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켈브레슈트, 데지레 - 에밀 (D sir - Emile Inghelbrecht 1880~1965)
작곡가이기도 하다.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 음악원에서 수학하고, 드뷔시의 영향을 받았다. 25세 때 지휘자로서 데뷔하였고,1908년 슈미트의 [살로메의 비극]을, 1911년에는 드뷔시의 [성 세바스티앙의 순교]를 초연하였다. 1913년에 샹젤리제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영입되었고 1919년 콩세르 프레이에르를 조직하여, 1924∼1933년 파리오페라 코미크 극장의 상임 지휘자, 1934년 프랑스 국립방송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역임하였다.
1940∼1950년 파리 오페라 극장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고 그 후는 프리랜서로서 활약하였다. 그는 드뷔시와 깊은 친교가 있었고,드뷔시의 관현악곡의 레퍼토리에 정평이 있었다. 22세 때에 관람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의 초연이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라 한다.단골인 드뷔시의 [성 세바스티앙의 순교](에인절)는 향기가 넘치는 명연 중의 명연이라 한다. 포레의 [레퀴엠](에인절)의 약간 빠른 템포 속에 떠도는 정교하고 치밀한 서정미도 잊을 수가 없다.
바렌보임, 다니엘 (Daniel Barenboim 1942~)
피아노 주자이기도 하며,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양친 모두 피아니스트인 음악 일가의 환경 속에서 자랐다. 어린 다니엘은러시아 태생인 부친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고, 7세 때 올 베토벤 프로그램으로 독주회를 열어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했다.그러나 유대인이었던 바렌보임 일가는 1952년에 이스라엘에 이주하였으며, 10세때 미국 - 이스라엘 재단의 장학금으로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음악원에 입학하였다.
그는 여기서 피아노를 에트빈 피셔에게 배우는 한편, 지휘법을 이고르 마르케비치에게서, 실내악을 첼리스트인 엔리코 마이나르디에게 배웠다. 또 이 동안 거장 푸르트벵글러에게 인정을 받아 솔리스트로서 기용되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더욱 1954년에 파리에 유학하여 나디아 불랑제를 사사한 다음, 1955년 로마 성 체칠리아 음악원에 입학하여 카를로 체키에게 피아노와 지휘법을 배웠다. 1956년 7월 수사의 칭호를 받고 졸업한 후, 1957년 1월 스토코프스키 지휘의 '심포니 오브 디 에어'와의 공연에서 피아니스트로서 미국 데뷔를 장식하였다.
그 이후 젊은 세대 중에서 가장 재능이 뛰어난 피아니스트로서 그 위치를 쌓아 올려 나갔다. 바렌보임이 지휘대에 서기 시작한 것은 1962년경부터이며, 그 후 오랫동안 깊은 관계를 유지한 영국 실내관현악단을 처음 지휘한 것은 1965년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데뷔하고부터 였다.약 10년 동안 이 오케스트라를 자주 객원 지휘하게 되었는데, 고전파의 교향곡과 근대, 현대의 작품으로 서서히 레퍼토리를 축적해 나갔다.
그리고 미국과 유럽의 메이저 오케스트라로부터도 자주 객원 지휘를 위촉받기 시작하였고, 1967년과 1968년에는 이스라엘 필하모니와 런던 교향 악단의 미국 연주 여행에서 지휘자로서 대동하여 큰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1968년에는 처음으로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하여 호평을 받았고,1971년 1월에는 뉴욕 필하모닉에 첫 등장하여 경이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CBS에서 그 기념으로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4번]의 레코드가 발매될 정도였다 . 그 후 시카고 교향악단, 필라델피아 관현악단,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 런던 필하모니를 자주 객원 지휘하여,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과 병행하여 본격적인 지휘 활동에도 역점을두게 되었다. 1967년 첼리스트인 자클린 뒤 프레와 결혼하였고,그 여자와의 협주곡이나 실내악에서 레퍼토리를 확대하게 되었다.
1975년 6월, 파리 관현악단의 4번째 음악 감독으로 취임함으로써마침내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전의 뮌슈, 카라얀, 솔티 등 역량 있는 사람들의 뒤를 이어 신진을 기용한 파리 시 평의회는그의 능력을 그만큼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는 취임하자 오케스트라의 활동을 여러 방면에서 넓히기 시작해, 단원을 중심으로 한 실내 오케스트라를조직하고 전속 합창단을 창설하는 등, 새로운 바람을 파리 악단에 불어넣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바렌보임은 푸르트벵글러를 정신적인 스승으로 삼아 목표로 하고 있는 만큼 그의 음악적인 자세는 기본적으로 로맨틱한 것이다. 더욱이 초기에는 의식만이 선행하고 표현의 테크닉이 정리가 되지 않았기때문에 자기 중심적인 주장만이 강했으며, 이러한 면은 피아니스트로서의 그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러나 파리 관현악단에서는 그런 것들이 점점 개선되어 스케일이 크고 포용력이 풍부한 표현으로 바꿔지고 있다. 시카고 교향악단을 지휘한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5번], 베를리오즈의[로메오와줄리에트](모두 그라모폰) 등은 그러한 최근의 바렌보임의 가장 좋은 면을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명반이다. 그는 파리 관현악단의음악 감독으로 있는 동안 프랑스 음악의 레퍼토리가 넓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베를리오즈와 프랑크, 생상스의 곡이 성공하고 있는 것도 푸르트벵글러에 통하는 낭만성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피아니스트로서도 모차르트, 베토벤, 멘델스존, 슈베르트, 슈만 등의 독일 음악이 태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바렌보임다우며, 리트의 반주, 실내악에서도 독특한 리더쉽을 보여주기도 한다. 바렌보임은 1984년 파리 관현악단과 함께 내한하여 세종문화회관에서 연주했으며, 1988년까지 파리 관 현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있었다.1989년 프랑스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의 예술 감독으로 내정되었나 당국과의 의견 차이로 잡음 끝에 결국 사임했다. 그러나 그동안 좋은 관계를유지하고 있었던 그는 시카코 심포니의 게오르크 솔티 후임으로 1991년 9월부터 취임할 예정이다.
아서턴, 데이비드 (David Atherton 1944~)
영국의 블랙풀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한 다음, 런던 오페라센터에서 오페라 연습 교사 자리를 거쳐 코벤트가든에서 오페라 지휘자로서 데뷔하여, 동 오페라 극장에 출연한 최연소 지휘자로서의 기록을 세웠다. 같은 해 프롬나드 콘서트의 최연소 지휘자로서 콘서트 데뷔를 장식했다. 또 같은 해에 올드버러 페스티발에서 해리슨 버트위슬의 오페라 [펀치와 주디]의 초연을 지휘하였다.
20세기 음악을 계통적으로 연주함과 동시에 신작을 소개하는 목적으로 1968년 런던 심포니에타를 결성하고, 1973년까지 음악 감독으로 활동했다. 레코드는 [쇤베르크 실내합주단 작품 전집](런던), [쿠르트 바일 작품집](그라모폰) 등의 녹음에 남아 있는데 뛰어난 연주로서 호평을 받고 있다. [펀치와 주디]의 전곡 음반(데카)은 {그라모폰} 지의 1980년도 오페라 전문 최우수 레코드 상을 받았다.
그 후 런던 심포니에타와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1979년 가을부터 다음해에 걸쳐서 런던에서 '스트라빈스키 페스티발'을 열었고,관현악도 포함하여 기악 작품의 모든 것을 연주하는 시리즈를 끝내, 주목을 받았다. 아서턴은 20세기 음악을 체계적으로 연주함과 동시에 현대음악을 의욕적으로 소개하는 지휘자로서 현재 영국 제일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일반적인 작품도 많이 연주하고 있으며, 1980년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관현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리타워, 데이비드 (David Littaur 1925~)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났다. 브리스틀의 크리프턴 칼리지와 런던의 길드홀 음악학교에서 배웠다. 리코르디 지휘자 상을 수상하였다. 1970년 이래 필로무지카 오브 런던의 예술 감독 겸 수석 지휘자를 맡고 있는데, 근년에는 이 실내 오케스트라 자체가 활발한 연주 활동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도 눈에 띌만한 활동을 하고 있지 않다. 레코드는 뉴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을 지휘한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전곡(EMI)이 있었는데 현재는 폐반되었다.
윌콕스, 데이비드 (David Willcocks 1919~)
합창 지휘자이다. 영국 뉴키에서 태어났으며 런던 왕립음악원(RCM)과 케임브리지의 킹스 칼리지에서 배웠다. 18세 때부터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를 하였고, 우스터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를 하고 있을 무렵(1950∼1957), 스리 콰이어즈 페스티벌에서 합창 지휘자로서 활약하여 주목을 받았고, 버밍엄 시립합창단(1950∼1957)과 브래퍼드 페스티발 합창협회(1956∼1974)의 지휘자를 겸무하였다. 1957년에 모교인 케임브리지 대학에 영입되어, 보리스 오드(1897∼1961)의 후임으로서 킹스 칼리지 채플의 오르가니스트 겸 채플 콰이어(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 합창단)의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윌콕스는 명성이 높은 이 합창단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시도도 도입하였다. 1963년의 헨델의 [메시아] 녹음에서는 소프라노의 아리아를 모두 보이 소프라노의 유니즌으로 대치시키고 있다. 킹스 합창단의 녹음을 많이 했을 뿐만 아니라 텔레비전과 라디오에도 출연하였고, 북아메리카에 연주 여행을 하는 등, 동 합창단의 대외적 활동을 적극적으로 편 것도 윌콕스의 공적이다.
1958년부터 5년간 케임브리지 대학음악협회의 지휘가도 겸하였으며, 1960년부터는 런던의 바흐 합창단의 음악 감독을 하고 있다. 현대 영국 합창 작품의 소개에도 열성적이었고, 1963년에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서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을 시작으로 1965년에는 작곡자를 대신하여 도쿄에서 지휘를 하였다. 1974년 모교 RCM의 학장에 취임하였고, 1977년에는 KBE(경)의 칭호를 받았다.
진맨, 대이비드 (David Zinman 1936~)
미국 뉴욕에서 출생했다. 7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고 뉴욕의 음악·예술고등학교와 오버린 음악원(1958년 졸업)에서 공부한 다음, 미네소타 대학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전공했다(1963년 석사). 피에르 몽퇴의 인정을 받은 진맨은, 1958년부터 메인 주에서 몽퇴로부터 지휘자를 위한 하기 강습을 받았고, 1961년부터 1964년까지 몽퇴의 어시스턴트로 있었다.
1962년에 덴마크 국립방송관현악단의 지휘자로 데뷔했고, 1963년 6월에 파울 자허를 대신하여 네덜란드 실내관현악단을 지휘, 성공을 거두자 이듬해부터 시몬 골트베르크와 함께 네덜란드 실내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를 지냈다. 또한 같은 해인 1964년에는 핼리어트 코엔 음악 재단으로부터 아놀드 박스 기념 메달을 받기도 했다. 그 후 진맨은 네덜란드를 본거지로 삼고 유럽은 물론 남북미주, 남아프리카, 일본(도쿄교향악단) 등 세계 각지의 오케스트라에 객원 지휘를 했고, 또한 각지의 음악제에도 출연했다.
미국에서의 데뷔는 1966년부터 1967년 시즌에 열린 필라델피아 관현악단과의 7회에 걸친 연속 연주회에서다. 그 후 뉴욕 필하모닉과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에서도 성공을 거두었고, 1974년부터 로체스터 필하모니의 음악 감독을 맡았다. 또한 네덜란드에서는 네덜란드 실내관현악단 이외에 1977년부터 로테르담 필하모니의 수석 객원 지휘자도 겸했는데, 1980년부터 에도 데 바르트의 후임으로 음악 감독으로 취임했다. 1988년 현재는 볼티모어 교향악단 상임 지휘자로 있다. 레코드는 협주곡의 반주 지휘가 많은데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작품도 교묘하게 소화시킨다. 대표적인 레코드는 [뒤카스 명곡집](필립스)이 있다.
딕슨, 딘 (Dean Dixon 1915~1976)
미국의 뉴욕에서 태어났다.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교육학을 배웠고, 그 밖에 컬럼비아 대학에서도 공부하였으며, 앨버트 스테셀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뉴욕에서 실내 오케스트라를 조직하고 지휘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1941년 흑인 지휘자로서는 최초로 뉴욕 필하모닉에 데뷔하여 센세이셔널한 화제를 일으켰다. 1944년에는 자신이 아메리카 청년교향악단을 조직하고 그 지휘자가 되었지만, 인종 차별의 벽에 직면하게 되어 결국 미국의 악단에서 소외되었다.
그래서 1949년부터는 유럽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게 되었는데, 1953년에는 첫 포스트인 예테보리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여 1960년까지 재임하였고, 1961년부터는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영입되어 서서히 자리를 굳혀 나가게 되었다. 1964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겸임하게 되었고, 그 한편 널리 유럽 각지에의 객원 지휘 활동도 하였다. 그리고 겨우 미국의 오케스트라에의 복귀가 이루어졌으나, 1976년 11월 4일 61세의 나이로 스위스에서 별세하고 말았다.
딕슨은 흑인 지휘자의 대명사적 존재이기도 하였는데, 그것을 싫어하여 모국을 버리고 오랫동안 유럽에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일류 지휘자는 될수 없었고 평가도 일정하지 않았으나, 많은 캐리어에 의한 풍부한 경험과 견실한 지휘로써 착실한 활동을 하였다. 그는 브람스 등 중후한 독일 음악을 단골로 하였고 프랑크푸르트 단원들의 존경을 받았다. 또 스칸디나비아 제국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은 것 같다. 레코드는 멘델스존의 교향곡과 그 밖의 것을 프라하 교향악단이나 빈 교향악단등과 녹음하였으며, 프라하 교향악단과의 브람스 [헝가리 무곡집](수프라폰)뿐이다.
마송, 디에고 (Diego Masson 1935~)
스페인의 토사에서 태어났다. 1953년부터 1958년에 걸쳐 파리 음악원에서 타악기, 화성, 실내악을 공부했으며, 그 한편 푸가, 대위법, 작곡을 레이보비츠에게 배웠다. 또한 졸업 후인 1964년에는 작곡을 마데르나에게, 1965년에는 지휘법을 불레즈에게 배웠다. 처음에는 오케스트라의 타악기 주자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차츰 지휘에 전념하게 되어 파리 오페라 극장과 그 밖의 지휘도 하게 되었다. 1966년 파리의 몇몇 오케스트라의 제일선의 연주가들을 모아 현대 음악 전문의 연주 단체 뮈지크 비방트앙상블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수많은 중요한 현대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데, 그중에는 슈톡하우젠의 [스톱](1969), [태양을 향해 돛을 올리고](직관 음악 1969), 모멘테의 [봉 바존](1972)의 초연하였다. 또한 불레즈의 [도메인](1970)의 프랑스초연과 레코딩, 글로보카르의 [프류이드]와 베리오의 [라보린투스 Ⅱ]의 레코딩등을 하였다. 마송은 이 밖에 마르세유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과 1968년에 아미앵에서 조직된 현대 발레 극장의 음악 감독도 역임였는데, 마데르나가 주재하고 있었던 앙상블 외로피앙의 지휘도 스위스의 타바시니크와 함께 맡고 있다. 레코드는 앞에서 말한 불레즈의 [도메인](RCA), 글로보카르의 [프류이드] 등을수록한 작품집이 있다.
미트로풀로스, 디미트리 (Dimitri Mitropolos 1896~1960)
피아니스트, 작곡가이기도 하며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아테네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L.와센호벤에게, 화성학과 대위법을 마르탱 피에르, 조제프 마르시크에게 배우고 1918년에 졸업하였다. 그 후 곧 벨기에에 유학하여 작곡을 폴 기르송에게 배웠으며, 1920년에는 베를린에 가서 작곡과 피아노를 페루치오 부조니에게서 배웠다. 1922년부터 3년간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 부지휘자가 되었고, 1924년부터 아테네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 겸 모교의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미트로풀로스는 1930년, 베를린에서 공연 예정이었던 피아니스트 에곤 페트리의 급작스런 병으로 인해 그를 대신하여 지휘와 독주를 겸임하여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을 연주하여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36년 보스턴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하기 위해 미국에 갔으며, 1937년부터 1949년까지 오르만디의 후임으로서 미니애폴리스 교향악단(현재 미네소타 관현악단)의 정지휘자가 되었다.
SP시대에 명반을 많이 취입하였고 NBC 교향악단이나 뉴욕 필하모닉의 객원 지휘를 하였다. 1949년에 스토코프스키와 함께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가 되고, 다음해 정지휘자로 취임하였으며, 1954년 이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지휘도 하였다. 직접적이고 특색있는 지휘는 특히 쇤베르크의 [정야]와 프로코피예프의 [로메오와 줄리에트](CBS) 등 현대 음악에 정평이 있다. 프란체스카티화 협연한 랄로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3번 (러시아 협주곡)], [생상스의 바이롤린 협주곡 제3번](모두 CBS)도 명반이다.
키타옌코, 드미트리 (Dmitry Kitaenko 1940~)
소련의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다. 레닌그라드의 글린카 합창학교에서 합창 지휘를 배우고, 1958년에 졸업하였다. 오페라와 오케스트라의 지휘법을 그리크로프에게 배웠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레오 긴스부르크의 클래스에서 배웠으며, 빈 음악아카데미에서는 한스 스바로프스키에게 배웠다.
1969년 카라얀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서 핀란드의 오코 카무에 이어 2위로 입상하여 세계적으로 주목되었다. 귀국 후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시체드린의 발레 [카르멘]을 새로운 연출로 상연하여 명성을 얻어 동 극장의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1976년에는 키릴 콘드라신의 후임으로서 모스크바 국립 필하모니 의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고, 빈 음악제를 비롯하여 동서 유럽의 메이저 오케스트라에 객원 지휘하면서 활약을 계속하고 있다. 키타옌코는 "기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영혼을 살릴 수 있는 음악을 창조해야 한다"는 음악관으로 음악을 통한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다.
그는 제24회 서을 올림픽 문화예술축전에 초빙되어 모스크바 필하모니와 함께 세종문화회관, 부산문화회관, 예술의 전당 등에서 총 7차례의 콘서트를 가졌다. 1989년 두번째 내한에서는 피아니스트 김형규와 서혜경이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4번]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각각 협연하였다. 레코드는 나카무라와 협연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CBS)과 이고르 주코프와 협연한 [피아노 협주곡 제1번](멜로디아) 등의 음반이 있다. 그의 연주는 대륙적인 견실함과 장인 기질적인 테크닉이 경지에 도달해 있다.
카히제, 잔수크 (Dzhansug Kakhidze 1936~)
작곡가이기도 하며, 소련의 그루지아 공화국에서 태어났다. 자세한 경력은 불명하지만, 처음에는 국립 그루지아 합창대의 지휘자를 역임하였고, 1965년부터 1968년까지 그루지아 공화국의 수도 트빌리 시의 파리아시빌리기념 아카데미 오페라 발레 극장의 지휘자로서 활약하였다.
