많은 노비를 풀어주었다.
958년에는 중국에서 고려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려에서는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또한 백관의 복제(服制)를 제정했으며, 수도 개경(開京)을 황도(皇都)로 개칭하고 서경(西京), 즉 평양을 서도(西都)라고 하였다. 한편 불교를 독신(篤信)하였으며, 국방에 유의하여 동북계(東北界)·서북계(西北界)에 많은 성을 쌓았다. 서북계에는 장청(長靑)·위화(威化)·무주(撫州)·안삭(安朔)·습홀(濕忽)·송성(松城)·낙릉(樂陵)·운주(雲州)·신도(信都)·안융(安戎) 등 주로 평남·북지방에 축성(築城)하였고, 동북계에는 장평(長平)·박평(博平)·고주(高州)·화주(和州) 등, 주로 지금의 함경남도 지방에 축성하였다. 만년(晩年)에는 참소를 혹신(惑信)하여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다. 능호(陵號)는 헌릉(憲陵)이다.
5代-경종(景宗, 955~981)
재위기간:975~981
휘는 주(인宙). 자는 장민(長民). 광종의 맏아들. 전시과(田柴科)를 제정하였다. 후일 방탕한 생활로 정사를 돌보지 않았음.
6代-성종(成宗, 960~997)
재위기간:981~997
휘는 치(治). 자는 온고(溫古). 시호는 문의(文懿). 태조의 손자. 어머니는 선의태후(宣義太后) 유씨(柳氏). 981년(경종 6) 경종(景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고려시대 역대의 왕 중 드물게 보는 명군(明君)으로서 내치·외교에 많은 치적을 남겼다.
성종의 내치 중에서는 관제개혁을 들 수 있는데, 거유(巨儒) 최승로(崔承老)의 자문을 받아, 유교를 국가의 지도원리로 삼고 중앙집권적인 봉건제도를 확립하였다. 관제개혁에 있어 중앙에 3성(省)과 6부(部)를 두었으며, 서무를 분장(分掌)한 7시(寺)를 설치하였다. 또 언론(言論)을 맡은 사헌부(司憲府), 군국(軍國)의 기밀기관인 중추원(中樞院) 등을 두었다.
한편 지방에는 처음에 12목(牧)을 설치하였으나 후에 10도(道)·12주(州)로 나누어 다스렸다. 또 권농정책에 힘썼다. 993년(성종 12) 거란족(契丹族)이 세운 요(遼)나라의 군대가 고려에 침입하자 서희(徐熙)를 요군(遼軍)의 진영에 보내서 외교담판으로 요나라의 군대를 물러가게 하였다.
후에 여진족(女眞族)이 차지하고 있던 지금의 평북 일대, 즉 장흥(長興)·귀화(歸化)·곽주(郭州)·구주(龜州)·안의(安義)·흥화(興化)·선주(宣州) 등에 성을 쌓아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능은 개성의 강릉(康陵)이다.
7代-목종(穆宗, 980~1009)
재위기간:997~1009
휘는 송(誦). 경종의 맏아들. 전시과를 고치고 학문을 장려 하는 등 치적이 많았으나 강조(康兆)에게 피살됨.
8代-현종(顯宗, 992~1031)
재위기간:1009~1031
자는 안세(安世). 휘는 순(詢). 시호는 원문(元文). 태조의 여덟째 아들 안종(安宗) 욱(郁)의 아들. 어머니는 경종의 둘째 비(妃)인 헌정왕후(獻貞王后:孝肅太后). 비는 성종의 두 딸 원정왕후(元貞王后)와 원화왕후(元和王后), 시중(侍中) 김은부(金殷傅)의 딸 원성왕후(元成王后), 대종(戴宗:追尊王)의 손녀 원용왕후(元容王后)이다. 처음에 대량원군(大良院君)에 봉해졌으나, 12세 때 천추태후(千秋太后:경종비 헌애왕후)의 강요로 숭경사(崇敬寺)에 들어갔다.
