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항으로 가는 길 : 안도현의 <외롭고 높고 쓸쓸한> 중에서
너, 문득 떠나고 싶을 때가 있지?
마른 코딱지 같은 생활 따위 눈 딱 감고 떼어내고 말이야
비로소 여행이란, 인생의 쓴맛 본자들이 떠나는 것이니까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번쯤 내동댕이쳐 보는 거야
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 거야
부안읍에서 버스로 삼십 분쯤 달리면
객지밥 먹다가 석삼 년만에 제 집에 드는 한량처럼
거드럭거리는 바다가 보일 거야
먼 데서 오신 것 같은데 통성명이나 하자고,
조용하고 깨끗한 방도 있다고,
바다는 너의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대수롭지 않은 듯 한 마디 던지면 돼
모항에 가는 길이라고 말이야 모항을 아는 것은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거든
모항 가는 길은 우리들 생이 그래왔듯이
구불구불하지, 이 길은 말하자면
좌편향과 우편향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한데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드는 싸움에나섰다가 지친 너는,
너는 비록 지쳤으나 승리하지 못했으나 그러나, 지지는 않았지
저 잘난 세상쯤이야 수평선 위에 하늘 한 폭으로 걸어두고
가는 길에 변산해수욕장이나 채석강 쪽에서 잠시
바람 속에 마음을 말려도 좋을 거야
그러나 지체하지는 말아야 해
모항에 도착하기 전에 풍경에 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촌스러우니까 조금만 더 가면 훌륭한 게 나올 거라는
믿기 싫지만, 그래도 던져버릴 수 없는 희망이
여기까지 우리를 데리고 온 것처럼 모항도 그렇게 가는 거야
모항에 도착하면 바다를 껴안고 하룻밤 잘 수 있을 거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너는 물어 오겠지
아니, 몸에다 마음을 비벼 넣어 섞는 그런 것을
꼭 누가 시시콜콜 가르쳐 줘야 아나?
걱정하지 마, 모항이 보이는 길 위에 서기만 하면
이미 모항이 네 몸 속에 들어와 있을 테니까
2. 답사 지역지도
3. 부안군 지역개관
1. 부안군(역사)
〔고 대〕 구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군의 동진강 하구 해안단구 취락지에서 민무늬토기의 파편과 함께 깬돌말·돌도끼·돌화살촉 등이 출토되었다. 이는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현상으로서 초기 농경문화의 형성을 입증해 준다.
고인돌이 부안을 비롯해 고창지방에 밀집되어 있고 동진강·만경강을 거쳐 내륙지방에 산재해 있어 청동기문화가 해안으로부터 내륙으로 전파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삼한시대에는 마한 54소국 중 지반국(支半國)이 부안지역에 있었다.
백제시대에는 개화현(皆火縣)이라 칭했으며,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한 뒤 신라 땅이 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는 부령현(扶寧縣) 혹은 계발(戒發)이라 하여 고부군(古阜郡)에 예속시켰다.
〔고 려〕 고려 초에 감무를 두었는데 보안현(保安縣)이 이에 예속되었다. 보안현은 본래 백제의 흔량매현(欣良買縣)이었는데, 신라 때 희안(喜安)으로 개칭되어 고부군에 이속되었다. 고려 때 보안으로 고쳐졌으며 한때 낭주(浪州)라 불리다가 보안감무가 겸임하게 되었다.
이 지방은 해안선을 낀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염창산성을 비롯한 13개의 크고 작은 성과 계화도봉수대·격포리봉수대, 그리고 진(鎭)과 포(浦)가 많이 산재해 있다. 또, 제안포(濟安浦, 옛이름 撫浦)에는 고려시대의 12조창 중 하나인 안흥창(安興倉)이 있어 임피현의 진성창과 함께 전라도 지방의 세미를 경창까지 운송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보안면 유천리 도요지는 고려청자의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고려 말 우왕대에 이르러서는 보안과 부령현에 각각 감무가 설치되었다. 경상도와 전라도에 자주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가 1355년(공민왕 4) 7월에 검모포(黔毛浦)에 침입하여 조운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 명나라 사람 장인보(張仁甫) 등 6명을 도강(都綱)으로 삼아 각각 당선(唐船) 1척과 전졸 150명을 주어 전라도 조세를 운반하게 했으나, 왜구와 싸우다 크게 패하여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1376년(우왕 2) 왜선 50여 척이 웅연(熊淵)에 내박하여 적현을 넘어 침입, 동진교를 부수어 조운이 중단되었으나 상원수 나세(羅世)와 변안열(邊安烈)이 적병 1천여 명을 행안산(幸安山)에서 격파하였다.
〔조 선] 1414년(태종 14) 보안현을 부령현에 병합했다가 1415·1416년에 통합, 분리되어 두 현의 이름을 따서 부안현이라 개칭하였다. 1417년 흥덕진(興德鎭)을 폐하고 부안에 이속시켜 부안진이라고 개칭했으며, 병마사를 두어 판사를 겸임하게 하였다. 1423년(세종 5) 첨절제사로 바꾸었다가 곧 다시 현감을 두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부안현의 호수는 323호, 인구는 1,662명이었다. 정유재란 때는 의병장 채홍국(蔡弘國) 등이 동지를 규합, 정유이창동맹(丁酉吏倡同盟)을 맺고 호벌치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유(李瑜)의 부인 김씨도 남편의 전사를 보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싸우다가 순절했고, 이 밖에 많은 의병이 활약하였다. 1608년(선조 41)에 정유재란 당시 불타 버린 부안향교를 지금의 서외리에 재건하였다.
이 고장은 실학의 대가인 유형원(柳馨遠)이 태어난 곳으로 보안면 우동리에 유적지가 있다. 1862년(철종 13)에 전라도 각지의 민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호남선무사(湖南宣撫使) 조구하(趙龜夏)의 행렬을 부안농민들이 가로막고 관리를 죽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근 대〕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이 지방의 농민들은 백산(白山)에서 봉기하여 관군에 대항하였다. 1895년 갑오개혁 때 지방관제 개편으로 군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부군에 속했던 백산·거마·덕림 등이 부안으로 이속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 곳에서는 3월 30일 부안읍 장날을 이용해 은희송(殷熙松) 등이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4월 18일에는 줄포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1943년 부령면이 부안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1읍 10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근대 인물로는 1905년 을사오적을 처단해야 한다고 상소하고 계화도에 은거하여 후진 양성에 힘쓴 전우(田愚)와 전생애를 항일투쟁과 육영사업에 바친 이영일(李永日), 한국의 대표적인 전원시인 신석정(辛夕汀),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한 고제신(高濟臣)과 김환(金桓) 등이 있다.
〔현 대〕 1963년부터 시작된 계화도 간척지공사가 마무리되어 1978년부터 계화도에서 쌀 추수가 시작되었다. 이 지역에는 간척공사로 수몰된 임실군 주민이 집단이주하였다. 1983년 2월 15일 계화출장소가 계화면으로, 진서출장소가 진서면으로 각각 승격했으며, 1987년 1월 1일 산내면이 변산면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1994년 12월 1일에 동진면 당산리 일부를 계화면 북창리로 이관하는 면간 경계를 조정하였다.