1973년부터는 그루지아 국립교향악단의 예술 감독 겸 수석 지휘자의 지휘에 있다. 아람 하차투리안을 낳은 그루지아의 현대 음악의 적극적인 소개자로서 알려져있고 수많은 작품을 초연하고 있으며, 그 공적에 대하여 1977년에 S.루스타베리상을 수상하였다. 그 밖에 그루지아 공화국의 공로예술가의 칭호도 얻고 있다. 소련에서는 그의 자작도 포함한 상당한 레코드가 있는데 하차투리안의 발레 [가이느]의 전곡과 발췌반(멜로디아)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한 1956년 판에 의한 [가이느]의 연주는 이 곡의 민족적 요소가 훌륭하게 표현된 뛰어난 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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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투츠, 에드몽 드 (Edmond de Stoutz 1920~)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태어났다. 취리히 대학에서 법학을 배운 다음, 취리히 음악 호흐슐레에서 피아노, 첼로, 오보에, 타악기 및 작곡을 배웠으며, 후에는 잘츠부르크와 빈에서도 공부하였다. 1952년부터 1954년까지 취리히 톤할레 관현악단의 첼로 주자 및 타악기 주자를 하였다. 그 후 1954년에 자신의 현악합주단인 취리히 실내관현악단을 창설하고, 그 지휘자로서 활약하고 있다. 또한 1962년에는 취리히 콘서트 합창단을 창설하여 지휘를 맡았다.
그는 후기 바로크에서 바르토크, 스트라빈스키까지의 폭넓은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현대 음악의 소개자로서 그 이름이 높다. 레코드는 쇤베르크의 [정야]와 베베른의 [현악을 위한 다섯 악장](이상 밴거드)등이 그의 대표적인 음반이라 할 수 있다.
바르트, 에도 데 (Edo de Waart 1941~)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암스테르담 음악원에서 오보에를 전공하였는데, 처음에는 암스테르담 필의 오보에 주자로 출발하였다. 이어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 수석 오보에 주자를 2년간 지내고 나서 지휘자의 길로 전향했다. 지휘자로서의 데뷔는 1964년 네덜란드 방송관현악단을 지휘한 것인데, 같은 해에 미트로풀로스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함으로써 뉴욕 필에 1년간 번스타인의 어시스턴트로 경험을 쌓았다. 귀국 후는 1966년에 네덜란드 관악합주단을 조직하여 그 지휘를 맡는 한편,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의 부지휘자도 지냈다.
그리고 1967년부터는 네덜란드 로테르담 필의 지휘자로 지명되어 수석인 장푸르네 밑에서 본격적인 지휘 활동에 들어갔으며, 1973년에는 푸르네의 뒤를 이어 음악 감독 겸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여, 제4대 수석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1973년에는 몹시 바빠 네덜란드 관악합주단의 자리도 사임했을 정도이다. 널리 국내외에서 객원 활동을 하여 주목을 끌었으며, 1976년에는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의 수석 객원 지휘자가 되어 미국에서의 정기적인 활동도 개시했다. 1977년부터는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발탁되어 세계 악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로테르담 필도 1979년에 사임하여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에 전념했었다. 또 이 1979년 여름에는 처음으로 바이로이트 음악제에 등장하여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지휘 했다.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바르트는 이탈리아의 리카르도 무티와 동갑이며, 그의 로테르담 필 취임과 무티의 필하모니 아 관현악단 수석 지휘자 취임도 같은 해였고, 또한 둘 다 미국 메이저 오케스트라에 발탁되었음은 흥미롭다. 바르트의 로테르담 필의 공연은 성실한 연주 속에 생명감을 띄우고 있으며, 허세가 없는 독특한 맛을 갖춘 매우 매력적인 음악이다.
레퍼토리는 중견 특유의 광범함을 보여주지만, 그 자신은 모차르트, 베토벤, 말러, 바그너, 브루크너를 좋아하는 작곡가라고 말하고 있다. 레코드는 모차르트뿐이지만 [세레나데 제4번, 제5번, 제7번]과 [행진 곡 ·무곡 집] 중에는 베토벤도 약간 포함되어 있다. 그 밖에 생상스의 [교향곡 제3번], 프랑크의 [교향곡 d단조](모두 필립스) 등이 있다. 바르트는 1988년 현재 미네소타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활동중인데 앞으로의 활약이 매우 기대되는 지휘자 중의 한 사람이다.
르모텔, 에두아르드 반 (Edourd van Remoortel 1926~1977)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1945년 브뤼셀 왕립음악원에 입학하여 첼로를 가스파르 카사도에게 배우고, 지휘법을 알체오 갈리에라에게 배웠다. 1949년에 졸업한 다음 제네바 음악원에 유학하여 개인적으로 요제프 크리프스의 가르침을 받았다. 브뤼셀의 콩세르 포윌렐에서 데뷔한 다음, 1951년 벨기에 국립관현악단의 수석지휘자로 취임하였다.
1956년 미국에서 데뷔하였는데, 그 실력이 인정되어 1958년부터 1963년까지 세인트루이스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1965년에는 몬테카를로 국립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의 음악 고문을 맡았으나 51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그의 레코드는 지금은 거의 없지만, 르모텔의 연주의 특징은 근대와 현대 음악의 명쾌한 해석에 있다. 미국 CBS에 프로코피예프의 명연 등이 있었다.
슈트라우스, 에두아르트 (Eduard Strauss 1910~1969)
빈 태생으로,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증조부가 된다. 처음에는 슈트라우스 극장의 콘서트 마스터인 세레브니크에게 바이올린을 배운 다음, 빈 음악 아카데미에서 피아노와 호른을 배웠고, 다시 프란츠 슈미트에게 작곡을 배웠다. 지휘자로서 출발한 뒤에는 오직 슈트라우스 집안의 작품 소개에 주력했고, 1949년에는 슈트라우스 음악제를 빈에서 개최했는데 잊었던 작품을 많이 발굴, 연주했다. 그 후 빈 필하모니와 빈 교향악단을 비롯 널리 국내외에서 객원 지휘를 했고, 만년에는 19세기 당시의 명성으로 빈 요한 슈트라우스 관현악단을 조직, 독자적인 활동을 했다. 그는 역시 슈트라우스 집안의 정서가 풍부하게 담긴 정통적 빈 왈츠를 만끽할 수 있게 했다. 레코드는 [예술가의 생애] 등 왈츠와 폴카를 담은 [슈트라우스의 즐거움](폰타나) 한 장이 있다.
베이눔, 에두아르트 반 (Eduard van Beinum 1901~1957)
네덜란드의 아른헴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형에게 바이올린을, 셈 드레스덴에게 작곡을 배웠는데, 피아노 연주에도 뛰어났었다. 그 후 암스테르담 음악원에 들어가 16세 때 출생지의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 주자로서 참가하였다. 1926년부터 1931년까지 할렘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였으며, 그 후 같은 해 멩겔베르크로부터 초대되어 명문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의 지휘자가 되었다. 1938년에 정지휘자가 되었는데, 1945년에 멩겔베르크가 독일 나치스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추방되자, 그 이듬해 그의 뒤를 이어 수석 지휘자가 되었다.
그 후 베이눔은 이 오케스트라를 높은 수준으로 올리는 데 전력을 다했다. 객원 지휘자로서도 유럽 각지의 교향악단에 출연하였고, 1937년에는 레닌그라드필하모니, 1949년, 1950년에는 런던 교향악단을 지휘하였다. 1954년 1월 8일에는필라델피아 관현악단을 지휘함으로써 미국에 데뷔하였으며, 같은 해 가을에는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과 함께 미국에 가서 공연하였다. 1956년부터 1958년까지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의 상임 지휘자를 겸임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하며 상승가도를 달리다가, 1957년 4월 13일 58세의 한창 나이에 심장병으로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베이눔의 지휘는 전임자인 멩겔베르크의 낭만성이 강한 지휘와 잘 대조되었다. 그는 항상 양식이 뒷받침된 중용을 지켰고, 견고하고 흔들림이 없는 조형에 뛰어났다.
또 결코 자기를 남에게 강요하는 일이 없었으며 오히려 음악을 있는 그대로 말하게 한다는 방향을 취했다. 따라서 그의 연주는 언제나 깊은 전통미에 떠받혀지고 있는 동시에, 한편에서는 현대적인 감각도 아울러 갖추고 있었고, 또 이러한 점에서 그의 음악에서는 신선한 숨소리를 언제나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레코드는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을 지휘한 브람스의 [교향곡 제1번] 및 [제4번], 헨델의 [수상의 음악]이 이전부터 대표적인 음반으로 알려져 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5번] 및 [제8번](이상 필립스)에서는 독일풍의 견 고한 조형을 표현함과 동시에, 수년 전 처음으로 나온 [제5번]은 라이브 녹음인 만큼 잘 통솔된 피아니시모와 압도적인 고조 사이에서 만들어내는 폭넓은 표현력에 특히 뛰어 나 있다. 멘델스존의 [이탈리아 교향곡]에는 견고한 구성을 내세우면서 명쾌한 리듬의 흐름으로, 밝고 청신한 상쾌감을 조성했다.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에서는 결코 곡의 형태를 무너지게 하는 일이 없이 낭만적인 감성을 빚어 내는 것을 보면, 각각 의 곡에 정확하고 적합한 파악력을 구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협주곡에는 그뤼미오와 협연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필립스) 및 카사드쉬와 협연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 제4번](CBS)이 있다.
마타, 에두아르도 (Eduardo Mata 1942~)
멕시코의 멕시코시티에서 태어났다. 멕시코 국립음악원에서 카를로스 차베스에게 배웠으며, 이어서 버크선 뮤직 센터에서도 공부했다. 마타는 불레즈, 슈톡하우젠 등 이른바 전위 작곡가의 작품을 멕시코에서 최초로 소개한 지휘자이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멕시코 발레단의 음악 감독을 지냈고, 1965년부터 1966년까지는 과달라하라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가 되었다. 그 밖에 멕시코의 주요한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을 역임하였는데, 1972년부터는 애리조나 주의 페닉스 교향악단의 음악 고문 및 수석 지휘자가 되었다.
1977년부터는 댈러스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에 취임하였고, 1978년에는 런던 교향악단과 종신 계약을 맺었다. 마타는 작곡도 하고 있는데, 교향적 작품 외에 실내악이나 성악곡을 쓰고 있다. 더욱이 1973년에는 멕시코 음악가 유니온으로부터, 1976년에는 멕시코 비평가 연맹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레코드는 최근 RCA가 마타와 댈러스 교향악단에 힘을 쏟아 녹음한 라벨의 [다프니스와 클로에],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3악장의 교향곡] 등을 내었다. 런던 교향악단과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팔랴의 [스페인 정원의 밤](피아노 협연자 아추카로) 등이 있다(이상 모두 RCA). 마타는 견실한 지휘의 기술과 예민한 리듬 감각 등 젊은 수재의 일면을 잘 발휘하고 있으며, 1988년 현재 댈러스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있다.
다운즈, 에드워드 (Edward Downes 1924~)
영국의 버밍엄에서 태어났으며, 영국 버밍엄 대학, 런던의 왕립음악원(RCM)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1948년 카네기 장학금을 받고, 헤르만 셰르헨에게 2년간 배웠다. 1950년부터 1951닌까지 칼 로자 오페라의 준지휘자가 되었다. 1951년부터 1969년 사이에는 코벤트가든 오페라 극장의 전속 지휘자를 역임하였으며, [니벨룽겐의 가락지] 전편을 지휘하였다.
1963년에는 쇼스타코비치의 [카체리나-이즈마이로바]의 서방측 무대 초연을 지휘하였다. 1971년부터 1975년까지는 오스트리아 오페라의 음악 감독 겸 수석 지휘자를 역임한 다음, 1980년 BBC 노던 교향악단(맨체스터)의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어릴 때부터 러시아어를 배운 다운즈는 자신이 대본을 영어로 옳기고, 영어판에 의한 상연을 하였다. 무소르크스키의 [호반시치나], 프로코피예프의 [전쟁과 평화], 쇼스타코비치기 [코] 등 러시아 오페라도 그 자신의 영역에 의해 영국에 소개하여 영국에서 러시아 오페라의 스페셜리스트로 주목을 받았다.
뢰러, 에드빈 (Edwin Loebrer 1906~)
안트빌에서 태어난 스위스의 지휘자이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뮌헨의 톤쿤스트 아카데미에서 작곡과 지휘를 배웠고 그 후에는 취리히의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다시 취리히 대학에서 음악학을 배웠고, 1938년에는 젠프르에 대한 학위를 땄다. 1936년 루가노의 스위스 이탈리아 방송(SRI)의 합창단을 결성하고 그 지휘자가 되었다.
또 1937년에는 이 방송국의 음악 감독이 되었으며, 방송 프로의 제작에 뛰어난 공적을 올렸다. 1961년에는 소치에타 카메리스티카 디 루가노(루가노 실내합주단)를 설립하고, 르네상스에서 바로크에 이르는 특히 이탈리아 작곡가의 작품을 중심적 레퍼토리로 하여 활동하였다. 레코드에는 루가노 실내합주단과의 페르골레시의 [스타바트 마테르] [살베 레지나], D.스카를라티의 [스타바트 마테르], 칸타타 [테브로 강의 기슭](모두 에라토) 등이 있다.
쿠르츠, 에프렘 (Efrem Kurtz 1900~)
러시아의 페테르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918년부터 1920년에 걸쳐 리가의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그 후 독일에 유학하여 1922년 슈테른 음악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지휘자로서의 데뷔는 1921년인데, 니키슈의 사망으로 갑자기 만년의 이사도라 덩컨의 무대 공연의 지휘자로서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하게 되어 일약 명성을 얻었고, 1923년까지 재임하였다.
그 동안 안나 파블로바, 몬테카를로 발레 뤼스(러시아 발레단) 등의 공연 지휘도 하였고, 발레 지휘자로서 제일급이 되었다. 한편, 1924년부터 1933년까지 슈투트가르트 필하모니의 음악 감독도 하였는데, 여기서는 교향관현악단의 분야에서 착실히 그 성과를 올렸다. 미국에 가서는 1933년부터 1954년까지 캔자스시티와 휴스턴의 두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을 맡고 있으면서, 한편으로 뉴욕 필하모닉, NBC교향악단,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등에 자주 객원 지휘를 하여 호평을 얻었다. 그 후 영국의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을 지휘하여 당시 미지에 가까웠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9번, 제10번]을 소개 녹음하였다.
그리고 1966년에는 소련에 초청되어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고, 또 로마 오페라 극장이나 밀라노의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서는 오페라를 지휘한 일도 있다. 쿠르츠는 오랫동안 발레 지휘자를 역임한 일이 있어서 무용 음악에서 독자적인 예술 영역을 보여주었는데, 리듬이 명쾌하고 능숙한 지휘는 5, 60년대에 호평이었다. 그 전형에는 [파블로바를 회상하여]와 하차투리안의 [가이느] 모음곡(모두 에인절)이 있다.
인발, 엘리아후 (Eliahu Inbal 1936~)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이곳 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배운 다음, 시에나의 키지 음악원에서 첼리비다케의 지휘법 클래스에서 1961년부터 1962년까지 배웠다. 한편 1960년에서 1962년까지 파리 음악원에서 지휘법의 공부를 겸하였다. 1963년에 구이도 칸텔리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하여 구이도 칸텔리 상을 수상하였고, 그 후 지휘자로서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로 이탈리아에서 지휘를 하였는데 1965년에는 스칼라 오페라 극장의 관현악단을 지휘하였다. 1968년에 볼로냐에서 R.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엘렉트라]를 통해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다. 독일에서의 오페라의 첫 지휘는 1973년의 슈투트가르트에서의 [코시 판 투테]이며, 그 이듬해에는 뮌헨에서 [운명의 힘]을 지휘하였다. 이처럼 1970년 전후의 활약은 눈부신 바가 있다. 잘츠부르크, 베를린, 루체른 그 밖의 음악제에서도 지휘를 하게 되었고, 1974년부터는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이스라엘과 영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 연주회 지휘자로서는 베토벤이나 독일 낭만파의 전통적인 작품에 정평이 있으며, 착실하고 과장이 없는 해석을 보여 주고 있다. 레코드는 많은 편은 아니지만 프랑크푸르트 방송 교향악단을 지휘한 바르토크의 [관현악을 위한 4개의 소품](필립스) 등이 있고, 근대 음악에의 의욕을 보여 주고 있어서 자못 흥미롭다
마우에르스베르거, 에르하르트 (Erhard Mauersberger 1903~)
독일의 마우에르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루돌프 마우에르스베르거의 동생. 형과 함께 부친의 지도를 받고, 1914년부터 1920년까지 라이프치히의 토마스 교회합창단에 소속된 다음, 1920년부터 1925년까지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오르간과 피아노를 배웠다. 졸업한 해에 형의 후임으로서 아헨의 기독교 교회, 안네 교회, 콘서트 홀의 오르간 주자, 합창단장으로 취임하였다.
1928년 마인츠의 그리스도 교회에도 같은 직위로 취임하는 한편 마인츠의 음악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0년부터 1961년까지 튀링겐 교회 음악학교 교장을 역임하였고, 형이 창립한 바흐 합창단, 게오르게 교회 합창단의 지휘도 하였다. 동시에 1932년부터 1960년까지 바이마르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에서 강사를 하였고, 후에 교수로 임명되었다. 1961년에는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의 합창단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동독 바흐 위원회의 회장을 지냈다.
1968년 국가 공로상, 1972년 라이프치히 예술상, 1973년 작곡가·음악학자협회상을 받았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지휘자였기 때문에 화려한 표정은 없고, 차분한 음악을 들려준다. 레코드는 바흐의 칸타타 [우리 주 신은 견고한 성, 눈을 뜨라고 우리에게 하시는거룩한 말씀](아르히프)을 라이프치히 게반트 하우스 관현악단과 독창으로는 기베르, 테퍼, 슈라이어, 아담과,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 합창단과 함께 공연하였다.
클라이버, 에리히 (Erich Kleiber 1890~1956)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언어 학자인 부친이 프라하로 부임되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을 프라하에서 보냈는데, 1895년과 그 이듬해에 양친을 다 잃고 나서는 프라하와 빈의 친척 집에서 자랐다. 빈에서는 기초 교육 종료 시험을 받고 프라하 음악원에서 피아노, 오르간, 타악기, 지휘법을 공부하고, 그곳 대학에서 철학, 역사, 예술사를 배웠다.
1911년부터 그 이듬해에 걸쳐 프라하의 도이치 극장의 연습 합창 지휘자가 된 것이 음악 활동의 시작인데, 그로부터 1919년까지는 다름슈타트의 궁정 오페라 극장의 제3 및 제2(1916년 이후)악장이 되었다. 1919년부터 1921년까지는 바르멘 - 엘버펠트(현 부퍼탈)의 제1악장이 되고, 이 시기에 콘서트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다. 그로부터 뒤셀도르프, 만하임의 지휘자를 역임한 다음 1923년 8월에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총감독으로 취임하고, 1934년 12월에 나치스의 문화 정책에 반대하여 사임할 때까지 이 지위에 있으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이 사이에 야나체크의 [예누파], 베르크의 [보체크] 등 그 밖의 초연도 하였고, 뉴욕 필하모닉의 지휘를 위하여 두 번 미국에 갔다 1935년 1월에 나치스를 피해 독일을 떠났고, 이듬해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론 극장의 독일 오페라의 수석 지휘자, 1943년부터 1947년까지 하바나 필하모니의 지휘자 및 중남미 각지의 객원 지휘 등을 하였다. 1947년부터 유럽으로 진출하였으며, 1951년부터는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객원 지휘에 초청되었고 1954년에 수석 지휘자가 되었지만, 정치적 이유 때문에 1955년 3월 사임하였다.
그 후 각지에서 객원 지휘를 계속하였으며, 1956년 1월 27일에 취리히에서 사망하였다. 클라이버는 언어의 리듬과 오페라의 연출 효과에 천재적이라 할 수 있는 뛰어난 감각을 갖추고 있었다. 이로 인해 오페라 지휘에 독특한 경지를 개척했으며, 그러한 양식을 콘서트 지휘에까지 발전시켜 나갔다.
