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관조(受貫祖)
휘(諱)는 원룡(元龍)자,호,생몰(生沒)년 실전
조부는 평장사(平章事),휘(諱),헌(軒)이며 아버지는 가락군(駕洛君) 휘(諱) 사혁(斯革)이다.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조(朝)에 등제(登第)하여 공민왕 9년(1360년)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 를역임 하였으며 우왕(禑王)10년(1384년)광정대부겸 관내권농도병마사(匡靖大夫兼管內勸農都兵馬使:정2품) 로 계림부윤에 부임 하여 해안에 침입한 왜구(倭寇)를 격퇴하여 병부상서겸 도원사(兵部尙書 兼都元帥)에 오르고 분성군( 盆城君)에 봉군(封君) 되었다.
우왕원년(禑王元年:1375)에 김해부사(金海府使) 박위(朴威)가 분산성(盆山城:김해지역의 산성)을 축성 할 때 분성군께서 당시 통헌대부(通憲大夫)로 김해(金海)로 귀양 온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에게 편지를 보내어 산성기(山城記) 를 지어 줄것을 청하여 포은 정몽주 선생께서 분성산성기(盆山城記) 찬하였으며 이러한 기록이 포은집에 전한다.
배위(配位)는 양천허씨(陽川許氏) 로 부사(副使) 유(儒)의 따님이며
충렬왕조에 첨의중찬(僉議中贊)을 지내고 충렬왕 묘정에 배향된 문경공(文敬公) 허공(許珙)의 4세손이다.
슬하에 감무어사전객령(監務御史典客令)을 지낸 장남 서(署),차남 전리판서(典理判書) 종주(宗柱) 를 두었다.
묘소는 김해시 화목구 칠봉산자락에 있으며 묘소아래 제실인 칠산재(七山齋) 영모사(永慕祀)에 위패가 모셔졌다.
2세
배서(裵署)
분성군(盆城君) 장남(長男)
고려(高麗) 때 감무어사(監務御史) 전객령(典客令)등을 지냈다.
2세
배종주(裵宗柱)
분성군(盆城君) 차남(次男)
고려(高麗) 때에 전리판서를 지냈다.
배위(配位)는 부인(夫人) 유씨(柳氏)이며 상장군(上將軍) 효성(孝誠)의 따님이다.
슬하에 아들 판도사(版圖司) 상호군(上護軍) 공보(公輔)를 두었다.
3세
배공보(裵公輔)
분성군의 손(孫)
판도사사상호군(判圖司事上護軍)을 역임
배위는 봉상대부상호군 이득의(李得義) 따님이며 아들은 제주목사 수(守) 이다.
4세
배정비(裵廷斐) 호(號) 구연(龜淵)
분성군(盆城君) 의 증손이며 평장사 단(端)의 아들이다.
진사(進士) 를 지냈으며 배위(配位)는 밀양박씨(密陽朴氏) 전적(典籍) 호(號) 인당(忍堂) 소(昭)의 女이다.
슬하에 3남1여를 두었다.
장남 통정대부 무창군수 찬, 차남 사직 우, 女는 전보원(田甫原),봉례(奉禮) 에게 출가하였다.
弟 정미(廷亹),진사
弟 정현(廷顯),진사
묘소는 의령군 지산(砥山) 칠천(漆川) 壬坐 에 모셔졌다.
4세
배수(裵守).상계 4파.해주목사공파의 파조
분성군 증손으로 봉순대부 해주목사(奉順大夫海州牧使)를 역임
배위(配位)는 함안여씨(咸安呂氏) 호군(護軍) 공계(公系) 따님이며
슬하에 중랑장(中郞將) 유초(惟肖)를 두었다.
5세
배찬(裵찬)
분성군(盆城君) 의 현손이며, 진사(進士) 휘 정비(廷斐)의 장남
통정대부행무창군수(通政大夫行茂昌郡守) 역임하였으며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진양강씨(晉陽姜氏) 손기(孫奇)의 따님이다.
6세
배하(裵夏)
자(字)는 순거(舜擧), 호(號)는 노은(老隱), 분성군(盆城君)의 5세손이며
중랑장 휘(諱) 유초(惟肖)의 차남이다.
벼슬이 영동정(令同正)에 이르렀으나 명리를 구하지 않았으며
산청 봉곡(鳳谷)에 은거하여 시가(詩歌)를 읊으며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이에 후세의 사람들이 그 마을의 이름을 노은(老隱)이라 하였다.
배(配)위는 숙부인 노씨(盧氏) 이다.
묘갈명은 정언 민치량(閔致亮) 이 찬 하였으며 탄재 이준섭이 유허비(遺虛碑)를 찬하였다
묘(墓)소는 경남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에 있다.
6세
배유흥(裵有興)
분성군(盆城君)의 5세손이며,봉순대부(奉順大夫) 휘(諱) 윤손(允遜)의 아들이다.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사선서(司膳署)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도총부(都摠府) 도총관(都摠管)에 증직(贈職)되었다.
묘소(墓所)는 경남(慶南) 합천군 삼가면 남토동 북산
6세
배극수(裵克壽)
호(號)는 송헌(松軒), 분성군(盆城君)의 5세손 이며 생원(生員) 휘(諱) 윤온(允溫)의 아들이다.
천성(天性)이 영민(英敏)하고 성리학(性理學)을 독실(篤實)하게 연구(硏究)하였다.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되어 숭의전(崇義殿)참봉(參奉)을 제수(除授)받고
이어 소부시(小府寺)소윤(小尹), 세자(世子)사부(師父), 광주부윤(廣州府尹), 제주(濟州)목사(牧使)등을 지냈다.
호(號)는 송헌(松軒), 천성(天性)이 영민(英敏)하고 독신성학(篤信性學)하였다.
그후 제주점마차사(濟州點馬差使)에 등용(登用)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영남(嶺南)에서 강진 대곡 평덕리(康津大谷平德里)에 이거하여 송정정사(松亭精舍)를 세우고
후진(後進)을 양성(養成)하며 거문고와 독서(讀書)로 여생을 보냈다.
묘(墓)소는 전남(全南) 강진군 군동면 평덕리이다.
7세
배진(裵縉)
분성군(盆城君) 의 6세손.
합천군 삼가(三嘉)에서 영산면(靈山面) 교동(校洞)으로 이거(移居)한 영산입향조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으며 아들 맹후의 귀(貴)로 인하여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증직(贈職)되었으며 문장과 필법이 탁월하였다.
친필 유묵 유구생필(遺句生筆)이 종가에 전(傳)해온다.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성취하여 모두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장자 맹후(孟厚)는 15세의 나이로 생원진사에 장원급제, 1462년(세조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성종(成宗) 때 사신(使臣)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어 조정의 기강(紀綱)을 바로잡아 왕으로부터 포상이 내려졌다.
차자 중후(仲厚)는 진사(進士) 문장과 도학(道學)으로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으며 당대의 명인들과 교류하였고(진사공파 파조), 3남 숙후(叔厚)는 연산군(燕山君) 때 이조 정랑(吏曹正郞) 오수찰방 지냈고(찰방공파 파조), 계후(季厚)는 경주 판관(慶州判官)과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거쳐 선산 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도호부사공파 파조)
묘소(墓所) 부곡면(釜谷面) 청암산 와용등
7세
배문보(裵文甫)
자(字)는 천장(天章), 호(號)는 세한재(歲寒齋),
분성군(盆城君)의 6세손이며 교수 휘(諱) 상금(尙錦)의 아들이다.
1526년(중종2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고성군수(高城郡守)를 역임하였다.
의령 유곡의 충의사(忠義祠)에 배향되었다.
묘(墓)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 있다.
배(配) 위는 정부인 장연노씨(長淵盧氏) 만호 노영희(盧永禧)의 따님이다.
8세
배약(裵爚)
분성군(盆城君) 7세손이며 숭덕재(崇德齋) 휘(諱) 문발(文拔)의 아들이다.
생원(生員)으로 1417년(태종 17)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현감(縣監)을 지냈다.
배위,묘소는 실전이며 아들 진사(進士) 이장(以章)을 두었다.
8세
배인(裵寅) 생몰년 실전.
분성군(盆城君)의 7세손이며 병조(兵曹)좌랑(佐郞) 특(忒)의 아들이다.
1426년(세종 8)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에 이르렀다.
배위(配位)는 숙인(淑人) 창녕성씨이며 아들은 병사(兵使) 경불(敬黻) 이다.
8세
배맹후(裵孟厚)1448~1479
자는 재지(載之) 호는 계당(桂堂), 참판공파 파조
분성군의 7세손이며.증(贈)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진(縉)의 장남이다.
1462년(세조 8)에 15세로 생원.진사 양시에서 장원 하였으며, 그해 별시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갔다.
1464년 대책(對策)에서 3등으로 뽑혔으며, 1469년(예종 1)에 좌랑(佐郞)에서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승진 하였으며
1470년(성종 1) 재행(才行)을 겸비한 자를 뽑아 예문관에 겸관(兼官)시킬 때 발탁되었다.
이듬해 경상도경차관(慶尙道敬差官)에 임명되었으며,1474년에 낭청(郞廳)으로서 국장(國葬)에 힘쓴 공으로 녹피(鹿皮) 한 장을 하사받았다.이듬해 일본국왕사신선위사(日本國王使臣宣慰使)·일본국통신사(日本國通信使)·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으로 왕으로부터 명주와 사슴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하사받았다.
1479년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올랐으며 다시 이조참의( 吏曹參議) 가 되었다.
배(配)위는 정부인 영산신씨(靈山辛氏) 수사 신진보(辛晉保)의 따님이다.
슬하에 세강(世綱),세순(世純),세륜(世綸) 을 두었다.
경남 합천군 명곡사(明谷祠)에 배향되었으며 묘(墓)소는 경남 창녕군 부곡면 청암리 화룡산에 있다.
8세
배중후(裵仲厚). 진사공파 파조
분성군의 7세손이며 증좌의정 휘 진(縉)의 차남이다.
일찌기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에 합격했으나 과거(科擧)를 단념하고 학문(學問)을 연마(硏磨),
문장도학(文章道學)이 뛰어나 당시 사림(士林)의 추앙(推仰)을 받았고,이심원(李深源)·조려(趙旅)·조욱(趙昱) 등과 도의 상교(道義相交)하며 시문(詩文)을 창화(唱和)했다. 내내강사(奈內江舍)의 사운삼수(四韻三首)와 산인혜영(山人慧穎)의 증시(贈詩) 1수(首)는 특히 유명(有名)하다.유묵과 유시가 도천종가에 전해온다
배위는 단성김씨(丹城金氏)이며,
묘소는 경남 창녕군 부곡면 청암리 방아등에 있다.
장남 정곡공(靜谷公) 배세적(裵世績) 관 군위현감(軍威縣監) ,차남 배세집(裵世緝) 관 부사직(副司直)
8세
배숙후(裵叔厚).오수찰방공파 파조
호(號)는 백암(白菴), 분성군(盆城君) 의 7세손이며 증 좌의정 휘(諱) 진(縉)의 3남이다.
가문의 오랜 전통을 이어받아 행실이 독실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공이 어릴때 형 참의공(參議公) 맹후(孟厚)를 따라 어계(漁溪) 조려(趙旅)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일찍부터 문명이 있었다. 공은 다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의 문하(門下)에서 수업(修業)하여 성리학(性理學)에 능(能)하였고,
1480년(성종 11)에 문과에 급제하여 1489년(성종20)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 1494년(성종 25)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1495년(연산군 1) 승의랑 오수찰방(鰲樹察訪)을 지냈다.
묘(墓) 경남 합천군 삼가면 외톨리 제곡 자라골에 있다.
8세
배계후(裵季厚).선산도호부사공파 파조
자(字) 직방(直方) 호(號)는 모당(慕堂)으로 분성군(盆城君) 7세손이며
증(贈) 좌의정 휘 진(縉)의 4남이다.
총명(聰明)하고 덕(德)과 재능(才能)이 깊고 두터웠다.
어렸을 때부터 중씨(仲氏) 진사(進士) 중후(仲厚)와 함께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 선생(先生)의
문하(門下)의 들어가수학(受學)하며 김일손(金馹孫), 조위(曺偉) 등과 교유(交遊)하였다.
공(公)은 1474 (성종 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고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1478년(성종 9) 경주(慶州)판관(判官)을 거쳐 창평현령(昌平縣令), 예안현감(禮安縣監)을 지냈으며
칠원현감(漆原縣監) 재직시 1489년 (성종 20)에 김일손(金馹孫), 조위(曺偉) 등 31현(賢)과 함께 진주(晉州) 촉석루(矗石樓)에서 종유(從遊), 수계(修契)하여 이르기를 금란(金蘭)이라 이름하고 도의상교(道義相交)하였다.
1491년 (성종 22년)에 선산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로 부임해서는 청렴(淸廉) 결백(潔白)하였으며 덕으로써 다스림에 이 고을에서 3년을 연임하였다.나라를 걱정하고 가문(家門)을 생각하며 절개(節槪)와 의리(義理)를 칭송(稱頌)하고 치민(治民)하는 시(詩)를 지어 금오산(金烏山)에 올라 한 구절을 읊어 이르기를 “야은(冶隱) 길재(吉再)는 이제(夷齊)와 그 절개와 의리가 같으니 금오산 또한 수양산이로다.
지세가 탁월(卓越)하니 고인(古人)이 찾아들고 좋은 이름 더 얻으면 세상(世上)을 천단(擅斷) 하리.”하였다.