나. 부안군(유물·유적)
선사시대유적으로는 변산면의 대항리패총(전라북도 기념물 제50호)과 하서면 석상리의 부안구암리지석묘군(사적 제103호)을 비롯해 보안면 영전리, 상서면 감교리, 하서면 백련리 등지에 고인돌군이 있으며, 보안면 상입석리에는 보안입석(전라북도 민속자료 제6호)이 있다.
성곽으로는 조선 태종 때 축성된 부안진성(扶安鎭城)과 상서면 감교리의 우금산성(禹金山城, 전라북도 기념물 제20호) 등이 남아 있다. 성지로는 백산면 용계리의 백산성지(白山城址, 전라북도 기념물 제31호), 주산면의 사산리토성지·소산리산성, 고려시대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계화면 창북리의 염창산성(廉倉山城)·수문산성, 동진면 당상리의 구지산토성지, 행안면의 역리산성 등 13개의 산성이 있다.
이 군은 예부터 해안선을 낀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제안포·검모포진(黔毛浦鎭)·격포진(格浦鎭)·여섭포(勵涉浦)·위도진(蝟島鎭) 등 진과 포가 많다. 또, 북쪽의 만경지역과 남쪽의 점방산(占方山)을 연결하는 계화도봉수대·월고리봉수대·점방산봉수대 등도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진서면 석포리에 내소사(來蘇寺, 옛이름 蘇來寺)를 비롯해 692년(신라 신문왕 12) 부설선사(浮雪禪師)가 창건한 월명암(月明庵), 상서면 감교리에 개암사(開巖寺)·개암사대웅전(보물 제292호) 등이 현존한다. 절터로는 변산면 중계리의 부안실상사지(扶安實相寺址, 전라북도 기념물 제77호)와 등운사지(登雲寺址)·영은사지(靈隱寺址)·백운사지(白雲寺址) 등이 있다.
특히, 내소사일원(전라북도 기념물 제78호)은 경관이 빼어나며, 경내에는 고려시대 대표적인 동종인 내소사고려동종(보물 제277호)이 있다. 그 밖에 상서면에 있는 청림리석불좌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3호)과 내소사삼층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4호), 내소사설선당과 요사(來蘇寺說禪堂─寮舍,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5호),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개암사동종(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6호) 등이 유명하다.
유교문화재로는 부안읍 서외리에 부안향교대성전(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93호), 서원으로는 부안읍 연곡리의 도동서원(道東書院)과 옹중리의 옹정서원(甕井書院), 상서면 가오리의 동림서원(東林書院)과 감교리의 청계서원(淸溪書院), 보안면 영전리의 유천서원(柳川書院)이 있고, 사우로는 부안읍의 노휴재(老休齋), 계화면의 계화재(繼華齋), 하서면의 효충사(效忠祠) 등이 있으며, 이밖에도 위도면 진리에는 위도관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01호)가 있다.
그리고 하서면 청호리에 고희외문중유물(高曦外門中遺物, 보물 제739호), 보안면 우동리에 부안김씨종중고문서(扶安金氏宗中古文書, 보물 제 900호)가 보관되어 있고, 보안면 남포리에는 채홍국 등이 중심이 되어 정유이창동맹을 맺고 왜병을 맞아 싸운 사실을 기리는 정유재란호벌치전적지(전라북도 기념물 제30호)가 있다.
또한, 하서면 백련리에 왜몰치(倭歿峙), 보안면 우동리에 반계선생유적지(磻溪先生遺蹟址, 전라북도 기념물 제22호), 계화면 계화리에 간재선생유적지(艮齋先生遺蹟址, 전라북도 기념물 제23호), 하서면 청호리에 고홍건신도비(高弘建神道碑,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11호), 부안읍 봉덕리에 이매창묘(李梅窓墓, 전라북도 기념물 제65호) 등의 유적이 있다.
고가옥으로는 줄포면 줄포리에 부안김상만가옥(金相万家屋, 중요민속자료 제150호)이 있고, 도요지로는 고려백자의 요지로 알려진 보안면의 부안유천리도요지(사적 제69호)와 주산면의 사산리와요지(전라북도기념물 제40호), 소산면의 백자요지, 진서면의 부안진서리도요지(사적 제70호), 보안면의 우동리분청사기도요지, 상서면의 감교리분청사기도요지 등이 있다.
그 밖에 부안읍 서외리의 부안서문안당산(중요민속자료 제18호), 동중리의 부안동문안당산(중요민속자료 제19호)·남문안당산(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8호), 내요리의 돌모산당산(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9호), 계화면 궁안리의 쌍조석간(雙鳥石竿,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7호), 백산면의 죽림리석장승(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0호), 변산면 격포리에 수성당(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58호) 등 민간신앙과 관련된 문화재가 있다.
또, 변산면 격포리의 채석강(彩石江, 전라북도 기념물 제28호)·적벽강(전라북도 기념물 제29호) 등지는 자연경관이 수려하기로 유명하다. 천연기념물은 부안도청리의 호랑가시나무군락(천연기념물 제122호), 부안격포리의 후박나무군락(천연기념물 제123호), 부안중계리의 꽝꽝나무군락(천연기념물 제124호)이 변산면에 집중되어 있고, 이 군에서만 볼 수 있는 변란(邊蘭) 등이 자생하고 있다.
참고문헌
新增東國輿地勝覽, 扶安邑誌, 全羅北道誌 上·下(全羅北道編纂委員會, 1969),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1979), 변산의 얼(부안군, 1982), 韓國地名要覽(建設部國立地理院, 1982), 韓國口碑文學大系(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3), 地方行政區域要覽(行政自治部, 2000).
3. 반계 유형원
1622(광해군 14)∼1673(현종 14).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관(寬)의 9세손으로, 현령 위(詣)의 증손자이고, 할아버지는 정랑 성민(成民)이고, 아버지는 예문관검열 흠(呻)이며, 어머니는 참찬 이지완(李志完)의 딸이다. 서울 출신. 18세에 혼인했는데, 처는 심수경(沈守慶)의 증손녀이자 부사 심은(沈誾)의 딸이다.
〔생애〕 임진왜란 뒤 사회가 극도로 어지럽고 양반 사회의 모순이 노정되어 가던 17세기초에 한성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전형적인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글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으나, 불행히도 2세 때에 아버지를 잃게 되었다. 당시 아버지 흠은 유몽인(柳夢寅)의 옥에 연좌되어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옥사하였다.
5세 때부터 취학해 외삼촌 이원진(李元鎭)과 고모부 김세렴(金世濂)을 모시고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원진은 이익(李瀷)의 당숙으로 하멜 표류사건 당시 제주목사로 있었던 사람이다. 김세렴은 함경도와 평안도의 감사를 역임했고, 대사헌까지 지낸 당대의 이름 높은 외교관이기도 하다.