그의 음악은 항상 노래하고 있는 것이 큰 특색인데, 그래서 형식과 내용의 균형이 교묘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레코드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전곡(런던)이 명반 중의 명반이라 할 수 있다. 클라이버는 1950년까지 코벤트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과 거의 정기적인 접촉을 가지고, 이 오페라 극장의 수준을 현저하게 높이는 데 기여했는데, 이러한 인연의 깊이를 이 레코드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라인스도르프, 에리히 (Erich Leinsdorf 1912~)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는데, 그가 남긴 많은 악보로 초견 연주에 숙달한 일이 후에 지휘자로서의 경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 빈의 음악원에서 철로와 작곡을 배웠다. 1934년 잘츠부르크 음악원에서 [돈 조반니]의 리허설 피아노를 연주하였다. 다음해에는 합창 지휘를 담당하였는데, 이것이 토스카리니에게 인정되어 그의 밑에서 부지회자를 맡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그 두렵의 토스카니니는 결코 급하거나 화를 잘 내는 성질이 아니었고, 그것은 만년이 되어서의 일이었다고 한다. 피렌체 5월 음악제, 빈 음악제에도 보조 지휘자로서 참가하였고, 1936년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오페라를 지휘함으로써 데뷔하였다. 1937년에는 바그너의 [발퀴레]를 지휘하여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데뷔하였다. 그후 한때 유럽에 되돌아갔지만 나치스의 대두 때문에 독일,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워 전적으로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 지휘를 하였다.
다시 메트로폴리탄에 와서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상임 지휘자로 재임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당시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는 소프라노 플라그스타트, 멜히오르 등 쟁쟁한 바그너 가수들이 즐비해 있어서 특히 바그너를 지휘하고자 희망하여 참가하게된 것이다. 라인스도르프는 클리블랜드 관현악단(1943년∼1946년), 로체스터 필하모니(1947년∼1955년)의 지휘자로 활동했으며, 1955년부터는 뉴욕 시립 오페라 극장의 상임 지휘자가 되어 1956년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1958년에는 다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 복귀하여 1962년까지 음악 감독으로서 활약하였다. 1962년 샤를 뮌슈의 후임으로서 보스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는데, 전 임자 뮌슈 시절과는 달리 말러나 브루크너를 취급하였고 그 밖에 보스턴 교향악단 과 인연이 깊었던 프로코피예프의 곡을 적극적으로 다뤘다. 그리고 그는 7년간 이 유서 깊은 오케스트라와 함께 그의 생애에서의 한 정점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는 보스턴 교향악단을 떠나게 된 이유로서 상임 지휘자의 일이 매우 다망 하다 는 점을 들고 있다.
곡목은 연간 75곡에서 80곡을 취급하는데, 이들 대부분이 반복 하여 연주되는 일이 없었고, 베토벤의 [운명]마저 재임중에 두 번밖에 지휘한 일 이 없었다고 하니 얼마나 어려운 작업이었나를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하겠다. 그 후에는 프리랜서로 각지의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극장에 출연하고 있으며, 1976년 부터는 줄리니의 뒤를 이어 빈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가 되었다.
더욱이 1978년부터 는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라인스도르프피 지휘는 결코 강렬한 개성을 내세우는 일이 없이 오히려 견실한 방식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 근년에는 충실된 맛이 더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레코드는 보스턴 교향악단 시절의 것(RCA)이 중심이 되어 있다. 오페라에서 는 피터스(소프라노)와 그 밖에 빈 필하모니 에 의한 [피가로의 결혼] 전곡(런던)이 그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다.
내 대머리 꼭대기를 봐주십사 지휘자 가운데는 대머리가 유독 많다. 토스카니니, 미트로풀로스, 솔티 등의 머리 꼭대기가 완전히 벗겨졌듯이 이번 세종문화회관 개관기념예술제에 출연하기 위하여 뉴욕 필하모닉을 이끌고 온 에리히 라인스도르프의 대머리도 꼭대기가 완전히 불모지에서의 당구알처럼 딴들반들 빛났다. 라인스도르프는 지휘를 시작할 때에도 그렇지만 끝나고 박수갈채에 응하여 인사할 때엔 기하학적이랄까, 허리를 90도로 구부리고 대머리 꼭대기를 곧바로 청중들에게 향하게 하고 몇십 초 동안 화석처럼 까딱않고 있는 것이 색달랐다.
'내 대머리 꼭대기글 봐 주십사.'하는 듯 했다. 음악 평론가 K씨는 "대머리 꼭대기를 청중에게 향하여 오래 있는 것은 무슨 뜻이 있을텐데, 이때 왜 조명실에선 목석처럼 가만히 있지요! 정면으로 그 대머리를 향하여 조명을 비추면 라인스도그프의 대머리는 빛이 반사하여 마치 성인(聖人)의 후광(後光)과도 같이 빛날게 아니겠소 ! 극장 당국은 이런 위트가 없으니 라인스도르프가 그토록 오래 대머리 꼭대기를 정면으로 향하고 있는 뜻을 묵살한 셈이오."라고 농담이 아닌 진담으로 이야기 했다. 허리 에서 상반신을 90도로 구부려 대머리 꼭대기를 보이는 것은 분명히 그의 독특한 스테이지 매너였다.
리고 라인스도르프가 더욱 멋있었던 것은 앙코르 곡을 연주할 때엔, 지휘봉 끝을 두 손으로 고이 쥐고 인사하고는 타이탄의 목소리와도 같이 굵다랗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곡목을 소개하는 것인데, 이런 일도 라인스도르프가 얼마나 친절한가 하는 것을 말해준다. 그의 목소리가 황소 울음처럼 우렁차고도 음악적이 기 때문에 성악가 L씨는 "라인스도르프의 앙코르 곡 소개 때의 목소리는 고스란히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음악의 남신인 아폴론의 목소리를 듣는 것과도 같다.
그의 지휘도 뛰어나지만 그의 목소리 자체가 위대한 음악이다. 이것은 지휘자로서 오랜 수업을 닦으면서 이룩된 것이다."고 격찬했다. 기악 연주가는 간혹 앙코르 연주 때 곡목을 소개하는 일이 있지만, 지휘자는 거의 하지 않는데, 70대의 노인인 라인스도르프가 그토록 친절히 소개해 주는 것은 음악은 휴머니즘 과 직결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의 성격이 괴퍅하여 오케스트라 단원과 갈등을 잘 일으킨다는 소문과는 달리 매우 위트와 유머가 있는 사람이었다.
우르바너, 에리히 (Erich Urbanner 1936~)
작곡가이기도 하며,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955년부터 1961년까지 빈 음악 아카데미에서 힌테르호퍼에게 피아노, 스바로프스키에게 지휘, 시스케와 예리네크에게 작곡을 배웠다. 그 후 빈의 음악 호흐슐레에서 12음 세미나의 작곡 및 지휘 교수를 지내고 있다. 1950년대 말부터 활발한 작곡 활동도 하고 있어 작품도 많다. 한편으로 그는 현대 음악 지휘자로서도 활약하고 있다. 자작인 [콘트라바스 협주곡]의 반주 레코드(텔레푼켄)가 있다.
앙세르메, 에르네스트 (Ernest Ansermet 1883~1969)
흔히 '발레 음악의 귀신'라든가 '오케스트라의 마술사' 등으로 불렸던 스위스의 명지휘자로 레만호반 부베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수학자, 조부와 모친은 음악가인 좋은 환경으로 일찍부터 음악에 친숙해지만 학교에서는 오히려 수학의 신동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의 스위스에서는 음악가로서 출세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부친과 같은 수학자의 길을 택하고 로잔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였다.
대학 졸업 후는 스위스에서 중·고등학교의 교사로 수년 동안 근무했다. 그러나 그 한편 음악의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학생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거나 블로흐와 발브란을 사사하여 작곡을 공부하였다. 그러한 그가 지휘자가 될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은 베를린에서 니키슈의 연주를 듣고 나서의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앙세르메가 지휘자로서 처음으로 청중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나게 된 것은 비교적 늦었으며, 27세(1910) 때 몬토루의 쿠르자르 연주회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을 지휘하여 일약 스위스 악단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로부터 5년간, 로잔과 몬토루를 중심으로 하여 지휘 활동을 함으로써 차츰 실력을 키워 나갔다. 1915년에 제네바 시의 교향 악단의 정기 연주회에서 지휘를 하였는데, 그 무렵 스트라빈스키와 친교가 생겼고, 그의 추천으로 디아길레프가 주재하는 발레 뤼스(러시아 발레단)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 이래 디아길레프가 떠난 1929닌까지 이 발레단의 공연에 참가하였고, 스트라빈스키의 [병사의 이야기] [결혼] [풀치넬라], 팔랴의 [삼각모자], 프로코피예프의 [어릿광대] 등 수많은 현대 발레의 초연을 지휘하였다.
'발레 음악의 귀신'의 소지는 실로 이 시대에 커나갔던 것이다. 발레 뤼스를 지휘하게 된 지 얼마 안된 1918년의 가을, 그는 소년 시절부터의 꿈이었던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스위스 로망드 관현악단이었다. 이 오케스트라는 최초에 48명이라는 소편성으로 그 첫발을 내딛었지만, 1938년에 로잔 방송관현악단을 흡수하여 92명이 되었고, 최종적으로는 120명이라는 대규모의 악단으로 성장하였다.
앙세르메는 1967년 상임 지휘자의 자리를 클레츠키에게 넘겨 줄 때까지 실로 49년간에 걸쳐 이 오케스트라를 계속 지휘하여 세계 일류의 오케스트라로 키웠던 것이다. 이것은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였던 멩겔베르크의 경우를 제외하면 한 사람의 지휘자가 한 오케스트라를 계속하여 지휘한 최장 기록이 된다. 1969년 2월 20일 제네바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나이 86세의 일이었다.
앙세르메는 젊었을 때부터 근대, 현대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다뤘으며, 그 생애가 그대로 현대 음악사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였다. 레코드는 모두 런던에서 냈으며, 레퍼포리는 매우 광범위한데, 근대·현대의 프랑스 음악과 러시아 음악, 특히 발레 음악의 연주에서는 그의 탁월함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친교가 있었던 스트라빈스키의 3대 발레 음악([불새]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을 비롯하여 차이코프스키의 3대 발레 음악([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들리브의 [코펠리아], 팔랴의 [삼각모자]와 [사랑은 마술사], 라벨의 [다프니스와 클로에] [마 메르 루아] [라 발스] [볼레로] 등, 이들은 모두 최고의 훌륭한 연주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의 연주는 수학자답게 정밀한 계산을 바탕으로 하여 음악을 구성한 것으로, 그 연출은 얄미우리만큼 교묘하기만 하다. 또 그는 음의 화가로서도 알려져 있는데, 색채적인 음향을 만들어 내는 명인이었다. 이것은 이미 말한 스트라빈스키나 라벨 외에 드뷔시의 [바다], 무소르크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차데], 레스피기의 [로마의 소나무] [로마의 분수] 등의 연주를 들으면 곧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앙세르메는 리듬 처리의 명인이었다. 발레 음악의 리듬을 이 사람만큼 정확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표현한 지휘자도 드물다.
그것은 마치 리듬에 생명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이탈리아인은 태어난 순간부터 노래하는 것을 배우고, 러시안인은 춤추는 일을 배운다"는 말이 있는데, 앙세르메의 몸 속에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발레 음악의 리듬이 맥박치고 있었던 것만 같다.
부르, 에르네스트 (Ernest Bour 1913~)
프랑스의 티옹비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오르간 주자로서 아마추어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그 지휘를 맡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공부하는 한편 스트라스부르 음악원에서 피아노, 오르간 이론을 배웠다. 또한 프리츠 뮌히에게서 지휘법을 배웠다. 그 후 먼저 그 고장의 방송국에서 합창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다. 1941년에 윌즈 시립 오케스트라에 지휘자로서 계약을 체결하였고, 그 밖에 라디오 파리를 정기적으로 객원 지휘하거나 스트라스부르의 음악 - 나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에의 연주 여행을 하였다.
1950년에 스트라스부르에 돌아와 스트라스부르 시립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1955년에는 프리츠 아담과 함께 스트라스부르 오페라의 지휘자도 되었다. 1964년 1월에 바덴바덴의 남서 독일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가 되었다. 현대 음악의 보급, 소개에 열심인 지휘자로서 알려져 있다. 힌데미트의 [화가 마티스], 바르토크의 [푸른 수염 영주의 성], 스트라빈스키의 [방탕자의 행각]의 프랑스 초연은 그가 하였다.
루카치, 에르빈 (Ervin Luk cs 1928~)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의사를 지망하여 의학을 배웠으며, 한편으로는 피아노와 작곡 공부도 하였다. 부다페스트의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에 입학하여 라슬로 쇼모지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졸업 후 1957년 부다페스트 오페라 극장의 부지휘자로서 시작하였다.
루카치는 1962년 로마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부터 국제적으로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1972년 헝가리 국립교향악단과 미국 연주 여행을 하여 호평을 받았다. 지휘대에서의 루카치의 지휘 양식에서는 날카로운 근대성에 뒷받침된 명확한 표현을 볼 수 있다. 그의 음악에서는 리얼하게 작품을 표현하려는 자세와 건조하면서도 투명한 서정성을 느낄 수가 있다.
그라치스, 에토레 (Ettore Gracis 1915~)
이탈리아의 라 스페치아에서 태어났다. 파르마의 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배운다음, 베네치아 음악원에서 피아노, 지휘법을 수학하고, 그 후 말리피에로와 주알니에리 밑에서 지휘법을 더욱 연마하였다. 그리고 1942년부터 6년간에 걸쳐 베네치아의 베네데토 마르첼로 합주단의 지휘자를 역임한 다음, 1959년에는 베네치아의 페니체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함과 동시에 마르첼로 음악원의 지휘과 교수로도 영입되어 후진들의 육성에도 전력하였다.
레코드는 페르골레시의 대표적 명곡 「스타바트 마테르」(아르히프), 미켈란젤리와 협연한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4번」(에인절)의 두 장이 있을 뿐이다. 이 중에서 프레니와 베르간사가 솔로로 노래하고, 나폴리 스카를라티 관현악단을 지휘한 전자가 페르골레시의 세계를 충분히 표현하고 있다.
비고, 외젠 (Eug ne Bigot 1888~1965)
프랑스의 렌에서 태어났다. 렌 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운 다음, 1905년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루르, 제달제, 비다르 등에게 배웠다. 1913년 샹젤리제 극장의 합창 지휘자로서 출발하였다. 1923년에는 파리 음학원 관현악단의 지휘자가 되었다. 1925년에는 음악 감독으로서 샹젤리제 극장에 복귀하고, 1935년에는 콩세르 라무뢰 관현악단의 회장과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1936년부터 1947년에 걸쳐 오페라 코미크 극장의 수석 지휘자도 겸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7년부터 타계하기까지 프랑스 국립방송의 수석 지휘자도 지냈다. 또 1947년부터 1958년에 걸쳐서 파리 음악원의 지휘과 교수로서도 많은 후진을 육성한 공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고는 프랑스 지휘계의 큰 인물로서 바그너, 러시아 음악, 베를리오즈에서 피에르네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음악에 정평이 있었다. 레코드는 적다. 협주곡을 지휘한 것 밖에 없지만 그 견실한 연주는 비고가 뛰어난 테크니션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요훔, 오이겐 (Eugen Jochum 1902~)
독일 바이에른의 바벤하우젠에서 태어났다. 음악 형제의 한 사람으로서, 형 오토(1898∼1969)는 합창 지휘자로서 오르간 주자이면서 작곡가였고, 동생 게오르크루드비히(1909∼ )는 지휘자이다.오이겐은 어릴 때부터 뛰어난 음악적 소질을 보였고, 8세 때부터 교회의 예배 때에 오르간을 치고 있었다.
1922년까지 아우구스부르크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오르간을 배우고, 이어서 뮌헨의 음악 아카데미에들어가 처음에는 주로 발터스하우젠 밑에서 작곡을 공부하였으나 결국 지휘로 전향하게 되고,하우제거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그리고 뮌헨 국립극장의 연습 지휘자의 자리도 구했다. 이 사이의1925년에 아카데미를 졸업하였고, 그 이듬해까지 멘헨글라트바흐의 극장 연습 지휘자 및 제2악장이 되었다.
이 사이의 1926년에 뮌헨 필하모니에서 연주회 지휘자로서 데뷔하였고, 이듬해1927년에 또 킬 시립오페라 극장에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통해 오페라 지휘자로서 데뷔하여 모두 성공하였다.이로 인하여 1927년에 킬 극장에서 제2악장으로서 초빙되어 그곳으로 이사갔다. 이윽고 제1악장으로승진하였고, 1929년까지 그 곳에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오페라의 레퍼토리를 50곡 이상으로넓혔고, 또 이에 병행하여 뤼베크 악우협회의 지휘자도 지냈다. 1929년부터 1930년에 걸쳐 만하임국립극장의 제1지휘자가 되고, 1930년부터 1932년에는 뒤스부르크의 음악 총감독이 되었으며,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1번]의 연주가 인정되어, 1932년에는 베를린 방송국의 음악 디렉터로 임명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베를린 필하모니와 베를린 시립 오페라 극장을 지휘하는 기회도 얻는 행운을 잡았다.
특히 베를린 필하모니와는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한편에서는 독일에서 나치스의 세력이 차츰
강대해지고, 마침내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나치스 독일 시대에, 베를린에서의 SP의
텔레푼켄 레코드를 통해 요훔의 이름이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1934년에 무크와 뵘의 뒤를
이어 함부르크 필하모니와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이 오페라 극장의
관현악단이 함부르크 필하모니) 하였고, 이 자리에 1949년까지 있었다.
이 사이에는 전쟁 때문에 시가지가 파괴되었으며 나치스의 정치적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는 당시 독일의 다른 도시에서의 상연이 금지되어 있던, 힌데미트, 바르토크, 스트라빈스키들의작품들을 용감하게 취급하였다. 또 나치스 점령 하에 있던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의 지휘 계약도 체결하였다. 그리고 그는 온후한 인품과 격조 높은 음악 조성이 높이 평가되어 이 관현악단과는 전후에도 관계를 가지게 된다.
1945년 독일의 무조건 항복 이후에도 요훔은 함부르크에서 활동을 개시하였는데, 1949년에 뮌헨으로 옮기고 바이에른 방송국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고,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설립에 진력하면서 그 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고, 그 연주 수준을 유럽 제1급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였다.
1961년에 그 자리를 쿠벨리크에게 물려 주고, 요훔은 베이눔의 후계자로서 하이팅크와 함께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는데, 이윽고 이를 사임하고 그 후에는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 런던 교향악단(1977년 이래 계관 지휘자), 런던 필하모니 등에서 지휘를 계속하고 있다. 그는 오페라를 포함하여 독일 것을 특히 장기로 하고 있다.
베토벤, 브람스, 브루크너에서 격조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함부르크 시에서 브람스 메달을, 국제 브루크너 협회에서는 브루크너 메달을 받고 있으며, 1950년부터는 브루크너 협회 독일 지부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 밖의 명예상도 수없이 많이 받고 있다.
요훔의 음악은 지성적이고 명쾌하게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과장된 주정주의(主情主義)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으며, 작품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감동력을 교묘하게 이끌어 낸다. 레코드는 드레스덴 국립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을 지휘한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7번]과 [교향곡 제8번](모두 에인전)이 특히 빛나고 있다.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전곡(그라모폰)도 귀중한 레코드이다.