1006년(목종 9) 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옮겨졌으며, 1009년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康兆)의 옹립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해 강조가 목종을 살해한 데 대하여 문책한다는 구실로 거란의 성종(聖宗)이 군사 40만을 거느리고 쳐들어오자, 강조로 하여금 이를 방어하게 하였으나 참패하고, 다음해 개경(開京)이 함락되어 남으로 피난하였다. 이어 왕이 친조(親朝)할 것을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되어 거란군은 물러갔으나 끝내 친조를 하지 않았고, 또 6성(城)을 요구해 온 것도 거절하였다. 1018년 거란의 장군 소배압(蕭排押)이 6성을 빼앗고자 침입하였으나, 상원수(上元帥) 강감찬(姜邯贊)의 뛰어난 전술로 구주(龜州)에서 섬멸하여 물리쳤다(龜州大捷).
다음해부터 거란과 국교를 열어 평화정책으로 일관하여 우호관계를 회복하고, 모든 사치와 호화로운 의식 ·제도를 폐지하고 승려의 횡포를 엄금하는 한편, 기민(飢民)의 구제에 만전을 기하였다. 불교와 유교의 발전을 도모하여 폐지된 연등회(燃燈會) ·팔관회(八關會)를 부활시키고, 선유(先儒)를 존숭하는 뜻에서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등을 추봉(追封)하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여, 한국 최초로 문묘종사의 선례를 만들었다. 또한, 거란군의 침략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기 위하여 대장경(大藏經)의 제작에 착수, 6천 권의 대부분을 완성하게 하였다. 지방 관제를 합리적으로 조절하기 위하여 12주의 절도사(節度使)를 폐하고, 5도호부(都護府) 75도(道)에 안무사(按撫使)를 두었다가, 다시 이를 폐하여 4도호부 ·8목(牧) ·56지주(知州) ·56군사(郡事) ·18진장(鎭將) ·20현령(縣令)을 두었으며, 사심관(事審官)의 선출을 엄격히 하였다. 능은 경기 개풍군의 선릉(宣陵)이다.
10代-정종(靖宗, 1018~46)
재위기간:1034~1046
휘는 형(亨). 현종의 2자.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고, 장자 상속과 적서 구별을 법으로 정하였음.
11代-문종(文宗, 1019~83)
재위기간:1046~1083
자는 촉유(燭幽). 시호는 인효(仁孝). 이름은 휘(徽). 초명은 서(緖). 현종(顯宗) ·원혜태후(元惠太后) 김씨의 셋째 아들. 1022년(현종 13) 낙랑군(樂浪君)에 책봉되었으며, 1037년(정종 3) 내사령(內史令)에 임명되었다. 형제상속으로 정종의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하자마자 법률개정에 착수하여, 최충(崔)으로 하여금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 ·연재면역법(捐災免役法) ·3원신수법(三員訊囚法) ·국자제생(國子諸生)의 효교법(孝校法) 등을 제정하였다. 1069년(문종 23) 양전보수법(量田步數法)을 제정하여 전답의 세율을 정하였으며, 이어 녹봉제(祿俸制) ·선상기인법(選上其人法) 등을 제정하여 내치(內治)의 기초를 다졌다. 한편 불교를 신봉하여, 1067년 흥왕사(興王寺)를 준공하였다. 왕자 후(煦)를 출가(出家)시켜 승려가 되게 하였는데, 그가 곧 대각국사 의천(義天)이다.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도 장려하여 최충의 9재(九齋)를 비롯한 12도(徒)의 사학(私學)을 진흥시켰다.
이처럼 내치에 힘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국방 ·외교에도 힘써 동여진(東女眞)이 북변(北邊)을 침노하자 이를 토벌하였으며, 후에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특히 송나라와 친선을 도모하여 선진문화 수입에 힘썼다. 이와 같은 현명한 정책이 큰 효과를 나타내며, 고려시대 중 가장 찬란한 문화황금기를 이룩하였다. 유교 ·불교를 비롯한 제도 ·시설 ·무역, 미술 ·공예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괄목할 만한 수준을 나타냈다. 인재등용에도 높은 안목을 가지고 적재적소에 배치하였기 때문에, 제도개혁 ·빈민구휼 등에서도 치적을 쌓았다.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서예(書藝)에도 능하여, 양주 삼천사(三川寺) 대지국사비(大智國師碑) 비문을 친필하였다. 능은 장단의 경릉(景陵)이다.