15세가 되던 해인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 원주로 피난했고, 다음 해에는 지금의 양평땅인 지평 화곡리(砥平花谷里)로 이사했다가 다음 해에 다시 여주 백양동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하였다.
1644년 23세 때에는 할머니의 상, 1648년 27세 되던 해에는 어머니의 상을 당했으며, 탈상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과거에 응시했으나 모두 낙방하였다. 그 뒤 1651년(효종 2) 30세 때에는 할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 2년 뒤 복상(服喪)을 마치자, 그 해에 32세의 젊은 나이로 멀리 전라도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에 은거하기 시작해 20년 간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남 6녀를 남기고 1673년에 죽었다.
반계라는 호도 이곳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반동에 은거하면서 오랜 세월을 걸려서 쓴 ≪반계수록 磻溪隨錄≫ 26권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반계수록과 기타 저술〕≪반계수록≫은 그의 주저(主著)로서, 그 동안 겪은 농촌 생활에서의 체험과 농촌 경제의 안정책 등을 제시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책으로서 정책론(政策論)이라 하겠다.
이 책의 성립 연대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으나 연보 등을 통해 추정하면, 그가 우반동으로 와서 은거 생활을 시작한 지 6년 후에서 11년 사이로, 그의 나이 38세부터 43세 사이가 될 것 같다.
≪반계수록≫의 주된 내용은 ① 전제(田制 : 토지 제도), ② 전제후록(田制後錄 : 재정·상공업 관계), ③ 교선지제(敎選之制 : 향약·교육·고시 관계), ④ 임관지제(任官之制 : 관료 제도의 운용 관계), ⑤ 직관지제(職官之制 : 정부 기구의 관계), ⑥ 녹제(祿制 : 관리들의 보수 관계), ⑦ 병제(兵制 : 군사 제도의 운용 관계), ⑧ 병제후록(兵制後錄 : 축성·병기·교통·통신 관계), ⑨ 속편의 의례·언어·기타, ⑩ 보유편(補遺篇)의 군현제(郡縣制 : 지방 제도의 관계) 등으로서 국가 체제의 전반적인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반계수록≫ 이외에도 정치·경제·역사·지리·군사·언어·문학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수 십 권의 저서를 남겼다고 전하나 불행하게도 ≪반계수록≫ 이외에는 서목(書目)만이 전해진다.
주요한 것으로 ① 성리학 관계의 ≪주자찬요 朱子纂要≫·≪이기총론 理氣總論≫, ② 지리서로는 나이 35세 때인 1656년에 박자진(朴自振)과 함께 ≪동국지지 東國地志≫에 대해 깊이 토론한 끝에 지리의 식견을 정리한 ≪여지지 輿地志≫를 비롯해 ≪지리군서 地理群書≫ 등이 있으며, ③ 역사서로는 44세 때 편찬한 ≪동국사강목조례 東國史綱目條例≫를 비롯한 ≪동사괴설변 東史怪說辨≫·≪동국가고 東國可考≫ 등이 있다.
그리고 ④ 병법서로 ≪무경사서초 武經四書抄≫·≪기효신서절요 紀茸新書節要≫, ⑤음운(音韻) 관계의 ≪정음지남 正音指南≫, ⑥ 문학 관계의 ≪도정절집 陶靖節集≫·≪동국문초 東國文抄≫, ⑦ 기타의 저술로 ≪기행일록 紀行日錄≫ 등을 꼽을 수 있다.
죽은 뒤 그의 명성이 얼마 동안은 세상에 묻혀 있다가 100년 뒤에 와서야 인물됨과 ≪반계수록≫의 내용이 알려지고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당시 국왕(영조)도 관심을 가져 초고(草稿)를 직접 읽어보고 크게 칭찬함과 동시에 인쇄해 세상에 널리 반포하도록 명했다고 한다.
왕명을 받아 ≪반계수록≫의 서문과 함께 세상에 알린 사람이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 이미(李掉)였고, 반포한 때가 1770년 (영조 46)으로 그가 죽은 지 꼭 97년 뒤의 일이다.
이 일이 있기 이전 1753년에는 조정에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에게 통정대부로서 집의 겸 세자시강원진선을 추증했고, 1768년 10월에는 판중추 홍계희(洪啓禧)가 찬한 묘비가 죽산부사 유언지(兪彦摯)에 의해 세워졌다. 그리고 1770년에는 다시 통정대부 호조참의 겸 세자시강원찬선에 증직되었다.
〔반계수록에 나타난 사상적 특징〕≪반계수록≫에 나타난 사상적 특징은 부민(富民)·부국(富國)을 위해 제도적인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토지 제도를 개혁해야 하며, 그렇게 해야만 농민들에게 최소한의 경작지를 분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형원의 최대 목표는 자영농민(自營農民)을 육성해 민생의 안정과 국가 경제를 바로잡자는 것이었다. 토지는 국가가 공유하고 농민들에게 일정량의 경지만을 나누어주는 균전제를 주장하였다. 즉, 그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과 균전제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 밖에도 병농일치의 군사 제도, 즉 부병제(府兵制)의 실시를 강조하였다. 원래 그가 주장한 균전제와 부병제는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에서 중시한 제도였다. 또한, 국가 재정을 확립시키기 위해 세제와 녹봉제의 정비도 주장하였다. 세제는 조(租)와 공물(貢物)을 합쳐 경세(經稅)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하며, 경세는 수확량의 20분의 1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과거제의 폐지와 공거제(貢擧制) 실시, 신분제 및 직업 세습제의 개혁, 학제와 관료제의 개선 등 다방면에 걸쳐서 국운을 건 과감한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모든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지면 천덕(天德)과 왕도(王道)가 일치되어 이상국가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와 같은 주장은 실제로 실행되지는 못했으나, 개혁 의지와 사상은 당시 재야 지식인들의 이상론(理想論)이 되었으며, 후학들의 학풍 조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학문은 실학을 학문의 위치로 자리잡게 했으며, 이익·안정복(安鼎福) 등으로 이어져 뒤에 후기 실학자로 불리는 정약용(丁若鏞) 등에게까지 미쳐 실학을 집대성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磻溪隨錄, 星湖文集, 順菴文集, 儒敎淵源, 柳馨遠(李勳求, 朝鮮名人傳, 朝光社, 1947), 磻溪柳馨遠硏究 上·下(千寬宇, 歷史學報 2·3, 1952), 磻溪柳馨遠의 社會改革思想(鄭求福, 歷史學報 45, 1970), 磻溪柳馨遠(千寬宇, 韓國史의 再發見, 一潮閣, 1975), 磻溪柳馨遠硏究(千寬宇, 近世朝鮮史硏究, 一潮閣, 1979), 磻溪柳馨遠의 商業振興論(元裕漢, 弘益大學校論文集 15, 1984), 磻溪柳馨遠의 官職論考(李存熙, 邊太燮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三英社, 1985).