구센스, 유진 (Eugene Goossens 1893~1962)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났다. 조부와 부친 모두 지휘자로서 영국에서 활동하였는데, 조부는 벨기에 사람이었다. 10세 때 브류주 음악원에 입학하였고, 이어서 리버풀 음악대학, 런던의 왕립음악원(RCM)에서 작곡, 음악 이론, 바이올린을 수학하였다. 졸업 후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는데, 1916년 비첨의 부지휘자가 되어 지휘에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21년 특별 편성된 악단을 결성하여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의 영국 초연을 지휘하여 명성을 얻었다.
1920년대에는 작곡 활동도 하였는데, 영국의 모더니스트로서 한때 떠들썩 했다. 1923년 가을, 신설된 로체스터 필하모니의 음악 감독으로 영입되어 미국에 건너가게 되었고, 거기서 23년간 지휘자로서 활약하였다. 또한 라이너의 후임으로 신시내티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재임했다(1931년∼1941년). 구센스는 쿨한 기질의 지휘로써 복잡한 작품을 잘 다루었다.
1947년 시드니의 뉴사우스 웨일스 음악원장 겸 시드니 교향악단 음악 감독으로 부임하여 음악적인 수준을 높이 올렸,는데, 그 공로로 1955년에 KBE(Sir :경)에 서위되었다. 1956년 시드니 교향악단의 시즌을 지휘하기 위하여 영국에서 돌아왔을 때, 시드니 공항 세관에서 구센스의 짐 속에서 포르노 사진이 적발되어 다음날 일간지에 크게 보도되었다. 이 사건으로 구센스는 두 요직을 사임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1977년 오스트레일리아 EMI는 '구센스/시드니 교향악단'을 추억하는 2장의 앨범을 발매하였다.
오르만디, 유진 (Eugene Ormandy 1899~1987)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4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하였고, 5세때 부다페스트 왕립음악원에 입학, 명바이올리니스트인 푸바이에게 지도를 받았다. 졸업 후는 바이올린 독주자로서 활약하는 한편 모교의 교단에 섰는데, 1920년에 어떤 매니저의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 간 일이 계기가 되어 그의 인생은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연주회가 취소되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뉴욕의 캐피틀 극장의 한 바이올린 주자로서 취직하였는데, 곧 콘서트 마스터로 승진되었다.어느 날 급병으로 쓰러진 지휘자의 대역을 맡은 데서 지휘자의 길이 열려, 1925년에 이 극장의 음악 준감독이 되었고, 일류 오케스트라의 지휘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있게 되었다. 1930년 봄, 필라델피아 로빈후드 델 관현악단에 객원 지휘하여 인정을 받은 그는, 1931년에 미니애폴리스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임명되었고, 5년의 임기중에 이 오케스트라의 기술적인 수준을 현저하게 높혔다.
1936년에는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의 어소시에이트 지휘자로 취임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상임 지휘자인 스토코 프스키의 추천에 의한 것으로, 그로부터 2년 후인 1938년, 38세라는 젊은 나이로 이 오케스트라의 정지휘자의 자리에 취임하게 되었다. 당시 30대의 지휘자가 미국의 초일류 오케스트라의 상임에 취임한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로서 오르만디는 대단한 행운을 잡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운이 좋았다는 것만으로는 이 필라델피아 관현악단과 같이 명인들이 기라성처럼 늘어선 오케스트라에서 오fot동안 콤비를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1980년에 무티에게 정지휘자의 자리를 물려 줄 때까지 실로 42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왔다는 것은 오르만디의 실력이 얼마나 탁월했나 하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오르만디의 오케스트라 통솔의 능력은 대단한 것으로 그야말로 명인의 경지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1978년, 1981년에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한국에 와서 세종문화회관에서 지휘했다. 그러나 오르만디에게는 선배인 스토코프 스키와 같은 강렬한 개성은 없다. 그것은 '무개성의 개성'이라고나 할까. 그것이 그의 예술의 장점이면서 또한 단점이라할 수 있다. 그리고 그만큼 좋은 의미에서의 '장인기질'에 철저한 지휘자도 드물었고 그런 점에서 귀중한 존재였다. 오르만디는 매우 폭넓은 레퍼토리의 소유자이다. 비발디에서 현대 작품까지 잘 소화시키고 있다.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어서 결코 지나치게 돌진하는 일은 하지 않았고, 이것이 재임중 압도적인 대중의 지지를 받게 된 비밀의 하나일 것이다. 오케스트라의 탓도 있지만 오르만디의 표현은 언제나 스마트하고 그 색채는 풍예하였다. 그리고 솔티나 도라티, 라이너 등와 헝가리계의 지휘자에게도 공통되는 일인데, 오르만디의 지휘는 극히 다이내믹하고 상쾌하다. 수많은 레코드 중에서 특색이 잘 발휘된 연주를 열거하면, 레스피기의 [로마 3부작], 비제의 [카르멘] 모음곡과 [아를의 여인] 모음곡, 프로코피예프의 [피터와 늑대]와 브리튼의 [청소년을 위한 관현악 입문], 코플랜드의 [애팔래치아의 봄]과 [빌리 더 키드], 거슈윈의 [파리의 아메리카인]과[랩소디 인 블루], 주페의 [경기병]서곡 등 파퓰러 소품을 모은 것이 단연 좋고, 큰 작품으로는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4번, 제5번], 시벨리우스의[교향곡 제2번], 바르토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이상 모두 RCA) 등이 빛나고 있다.
특히 후자는 최근의 원숙한 그의 예술적 경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오르만디는 종합적 기교가 뛰어난 지휘자이기도 하다. 젊었을 때의 그는 '반주 지휘자'라는 말을 듣기도 하였는데, 협주곡 지휘의 우수함은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주자의 개성을 존중하면서 착실하게 음악을 만들었다. 오이스트라흐와 공연한 멘델스존과 차이코즈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CBS),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CBS), 호로비츠와 협연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RCA) 등은 반주 지휘의 표본이라 할 만한 명연주이다.
행운의 황금 열쇠와 지휘자 대한민국 음악제의 하나로서 1981년 5월 사흘 동안 베풀어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백발의 노지휘자 유진 오르만디의 어쩌면 나이 때문에 마지막 지휘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품고 들어서 그런지 더욱 애착을 느끼게 했다. 하루에 3곡씩 베토벤을 비롯한 위대한 작곡가들의 명곡을 연주했는데 오케스트라의 음색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무지개와도 같이 찬란했다. 그런데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 의식으로서 연주하는 우리 애국가와 미국 국가는 이를데없이 아름답게 느껴졌지만 특히 애국가의 연주는 우리나라를 찾아온 세계적인 많은 오케스트라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게 연주한 것이라고 본다.
사흘 동안 만원을 이룬 4천여 석의 세종문화회관에서 많은 청중에게 음악적인 기쁨을 주었지만 세계적인 지휘자 오르만디 옹이 며칠 동안 우리나라에 머물면서 보여준 대인 관계가 음악 못지 않게 아름다웠던 것이 아닌가 한다 우선 그 하나가 어떤 사람에게든지 친절히 대해 주는 것인데 신라 호텔에서 세종문화회관까지 모셔다 주는 자동차의 운전사에게 깍듯이 인사를 먼저 하면서 수고한다는 뜻을 나타냈다. 그리고 오르만디는 단원들과 함께 서울 시장이 베푸는 잔치에서 황금으로 만든 '행운의 열쇠'를 받을 때 단원들에겐 기념 메달만을 주었는데 혼자 좋은 것을 받아서 죄송하다는 말을 되뇌었다.
이것은 그가 헝가리 사람으로서 젊었을 때 미국으로 가서 음악 활동을 하면서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음악으로 실천해 온 행동 철학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오르만디는 사인을 받겠다고 밀려드는 많은 팬들을 제지하는 극장 직원들을 나무랐는데, 이것도 그의 드높은 휴머니즘을 말해준다. 자기에게 사인을 받겠다는 사람들이 세찬 물결처럼 달려들어 설령 자기가 부상을 입더라도 팬들의 열의를 조금도 뿌리치지 않겠다고 하는 그의 마음씨는 결코 인기 전술이 아니며 그의 부드러운 천성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퀠러, 이브 (Eve Queler )
현재 50세 전후로 생각되는 미국의 여성 지휘자이다. 피아노와 호른을 배우고 처음에는 피아니스트로서 활약을 시작하였다. 지휘는 조제프 로젠스톡과 카를 밤베르거에게 배우고, 1965년에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연습 지휘자를, 같은 해부터 1970년까지 뉴욕시티 오페라와 어시스턴트 지휘자를 맡아 오페라의 경험을 쌓아 올렸다. 그리고 이 사이 1968년 뉴욕에서 [라 보엠]을 지휘함으로써 데뷔하였다. 1970년에는 세인트루이스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심포니 지휘자로서도 데뷔하여 주목을 받았으며, 1971년 『뮤지컬 아메리카』 잡지의 '이달의 음악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뉴욕 오페라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 겸 수석 지휘자로 활동했으며, 미국 각지와 유럽의 오페라 극장에도 종종 객원 지휘를 했다. 그녀가 음악 감독으로 재임했던 뉴욕 오페라 관현악단은 카네기 홀에서 연주회 형식에 의한 공연을 주로 하고 있어서 극장에서는 좀처럼 상연되지 않는 작품의 연주에 의해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이 공연과 병행하여 지금까지 도니체티의 [겜마 디 베르지], 미스네의[르 시드], 푸치니의[에드가르], 베르디의 [아롤도](이상 CBS)를 녹음하고 있다.
므라빈스키, 에프게니 (Evgeny Mravinsky 1903~1988)
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현재의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다. 1920년에 레닌그라드대학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때 중퇴하고, 후에 유명한 배우가 된 체르카소프와 함께 마린스키 극장에 잡역으로 들어갔다. 이 마린스키 극장은 현재의 레닌그라드 국립 아카데미 오페라 발레 극장의 전신인데, 그가 들어갈 당시는 표도르 샬리아핀, 이반 아르체프스키, 이반 에르쇼프 등, 러시아 오페라의 지보라 할 수 있는 명가수들이 있어서 바로 가까이에서 그 예술에 접할 수가 있었다.
그 후 레닌그라드 발레 학교의 피아니스트로서 채용되어 유명한 지휘자와 무용수들의 연습 광경을 자세히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1924년 그는 정식 음악 교육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레닌그라드 음악원에 입학하여 체르노프에게 작곡을, 가우크와 말코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그가 쇼스타코비치와 알게 된 것은 이 음악원 재학중의 일이었다. 1930년에 작곡과를, 1931년에는 지휘과를 각각 졸업하였는데, 그보다 전인 1929년에 처음으로 오케스트라 지휘를 경험했다.
1931년 레닌그라드 오페라 발레 극장의 부지휘자로 임명되고, 1932년에는 당시 아직 신인이었던 가리나 브라노바가 주연하는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지휘하여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므라빈스키가 소련 악단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38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전 소비에트 지휘자 콩쿠르에서 1등상을 수상하고 나서였다.
그 결과 그의 이름은 소련 내에 널리 알려졌고 동시에 레닌그라드 필하모니의 정지휘자로 발탁되는 행운을 잡게 되었다. 이때 35세의 젊은 나이로 지휘자로서의 경험이 몇 년밖에 되지 않았던 그가, 소련 최고의 오케스트라의 책임있는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얼마나 그의 장래가 촉망되고 있었나 하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처음에는 이 관현악단의 고참 멤버들로부터 '
오케스트라의 생도'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지만, 그동안 급속도로 두각을 나타내고 곧 권위있는 지휘자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침체 상태였던 레닌그라드 필하모니를 육성하고 세계적인 유명 오케스트라로 높인 공적으로 1946년에 레닌 상을 수상하였으며, 사회주의 노동 영웅, 소비에트 연방 인민 예술가의 칭호를 받는 등 소련 음악계의 인간 국보적인 존재이다.
그는 또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원장도 역임하였다. 므라빈스키의 지휘는 토스카니니를 연상케 하는 정도로 격렬한 힘에 넘치는 것으로서, 스케일이 큰 표현에는 거장다운 품격이 스며나오고 있다. 레퍼토리는 바흐, 하이든에서 현대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매우 넓지만, 그 중심이 되는 것은 역시 러시아 작품으로서, 그 중 차이코프스키,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연주는 천하일품이라 할 수 있다.
므라빈스키는 쇼스타코비치의 최대의 이해자로서 정평이 나 있어서 레닌그라드 필하모니의 정지휘자가 되기 바로 전년에 손을 댄 교향곡 [제5번]을 비롯하여 [제6번, 제8번, 제9번, 제10번, 제11번, 제12번][숲의 노래][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등, 쇼스타코비치의 주요한 작품 거의 모두를 초연하였던 것이다. 레코드는 차이코프스키와 쇼스타코비치의 것들이 대단한 명연주이다.
차이코프스키에서는 [교향곡 제4번], [교향곡 제6번](이상 그라모폰), 쇼스타코비치에서는[교향곡 제5번][교향곡 제7번][숲의 노래](이상 멜로디아) 등이 녹음은 오래되었지만 레코드 사상에 길이 남을 모범적인 연주라 하겠다. 1965년 2월에 실시된 연주회의 실황 녹음에 의한 [모스크바 음악원 연주회장의 므라빈스키]라는 일련의 레코드(멜로디아)는 므라빈스키의 원숙한 예풍을 알 수 있다는 데서 귀중하다. 그 중에서도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제7번]과, 글린카의 오페라 [루슬란과 루드밀라] 서곡 외에 소품을 수록한 한 장이 각각 경청할 만한 것이다.
또, 그는 1978넌의 빈 예술 주간의 라이브 녹음에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5 번],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5번], 브람스의 [교향곡 제2번]과 그 밖의 것을 수록한 앨범(멜로디아)에서는 실연다운 긴박감과 박진감이 넘쳐 흐르는 열렬한 연주를 보여주고 있디. 이는 만년의 므라빈스키의 예술 경지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명반이라 할 수 있다.
스베틀라노프, 에프게니 (Evgeny Svetlanov 1928~)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볼쇼이 극장관현악단의 솔리스트, 어머니는 마임 앙상블의 예술가라는 극장 집안에서 태어났다. 스베틀라노프는 그네신 학교에서 미하일 그네신에게 작곡을 배웠고, 메트너 문하생인 마리아 구르비치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1951년에 졸업한 뒤에 모스크바 음악원에 진학, 그 곳에서 샤포린에게 작곡을, 가우크에게 지휘를 배웠다. 1959년에 졸업했는데 재학 중인 1953년에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하여 데뷔했다. 1955년부터 볼쇼이 극장에 들어가 처음에는 어시스턴트 지휘자로 일했으나 곧 지휘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62년부터 1964년까지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여 1964년 볼쇼이 극장의 스칼라 극장 공연에도 동행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약 10년에 걸친 볼쇼이 극장 시절에 스베틀라노프는 차이코프스키나 러시아 국민음악파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소련의 대표적인 오페라와 발레를 지휘하여 명성을 높였는데, 특히 장려한 합창이 곁들인 장면에 있어서는 신선하고 색채가 풍부한 음을 보여주었다고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시체드린이나 카라예프 등의 새로운 작품도 적극적으로 채택하여 초연하기도 했으며, 바르토크의 [푸른 수염 영주의 성] 등의 외국 작품의 소개에도 힘썼다. 스베틀라노프는 볼쇼이 극장 시절부터 모스크바 필하모니며,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 등 소련 각지의 오케스트라를 자주 지휘하여 콘서트 지휘자로서도 활약했는데, 1965년에는 콘스탄틴 이바노프의 후임으로 소련 국립교향악단의 음악 감독 겸 수석 지휘자로 취임했다.
스베틀라노프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소련국립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취임한 뒤부터라 하겠는데, 특히 취임 얼마 후에 녹음한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전집](멜로디아)의 훌륭한 연주로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다. 콘서트 지휘자로서 레퍼토리는 매우 넓다고 하겠는데, 19세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소련의 관현악단곡 및 합창곡이 거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차이코프스키, 무소르크스키,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등의 대가들의 작품은 물론, 특 히 주목을 끈 것은 그때까지도 별로 소련 국내에서도 연주되지 않았던 미야스코프스키의 작품을 가끔 연주한 것을 비롯하여, 셰발린과 크니퍼, 시체드린, 에슈파이 등의 새로운 작품을 소개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또한 스베틀라노프는 작곡가로서도 대편성의 교향곡, 실내악곡, 기악곡, 칸타타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현대 소련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음악가의 한 사람으로서 1968년에 '인민 예술가'의 칭호를 받았고 1972년에는 레닌 상을, 1975년에는 글린카 상을 받았다. 레코드는 차이코프스키를 비롯하여 러시아 - 소비에트의 유명한 작품은 거의 모두 녹음했기 때문에 그가 지휘한 작품은 아주 많은 편에 속한다. 그의 연주는 어느 것이나 다이내믹하고 생동감과 색채감이 충만한 것이 특징이라 하겠는데 최근에는 영국의 오케스트라와 녹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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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바, 파우스토 (Fausto Cleva 1902~)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에서 태어났다. 트리에스테 음악원과 밀라노의 베르디 음악원에서 배웠다. 그 후 미국에 건너가 1920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합창 지휘자가 되었고, 1938년에는 부지휘자가 되었다. 더욱이 1950년부터는 수석 지휘자가 되었는데 이 동안 1934년부터는 신시내티 하기 오페라의 음악 감독을, 또 1944부터 1946년까지는 시카고 오페라의 예술 총감독을 하였다.
그 밖에 1942년부터 1943년까지, 1949년부터 1955년까지는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음악 감독을 역임했다. 그는 오페라 분야에서만 활동했으며, 그 밖에 빈 국립 오페라 극장과 스톡홀름 왕립 오페라 극장에서 초청되기도 했다. 베로나의 야외 극장에도 출연하였으며, 그 밖에 에든버러 음악제를 비롯하여 각지의 음악제의 출연도 많았다. 특히 이탈리아 및 프랑스의 오페라를 주요한 레퍼토리로 삼고 있으며, 레코드에는 베르디의 [루이자 밀러] 전곡(RCA), 카탈라니의 [라 왈리] 전곡(런던) 등이 있다.
프로하스카, 펠릭스 (Felix prohaska 1912~)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부친 카를 프로하스카는 1908년부터 빈 음악원과 음악 아카데미의 피아노 교수를 했던 사람이며, 그 이전에 바르샤바 필 지휘자도 지냈고 작곡가로서도 알려져 있었다. 펠릭스는 부친으로부터 작곡과 피아노를 배우고, 그 후 빈 대학에서 음악학을, 또 피아노를 벨라와 슈토이에르만에게, 바이올린을 G.파이스트에게, 음악 이론을 가르 등에게 배웠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그라츠 오페라 극장의 코레페티토르를 지내는 한편 동지의 음악원에서 가르쳤고, 그 후 1941년까지 뒤스부르크, 이어서 1943년까지 스트라스부르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를 지냈다. 스트라스부르에서는 음악원의 교직도 겸했다. 전후 1945년부터 오랫동안 빈 국립 오페라 극장과 폴크스오퍼의 지휘자를 겸무하고, 빈 음악 아카데미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1955년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오페라극장 수석 지휘자가 되었으며, 1961년 그 지위를 그만두고 이후 1969년까지 함부르크 음악대학 학장으로 교무를 맡아보는 한편, 지휘법 클래스의 주임 교수와 동교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역할도 했다. 또 그때까지의 긴 세월에 걸쳐 유럽 제국과 남미에서도 객원 지휘자로 활약했다. 1945년과 1946년의 잘츠부르크 음악제에도 출연하여 [피가로의 결흔]과 [후궁으로부터의 도피]를 지휘했다. 레코드는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밴거드)등이 있다.
