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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요
안동김씨(安東金氏)는 경상북도 안동(安東)을 본관으로 하는 김씨 가문이다.
시조 김선평(金宣平)은 고려 왕조의 개국 공신으로 통합삼한보사벽상아부공신(統合三韓保社壁上亞父功臣)을 지냈다.
조선 왕실의 인척이 되어 왕실 위에서 섭정을 한 가문이다. 조선 후기 가장 많은 고관을 배출하여 ‘금관자(金貫子)’라 불렸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귀족 작위를 받은 유력 가문으로 계보가 보존되어 있는 순혈 가문 중 하나이다.
풍양조씨, 여흥민씨, 반남박씨와 더불어 귀족가, 세도가였고 순혈 가문으로 남기 위해 백성들을 대상으로 혹형에 처했다는
역사적 사료들도 존재한다.
이칭은 장동김씨(壯洞 金氏)로 명칭된다.
2.역사
시조 김선평(金宣平)은 진골로서 효공왕 신유(辛酉,901)년 흥덕궁(興德宮)에서 봉안용수(鳳眼龍鬚)와 성정호위(星精虎威)의
기상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김선평(金宣平)은 신라말 고창군(古昌郡,안동)의 성주(城主)였는데, 왕건(王建, 877.~943.)을 돕기 위해서 군사들을 이끌고
930년(고려 태조13년)고창군(高昌郡)에서 권행(權幸)·장길(張吉)과 함께 견훤(甄萱)의 후백제군을 물리쳤다.
그 전공으로 고려 개국공신인 대광(大匡)작위를 받았고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의 칭호를 받았으며
최고위 귀족 태사(太師)작위를 받았다.
이후 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태사아부(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亞父)에 봉해졌으며,
고창군(古昌郡)은 안동부(安東付)로 승격되었다.
그래서 현재 안동(安東)은 김선평 태사에 의해서 변경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아부(亞父)라는 것은 고려의 황제 왕건(王建)이 김선평(金宣平) 태사를 존경해서
“아버지에 버금간다”라고 해서 버금 아(亞),아비 부(父)라고 한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김선평을 스승처럼 따랐다 기록되었다.삼태사(三太師)-김선평(金宣平),권행(權幸),장길(張吉)을
제향하는 태사묘(太師廟)가 남아 있으며,
약 1000년 이상 金(김), 權(권), 張(장) 3姓(성)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기능해 왔다.
조선조에 들어와 후손
비안현감 김삼근(金三近,1390~1465.)이 안동시 풍산읍 하리리 부근에 살다가 소산리으로 옮겨 정착한 이래 높게 번성하였다.
장자 김계권(金係權,1410.~1458.)은 한성판관이고,
차자 김계행(金係行,1431.~1517.)은 대사헌으로 재임하였다.
김계행(金係行)의 현손(玄孫)으로 구전(苟全) 김중청(金中淸)이 있다.
김중청(金中淸1566년(명종21)~1629년(인조7)은
소고(嘯皐)박승임(朴承任),한강(寒岡)정구(鄭逑),월천(月川)조목(趙穆1524~1606 )세분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였으며,
1610년(광해군 2)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13년 전적(典籍)예조좌랑·정랑을 역임하고 이듬해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승정원(承政院) 승지(承旨)를 지내셨다.
임진난(任辰亂) 때는 백의(白衣)로 창의(倡義)하시고, 경상북도 봉화군 반천서원(槃泉書院)에서 제향(祭享)되며,
또 봉화군 소천면 현동리 충렬사(忠烈祠)에서도 향사(享祀)되고 있다.
김계권은 5형제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세조의 국사를 지낸 명승 학조대사(學組大師)이고,
둘째 김영전(金永詮)은 사헌부감찰,
셋째 김영균(金永勻)은 진사,
넷째 김영추(金永錘)는 수원부사,
다섯째 김영수(金永銖)는 사헌부장령으로 재임하였다.
다섯째 사헌장령 김영수는 3형제를 두었는데 큰아들 김영(金瑛)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의으로 재임하였고,
둘째 김번(金璠)도 문과에 급제하여 평양서윤으로 재임하였으며,
셋째 김순(金珣)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형조좌랑으로 재임하였다.