관민(官民)이 두루 편안(便安)하므로 여러 선비들과 종유(從遊)하며 시가를 지어 읊고 아름다운 경치를 즐겼다.
1498년(연산 4) 유자광(柳子光)을 중심(中心)으로 한 훈구파(勳舊派)가 ‘성종실록’에 실린 사초(史草) ‘조의제문(弔義祭文)’으로 사림파(士林派)를 모함하여 김종직(金宗直)을 부관참시(副棺斬屍)하고
김일손등 많은 선비들을 죽이고 귀양(歸養)보낸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김탁영(金濯纓)이 무고를 입자 공은 벼슬을 버리고 농원(農園)으로 돌아와 세상(世上)에 나아가지 않고 조용히 거처(居處)하며 금서(琴書)으로서 스스로를 달래였다.
묘소는 경남(慶南) 창녕군 부곡면(釜谷面) 청암리 차실부락 뒤 학산등에 있다.
배(配) 숙부인 경주김씨(慶州金氏) 증(贈) 우의정(右議政) 김동언(金東彦)의 따님이다.
8세
배담(裵湛) 영덕입향조
자(字)는 화여(和汝)이고 호(號)는 야은(野隱), 분성군(盆城君) 의 7세손이며
통덕랑 휘(諱) 인(仁)의 아들이다.
1414년(태종14)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1427년(세종9) 영덕 현령(盈德縣令)·병마단련사(兵馬團鉢事)에
기용(起用)되어 3년간 재직(在職)하였으며 청백리(淸白吏)로 유명(有名)하였고, 벼슬에서 물러난후
영덕 군자동(君子洞)에 은거하여 후진양성(後進養城)에 힘썼다.
후일 사람들이 야성은군자(野城隱君子)가 머물던 곳이라 하여 군자동(君子洞)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웠으며
유허비는 방산(舫山) 허훈(許薰)이 찬하였다.
유물로는 영덕현령(盈德縣令)·병마단련사(兵馬團鉢事) 임명 왕지를 포함한 3점의 왕지가 전한다.
묘(墓) 경북 영덕군 지품면 오천1리에 있다.
8세
배이동(裵二仝)
분성군(盆城君)의 7세손이며,판관(判官) 휘(諱) 상무(尙武)의 차남(次男)이며 만호 일동(一 仝)의 아우이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선전관(宣傳官),구례(求禮)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구례현감 임기(任期)를 마친 후에도 임지에서 세거 하여 구례 입향조가 되었으며
묘소는 구례현 용방면 이었으나 1978년 전북 남원시 아영면 의지리로 이장하였다.
9세
배세강(裵世綱) 1608∼1641 (선조∼인조)
호(號)는 영락정(永樂亭) 분성군(盆城君)의 8세손이며 계당공 휘(諱) 맹후(孟厚)의 장남(長男)이다.
성종조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고 중종조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김천찰방(金泉察訪)을 거쳐 관직(官職)이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전라도사(全羅都事)에 이르렀다.
묘소는 경남(慶南) 창녕군(昌寧郡) 계성면(桂城面) 명리에 있다.
9세
배세순(裵世純) 호(號)는 일심재(一心齋)
분성군(盆城君) 의 8세손이며,계당공 휘(諱) 맹후(孟厚)의 차남(次男)이다.
숙부 숙후(叔厚)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중중조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오수찰방(鰲樹察訪)을 역임하였다.
9세
배세륜(裵世綸) 황산찰방공파의 파조(울산문중)
자(字)는 경여(經余) 호(號)는 묵와(默窩)
분성군(盆城君)의 8세손이며 계당공(桂堂公) 휘(諱) 맹후(孟厚)의 3男이다.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전적(典籍), 지평(持平), 교리(校理), 황산(黃山)찰방(察訪) 등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 이조(吏曹)좌랑(佐郞)에 이르렀다.청백(淸白)하였으며 선정비(善政碑)가 있다.
합천에서 울산으로 이거하여 울산입향조(蔚山入鄕祖)가 되었다.
배위는 숙인(淑人) 김해김씨(金海金氏) 제포첨사(薺浦僉使) 김영손(金永孫)의 여(女)이다.
묘소는 울산(蔚山)광역시 범서면 다전리 사랑곡 서일산에 있다.
9세
배세적(裵世績) 1471∼1507 (성종∼중종)
자(字)는 무숙(懋叔) 호(號)는 정곡(靜谷) 분성군(盆城君)의 8세손이며
진사공(進士公) 휘(諱) 중후(仲厚)의 장남이다.
점필재(점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수학하여 문장과 행의로 사우들의 추증을 받았으며
1493(성종 24)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어 1507(중종 2) 문과에 급제하여
군위현감(軍威縣監)에 재직 백성을 보살폈는데 정사(政事)가 청렴하여 경내(境內)가 모두 화목하였다.
공이 재임하던 중에 하세하니 고을 백성의 애통해 함이 부모상을 당한 것과 같았다. 청백리로 이름이 알려 졌으며
후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漆原面) 용정리 덕연서원(德淵書院) 내(內) 별사(別祠)에 배향(配享)되었다.
配位는 성산배씨(星山裵氏) 진사 신(信)의 따님이다.
묘(墓) 경남 함안군 칠북면 검단리 지곡에 있다.
9세
배세집(裵世緝)
분성군(盆城君) 의 9세손이며 진사공 휘(諱) 중후(仲厚)의 차남(次男)이다.
중종 조에 어모장군(禦侮將軍) 용양위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배위는 숙인(淑人) 영산신씨(靈山辛氏) 현감(縣監) 신영리(辛永理)의 여(女)이다.
묘소는 경남(慶南) 창녕군(昌寧郡) 영산면(靈山面) 서리 미북에 있다.
9세
배세경(裵世經)
분성군(盆城君)의 8세손이며 모당공(慕堂公) 휘(諱) 계후(季厚)의 장남(長男)이다.
성품(性稟)이 고상하고 씩씩하여 허랑하게 놀지 않았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벗 사귀기를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택했다.
어느해 흉년(凶年)을 만났는데 창고(倉庫)를 덜어서 주급해 주니 사람들이 부제군자(扶濟君子)라고 했다.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 오우정(五友亭) 민구연(閔九淵) 등과 도의(道義)로써 사귀었다.
아우 진사(進士) 세위(世緯)와 같이 밀양향사당품관안(密陽鄕社堂品官案)에 기재(記載)되었다.
9세
배문(裵紋) 자(字)는 국보(國寶), 호(號)는 죽헌(竹軒)
분성군(盆城君) 의 8세손이며, 만호(萬戶) 휘(諱) 일동(一仝)의 장남(長男)이다.
성품(性稟)이 순박하고 인정이 두터웠으며 세상(世上)일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거문고를 켜는 일과 책을 읽는 일로써 안분지족(安分知足) 하였고 대나무 밭을 가꾸며 일생(一生)을 보냈다.
세상 사람들이 죽헌일사(竹軒逸士)라 불렸고 통정대부(通政大夫) 부호군(副護軍)에 증직(贈職)되었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여흥민씨(驪興閔氏) 우후(虞侯) 민선(閔璿)의 여(女).
묘소는 경남(慶南) 산청군 생초면 노은리이며 묘소 아래에 재실(齋室) 봉산재(鳳山齋)가 있다.
9세
배륜(裵綸),자(字)는 국경(國經) 호(號)는 매헌(梅軒)
분성군(盆城君) 의 8세손이며 만호(萬戶) 휘(諱) 일동(一仝)의 차남(次男)이다.
산청 노은(老隱)에서 황산(黃山) 매곡촌(梅谷村)으로 이거(移居)하였으며 장악원(掌樂院) 주부(主簿)에 증직(贈職) 되었다.
배위는 공인(恭人) 월성이씨(月城李氏) 장악원정(掌樂院正) 이완식(李完湜)의 여(女)
10세
배학(裵鶴) 1498∼1569(연산∼선조)
자(字)는 태충(太冲), 호(號)는 임천(林泉)
분성군(盆城君)의 9세손이며 어모장군 용양위 부사직 휘(諱) 세집(世緝)의 아들이다.
천성(天性)이 온순(溫純)하고 인자(仁慈)하였으며,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孝誠)스러웠다.
부모님의 상(喪)을 당해서는 묘막(墓幕)을 지키며 죽을 먹었고, 슬피 곡을 하면서 묘소(墓所)를 살펴 소제하였는데,
이러한 행동(行動)을 6년을 하루같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치지 않았다.
이일이 조정(朝廷)에 알려져 명종(明宗)이 학행(學行)으로 영릉참봉(英陵參奉)을 제수(除授)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세상(世上)에 드러나지 않고 숨어서 덕행(德行)을 닦고 산야(山野)에 은둔(隱遁)하여 스스로 호(號)를 임천(林泉)이라 하였다. 뜻이 높고 원대하여 어려서부터 관직(官職)에 나아갈 뜻보다는 성리학(性理學)에 마음을 쏟아 서실(書室)을 죽림(竹林) 가운데 만들고 그곳에서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눈이 오는 날 시(詩)를 보내어 말하기를
“군자(君子)는 눈 덮인 무릉을 바라보고, 영축산(靈鷲山)의 이어진 구름 위를 거니네.
[군간무릉설(君看武陵雪), 요연취산운(遙連鷲山雲)]”라고 하였고,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先生) 역시 공을 아껴 산해정(山海亭)으로 공을 찾아와 함께 의리학(義理學)을 강론(講論)하였다.
한때 사림(士林)에 고성인(固城人) 정랑(正郞) 이중(李中)이 있었는데 또한 현인(賢人)이었다.
서로 뜻이 같고 도리(道理)가 합치(合致)되어 특별히 서로 좋은 교우(交友)라 도의(道義)를 연마(硏磨)하고 널리 고금(古今)을 통하였다.
서로도와 학문을 힘쓰던 의리(義理)가 늙어가면서 더욱 돈독(敦篤)해 가족(家族)과 같아서 잠깐 동안이라도 서로 떨어지지 못하였다. 임종시에 명(命)을 남겨 말하기를 “나와 이우(李友)는 황천에서도 서로 기다리는 의리가 있다.
옛날의 장의(張儀)와 범숙(范叔)같이 저승에 돌아가서 각기 서로 반목(反目)하게 된다면
죽은 사람의 혼백(魂魄)에 사한(私恨)이 한없을 것이니 두 집의 자손(子孫)들은 모름지기 이 뜻을 체득하며 한 산등에 장사하여 외롭지 아니한 좋은 이웃이 되게 하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영산현 청암산(靑巖山) 언덕에 임천(林泉)공과 이명암(李明巖) 두 선생(先生)의 무덤이 서로 가까이 있게 되었다.
묘(墓) 경남 창녕군 영산면 염포리 광지에 있다.
배(配) 일선김씨(一善金氏) 충순위 김광절(金光日+折)의 여(女).
슬하에 3남1녀를 두었다
아들은 장남은 배식(裵湜)이며 차남은 좌찬성에 증직된 배영(裵渶)이며 삼남은 배운(裵澐)이다.
따님은 박사립(朴斯立)에게 출가하여 2女를 두었는데 사위는 .고령현감.모계(茅溪) 문위(文緯),
생원 신우익(愼友益) 이다
10세
배신침(裵愼침) 1499~1592
자(字)는 정숙(靜叔), 호(號)는 임당(林塘)으로 분성군(盆城君) 의 9세손이며
매헌공(梅軒公) 휘(諱) 륜(綸)의 아들이다.
1537년(중종 32)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여 성균진사(成均進士)가 되었다.
문장(文章)이 능(能)하고 행의(行誼)가 성실(誠實)하며 세인(世人)의 추앙(推仰)을 받았으며
옥계(玉溪) 노진(盧鎭), 덕계(德溪) 오건(吳健) 등과 더불어 도의(道義)와 성리학(性理學)을
강론(講論)하며 연마(硏磨)하였다.
1788년(정조 12)에 사림(士林)의 추천(推薦)으로 산청(山淸)의 평천서원(平川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위(配位) 강양이씨(江陽李氏) 이봉춘(李奉春)의 따님이고
계비(繼妃)는 여흥민씨(驪興閔氏) 참봉(參奉) 민희안(閔希顔)의 따님이다.
묘소(墓所)는 경남(慶南) 산청군 생초면 평촌리에 있다.
10세
배맹신(裵孟伸)
자(字)는 장숙(壯叔) 호(號)는 력봉(력峰) 분성군(盆城君) 의 9세손이며
만호 휘(諱) 경림(景霖)의 차남이다.
천성이 강직하고 기상이 장웅(壯雄)하며 재예총명하였다.
조부게서 정학(庭學)하고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문하에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장군과 동문수학하였다.
부친에게 무예를 익혔는데 그중 궁마술(弓馬術)에 뛰어났고 부친게서 말하기를 “이 아이는 장차 문무를 겸전할 큰인뭉이 될것이다” 하며 크게 칭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조총(鳥銃)을 난사하면서 파죽지세로 국토를 유린하자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공은 분기충전하여 세간리 마을 앞 현고정(懸鼓亭)에 18장수들과 함게 모여 창의를 맹세하고
북을 두드리며 “국난을 구출하자, 의병에 앞서자, 죽음을 맹세하자.” 하고 외쳤다.
정암진 전투 및 영산, 창녕전투에서 공은 항상 선봉장으로서 홍의장군 곽망우당을 도와 군졸을 지휘하며 왜적을 격멸하여 낙동강 유역을 완전히 제압하였다.