슬래트킨, 펠릭스 (Felix Slatkin 1917~1960)
미국의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워서 처음에는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데뷔하였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영화 음악의 녹음을 위한 오케스트라에서 콘서트 마스터를 역임하였다. 1948년 할리우드 현악 4중주단을 조직하여 제1바이올린을 맡았으며, 이 4중주단의 수준을 향상시키는데 노력했다. 그와 동시에 할리우드의 명물인 할리우드 보울에서 이루어지는 '스타라이트 콘서트'에서 할리우드 보울 교향악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딱딱하지 않은 친숙한 명곡을 연주하였으며, 레코드에서도 거의 이러한 종류의 곡만을 녹음하여 인기를 얻었다.
슬래트킨이 많이 녹음하고 있는 오케스트라 소품을 들어보면, 매우 명쾌하고 화려한 색채를 뿌리는 것과 같이 그야말로 야외 회장에 척 어울리는 데가 있다. 같은 파퓰러 음악을 슬래트킨이 연주를 하면, 보스턴 팝스가 오서독스한 데 비해, 할리우드 보울에서는 더욱 직선적으로 청중을 즐겁게 해준다. 아마도 이런 점에서 미국인의 환영을 받게 되는 것 같다.
바인가르트너, 펠릭스 (Felix Weingartner 1863~1942)
오스트리아의 차라에서 태어났다. 20세기 전반에 있어서 최고의 지휘자의 한 사람으로 그라츠와 라이프치히에서 배우고, 1883년에는 바이마르에서 만년의 리스트를 사사하기도 했다. 쾨니히스베르크의 악장을 시작으로 유럽 각지에서 활약하여, 1914년 다름슈타트의 총감독, 1919년 이후는 주로 빈 국립 오페라와 빈 필하모니의 지휘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바인가르트너의 연주는 빈의 귀족 취미와 고전적인 형식미에 뒷받침된 전아하고 유려한 것으로, 더구나 고상한 향기는 비길 바가 없다.
드라마틱한 박력은 미약해 연주 효과는 별로 없는 것 같지만, 표현하기 어려운 정감을 갖추고 있어서 결코 무미건조하지 않다. 현대의 연주에 비하면 템포의 움직임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지만, 세련되고 단려한 것은 잘 닦아진 구슬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러한 그의 특징이 최대한으로 발휘된 것이 베토벤의 [교향곡 제8번](에인절)으로서 부드럽고 기품 있게 표면이 덮히면서 꽉 긴장된 리듬이 감칠맛 나게 이어지고, 세부에 이르기까지 빈 필하모니의 치밀한 음색이 절묘한 뉘앙스를 맛보게한다. 스테레오도 포함하여 이 이상 더 바인가르트너의 [제8번]다운 [제8번]의 명연주는 절대로 없을 것만 같다.
그로스만, 페르디난트 (Ferdinand Grossmann 1887~1970)
북오스트리아의 투른에서 태어났다. 린츠의 브루크너 음악원에서 게레리히에게 작곡을 배우고, 빈에서는 바인가르트너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1923년 빈 국민음악원을 창설하고 교육에도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합창 지휘자로 취임하였으며,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빈 소년합창단의 지휘자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1946년에는 빈 아카데미 합창단을 창설하여 제일급의 수준으로까지 키웠는데, 1956년 다시 빈 소년합창단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로스만은 빈 합창 지휘의 중진으로서 특히 모차르트와 슈베르트의 종교 음악에서 멋진 지휘를 보여주었다. 본질적으로 카톨릭의 음악가로서 J.S.바흐 등의 작품은 다루지 않았다.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곡」(필립스) 등은 빈 소년합창단을 이끌어 만든 호연이었다.
라이트너, 페르디난트 (Ferdinand Leitner 1912~)
독일의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베를린 고등음악대학에서 프란츠 슈레커에게 작곡을, 브람스 및 리히터 문하의 율리우스 프뤼버에게 지휘를 배웠다. 처음에는 유명한 가수와 바이올린의 쿨렌캄프, 철로의 횔셔 등 기악 주자의 피아노 반주자로 활동하였다. 1935년부터 글라인드본에서 프리츠 부슈의 조수를 하였고, 1943년부터 베를린의 노렌도르프 극장에서 지휘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5년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 극장, 1946년 뮌헨 국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를 역임한 다음, 1947년에 슈투트가르트 오페라 극장의 오페라 감독과 음악 감독 (1950년∼1969년)을 지냈다. 그동안 동 오페라 극장을 인솔하여 유럽 각지에도 자주 여행하였는데 오르프의 스페셜리스트로서 1959년 [오이디푸스 왕], 1968년 [프로메테우스]를 세계 초연하였다. 1969년 취리히 오페라 극장의 수석 지휘자가 되었고, 뮌헨, 함부르크의 국립 오페라 극장, 시카코 오페라 극장에 자주 객원 지휘하였다.
1972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테아트로 콜론에서의 독일 시즌에서 지휘하였다. 콘서트 지휘자로서도 세계적으로 활약하고, 네덜란드의 3대 오케스트라에는 정기적으로 객원 지휘를 하고 있다. 라이트너는 그의 폭넓은 레퍼토리 중에서도 모차르트, 바그너, R.슈트라우스의 오페라, 브루크너, 하르트만의 교향곡을 장기로 하고 있다. 레코드는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램프와 협연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인상 그라모를) 등이 있다.
프리차이, 페렝크 (Ferenc Fricsay 1914~1963)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부다페스트의 호흐슐레에서 코다이와 바르토크를 사사했다. 졸업 후에 곧 지휘자로서 데뷔하였고, 세게도에 10년간 있었다. 1945년 부다페스트 국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 1952년 베를린 시립 오페라 극장 및 RIAS 교향악단의 상임, 1961년에는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의 총감독이 되었다. 프리차이는 원래 빠른 템포와 시원스럽고 명쾌한 리듬으로 그야말로 상쾌하게 연주하는 지휘자였다.
약간 내용이 빈약하다는 결점은 있었지만 바르토크의 [현악기와 타악기, 그리고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이나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은 그의 스타일에 꼭 맞았는데 그러면서도 엄격함과 그 깊이를 겸비한 명연주였다. 그러나 죽음 직전에 그의 지휘 스타일은 크게 변화되었다.
템포는 느리게 되고 스케일은 웅대해지고 그 속에 그의 정신이 꽉 차게 되었던 것이다. 루바토도 많이 사용되고 그늘이 짙은 선율의 노래와 함께 '작은 푸르트벵글러'라고 칭하게 되었던 것이다. 드보르자크 [신세계에서]는 그 과도적인 스타일로서 극단적인 템포의 움직임이 로맨틱하기보다는 인공적이 되고 전체의 긴장력이 부족한 결과가 되었는데, 그의 너무나도 변한 데 대한 놀라움이 컸던 레코드였다.
그러한 점에서 베토벤의 [제5교향곡]은 클렘페러에게 육박하는 훌륭한 연주였으며,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40번]도 깊은 내용미가 멋지고 훌륭하였다. [슈트라우스 왈츠집]이나 스메타나의 [몰다우], 폰키엘리의 [시간의 춤] 등의 소품은 다소 정리가 부족하지만 표현력의 강함에는 감동되고 만다. 만년의 녹음이 적은 것이 애석하다(이상의 레코드는 모두 그라모폰).
우브라두, 페르낭 (Fernand Oubradous 1903~)
파곳 주자이기도 하며,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파리 음악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직후부터 파리의 주요 오케스트라에서 파곳 주자로서 활동하면서 선명한 연주로써 주목을 받았다. 1927년 파리 관악 삼중주단을 결성하고, 오보에, 클라리넷, 파곳이라는 유니크한 편성에 의한 창작과 연주를 추진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다수의 프랑스 작곡가가 이 앙상블의 활동을 돕기 위해 작품을 제공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 중에는 이베르, 미요, 루셀, 슈미트 등이 있었다. 1939년에 그의 이름이 붙은 실내관현악단을 파리에서 설립하였다. 1940년 파리 음악원의 실내악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 후 파곳 주자로서의 활동을 포기하고, 다양한 음악 활동에 들어서게 되었다. 프랑스 18세기의 음악에 관한 출판이나 프랑스 명주자를 솔리스트로 한 레코드 녹음, 작곡(실내악이 많다), 그리고 교육적인 저작의 집필들이 그 주된 것이었다. 특히 1938년과 1939년에 초판이 간행된 {파곳 완전 교본}은 잘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는 다시 실내관현악단을 조직하고, 시즌중 매일요일에 파리의 살 가바에서 연주회를 개최하고, 라스킨 등의 프랑스의 명주자를 솔리스트로 하여 활동을 계속하였지만 오케스트라의 연주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새로운 세대의 청중을 사로잡을 수가 없었다. 근년은 그러한 활동에서 손을 뗐다고 한다. 녹음에서는 프랑스의 관악기 명수들과의 협연에 의한 모차르트의 협주곡(텔레푼켄)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프레비탈리, 페르난도 (Fernando Previtali 1907~)
이탈리아의 아드리아에서 태어났으며 토리노 음악원에서 배웠다. 졸업 후는 1928년부터 1936년까지 8년간에 걸쳐 피렌체 관현악단에서 비토리오구이 밑에서 부지휘자로 연찬을 쌓았다. 그리고 1936년부터 로마의 이탈리아 방송교향악단 지휘자로 등용되고 2년 후인 1938년에는 그 상임 지휘자가 되었으며,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의 뒤를 이어 1946년까지 이 지위에 있으면서 활약했다.
그동안 방송 오페라에서 많은 성과를 남기고 주목을 받았으며, 한편 밀라노 스칼라 오페라 극장과 그 밖의 오페라 극장에서 왕성한 지휘 활동을 하였다. 1940년에는 피렌체에서 달라피콜라의 오페라 [야간 비행] 초연을 맡아 화제를 모았다. 현재는 나폴리 산 카를로 오페라 극장 수석 지휘자로 있다. 프레비탈리는 자신이 작곡가이기도 한 만큼 현대 작품에도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으며 또 부조니의 [투란도트]와 그 밖의 작품도 부활 연주하고 있다. 베테랑 지휘자로서 경력도 풍부하지만, 그 지휘는 이탈리아 오페라적인 극적 긴박감이 다소 부족하다.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전곡(RCA) 외의 레코드는 모두 폐반되었다.
몰리나리 프라델리, 프란체스코 (Francesco Molinari Pradelli 1911~)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태어났다. 이바르디에게 피아노를, 노르디오에게 작곡을 배웠다. 이어 로마의 성(聖)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베르나르디노 몰리나리에게 지휘를 배우고, 1938년에 졸업하였다. 이 해에 콘서트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다. 1939년에 볼로냐, 베르가모 그리고 브레시아에서 도니체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을 지휘함으로써 오페라 지휘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밀라노의 스칼라 오페라 극장의 데뷔는 1946년 이후의 일이었다.
런던의 코벤트 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에는 1955년에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를 지휘함으로써 데뷔하였으며(그때의 토스카 역은 테발디였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는 1966년에 데뷔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기량도 뛰어나 레코드도 남아 있다. 콘서트 지휘자로서 활약한 시기도 있었으나, 세계적인 평가를 받은 것은 전적으로 이탈리아 오페라의 지휘자로서이다. 따라서 그의 대표적인 레코드를 든다면 이탈리아 오페라를 지휘한 베르디의 오페라 [운명의 힘](런던)에서는 테발디·모나코·시미오나토·바스타아니니 등, 당대의 가장 유명한 성악가들과 협연하여 좋은 캐스트를 잘 살린 지휘를 보여주고 있다.
카푸아나, 프랑코 (Franco Capuana 1894~1969)
이탈리아 파노에서 태어났다. 나폴리 음악원에서 작곡을 배운 다음, 1919년에 지휘로 전공을 바꾸고 같은 해에 지휘자로서 데뷔했다. 1920년대에는 이탈리아의 지방 도시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지휘자로서의 솜씨를 닦았다. 밀라노의 스칼라 오페라에 첫 등장한 것은 1937년의 일이었다.
이탈리아 국내 또는 국외에서도 주로 이탈리아 오페라를 지휘하면서 활약했다. 카푸아나의 지휘에는 눈에 띠는 특징이 없다. 그러나 그 지휘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스타일 또는 그 독자적인 음악적 호흡이라는 것이 살아 있는 것으로, 노래하는 이에게 과도한 요구를 하는 그러한 식이 아니다. 이탈리아 오페라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인기질적 수완이 뛰어난 지휘자의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카푸아나의 맛은 역시 레코드에서보다 극장에서 잘 발휘되었다고 본다.
안드레, 프란츠 (Franz Andr 1893~1974)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브뤼셀의 음악원에서 수학한 다음, 베를린에 옮겨 명지휘자 바인가르트너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1920년부터 브뤼셀 왕립음악원의 지휘과 교수로 1944년까지 근무하면서 후진 육성에 힘썼다. 1935년 벨기에 방송교향악단을 창설하고 그 초대 상임 지휘자가 되었으며, 이것을 벨기에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로 육성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벨기에 국립방송관현악단으로 이름을 고친 후에도 그 수석 지휘자로 있으면서 1958년에 부지휘자였던 다니엘 스테른펠트에게 그 자리를 내어줄 때까지 활약을 계속하였고, 그 후는 독일의 각지에서 지휘 활동을 하였다. 작곡가로서의 작품도 있고 륄리를 비롯한 옛 작품의 오케스트레이션도 하고 있다. 지휘자로서의 안드레는 프랑스의 근대 작품을 잘 다뤘으나 그러한 레코드는 폐반이 된 지 오래되었고,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과 [홈 콘서트적명곡](모두 텔레푼켄)이 있다. 그의 지휘는 과부족이 없는 장인 기질의 모델이었다.
콘비추니, 프란츠 (Franz Konwitschny 1901~1962)
체코슬로바키아 북모라비아에서 태어났다. 음악가 집안 출신으로 브르노의 독일음악협회 부속의 음악학교에서 배운 다음, 1923년부터 1925년까지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공부하였다. 동시에 라이프치히 오페라 극장과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에 입단해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담당하였는데, 당시의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콘비추니는 1925년 빈에 이주하였고, 그곳의 피츠너 4중주단에 비올라 주자로서 참가하였다.
또 폴크스 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이론을 가르쳤으나 1927년 지휘자로 전향하였다. 먼저 슈투트가르트의 오페라 극장의 연습 지휘자가 되었으며, 1930년 제1악장으로 승격하였다. 1933년부터 1938년까지는 프라이부르크의 음악 총감독을 맡았다. 이어서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의 음악 총감독을 역임했고, 그곳의 오페라 극장과 박물관 연주회에서 지휘를 하였다.
그리고 1945년 전쟁의 종결을 기다린 다음 하노버로 옮겨 주로 함부르크와 하노버에서 활약하였다. 1949년에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였는데, 죽을 때까지 이 직위에 있었다. 또한 그것과 병행하여 1953년부터 1955년까지는 드레스덴 국립 오페라 극장의 수석 악장, 1955년부터는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총감독도 겸임하였다.
콘비추니는 1950년 이후 글자 그대로 동독 지휘계의 최고의 존재가 되어 있었는데, 그만큼 그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다망한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더욱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과 드레스덴,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 등을 인솔하여 동서의 여러 나라에 적극적으로 연주 여행을 하였다. 그러나 베오그라드에서 베토벤의 [미사 솔렘니스]의 리허설 도중에 심장 발작을 일으켜 별세하였다. 그는 1951년 교수의 칭호를 받았고, 1952년에는 동독 정부로부터 국가상을 받았다. 콘비추니의 큰 공적은 전후 동독의 음악계를 재건한 일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을 일으켜 세계에서도 유수한 관현악단으로 만든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콘비추니는 거기에 이어지고 있는 니키슈, 푸 르트벵글러, 발터, 아벤트로트 등이 구축한 전통을 훌륭히 지키면서 근대성도 도입한 것이다. 동독의 작곡가의 작품도 다루었으나, 그의 장기는 베토벤에서 말러와 R.슈트라우스에 이르는 정통적인 독일 작품이었다. 그 지휘와 해석에서는 푸르트벵글러의 강한 영향을 볼 수 있는데, 낭만적인 정감이 진하게 흐르고 있다. 대표적 레코드로서는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과 공연한 베토벤의 [교향곡 전집](필립스)을 들 수 있는데, 튼튼한 구성 속에 낭만적인 서정과 정열이 들끓고 있다.
리트샤우어, 프란츠 (Franz Litscbauer 1903~1972)
오스트리아의 빈 남쪽 라아에서 태어났다. 빈 아카데미에서 지휘법을 셰르헨에게 배웠다. 1938년부터 1941년까지 빈 여성교향악단의 지휘자를 역임하였고, 1947년 빈의 콘체르트하우스 협회에 속하는 빈 실내관현악단을 설립하여 1952년까지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그동안에 이 관현악단을 이끌고 수많은 연주 여행을 하였다. 1952년부터 1956년까지는 빈 교향악단의 연주회와 연주 여행의 지휘를 하였고, 또 이 교향악단과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관현악단을 지휘하여 레코드계에도 진출하게 되었다.
카이로의 이집트 방송국의 음악 주임 및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유럽 각지에서 객원 지휘를 하였는데, 작곡가로서 관현악곡, 실내악곡, 가곡 등도 쓰고 있다. 그의 음악은 빈적인 정감을 소중히 하면서도 젊은 세대답게 명쾌한 면도 보여준다. 레코드는 구입하기가 힘드는데, 그중에서는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의 무곡집이 좋다.
데커, 프란츠-파울 (Franz-Paul Decker 1923~)
서독의 쾰른에서 태어났다. 쾰른의 고등음악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바부스트를 사사하여 지휘법을 배웠고, 그 밖에도 쾰른의 대학에서 뷔켄에게 음악학을 배웠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서독 각지에서 지휘자로서의 경력을 쌓은 뒤, 1956년 첫번째 자리인 보훔의 오페라 하우스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962년부터는 은퇴한 에두아르트 프리푸세의 뒤를 이어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필하모니의 제2대 상임 지휘자로 영입되어 활약함과 동시에 각지에의 객원 지휘 활동도 하였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67년부터는 캐나다에 옮겨, 몬트리올 교향악단의 예술 감독 겸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레코드는 겔버와 협연한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에인절)이 있을 뿐이며, 뮌헨 필하모니를 상대로 중후한 지휘를 하고 있다.
페넬, 프레데릭 (Frederick Fennell 1914~)
미국의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났다. 이스트먼 음악학교에서 배우고 1937년에 졸업하였다.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 음악원에서도 공부하였으며, 쿠세비츠키를 사사하였다. 학생 시절부터 취주악의 지휘를 하기도 하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 모교의 교수가 되어 음악 교육에 종사하는 한편, 1952년에 이스트먼 관악 앙상블을 조직하여 오로지 그 지휘에만 임했다. 페넬은 취주악의 지휘에 있어서는 베테랑급 존재였고, 또 취급하는 곡목도 대단히 폭 넓었다.
본 - 월리엄스의 [영국 민요 모음곡]이나 홀스트의 [모음곡](머큐리)을 비롯하여 그레인저, 미요, R.슈트라우스, 힌데미트,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등 수많은 레코드는 관악기의 앙상블을 예술적으로 높이려는 그의 의도가 훌륭히 실현된 것이라고 해도 좋다. 그 밖에 스탠다드한 행진곡부터 바그너의 취주악용 편곡까지 매우 많은 레코드를 녹음하고 있다
레만, 프리츠 (Fritz Lebmann 1904~1956)
독일의 만하임에서 태어났다. 1918년부터 1921년까지 만하임의 호흐슐레에서 배우고, 이어서 하이델베르크와 괴팅겐의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1923년부터 1927년까지 괴팅겐 극장의 악장을 지냈으며, 11927년부터 1929년까지는 에센에서 교편을 잡았다. 동시에 1927년부터 1938년에 걸쳐서 힐데스하임에서 활약하였으며, 1929년부터 1938년까지 하노버 관현악단과 합창단의 지휘자로도 활동하였다.