김창집의 증조부 김상헌(金尙憲,1570.~1652.)에 이르러 그들의 가문은 충절(忠節)의 가문으로 부상하게 된다.
김상헌은 김상용(金尙容,1920.~1951.)의 동생으로,
병자호란 당시 김상용은 강화도 남문루에서 분신하였고, 척화항전을 끝까지 고수하였다.
또한 김상헌은 1639년에 청이 조선에 출병을 요구하였을 때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에 압송되어 6년 동안 감금되기도 하였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그는 대로(大老)로 인정받으며 북벌의 상징적 인물로 숭앙되었으나,
양주의 석실촌(石室村)에 은거하였다.
장동김씨(壯洞 金氏)는 노론에 합류하였다.
김수증(金壽增,1624.~1701.),퇴우당(退憂堂)
김수흥(金壽興,1626.~1690.) 김수항(金壽恒,1629.~1689.)은
장동김씨 가문을 노론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하게 만들었다.
김수흥과 김수항은 충청의 산림 송시열 송준길과 정치적 동맹을 맺으며,
현종조의 예송논쟁 숙종조의 환국기를 지나며 노론의 핵심이 되었다.
이들은 1674년의 갑인예송 때에는 춘천과 영암으로 유배되었다가,
1680년 경신환국 이후에는 10년간 형제가 번갈아 가며 영의정에 제수되기도 하였으나,
결국 1689년의 기사환국에 즈음하여 유배 후 사사(賜死)라는 파란을 겪는다.
김수증은 현재의 강원도 화천군 화악산(華嶽山)에 은거하며 혼란을 피할 수 있었다.
김창집은 노론 4대신으로 경종(景宗)에 의해서 성주에서 사사되었으나,
동생인 김창협과 김창흡은 학문과 문장에서 당대를 호령하였고
그 후손들과 사위, 제자들은 학력(학맥), (가문)혼맥으로 얽히며 장동 김씨는 최고 명문가 지위를 유지한다.
이후 사도세자를 옹호하는 시파로 노선을 타면서 정조의 눈에 들게 된다.
김조순(金祖淳, 1765. ~ 1832.)은 정조가 총애했고 생전에도 그와 사돈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정조 본인도 김조순(金祖淳)의 증조인 김수항 등의 학문을 정순하다고 여겨 존경했을 정도였다.
정조 본인은 노론 자체를 싫어한 것도 아니며, 싫어할 수도 없는 것이 오히려 노론의 영향을 받고 성장한 인물이다.
정조는 문체반정 이니 하는 행보를 밟았고 심환지에게 나도 벽파라며 시인했다.
안동김씨(安東金氏)는 나라 망하게 한 귀족 가문으로 인식이 되어 있지만 청백리나 훌륭한 관리,재상, 학자가 많다.
오히려 이런 면모 때문에 일찌기 가문이 융성하게 된 것이다.
세도 정치의 막을 연 김조순(金祖淳)도 실록을 보면 관서 지방을 다녀와 백성들의 어려움을 상소한 일도 나오고,
관대한 면도 있는 유능하고 곧은 관료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생전에 정조의 큰 신임을 받는 정조의 친위 세력이었고,
그의 딸이 순조의 비가 된 것도 정조의 유지에 따른 것이었다.
그가 안동김씨(安東金氏)를 이끌던 시기는 전횡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김조순(金祖淳)은 당대에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김조순의 뒤를 이어 김조순(金祖淳)의 아들인 김좌근(金左根,1797~1869)과 양손자인 김병기,
또다른 장동 김씨인 김문근 등이 세도정치(世道政治)를 하면서 모두가 아는 막장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과거에서 왕족은 멸시를 받고 안동김씨(安東金氏) 출신이 급제하자 '조선이 이씨의 나라인가, 김씨의 나라인가'를 외친
경평군 이세보가 눈에 가시가 되어 유배(流配)를 갔을 정도였다.
어찌나 이들의 위세가 높았는지 이원경을 추존하려던 역모의 주모자들도 왕은 폐위시켜야 하지만
안동김씨(安東金氏)는 보전해야 한다는 소리를 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그래도 상황이 급변하면 하루 아침에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었음을 우려했는지
왕실의 외척 즉 왕의 장인 자리는 놓지 않았다.