그러나 무수한 왜적의 난사 속에서 고군분투하다가 순절하였다. 공의 선봉장으로서 세운 혁혁한 전공과 국가를 위해 순절한 충절을 높이 산 조정에서는 1677년(숙종31)에 공에게 병조참의를 추증하였다.
의령 충익사(忠翼祠)에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공을 위시하여 영장(領將) 윤탁(尹鐸), 도총(都總) 박사제(朴思齊), 수병장(收兵將) 오운(吳水+雲), 수병장 이운장(李雲長), 선봉장(先鋒將) 심대승(沈大承),
독사장(督梭將) 정연(鄭演), 돌격장(突擊將) 권란(權鸞), 조군(調軍) 정질(鄭질), 전군(典軍) 허언침(許彦深), 전향(典餉) 노순(盧錞), 치병(治兵) 강언용(姜彦龍), 군기(軍器) 허자대(許子大),
기찰(譏察) 심기일(沈紀一), 복병(伏兵) 안기종(安起宗), 군관(軍官) 조사남(曺士男), 군관 주몽용(朱夢龍) 등 총 18명의 의병의 위패를 봉안하고 호국영령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11세
배영(裵渶) 자(字)는 심원(深源), 호(號)는 인재(忍齋)
분성군(盆城君) 10세손이며, 임천공(林泉公) 휘(諱) 학(鶴)의 차남(次男)이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손자인 박재(璞齋)김뉴(金紐)의 문인으로 타고난 성품(性品)이 순수(純粹)하고 가문(家門)의
전통(傳統)을 이어받아 언행(言行)이 아름답고 행동(行動)이 성실(成實)하였다.
시를 지어 자제에 이르기를
“남아직분(男兒職分)은 오직 충효(忠孝)이니 마땅히 이를 잊지 말아야 할 겄이다." 하였다.
이렇듯 자손(子孫)을 교훈(敎訓)함에는 반드시 충효(忠孝) 로서 가르쳤다.
창주(滄洲) 곽간(郭간), 판서(判書) 홍성민(洪聖民), 삼일당(三一堂) 신일(辛馹) 등과
더불어 서로 시를 주고 받으며 만년(晩年)을 전원(田園)에서 마쳤다.
아들의 대유의 귀(貴)로 인하여 이조(吏曹)판서(判書)를 증직(贈職)받고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추증(追贈)받았다.
배위는 영산신씨 辛駿의 따님이며 동지중추원사 신처강의 5세손이다.
사촌동서는 여응구(아들 감호 여대로)이다.
슬하에 대유(병조참지),대륜(종사랑) 을 두었다
11세
배원우(裵元佑)1584~1603(명종~선조)
자(字)는 자동(自東), 호(號)는 두곡(杜谷)으로 분성군(盆城君) 의 10세손이며
휘(諱) 필성(必聖)의 장남(長男)이다.타고난 모습이 빼어나게 아름다웠으며, 도량(度量)과 식견(識見)이 깊고 원대하여 수많은 성현들의 학문과 경전을 두루 섭렵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조카 응남(應男), 박경전(朴慶傳)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운문협(雲門陜)에 모여 맹세하고, 적과 접전 끝에 적을 소탕하고 향민(鄕民)을 보호(保護)하였다. 그 공으로 선무공신 3등에 녹훈(錄勳)되고, 훈련원정을 제수(除授)받았다.
경북(慶北) 하양군의 효양사(孝陽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경주김씨(慶州金氏)이며, 광택(光宅)의 따님이다.
아들 봉사(奉事) 의남(儀南)을 두었다.
11세
배원보(裵元寶) 1586~1606(명종~선조)
자(字)는 자형(自荊)으로 분성군(盆城君) 의 10세손이며
휘(諱) 필성(必聖)의 차남(次男)이다.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을 지냈다.
배위(配位)는 의인(宜人) 경주김씨(慶州金氏)이며, 광연(光淵)의 따님이다.
장남(長男) 이남(以南), 차남(次男) 훈련원정(訓練院正) 응남(應南) 등을 두었다.
11세
배철중(裵鐵重)
분성군(盆城君) 의 10세손이며, 통훈대부부호군(通訓大夫副護軍) 휘 형효(亨孝)의 아들이다.
공은 무과에 급제하여 사과(司果)를 지내고 이어 주부(主簿), 선전관(宣傳官) 등을 거쳐 관직이 통정대부아산현감홍천영장(通政大夫牙山縣監兼洪川營將)에 이르렀다.
공은 모친의 병환이 깊어지자 비록 공무(公務)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소 아침저녁으로 약을 만들어 봉양하였다.
그러나 모친의 병이 더욱 깊어지자 공은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어머니의 입에 넣어드려 결국 깨어나게 하였다.
공은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고양(高陽)으로 돌아와 어머님을 극진히 봉양하였다.1623년(인조1)에 정려(旌閭)가 내렸으며, 공의 행적이 고양지(高陽誌)와 삼강록(三綱錄)에 실려있다.
배위 숙부인(淑夫人) 중화양씨(中和楊氏), 계비 숙부인 문화유씨(文化柳氏)이고,슬하에 장남 종(宗:通德郞), 차남 윤(胤) 등을 두었다.
11세
배수겸(裵壽謙) 1523∼1593 (중종∼선조)
자(字)는 천익(天益), 호(號)는 양촌(陽村) 분성군(盆城君)의 10세손이며
임당공(林塘公) 휘(諱) 신침(愼沈)의 장남이다.
공은 만년에 아우 종수(宗壽), 담수(聃壽), 기수(祺壽) 등과 함께 산청 고계(古溪)로 이거하여 양친을 정성껏 봉양하였고,
형제들과 돈목하며 도의로써 교우하였다. 이와 같은 공의 행실은 세상에 두루 모범이 되었고, 이로 인해 사림의 추중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온 나라안이 병화로 어지러운 와중에도 부모 봉양하기를 더욱 극진히 하였다.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공은 아들 의중(義重)과 조카 무중(武重)을 독려하여 뜻을 펼치게 하였으니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창의하였다.
그해 12월 부친상을 당하여 애훼가 지나쳐 병이 되었다.
마침내 임종에 임박(臨迫)하여 자손들에게 훈계하여 말하기를 “나이 70이 넘어 죽으니 무슨 한이로다.
어가가 파천해 있으니 내가 죽은 뒤에 받드시 장례를 간소히 할 것이며 있는 힘을 다해 왜적을 섬멸하여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묘(墓) 경남 산청군 생초면 하촌리에 있다.
배(配) 창녕성씨(昌寧成氏) 성한섬(成漢贍)의 따님이다.
11세
배기수(裵祺壽) 1532∼1619 (중종∼광해)
자(字)는 진익(晋益)이고 호(號)는 대황재(大惶齋), 분성군(盆城君)의 10세손이며
임당공(林塘公) 휘(諱) 신침(愼沈)의 아들이다.
젊어서 뜻을 세우지 못하여 그 행실(行實)이 방종하였으나
만년(晩年)에 남명(南溟) 조식(曺植) 선생(先生)과 덕계(德溪) 오건(吳健) 선생(先生)을 만나 크게 뉘우친 바가 있어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硏究)하여 명성(名聲)이 높았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백형(伯兄)의 아들 의중(義重)과 중형(仲兄)의 아들 무중(武重)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왜적(倭賊)과 싸웠다.
1605년(선조38)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제수(除授)받았다.
묘(墓) 경남(慶南)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있다.
배(配) 숙인(淑人) 진양하씨(晉陽河氏) 하기용(河起龍)의 따님이다.
11세
배세겸(裵世謙) 1540∼1632 (중종∼인조)
자(字)는 공익(公益) 호(號)는 심원재(心遠齋) 분성군(盆城君)의 10세손이며
임당공(林塘公) 휘(諱) 신침(愼沈)의 아들이다.
공은 학문이 높고 지조와 절개가 굳어 세인들의 추앙을 받았다.
권동산(權東山), 권석주(權石洲), 이석문(李石門), 오사호(吳思湖)등과 도의로써 사귀며 명애와 이익을 구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공(功)을 세우고 의금부도사(義禁莩事)에 임명(任命)되었다.
유고 2권이 전하며 평천사(平川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묘(墓) 경남 산청군 차황면 장위리에 있다.
배(配) 단인 무송윤씨(茂松尹氏) 판윤 윤호(尹灝)의 따님이다.
12세
배명원(裵明遠) 1542∼1593 (중종∼선조)
자(字)는 군회(君晦), 호(號)는 월정(月汀), 분성군(盆城君) 의 11세손이며
증(贈)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휘(諱) 덕수(德秀)의 장남(長男)이다.
공(公)은 천성(天性)이 강직(剛直)하고 의리(義理)가 깊어 조식(曺植) 문하(門下)에서 문장(文章)과 행의(行誼)가 탁이(卓異)하여 사우(士友)의 추앙(推仰)을 받았고,
월천(月川) 조목(趙穆), 수우(守愚) 최영경(崔永慶), 도촌(陶村) 조응인(曺應仁), 모헌(慕軒) 하혼(河渾) 등과 도의로써 교우하였다.
공은 벼슬이 통정대부 상주목사(尙州牧使)에 이르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아우 형원(亨遠)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상주(尙州) 진관병마절제사(鎭管兵馬節制使)가 되어 성(城)을 지키다가 군중(軍中)에서 순사(殉死)했다.
합천(陝川)의 명곡서원(明谷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묘(墓) 경남 합천군 야로면 정대리 2구에 있다.
배(配) 숙부인 진주하씨(晉州河氏) 참봉 하미수(河眉壽)의 따님이다.
12세
배형원(裵亨遠) 1552~1620(명종~광해)
자는 군길(君吉), 호는 정곡(汀谷)으로 분성군(盆城君) 의 11세손이며
증 통정대부 휘 덕수(德秀)의 아들이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순박하고 곧았으며 겸하여 뛰어나게 총명하였는데 어려서 이미 학문에 뜻을 두고 정진하니
일찍이 그 성취를 보았다. 백씨 명원(明遠)을 따라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반궁체험과 지경실행으로서의 학문을 가르침받았다.
또한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곁에서 모시면서 월천(月川) 조목(趙穆),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등과 함께 학문을 강마하였으며 의로써 교우하면서 시를 지어 돌리기도 했다.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공은 백씨 명원(明遠)과 더불어 뜻을 같이하는 도촌(陶村) 조응인(曺應仁), 용담(龍潭) 박이장(朴而章), 모헌(暮軒) 하혼(河渾) 선생등과 함께 상소하여 신원을 호소하였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여러 제현들과 분연히 떨치고 일어서 창의하여 초유사 학봉(鶴峰) 김성일(金成一)의 막하에 합류했다.
거창 우현(牛峴)에서 적을 맞아 몸을 사리지 않고 분전하였는데 불행히도 백씨의 상을 당하여 난중임에도 불구하고 예에 어긋남이 없이 반장하였다.
난이 평정된 후에도 그 공을 내세우는 일없이 은거하였는데 독행으로 천거하여 선교랑 김해교수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구원(丘園)에서 소요하며 수신하고 후진을 육성하는데 전념하여 사림의 추중을 받았다.
호조정랑에 증직되었으며 명곡서원(明谷書院)에 배향되었다.
묘(墓) 경남 합천군 야로면 덕암리 지문동에 있다.
12세
배응경(裵應慶) 자(字)는 응보(應甫), 호(號)는 망곡(茫谷)
분성군(盆城君) 의 11세손이며 사선서(司膳署) 직장(直長) 휘 담(湛)의 장남(長男)이다.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고 은거(隱居)하여 오로지 위기지학( 爲己之學:자기 자신의 본질을 밝히기 위한 학문 )에 전념하였다. 또한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부모(父母)의 병환(病患)이 위중하자 단지 하여 풍속(風俗)을 교화하는데 모범(模範)이 되었다.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가 공(公)의 효행(孝行)을 바탕으로 시(詩)를 지었으며 공이 돌아가시자
만사를 지어 애도하였다.
배위(配位) 벽진이씨(碧珍李氏)는 천상(天祥)의 따님이고 슬하에 장남(長男) 증(贈)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工曹)참의 영옥(英玉) 등 1남 2녀를 두었다.
묘소(墓所)는 경남(慶南) 함안군 대산면 장안리 입사동에 있다.
12세
배응철(裵應哲)자(字)는 철보(哲甫), 호(號)는 유곡(柳谷)
분성군(盆城君) 의 11세손이며 사선서(司膳署) 직장(直長) 휘(諱) 담(湛)의 아들이다.
성품이 온후하고 덕스러웠으며 독실한 행으로 사림의 추증받았으며
공이 돌아가시자 간송 조임도가 만사와 제문을 지어 애도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장예원 판결사(判決事)에 증직(贈職)되었다.
배위(配位) 숙부인(淑夫人) 무송윤씨(茂松尹氏)는 경한(景漢)의 따님이고
슬하에 외아들 통덕랑(通德郞) 양옥(良玉)을 두었다.
묘소(墓所)는 경남(慶南) 함안군 칠원면 장암리에 있다.
12세
배경남(裵慶南) 1548∼?
자(字)는 문길(門吉)로 분성군(盆城君) 의 11세손이며
이조참의 휘 세원(世元)의 아들이다.
1572년(선조 5)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순창 군수(淳昌郡守)를 거쳐 단주 부사(端州府使)를 역임하였다.
묘(墓) 전남 강진군 군동면 평덕리에 있다.
