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리를 지나 용점에서 조금 올라가면 무덤실이 나오고,
거기서는 송골 뚝넘어 소나무 밭과, 여름이면 마당에
구더기 굼실굼실 기어다니던 금곡 할매네 집이 보였다.
단오날에는 뚝 넘어 서있는 오래된, 옆으로 뻗어나온 소나무에다
동네 청년들이 튼튼하게 엮은 동아줄로 그네를 메놓고 그네들을 뛴다.
마을 처녀들은 예쁘게 분단장 하고, 아끼던 네거리 옷 차려입고
그날만은 처녀 총각들의 년중 최고의 날이 된다.(그래봤자 다들
친 인척 동기간인데) 평소 마음속으로 연모했던 오라버니, 아제비들과
또는 세경받고 타지에서 머슴살러온 청년들과도 그네를 밀어주며.
누가 멀리 뛰나 핑계로 은근히 뜨거운 눈빛도 주고 받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하긴 열두서너 살의 우리들도 그랬으니까....
밤이면 부모님 몰래 집에서 빠져나와 또래들과 모여놀곤 했다.
조희네 정미소에 딸린 전빵에 모여앉아 무서운 얘기도 나누고
팔뚝 맞기 민화투도 치며 슬쩍슬쩍 부디치는 머스마들 체온이 왜 그리
설레고 흥분되던지.. 아~ 그때가 우린 사춘가였던가보다.
나중에 상민이가 실토 하기를 남자 애들은 조희 눈을 피해
과자랑 사이다, 콜라를 훔쳐 먹기 바빴단다.그이름도
잊을수 없는 라면땅, 뽀빠이,크림빵,하얀 눈깔사탕,풍선껌
롯데라면 소고기~으~!!!~~~조희가 알아도
이제 공소시효가 한참 지났으니, 너무배아파 하지마라.
송골에선 유일하게 조희네가 복숭아
과수원을 하고 있었다.과일도 귀했던 옛날이라 높이 세워진
원두막이 낭만이 있어 보였고 그 과수원이
우리 것이 였으면 하고 부러워도 했었다.
시골에 살았다면 누구나 그런 경험들이 있겠지만
복자랑 우리 친구들은 조희네 복숭아 나무 밑에 열려 있는
수박과 참외도 많이도 서리했었다. 깜깜해서 설익은 걸 따와
버리기도 했고 같은 서리꾼 끼리 서로 놀래 36계 도망치다
긁혀서 상처도 나고 후유증도 많았지..
지금은 하라고 해도 않겠지만, 그때는 그게 그렇게 스릴있고
재미있었는데, 정걸아 요즘엔 서리하다 걸리면 바로 형사 입건이라지?
없는 살림에 첩실로 들어온 작은 외숙모(일명 말대가리) 눈치 안보고
밥이라도 얻어 먹으려고 시간만나면 꼴망태 둘러메고
낫을 들고 꼴베러 나서곤 했다.ㅠㅜ
마냥 놀고 싶었던 나이 였지만 그건 희망사항일뿐..
(실제로 시골아이들은 일손이 바빠 놀 시간도 많지 않았다)
칡넝쿨을 걷다가 낫으로 무릎과 발목을 쪼아서
내 다리엔 그때 흉터가 훈장처럼 남아있다.
새들서 송골로 올라간 나는 늘 또래들을 끌고 다니는 대장이었다.^^;
언젠가 창섭이가 나보고 어릴때 모땟던걸로 기억한다고
한적이 있는데 김목사, 그건 잘봤고 사실이었네.
지리실이나 마째 여자애들은 덤비지 않았으니까.
새들 살??도 전병수하고도 싸우다 많이 터진 기억이 나고
오국이 창섭이 장터 애들한테도 많이 맞았던거 같다.
아마 까불고 덤비니까 때렸겠지? 국희랑은 또 얼마나 싸웠던지..
그래도 딱 한명만은 피해다녔다.
공포의 그 이름 도.꼬.뿌.리.십.오.센.치,, 박성종~!!~
서울 회장님~장터 지나오다가도 성종이가 저만치 보이면
쇠전뒷길이나,장터안 골목으로 피해 돌아서다녔다.ㅠㅠ
그랬던 성종이는 넘 멋진 신사로 변해있다*^^*
얘기가 또 새들로 내려왔네? ㅎㅎㅎ
내가 납실로 이사오기 일년 전 쯤인가?
이복자!!! 나보다 키는 점점 빨리 자랐고 언제나 기죽어 살던게
억울 했고 이젠 덩치로 봐도 한번 해볼만 하다 싶었는지,
어느날, 두~둥~!!~~ 어른들은 다 들에 나가시고
우린 단 둘이 외갓집 아랫방에서 놀다가 다툼끝에 결국 엉켜 붙었다.
역시 나의 승리로 돌아가는가 싶었는데, 아차~ 갑자기
죽을 만큼의 통증이 밀려와 얼떨결에 손을 놓고 항복을 하고 말았다.
헐... 복자 이 가시나가 도 저히 힘으로 안될것 같으니까 그랬는지
덜컹 내 오른쪽 귀를 물고 늘어져서 놓지를 않네?
아~으~ 그날 이후로 군림하던 난 송골 이복자에게
꼬랑지 내리고 말았다. 허이구, 내 자존심아 ~~~~~
다른 애들 역시 나를 떠나 복자에게로 돌아섰고,
사는 낙을 잃어버린 난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아마 그때가 사춘기여서 그랬던 것 같은데,(물론 나중에는 복자와
친하게 지냈고,지난번 영덕 석수이 아들 결혼식에서 우리신랑을
소개 시켜주면서 얘가 내 귀 물어 뜯었던 복자야,했더니
우리복자 날 마구 두드리며 얼굴 빨개지더라) ㅋㅋㅋ
다행히 엄마가 이제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도 돌아가셨고
첩으로 데리고 온 말대가리 올케가 뵈기 싫다고 큰집이 있는
납실로 이사를 간다고 하셨다.