12代-순종(順宗, 1046~1083)
재위기간:1083
문종의 맏아들로 즉위한 해에 죽음.
13代-선종(宣宗, 1049~1094)
재위기간:1083~1094
휘는 운(運). 문종의 둘째 아들.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국 송나라에서 불경을 연구하고 오는등 고려문화의 융성기를 이룸.
14代-헌종(獻宗, 1084~1097)
재위기간:1094~1095
휘는 욱(昱). 선종(宣宗)의 원자(元子). 어머니는 사숙태후(思肅太后) 이씨(李氏).즉위하자 이자의(李資義)의 난을 평정하고, 다음해에 신병으로 숙부에게 왕위를 이양(移讓)함
15代-숙종(肅宗, 1054~1105)
재위기간:1095~1105
자는 천상(天常). 초명(初名)은 희(熙). 휘는 옹(). 시호는 명효(明孝). 문종(文宗)의 3남. 순종의 아우. 비는 유홍(柳洪)의 딸 명의태후(明懿太后). 문종 때 계림공(鷄林公)에 봉해졌고, 조카인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왕위를 찬탈하여 1095년 즉위하였다. 1096년 주전관(鑄錢官)을 두고 주화(鑄貨)인 은병(銀甁)을 만들어 통용하게 하였으며, 1102년에는 해동통보(海東通寶)를 주조하여 통용하게 했다. 남경(南京)을 양주(楊州)에 세우려고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을 두어 궁궐을 조영하게 하였다. 또한 불교를 신봉하여 많은 불회(佛會)를 열었으며, 평양에 기자(箕子)의 무덤을 만들고 묘사(廟祠)를 세웠다.
1104년 여진족 완옌부[完顔部]의 우야소[烏雅束]가 침입했을 때, 임간(林幹)을 보내어 방어하게 했으나 이를 막아 내지 못하자, 다시 윤관(尹瓘)을 보내어 화약을 체결하였다. 이로부터 정주장성(定州長城) 밖에 있는 여진부락은 완옌부의 치하에 들어갔다. 이후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군비확장에 착수하려던 즈음, 서경(西京)으로 행차 도중 병을 얻어 죽었다. 능은 영릉(英陵)이다.
16代-예종(睿宗, 1079~1122)
재위기간:1105~1122
휘는 우(). 자는 세민(世民). 시호는 문효(文孝). 숙종의 태자, 명의왕후(明懿王后)의 소생. 1100년 왕태자에 책봉되고, 1105년에 즉위하였다. 1108년(예종 3) 윤관(尹瓘)에게 여진(女眞)을 경략하게 하여 함흥평야에 9성을 쌓았다. 1119년 이후 새로 일어난 금(金)나라와 교류를 시작하였다. 학문을 좋아하여 학교를 세우고 국학(國學)에 양현고(養賢庫:학생후생재단)를 설치하는 등 학문을 진흥시켰다. 능은 개성의 유릉(裕陵)이다.
17代-인종(仁宗, 1109~1146)
재위기간:1122~1146
자는 인표(仁表). 휘는 해(楷). 예종의 맏아들. 어머니 순덕왕후(順德王后). 비(妃)는 이자겸(李資謙)의 제3녀 폐비(廢妃) 이씨와 제4녀 폐비 이씨, 중서령(中書令) 임원후(任元厚)의 딸 공예왕후(恭睿王后), 병부상서(兵部尙書) 김예(金睿)의 딸 선평왕후(宣平王后).
1115년(예종 10)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1123년 15세의 나이로 이자겸에게 옹립되어 즉위하였다. 1126년(인종 4) 이자겸이 난을 일으키자 최사전(崔思全) ·척준경(拓俊京) 등을 시켜 반란을 평정하고 이자겸을 귀양보냈으며, 그의 딸들인 왕비들을 폐출(廢出)하였다. 또 1135년 서경(西京)에서 묘청(妙淸)이 난을 일으켰으나 김부식(金富軾)을 서경 정토대장(征討大將)으로 삼아 이를 평정하였다.