배(配)위는 숙부인(淑夫人) 창녕조씨(昌寧曺氏) 진사(進士) 조간세(趙幹世)의 따님이며
후배(配)는 숙부인(淑夫人) 원주이씨(原州李氏) 진사(進士) 원숙기(元淑氣)의 따님이다.
아들은 희천군수(熙川郡守) 종립(宗立) 이다.
12세
배경신(裵慶信) 1540∼1601 (중종∼선조).의성비안입향조(義城比安入鄕祖)
자(字) 성오(性五) 호(號)는 회당(晦堂)으로 분성군(盆城君) 의 11세손이며
휘(諱) 세정(世貞)의 차남(次男)이다.
문소교수(聞韶敎授)를 역임하였으며 강진(康津)에서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雙溪里)로
이거(移居)하여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配) 청풍김씨(淸風金氏) 김기남(金起南)의 여(女)
묘(墓) 경북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개소산에 있다.
12세
배경운(裵慶運) 1556∼1608 (명종∼선조).의성 봉양입향조
자(字) 대유(大宥) 호(號)는 소은(韶隱)으로 분성군(盆城君) 의 11세손이며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漢城)판윤(判尹) 세언(世彦)의 아들이다.
의성봉양입향조(義城鳳陽入鄕祖)
선조조에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천거(薦擧)되고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품계(品階)가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에 금군호위장(禁軍護衛將)을 제수(除授)받아 많은 공(功)을 세웠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묘소는 경북(慶北) 의성군 봉양면 곡현리에 있다
12세
배서온(裵敍溫) 1563∼? (명종∼?)
자(字)는 화중(和仲) 호(號)는 엄송당(掩松堂), 분성군(盆城君)의 11세손이며
휘(諱) 도수(道秀)의 아들이다.
재능이 탁월하고 행실이 돈독했다. 일찍히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경서에 깊이 통달했다.
1584년(선조 17) 사마시에 올랐으며 1590년(선조 23)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상리를 하던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왜적들로 인해 장인 교수(敎授) 류휘춘(柳輝春)이 순절하고 공은 사로잡혔다. 이에 공이 태연히 예의를 지켜 장인의 장패(將牌)를 모시니
왜적이 공과 부인 류씨(柳氏)를 일컬어 의사요 절부라 하였다. 왜적에게 사로잡힌 공은 곧 왜국으로 이송되었는데 나라를 걱정하는 일편단심으로 바다 건너 절을 올리기를 한결같이 하였으며 한시도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이에 감복한 적이 9년 만인 1600년(선조 33) 공을 돌려보냈는데 돌아와서는 임천에서 소요하며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조에 공의 위국충절이 조정에 알려져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되었고 논과 밭을 하사 받았다.
묘(墓) 전북 정읍시 신태인읍 신태인6리에 있다.
배(配) 경경부인 흥양유씨(興陽柳氏) 교수 류휘춘(柳輝春)의 여(女).
12세
배계신(裵繼信) ?∼1637
분성군(盆城君) 의 11세손이며
내자시(內資寺) 직강(直講) 몽필(夢弼)의 장남(長男)이다.
도량이 넓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지용(智勇)이 탁이(卓異)하였다.
또한 선현(先賢)들의 의로운 행실(行實)을 되새기며 항상(恒常) 사생취의(捨生取義)할 뜻을 가슴에 품고 수신(修身)하였다.
1624년(인조 14)에 청(淸)나라 오랑캐가 대거 침임하여 임금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란(避亂)을 갔다.
이 소식을 듣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공(公)은 "진실(眞實)로 국가(國家)의 존망(存亡)이 절박한 지경에 이르렀도다 " 라고 하고는 창의(倡義)하여 관찰사(觀察使) 정세규(鄭世規)의 진(陳)에 합류하였다.
그때 병사(兵使) 이의배(李義培)가 겁을 먹고 죽산산성(竹山山城)에 들어가서 몸을 움추리고는 나오지 않았다.
이에 정세규와 더불어 그 비겁함을 꾸짖고는 앞장서서 적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격전(激戰)이 벌어져 적이 높은 봉우리에서부터 압박해 내려오며 공격(攻擊)해 왔기에 분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공(公)과 김홍익(金弘翼), 이경선(李慶善), 이상재(李尙載), 최진립(崔震立) 등 제현(諸賢)을 비롯하여 일군(一軍)이 모두 전사(戰死)하고 말았다. 이듬해 정월(正月) 공(公)의 장남(長男) 근익(謹益)이 그소식을 듣고 공(公)의 시신(屍身)을 수습코자 하였으나 시신(屍身)을 찾을 길이 없어 공(公)의 의복(衣服)과 신으로 대신 초혼(招魂)하여 귀장(歸葬)하였다.
이와 같은 의로운 행실(行實)이 조정(朝廷)에 알려져 특별히 조봉대부(朝奉大夫) 군자감(軍資監) 첨정(僉正)에 증직(贈職)되고 1834(순조 34) 다시 훈련원(訓練院) 부정(副正)에 증직(贈職)되었으며 공(公)의 사적이 "조야회통(朝野會通)"에 수록되었고 삼강록에 등재되었는데 판서(判書) 송도순(宋道淳)이 묘갈명(墓碣銘)을 찬(撰)하고 문집(文集)으로 부정공실기(副正公實記)가 있다.
묘소는 충남(忠南) 논산시 가야곡면 두월리 호곡에 있다.
12세
배대륜(裵大綸) 1569∼1629 (선조∼인조)
자(字)는 자성(子誠)이고 분성군(盆城君) 의 11세손이며
증 이조판서 휘(諱) 영(渶)의 차남이다.
품계가 종사랑에 이르렀으며 1592(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모정(慕亭) 대유(大維)와 함께 창의하여 창녕 화왕산성에서 적을 방어하였다.
묘(墓) 경남 창녕군 계성면 관동리 천진
묘비의 글씨는 5세손 배진도(裵晋度)가 썼다.
숭정(崇禎) 기원(紀元) 정축(丁丑) 후(後) 103년 무진(戊辰) 10월
배(配) 흥해최씨(興海崔氏) 습독 최원립(崔元立)의 여(女).
12세
배응남(裵應男)1575~1613(선조~광해)
자(字)는 인수(仁수), 호(號)는 운계(雲溪)로 분성군(盆城君) 의 11세손이며
전적(典籍) 휘(諱) 원보(元寶)의 차남(次男)이다.
어려서부터 영특(英特)하였고, 성장(成長)하면서 외모가 준수하고 성격이 쾌할하여 대장부로서의 풍도(風圖)가 있으므로 공(公)의 숙부(叔父) 휘 원우(元佑)가 그 기량을 중시하여 군신(君臣)부자(父子)의 윤리(倫理)와 오위진결의 병법(兵法)을 공부하게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사(義士) 박경전(朴慶傳) 등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왜적(倭賊)과 접전 끝에 이를 소탕(掃蕩)하여 향민(鄕民)을 보호하였다. 선무원종2등공신에 녹훈(錄勳)되고, 숙부(叔父) 휘(諱) 원우와 함께 하양(河陽)의 효양서원(孝陽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위(配位)는 숙부(叔父)인 안동권씨(安東權氏)이며, 언상(彦尙)의 따님이다.
아들 경민(景敏)을 두었다.묘소(墓所)는 함박등에 있다.
12세
배무중(裵武重) 1574∼1626 (선조∼인조)
자(字)는 성언(聖彦), 호(號)는 용암(龍岩), 분성군(盆城君) 의 11세손이며
휘(諱) 담수(聃秀)의 아들이다.
공(公)은 어려서부터 지조와 절개가 굳었으며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않고 기개와 도량이 고매하여 경사를 널리 섭렵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대장부 세상에 태어나 때를 만나면 나라를 잘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임천에 은거하여 유유자적할 것이다.” 하였다.
공은 부모를 섬김에 지극정성으로 하였고 11세 때 부친상을 당해서는 나이답지 않게 장례 절차를 예제에 맞게 하여 주위애서 지극한 효성을 칭찬하였다.
1592년(선조25) 5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구가 쳐들어오니 공이 19세의 젊은 나이로 종형 경은공(鏡隱公) 의중(義重)과 종부 대황재(大惶齋) 휘 기수(祺壽)와 더불어 의병을 일어켰으며
전라장수 임성춘(林聖春), 박인량(朴仁良)과 합세하여 7월에 왜구를 함양 국계촌(菊溪村)에서 불시에 공격하여 적을 무찔렀다.
이로 인하여 수많은 왜적이 죽었으며, 그곳의 이름이 혈계촌(血溪村)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듬해 봄에 종형이 적이 쏜 화살에 맞아 독기가 퍼지니 공이 흉부를 빨아 독을 제거함으로써 완쾌시켰고 가을에 모친상을 당하니 애통함이 더욱 심하였다.
다시 1597년(선조30) 정유재란에 종부, 종형을 모시고 전라병장(全羅兵將) 조경남(趙慶男)과 사촌(蛇村)에서 군세를 합쳐 불을질러 왜적을 공격하니 왜적은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그해 8월 왜적이 안의(安義) 황석산성(黃石山城)에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 갔으나 곽월(郭越), 조종도(趙宗道), 정언남(鄭彦男) 등의 뛰어난 장수들이 이미 순절한 뒤였다.
공이 애통해하며 이르기를 “나라의 운명이 어찌 이러한가?” 하였다. 공은 난리 동안에 수많은 왜적을 베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난이 평정된후 종부, 종형과 더불어 영달을 구하지 않고 은거하니 사람들이 “삼은(三隱)”이라 하였고 유림에서 여러번 천거하여 벼슬하기를 권하였는데 공이 굳이 사양하며 “인간 만사가 분수에 맞아야 하니 어찌 부명(浮名: 실속 없는 헛된 명성)을 탐하여 급급해 하겠는가” 하였다.
공의 후손들과 유림들이 삼은동(三隱洞) 삼현(三賢:즉 공과 공의종형, 그리고 종부를 이름)의 공적을 기리고 추모하여 경남 산청군 생초면 상촌리 신기에 원모정(遠慕亭)을 짓고 비석을 세웠다.
묘(墓) 경남 합천군 야로면 정대리 2구에 있다.
13세
배홍우(裵弘祐) 1580~1627(선조~인조)
자는 수보(綏甫), 호는 양지재(養志齋)로 분성군(盆城君) 의 12세손 이며
병조참지공(兵曹參知) 모정공 휘 대유(大維)의 장남이다.
나면서부터 특이한 재질이 있어 태어나지 한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사람의 얼굴을 분별하여
다른 어미가 젖을 주면 울면서 먹지 않았다.
사람들과 어울릴 때에는 말이 적었고 침착하여 생각이 있는 것 같았으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일곱 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곡하며 애통해함이 어른들과 같았다.
부친은 공이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였음을 가엾게 여겨 교육을 독려하지 않았으나
여덟 살에 글을 깨우치게 하고자 사략을 가르쳤더니 책을 한번도 채 읽기 전에 문리가 크게 터지므로
외삼촌인 진사공 할 이 기특하게 여기고 말하기를 “이 아이는 진실로 우리 집안에서 반드시 대성할 인물이다.”라고 하였다.
열세살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친은 의병을 이끌고 진영으로 달려가니 공은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를 따라서 난리를 피해 떠돌아 다녔다. 난리가 평정되고 고향에 돌아가서는 시서를 읽고 쓰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1604년(선조 37)에 향시에 합격하였다. 이해 가을에 숙부께서 병이 위중하고 종제 홍지(弘祉)도 모두 어렸기에 공이 잠시도 그 옆을 떠나지 않으면서 석달 동안 시탕함이 지극히 정성스러워 게을리하지 않더니 병이 나은 후에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다.
공은 언제나 스스로 탄식하여 말하기를
“사람들은 모두 어버이에게 효도하건만 나는 유독 무슨 죄가 있어서 일찍이 자모를 여의고 아버지께서는 천리 밖에 계셔 또한 오래 모시기가 어려우니 생각하건대 어찌 자식의 직분을 다하겠는가?”고 했으며 숙부모 모시기를 부모같이 했다.
다음해 숙부가 다시 병이 생기자 공은 옷과 띠를 풀지 않고 넉달 동안을 하루같이 하였으나 낫지 못하자 통곡하며 기절하였다.
초상과 장례를 한결같이 가례에 의하고 크고 작은 범절에 있어서도 몸소 마련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국담(菊潭) 박수춘(朴壽春)과 죽암(竹庵) 허경윤(許景胤) 등과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창건하여 송계(松溪) 신계성(申季成) 선생을 봉안하였다.
일찍이 손수 초당(草堂)을 지어 편액하여 양지재(養志齋)라 하고
그 벽에다 새겨 이르기를 “이곳에서 밥도 먹고 이곳에서 죽도 먹고 시와 술도 이곳에서 하고 여기서 노래하고 여기서 웃고 여기서 앉고 누우며 사람에게서 구하지 아니하고 남을 두려워하지 아니한다면 어찌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있으랴?”하였다.
이 해에 내시교관을 제수했는데 부임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공에게 벼슬에 나가기를 권하니 공이 대답하지 않고 시로써 뜻을 보여 이르기를 “초조한 것은 인간의 일이요 총총한 것은 세상사람일세. 어찌 내 몸을 고단케 하리.”라고 하였다.