5. 부안 유천리 도요지
소재: 전북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일대
사적: 제69호
고려 시대 중기의 청자 요지로 일제 강점기부터 심한 도굴로 인하여 최전성기의 우수한 파 편을 간직한 요지의 퇴적층은 거의 완전히 파괴된 상태이며, 그 밖의 지역도 거의 전답으로 변하여 보존 상태가 극히 불량하다. 요지는 모두 40여 개소로 대부분이 유천리의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로의 남쪽 측면에 밀집되어 있고, 도로 북쪽 야산 기슭에도 10개소가 산재하며 유천초등학교 뒷편 구릉에도 널려 있다. 요지는 굴포만이 있는 바닷가 앞의 광활한 들판에 위치하고 있으며 토성으로 둘러싸인 안쪽 구릉에도 널려 있다.
가마의 형태는 조사한 바 없어 확실하지는 않으나 낮은 구릉을 이용한 등요(登窯)의구조로 만들어졌으리라 생각된다.
기형 : 투각 돈(墩)을 비롯해서 방형의 청자판(靑磁板)·大盤· 접시· 전접시·대야· 장구· 鐘· 탁잔(托盞)· 화분(花盆)· 합(盒)·발(鉢)·완· 각종 매병(梅甁)·주병(酒甁) 유병(油甁)·향로· 항(缸)· 침(枕)등, 다종다양하며 특히 1m이상의 매병의 예가 있어 고려 청자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문양 : 음각· 양각· 투각· 象形· 상감· 퇴화(堆花)· 지사· 철회· 철채 등의 다양한 수법으로 되어 있으며 주로 국화· 모란· 연화· 운학·그림· 초화· 운룡· 파도· 물고기 석류· 보상화· 봉황 등은 상감 기법으로, 연판은 양각으로 ,귀갑· 고리문은 투각으로 ,상감 기법으로 자주 표현되는 운룡·모란· 국화와 함께 화훼 등은 음각으로, 화문은 퇴화문으로 나타내는 등 고려 시대의 많은 문양들이 발견되고 있다,
유색 : 녹청·담청·담록·녹갈·황갈·천청색등 다채로우며 그 중 비색이라고 일컫는 천록을 머금은 청색 류가 많으며 대체로 미세한 유빙렬이 많고 투명하다 태토는 정선되었으며 회색, 회백색을 띠고 있다. 굽받침의 경우 정교하게 구웠으며 큰 기형은 내화 토와 모래를 섞어 빚은 비짐 흙으로 받쳐 구운 흔적이 많다..
특히 부안유천리 요지의 40여 개소 중에서도 12호 요지를 중심으로 한 여러 요지에서 출토되는 도자편은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당전 마을 내 요지 출토의 우수한 도자편과 거의 비슷하여 동시대의 고려 귀족 사회의 많은 수요를 채우기 위하여 강진과 더불여 이곳에서 양질의 도자기가 동시대 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강진과 함께 한국 청자 제작 지로서 대표되는 이곳 요지는 최전성기의 순청자 상감 백자 진사 백자 투각돈 1m이상의 매병 등이 출토되어 더욱 주목을 끈다.
6. 내소사 來蘇寺
내소사(來蘇寺)는 한국의 8대 명승지 가운데 하나인 변산반도 남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 일대 사찰 가운데 최고의 명찰로 손꼽힙니다. 행정구역상 소재지는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268번지이며, 예전에는 선계사.청림사.실상사 등과 함께 변산의 4대 명찰로 불렸으나, 지금 남아 있는 사찰은 오직 내소사뿐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백양사의 말사로 속해 있었으나,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의 말사입니다.
내소사를 찾는 이들에게 유구한 사찰의 역사 못지 않게 큰 감동을 안겨 주는 일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사찰 일주문부터 천왕문에 이르는 약 600m정도의 전나무 숲길이 그것입니다. 마치 터널을 이룬 듯한 전나무 숲길 아래로 드문드문 보이는 산죽의 모습은 내소사가 간직하고 있는 특별한 자랑거리 중의 하나입니다. 변산의 절경과 어우러진 내소사의 이 같은 아름다움 때문인지 예로부터 많은 스님과 시인들이 이 곳에 들러 시를 남겼으며, 지금까기 각종 문헌에 이들 시가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소사의 창건 이후의 역사는 별로 전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오랜 역사 속에서 분명 많은 자료들이 많들어졌겠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오지 몇 개의 전각뿐입니다. 그나마 지난 1995년에 <내소사사적비>가 건립되므로써 역사의 대강을 전하고 있는데, 여기에 수록된 내용들에 대한 역사적 고증과 보완 작업은 앞으로 계속 연구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현존하는 자료 가운데 내소사의 창건 연기를 살펴볼 수 있는 것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있습니다. 단 몇 구절에 불과한 내용이지만, ‘신라의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창건한 사찰로서 대.소의 두 소래사가 있다.’라는 표현이 있어 신라의 혜구 스님이 창건한 사찰임을 알수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 자료가 편찬된 16세기 무렵에는 내소사가 대.소의 두 개 사찰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대내소사’는 소실되어 없어지고 지금의 내소사는 ‘소내소사’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게 일반적 견해입니다.
한편 내소사의 역사와 관련하여 눈여겨 둘 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사찰 이름의 변화에 대한 내용인데,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내소사의 이름은 소래사(蘇來寺)로 불리워졌던 것이 확실합니다. 위에서 든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하여 18세기에 편찬된 신경중(申景濬)의 『가람고』에도 소래사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이유로 사찰명이 바뀌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1700년에 제작된 괘불과 내소가 동종에 새겨진 1853년의 명문에는 내소사라는 이름이 있어, 한동안 두 사찰명이 혼용되다가 이후 바뀐 이름인 내소사로 정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진서면 석포리 관음봉 아래에 위치한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에 혜구두타가 이곳에 절을 세워 큰 절을 대소래사, 작은 절을 소소래사라 하였다고 한다.
그 후 대소래사는 불타 없어지고, 소소래사만 남았는데 지금의 내소사는 소소래사이다.
이 절의 대웅보전은 조선 인조때 청민선사가 중건하였는데 빼어난 단청솜씨와 보살화를 연꽃문양으로 조각한 문격자의 아름다움이 일품이다.
또 경내에는 고려동종, 법화경절본사본, 설선당과 요사, 3층석탑, 괘불 탱 등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으며, 입구의 전나무숲이 한껏 풍치를 더하는 유서깊은 절이다.