2차례의 내란으로 정국(政局)이 불안한 중에도 1127년 주(州) ·현(縣)에 학교를 세웠으며, 1129년에는 서적소(書籍所)를 설치하였다. 한편 금(金) ·송(宋)나라 등과 사신 왕래를 자주 하였으며, 1145년 김부식에게 명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을 편찬하게 하였다. 능은 개성의 장릉(長陵)이다.
18代-의종(毅宗, 1124~1173)
재위기간:1146~1170
휘는 현(晛). 인종의 맏아들. 무신을 천대하고 문신을 우대하다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나 폐위되고, 명종3년에 경주에서 살해됨.
19代-명종(明宗, 1131~1202)
재위기간:1170~1197
휘는 호(皓). 의종의 동생. 정중부의 추대로 즉위하고 최충헌(崔忠獻)에 의하여 폐위됨
20代-신종(神宗, 1144~1204)
재위기간:1197~1204
휘는 탁(晫). 인종의 다섯째 아들로 최충헌에 의해 옹립(擁立)됨
21代-희종(熙宗, 1181~1237)
재위기간:1204~1211
이름은 영(). 초명은 연(淵) ·덕(悳). 자는 불피(不陂). 시호는 성효(誠孝). 신종(神宗)의 장자로, 어머니는 선정태후(宣靖太后) 김씨(金氏)이고 비는 영인후(寧仁侯) 진()의 딸 성평왕후(成平王后)이다. 왕 즉위의 공으로 권신(權臣) 최충헌(崔忠獻)을 문하시중(門下侍中) ·진강군개국후(晉康郡開國侯)에 봉했으나 횡포가 심하자, 1211년(희종7) 내시(內侍) 왕준명(王濬明) 등과 함께 그를 죽이려 하다가 성사하지 못하고 폐위되어 강화(江華)로 쫓겨났다. 이어 자연도(紫燕島:永宗島)로 옮겨지고, 1215년(고종2) 교동(喬桐)으로 옮겨졌다. 1219년 봉영(奉迎)되어 서울에 살다가 1227년 복위 음모가 있다는 무고로 다시 교동에 유배되어 죽었다. 능은 강화의 석릉(碩陵)이다.
22代-강종(康宗, 1152~1213)
재위기간:1211~1213
자는 대수(大). 이름은 숙(璹)·정(貞).시호는 원효(元孝). 명종(明宗)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광정태후(光靖太后) 김씨(金氏), 비(妃)는 원덕태후(元德太后) 유씨(柳氏)이다. 1171년(명종1) 관례(冠禮)를 올리고, 1273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297년 최충헌에게 쫓기어 부왕과 함께 강화도로 갔다. 1210년(희종 6) 소환되어 이듬해 수사공상주국한남공(守司空上柱國漢南公)에 봉해졌으며, 희종(熙宗)을 폐한 최충헌에게 옹립되어 왕위에 올랐다.
능은 경기 개풍군에 있는 후릉(厚陵)이다.
23代-고종(高宗, 1192~1259)
재위기간:1213~1259
이름은 철(), 초명은 진(瞋).자는 대명(大明)·천우(天祐).시호는 안효(安孝). 강종의 맏아들. 어머니는 원덕태후(元德太后) 유씨(柳氏). 비(妃)는 희종의 딸 안혜태후(安惠太后) 유씨(柳氏). 1212년(강종 1) 태자에 책봉되고, 이듬해 강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최씨(崔氏)의 무단(武斷)정치로 실권을 잡지 못하다가, 1258년 최의(崔)가 살해되자 정권을 되찾았다.
재위 기간에 거란·몽골 등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특히 1231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몽골의 침입을 받고 강화(江華)에 천도하여, 1228년 간 항쟁하였다. 왕의 친조(親朝)와 태자 전()의 볼모를 조건으로 강화가 성립되어, 이후 고려는 사실상 원(元)나라의 속국으로서 공민왕 때까지 굴욕을 겪었다.