부친의 명으로 과거를 보아 1618(광해 10)에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고 뒤에 백운서원(白雲書院)을 배알했다. 1621년(광해 21) 봄에 세자 시강원의 설서를 제수하고 겨울에는 승문원의 부정자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출사하지 않는 이유를 물으면 대답하여 말하기를
“군인에도 오히려 세 사람의 장정이 있으면 한사람은 면제되는 법이 있는데 더욱 우리 부자 세 사람이 모두 집을 버리고 출사에 종사한다면
제사를 받들 사람이 없게 되며 또 한집안이 지나치게 병행함이란 크게 두려운 일이다.” 하고 그후로부터 뜻과 기개를 더욱 겸손하게 하여 세상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1623년 인조가 반정을 하고 부친은 본직으로써 명을 받들어 대비의 행차를 호송하여 환궁하니 부친에게 직명이 내렸으나 그해 가을 관직을 내놓고 고향에 돌아왔다.
이때부터 잠시도 부친의 옆을 떠나지 아니하고 닭이 울면 침실을 방문하고 밤늦게 물러나며 일이 있으면 직접 일을 하여 마치 종이 하듯 하였다.
언제나 고기를 강에서 낚아 생선을 어버이 앞에 바치니 모두가 살아 뛰었는데 어버이는 심히 이것을 즐거워하였다.
이 해 겨울에 사헌부 감찰을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25년에는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의 신도비명를 썼다.
1627년(인조 5)에 오랑캐가 서도를 침범하여 대가(大駕) 강도(江都)로 좌천할 때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이 호소사가 되어 공을 불러 의병장을 삼았는데
바로 공이 읍에 들어가 병사를 모집하여 병단(兵團) 할 즈음에 문득 병이 들어 이틀 만에 병사 하였다.
묘(墓) 경남 창녕군 영산면 염포리 광지에 있다.
13세
배홍록(裵弘祿) 1586~1643(선조~인조)
자는 응보(膺甫)로 분성군(盆城君) 의 12세손이며
병조참지 모정공(慕亭公) 휘 대유(大維)의 차남이다.
1612년(광해 4) 무과에 급제하여 1615년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사정,
1618년에는 통정대부 행 웅천현감, 1620년에는 이천 도호부사 겸 병마첨절제사,충무위 부사용을 역임하였다.
당대 제현들과 시서로 교류하였으며 특히 간송당(澗松堂) 조임도(趙任道)선생과는 그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공께서 일찍이 이천부사 재직시 멀리 고향에 있는 간송당(澗松堂) 선생께 술을 보내어 위로함에 선생께서 詩로 화답하기를
故人情重記貧交. : 고인은 정이 두터워 가난할 때 사귄 친구를 기억하여
遠送春? 慰寂寥. : 멀리 봄에 빚은 막걸리 보내어 적막함을 위로하네.
一酌陶然忘世事. : 술 한잔에 흠씬 취하여 세상사 잊었는데
落花飛散雨蕭蕭. : 낙화는 흩날리고 비는 우수 나리네
하였으며 공께서 돌아 가시자 간송당(澗松堂)선생께서 다음과 같은 애도의 만시를 지어 그 슬픈 심정을 표현하였다.
干城之具勇兼人.: 훌륭한 장수로서 여러 사람을 당할 용맹을 가졌는데
再佩銅章心豈伸.: 두번이나 구리인장을 차고 고을원이 되었으나 품은 마음을 어찌 다 펼쳤을까?
樂在邱園安性命.: 즐거움은 시골 동산에서 성명을 온전히 가지는 것.
夢驚槐蟻謝風塵.: 괴화나무 밑에서 꾼 헛된 영화의 꿈 놀라깬뒤 풍진 세상을 멀리 했지.
公能許我交情厚.: 공은 나에게 친구로서 사귀는 정을 두텁게 허락해 주었고,
我亦多公族分親.: 나도 공과 친족의 분수를 가지고 매우 친하였네.
虀露悲歌那忍聽.: 서릿발 찬이슬에 슬픈 노래 어찌 참아 듣겠나.
曉星殘月涕沾巾.: 새벽별 세잔한 달빛에 눈물이 수건을 적시네.
묘(墓)소는 경남 함안군 대사면 평림리 월포 중독산에 있다.
배(配)위는 숙부인 영산신씨(靈山辛氏) 판관 신박(辛石+薄)의 여(女).이시고
또 배(配)위는 숙부인 의령남씨(宜寧南氏) 선전관 남홍술(南弘述)의 여(女).이시다.
슬하에 3남 3여를 두었다
13세
배홍지(裵弘祉) 1598~1633(선조~현종)
자는 수보(受甫)이고 분성군(盆城君) 의 12세손이며
종사랑 휘 대륜(大倫)의 장남이다.
공은 여덟살에 아버지를 잃고 뒤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우 동지중추부사 홍례(弘禮)와 함께 여막을 짓고
삼년간 시묘살이를 하면서 죽만 먹으며 지내니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가 만장에서 말하기를
“여막에서 지내면서 슬퍼하고 정성스럽게 섬기기를 다하였고 온화한 기색은 널리 퍼져 당시의 풍속을 고치었네.
세상의 모든 아들들이 아들의 도를 다하게 되었으니 공을 위하여 길이 통곡하고 또 길이 슬퍼하네.”하였다.
공의 유고는 ‘모정집(慕亭集)’에 실려있다.
묘(墓)는 광지산 소곡에 있다.
13세
배운상(裵雲祥)
자(字)는 경서(慶瑞), 호(號)는 모렴(慕廉)으로 분성군(盆城君)의 12세손이며, 휘(諱) 척(滌)의 아들이다.
공(公)은 천성이 지극(至極)히 효성(孝誠)스러워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였을 때 여막(廬幕)을 짓고 거친 베옷을 입은채로 삼년(三年)간 시묘(侍墓)하였으며, 모친(母親)이 병환이 깊을 때는 변을 맛보아 그 증세를 파악하였다. 공의 이러한 효성(孝誠)은 이웃에게까지 알려져 인근(隣近) 마을 사람들이 모두 칭찬(稱讚)하였다. 공(公)은 성균관(成均館)진사(進士)를 지냈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工曹)참판(參判)을 증직(贈職)받았다.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김해김씨(金海金氏)이며, 기준(奇俊)의 따님이다.
장남(長男) 격언(格言), 차남(次男) 민언(敏言) 등을 두었다.
13세
배양옥(裵良玉) 1622~1694(광해~숙종)
자(字)는 기지(器之), 호(號)는 사오당(四吾堂)으로 분성군(盆城君)의 12세손이며,
유곡공(柳谷公) 휘 응철(應哲)의 아들이다. 공(公)음 품계(品階)가 통덕랑(通德郞)이었으나 일찍이 과업(科業)에 뜻을 버리고 장암(藏岩) 수석동(水石洞)에 정자(亭子)를 짓고 성리학(性理學)을 깊게 연구(硏究)하였다. 또한 당우삼대(唐虞三代)의 정치와 교육에 관한 저술을 하고 성현들의 학문을 연구하여 유학(儒學)의 핵심이 되는 부분을 밝혀냈다. 미수(眉수) 허목(許穆) 선생(先生)이 공(公)을 찾아와 수석기를 지었으며, 또한 선생이 재상(宰相)이 되었을 때 공(公)을 한양(漢陽)으로 초청(招請)하였다.
배위(配位)는 공인(恭人) 밀성박씨(密城朴氏)이며, 승개(承凱)의 따님이다.
장남(長男) 수(수), 차남(次男) 만(晩), 삼남(三男) 현(晛) 등 3남 1녀를 두었다.
묘소(墓所)는 경남(慶南) 함안군 칠원면 장암리에 있다.
14세
배욱(裵旭)1593~?(선조~?)자(字)는 숙승(叔昇)
분성군(盆城君) 의 13세손이며, 휘(諱) 학로(學魯)의 아들이다.
천품이 영오하였으며 도량(度量)이 넓고 깊었다. 또한 문사가 출중(出衆)하여 명성(名聲)이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事實)이 ‘울산읍지’에 실려있다.
배위(配位)는 파평윤씨(坡平尹氏)는 군수(郡守) 홍명(弘鳴)의 따님이고
슬하에 장남(長男) 두첨(斗瞻), 차남(次男) 선전관(宣傳官) 두원(斗元),
삼남(三男) 두수(斗壽), 사남(四男) 훈련원(訓練院) 판관(判官) 두추(斗樞), 오남 두천(斗千) 등 5남을 두었다.
묘소(墓所)는 울산시 울주군 연양읍 반연리 토곡이 있다.
*욱(旭)공의 생부는 경립(敬立)이며,계당공(맹후)의 장자 세강의 현손이다,
학로공은 계당공(맹후)의 3남이신 울산입향조 찰방공 세륜의 현손으로 슬하에 아들이 없어 같은 항렬 즉 고조부 세륜의
백씨인 세강(백고조부)의 현손인 경립의 아들 욱을 양자로 입적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있다.)
14세
배명윤(裵命胤)
자(字)는 덕승(德承), 호(號)는 삼외당(三畏堂), 분성군(盆城君) 의 13세손이며
선무랑(宣務郞) 휘(諱) 홍지(弘祉)의 아들이다. 공(公)은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어릴때부터 닭이 울면 일어나 부모(父母)의 침소에 나아가 살피고 물러나면 독서(讀書)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말을 빨리 하거나 당황없는 기색을 좀처럼 보이지 않아 모두가 존경(尊敬)하였다. 공(公)의 부친(父親)이 병환(病患)으로 누위계실 때 공은 밤낮으로 봉양(奉養)하여 정성(精誠)을 다했고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자 장례(葬禮)를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를 좇아 하였다. 다시 모친(母親)의 상을 당하니 고의 부친상 때와 마찬가지로 한결같이 죽을 먹으며 예를 다하였다. 이런 공(公)의 모습을 보고 선비들이 조정(朝廷)에 천거(薦擧)하여 공조(工曹)좌랑(佐郞)을 제수(除授)받았다.
묘소는 영산 천진석탑
配位는 공인(恭人) 현풍곽씨(玄風郭氏) 계공랑(啓功郞) 곽재기(郭再琪)의 여(女)
14세
배세중(裵世重) 1673∼1730 (현종∼영조)
자(字)는 통언(通彦), 분성군(盆城君) 의 13세손이며 휘(諱) 경민(景敏)의 아들이다.
공(公)은 어려서부터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였는데 겨우 12세의 나이로 부친(父親)의 상(喪)을 당하여 애통(哀痛)해함이 어른과도 같아으며 홀로 남은 모친(母親)을 섬기는 일에 성의(誠意)를 다하였다. 모친이 설사병에 걸리자 공이 몸소 그 변을 맛보며 병의 차도를 살폈으며 이부자리의 오물을 종에게 맡기지 않고 공이 직접 거두어 청결(淸潔)히 하였다. 공의 형제(兄弟)들이 모두 효우(孝友)로 칭송(稱頌)을 받았으나 그 중에서도 공과 아우 세두(世斗)의 효성이 특별하였다. 형제들이 힘을 모아 별당(別堂)을 지어 모친의 거처(居處)를 더욱 편케 하였으며 새벽이면 다같이 문안드리고 밤에는 네형제가 침소(寢所)에 앉아 모친의 기후를 살폈다. 형제간에 우애(友愛) 또한 각별하여 분가하라는 모친의 분부를 받들어 분가하였으나 농사(農事)를 지어 얻은 소출(所出)을 균등(均等)하게 나누어 거두었다. 모친상을 당해 서는 조석(朝夕)으로 성묘(省墓)하기를 한결갇이 하여 산골짜기에 길이 새로 생겼다. 이와 같이 지극(至極)한 효행으로 말미암아 영조조에 정려(旌閭)가 내렸으며 아우 세두(世斗)는 호조(戶曹)좌랑(佐郞)에 증직(贈職)되었고, 공을 비롯한 형제들의 효행(孝行)이 “충효록”에 기재되어 있고,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이 정려(旌閭) 중수기(重修記)를 찬(撰)했다.
경북(慶北) 청도군 하양읍 동당산
배(配) 연일정씨(延日鄭氏) 정세인(鄭世仁)의 여(女).
14세
배세두(裵世斗) 1682∼1750 (숙종∼영조)
자(字)는 국언(國彦) 분성군(盆城君) 의 13세손이며,운계(雲溪)공 휘(諱)응남(應男 )의 孫이다.
공(公)은 형(兄) 세중(世重)과 함께 효우(孝友)가 돈독(敦篤)하여
조정(朝廷)에서 호조(戶曹)좌랑(佐郞)을 추증(追贈)하고 정려(旌閭)를 내렸다.
배위는 공인(恭人) 경주이씨(慶州李氏) 이호신(李好信)의 여(女).
14세
배순국(裵順國)
호(號)는 호정(湖亭), 분성군(盆城君) 의 13세손이며
증(贈) 통정대부(通政大夫) 휘(諱) 응심(應心)의 아들이다. 공(公)은 가문(家門)의 성품(性稟)이 강직(剛直)해서 사람과 사물을 의논(議論)함에 조금도 숨기는 일이 없었다. 부모(父母)를 섬기되 혼정신성(昏定晨省)을 게을리하지 않고 부모님께 병환(病患)이 있으면 밤마다 하늘에 기도하는 등 온갖 정성(精誠)을 다 쏟았다. 형제(兄弟)간에 우애(友愛)가 독실(篤實)하여 베개와 이불을 같이 하였으며 책상을 이어 대고 서로 마주 앉아 화음을 맞추니 그 소리가 고을 구석구석에 퍼져 나갔으며 끊어진 적이 없었다. 전원(田園)에다 조그만한 정자(亭子)를 짓고 고을 선비들과 흉금(胸襟)을 같이 하여 읊고 취하며 같이 놀고 깨어도 같이 읊어 석양(夕陽)이 지나면 달을 맞이하여 즐기기를 평생(平生)동안 하였다. 효종조에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工曹)참의(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묘(墓) 경남 밀양시 무안면 동산리 있고, 공을 모시는 재실이 있다.