1. 내소사 대웅보전
보물 제291호인 대웅보전은 다포계 양식에 팔작지붕으로 된 불전이다. 전면 3칸은 개방되어 꽃살무늬를 조각한 문짝을 달았는데 이들은 모두 정교한 공예품들이다. 공포는 외부의 출목수로는 가장 복잡한 3출목의 구성이어서 길게 뻗어 나온 쇠서들이 중첩된 모습은 매우 환상적이다. 내부는 5출목 구성으로 제공의 뒤 뿌리를 일일이 연봉형(蓮峯形)으로 새겨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단청도 매우 장엄한 금단청으로 채색하였다. 추녀 아래의 귀한대와 내부 충량머리는 용머리를 조각하여 화려함을 더해 주고 있다. 대웅전 내부 후불벽에는 「백의관음보살도」가 그려져 있는데 이 작품의 세부적 수법으로 보아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백제 무왕 34년(633)에 「혜구두타」가 이곳에 절을 세워 큰 절을 대소래사 작은 절을 소소래사라 하였는데 그 후 대소래사는 불타 없어지고 소소래사만 남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선인조 11년(1633)에 청민선사가 중건했는데 지금의 대웅보전은 이때 지어진 건물이다. 그 후 고종 2년 관해스님이 중창했다. 지금은「내소사」라고 부르고 있는데 언제부터 그렇게 부르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 대웅전에 얽힌 전설
청민선사가 이 절을 중건할 때 목수를 불렀는데 그 목수가 3년 동안을 말 한마디 않고 건물에 들어갈 나무만 깍고 있었나 보다. 법당보살님은 이를 목수가 묵언 수양을 하고 있었고 표현했다. 어찌 되었건간에 말 한마디 않하고 나무만 깍고 있으니 사미승이 장난기가 발동했던 모양이다. 목수가 깍고 있는 나무토막 중에 하나를 몰래 숨겨놓고 모른채 했다. 마침내 모든 나무를 다 깍았다고 생각한 목수는 드디어 나무를 헤아렸고 부족한 것을 안 목수는 자신의 수양이 아직 부족한 것으로 생각해 청민선사에게 절을 지을 수 없다고 했단다. 그러자 선사가 그 부족한 한 토막은 이절과 인연이 안되는 것 같으니 그만 생각을 바꿔 절을 지어달라고 사정했다. 목수가 할 수없어 남은 토막만 가지고 절을 지어 지금도 법당안에 오른쪽 윗부분 내 5출목의 한부분이 비어있다. 그 옆에도 빈 부분이 있는데 단청의 유무를 가지고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원래 지을 때부터 없던 곳은 단청이 칠해져 있고 후에 빠진 부분은 단청도 빠져있다. 절을 지었으니 단청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어느날 한 화공이 찾아와 단청을 해주겠다고 선사에게 이야기하면서 조건을 달았다. 100일 동안 누구도 건물안을 들여다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래 선사와 목수는 교대로 그 건물앞에서 누구도 얼씬 못하게 지켰다. 99일이 지나도록 인기척도 없고 먹을 것도 안들어가니 사미승이 얼마나 궁금했겠는가. 그래 목수가 지키고 있을 때 사미승은 주지스님이 부른다고 거짓하고 기어이 들여다 보았다. 그러자 하얀색 새가 입에 붓을 물고 날개짓에서는 화려한 물감 만들어내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은가. 이에 너무 놀란 사미승은 자세히 보고자 문을 살짝 열었다. 그러자 삐걱하는 소리가 나고 놀란 새는 그만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단청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대웅전 안에 좌우 한쌍으로 그려져야할 그림이 좌측 창방위는 바탕면만 그려져 있고 내용은 그려져 있지 않다. 그 새를 사찰에서는 관음조라고 한다. 지금도 새벽녘에 새울음소리가 나는데 그 새가 관음조라고 한다. 목수나 관음조나 모두 관음보살께서 현신하신 것이라는 설명이다.
2.내소사 고려동종
이 동종은 높이 1.03m, 구경(口徑) 0.67m로서 고려시대의 양식이 잘 나타난데다가 조각장식이나 형태의 아름다움에 있어 고려동종의 대표작이다. 명문에 의하면 고려 고종(高宗) 9년(1222)에 청림사(靑林寺)에서 주조(鑄造)하여 달았던 것으로 폐사 후 오랫동안 매몰되었다가 조선 철종(哲宗) 4년(1853)에 내소사(來蘇寺)에 옮겨진 것으로 되어 있다. 종신(鍾身) 상하에 견대(肩帶)를 둘렀는데 견대에는 매우 정밀한 당초보상화문(唐草寶相華文)이 양각되었고, 견대(肩帶) 위에는 여의두문(如意頭文)과 유사한 입화형(立花形)장식이 있어 고려종(高麗鐘)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견대 밑에는 네 개의 유곽(乳郭)이 있는데, 외곽에는 연주문(蓮珠文)과 당초문대(唐草文帶)를 두르고 구유(乳)가 있다. 유두(乳頭)는 연꽃 봉오리형이 세조(細彫)되었고, 여덟판 꽃잎을 조각한 유좌(乳座)가 있다. 중앙에는 화운문(花雲文) 위에 삼존상을 양각하였다. 본존(本尊)은 좌상이며, 좌우 협시불(脇侍佛)은 입상이다.
□. 대웅보전의 꽃창살무늬
전면 3칸으로 모두 8짝의 문짝은 온통 국화와 연꽃으로 수놓아져 있으며 이 꽃창살무늬는 그 소박하고 정교한 아름다움이, 그대로 경건한 신앙을 자아내게 한다. 오색단청이 아니라 나무빛깔과, 나무결을 그대로, 드러나게 만든 소지 (素地) 단청은 아름다움의 극치로 평가 받고 있으며, 꽃창살의 사방연속 무늬는 우리나라 장식문양 중에서 최고 수준을 보여주는 것으로, 창살 하나에까지라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담아 내고자 했던 옛 사람들의 높은 예술성과 장인정신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3.내소사 삼층석탑
내소사 대웅보전 앞에 위치한 3층석탑은 2중기단으로서 화강암질로 되어있다. 하층기단은 全高 3.46cm 폭 1.43m이며 1장의 석재에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각출하였고, 면석에 우주와 장주를 각하였다. 이 갑석의 상면은 상대중석 받침쪽의 높은 경사를 이루고 중석 받침은 2단으로 되어 있다. 상대중석의 경우도 모두 1매의 석재로서 면석에 우주와 면석중앙에 장주가 하나씩 모각(模刻)되었다. 2단의 탑신받침 각출과 하단받침을 말각(抹角)하였다. 이 갑석의 아래에 갑석부연(甲石副椽)을 각출하였다. 탑신석은 각각 1매의 석재로 되어 있고 2층의 탑신석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하게 체감되었다. 옥개석은 각층이 1매의 석재로 되어 있고 4단의 받침이 있다. 3층 옥개석 상면의 노반이 있는데 이 노반의 윗부분은 상대갑석과 같은 형태로 되어 있고 크고 작은 구형의 석재 2개가 올려져 있다. 고려때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4. 내소사 영산회 쾌불탱화
내소사 영산회괘불탱화는 1700년(강희 39년)에 장 10.5m×폭 8.17m 크기로 제작되었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각 존상의 명문이 있는 입불형태로 날씬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체구와 화려한 옷의 문양, 화려한 채색 등이 수준 높은 영산회 괘불탱화이다.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괘불탱화는 거의가 조선후기에 제작되었으며 크게 영산회상도와 보살상 두가지 형태로 구분되는데 대부분 영산회상도이며,내소사의 괘불탱화도 영산회상도이다. 이는 조선후기의 '법화경'신앙이 크게 유행한 것에 기인한다.