그 동안 황룡사탑(皇龍寺塔) 등 많은 문화재를 소실하였으나, 원나라의 침략을 부처의 힘으로 격퇴하기 위하여 8만대장경을 조판(彫板)하게 하고, 유학을 장려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능은 강화의 홍릉(洪陵)이다.
24代-원종(元宗, 1219~1274)
재위기간:1260~1274
자는 일신(日新). 휘는 정(禎). 이름은 식(). 초명은 전(). 시호는 순효(順孝). 고종의 맏아들. 비(妃)는 김약선(金若先)의 딸 순경태후(順敬太后). 1235년(고종 22) 태자에 책봉되고, 1259년 강화를 청하기 위하여 표(表)를 가지고 몽골에 갔다. 고종이 죽자 1260년 귀국 즉위하였다. 개경으로 환도하려다가, 1269년 임연(林衍)에 의해 폐위되었고 원나라의 문책으로 다시 복위되었다.
최탄(崔坦) 등이 서경(西京)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몽골에 투항하자, 몽골은 서경에 동녕부(東寧府)를 두었다. 그 해 몽골에 갔다가, 1270년 귀국하여 개경 환도를 선언하자 배중손(裵仲孫)을 중심으로 삼별초(三別抄)의 난이 일어났으며, 1273년 여원(麗元) 연합군에 의해 평정되었다. 탐라에 다루가치총관부[摠管府]를 둔 원나라로부터 일본정벌을 위한 전함 300척을 만들라는 요청을 받았다. 원나라에서 매빙사(妹聘使)가 오자 결혼도감(結婚都監)을 설치, 원성을 샀다. 능은 소릉(韶陵)이다.
25代-충렬왕(忠烈, 1236~1308)
재위기간:1275~1308
초명은 심(諶) .휘는 거(). 원종(元宗)의 맏아들. 어머니는 순경태후(順敬太后) 김씨(金氏). 비(妃)는 원나라 세조의 딸 장목왕후(莊穆王后). 구비(舊妃)는 시안공(始安公) 인(絪)의 딸 정화궁주(貞和宮主) 및 숙창원비(淑昌院妃) 김씨(金氏)이다. 1260년(원종 1)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1271년(원종 12) 6월 원나라에 가서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결혼, 1274년 원종이 죽은 뒤 고려에 돌아와 그 해 8월 왕위에 올랐다.
10월 원(元)나라 세조의 강요로 일본 정벌을 위한 동로군(東路軍)을 파견하였으나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고 패퇴했으며, 1281년(충렬왕 7)에도 김방경(金方慶) 등이 원나라 병사와 더불어 제2차 일본 정벌에 나섰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1290년(충렬왕 16)에는 합단(合丹)의 내침으로 12월 강화로 피난하였다가 1292년(충렬왕 18) 1월에 환도하였다. 원나라의 지나친 간섭과 왕비의 죽음 등으로 정치에 염증을 느껴 1298년(충렬왕 24)에 세자(충선왕)에게 선위(禪位)한 뒤 태상왕(太上王)으로 물러나 원나라에 갔는데, 계국대장공주(國大長公主:충선왕의 妃)의 무고로 충선왕이 국새(國璽)를 빼앗기는 등의 음모사건이 발생하자 선위 7개월 만에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은 그 후 음주 가무와 사냥으로 소일,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다가 1308년(충렬왕 34) 7월, 재위 34년 만에 죽었다. 원나라의 문물제도를 받아들여, 훈고사장(訓古詞章)의 학을 경사(經史)로 전향시키는 등의 치적을 쌓기도 하였으나, 원나라의 간섭 때문에 자주성을 잃기도 하였다. 능은 경릉(慶陵:개성)이다.