배(配) 숙부인 고성이씨(固城李氏) 이시성(李時星)의 여(女).
14세
배덕민(裵德民)
자(字)는 덕생(德生), 호(號)는 눌장(눌莊)으로 분성군(盆城君) 의 13세손이며
휘(諱) 지상(智祥)의 아들이다.
공(公)은 품행(品行)이 단정(端整)하고 청순(淸純)하였으며 서예(書藝)에 능숙(能熟)하여 뭇사람들의 모범(冒犯)이 되었다.
또한 효성(孝誠)이 지극(地極)하였는데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부친(父親)이 병환(病患)으로 거동(擧動)이 불편하자 부친(父親)을 업고 산중(山中)에 은거(隱居)하였다
산중에서도 병든 부친을 공양함에 있어서 정성을 다하여 평상시(平常時)와 같이 하였다.
그러나 왜적(倭敵)이 갑자기 부친이 있는 곳에 나타나 위협하며 굴복(屈伏)을 강용하였는데 오히려 부친이 꾸짖어 “나는 오직 우리나라의 신하(臣下)요 백성(百姓)이거늘 어찌 너희 개돼지와도 같은 무리들을 섬길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적이 칼을 들어 부친을 해치려 하렸는데 그때 마침 숲속 깊숙이 나무하러 갔던 공이 돌아와 그 광경을 목격하였다.
공을 크게 통곡(痛哭)하며 달라와 적을 주먹으로 쳐 밀치고는 자신(自身)의 몸으로 부친의 몸을 감싸고 적의 칼과 창으로부터 부친을 보호(保護)하려하였다.
그러나 불행(不幸)히도 공과 부친이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적들이 물러가며 말하기를 “아버지는 능히 당대(當代)의 충신(忠臣)이라 할것이고 아들은 능히 당대의 효자(孝子)라 할것이니 진실(眞實)로 동방의 충효(忠孝)예의(禮義)의 귀감이다.” 하고 표석(表石)을 세웠다.
공(公)의 이와같은 지극한 효행(孝行)이 조정(朝廷)에 알려져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조봉대부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贈職)되었다.
15세
배일장(裵一長) 1613~1677(광해~숙종)
자(字)는 자첨(子詹), 호(號)는 계헌(戒軒)으로 분성군(盆城君) 의 14세손이며
생원(生員)진사(進士) 휘(諱) 역(日+易)의 장남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유달리 슬기로워 나이 겨우 하나 둘을 셀 시기에 글자를 쓰고 글도 잘 역었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애훼(哀毁)함이 어른과 같았고 상중(喪中)에 예(禮)를 읽어 하나에서부터 예에 따라 처리하였다. 또 경학(經學)에 독실한 뜻을 두어 마침내 순실한 선비가 되었으며 근칙(謹飭)으로 몸가짐을 하여 언행을 극히 조심하였다. 병자년(丙子年1636년 인조14) 이후에는 과거를 보지 않았으며 헐벗고 굶주림에 관심을 두지않고 오로지 성리서(性理書) 로써 일상의 생활을 삼았다.
현종3년(1662)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이 영남에 왔을때 진주선비 하홍도(河弘度)에게 도내의 선비중 등용할자를 물으니
박만(朴曼) 전 현감 권극경(權克敬)전 감찰 이덕구(李德耈)등과 함께 천거되었으며 다시
숙종 3년(1677) 좌의정 권대운(權大運) 에의해 정시한(丁時翰)·권흠(權歆)·홍세형(洪世亨)·이현일(李玄逸)·정석교(鄭錫僑)·조현기(趙顯期)·정동익(鄭東益)·윤추(尹推)등과 함께천거돼어 조용(調用)을 윤허받아
재랑(齋郞)을 제수하자 나가지 않고 이르기를. "본디 재덕(才德)도 없고 또 양친도 안계시니 벼슬하고 싶지않다." 고 하였다. 순실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행의(行誼)로 사림의 추증을 받았다 자손들을 훈계함에는 공경스럽고 게으르지 말며 남들과 겨루지 않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고 특히 남의 허물은 말하지 말도록 훈계하였는데 모두가 자신이 몸소 행했던 바이고, 여자에게는 여섯 가지의 규범(閨範)으로 가르쳐 부도(婦道)를 다하게 하였으며, 또 일찍이 옛사람들의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을 모아 노래로 만들어 부르고 시로 지어 끊임없이옮으니, 노비들까지도 익히들어 알게 되었다.
저술(著述)로는<심경보사(心經補辭>가 있다. 그외에 제현들의 문집에 주고받은 詩書가 전한다.
공의 묘갈명은 이당규 (李堂揆)가 찬하였으며 합천의 명곡서원(明谷書院)에제향되었다.
묘소(墓所)는 경북(慶北) 고령군 쌍림면 합가 2리에 있다.
배위(配位) 문화유씨는 무과(武科)에 오른 경문(慶文)의 따님이며, 계배(繼配) 성산이씨는 찬(贊)의 따님이다.
아들 석윤(碩胤)등 1남 3녀를 두었다.
묘소(墓所)는 경북(慶北) 고령군 쌍림면 합가 2리에 있다.
15세
배여경(裵汝慶) 1622~1696(광해~숙종) 자(字)는 선여(善餘), 호(號)는 일성재(一誠齋)
분성군(盆城君) 의 14세손이며 선무랑(宣務郞) 휘(諱) 후도(後度)의 장남(長男)이다.
공(公)은 천성(天性)이 순박하고 아름다웠다. 또한 효우(孝友)가 돈독(敦篤)하여 아우 정릉참봉(貞陵參奉) 여영(汝榮)과 더불어 같은 방에서 거주(居住)하였고 잠을 잘 때면 나란히 누워 한 이불을 덮었다. 1659년(효종 10)에 모친상을 당하였고, 그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1661년(현종 2)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했다. 그 후 6년동안 묘막(墓幕)에서 거주(居住)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조석(朝夕)으로 묘소(墓所)에 가서 절하였는데 호랑이 한 마가 질을 인도하였으며 제수(除授)로 쓸 꿩을 잡아 우물가에서 공을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기거하던 묘막이 다하니 묘소(墓所)아래에 다시 지었으며 사절제(四節祭) 때면 하루에 세 번 성의(誠意)를 다하여 제물을 올리고 호곡(號哭)했다. 이와 같은 연유로 사림(士林)에서 그 제사(祭祀)를 일컬어 일성(一誠)이라 하였다. 1659년(숙종 21)에 공의 지극(至極)한 효행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배수하였고 이듬해 향년(享年) 75세로 하세(下世)하니 임금께서 공의 행의(行誼)를 가상히 여겨 승의랑(承議郞) 호조(戶曹)좌랑(佐郞)을 증직(贈職)하였으며, 1736(영조 12)에 사림(士林)에 의해 도암서원(道岩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배위(配位) 의인(宜人) 칠원제씨(漆原諸氏)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折衝)장군 제홍유(諸弘裕)의 따님이다.
슬하에 장남(長男) 세강(世綱), 차남(次男) 세기(世紀), 삼남(三男) 세겸(世縑), 사남(四男) 세환(世환),
오남 증 가선대부(嘉善大夫) 세문(世紋) 등 5남 1녀를 두었다.
묘소(墓所)는 경남(慶南) 함안군 군복면 소포리 오당골에 있다
15세
배두원(裵斗元)
자(字)는 경앙(景仰)으로 분성군(盆城君) 의 14세손이며
휘(諱) 욱(旭)의 차남(次男)이다.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배위(配位) 숙인(淑人) 밀양박씨(密陽朴氏)는 창호(昌昊)의 따님이다.
* 열녀(烈女) 공인(恭人) 분성배씨 두원의 딸이다.
청안이씨(淸安李氏) 통덕랑(通德郞) 이하형(李夏衡)의 처(妻)로 출가(出家)하였으나
부군(夫君)이 처음 처갓집을 다녀온 후 병(病)을 얻었으므로 시가(媤家)에 와서 전력을 다하여 6년을 하루같이 간병하였으나 백약(百藥)이 무효(無效)하고 심지어 ‘등창’까지 나서 신음하였다.
공인(恭人)이 자신의 허벅지살을 도려내어 부군(夫君)의 환부에 붙이는 등 갖은 애를 썼으나 효과가 없고 이윽고 생명(生命)이 위독한 지경에 이르자 손가락을 끊어서 피를 입에 넣어 7일을 더 연명(延命)토록 하였다.
결국 부군이 별세하고 장례(葬禮)에 희등(가마에 흰천을 두른 것)을 타고 산지(山地)까지 가서 둘째 조카 정재(廷裁)를 양자(養子)로 삼고 소상(小祥), 대상(大祥)을 지낸 후 다음 달 지내는 제사(祭祀)에 산소(山所)에 다녀와서 친정아우들과 조카, 그리고 양자(養子)를 불러놓고 "여자(女子)는 자고로 시집가서 아들, 딸 낳고 그 집 뒤를 잇게하는 것이 도리인데 나는 시집와서 무일점(無一点) 혈맥(血脈)이라 이집에 온 흔적이 없으니 너희들은 자손대대로 ‘수척(受戚)’하기 바란다.” 하는 유언(遺言)을 남기고 피를 토하고 죽었다. 유언에 따라 지금까지 양가(養家)에서 혼인(婚姻)하지 못함을 물론이거니와 호형(呼兄)호숙(呼叔)하고 있다.
울산(蔚山)지역의 유림(儒林)의 상소(上疏)로 1741년(영조 17) 정려(旌閭)가 내렸다.
열녀각(烈女閣) 은 울산광역시 중구 반구동에 보존(保存)되고 있다.
묘(墓) 울산광역시 북구 시례동 산 18번지에 있다.
15세
배홍린(裵弘린) 1564~1638
분성군(盆城君) 의 14세손이며 판관공(判官公) 휘 학종(學琮)의 아들이다.
공은 구미(龜尾) 비산(飛山)의 입향조이다. 비산을 세거지로 삼아 자손이 연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1970년 구미에 공단이 조성됨에 따라 공을 비롯하여 선조 묘역이 부지로 편입되어 구미시 형곡동(荊谷洞) 산 34번지 길지를 택하여 이장하였다. 선조의 유덕을 추모하는 후손들이 경북 구미시 비산동 274-1에 공의 재실인 덕산재(德山齋)를 지어 공을 기리며 숭조목족(崇祖睦族)을 도모하고 있다.
묘(墓) 경북 구미시 형곡동(荊谷洞) 산 34번지
배(配) 밀양박씨(密陽朴氏) 박재흥(朴再興)의 여(女).
15세
배진명(裵震明)1644~1713 자(字)는 덕휘(德輝), 호(號)는 모헌(慕軒)
분성군의 14세손 이며 증통헌대부 장락원정 휘 욱(昱)의 장자(長子)이다.
공께서는 박학(博學)하고 효성(孝誠)이 지극했다.부모상(父母喪)을 당(當)하여 여막(廬幕)에서 죽을 마시며 3년 거상(居喪)했고, 부모(父母)를 종신(終身) 사모(思慕)하는 뜻에서 호(號)를 모헌(慕軒)이라 하였다. 미수(眉叟) 허목(許穆)과 도의교로 사귀었으며 영조조 에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묘소는 운동 금곡 자좌(子坐)
배위(配位)는 밀양박씨(密陽朴氏) 성일(誠一)의 女
후배위(後配位)는 숙부인(淑夫人)무송윤씨(茂松尹氏) 영(暎)의 女
15세
배숙(裵璛) 1653∼1685 자(字)는 숙옥(肅玉),
분성군(盆城君) 의 14세손이며,가선대부(嘉善大夫) 휘(諱) 경선(敬善)의 아들이다.
생부(生父)는 경신(敬宸)
1676(숙종 2)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횡성현감(橫城縣監)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영산면 광지리 점동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해주정씨(海州鄭氏) 유종(有宗)의 따님이시고
농포선생(農圃先生) 문부(文孚)의 증손이시다.
16세
배순우(裵舜佑)1677~1713
자 성경(聖卿)
분성군 15세손이며, 현감(縣監) 숙(璛)의子
숙종(肅宗) 37년 (1711)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였다.
배위는 청주한씨 현감 영세(榮世) 의 女
16세
배덕성(裵悳星) 1544∼1601 (중종∼선조)
자(字)는 종일(宗一)이고 호(號)는 송은(松隱), 분성군(盆城君) 의 15세손이며
휘(諱) 광로(光輅)의 아들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독서를 좋아하였다. 1591년(선조24) 부친상을 당하자 애통함이 지나쳐 몸이 상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공이 부친의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다음해 4월 왜적이 밀려들어와 공이 있던 성(城)이 함락되었다. 공은 창의하려 하였으나 아직 3년상을 마치기 전이니 삼가라는 모친의 분부로 뜻을 굽히고 화산(花山) 송곡(松谷)에 은거하면서 시묘살이를 다하였다. 시묘살이 후 어느날 가락왕릉(駕洛王陵)이 왜적들의 손에 도굴당해 파헤쳐져 있는 것을 보고 공은 사람을 모집하여 릉(陵)을 보수하였다.얼마 지나 모친이 상을 당하였을때 부친상때와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르었다. 세속의 명리에 뜻이 없어 명애와 이익을 구하지 않고 한적하게 살았다.