참고문헌: 답사여행의 길잡이 1 -전북-돌베게출판사 ]
우리 문화의 올바른 길잡이 - 이승훈의 신한국기행
7.변산반도 호랑가시나무
국내 국립공원중 유일하게 산악과 해양이 함께 있는 변산반도국립공원은 온난다습한 해양성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는 곳으로 한반도 식물 분포학상 난대성식물과 한대성식물이 분포할 수 있는 남·북방한계선의 경계가 공존하는 중요한 지역이다.
상록 침엽수림으로는 소나무군락과 곰솔군락이 있으며, 낙엽활엽수림으로는 소사나무군락·굴참나무군락 등이 있다. 변산반도 국립공원내에 산재하고 있는 식물자원 중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식생군락을 따라 공원 식물자원 탐방을 계획해보는 것도 좋은 현장 환경교육이 될 것이다.
변산반도 국립공원내에는 천연기념물 제122호 호랑가시나무군락지, 제123호 후박나무군락지, 제124호 꽝꽝나무군락지, 제370호 미선나무군락지 등 총 4종의 천연기념물이 분포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먼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식물군락인 호랑가시나무군락을 대상으로 이번호에 이야기하고자 한다. 호랑가시나무는 변산면 도청리 해안 양지 기슭에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식물분포학상 북방한계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 인정돼 1962년 12월3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호랑가시나무는 일명 호랑이 등긁게나무라고도 불리우는데, 속설에 의하면 옛날에 지리산에서 내려온 호랑이가 변산에 들러 이 나무로 가려운 등을 긁고 갔다고 한다. 또 호랑가시나무의 잎에 있는 가시가 날카로워 고양이 새끼의 발톱과 같다하여 묘아자(猫兒刺)나무라고도 불리우며, 구골나무(狗骨木)라고도 한다. 감탕나무과에 속하는 상록활엽수인 호랑가시나무는 전세계적으로 남극을 제외하고 약 7백종 이상이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제주도와 완도·진도·함평·영광 그리고 이곳 변산 등지의 난대(暖帶) 산야에 자생·분포하고 있다.
나무의 높이는 보통 2∼3m 정도로 가지가 많고 털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잎은 호생(어긋나기)하며 딱딱하고 표면에 광택이 있다. 지역적으로 약간씩 모양의 차이를 나타내지만 타원모양의 육각형이 대부분이다. 잎 가장자리에는 각점(角點)이 있고 그 끝에 날카로운 가시바늘이 나와 있다. 잎의 길이는 약 3.5∼10cm, 표면은 짙은 녹색이나 뒷면은 황록색이다. 꽃은 4∼5월에 흰색으로 피고 향기가 나며 잎겨드랑이에 5∼6송이씩 산형화서로 달리며, 9∼10월에 둥근 모양의 열매가 붉게 익는다.
서양에서는 호랑가시나무를 신성하게 여긴다. 매년 성탄절이 되면 장식용으로 많이 이용하는데 나무로 잎과 줄기를 둥글게 엮는 것은 예수의 가시관을 상징하며, 붉은 열매는 예수의 핏방울, 하얗기도 노랗기도 한 꽃은 우윳빛 같아서 예수의 탄생, 나무껍질의 쓰디쓴 맛은 예수의 수난을 의미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음력 2월 영등날 가지를 꺾어다가 정어리의 머리에 꿰어 처마 끝에 매달아 액운을 쫓는데, 정어리의 눈알로 귀신을 노려보다가 호랑가시나무의 가시로 눈을 찔러 다시 오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라고도 하며 잘못 들어오면 정어리처럼 눈을 꿴다고 도깨비에게 경고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김용민 (국립공원관리공단 변산반도관리사무소)
8. 기암괴석 채석강 (전북일보 12월 08일)
산과 바다가 함께 하는 우리나라 유일의 반도형 국립공원인 변산반도국립공원은 바다와 접하고 있는 해안 자연경관을 가진 외변산 탐방권과 푸른 숲·맑은 계곡이 있는 내변산 탐방권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한겨울로 접어드는 이 시기, 누군가와 함께 변산반도국립공원을 찾을 때면 외변산을 따라 펼쳐지는 바다와 함께 기암괴석이 만들어낸 격포 채석강을 둘러 볼만하다.
채석강이라고 하면 일반인들은 흔히 돌을 캐는 채석장이나 하천으로 오해하고 있는데, 채석강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중국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며 놀다 강물에 비친 달을 보고 그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중국의 채석강과 흡사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외변산 전체 해안은 화산성 퇴적암과 넓지는 않으나 화강암이 분포하고 있으며, 파식대, 해식애 및 해식동굴 등이 잘 발달돼 있는 해안침식 지형이다. 또한 배후지로 소규모 사구가 형성된 퇴적지형이 혼재하고 있다.
채석강은 선캄브리아시대에 속하는 화강암과 편마암을 기저암으로 하고 중생대의 백악기(白惡紀) 약 7천만년전에 퇴적한 셰일과 석회질 셰일, 사석(砂石), 역석 등이 와층(瓦層)을 이루고 있다.
퇴적층을 중생대 말기에 분출한 규장암이 뚫고 들어와 왕성한 지층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기암괴석은 단층, 습곡 및 부정합 등 모든 해안지형의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는 지질학 연구의 야외실습장으로서도 활용되고 있다.
또 절벽은 마치 수만권의 책을 쌓아올린 것과 같은 모습과 시루떡을 엎어놓은 것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으며 여러가지의 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변산반도 해안에서 바라다 보이는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변산 8경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웅연조대(熊淵釣臺), 서해낙조(西海落照)가 있는데 두가지와 함께 채석강 채석범주(採石帆舟)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탐방코스다.
억만년 세월을 파도에 몸을 맡긴 바위는 지쳐 깎이고 씻겨 절벽을 이루었으며, 절벽은 다시 씻겨 동굴을 이루었으니, 대자연의 신비와 비밀을 간직한 채석강과 이곳을 한가롭게 지나는 고깃배의 모습을 두어 채석범주(採石帆舟)라고 부른다
옛날 격포진이 자리하고 있던 채석강은 기이한 바위와 함께 빼어난 경관이 일품으로, 1976년 4월 2일 지방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변 자연경관 자원으로는 적벽강과 천연기념물 후박나무군락지 등이 있다.
김용민(국립공원관리공단 변산반도 관리사무소)
9. 이매창 李梅窓
1573(선조 6)∼1610(광해군 2). 조선 중기의 기생·여류시인. 본명은 향금(香今), 자는 천향(天香), 매창(梅窓)은 호이다. 계유년에 태어났으므로 계생(癸生)이라 불렀다 하며, 계랑(癸娘·桂娘)이라고도 하였다. 매창은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딸이다.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유가 깊었다. 부안(扶安)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부안에 있는 묘에 세운 비석은 1655년(효종 6) 부풍시사(扶風詩社)가 세운 것이다. 여기에는 1513년(중종 8)에 나서 1550년에 죽은 것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그의 문집 ≪매창집≫ 발문에 기록된 생몰 연대가 정확하다. 그는 37세에 요절하였다.