비록 헌종조 초와 철종조의 안동김씨(安東金氏)의 권력 독점은 조선이 망하는 데 크게 기여한 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이들은 자기 집안이라면 능력도 안 보고 무조건 요직에 앉힌 여흥민씨 (驪興 閔氏)와는 비교하는게 실례일 정도로 일족 관리가
굉장히 철저한 편이다.참고로 이 집안은 무능하다고 판단되면 실권이 없는 한직으로 보내는 건 기본이고 승진도 안 시켜준다.
그 흥선대원군 마저도 안동김씨(安東金氏) 중 유능한 인사들을 판서급으로 기용할 정도였다.
이로 인해 김병학(金炳學,1821~1879)과 김병국(金炳國,1825~1905)을 중앙 정계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고종 초의 정승과 재상직을 역임하며 대원군의 개혁 공신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김병학(金炳學)은 고종 초의 대표적 영의정이었고 대원군의 개혁 정책을 뒷받침했으며,
그의 아우인 김병국(金炳國)은 이조 판서, 호조 판서를 역임했고 사창제 실시에 크게 기여했다.
그렇지만 끝내 정승 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이 한이 됐는지 대원군 하야를 거들었고 덕분에 고종 친정 이후에
이최응과 함께 정승직을 역임할 수 있었다.
김병기는 병조판서, 좌찬성을 역임했다.
대원군 하야 이후에는 김병덕, 김병교, 김병시, 김병지 등 안동김씨(安東金氏)들이 판서급의 요직에 대거 기용되었다.
평양서윤을 역임한 김번(金璠)의 후손들이 장동 김씨 서윤공파로 분파하였다.
왕비 3명, 후궁 1명, 부마도위 2명, 종묘공신 6명, 판서 35명, 당상관(정3품 이상)140여 명 등 조선 후기 모든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고관대작을 배출하였다.
본관을 사칭하는 백성을 능지형에 처하여 대명성(大名聲)에 비하여 인구가 극소수가 되었다.
손자 동지돈녕부사 김극효(金克孝,1542~1618)와 그의 아들 김상용(金尙鎔),김상헌(金尙憲) 형제가 크게 현달하여
인조 때 상신에 올랐다.
김상헌의 손자 김수항(金壽恒)의 아들들인 김창집(金昌集) 영의정,김창협(金昌協) 대제학,김창흡(金昌翕) 사헌부집의,
김창업(金昌業)이조참의,김창즙(金昌緝) 왕자사부, 김창립 형제는 덕망과 명망으로 크게 현달하고 당대를 지배하였던 인물들로 서인 노론 세력의 중추가 되었다.
김창집(金昌集)영의정의 현손 김조순(金祖淳)부원군 딸이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국구로서 영안부원군에 봉해졌고, 헌종의 왕비 효현왕후(孝顯王后),철종의 왕비 철인왕후(哲仁王后)에 이르기까지 세도 가문이 되었다.
이들 후손들은 한양 백악산 아래 장의동에 세거하여 장동김씨(壯洞金氏) 장김(壯金)이라 칭하였다.
대대로 벼슬한 양반 가문이라 하여 '금관자(金貫子)가 서 말인 집안'이라고 말하며,
17세기 이후 명실공히 국반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안동김씨(安東金氏) 세도 정권은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다.
엄밀히 말해선 큰 관심이 없던 것에 가깝지만.천주교 박해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정순왕후와 벽파 세력이었고,
그 이후에 집권한 안동김씨 입장에선 굳이 천주교 잡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안동김씨(安東金氏) 내부에서는 천주교 신자들도 간간히 나왔는데,
대표적인 것이 김상헌(金尙憲)의 봉사손인 김건순으로 이 사람은 병자호란 의 치욕을 씻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청나라를 정벌하려는 망상을 품고 있다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여러 의미에서 시파(時派 : 시류에 영합)다운 면모. 헌종 때의 천주교 박해인 기해박해를 주도한 세력은 풍양조씨 그들 자신도
유자고, 유자 중에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안 지내는 행위를 옹호할 사람도 그걸 주장할 명분이 있는 사람도 없다. 아무리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가 강하나 천주교를 탄압하지 않는다는 것은 적당한 명분을 만들어 몰아낼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기해박해는 풍양 조씨가 안동 김씨를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박해라는 해석이 있다.