1938년부터 1947년까지는 부퍼탈의 음악 감독, 1946년부터 1950년까지는 괴팅겐 시립극장의 감독이 되고, 1953년부터는 뮌헨의 호흐슐레의 지휘과 교수가 되었다. 각지에서의 객원 지휘도 하였으며, 1956년 3월 30일 뮌헨에서 별세했다. 레만은 바흐, 헨델 및 독일의 고전물을 단골로 하였으며, 단정한 연주를 하는 것으로 정평이 있다. 레코드에는 그러한 바로크 것이 많아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헨델의 [수상 음악](이상 베를린 필하모니, 아르히프) 등 그 밖에 바흐의 칸타타에 명연주가 있다.
레한, 프리츠 (Fritz Lehan 1932~)
서독의 슬레스비히홀슈타인 지방에서 태어났다. 라이프치 히 음악원에서 쿠르트포마스에게 작곡과 지휘를 배웠고 그에게 매우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쾰른의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 활동을 하면서 괼른의 음악 학교의 관계자로 구성한 콘소르티움 무지쿰 합주단을 결성하고 그 지도와 지휘를 맡게 되었다. 레한의 레코드는 이 합주단을 지휘한 것이다.
레한은 이러한 레코드를 통해 추측하면 독일의 바로크 음악이나 하이든과 모차르트 등의 소편성의 곡을 장기로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특히 별로 연주되지 않는, 또는 레코드화되는 기회를 얻지 못한, 작품을 다루고 있다. 그가 만들어 내는 음악은 음악사적 연구를 근거로 한다기 보다는 옛 시대를 연상하게 하는, 연구하는 쪽과 듣는 쪽이 일체가 되어 음악을 즐기는 것과 같은 스타일의 것이다. 대표적인 레코드는 하이든의 [협주 교향곡 Bb장조](에인절)를 들 수 있는데, 과장이나 왜곡이 없는 연주이다.
말러, 프리츠 (Fritz Mahler 1901~)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으며,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조카가 된다. 빈 대학에서 배우고, 쇤베르크와 베르크를 사사했다. 1928년부터 베를린 방송국의 디렉터를 하였고, 1929년부터 1931년까지는 노이슈트레이츠 극장의 악장을 맡았다. 1932년부터 1934년까지는 코펜하겐 방송교향악단의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1936년 미국으로 옮기고 몇몇 교향악단의 지휘자를 역임한 후, 1953년부터 1964년까지 하트퍼드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그의 주요 레퍼토리는 독일 낭만파 이후의 작품과 미국 작곡가의 것이다. 레코드는 극히 적고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밴거드)가 있었으나 폐반되었다. 의욕적인 활동을 했으나 지휘해 온 오케스트라가 대체로 마이너 단체뿐이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 같다.
라이너, 프리츠 (fritz Reiner 188~1963)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작곡을 케슬러에게, 피아노를 토만에게 배웠다. 또 부다페스트 대학에서는 법률 공부도 하였다. 1909년 부다페스트의 오페라 코미크의 부지휘자가 되었고, 1910년에는 유고슬라비아의 류블랴나 주의 주립 오페라 극장의 제1지휘자가 되었다. 1911년부터 1914년까지 부다페스트 국민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 1914년부터 1921년까지는 드레스덴슈타츠카필레(국립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의 지휘자를 역임하였다.
1922년에는 미국에 건너가서 1931년까지 신시내티 교향악단의 지휘자로 활동했으며, 이 동안 밀라노 스칼라 오페라 극장의 교향악 연주회를 지휘하였고, 그 밖에 런던 등 유럽 각지에서도 객원 지휘하였다. 1931년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원에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동시에 각지의 오케스트라에의 객원 지휘도 종종 하였다. 이어서 1938년 피츠버그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어 1948년까지 10년간 재임했다. 1948년부터 1953년까지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를 하였고, 1953년에 마지막 임지가 된 시카고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시카고 교향악단은 라파엘 쿠벨리크가 지휘를 하고 있었으나, 쿠벨리크는 겨우 3년간 있다가 시카고를 떠났다. 그 원인은 {시카고 트리뷴} 신문의 비평을 담당하고 있던 크라우디아 캐시디의 가차없는 비난 때문이었다고 한다. 라이너가 부임한 당시의 시카고 교향악단은 분명히 좋은 상태로 옮겨 가고 있었으며, 라이너가취임한 후 매우 높은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그는 흔히 완벽주의자라고 말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귀가 매우 뛰어나 있다는 데서 오는 일면이다. 연습 도중에 틀린 음을 내면, 그는 끝난 다음에 그것을 각 파트의 책임자에게 말하며, 그것이 각각의 음을 틀리게 낸 단원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라이너는 또 예민한 리듬에 대한 센스가 있었다.
스트라빈스키처럼 복잡한 리듬의 곡들을 지휘할 때는 오른손 팔꿈치, 오른쪽 손목, 왼쪽 어깨, 그리고 턱 등의 각각의 독립된 동작에 의해 그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전달하고, 또 그러므로써 정교한 앙상블을 달성할 수가 있었다. 라이너의 지휘는 '베스트 포켓 비트'라 불렸고, 이것이 유명해졌다. 그것은 조끼의 호주머니 폭을 아주 조금밖에는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영화 '카네기 홀'에서 실제로 그러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라이너에 따르면 그것은 단원들이 스스로 박자를 세는 일을 그만두게 하고 지휘자에게만 주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또 오르만디에 따르면 라이너는 심장이 약했기 때문에 큰 동작 을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 작은 지휘 동작에서 언제나 긴장도가 높은 완벽한 앙상블을 끌어낼 수 있었다는 것은 라이너의 통솔력이 얼마나 대단하였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에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일련의 시카고 교향악단 시리즈는 라이너의 예리한 눈을 통해서 그 큰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을 납득시키는 예가 있었다. 라이너는 1963년 11월 15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바그너의 악극 [신들의 황혼]의 상연을 준비하기 위해 뉴욕에 체재하던 중 별세하였다.
그 약2개월 전에 하이든의 [교향곡 제101번(사계)]과 [교향곡 제95번](이상 RCA)을 녹음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마지막 레코드가 되고 만 것이다. 레코드는 시카고 교향악단 시절에 상당히 많이 남기고 있다. 그의 레퍼토리의 넓이는 극히 폭 넓고 다양하다. 특히 명연주라 할 수 있는 것은 헝가리의 대작곡가 바르토크의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과 [현악기, 타악기,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RCA)이 있다. 그의 지휘는 언제나 자의적인 왜곡을 배제하고, 항상 악곡 본래의 순수한 형태를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단순히 기계적인 차가운 것은 아니었으며. 철저한 태도에서 각각의 곡에 어울리는 표현이 생겨나고 정연한 조형 속에 강한 힘이 들어있는 것이었다.
[운명] [미완성] [전원] [신세계](이상 RCA) 등의 곡에 이러한 그의 예술을 잘 엿볼 수 있다. 그 밖에 R.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레스피기의 [로마 의 소나무] [로마의 분수], 프로코피예프의 [키제 중위](이상 RCA) 등 후기 낭만파에서 근대에 걸친 곡들에서 신선하고 선명한 색채를 발휘하였다. 이것은 대개 시카고 교향악단을 지휘한 것인데, 그 밖에 빈 필하모니를 지휘한 [레퀴엠],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과 드보르자크의 [슬라브 무곡](런던) 등이 있다.
리거, 프리츠 (Fritz Rieger 1910~1978)
오바알트슈타트(현재 체코슬로바키아 령)에서 태어났다. 프라하의 음악 아카데미에서 조지 셀 등에게 배웠다. 1931년부터 1938년까지 프라하의 독일 극장의 악장을 지냈고, 1939년부터 1941년까지는 아우시히(현재 우스티) 시립극장의 제1악장을 지냈고, 1941년부터 1945년까지는 브레멘 국립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전후인 1947년부터 1949년까지는 뮌헨필하모니의 제1악장으로 취임하였고, 1949년부터 1967년까지 뮌헨 국립극장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리거는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공헌한 공로로 뮌헨시에서 음악 총감독 및 시음악가의 칭호를 받았다. 1978년 9월 30일 본에서 사망하였다. 리거가 특히 좋아하는 작품은 독일 고전파 및 낭만파의 것이었는데, 근대 ·현대의 작품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는 견실하게 정리된 음악을 만들어 내고 있으며, 그 표현 방법에 있어서는 개성미가 부족했다. 레코드는 적어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5번]과 [바이올린 협주곡](모두 컬럼비아)이 있는데, 실수가 없는 지휘로 전체가 조성되고 있다. 리거 음악의 성격에서 보면 협주곡에 적격인 것 같다.
베르너, 프리츠 (Fritz Werner 1898~)
합창 지휘자. 독일의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출생지에서 1920년부터 에지디, 하이트만에게 오르간을, K.슈베르트에게 피아노, 자이페르트와 볼프에게 악식 등을 배웠다. 1932년부터 1935년까지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에서 G.A.슈만에게 작곡을 배우고, 1935년에는 그 작곡에 관하여 멘델스존 상을 받았다. 1936년부터 베를린과 포츠담에서 교회 음악가로서 활약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후는 하일브론(서독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 정착하여 1946년부터 1964년까지 성키리안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를 맡았고, 1947년 하일브론에 하인리히 쉬츠 합창단을 창설하여 그 지도와 지휘를 하였다. 1954년에는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서 프로페서의 칭호를 받았다. 작곡가로서도 유명하여 교향곡, 협주곡에서 성악 작품까지 작품도 매우 많다. 하일브론의 하인리히 쉬츠 합창단과의 레코드가 많은데, 특히 바흐와 쉬츠의 연주에는 정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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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민, 권터 (G ntber Ramiu 1898~1956)
오르간 주자이기도 하며, 독일의 카를스루에에서 태어났다. 라이프치히의 토마스 학교에서 카를 슈트라우베에게 오르간을 배웠고, 그 후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계속하여 슈트라우베에게 오르간을, 타이히뭘러에게 피아노를, 크렐에게 음악이론과 작곡을 배웠다. 1918년 토마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고, 그 후 게반트하우스 합창단, 베를린 필하모니 합창단 등의 지휘자를 역임하는 한편, 오르간과 하프시코드 주자로서 유럽 각지에서 활약하였다.
1940년 슈트라우베의 사망 후, 그 후임으로서 토마스 칸토르에 취임하였다. 1950년의 바흐 서거 200주년의 독일 바흐제를 지휘하였는데, 그는 독일의 바흐 연주의 중심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카를 리히터는 그의 문하생 중의 하나였다. 레코드는 별로 많지 않으나 LP 초기에 녹음된 바흐 [요한 수난곡](아르히프), [마태 수난곡](EMI)은 지금도 생생한 감동을 주는 명연이다.
케르, 귄터 (G nter Kehr 1920~)
바이올린 주자이기도 하며, 독일의 다름슈타트에서 태어났다. 프랑크푸르트와 쾰른에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그 후 베를린 대학과 쾰른 대학에서 음악학을 전공하였는데, '18세기의 변환기(말기)에 있어서의 바이올린 주법'에 관한 논문으로 1941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 비올라의 슈미트, 첼로의 뮌히 - 흘란드와 함께 귄터 케르 3중주단을 결성하고 현대 음악의 소개에 진력하였다. 1955년 마인츠 실내관현악단의 지휘자가 되었고, 그 단원들과 실내악단도 조직하여 바로크와 모차르트 무렵의 고전파 작품의 연주에 주력하였다. 또 그 2년 전부터 1961년까지 마인츠에 있는 페터 코르넬리우스 음악학교의 학장을 겸하였다.
1959년부터 쾰른 음악대학의 실내악과의 지도에도 힘썼으며, 1961년 교수로 임명되었다. 케르는 음악 문필가로서도 활약하였고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관계에 대해 쓴 저서도 출판했으며, 바이올린곡이나 관현악곡의 교정도 많이 하였다. 레코드는 마인츠 실내관현악단과의 녹음이 많은데, 그중에서 [바흐의 아들들](복스)과 [크리스마스 협주곡집](아르히프) 등을 들 수 있으며, 전자에는 그가 바이올린 주자로서 참가하는 실내악 연주도 수록되어 있다. 모차르트의 [교향곡 전집](미국 복스)은 기획이나 연주에 있어서 주목되는데, 레코드 사상 최초의 것이었다.
반트, 귄터 (G nter Wand 1912~)
독일의 엘버펠트에서 태어났다. 쾰른 대학에서 야르나흐 교수 등에게 배웠으며, 엘버펠트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939년에 쾰른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가 되었고, 1944년부터는 잘츠부르크 오페라극장의 상임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7년부터 다시 쾰른에 돌아와 유서 깊은 귀르체니히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임명되고, 두터운 신임을 모으면서 오랫동안 재임했다.
한편 1948년부터는 쾰른 국립음악대학의 교수에 취임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1953년부터는 비스바덴 오페라 극장의 상임 지휘자도 겸임하여 활약하였다. 또 이러한 활동과 병행하여 독일을 중심으로 하여 파리의 라무뢰 관현악단 등, 유럽 각지에도 객원 지휘를 하였다. 1982년 9월부터는 갑자기 사임한 클라우스 텐슈테트의 후임으로서 함부르크의 북독일 방송교향악단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였는데, 정평있는 브루크너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환영하였다.
반트의 지휘는 독일의 장인 기질적인 지휘자에게 공통되는 견실한 것으로서, 모든 작품을 견실하게 마무리한다. 함부르크 악단의 이러한 견실성은 레코드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오랫동안 쾰른을 활동 무대로 하게 하였으며, 현대의 작품에서는 그 나름대로의 역량을 보이고 있다. 반트는 1988년 현재도 북독일방송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레코드는 바르토크의 [현악과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등이 있었는데, 현재는 겨우 박하우스와 공연한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런던)이 남아 있을 뿐이다.
아른트, 귄터 (G nther Arndt 1907~1976)
독일의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베를린 시의 교회 음악학교와 대학에서 수학하고, 베를린 국민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베를린 하인리히 쉬츠 합창단을 조직하여 지휘자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는 베를린 방송국의 실내악 부분의 책임자가 되었고, 1949년부터는 베를린 RIAS 방송국의 관현악곡 선곡의 고문에 취임했다. 1950년에는 베를린 모테토 합창단을 결성하고, 1960년부터는 그 지휘도 담당하였다.
그 한편 1955년에서 1972년까지 RIAS 실내합창단의 지원자도 겸임하게 되었으며, 더욱이 1962년부터 1972년 은퇴할 때까지 RIAS의 음악부 차장을 역임했다. 아른트는 합창 지휘자로서 높이 평가받았고, RIAS 실내합창단의 명성을 높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베를린 모테토 합창단(후에 귄터 아른트 합창단으로 개칭)에서의 레코딩도 적극적으로 하였으며, 바로크 합창 음악의 보급에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작곡가의 수많은 작품의 초연도 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1971년에는 독일 연방 공화국으로부터 대공로 십자상을 받았다. 그의 대표적인 레코드는 [쉬츠 모테트 집](에인절)이 있다
헤르비히, 권터 (G nther Herbig 1931~)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동독의 바이마르의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에서 헤르만 아벤트로트에게 지휘법을 배우고, 강한 영향을 받았다. 섬세하고도 숨이 긴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는 것은 이 영향의 하나로 생각해도 좋다. 음악원을 졸업한 다음에도 아벤트로트를 사사하면서 얀손스, 셰르헨, 카라얀 등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바이마르의 도이치 국립극장에서 지휘자로서 데뷔한 다음 모교의 강사가 되었고, 그곳의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그로부터 포츠담의 음악 감독을 거쳐 1966년에 베를린 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영입되어 많은 팬을 얻고 나서, 1972년에 드레스덴 필하모니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베를린 교향악단이나 드레스덴 필하모니와 함께 또는 단신으로 연주 여행도 하고 있다. 1977년부터는 베를린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옮겨가게 되었다. 1988년 현재는 디트로이트 교향악단 상임 지휘자로 있다. 레코드는 앞으로 그 수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조형을 분명히 하면서 동독풍의 소박함이 가득한 그 음악은 동독에서는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다. 레코드는 하이든의 [교향곡 제103번]과 [제104번]을 녹음한 것이 있다(독일 샬프라텐). 이것은 정취있는 상당한 호연이다.
슈무라, 가브리엘 (Gabriel Chmura 1946~)
브레슬라우(지금의 폴란드, 브로츨라프)에서 출생했다. 1957년에 이스라엘로 돌아가 텔아비브 음악 아카데미에서 작곡과 피아노를 공부하고, 1968년부터 지휘법의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 1년간은 파리에서 피에르 데르보를 사사했고, 다시 2년 동안 빈에서 한스 스바로프스키를 사사했다. 이때 시에나에서 프랑코 페라라의 하기 강습도 받았다.
1971년 7월에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 열린 칸텔리 지휘자 콩쿠르에서 금상을 받았고, 그 해 9월에 베를린에서 열린 제2회 카라얀 지휘자 콩쿠르에서도 1위로 선발되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베를린 필하모니, 빈 교향악단, 이스라엘 필하모니 등 유럽 각지의 오케스트라에 초청되면서 명성을 떨쳤다. 1974년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에 초청되어 [오텔로]로 데뷔한 슈무라는 이 공연의 성공으로 다음해부터 아헨 시의 음악 총감독으로 취임했는데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도 매 시즌마다 개연, [오텔로]와 비제의 [카르멘]을 지휘했다.
현재 슈무라는 아헨을 본거지로 각지에 다니며 객원을 하면서 활동하고 있는데, 젊은 시절 아헨에서 활약하여 세계 무대로 진출한 바 있는 카라얀이나 자발리슈의 뒤를 이을 것인지는 매우 흥미있다고 하겠다. 레코드는 아주 적은 편이며, 런던 교향악단을 지휘한 멘델스존의 [서곡집]이 있을 뿐인데, 멘델스존의 천진난만한 로맨티즘을 부드럽게 표현한 좋은 연주로 평가되고 있다.
산티니, 가브리엘레 (Gabriele Santini 1886~1964)
이탈리아의 페르자에서 태어났다. 볼로냐에서 M.G. 민구치, 아 미치에게 배웠다. 지휘자로서의 데뷔는 1906년의 일이다. 1925년부터 1929년에 걸쳐 스칼라 오페라극장에서 토스카니니의 어시스턴트를 하였다. 1944년부터 1947년에 걸쳐서는 로마오페라 극장의 예술 감독을 맡기도 하였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지휘자로서 특히 베리스모 오페라를 지휘하여 정평이 있었다. 그것을 뒷받침이나 하는 것처럼, 코렐리, 스텔라, 세레니 등에 의한 조르다노의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에인절), 코렐리, 데 로스 앙헬레스 등에 의한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인절) 또는 데 로스 앙헬레스, 비외를링 등에 의한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 부인](에인절) 등의 전곡 레코드를 통해 들을 수 있는 산티니의 지휘는 반드시 베리스모 오페라의 표현의 격렬성을 강조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내용은 충실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산티니의 지휘자로서의 탁월성을 단적으로 알게 하는 것은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그라모폰)에서다. 금관현악의 울림 등에서 독자적인 맛이 있다. 더욱 산티니에게는 모노럴 녹음에 의한 [돈 카를로](에인절) 전곡 음반도 있는데 여기서도 그의 독특한 맛이 만족스럽게 표현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델로구, 가에타노 (Gaetano Delogu 1934~)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메시나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대학에서 법률 학위를 취득하는 사이에도 음악 공부를 병행하였다. 로마와 베네치아에서 프랑코 페라라를 사사하여 지휘법을 배웠다. 직업적인 지휘자로서의 경력은 피렌체에서 열린 청년 지휘자 콩쿠르에서 제1위로 입상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는데, 그 후 4년간 이탈리아의 주요한 오케스트라에서 경험을 쌓았다.