후손 병추(秉樞), 행장과 갈명을 찬하고 이후 다시 후손 병주(秉注), 석물을 중수하고 개찬(改撰), 방후손 길기(吉基) 서(書),
묘(墓) 경남 김해 삼계동 화비산 자좌(子坐)
배(配)위는 숙부인 안동손씨(安東孫氏)
16세
배진창(裵震昌, 1642~1740) 자는 주백(周伯),호(號)는 송고재(松皐齋)
분성군의 15세손이며,영덕입향조 야은공(휘 湛) 8세손.반선재 진도 의 兄
지행단결(志行端潔)하였으나, 과거(科擧)를 보지 않고 학문에 전력(專力)하였다. 모병(母病)에 북두(北斗)에 빌어
신제(神劑)를 얻었으며, 성묘(省墓)를 정성(精誠)스레 다녀 언덕에 길이 날 정도였다.
1721년(경종1년) 수직(壽職)으로 통정(通政)이 되었다.
배위는 월성최씨(月城崔氏) 익대(益大)의 女이다.
서파 유필영이 명(銘)을 찬하였으며 유고(遺稿)가 있다.
16세
배진도(裵震度)1663~1728, 자는 진백(晉伯),호(號)는 반선재(盤旋齋)
분성군(盆城君) 15세손이며,영덕 입향조 영덕 현령(盈德縣令)야은(野隱:휘湛 )공 8세손, 송고재 진창 弟
학문(學問)이 정도(精到)하였지만 과거(科擧)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향리에
은거(隱居)하여 학문을 강구하였다.
배위는 안동권씨 도규(道揆) 女
17세
배윤성(裵潤聖)1657~1752(숙종~영조)
자(字)는 석로(碩魯), 호(號)는 일야당(逸野堂)
분성군(盆城君) 의 16세손이며 통정대부(通政大夫) 휘(諱) 진창(震昌)의 장남(長男)이다.
자질(子姪)이 총명(聰明)하고 영특(英特)하였다. 어려서 효경(孝經)을 배웠는데 실체발부는 감히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는 또래의 아이들과 더불어 유희(遊嬉)하지 않았는데 “신체(身體)가 상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또한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가세가 빈궁하였을 때, 몸소 농사(農事)를 짓고 물고기를 잡아 늙은 부모님께 맛있는 음식(飮食)을 올리기를 한결같이 하였다. 부모의 상(喪)을 당해서는 시묘(侍墓)하는 동안 내내 죽으로 연명(延命) 하였다. 개인의 영달(榮達)에는 뜻이 없어 일찌감치 과거(科擧)를 페하고 정재(靜齋) 이성룡(李聖龍)과 더불어 학문(學問)을 갈고 닦으며 도의(道義)로써 교우(交友)하였다.
사직(師直) 한소계(韓巢溪)가 당명(堂銘)을 찬(撰)하였고, 유고(遺稿) 2권이 있다.
배위(配位) 월성이씨(月城李氏)는 계공랑(啓功郞) 신재(信再)의 따님이고 슬하에 장남(長男) 상타(尙타), 차남(次男) 강릉(江陵)참봉(參奉) 상지(尙祉), 삼남(三男) 가선대부(嘉善大夫) 절충(折衝)장군(將軍) 행(行) 용양위 부호군(副護軍) 상철(尙哲) 등 3남을 두었다.
외암(畏庵) 권석장(權錫璋)이 행장(行狀)을 찬(撰)하였으며
면우(면宇) 곽종석(郭鍾錫)이 묘갈명(墓碣銘)을 찬(撰)하였다.
묘소(墓所)는 경북(慶北) 영덕군 지품면 오천1리에 있다.
17세
배윤집(裵允緝) 1703~1747(숙종~영조)
자(字)는 희백(熙伯)으로 분성군(盆城君)의 16세손이며,
통덕랑(通德郞) 휘(諱) 순좌(舜佐)의 차남(次男)이다.
수염이 아름다웠고 몸가짐이 단정(端正)하였다. 공(公)의 형(兄)이 일찍 죽고 부친(父親) 또한 돌아가시니 종가(宗家)를 관리(管理)할 사람이 없었다. 이에 공(公)은 아우 윤적(允積)과 함께 밤낮으로 종가(宗家)의 외실(外室)에 거처(居處)하였다. 누군가 남의 선행(善行)에 대해서 칭찬(稱讚)을 하면 자기의 일인 것처럼 기뻐하며 칭찬하였고, 후진(後進)과 자질(子姪)들에게 약간의 재주만 있어도 계속 독려(督勵)하여 성취(成就)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잡안일이 워낙 많아 학업(學業)에 전념(專念)하지는 못하였지만 글을 쓸 때에는 붓이 흐르는 듯 막힘이 없어 사람들이 그 넉넉하고 재빠름에 탄복(歎服)하였다. 고은 기일이 되면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제사에 쓰이는 모든 것들을 극히 깨끗이 하는데 힘썼으며 자질이 비록 어리석다 하더라도 반드시 신의(信義)를 지키도록 인도(引導)하고 또 내외(內外)의 구별을 엄하게 하여 가까운 집안끼리라고 반드시 예모를 갖춘 뒤에야 출입(出入)하게 하였다. 또한 조상(祖上)을 받드는 일에도 힘을 써서 6대조의 묘갈(墓碣)과 사당(祠堂)을 세우는 일 등을 직접하였다. 유고(遺稿)가 남아있다.
배위(配位)는 의성김씨(義城金氏)이며 세일(世逸)의 따님이다.
부인(夫人)은 정숙(貞淑)하고 덕(德)이 있어 집안을 다스리는데 한결같이 근검(勤儉)으로 하였다. 자녀(子女)를 가르침에는 자애(慈愛)로 극진(極盡)히 하였고, 아랫사람은 다스리되 어질게 하였다. 궁한 사람들을 가련히 여겨 말하기를 “재산(財産)을 자손(子孫)에게 남겨주는 것은 사람에게 음덕(蔭德)을 베푸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슬하에 4남 2여를 두었다.
사위 이석유(李碩儒)는 星山人 으로 증손은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이다
18세
배극렬(裵克烈) 1764∼? (영조∼?)
자(字)는 준보(俊甫)이고 호(號)는 의재(義齋) 분성군(盆城君)의 17세손이며
가선대부(嘉善大夫) 휘(諱) 윤흥(允興)의 차남(次男)이다.
공(公)은 타고난 천성(天性)이 지극(至極)히 효성(孝誠)스러웠다. 부모(父母)가 설사로 고생할때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다 고아 드려 효험(效驗)을 보았다.
또한 부모(父母)가 병들었을 때 허벅지 살을 베어 약(藥)으로 드렸다.
부모상을 당하였을 때는 더할수 없이 극진히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는데 호랑이가 여막(廬幕)을 지켜주었고 붉은새가 와서 우는 기이한 현상이 있었다.
공(公)의 부인(夫人) 진씨(陳氏) 역시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시부모가 병환(病患)으로 고생하실 때 허벅지살을 베어 약(藥)으로 바치고, 머리를 잘라 팔아 시부모를 봉양(奉養)하였다.
이러한 부부(夫婦)의 효행(孝行)이 조정(朝廷)에 알려져 헌종(憲宗) 3년 1837년에 정려(旌閭)가 명해지고 경남(慶南) 산청군 오부면 일묵리에 쌍효정(雙孝旌)이 세워졌다.
배(配) 여양진씨(驪陽陳氏) 통정대부(通政大夫) 봉대(陳奉大)의 여(女).
18세
배동석(裵東錫) 1738~1798 자(字) 여언(與彦) 분성군17세손이며,모정(慕亭)공의 6세손이다.
학문과 행의로 영산(靈山) 고을 선비들에게 추존(追尊)받았고 당대의 명필로 알려졌으며
사림들과 더불어 망우당 곽재우 의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비(碑)의 글씨를 썼다.
묘소 영산 서리미북 사직공 묘하(墓下) 오른쪽 계좌(癸坐)
배위 밀양박씨(密陽朴氏) 박경응(朴慶膺)의 여(女) 병사(兵史) 박진한(朴振翰)의 현손(玄孫)
묘(墓) 광지동 지공(知公) 묘하(墓下) 묘좌(卯坐)
묘소 영산 서리미북 사직공 묘하(墓下) 오른쪽 계좌(癸坐)
18세
배상복(裵尙福) 1728∼1801 (영조∼순조)
자(字)는 사수(士受) 호(號)는 일파(逸波), 분성군(盆城君)의 17세손이며 휘(諱) 윤신(潤紳)의 장남이다.
어려서 조부에게 학문을 배웠다. 천부적 재능이 탁월하여 20세부터 경향(京鄕) 각지에 있는 학식있는 선비들을 찾아 10년 넘게 학문과 심신을 연마하였다. 또한 강릉의 소계공(巢溪公)과 당진의 위수 제공(渭수諸公)을 만나 학문을 토론하고 구산서원(邱山書院)과 송담서원(松潭書院)을 찾아 운집한 문사들과 음영시제로 경전 시구(詩句)와 시경(詩經)의 시 300수를 통달하니 당대에 공을 앞서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하며 선비들이 놀라위 했다. 청운의 뜻을 품고 중국의 낙양과 중원의 명주땅을 견학하고 돌아와 과거를 보았으나 실패하였다. 이때 소계공이 공에게 지방의 관리라도 하라는 말에 “옛사람들은 장원을 하지 않으면 벼슬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대수롭지 않은 벼슬을 녹봉이나 받자고 할수 있겠는가.” 라고 대답 하였다.
공은 향리로 돌아와 노부모를 봉양하고 후진을 양성하는데 힘쓰며 여생을 보냈다. 공의 시문이 많았으나 불의의 화재로 소실되고 남은것이 수십 수애 불과하다.
묘(墓) 경북 영덕군 지품면 오천1리 금음산에 있다.
배(配) 안동권씨(安東權氏) 수표(權樹標)의 여(女)
19세
배경봉(裵慶鳳)
분성군의 18세손
자(字) 군현(君現) 호(號) 곤명(崑溟)
본성(本性)이 순후(淳厚)하고 지기(志氣)가 고명(高明)며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있으며
사람들에게 앙망(仰望)되었으며 유집(遺集) 2권이 있다.
배(配)위는 죽산박씨(竹山朴氏) 박상영(朴相永)의 여(女)
20세
배영규(裵永奎)
호(號)는 백인(百忍),분성군 19세손이며 모정(慕亭) 대유(大維)의 8세손이다.
천성(天性)이 단아(端雅)하고 의표(儀表)가 헌앙(軒昻)하였으며 일생(一生) 서예(書藝)에 전심(專心)하여 필법(筆法)이 우정경(尤精勁)하여 세상(世上)이 배씨(裵氏)는 필가(筆家)라 하였다.
20세
배극소(裵克紹) 1819∼1871 (순조∼고종)
자(字)는 내휴(乃休)이고 호(號)는 묵암(默庵)
분성군(盆城君) 의 19세손이며, 처사 상관(相觀)의 장남(長男)이다.
직재(直齋)김익동 (金翊東) (定齋) 유치명(柳致明) 양(兩) 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서 수학(受學)하였고
1850년(철종1) 생원시(生員試)에 1등으로 합격(合格)하였으나 영달에는 뜻이 없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隱居)하였다. 효행(孝行)과 문학(文學)으로 세상(世上)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문집(文集) 3권이 있고 사례간요(四禮簡要)와 개몽자학(開蒙字學), 이천자(二千字)가 전한다.
(상세한 내용은 묵암공 편 참고)
20세
배상순(裵相淳)1801∼1863 (선조∼철종)
자(字)는 여현(汝賢) 호(號)는 낙천재(樂天齋)
분성군(盆城君) 의 19세손이며 조당공(釣堂公) 휘(諱) 일준(一準)의 아들이다.
효성(孝誠)이 남다르게 지극(至極)하여 부모님을 모실 때 비록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끼니마다 맛있는 음식(飮食)을 공양(供養)하는데 모자람이 없고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장사(葬事)와 제사(祭祀)를 치르는데 주자의 가례(家禮)에 따라 조금도 소흘함이 없었다. 공은 평생(平生)을 소학(小學)에 근간하여 연구(硏究)하였으며 깊이 깨달아 성취(成就)한 바가 있었다.
1868년(고종 5) 이조(吏曹)판서(判書) 정기세(鄭基世)가 계(啓)를 올려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의 증직(贈職)을 받고, 예조판서(禮曹判書) 최우형(崔遇亨)이 다시 계를 오려 정려(旌閭)가 명해지고 복호의 은전이 내려졌다.
정려(旌閭)는 경남(慶南)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에 세웠다.
21세
배경봉(裵慶鳳)1844~1920 자는 성의(聖儀) 호는 경암(敬菴),송연산인(松淵散人).
분성군 20세손이며 영덕입향조 야은공(野隱公:諱,湛)13세손,일와(逸窩) 인주(仁周) 의 차남.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하고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예(禮)에 밝았다. 과거에 힘쓰지 않고
향리에 은거하여 송연정사(松淵精舍)를 짓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썼으며,당대의 명사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방산(舫山)허훈(許薰),
서파((西坡) 류필영(柳必永), 연계(連溪) 박시찬(朴時燦),소산(素山) 장인목(張寅睦),
범암(汎庵) 류연집(柳淵楫), 산촌(山村) 김재헌(金在憲),
유재(由齋)신재석(申在錫)· 등과 시서(詩書)로 교우(交友)하였다.