안동김씨(吾金)파(派)현황 |
대분류 | 중분류 | 소분류 | |
1 | 감찰공(監察公) 영전(永銓)파 | 감찰공(監察公) 영전(永銓)파 | 진사공(進士公) 홍(弘)파 |
2 | 감찰공(監察公) 영전(永銓)파 | 진사공(進士公) 등(登)파 | |
3 | 감찰공(監察公) 영전(永銓)파 | 구애공(進士公) 응(譍)파 | |
4 | 감찰공(監察公) 영전(永銓)파 | 광릉공(廣陵公 ) 호(琥)파 | |
5 | 감찰공(監察公) 영전(永銓)파 | 장사랑공((將仕郞公) 환(瓛)파 | |
6 | 진사공(進士公) 영균(永勻)파 | 진사공(進士公) 영균(永勻)파 | 진사공(進士公) 영균(永勻)파 |
7 | 부사공(府使公) 영추(永錘)파 | 부사공(府使公) 영추(永錘)파 | 부사공(府使公) 영추(永錘)파 |
8 | 장령공(掌令公) 영수(永銖)파 | 삼당공(三塘公) 영(瑛)파 | 증승지공(贈承旨公) 규보(奎報)파 |
9 | 장령공(掌令公) 영수(永銖)파 | 승의랑공(承議郞公)기보(箕報)극(克)파 | |
10 | 장령공(掌令公) 영수(永銖)파 | 증승지공(贈承旨公)기보(箕報)태(兌)파 | |
11 | 장령공(掌令公) 영수(永銖)파 | 춘당공(春塘公) 기보(箕報)원(元)파 | |
12 | 장령공(掌令公) 영수(永銖)파 | 목사공(牧使公) 성보(星報)파 | |
13 | 장령공(掌令公) 영수(永銖)파 | 원천공(源泉公) 달행(達行)파 | |
14 | 장령공(掌令公) 영수(永銖)파 | 서윤공(庶尹公) 번(璠))파 | 문정공(文正公) 상헌(尙憲)파 |
15 | 장령공(掌令公) 영수(永銖)파 | 휴암공(休庵公) 상준(尙寯)파 | |
16 | 장령공(掌令公) 영수(永銖)파 | 문충공(文忠公) 상용(尙容)파 | |
17 | 장령공(掌令公) 영수(永銖)파 | 부사공(府使公) 상관(尙寬)파 | |
18 | 장령공(掌令公) 영수(永銖)파 | 부윤공(府尹公) 상복(尙宓)파 | |
19 | 장령공(掌令公) 영수(永銖)파 | 학생공(學生公) 선효(善孝)파 | |
20 | 장령공(掌令公) 영수(永銖)파 | 수군절도사공(水軍節度使公)순(珣)파 | 사직서령공(社稷署令公) 생하(生河)파 |
21 | 장령공(掌令公) 영수(永銖)파 | 눌재공(訥薺公) 생명(生溟)파 | |
22 | 정헌공(定獻公) 계행(係行)파 | 정헌공(定獻公) 계행(係行)파 | 참봉공(參奉公) 극인(克仁)파 |
23 | 정헌공(定獻公) 계행(係行)파 | 진사공(進士公) 극의(克義)파 | |
24 | 정헌공(定獻公) 계행(係行)파 | 생원공(生員公) 극례(克禮)파 | |
25 | 정헌공(定獻公) 계행(係行)파 | 학생공(學生公) 극지(克智)파 | |
26 | 정헌공(定獻公) 계행(係行)파 | 군수공(郡守公) 극신(克信)파 | |
27 | 어담공(漁潭公) 삼익(三益))파 | 어담공(漁潭公) 삼익(三益))파 | 어담공(漁潭公) 삼익(三益))파 |
28 | 주부공(注簿公) 삼우(三友)파 | 계공랑공(啓功郞公) 맹구(孟龜)파 | 참봉공(參奉公) 시좌(時佐)파 |
29 | 주부공(注簿公) 삼우(三友)파 | 참봉공(參奉公) 시량(時亮)파 | |
30 | 주부공(注簿公) 삼우(三友)파 | 생원공(生員公) 시우(時佑)파 | |
31 | 주부공(注簿公) 삼우(三友)파 | 생원공(生員公) 이려(以礪)파 | |
32 | 주부공(注簿公) 삼우(三友)파 | 등암공(藤菴公) 계구(季龜)파 | 습독공(習讀公) 엄(淹)파 |
33 | 주부공(注簿公) 삼우(三友)파 | 첨사공(僉使公) 온(溫)파 | |
34 | 주부공(注簿公) 삼우(三友)파 | 항재공(恒薺公) 낙(洛)파 | |