유희경의 시에 계랑에게 주는 시가 10여 편 있다. ≪가곡원류≫에 실린 “이화우(梨花雨) 흣날닐제 울며 ○고 이별(離別)한 님”으로 시작되는 계생의 시조는 유희경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라는 주가 덧붙어 있다.
허균의 ≪성소부부고 惺所覆螺稿≫에도 계생과 시를 주고받은 이야기가 전한다. 그리고 계생의 죽음을 전해듣고 애도하는 시와 함께 계생의 사람됨에 대하여 간단한 기록이 덧붙여 있다. 계생의 시문의 특징은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그대로 읊고 자유자재로 시어를 구사하는 데에 있다. 그의 우수한 시재(詩才)를 엿볼 수 있다.
여성적 정서를 읊은 중에 〈추사 秋思〉·〈춘원 春怨〉·〈견회 遣懷〉·〈증취객 贈醉客〉·〈부안회고 扶安懷古〉·〈자한 自恨〉 등이 유명하다. 그는 가무·현금에도 능한 다재다능한 예술인이었다. 부안의 묘에 비석이 전한다. 1974년 그 고장 서림공원에 시비(詩碑)를 세웠다.
≪참고문헌≫ 村隱集, 惺所覆螺稿, 芝峰類說, 水村漫錄, 朝鮮歷代女流詩選(申龜鉉, 朝鮮文庫 1-5, 學藝社, 1939).
10. 개암사
개암사는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절입니다. 보물 제292호로 지정된 대웅전이 외롭게 골짜기를 지키고 있는 개암사 일대는 유서 깊은 왕궁터였습니다. 그래서 '개암고적'은 변산팔경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절에 있는 개암사지(開巖寺誌)에 따르면 마한의 효왕(孝王) 28년(BC 282)에 변한(卞韓)의 문왕(文王)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쌓았는데, 우(禹)와 진(陳)이란 두 장수를 보내 일을 감독하게 하였습니다. 두 골짜기에 왕궁과 전각을 지었는데, 동을 묘암(妙巖), 서를 개암(開巖)이라 불렀어요. 그 후 문왕이 죽자 마연(馬延)이 뒤를 이어 백성들을 잘 다스렸는데 우와 진의 두 장수가 죽은 후 마연이 살해되고 내분이 일어나 외적이 침입하여 변한이 망했다는 것입니다. 변한의 유민들은 우와 진의 두 장수를 기리는 뜻에서 산 위에 솟은 두 바위를 우진암이라 불렀으며 산성을 마연산성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산 이름을 변산(卞山)이라 불렀다고 전합니다.
지금의 개암사는 백제 무왕 35년(634) 묘련왕사(妙蓮王師)에 의해 변한의 궁전을 고쳐서 개암사와 묘암사를 지은 데서 비롯되었는데, 백제 멸망 후 원효와 의상이 이 곳에 와서 개암사를 다시 지었다고 전합니다. 그 후 고려 충숙왕 때(1314년) 원감국사(圓鑑國師)가 송광사에 있다가 이곳으로 들어와 삼창을 하며 황금전(黃金殿)을 중심으로 동에는 청련각(靑蓮閣), 남에는 청허루(淸虛樓), 북에는 팔상전(八相殿), 서쪽에는 응진당(應眞堂)과 명부전(冥府殿) 등 30여동의 건물을 지어 대가람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원감은 이곳에서 능가경을 강의하여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였는데 이로부터 변산을 능가산이라 하였다고 전합니다.
다시 조선시대에 태종 14년(1414)에 선탄선사(禪坦禪師)가 이 곳에 와서 도솔사라 이름하고 외도솔과 내도솔을 지었는데, 외도솔은 백학봉에 있었고 내도솔이 지금의 개암사라고 합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도솔사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외도솔은 1874년에 불에 타 없어졌고, 이후 개암사의 많은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다 불탔는데 다행히 황금전이었던 대웅전이 남아 몇 차례의 중수를 해오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보물 제292호로 지정된 이절의 대웅전은 정면3간, 측면3간의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 초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울금바위, 우금산성
상서면 개암사 뒷산을 감고 있는 석성이며, 그 길이가 3960m에 이릅니다. 근간에 학계에서는 이 성을 백제 광복을 위한 마지막 항전 성인 주유성으로 규정짓고 있습니다. 울금바위 아래 능선은 돌무더기가 담처럼 열려 있는데 이것은 화강 괴석으로 축조한 석성인 우금산성이며, 660년 백제 의자왕이 나당 연합군에 항복하자 복신과 도침 등이 일본에 있던 왕자 풍을 맞아 왕으로 추대하고 의병을 일으켜 피나는 항전으로 백제 부흥을 줄기차게 벌였던 백제 최후의 항거 거점이었다.
2. 백제부흥운동 전적지-변산반도 < 한 겨 레 신 문 >
사실 이번 역사여행의 주목적이 낙조대 탐승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주류성과 백강 등
백제부흥전쟁의 현장이 이곳 변산반도 일대였다는 학설이 관심거리였다. 굳이 월명암을
넣은 것은 겹겹이 산으로 두른 내변산과, 어염이 풍부한 해안선을 따라 농경지가 비옥한 외변산이 하나의 땅덩어리 안에 어우러져 있어 항전의 근거지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이곳의 지세를 짐작해보기 위함이었다.
주류성(우금산성)으로 꼽히는 곳으로 가는 길은 전북 부안읍에서 차로 십분쯤, 왼쪽으로는 기름진 벌판 `장패평'이 펼쳐지고 오른쪽 들녘 너머 로 기상봉, 옥녀봉 따위가 가지런한 사이로 내지른 2차선 국도이다.
장패평(장패평)은 말 그대로 장수들이 싸우다 패한 벌판이란 뜻이다.
주류성에 웅거한 백제부흥군과 당나라 침략군의 접전이 이곳에서 벌어졌 고 당나라 군사들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장패평의 끄트머리이자 개암사로 들어가는 들머리에는 이런 전설의 단초가 됐을 법한 `장군총'이 있다. 안내판은 싸움에서 패한 당군의 장수 28명의 주검을 백제부흥군이 거둬 묻어주었다는 이 지방의 전설을 적었다. 하지만 장군총이라고 해서 어마어마한 규모는 아니고 길이 1.5~2m의 평평한 자연석 19개를 그대로 누인 모습이다. 본래는 28개였는데 몇 개가 없어졌다고 한다. 선사시대의 남방식 지석묘로 보는 학계의 해석에 좀 더 수긍이 가되 지방민들의 전설도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리라고 짐작해보면 족한 곳이다.
주류성은 개암사 뒷길로 20분쯤 걸어 올라가면 된다. 높이가 각각 40m 와 30m쯤 되는 우람한 울금바위에서 시 배만남장대쪽으로 1천5백13m, 남 장대에서 북장대를 거쳐 울금바위로 되돌아오기까지 다시 2천4백13m로 모두 3천9백26m에 이르는 장대한 석성이다.