26代-충선왕(忠宣,1275~1325)
재위기간:1309~1313
초명은 원(), 휘는 장(璋). 자는 중앙(仲昻). 충렬왕의 아들. 어머니는 원나라 세조(世祖:忽必烈)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비는 원나라 진왕(晉王) 감마라(甘麻刺)의 딸 계국대장공주(國大長公主), 조인규(趙仁規)의 딸 조비(趙妃), 서원후(西原侯) 영(瑛)의 딸 정비(精妃), 홍규(洪奎)의 딸 순화원비(順和院妃) 등이었다. 1277년(충렬왕 3)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291년(충렬왕 17) 원나라로부터 특진상주국 고려국왕세자(特進上柱國高麗國王世子)의 호(號)를 받았다. 1297년(충렬왕 23) 충렬왕의 총애를 빙자, 횡포가 심하던 궁인 무비(無比)와 환관(宦官) 도성기(陶成器) ·최세연(崔世延) 등 40여 명을 죽여 궁중의 기강확립을 기도했다.
이 때 충렬왕은 정치에 흥미를 잃고 있었으므로, 무비 등을 죽인 사건을 계기로 1298년 충선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즉위하자 정방(政房)을 폐하는 등 관제를 혁신하고, 권신이 소유한 광대한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군제(軍制) ·세제(稅制)를 정비하고 원나라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계국대장공주와의 불화로 원나라와의 사이가 원만치 못하였고, 곧 이어 원나라 사신에게 국새(國璽)를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져 선위 7개월 만에 왕위는 다시 충렬왕에게로 돌아갔다. 충선왕은 원나라에 소환되었는데, 이 때 간신 왕유소(王維紹) 등이 충선왕을 아주 폐하고, 그 대신 서흥후(瑞興侯) 전(琠)을 그 후사(後嗣)로 삼으려는 공작을 했다.
1305년(충렬왕 31) 원나라의 성종(成宗)이 죽고, 그 후 황위(皇位) 쟁탈전이 일어났는데, 충선왕은 승자가 된 무종(武宗)을 도왔으므로 그 세력의 힘으로 왕유소 일당과 서흥후 등을 제거하였다. 1308년 심양왕(瀋陽王)에 봉해졌고, 같은 해에 충렬왕이 죽자, 귀국하여 다시 왕위에 올랐다. 복위 후 기강의 확립, 조세의 공평, 인재 등용과 공신자제(功臣子弟)의 중용, 농 ·잠업의 장려, 동성결혼의 금지, 귀족의 횡포 억제 등 과단성 있는 혁신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정치에 싫증을 느껴, 제안대군(齊安大君) 숙(淑)에게 정치를 대행하게 하고 원나라로 가 전지(傳旨)로써 국정을 처리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각염법(鹽法)을 제정하여 소금의 전매를 단행하여, 그때까지 사원(寺院)과 권문세가(權門勢家)에서 소금을 독점하여 폭리를 취하는 것을 막았다.
1313년(충선왕 5) 아들 강릉대군(江陵大君:충숙왕)에게 전위하고 계속해서 연경(燕京)에 머물러 만권당(萬卷堂)을 지은 뒤 내외의 고금서적을 수집하였으며, 이제현(李齊賢:고려인) ·조맹부(趙孟:원나라 사람) 등 대학자를 초빙하여 고전 연구에 몰두하였다.1320년(충숙왕 7) 원나라의 환관 임파이엔토그스[任伯顔禿古思]와 틈이 생겨 그의 참소로 토번(吐蕃)에 귀양갔다가 이제현 등의 간절한 소청으로 3년 만에 풀려나 돌아왔다. 1325년(충숙왕 12) 5월에 원나라에서 죽었다. 그림을 잘 그렸으며, 능은 덕릉(德陵:開城)이다
27代-충숙왕(忠肅,1294~1339)
재위기간:1314~1330, 1333-1339
초명은 도(燾). 휘는 만(卍). 자는 의효(宜孝). 시호는 의효(懿孝). 충선왕의 둘째아들. 어머니는 몽골 출생의 의비(懿妃). 비는 원나라 영왕(營王)의 딸 복국공주(國公主), 홍규(洪奎)의 딸 명덕태후(明德太后),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 및 바이앤후두[伯顔忽頭]의 딸 경화공주(慶華公主). 1299년(충렬왕 25) 강릉군(江陵君)에 봉해졌고, 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1313년 왕위를 물려받고 돌아와서 즉위하였다. 즉위 후 정치를 소홀히 하여 혼란이 오자 이 기회를 틈타 심양왕(瀋陽王) 고(暠)가 왕위 찬탈을 꾀하여 원나라에 무고, 1321년 연경(燕京)에 들어가 돌아오지 못하고 5년간 체류하였다.