35 | 주부공(注簿公) 삼우(三友)파 | 낙와공(樂窩公) 치림(致林)파 | |
36 | 참봉공(參奉公) 언적(彦迪)파 | 별장공(別將公) 홍(洪)파 | 계공랑공(啓功郞公) 지형(之炯)파 |
37 | 참봉공(參奉公) 언적(彦迪)파 | 증참의공(贈參議公) 지찬(之燦)파 | |
38 | 참봉공(參奉公) 언적(彦迪)파 | 자헌공(資憲公) 지병(之炳)파 | |
39 | 참봉공(參奉公) 언적(彦迪)파 | 참봉공(參奉公) 언적(彦迪)파 | 별장공(別將公) 홍(洪)파 |
40 | 참봉공(參奉公) 언적(彦迪)파 | 국헌공(菊軒公) 준(浚)파 | |
41 | 참봉공(參奉公) 언적(彦迪)파 | 학생공(學生公) 수정(遂晶)파 | |
42 | 호장공(戶長公) 처상(處商)파 | 호장공(戶長公) 처상(處商)파 | 호장공(戶長公) 처상(處商)파 |
43 | 호장공(戶長公) 처상(處商)파 | 현감공(縣監公) 지철)파 | 현감공(縣監公) 지철(之哲)파 |
44 | 사헌공(司憲公) 원수(元水)파 | 사헌공(司憲公) 원수(元水)파 | 사헌공(司憲公) 원수(元水)파 |
45 | 사과공(司果公) 열(烈)파 | 사과공(司果公) 열(烈)파 | 사과공(司果公) 열(烈)파 |
46 | 선군공(選軍公) 여중(呂重)파 | 선군공(選軍公) 여중(呂重)파 | 판관공(용(龍)파 |
47 | 선군공(選軍公) 여중(呂重)파 | 시중공(학(鶴)파 | |
48 | 예의소승공(禮儀少丞公) 생(生)파 | 예의소승공(禮儀少丞公) 생(生)파 | 예의소승공(禮儀少丞公) 생(生)파 |
안동김씨,오김(安東金氏.吾金) | |
관향 | 경상북도 안동시(慶尙北道 安東市) |
시조 | 김선평(金宣平) |
중시조 | 김습돈(金習敦) |
집성촌 |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 종로구(鍾路區) 경기도(京畿道)고양시(高陽市),광주군(廣州郡),양평군(楊平郡),포천군(抱川郡),여주군(驪州郡),이천군(利川郡), 용인군(龍仁郡),화성군(華城郡),시흥군(始興郡),김포군(金浦郡),강화군(江華郡), 강원도(江原道)명주군(溟州郡),춘성군(春城郡),양양군(襄陽郡),삼척군(三陟郡),김화군(金化郡),철원군(鐵原郡), 충청북도(忠淸北道)청원군(淸原郡),진천군(鎭川郡),괴산군(槐山郡),음성군(陰城郡), 충청남도(忠淸南道)연기군(燕岐郡),논산군(論山郡),부여군(扶餘郡),당진군(唐津郡),천원군(天原郡), 전라북도(全羅北道)완주군(完州郡),순창군(淳昌郡),고창군(高敞郡),익산군(益山郡), 전라남도(全羅南道)곡성군(谷城郡),고흥군(高興郡), 경상북도(慶尙北道)안동군(安東郡),달성군(達城郡),의성군(義城郡),청송군(靑松郡),양양군(襄陽郡), 상주군(尙州郡),문경군(聞慶郡),예천군(醴泉郡),영주군(榮州郡),봉화군(奉化郡), 경상남도(慶尙南道)진양군(晉陽郡),의령군(宜寧郡),함안군(咸安郡),창녕군(昌寧郡),함양군(咸陽郡),거창군(居昌郡), 평안북도(平安北道)구성군(龜城郡),박천군(博川郡), 황해도(黃海道)연백군(延白郡),수안군(遂安郡),용천군(龍川郡), |