1968년 뉴욕의 미트로풀로스 국제 콩쿠르에서 제1위로 입상하고, 뉴욕 필하모닉 등을 통해 데뷔하였으며, 셀과 번스타인의 어시스턴트로도 활동했다. 또한 이탈리아에서는 국립방송 등에서 지휘를 하였고, 유럽 각국에서 객원 지휘를 하였다. 1972년 영국에서의 데뷔는 대단한 호평이었고, 다음해인 1973년부터 코벤트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에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지휘하였다.
또 런던 필하모니와 하이든의 교향곡을 EMI에 녹음하였다. 1975년 그는 체코 필하모니 에 데뷔했으며, 이후 이 악단과 계속적인 연주를 하고 있다. 1979년부터는 덴버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관현악을 극명하게 정리하였으며, 밝은 음향과 유려한 선율의 표정을 잃지않는다. 레코드는 체코 필하모니를 지휘한 [로시니 서곡집](수프라폰)등이 대표작이다.
베르티니, 게이리 (Gary Bertini 1927~)
이스라엘의 지휘자이며 작곡가이기도 하다. 소련의 베사라비아 지방(현재 몰다비아 공화국)의 부리체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팔레스티나로 옮겼고, 6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 세계대전 종전 후 밀라노의 베르디 음악원(1946∼1947년)과 파리 음악원(1951∼1954년)에서 공부하였는데, 파리에서는 불랑제, 샤이, 오네게르 메시앙 등에게 배웠다.
졸업 후에는 이스라엘에 돌아가서, 텔아비브의 음악 교사 칼리지와 루빈 아카데미에서 지휘를 가르치고, 또 리나토 합창단(현재의 이스라엘 실내합창단)을 결성하였다. 지휘자로서는 1955년 이스라엘 필하모니에서 데뷔하였는데, 당분간은 국내에서 후진의 지도에 힘을 썼다. 1960년에 처음으로 미국 연주 여행을 하고 나서 차츰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고, 1965년 영국 실내관현악단을 지휘함으로써 영국에도 데뷔하였다. 그 후부터 이 두 나라에 자주 초청되었다.
특히 영국에서는 스코티시 내셔널 관현악단과 스코티시 오페라와는 그 관계가 깊어졌는데, 1970년경부터는 독일이나 파리 등 유럽의 주요 오페라 극장에서의 현대 오페라를 중심으로 한 활동이 눈에 띄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쿠르트 바일과 현대 이스라엘의 요제프 타르의 작품 연주가 눈에 띄나, 모차르트와 로시니의 오페라에서도 성공을 거두고 있으며, 파리 오페라 극장에는 뒤카스의 [아리안과 푸른 수염]을 통해 데뷔하였다.
또 이스라엘에서 수많은 새로운 작품을 적극적으로 소개하였으며, 1965년에는 이스라엘 실내 앙상블을 결성하였다. 1975년부터 텔아비브 대학 교수, 1976년부터 이스라엘 페스티발의 예술 어드바이저, 1977년부터 예루살렘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그는 1981년부터 디트로이트 교향악단의 음악 고문, 1983년부터 1988년 현재까지 쾰른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베르티니는 작곡가로서도 발레와 극음악, 실내악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체르카소프, 게나디 (Gennady Cherkasov 1930~)
1930년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출생했다. 1939년 모스크바로 옮겨 모스크바 음악원부속중앙음악학교에서 배웠다. 모스크바 음악원 피아노과로 진학하여 1953년에 졸업한 후 다시 동 대학원에서 1957년까지 페인베르크 교수를 사사했다. 1958∼1959년에는 파리 국립국악원 지휘과 조수를 지낸 뒤, 1961년 모스크바 음악원 오페라 - 오케스트라 지휘과를 졸업했다.
1962∼1964년 볼쇼이 극장의 부지휘자로 경험을 쌓고, 1964∼1972년 모스크바 극장 오페라 수석 지휘자로 활약했다. 1972년 러시아 공화국 공로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또 같은 해 모스크바 방송국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레코드는 슈만의 [사육제] [교향적 연습곡]을 오케스트라 판의 연주(멜로디아)에서 그의 뛰어난 역량을 엿볼 수가 있다.
로제스트벤스키, 게나디 (Gennady Rozhdestvensky 1931~)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명지휘자로서 알려진 니콜라이 아노소프이고, 모친은 당대의 명가수인 소프라노 나탈랴 로제스트벤스카야로, 어려서부터 음악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활동중이었던 부친과 혼동되지 않기를 바래서 모친의 성을 따랐다고 한다.
일찍부터 음악을 배우기 시작해 8세 때 모스크바의 그네신 기념음악학교의 피아노과에 입학했으며, 10세 때에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이구므노프 교수를 사사하였다. 한편 부친으로부터 지휘법을 배우고, 지휘자에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51년 재학중부터 지휘 활동을 하였는데 볼쇼이 극장의 부지휘자를 역임한 것을 비롯하여 레닌그라드 필하모니에 객원 지휘를 하였다. 또한 바르샤바와 부쿠레슈티에서 모스크바 유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등, 그 다망한 활동의 모든 것이 주목을 집중시켰다.
1955년의 모스크바 음악원의 졸업 시험에서는 볼쇼이 극장에서 프로코피예프의 발레 [신데렐라]의 본격적인 상연을 지휘하여 교수진을 놀라게 할 만큼의 성공을 거두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그리고 1956년부터 볼쇼이 극장의 지휘자의 한 사람으로 영입되고 1960년까지 발레 지휘자로서 활약하였다. 1959년 가우크의 후임으로서 모스크바 국립방송교향악단의 음악 감독 겸 수석지휘자로 취임하여 1973년까지 재임하였다.
그 동안 1962년에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니의 수석 지휘자로서 미국에의 연주 여행을 하여 대성공을 거두었고, 1973년에도 이 악단과 다시 미국을 방문하였는데 호평을 받았다. 또한 1965년부터 1970년까지는 볼쇼이 극장의 수석 지휘자를 겸임하였다. 동시에 유럽, 미국 등 서방측에서의 활동도 활발해졌고, 클리블랜드 관현악단과 런던 필하모니의 수석 객원 지휘자도 겸하게 되었다.
그는 1978년 9월부터는 BBC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영입되었으며, 1988년 현재 소련국립문화성교향악단의 상임지휘로 활동중이다. 로제스트벤스키는 현대의 가장 재기 넘치는 지휘자의 한 사람으로서 탁월한 지휘 기법과 광범위한 레퍼토리 그리고 악보에 대한 비범한 암기력의 소유자이다.
오케스트라의 자발성을 최대한 살려 언제나 정기와 색채감에 가득 찬 연주를 전개하였는데, 작품의 시대적 양식에 대해서도 뛰어난 감각을 보여준다. 레코드는 많지만 차이코프스키의 3대 발레(멜로디아, 런던)는 다른 사람의 추종을 불허하며, 쇼스타코비치의 [코]를 비롯하여 오페라에도 뛰어난 극장적 감각이 표출되고 있다. 또 프로코피예프, 차이코프스키,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전집](모두 멜로디아)도 대표적인 레코드이다.
솔티, 게오르크 (Georg Solti 1912~)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출생했다. 김나지움에서의 교육을 마친 뒤 부다페스트음악원에 입학, 도흐나니, 바르토크, 코다이, 레오 바이너 등을 사사, 피아노, 작곡, 지휘법을 배웠다. 18세에 졸업한 뒤 1933년부터 1939년까지 부다페스트 국립 오페라 극장의 부지휘자를 거쳐 전속 지휘자로 근무했다.
그 사이(1937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도 참가, 토스카니니의 조수로 지냈다. 그런데 나치 독일이 헝가리까지 들어오자 유대인이었던 솔티는 위험을 느끼고 스위스로 망명했는데 1942년,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 출전, 피아노 부분 제1위를 차지했다. 스위스로 망명한 솔티는 피아니스트로서 인정을 받았고, 일을 하면서 취리히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거주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46년, 독일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인 게오르크 쿨렌캄프의 파트너가 되어 베토벤의 [크로이체르 소나타] 등으로 피아니스트로 데뷔했다. 그러나 지휘자로 입신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 솔티는 회사의 간부들에게 잘 보이려고 무척 노력했다. 그런데 당시는 전쟁(2차 대전) 때이므로 독일에서 활동한 지휘자의 태반이 점령군에 의해 활동을 금지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솔티의 입장에서 본다면 시기적으로 행운아였다고 하겠다.
1946년, 뮌헨에 초청된 솔티는 베토벤의 [피델리오]로 데뷔, 센세이셔널한 성공을 거두었다.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근무했는데 그 사이 빈, 베를린, 파리, 로마 등 유럽의 도시와 남미의 여러 도시에까지 객원, 서서히 지휘자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952년부터 1961년까지 프랑크푸르트 시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총감독을 맡았는데 그 사이 영국의 데카와의 관계도 긴밀하게 유지되었고, 레코드의 경우는 이미 훌륭한 스타 지휘자로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특히 1958년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가락지] 전 4부작의 세계 최초의 녹음은 특기할만한 솔티의 역사적 캐리어가 되었다. 그리고 1959년, 런던의 코벤트 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한 R.슈트라우스의[장미의 기사]가 크게 성공을 거두자, 오페라 지휘자로서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확립하게 되었다.
1960년 솔티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아의 음악 감독 취임은 수락했으나, 사무국의 인사 때문에 의견이 맞지 않자 사표를 내고 댈러스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1961년에 코벤트 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이 되는 바람에 불과 한 시즌만 마치고 댈러스를 떠났다. 이때 솔티는 영국에 귀화, 코벤트 가든의 수준을 비약적으로 높인 공이 인정되어 영국 왕실로부터 '경'이란 칭호를 받았다.
1969년 시카고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했고, 1971년에는 코벤트 가든과의 계약이 끝나 1972년부터 3년간 파리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을 겸했고, 1973년에는 파리 오페라 극장의 음악 고문도 맡았으나 프랑스에서의 지위는 짧은 기간으로 끝났다. 1979년부터 런던 필하모니아의 수석 지휘자로 취임했고 1981년에는 미국과 영국의 2대 악단을 지휘하여 끊임없는 활동을 벌였다. 1989년 카라얀 서거 뒤의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의 주재자로서 그 진행을 성공리에 마치기도 했다.
22년간 몸 담았던 시카고 교향악단을 창단 100주년이 되는 1991년 바렌보임에게 배튼을 인계하고 용퇴한다. 그 후의 활동은 세계 일류 오케스트라를 객연하고 실내악에 힘쏟으며 유유자적한 음악 생활을 보낼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솔티는 례코드와 미디어를 통해 메인 캐리어를 구축한 최초의 지휘자이기도 하다. 초기의 솔티는 음악을 힘차게 드라이브 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 점이 하나의 신선한 매력으로 비쳤다. 또한 그러한 박력 있는 지휘 자세가 젊은 팬들에게 인기를 끌기도 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매파적인 이미지를 주게 되어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레코드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3번(영웅)](런던)이라 하겠다. 빈 필하모니로 하여금 굉장한 박력을 발휘하게 한 홀륭한 연주였다. 그런데 누가 뭐라 해도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가락지](런던)가 잊을 수 없는 업적이라 하겠다. 시카고로 옮긴 뒤의 솔티는 거장다운 품격과 여유가 생겨 말러의 [교향곡 제5번, 제8번](런던) 등에서는 스케일도 크고 정치하게 연마된 아름다운 앙상블도 들려 주었다.
그래서 베토벤의 [교향곡 전집](런던)에서는 원전주의의 현대의 스탠다드라고도 말할 수 있는 명연주를 실현했고,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런던),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런던) 등의 레퍼토리는 시카고 교향악단의 빛나는 비르투오지테를 충분히 발휘한 것이라 하겠다. 런던 필하모니와의 레코드는 홀스트의 모음곡 [행성](런던)이 거장다운 스케일 속에서도 서정적인 정취를 중시한 최상급의 작품이라 하겠다.
바라토, 조지 (George Barati 1913~)
작곡가, 첼로 주자이기도 하며, 헝가리 북서쪽의 제르에서 태어났다. 부다페스트의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에서 배우고, 1936년부터 1938년까지 부다페스트 오페라 극장의 수석 첼로 주자를 맡았다. 이 해에 미국에 이주하여 프린스턴 대학 음악과의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한편 미국의 작곡가 세션즈를 사사했다. 프린스턴 대학에 프린스턴 앙상블과 합창 협회를 창립하고 그 지휘자를 했으며, 1943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미국 육군의 밴드 리더가 되었다.
1946년부터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의 첼로 주자, 1950년부터 호놀룰루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을 역임하였고, 1956년 호놀룰루의 하와이 오페라 극장의 예술 감독에 취임하였다. 또 그 이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바라티 실내교향악단을 조직한 일이 있었는데, 1951년까지 3년간 그 지휘를 하였다. 그의 작품은 1959년 나움버그 상을 받게 된[실내 협주곡]을 비롯하여 많이 있다. 그리고 브루크너 - 말러 협회의 명예 회원으로도 추대되고 있다. 레코드는 하이든의 [성 니콜라이 미사](콘서트 홀)와 미셰란과 협연한 자작의 [첼로 협주곡](CRI)이 있다.
조르제스쿠, 조르주 (George Georgescu 1887~1964)
루마니아의 스리나에서 출생했다. 5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뒤에 첼로로 바꾸었는데 부쿠레슈티 음악원에서 디미트레스크를 사사했다. 1910년 독일로 유학, 베를린 고등음악학교에서 베커의 지도를 받았다. 1911년부터 1916년까지 마라토 현악4중주단의 첼리스트로 있었는데 R.슈트라우스의 권유로 지휘자를 지망, 라이프치히에서 니키슈의 가르침을 받았다.
1918년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하여 데뷔했고, 1920년에 귀국, 부쿠레슈티에서 부쿠레슈티 에네스쿠란 이름의 국립 필하모니를 조직, 사망할 때까지 수석 지휘자로 있으면서 이 오케스트라를 일류의 앙상블로 키웠다. 그러는 사이, 즉 1922년부터 1940년까지는 부쿠레슈티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을 겸임했고, 또한 1950년부터 3년간은 부쿠레슈티 음악원의 교수로 근무하기도 했다. 부쿠레슈티에서 생애를 마쳤다. 조르제스쿠는 루마니아의 대표적인 지휘자로 그의 지휘는 스케일이 클 뿐만 아니라 로맨틱한 것이 특색이다. 레코드는 루마니아의 엘레트에 있다.
셀, 조지 (George Szell 1897~1970)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헝가리인, 모친은 슬로바키아인이었다. 3세 때 양친을 따라 빈에 이주하였고, 그 곳에서 음악 교육을 받았다. 7세 때에 피아니스트로서 데뷔하였는데, 그 놀라운 음악적 재능은 '모차르트의 재래'로까지 말해졌다고 한다. 명피아니스트를 꿈꾸면서 공부하는 한편, 작곡을 만디체프스키와 레거에게서 배웠다.
17세 때 베를린 필하모니의 연주회에서 자작의 교향곡을 지휘하였고, R.슈트라우스에게 그 재능을 인정받아 그의 밑에서 베를린 필하모니의 부지휘자로서 일을 하였다. 20세 때 R.슈트라우스의 추천으로 스트라스부르의 시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의 자리를 얻게 되었다. 이로부터 본격적인 지휘 활동에 들어가 그 이후 프라하 독일 오페라 극장, 다름슈타트 궁정 오페라 극장, 뒤셀도르프 시립 오페라 극장 등의 지휘자를 역임하였다.
1924년에는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수석 지휘자로 영입되었다. 1927년부터는 베를린 고등음악원의 지휘과의 교수도 겸임하고 있었는데, 1929년에 다시 프라하로 돌아가 독일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서 활약하였다. 그 사이 1930년에 처음으로 미국에 가서 세인트루이스 교향악단을 시작으로 미국 각지의 오케스트라에 객원 지휘를 하여 호평을 받았다. 1939년의 오스트레일리아 연주 여행의 귀로에 뉴욕에 들렀는데, 마침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바람에 유럽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셀의 미국 생활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그의 운명이 크게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1941년 거장 토스카니니에게서 NBC 교향악단의 객원 지휘자로서의 초청을 받고 가서 호평을 받았다. 1년 후인 1942년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1946년까지의 4년간, 그는 주로 독일 오페라를 중심으로 한 레퍼토리를 지휘하고 명성을 얻었다. 이 사이에 미국에 귀화하여 보스턴 교향악단이나 뉴욕 필하모닉, 필라델피아 관현악단, 시카고 교향악단,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 등에 객원 지휘를 하면서 정력적인 활동을 하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듬해 1946년 에 클리블랜드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클리블랜드 관현악단은 당시 아직 비교적 역사가 짧은 2류의 오케스트라였는데, 셀은 단기간에 미국 제1급 오케스트라로까지 키웠다. 기능적이고 유럽의 전통적인 성격을 가진, 그 자신이 이상으로 하는 관현악단으로 변신시킨 것이었다. 셀의 훈련은 매우 엄격한 것으로서 티끌만큼의 타협도 없었고, 특별 훈련에 특별 훈련을 거듭해 나가는 완벽하기까지 한 음악을 만들어내는 타입이었다 한다.
그와 같이 그가 정성을 쏟아 닦아온 이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한국을 방문한 것은 1970년 5월의 일이었는데, 시민회관에서 동 악단을 지휘했다. 그리고 귀국 후 2개월 후인 7월 30일에 셀은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죽음의 원인은 심장마비로서, 한국에 오기 전부터 건강이 쇠하여져서 걱정되었는데 한국과 일본에서의 과다한 스케줄이 그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결과가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셀의 음악에 대한 태도에는 토스카니니와 닮은 점이 많다. 특히 젊었을 때의 연주는 그러했다. 악보에 어디까지나 충실하면서 허식을 배제한 합리적인 지휘를 그의 특색으로서 들 수가 있다. 그 객관성을 존중하고, 음악의 정신을 엄정하게 표현하려는 마음가짐은 때로는 그의 연주에서 어떤 차가움을 느끼게 하는 원인이 되기 도 했다. 그러나 만년에는 차츰 그러한 차가움이 모습을 감추고 모서리가 없어져 원모양의 부드러움을 띈 표현으로 바뀌게 되어 원숙미를 느끼게 하였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그의 죽음이 약간 빨랐다는 점에서 애석하기만 하다. 레퍼토리는 고전에서 현대 음악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넓다. 특히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바그너 등의 독일 고전·낭만파의 작품, 그리고 드보르자크, 바르토크, 코다이 등의 민족 색깔이 짙은 작품의 연주에 뛰어나 있었다.
레코드는 많이 나와 있는데, 그 중에서도 토스카니니풍의 객관적인 해석을 강조한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제9번 (신세계)], 체코의 민족적인 흙 냄새와 도회적으로 세련된 맛을 멋지게 뒤섞은 드보르자크의 [슬라브 무곡집], 조국 헝가리가 낳은 대작곡가 바르토크에의 심취가 느겨지는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만년의 셀의 예풍의 변화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코다이의 [하리 야노슈]와 프로코피예프의[키제 중위],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가락지]의 오케스트라곡 발췌(이상 CBS) 등이 걸출하다. 이상은 모두 클리블랜드 관현악단을 지휘한 것인데, 빈 필하모니를 지휘한 베토벤의 [에그몬트]전곡(런던)도 그의 베토벤 관을 알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귀중한 음반이다.