1325년에 귀국, 이듬해 심양왕에게 선위할 계획을 세웠으나 한종유(韓宗愈) 등 충신들의 반대로 취소했다. 그 후 눈 ·귀가 멀어 정사를 못 돌본다는 조적(曹) 일당의 무고를 받고 정사에 더욱 염증을 느껴, 1330년 태자 정(禎:忠惠王)에게 선위하고 원나라에 갔다. 그러나 아들 충혜왕을 황음무도(荒淫無道)하다는 이유로 원나라가 폐위하자 1332년에 자신이 복위, 그 뒤 원나라의 무리한 세공(歲貢)을 삭감하고, 공녀(貢女) ·환자(宦者)의 선발 등을 중지하도록 청원한 사실 등 업적을 세웠으나, 여전히 연락(宴樂)과 사냥에 몰두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글씨를 잘 써 예서(隸書)에 능했다. 능은 의릉(毅陵:開城)이다.
28代-충혜왕(忠惠,1315~1344)
재위기간:1331~1332, 1340-1344
휘는 정(禎). 충숙왕의 아들.행실이 좋지 않아 정사를 혼란에 빠뜨렸음. 원나라로 귀양을 가다 병사함.
29代-충목왕(忠穆,1337~1348)
재위기간:1345~1348
휘는 흔(昕). 충혜왕(忠惠王)의 아들. 어머니는 덕녕공주(德寧公主). 원나라에 볼모로 가 있다가, 1344년(충혜왕 복위 5) 선왕이 죽자 원나라에서 개부의동삼사 정동행중서성 좌승상 상주국(開府儀同三司征東行中書省左丞相上柱國)의 벼슬을 받고 귀국하여 즉위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8세였으므로 덕녕공주가 섭정을 했다. 보흥고(寶興庫) ·내승(內乘) ·응방(鷹坊) 등을 철폐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서연(書筵)을 열었으며, 권신들이 독점하였던 녹과전(祿科田)을 본래의 소유자들에게 반환하였다.
1347년(충목왕 3)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설치하여 각 도(道)에 양전(量田)을 실시하였으며, 이어 충렬왕 ·충선왕 ·충혜왕 등 3조실록(三朝實錄)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1348년 진제도감(賑濟都監)을 설치하여 기민(飢民)을 구제하는 등 많은 선정을 베풀었으나 재위 4년 만에 죽었다. 능은 명릉(明陵:開城)이다.
30代-충정왕(忠定,1337~1352)
재위기간:1349~1351
휘는 저. 충혜왕의 서자로 모는 희비(禧妃),충목왕(忠穆王)이 후사가 없이 죽자 1349년 원(元)나라로부터 왕으로 책봉되어 7월에 즉위하였다. 외척 윤시우(尹時遇)와 배전(裵佺) 등이 세도를 부려 기강이 해이해지고, 밖으로는 왜구의 침입이 잦아 국정이 문란하였다.
31代-공민왕(恭愍,1330~74)
재위기간:1352~1374
호는 이재(怡齋)·익당(益堂). 이름은 전(). 초명은 기(祺). 몽골식 이름은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 충숙왕의 둘째아들이다. 비는 원(元)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다. 충목왕이 즉위할 때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해졌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숙위(宿衛)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가서,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하였다. 원나라의 지시로 충정왕이 폐위되면서 왕위에 올랐다. 원나라가 쇠퇴해지자 원나라 배척운동을 일으키고, 1352년(공민왕 1) 변발(髮) ·호복(胡服) 등의 몽골풍을 폐지하였다.
1356년 몽골 연호 ·관제를 폐지하여 문종 때의 제도로 복귀하는 한편, 내정을 간섭한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하였다. 이어 원나라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린 기철(奇轍) 일파를 숙청하고, 100년 간 존속한 쌍성총관부를 쳐서 폐지하는 등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였다. 1368년 명(明)나라가 건국하자 이인임(李仁任)을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에 남은 원나라 세력을 공략하였다.