주요인물 | 순원왕후(純元王后),효현왕후(孝顯王后),철인왕후(哲仁王后),영빈김씨(寧嬪金氏), 김삼근(金三近),김계권(金係權),김계행(金係行),김 번(金 璠),김원효(金元孝),김극효(金克孝),김상용(金尙容),김상준(金尙寯), 김상헌(金尙憲),김광욱(金侊煜),김광찬(金光燦),김광혁(金光爀),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김창집(金昌集),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김창업(金昌業),김이소(金履素),김이교(金履喬),김이도(金履度),김달순(金達淳),김제겸(金濟謙),김신겸(金信謙), 김성행(金省行),김원행(金元行),김문근(金汶根),김병기(金炳冀),김이재(金履載),김학순(金學淳),김매순(金邁淳),김난순(金蘭淳), 김유근(金逌根),김홍근(金弘根),김응근(金應根),김영근(金泳根),김조근(金祖根),김수근(金洙根),김세균(金世均),김병덕(金炳德), 김병주(金炳㴤),김병지(金炳地),김병필(金炳弼),김조순(金祖淳),김좌근(金左根),김문근(金汶根),김병연(金炳淵),김병학(金炳學), 김병덕(金炳德),김병운(金炳雲),김성근(金聲根),김보근(金輔根),김명규(金明圭),김병국(金炳國),김병시(金炳始),김옥균(金玉均), 김덕규(金德圭),김영진(金英鎭),김좌진(金佐鎭),김석진(金奭鎭),김성진(金晟鎭),김익진(金翼鎭),김시태(金時泰),김응균(金應均), 김가진(金嘉鎭),김광림(金光琳),김종한(金宗漢),김증한(金曾漢),김두한(金斗漢),김수한(金守漢),김시현(金始顯),김모임(金慕妊), 김범일(金範鎰),김병관(金炳官),김인기(金仁基),김학진(金鶴鎭),김무연(金武然),김창규(金昌圭),김충환(金忠環),김성락(金成洛), 김성진(金晟鎭),김호진(金浩鎭),김성진(金聖鎭),김형동(金亨東),김명동(金明東),김동인(金東仁),김복동(金復東),김을동(金乙東), 김성동(金盛東),김익동(金益東),김익기(金翼基),김상년(金尙年),김범일(金範鎰),김병연(金炳淵),김복한(金復漢),김의한(金毅漢), 김휘동(金暉東),김성동(金聖東),김현동(金賢東),김용기(金容基),김명년(金命年), *무순* |
후손
인물
성함 | 출생 | 종파 | 관직 |
근대 이전 | |||
김조순(金祖淳) | 1765년 | 문정공파 | 부원군,[장원] |
김조근(金祖根) | 1793년 | 문정공파 | 부원군 |
김문근(金汶根) | 1801년 | 문정공파 | 부원군 |
순원왕후(純元王后) | 1789년 | 문정공파 | 순조의 왕후 |
효현왕후(孝顯王后) | 1828년 | 문정공파 | 헌종의 왕후 |
철인왕후(哲仁王后) | 1837년 | 문정공파 | 철종의 왕후 |
김수흥(金壽興) | 1626년 | 문정공파 | 영의정,[장원] |
김수항(金壽恒) | 1629년 | 문정공파 | 영의정[장원] |
김창집(金昌集) | 1648년 | 문정공파 | 영의정[장원] |
김흥근(金興根) | 1796년 | 문정공파 | 영의정 |
김좌근(金左根) | 1797년 | 문정공파 | 영의정 |
김병학(金炳學) | 1821년 | 문정공파 | 영의정 |
김병국(金炳國) | 1825년 | 문정공파 | 영의정[장원] |
김병시(金炳始) | 1832년 | 문정공파 | 영의정[장원] |
김석진(金奭鎭) | 1843년 | 문정공파 | 영의정 |
김상헌(金尙憲) | 1570년 | 문정공 | 좌의정[장원] |
김이소(金履素) | 1735년 | 문정공파 | 좌의정 |
김홍근(金弘根) | 1788년 | 문정공파 | 좌의정 |
김상용(金尙容) | 1561년 | 문충공파 | 우의정[장원] |
김달순(金達淳) | 1760년 | 문정공파 | 우의정 |
김이교(金履喬) | 1764년 | 문충공파 | 우의정[장원] |
김창협(金昌協) | 1651년 | 문정공파 | 대제학[장원] |
김응균(金應均) | 1801년 | 문충공파 | 예조판서[장원] |
김온순(金蘊淳) | 1776년 | 문충공파 | 예조참판[장원] |
김매순(金邁淳) | 1812년 | 문충공파 | 예조참의[장원] |
김병운(金炳雲) | 1814년 | 문정공파 | 한성판윤 |