21세
배문창(裵文昶) 1864년(고종 1)∼1928년
자는 성화(性和)이고, 호는 정산(靜山)이었다가 후에 정산(定山)개호(改號)하였다.
분성군(盆城君)의 20세손이며, 군위현감 정곡공(靜谷公:세적) 12세손이다.
증조부는 배한신(裵漢臣), 조부는 배이신(裵以信)이며, 아버지는 배영수(裵永守)이다. 어머니는 성산이씨(星山李氏)이다.
희재(希齋) 안종창(安鍾彰)과 더불어 이만구(李晩求),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학문과 덕행으로 사우들의 추증을 받았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이 일어나고 김홍집(金弘集)의 친일내각이 성립되는 등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일헌(一軒) 조병택(趙昺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당대의 학자 서천(西川) 조정규(趙貞奎),일헌(一軒) 조병택(趙昺澤),희재(希齋)안종창(安鍾彰) 등과 교유하였으며 고향에서 후학을 지도하였으며
문집으로 정산선생문집(定山先生文集)이 있다.
21세
배문연(裵文演) 자(字) 치조(致祚) 호(號) 학천(鶴川)
독행(篤行)으로 문장(文章)에 능(能)하고 사림(士林)에 추중(推重)받았으며 유고(遺稿)가 있다.
배(配) 상산김씨(商山金氏) 김철신(金輟臣)의 여(女)
배(配) 장수이씨(長水李氏) 이필신(李弼臣)의 여(女)
21세
배찬(裵瓚) 1825~1898 字는 우서(禹瑞) 號는 금계(錦溪)
분성군의 20세손이며 ,대황제(大惶齋:諱 祺壽)의 10世孫, 낙천재(樂天齋) 휘 상순(相淳)의 子
어려서부터 가도를 이어 받아 효우에 독실하고 학문을 일찍 깨우쳤으며 특히 필세가 비범하여 사림(士林)의 추증을 받았다. 1874년(고종11) 사마시에 1등 2위로 합격하였으나 한번도 출사 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금계재(錦溪齋)를 지어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산수속에서 詩를 옮으며 안빈낙도로 유유자적 하였다.
저서에 금계집(錦溪集) 이 전한다.
문집 중 雜著 편에 부국강변론,적정론, 군정론, 등 당대의 긴요한 정무를 논술한 것이다. 여기에는 조예깊은 학문과 우국애족의 충성이 담겨져 있다. 또한 거향론(居鄕論) 5조가 전하는데 형제, 독서, 행신, 치산, 으로 선비가문의 행실에 관한 규범이다.
21세
배영모(裵靈謨) 1845~1905(헌종~고종)
자(字)는 국필(國弼), 호(號)는 낙대(樂臺)이고 분성군(盆城君) 의 20세손이며 모곡공(茅谷公) 휘(諱) 진형(鎭亨)의 아들이다.천품(天稟)이 인후(仁厚)하였으며 세상(世上)의 영화(榮華)를 구하지 않아다.
또한 몸소 송사를 지으며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고 스스로 경계(警戒)하였다.
후손(後孫)들이 경남(慶南) 산청군 생초면 향양리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워 추모(追慕)하고 있다.
배위(配位) 경주김씨(慶州金氏)는 김봉술(金鳳述)의 따님이다.
슬하에 장남(長男) 기원(基遠), 차남(次男) 기우(基玗), 삼남(三男) 기옥(基玉),
사남(四男) 기녕(基寧), 오남 기응(基應) 등 4남을 두었다.
묘소(墓所)는 경남(慶南) 산청군 생초면 향양리에 있다.
21세
배진하(裵鎭夏 ; 1838∼1912) 자는 화중(和仲), 호는 요산(樂山)
분성군20세손이며, 선산도호부사공(諱 季厚)13세손, 선산 입향조(諱 漢臣 1729~1802) 의 증손으로
1882년 무과에 급제하여 잠시 용양위 부사과를 지냈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귀향은거하여 학문에 힘썼으며
시서로 자오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배위는 밀양박씨 永秀의 따님이시다.
김홍락(金鴻洛)이 묘갈명을 찬하였으며 묘소는 칠곡군 인동면 온수동 흥양곡 庚坐
유고는 1935년 경북 선산에서 간행되었다. 김홍락(金鴻洛), 최병원(崔炳元), 조형묵(趙兄默)의 서가 있다.
문집 중 「천인론(天人論)」에서는 하늘과 인간의 상관관계를 설명하였다. 천도(天道)는 음양(陰陽)이 아니면 천(天)이 될 수 없고, 인류는 도덕이 없으면 사람이 될 수 없다. 천은 음양으로 만물을 생성하고 각기 그 이(理)를 부여받는다는 내용이다.
또 「무후론(武侯論)」은 영웅이 시세(時勢)를 만드는가, 시세가 영웅을 만드는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하여
영웅은 시세를 만나지 못하면 영웅이 될 수 없고, 시세는 영웅을 만나지 못하면 시세가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삼강론(三綱論)」에서는 외국(外國)이 조선을 예의지국(禮義之國)이라 말하는데 지금은 명교(名敎)가 불명(不明)해지고 풍화(風化)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탄식하였다.
21세
배환(裵,文+奐)1833~1894,譜諱(文九) 자(字)는 龍九
호(號)는 시재(時齋), 분성군(盆城君) 20세손이며,용양위 부호군을 지낸 영혁(永爀)과 남평문씨의 장남이다.
시서로 저명하였으며 흥선대원군 의 문하에서 여러 명현들과 교유하였으며 선전관을 역임하였다.
배위는 숙부인 청도김씨이다.
외손은 시서로 저명한 아석(我石) 김종대(金鍾大1873~1949) 이다.
21세
배문회(裵文會) 1899-1984 자는 익삼(益三) 호는 중원(中園)
분성군의 20세손이며,사오당(四吾堂:諱良玉)의 8세손 이다.
눌재(訥齋) 김병린(金柄麟) 門人으로 유학자 이며 교육 자이다.
저서로는 중원문초(中園文鈔),동양사상 정점 전언 등이 있다.
2007년 중원공의 아들 정전(正典)이 선고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중원선생기념사업회(中園先生記念事業會) 를 발족하여 기념관인 중원서원(中園書院)을 건립하고 선생의 문집인 중원문초(中園文鈔),국역 간행 하였다.
21세
배문준(裵文準)1905~1984호(號) 소명(少溟)
분성군(盆城君) 20세손이며 , 군위현감 정곡(靜谷)공 휘 세적(世績)12세손 이다.
경남 함안(칠원)출신의 근세 유학자로 눌재(訥齋) 김병린(金柄璘)의
문인(門人)으로 학행(學行)이 뛰어나며 행실(行實)이 아름답고 조행(操行)이 있었으며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여러 문중의 많은 금석문을 찬 하였으며,
칠원면부의장(漆西面副議長) 을 역임하였다.
저서에 소명문초소명문초(少溟文抄) 가 있다.
배위는 함안조씨(咸安趙氏) 조용의(趙鏞懿) 女
후배는 정선전씨(旌善全氏) 전영수(全英壽)女
22세
배장준(裵章俊) 1846년(헌종 12)∼1883년(고종 20).
자는 준려(俊麗)이고, 호는 남강(南岡)이다. 분성군의 21세손 이며 선산도호부사공(휘 계후)의 14세손이다.
정사(精舍)를 지어 학문에 힘을 쏟아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비롯한 성리학서를 밤이 깊도록 공부하였으며,
이후 사방을 돌아다니며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곳곳의 명사들을 찾아 다니는 와중에도 가난한 사람이나 어려운 사람을 만나게 되면 반드시 구휼하였다.
문집(文集) 2권이 전하며,배위는 밀양(密陽) 박씨 래헌의 女 이다.
묘소는 군위 재와곡(載瓦谷) 선영(先塋)이다.
22세
배성호(裵聖鎬)(1851~1929) 분성군(盆城君)21세손
자(字) 는 경노(敬老) 호(號)는 금석(錦石)
아버지는 문장으로 이름난 눌암(訥菴) 도(璹)이며 어머니는 창원황씨이다.
어려서부터 성실한 천성(天性)과 총명함으로 학문에 힘써 성취가 남달랐다.
또 부모를 지극히 섬겼는데 부친이 돌아가시자 피를 토하며 3년간 애도하였다.
이후로 부친의 유언에 따라 더욱 열심히 공부하였다.
성재(性齋) 허전(許傳)에게 수학하여 사우들의 추증을 받았다.
일생 학문을 연구한 학자로 당대의 명사인 곽종석,기우만,송병순,민치량 등과 교류하였다.
저서에는 금석문집(錦石文集)이 있다.
배위는 하빈이씨(河賓李氏) 현백(賢栢)의 따님이시다.
전 홍문관 응교 정승현(鄭承鉉)선생이 행장을
송산(松山) 권재규(權載奎) 선생이 묘갈명을 찬하였다.
*《금석문집(錦石文集)》 8권이 전한다. 권1에서 권3까지는 시문(詩文), 권4는 서(書),
권5는 잡저(雜著), 권6은 제문(祭文) 및 기타 자료, 권7은 행장 및 유사(遺事), 권8은 부록이다.
1933년 삼종질 배영대(裵永大) 공께서 산청(山淸) 금계재(錦溪齋)에서
편집 간행 하였으며 서문은 采雲 宋曾憲, 발문은 順興安孝鎭, 菁川 鄭敏錫 각각 찬 하였다
22세
배상학(裵相學, 1845~1938)
자는 사문(士文) 호(號)는 만취정(晩翠亭) 분성군 21세손이며 영덕입향조 盈德 縣令 야은(野隱:휘 담)의 14세손
동계(東溪) 류진성(柳晉成)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문학과 예술에 성취하였다.
스승이 돌아 가시자 삼어정(三於亭)을 중건하여 스승을 추모하였으며 삼어정계첩(三於亭契帖)
서문을 찬하였다. 원근(遠近)의 명석(名碩)들과 두루 교유하며 창작(唱酌)하였다.
23세
배진기(裵縉基) 1878년(고종 15) 6월 13일∼1943년 4월 13일. 일제강점기 유학자.
분성군 22세손이며,선산도호부사(諱季厚) 공 15세손 이다.
자는 인여(仁汝)이고, 호는 내산(來山)이다.
경상남도 창원군(昌原郡) 웅동면(熊東面) 두동리(頭洞里)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배상관(裵相寬)이고, 조부는 배문구(裵文九)이며, 아버지는 배익갑(裵翊甲)이다.
외조부는 정인손(鄭仁孫)이고, 처부는 신태일(申泰一)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망국의 상황에 애통해 하였다. 이후 경상남도 합천군(陜川郡) 삼가면(三嘉面)의 황매산(黃梅山) 아래로 이사를 하였으며, 어머니가 병이 나자 간호에 지극 정성을 다하였다.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탐독하였다.
묘는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범학산(範學山)에 있다.
저서는 《내산선생문집(來山先生文集)》이 있다.
23세
배선찬(裵璇燦) 1868(高宗戊辰)~1940 자(字)는 순칠(舜七) 호(號)는 오산(午山)
분성군의 22세손이며,영덕입향조 盈德 縣令 야은(野隱:휘 담)의 15세손
효심(孝心)이 지극하고 당세에 학행으로 추앙 받으셨다.13세에 향시(鄕試)에 장원 하시고 과거 공부에 전념하였으나 갑오(甲午)이후에 국사(國事)가 날마다 그릇되고 과거제도(科擧制度)가 폐지 되므로 마음을 고쳐먹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셨다.후에 명망(名望)으로 선사(善士)로 여러번 천거(薦擧)되었으며 또 경학원(經學院) 강사(講師)로 청하고저 하였으나 모두 고사(固辭)하고 부임(赴任)하지 아니하였다.
당세(當世)의 중망(重望)으로 곽면우(郭 人+免宇), 허방산(許舫山), 류서파(柳西坡), 김노산(金老山)등 여러先生은 강질훈도(講質熏陶)의 더함이 되고 염암(리) 류연구(柳淵龜), 동매(東梅) 이가호(李家鎬), 심대(心臺) 김세동(金世東), 해봉(海峯) 남호량(南浩良), 봉산(鳳山) 신봉래(申鳳來), 매산(梅山) 이영석(李永錫) 등과 학문과 덕성(德性) 을 닦으며 시문(詩文)으로 교유하였다. 저서에 오산문집(午山文集)이있다.
23세
배영기(裵永基)1833~1898 자는 윤기(潤起)
분성군 22세손이며, 선의(善儀)의 아들이다.
통정대부 선공감역을 역임
배위는 숙부인 충주지씨 이며 슬하에 2남2여를 두었는데
장남은 의금부 도사 석규(錫圭)
차남은 연풍군수 석구(錫龜)
완산 이종수(李鍾壽)
인동 장진환(張晉煥)
*사위 장진환의 父 즉 사돈은 장충식(張忠植1836~1901) 으로 유인석 진영에서 두 아들 익환,진환과 함께 을미의병으로 활약하였으며 의병당시 기록한 일기 산거만록(山居漫錄)을 남겼다.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24세
배석구(裵錫龜) 字는 우범(禹範) 1868~1925
분성군 23세손이며 父는 선공감 감역 영기(永基)이다.
1888년 영회원참봉,1893년 의금부도사,제중원주사,1894년원외랑,1899년 연풍군수를역임 하였으며 재임시 선정과 치적으로 이름이 들어났다. 매부인 장진환과 사돈 장충식의 을미의병 활동에 군자금을 기부하여 의병운동을 지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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