울금바위 뒤쪽 벼랑을 기어 정상에 오르면 일망무제로 펼쳐진 호남평야와 서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성은 능선을 따라 꿈틀꿈틀 내뻗어 비바람에 씻겨오면서도 천여년 전의 자태를 완연히 지녔다.
이 곳이 7세기 중엽 백제 유민들이 당나라와 신라의 침략군에 맞서 3년동안이나 세차게 항전했다는 곳이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떨쳐 일어섰다가 숨진 백제 민중의 한맺힌 넋이 떠돌고 있는 곳이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의 10만군과 신라 김유신의 5만군은 백제의 수도사비성을 공략한 데 이어 의자왕이 피난한 웅진성마저 함락시켰다. 의자왕은 침략군에 변변히 항전도 못하고 투항해 구차한 목숨을 유지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힘을 빌려준 당은 웅진, 마한, 동명 등 5곳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사비성에는 류인원의 1만 군사를 주둔시켜 이 땅을 영구히 강점하려 했다. 당은 군사통치를 통해 백제 민중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억압했다. 점령군은 곳곳에서 강도질과 약탈, 부녀자 겁간을 서슴지 않았다.
당나라 침략군에 맞선 백제 민중의 투쟁은 그 해 8월2일 시작돼 곳곳으로 확산됐다.
남잠성과 정현성을 지키던 군인들이 항전에 나섰고 백제 귀족 정무의지휘 아래 두시원산에 모인 병력이 침략군에게 타격을 입혔다.
백제 서북지방의 주요한 성인 임존성(충남 예산)에는 항전의 깃발을 올 린 지 10여일 만에 3만여명의 부대가 모였다. 주류성에선 백제의 장군이 었던 복신과 중 도침의 지휘 아래 부흥군의 대오가 정비됐다. 항전군의 두 축이 형성된 것이다.
초기에 성에 의지해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방어전에 치중했던 부흥군은 점차 세가 늘자 침략군의 본거지를 공략하러 나섰다. 항전군이 사비성 남쪽에 목책을 치고 포위 공격에 나서자 침략군은 한때 외부와의 연락이 끊기고 소금마저 떨어지는 위기에 몰렸다. 유인귀가 이끄는 당의 지원군은 항전군의 거점인 주류성을 역습하려다 떼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지금의 주류성은 겉보기에 메마르기 짝이 없는 옛 석성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20만평에 이르는 성곽 안에 백제 이궁터가 있다고 하나 수풀에 묻혀 가 볼 수 있는 형편이 못된다.
그렇지만 이곳은 그 먼 옛날 백제의 이름 없는 민중들이 침략자들의 군사통치에 맞서 분연히 일어났던 의기를 느끼게 하는 곳이다. 물론 그들을 근대적인 저항민족주의의 틀에 꿰어 맞출 일은 아니다. 또한 백제왕조에 대한 충절의 발로만으로 해석하는 것도 지나쳐 보인다. 당나라 침략군의 무단통치가 백제 왕실과 귀족의 치하에 비해 훨씬 가혹했기 때문은 아니
었을까. 그래서 그들은 다른 잇속 계산 없이 점령군을 내쫓는데 열심이었으리라. 그리하여 대가를 얻지 못한 그들의 죽음이 후세의 여행자를 짙은 우수에 젖게 하는 것 아닌가.
다시 전쟁 얘기다. 임존성과 주류성을 양대 근거지로 한 항전군의 기세가 높아지자 수십개의 성이 이에 호응해 금강 이북이 침략자의 압제에서 해방됐다. 항전군의 2년쯤 뒤인 662년 5월 왜국에 가있던 왕자 풍이 돌아와 국왕이 될 무렵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세가 다소 안정되자 항전 지도부는 자중지란을 일으킨다. 부흥전쟁 초기부터 동지인 복신과 도침이 자리다툼을 하다 복신이 도침을 죽였다. 복신은 다시 왕자 풍과 불화를 빚다가 풍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귀족과 왕족이 이렇게 저들끼리의 싸움에 골몰하자 항전군의 사기는 크 게 떨어졌다. 침략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663년 나당연합군은 주류성과 임존성 공격에 나서 이를 함락시켰고 뒤늦게 도착한 왜국의 지원군은 백강 어귀에서 크게 패했다. 그해 9월로 삼년에 걸친 백제부흥전쟁은 끝났다. 그리고 부흥군에 가담한 백성들이 다시 무참하게 살륙됐다. 그러나 국왕으로 떠받들렸던 풍은 고구려로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다.
주류성의 중심인 울금바위에는 세개의 큰 굴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복신의 지휘소로 4백~5백명의 장병을 모아놓고 집회를 할 만한 거대한 자연석굴이며 입구의 너비와 깊이가 각각 20여m로 높은 곳은 30여m에 이른다. 복신이 왕자 풍과 다투던 끝에 거짓으로 병을 꾸미고 태업(사보타주)을 하던 곳이며 끝내 풍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법한 곳이다. 주류성의 위치 문제에 대해선 사실 아직까지 학계의 합의가 없다. 충남의 한산과 예산쪽 의 내포, 논산군의 연기라는 주장과 이곳 부안설이 다투고 있는 상태다.
각 지방의 향토사 연구자들이 저마다 자기 고장이 맞다고 주장하는 `주류성 유치경쟁'을 속된 지역 이기주의로 매도할 일은 아니다. 그보다는 역대 왕조와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차별과 소외를 겪어 온 이쪽 지방민들 이 자신의 뿌리와 정체 의식을 옛 백제에서 찾으려는 비원의 발로로 보인다.
부안군 애향운동본부(0683-82-3993)는 동진강 하구~계화도 간척지~백산~주류성~개암사~내소사~로 이어지는 백제부흥전쟁 전적지 답사 코스를 개발했다. 동진강과 계화도는 왜국의 지원 함대와 당나라 수군의 진입로였다는 곳이다.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상전벽해가 돼 별 유적은 없지만 간척지의 넓은 벌판과 서해 바다를 구경하는 셈치고 들를만 하다.
백산은 백제부흥군이 왜국에서 돌아오는 왕자 풍을 맞았다는 평야지대의 토성인데, 사실 이보다는 1894년 갑오농민혁명 때 농민군이 전봉준의 휘하에 총집결해 전주로 진격한 근거지로 더욱 유명하다. 토성 안에는 농민혁명 기념탑이 서있고 입구에는 이곳 농민회가 작은 화강암을 쪼아 `백산성지'라고 새긴 안내비가 애틋하다.
주류성 오르는 길의 들머리인 개암사는 본래 마한, 진한, 변한 시대에 변한의 왕궁터였다고 전한다. 지금의 개암사는 백제 무왕35년(634년)에왕실의 고문격인 왕사 묘련이 궁전을 절로 고쳤다고 하니 이곳이 후일 백제부흥군의 근거지가 된 내력이 짐작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