영빈김씨 (寧嬪金氏) | 1669년 | 문정공파 | 숙종의 후궁 |
23세손(根) | |||
김성근(金聲根) | 1835년 | 문충공파 | 조선귀족[장원] |
24세손(炳) | |||
김병익(金炳翊) | 1837년 | 문충공파 | 조선귀족[장원] |
25세손(均/圭) | |||
김덕규(金德圭) | 1941년 | 참봉공파 | 국회부의장 |
김옥균(金玉均) | 1851년 | 문충공파 | 급진개화파[장원] |
김병규(金炳奎) | 1874년 | 문충공파 | 중추원참의[장원] |
김서규(金瑞圭) | 1875년 | 문충공파 | 중추원참의[장원] |
김호규(金虎圭) | 1911년 | 문충공파 | 조선귀족 |
김창규(金昌圭) | 1920년 | 참봉공파 | 공군참모총장 |
김충환(金忠環) | 1954년 | 생원공파 | 국회의원 |
김성락(金成洛) | 1919년 | 예의소승공파 | 국회의원 |
26세손(鎭) | |||
김좌진(金佐鎭) | 1889년 | 문충공파 | 독립운동가 |
김성진(金晟鎭) | 1905년 | 문충공파 | 보건사회부장관 |
김영진(金英鎭) | 1876년 | 문충공파 | 중추원참의 |
김경진金慶鎭) | 1895년 | 문충공파 | 중추원참의[장원] |
김호진(金浩鎭) | 1939년 | 진사공파 | 고용노동부장관 |
김성진(金聖鎭) | 1931년 | 문정공파 | 문화체육관광부장관 |
김익진(金翼鎭) | 1896년 | 문충공파 | 검찰총장 |
김학진(金鶴鎭) | 1838년 | 문충공파 | 조선귀족 |
김석진(金鶴鎭) | 1843년 | 문충공파 | 조선귀족 |
김가진(金嘉鎭) | 1846년 | 문충공파 | 독립운동가 |
김대진(金大鎭) | 1917년 | 어담공파 | 국회의원 |
김덕진(金德鎭) | 1954년 | 문정공파 | 부장판사 |
김동진(金東鎭) | 1891년 | 문충공파 | 독립운동가 |
김종진(金宗鎭) | 1901년 | 문충공파 | 독립운동가 |
27세손(漢) | |||
김수한(金守漢) | 1928년 | 예의소승공파 | 국회의장 |
김영한(金榮漢) | 1857년 | 문충공파 | 중추원참의[장원] |
김창한(金榮漢) | 1870년 | 문충공파 | 중추원참의[장원] |
김종한(金宗漢) | 1844년 | 문충공파 | 조선귀족[장원] |
김덕한(金德漢) | 1874년 | 문정공파 | 조선귀족[장원] |
김혜경(金恵京) | 1966년 | 문충공파 | 이재명의 부인 |
김증항(金曾漢) | 1920년 | 문충공파 | 문교부차관 |
김광림(金光琳) | 1948년 | 호장공(처상)파 | 재경부차관,국회의원 |
김중한(金重漢) | 1909년 | 호장공(처상)파 | 국회의원 |
김두한(金斗漢) | 1918년 | 문충공파 | 국회의원 |
김복한(金復漢) | 1860년 | 문충공파 | 독립운동가 |
김의한(金毅漢) | 1900년 | 문충공파 | 독립운동가 |
28세손(東) | |||
김옥숙(金玉淑) | 1935년 | 참봉공파 | 노태우 대통령 영부인 |
김성동(金盛東) | 1954년 | 예의소승공파 | 국회의장비서실장 |
김형동(金亨東) | 1975년 | 생원공(극례)파 | 국회의원 |
김명동(金明東) | 1903년 | 문충공파 | 국회의원 |
김동인(金東仁) | 1927년 | 진사공파 | 국회의원 |
김복동(金復東) | 1933년 | 참봉공파 | 국회의원 |
김을동(金乙東) | 1945년 | 문충공파 | 국회의원 |
김익동(金益東) | 1930년 | 참봉공파 | 국립대학총장 |
김휘동(金暉東) | 1944년 | 사헌공파 | 안동시장 |
29세손(顯) | |||