웰든, 조지 (George Weldon 1906~1963)
영국의 치체스터에서 태어났으며, 런던의 왕립음악원에서 지휘법을 맬콤 사젠트에게 배웠다. 1943년부터 1951년까지 버밍엄 시립관현악단 상임 지휘자를 맡았다. 그 동안 객원 지휘자로서 북아프리카, 터키, 유고슬라비아 등에도 활동 무대를 넓히고 있다. 1952년부터는 바르비롤리의 보좌역으로 할레 관현악단의 부지휘자를 역임하였고, 1955년부터 1956년까지 새들러즈 웰즈 발레단 음악 감독으로서 수완을 발휘하였다.
또한 로열 필하모니, 리버풀 필하모니, 필하모니아 관현악단, BBC 교향악단, 코벤트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 등 영국 대부분의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하였다. 그는 발레 지휘자로서 유명하였으며, 발레 음악에서는 상당히 좋은 연주를 남기고 있는데, 그리그의 [관현악 작품집](세라핌)만이 음반으로 남았다. 약간 딱딱한 연주이지만 과장이 없는 표현에는 호감이 간다.
프레트르, 조르주 (Georges Pretre 1924~)
프랑스 와제에서 태어났다. 8세 때 출생지의 음악원에 입학, 11세 때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트럼펫과 작곡을 배웠다. 이어 앙드레 클뤼탕스를 사사하여 지휘법을 공부했다. 1946년 마르세유 오페라 극장에서 랄로의 [이스의 임금]을 지휘하여 지휘자로서의 캐리어를 시작했다.
그것에 이어지는 10년간은 주로 프랑스의 지방 오페라극장에서 지휘자로 지냈으며, 그중에서도 툴루즈와 리옹에서의 지휘는 호평을 밭았다. 1956년 파리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 등장하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카프리치오]를 지휘했다. 이것은 이 작품의 파리 초연에 해당하기도 했다.
그 후 1959년까지 파리 오페라 코미크 극장과 계약, 1960년에는 파리 오페라 극장에도 등장하고 풀랑크의 작품 등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파리 오페라 극장 지휘자로서의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시카고의 오페라 극장을 시작으로 구미 각지에 오페라 지휘자로서 객원 연주하였고, 동시에 콘서트 지휘도 활발히 하게 되었다.
1961년 로열 필에 첫 객원 지휘, 이듬해 1962년에는 빈 국립 오페라 극장, 1965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 각각 데뷔했다. 현재도 세계의 주요 오페라 극장에서 많은 지휘를 하고 있다. 종종 마리아 칼라스와 공연했던 적이 있으며, 그녀가 부른 [카르멘] [토스카]의 레코드 녹음은 프레트르가 지휘를 맡았다. 풀랑크는 그의 지휘를 신뢰하여 [인간의 목소리] [글로리아] 등의 초연을 프레트르에게 말긴 바 있다. 프레트르의 레코드 녹음 중에서 특히 뛰어난 것은 풀랑크의 여러 작품일 것이다.
[오바드] [글로리아] [암사슴] [전원풍 합주곡] [스타바트 마테르](이상 에인절) 등은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 프랑스 국립방송관현악단, 파리 관현악단 등 파리 명문 오케스트라와의 녹음이며, 경묘하고 뛰어난 연주라고 종래부터 높이 평가되고 있다. 오페라에서는 전기한 칼라스와의 레코드, 특히 [토스카](에인절)의 긴박한 표현이 출중하다. 그 밖에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RCA), 베를리오즈 [파우스트의 겁벌], 생상스 [삼손과 달릴라](이상 에인절), 비교적 새로운 녹음 중에서는 귀스타브 샤르팡티에의 [루이즈](CBS)가 뛰어났다.
그의 연주는 때로 어떤 특정 부분을 강조함으로써 세부의 표현 연마나 전체적인 간추림이 결여되는 일도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다이내믹한 효과와 세련된 표현에는 뛰어난 데가 있다. 전기한 여러 레코드는 프레트르의 개성이 음악의성격과 일치해서 큰 성과를 가져온 것이다. 시벨리우스, 차이코프스키, 베를리오즈 등의 교향곡 녹음도 했으나 일부분의 녹음(예, 베를리오즈 [이탈리아의 하롤드])을 제외하고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현재는 폐반되었다.
세바스티안, 조르주 (Georges Sebastian 1903~)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부다페스트 음악 아카데미에서 바르토크, 코다이 등에게서 배운 다음, 뮌헨에서 발터의 지휘법 강습에 참가(1922)하였다. 같은 해에 뮌헨의 바이에른 오페라 극장의 음악 스태프에 참여하였다.
1923년에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음악 스태프에 참여하였고, 1924년부터 1925년에 걸쳐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의 부지휘자, 1925년에서 1927년에 걸쳐서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부지휘자, 그리고 1927년부터 1931년까지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수석 지휘자가 되었다. 여기서 또 발터의 영향을 받아 낭만파, 고전파의 레퍼토리를 확장하는 한편, 바르토크의 [푸른 수염 영주의 성], 에른스트 크르제네크의 [조니는 연주하기 시작한다] 등의 중요한 작품의 베를린 초연을 지휘하였다.
1931년 모스크바 방송 음악 감독과 모스크바 필하모니의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활동하였고, 1946년에는 파리에 정주하게 되었다. 여기서 프랑스 국립방송관현악단 외에 한동안 파리 오페라 극장의 수석 지휘자도 역임하였다
치핀, 조르주 (Georges Tzipine 1907~)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파리 음악원에서 배웠고, 바이올린 연주를 전공하였다. 바이올린으로 '프리미에 프리'를 얻은 다음, 1926년에 파리의 방송국에서 바이올린의 솔리스트로서 데뷔하였다. 그러나 그는 바이올린 주자로서의 활동을 화성, 대위법, 지휘법을 배우기 위해 중지하였다가, 1931년에 이번에는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다. 그 후에 그는 마르크 드 랑스와 레이나르드 앙의 제자가 되었다.
앙의 후임으로서 찬의 카지노의 수석 지휘자를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역임하였다. 또 그는 러시아 발레단과 롤랑 프티 발레단의 공연 때의 지휘자로서 프랑스의 각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따라서 파리의 주요 오케스트라에 반복하여 객원 지휘자로서 등장하였다. 1949년 이후는 프랑스 국외에서도 활동했는데 영국, 포르투갈, 터키, 남북아메리카로 활동의 무대를 넓혔다. 1960년부터 1965년까지는 멜버른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 겸 음악 감독이 되었다.
1966년, 치핀은 파리 음악원의 지휘법 강좌를 맡게 되었다. 그는 레코딩에서도 콘서트에서도 20세기의 작품을 많이 다뤘다. 특히 프랑스의 20세기 작품의 연주에는 정평이 있다. 아르투르 오네게르, 장 리비에, 자크 이베르, 플로랑 슈미트, 다니엘 르쉬르, 앙리 토마지, 앙리 뒤티외의 작품에는 그에 의해 초연되거나 소개된 것도 적지 않다.
알브레히트, 게르트 (Gerd Albrecht 1935~)
독일 에센에서 태어났다. 음악 학자인 부친과 피아니스트인 모친이라는 혜택받은 환경에서 자랐다. 함부르크에서 음악을 배우고 1956년 동지에서 지휘자로 데뷔했다. 1957년 브장송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일약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듬해 1958년부터 뷔르템베르크 오페라 극장을 시발로 마인츠를 거쳐 1963∼1966년 뤼베크, 1966∼1972년 카셀 오페라 극장 음악 감독을 지냈다.
그리고 1972년부터는 카셀 오페리터는 마젤의 뒤를 이어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 음악 감독으로 취임, 1980년까지 근무했다. 취리히 톤할레 관현악단 수석 지휘자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1988년 현재는 빈 교향악단 상임 지휘자로 있다. 오페라부터 심포니까지 지휘할 수 있는 지휘자이다. 오페라는 독일 오페라에서부터 이탈리아 오페라까지 상당히 넓은 레퍼토리를 갖고 있다. 라이만의 현대 오페라 [리어 왕] 전곡(그라모폰)에서 들을 수 있는 그의 지휘 방식은 유럽에서의 높은 평가를 뒷받침해 주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보세, 개르하르트 (Gerhard Bosse 1922~)
바이올린 주자이기도 하며, 독일의 작센의 브르첸에서 태어났는데, 2세 때부터 부친에게 바이올린의 기초를 배웠다. 당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콘서트 마스터 였던 볼간트를 사사했으며, 라이프치히 음악대학에서는 다비손에게 배웠다. 1943년 린츠의 브루크너 관현악단에 입단했으며, 1946년에는 바이마르 음악대학의 강사로서 재직했다.
1961년 모교인 라이프치히 음악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동시에 라이프치히 방송교향악단의 콘서트 마스터로 취임하였다. 1955년에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수석 콘서트 마스터가 되고, 게반트하우스 4중주단의 제1바이올린을 맡게 되었다.
1962년에는 이 관현악단의 지휘자 콘비추니와 협력하여 게반트하우스 바흐 관현악단을 결성하여, 콘비추니와 함께 이 단체의 지휘도 하게 되었다. 보세는 바이올린 주자로서는 낭만성이 있는 해석을 좋아했으며, 지휘자로서는 바흐를 중심으로 한 바로크의 작품을 주로 하여, 전통적인 품격이 있는 음악을 만든다. 바흐 관현악단을 지휘한 헨델의 [합주 협주곡 작품 3](필립스)의 음반이 좋다.
가바체니, 자난드레아 (Gianandrea Gavazzeni 1909~)
이탈리아의 베르가모에서 태어났으며, 작곡가인 동시에 저명한 음악 평론가이기도 하다. 도니체티, 피체티, 바그너, 더욱 무소르크스키 등에 관한 평론과 전기는높이 평가받고 있다. 밀라노 음악원에서 수학하였다. 1940년대 전반까지는 작곡에만 전념하였으며 가끔씩 자신의 작품을 지휘할 정도였는데, 1948년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지휘자로서 지휘대에 서게 되었다.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서도 종종 지휘를 하였는데 근년에는 고령의 탓으로 지휘 활동이 뜸해졌다. 이탈리아 오페라를 지휘한 레코드는 남아 있지만, 어느 레코드에 수록된 연주도 딱딱한 느낌이 들면서 오페라틱한 감흥이 부족한 감이 있다. 오히려 극장에서는 그 골격을 확실히 표현함으로써 본령을 발휘하고 있다.
마시니, 잔프란코 (Gianfranco ,Masini 1937~)
이탈리아의 레조 에밀리아에서 태어났다. 파르마 음악원과 볼로냐 음악원에서 피아노, 성악, 작곡 등을 공부하고, 헤르만 셰르헨에게 작곡과 지휘를 배웠다. 1963년에 레조 에밀리아의 오페라 극장에서 [라 보엠]을 지휘하여 데뷔한 후, 이탈리아 각지의 오페라 극장에서 활약하였다. 1968년에는 볼로냐에서 콘서트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트리에스테의 베르디 오페라 극장의 상임의 한 사람으로서 활약했으며, 또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바르셀로나의 리세오 극장, 프랑스 국립방송, 엑상 프로방스 음악제 등에도 종종 초청을 받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각지의 음악원 교수직도 맡고 있다. 레코드는 아리아집의 반주가 많았는데, 로시니부터 베리스모에 이르는 넓은 레퍼토리를 가지며, 소프라노인 카발레가 주연한 로시니의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전곡(필립스)이 대표적인 음반이다.
리볼리, 잔프란코 (Gianfranco Rivoli 1921~)
이탈리아의 밀라노 근교에서 태어났다. 밀라노 음악원에서 파리나, 페도롤로, 게데니에게 작곡을, 안토니노 보토에게 지휘를 배웠다. 1938년부터 이탈리아 각지의 오페라 극장과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활약하였는데, 작곡가로서도 알려져 있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뒤셀도르프와 뒤스부르크를 본거지로 하는 라인 도이치 오페라의 상임 지휘자, 1965년부터 1969년까지 리스본의 굴벤키안 재단의 예술 감독, 1970년부터 1972년까지 토리노의 레조 극장의 상임 지휘자로 활약하였다.
그 후에는 프리로 활약하고 있는 것 같으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스위스, 스페인, 프랑스, 독일 각지의 오페라 극장과 음악제에도 자주 출연하고 있다. 레코드는 협주곡과 아리아집의 반주 등 몇 장밖에 없지만, 1960년대에는 콘서트 홀에서 많은 녹음을 하였다. 레퍼토리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중심인데 모차르트, 바그너, 스트라빈스키, 무소르크스키, 야나체크, 브리튼 등도 포함되어 있다.
파타네, 주세페 (Giuseppe Patan )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지휘자 프랑코 파타네(1908∼1968)였다. 나폴리의 산 피에트로 아 마이엘라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치레아, 사바스타, 롱고 등에게 배웠다. 8세 때에 마스카니의 조수를 지냈다고 한다. 재학 때부터 오페라의 연습 지휘자를 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19세 때인 1951년에 나폴리의 메르카단테 극장에서 테너 가수인 질리와 그 밖의 가수들과 공연한 [라 트라비아타]를 통해 데뷔하였다.
1961년부터 1956년까지 나폴리의 산 카를로 오페아 극장의 제2지휘자를 역임한 다음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유럽 각지의 오페라 극장에서 활약하였다. 1951년에는 린츠 시립극장의 수석 지휘자가 되었다. 1962년부터 1968년까지는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를 중심으로 하여 독일, 오스트리아에서 이탈리아 오페라의 지휘자로서 명성을 높였고, 1969년에는 [리골레토]를 통해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서도 데뷔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는 특정한 극장에 구속되지 않고 빈, 베를린, 뮌헨, 함부르크, 파리, 런던의 코벤트가든 등 유럽의 주요한 오페라 극장 외, 1978년부터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등에서도 매시즌마다 출연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파타네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표적인 지휘자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로시니에서 베리스모에 이르는 작품과 그 밖에 프랑스 오페라에서도 뛰어난 수완을 높이 평가받고 있다. 또 아직 레코드는 없지만 1955년 이래 콘서트 지휘자로서 활약하고 있으며, 빈 필하모니와 스위스 로망드 관현악단과의 연주회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중에서 특히 베토벤의 연주는 토스카니니 스타일을 이해한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시노폴리, 주세페 (Giuseppe Sinopoli 1946~)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1958년에서 메시나에서 개인적으로 화성과 오르간을 배우고, 1965년에 파도바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면서, 베네치아의 B.마르첼로 음악원에서도 배웠다. 이 동안의 1968년부터 마데르나에게 인정을 받고, 다름슈타트에서 마데르나와 슈토크를 사사하였다. 1971년에 파도바 대학을 졸업하고, 다음해부터 빈에서 지휘를 스바로프스키에게 배웠다.
모교 마르첼로 음악원의 현대 음악과 전자 음악의 교수로 1974년까지 근무했으며, 그 후 빈을 중심으로 분석과 화성을 빈 음악원에서 가르쳤다. 1975년에는 베네치아에서 마데르나 앙상블을 결성하고, 현대 음악의 지휘자로서도 활약하고 있다. 작곡가로서는 1970년부터 작품을 발표하고, 루아이안과 도나우에싱겐 음악제에서 위촉 작품을 썼고, 근년에는 지휘자로서도 오페라에 진출하였다.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1980년부터 1981년의 시즌에 지휘한 베르디의 [아이다]에서 대성공을 거두어, 오페라 지휘자로서 리카르도 샤이 다음 가는 큰 그릇으로 평가되었다.
또 1981년 5월에는 뮌헨에서 자작의 오페라 [살로메]의 초연을 지휘하여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시노폴리는 작곡가로서도 지휘자로서도 앞으로의 활약이 매우 기대된다. 레코드는 아직 부소티의 [베르크크리스탈]과 [로렌자초 교향곡](그라모폰)의 한장만이지만 매우 뛰어나다. 1988년에는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의 상임으로 있었으며, 1990년에는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칸텔리, 구이도 (Guido Cantelli 1920~1956)
이탈리아의 노바라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밴드의 지휘를 하고 있었기에 어릴 때부터 음악적인 환경 속에서 자랐다. 소년 시절은 천재 소년 피아니스트라고 그 주위에서 떠들썩하였고, 리사이틀도 열었다. 그 후 밀라노 음악원에 들어가 작곡과 지휘를 배웠다. 1942년부터 출생지의 코치아 극장에서 오페라를 지휘하고 있다가 1945년 7월 올림피아 극장에서 밀라노 스칼라 오페라 극장의 오페라를 지휘하여 주목을 받았다.
이 연주를 들은 거장 토스카니니는 "그는 나와 동일한 지휘를 한다"라고 그의 재능을 칭찬한였기 때문에 일약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49년 토스카니니는 NBC 교향악단의 부지휘자로서 그를 미국으로 가게 하였는데, 이것이 비약적인 출세의 계기가 되어 뉴욕 필하모닉의 지휘자로서 30대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발터, 미트로풀로스 등의 거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활약하였다.
1956년 11월 23일 파리 교외 오를리 공항에서 추락 사고 때문에 겨우 36세의 나이로 그의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요절만 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거장이라 불리는 지휘자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선율을 명확히 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싱싱한 표현을 보여주는 그의 연주는 작은 토스카니니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베르디 [레퀴엠](발터 협회)의 유동감 넘치는 신선한 연주는 언제나 싱싱했다.
슐러, 건서 (Gunther Schuller 1925~)
작곡가이기도 하면 미국의 뉴욕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호른 연주자로 출발하여 신시내티 교향악단의 제1호른 주자로 활동하다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으로 옮겼다. 슐러는 작곡 분야에도 손을 대면서 바쁘게 되자, 1959년 연주활동을 단념하고 작곡에 전념하게 된다.
그러나 작곡 활동과 함께 지휘자로서의 활동도 계속했는데, 보스턴 교향악단, 신시내티 교향악단, 클리블랜드 교향악단, 시카고 교향악단,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 밴쿠버 교향악단 등 미국과 캐나다의 주요 오케스트라 이외에 영국의 BBC 교향악단, 필하모니아 교향악단, 프랑스 국립방송관현악단 등 유럽 각지에도 널리 출연했다. 작곡은 독학으로 공부를 했는데, 클래식에 한정되지 않고 재즈나 민족 음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흥미를 갖고 있었다.
작품에는 [브라스와 퍼커션을 위한 교향곡](런던), [폴 이레의 주제에 따른 7개의 연습곡](RCA), [호른 협주곡], [관현 4중주곡 제1번], [금관 악기를 위한 5중주곡], 그리고 [재즈 4중주곡]과 [관현 악기를 위한 콘체르티노] 등이 있다. 뉴 잉글랜드 음악원의 원장을 맡는 등 교육면에도 심혈을 기울였으며, 저서로는[호른의 테크닉(1962)][재즈의 뿌리와 그 발달(1968)] 등이 있다. 현재 슐러가 지휘한 레코드는 조프린의 오페라 [툴리 모니샤](그라모폰)가 나와 있다.
레온하르트, 구스타프 (Gustav Leonbardt 1928~)
하프시코드, 오르간 주자이기도 하며, 네덜란드의 스 프라페란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와쳄발로 레슨을 받았다. 이미 15세 때에는 쳄발로와 네덜란드에 많이 남아 있던 옛 오르간에 깊은 흥미를가기고 있었다 한다. 1947년부터 1950년에 걸쳐서 스위스 바젤 스콜라 칸토룸에서 에두아르트 밀러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