1369년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동녕부(東寧府)를 치게 하여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 국위를 크게 떨쳤다. 내정에서는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신돈(辛旽)을 등용하여 귀족이 겸병한 토지를 소유자에게 반환시키고,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키는 등 개혁적인 정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그 뒤 홍건적 ·왜구의 계속적인 침범으로 국력이 소모되었고, 1365년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그녀를 추모하여 불사(佛事)에만 전심하였다.
정치를 신돈에게 맡겨 정치가 문란해졌으며,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여 풍기도 문란해졌다. 특히 홍륜(洪倫)이 익비(益妃)를 범하여 임신시키자, 이를 은폐할 의도로 홍륜 ·최만생(崔萬生) 등을 죽이려다가, 그들에게 살해되었다. 그림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 화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글씨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대자(大字)에 뛰어났다. 능은 현릉(玄陵)이다. 작품에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국립현대미술관) 《노국대장공주진(眞)》 《석가출산상(釋迦出山像)》 《아방궁도(阿房宮圖)》 《현릉산수도(玄陵山水圖)》 《동자보현육아백상도(童子普賢六牙白象圖)》 등이 있다.
32代-우왕(禑,1364~1389)
재위기간:1375~1388
아명 모니노(牟尼奴). 신돈(辛旽)의 시녀 반야(般若)의 소생. 공민왕이 신돈의 집에 미행하여 낳은 아들이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처형된 다음 궁중에 들어가, 1373년 우(禑)라는 이름을 받고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해졌다. 때를 같이 하여 명덕태후(明德太后)의 명으로 궁인(宮人) 한씨(韓氏)의 소생으로 발표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자, 수시중(守侍中) 이인임(李仁任)의 후원으로 10세에 즉위하였다.
처음에는 경연(經筵)을 열어 학문을 닦기에 힘썼고, 명덕태후의 훈계를 받아 몸가짐을 바로하여 기대를 모았으나, 명덕태후가 죽은 다음 사냥 ·음주가무 ·엽색 등 방탕에 빠져 백성들의 신망을 잃었다. 여기에다 국왕을 믿고 권력을 휘두른 이인임이 최영(崔塋) ·이성계(李成桂) 등으로부터 미움받아 경산부(京山府)에 유배됨에 따라, 정치적 지지기반을 잃었다. 1388년 6월 왕족의 혈통이 아니고 신돈의 자식이라는 이성계의 주장에 따라 왕위에서 쫓겨나 강화에 유배되었다. 강릉(江陵)으로 옮겨져, 1389년 12월 그의 아들 창왕(昌王)과 함께 이성계에 의해 살해되었다. 우왕 ·창왕은 모두 폐위되었기 때문에, 죽은 뒤에 왕으로서의 시호를 받지 못하여 폐왕 우, 폐왕 창으로 기록되었다
33代-창왕(昌)
재위기간:1388~1389
이성계 등이 우왕을 폐위시킨 후, 창왕을 세웠으나 1년만에 강화도로 유배되어 10세때 시해됨.
34代-공양왕(恭讓,1345~1394)
재위기간:1389~1392
이름은 요(瑤). 신종(神宗)의 7대손이며,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균(鈞)의 아들이다. 비(妃)는 창성군(昌城君) 진()의 딸 순비(順妃) 노씨(盧氏)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원(元)나라에서 명(明)나라로 바뀔 때였으므로, 조정에서는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의 대립이 격심했으며, 친명파의 이성계(李成桂)는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뒤에 창왕(昌王)을 즉위하게 하였으나, 음모를 꾀했다는 이유로 창왕을 폐위시키고, 1389년 공양왕을 즉위시켰다.
왕은 과단성이 없는 성품으로 정몽주(鄭夢周)를 중심으로 한 구세력(舊勢力)에 이어 새로 실권을 잡은 이성계에게 완전히 실권을 빼앗겼다가, 정몽주가 살해된 후 덕이 없고 어리석다는 이유로 폐위당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34대 475년 만에 망하였다. 공양왕은 폐위된 뒤 원주(原州)에 추방되어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다가 2년 뒤에 삼척(三陟)에서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