내심 얼마나 반가운지 우리 집앞에 우물이 있는 관계로
눈만 뜨면 보리 쌀 씻으러, 나물 씻고 물길러 오는 복자의
가재미눈은 정말 견디기 힘들어으니까.
마치 까불면 '왼쪽 귀마저 물어버린다' 하는 그런 눈으로 보였으니까...
그야말로 복자는 살맛났고, 난 죽을 맛이였다. ㅠㅠ
그랬는데, 막상 납실로 이사를 오니까 왜 그렇게 송골이 또
그리워 지는지, 앞뒤가 산으로 둘러쌓인 물맛 좋은 송골, 아늑한
전경이 마치 노래 '고향의 봄'에 나오는 그런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새벽일찍 일어나 뒷산으로 감꽃, 모과, 홍시 줏으러 다니느라
덜깬 눈을 비벼대며 바가지 들고 돌아 다니던 그때가
그리워서 였을까?.송골 뒷산엔 감나무도 많았다...........
여름 모내기가 끝나면 집집마다 푹구먹는다며
푸집하게 이고지고 음식을 내와서 한바탕 마을잔치가
벌어지기도 했다. 어느집은 동동주 한동이를 내오고,
또 어떤집은 진달래 화전과 메밀 전병, 부침개를
게다리소반 가득 부쳐내 왔으며, 술 넣고 찐 쌀기지 떡을
함지박 가득 이고 오기도 했다.
품앗이로 이집저집 오랜 모내기가 끝나고, 파종이 끝나 한숨
돌릴 즈음 일꾼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힘든 봄일을
마쳤다고 서로 애?㎢摸? 위로하고 풍년을 기원하던
참으로 덕있게 베풀던, 오래된 좋은 풍습이 였던것 같다.
지금 시골은 그런건 모두 사라지고 밥하기도 귀찮고
일손도 모자라서 그냥 시켜먹는다고 들었다. 논둑 밭둑에 앉아
대접에 농주 한잔 따라 시원하게 들이키고 비빔밥 슥슥 비벼
꿀맛으로 한 다라이 비우던 그 풍경을 볼 수가 없고,
부~앙~ "짜장면 시키신 부~운~!!~" "커피~시키신 분~!!~"
이렇게 변해버렸다고 이야기 들었다.
봄이면 온산에 개나리 진달래 물결치고
뻐꾸기 울음소리 정겹게 들리던 앞산 삼우잣골,
개똥 참외, 까투리 복숭아 익어가던 건냉골, 인동초, 복숭아 꽃이
만발하던 옛 송골이며 여름에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언제나
홈 통 을 통해 떨어졌고 덤 밑에 물 맞으며 소리지르던 때가 그립다.
장떡을 반찬으로 한 도시락을 싸서 지리실 약수터로
향하던 한내골 길... 생애 지워지지 않을 서러움과 아름다움이
공존했던 내 그리운 송골은 이제 없다.
지루하게 걷던 장사리 길도, 이모가 시집간 동네, 마째
서낭당도 다시는 볼 수 없다.
홍수가 나면 손에 손 잡고 놓으면 떠내려 갈세라 꽉잡고
비명 지르며 건너던 용점앞 냇가도 이제 시퍼런 물속에 들어 앉았고,
납딱바리 나타난다던 장사리 굽이 길도 댐속에 담겨있다.
조희야, 상민아, 복자야~ 니들도 기억하니? 어두운 밤이면
한내골 쪽을 바라볼때 의문의 불덩어리들이 마구 날아 다니던걸?
우린 그게 도깨비불이라고 했지?
양지밖골 에서 사꾸다치 치던건 생각나는지?
복합비료, 요소 비료포데 깔고 엉덩이 아파하며
썰매 타던 그 겨울은 너무도 신났지?
순선이가 빗자루 부여잡고 눈감은채 춘향이 하면서
신 내린다고 부들부들 떨고 일어나 다가오면
혼비백산 달아 나던 그 순간들이 너무도 생생한데.*^^*
나중에 실토하던데 모두 컨셉(뻥)이였댄다. ㅎㅎㅎ
조희네 아랫방,또는 익바우네 쇠죽 끓이던 방에서
호롱불 밝히고 밤새우던 그시절이~
구월 시사때 떡 받으러 졸졸 따라다니던 그 시절이 너무 그리워......
송골의 새로지었던 우리 초가삼간이 보고 싶고,
맹용이, 삼년겐또 가 그립다.
그리고 그 무섭던 말대가리도 보고싶다.
특이했던 지곡댁 탑이 아제... 월남갔다 정신이 약간 이상해져
돌아온 동수 아제... 정신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금선이..
그리고 술에 절어 늘,동태눈을 하고 있던
상민네 일꾼 선달이 김상도 그립다.
오늘따라 생생하게 더 생각이난다................
첫댓글 위글은 학교 카페에 올린글을 스크랩해왔습니다 어려웠던 내 어린시절을 쓴것으로, 그래도 그 송골이 그리워 때로는 추억속에 잠깁니다^^
송골에서 기억에 남는거라면 조희 언니네 복숭아 밭에서 시커먼스 얼굴로 사진찍었던 생각밖에 다른 추억거린없는것같네, 허긴 어린나이에 무슨추억이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