김세현(金始顯) | 1895년 | 문충공파 | 조선귀족 |
김시현(金始顯) | 1883년 | 승의랑공파 | 국회의원 |
김엽(金燁) | 1933년 | 사직서령공파 | 국립대학총장 |
30세손(基/年) | |||
김모임(金慕妊) | 1935년 | 시중공파 | 보건복지부장관 |
김인기(金仁基) | 1933년 | 첨사공파 | 공군참모총장 |
김익기(金翼基) | 1916년 | 사헌공파 | 국회의원 |
김상년(金尙年) | 1929년 | 승의랑공파 | 국회의원 |
김용기(金容基) | 1909년 | 시중공파 | 독립운동가 |
31세손(鍾/鎰) | |||
김범일(金範鎰) | 1950년 | 증참의공파 | 대구광역시장 |
34세손(然) | |||
김무연(金武然) | 1921년 | 계공랑공파 | 경상북도지사 |
24세손
김병연(金炳淵) -1807년-시인- 휴암공파
25세손
김충립(金忠立) -1947년-목사- 승의랑공파
26세손
김우진(金祐鎭) -1897년-작가- 승의랑공파
김기진(金基鎭) -1903년-소설가- 문충공파
27세손
김을한(金乙漢) -1905년-기자- 문정공파
김순한(金淳漢) -1974년-부장판사- 생원공파
김민지(金玟志) -1985년-아나운서- 문충공파
28세손
긴성동(金聖東) -1947년-소설가- 문충공파
김경동(金慶東) -1955년-정당인- 문충공파
김현동(金賢東) -111970년-MC - 문정공파
김창동(金彰東) -2000년-프로게이머- 참봉공파
29세손
김동현(金東顯) -1998년-가수- 문정공파
30세손
김명년(金命年) -192년-공무원- 국헌공파
김범년(金範年) -1958년-공무원- 구애공파
김효식(金孝植) -1938년-여배우- 장사랑공파
김성년(金聖年) -1977년-기초의원- 예의소승공파
김정년(金政年) 1992년-농구선수- 진사공파
31세손
김종일(金鐘鎰) -1962년-육상선수- 문정공파
32세손
김호연재(金浩然齋) - 1681년 - 시인 - 문정공파
항렬
세수 | 항렬자 |
22世 | 순(淳) |
23世 | 근(根) |
24世 | 병(炳) |
25世 | 규(圭)/균(均) |
26世 | 진(鎭) |
27世 | 한(漢) |
28世 | 동(東) |
29世 | 현(顯) |
30世 | 년(年)/기(基) |
31世 | 일(鎰)/종(鍾) |
32世 | 구(求) |
33世 | 모(模) |
34世 | 연(然) |
35世 | 배(培) |
36世 | 선(銑) |
37世 | 원(源) |
38世 | 영(榮) |
39世 | 사(思) |
40世 | 준(浚) |
41世 | 선(善) |
42世 | 택(澤) |
43世 | 식(植) |
44世 | 환(煥) |
45世 | 철(喆) |
석실서원은 1654년김상용(金尙鎔),김상헌(金尙憲)형제를 배향한 석실사로 1663년에 사액되었다.
이후 김상헌(金尙憲)의 후손들이 서원 교육을 담당하며 북벌론의 재야 중심이 되어 정치적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철종 대에 들어 김씨 종친들이 대대로 배향되어 사묘가 되었다.
태장재사는 시조인 김선평(金宣平)의 묘단을 지키고 제사를 받들기 위해 1750년에 건립되었다.
1624년(인조 4) 결국 『여지승람(輿地勝覽)』의 “부의 서쪽, 천등산 좌측 줄기에 봉우리가 하나 있으니 태장이라고 한다”는
기록에 의거해서 여기 설단을 하고 그 아래 재사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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