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벽대전의 위치와 江東의 위치
☞미리 전제 돼야 할 것은 실제의 역사에서는 赤壁大戰은 존재 할수 없는 전쟁입니다.
왜냐하면 적벽대전은 曺魏의 28만 병력과 孫吳의 병력 약 4만 5천과 劉蜀의 병력 1만5천여 병력의 연합군이
장강 일대에서 208年七月~208年十一月 사이에 벌였다 라는 전쟁입니다,
그런데 孫吳의 建國은 222年이며 滅亡은 280年5月1日 이라고 합니다.
적벽대전이 끝난 시점이 208년 11월이라면 건국되지도 않은 孫吳가
11년 전에 적벽대전을 치루었다는 말이 되지요?!
正史 《三國志》와 소설 三國志演義를 헷갈리면 안됩니다.
三國志演義는 주원장이 역사공정을 위해 역사 공장 기획에 따라 만들어진 역사 소설입니다.
즉, 三國志演義의 숨은 의도는 삼국시대에 지금의 중공 영토 전체를 무대로
전쟁을 치루었으며 삼국시대에도 지금의 중공 영토가 자신들으이 고토 였다 라는 것을
민중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현재 동아사아 역사는 赤壁을 위 지도의 위치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孫吳 도읍지를 建業(지금의 南京)이라고 주장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楊子江 일대는 東晉 이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밀림이 우거진 지역일 뿐입니다.
즉, 317년 이전에는 지금의 南京일대는 역사에 등장 할 수 없는 땅입니다.
현재 동아시아 역사는 赤壁大戰이라는 전쟁을 실존했던 전쟁으로 해석하며
그 위치는 長江 일대(위 지도)라고 주장하지만 혹여 赤壁大戰이라는 전쟁이 존재 했다 라고 해도
赤壁大戰의 무대는 절대로 위 지도의 위치 일수 없다 라는 것만은 분명 합니다.
正史 《三國志》의 실제 역사와 소설 《三國志演義》를 헷갈리면 역사 아마추어 입니다.
소설 《三國志演義》에서는 曹操는 赤壁大戰에서 패한 후 부랴 부랴 許昌(허창)으로 돌아 옵니다.
許昌은 曹魏의 都邑地 이지요.
"魏" 라는 이름으로 나타 나는 나라는 秦末 陳涉(진섭)이 세운 나라와
漢末 曹操의 아들인 曹丕가 세운 나라와 拓拔珪(탁발규)가 세운(北)魏와
隋末 李密이 封해진 나라 이름으로 쓰였습니다.
曹操는 적벽대전의 패전으로 낙담하는 자신들의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위로 합니다.
"우리는 아직 幷州, 冀州, 靑州, 幽州 가 건재 하다"
현재 동아시아 역사 해석으로의 幷州, 冀州, 靑州, 幽州 지역은 위 지도 처럼 비정하여 역사를 해석합니다.
즉, 幽州(유주)는 지금의 遼河의 북쪽 일대이며 冀州(기주)의 위치는 지금의 河北 일대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위 지도는 기록과 다르게 그려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曺魏의 영토는 幷州, 冀州, 靑州, 幽州 지역으로 한정 된다 다른 것을 의미하는데
위 지도의 曺魏 영토는 司隸, 兗州, 雍州등이 모두 曺魏의 영토로 그려져 있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 지도는 잘못된 역사 지도인 것입니다.
단언 컨데 현재 동아시아 역사는 모두 거짓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부터 三國時代가 얼마나 거짓으로 해석 되고 있는지 하나 하나 짚어 보겠습니다.
孫權의 吳나라를 孫吳라고 합니다.
孫吳의 治所(다스리는 곳)를 江東이라고 하며, 江東은 楊子江 일대를 의미 합니다.
역사를 해석할 때 楊子江과 長江을 동일시 하면 역사 아마추어 입니다
楊子江은 江蘇省과 浙江省이 시작되는 부분 부터 바다로 들어가는 구간(위 지도) 만을 의미하는 것이며
長江은 金沙江 즉, 四川省이 끝나는 지점부터 楊子江이 시작되는 江蘇省 까지의 구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長江=楊子江이라고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중공의 야바위 역사에 놀아 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楊子江 일대는 西晉의 망명왕조가 317년 江蘇省 일대로 들어가서 개발하기 이전 까지의 양자강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밀림 지역이였던 것이며 삼국 시대에 양자강 일대가 등장하는 것은
그 자체가 거짓 역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孫吳를 楊子江에 존재 했던 나라로 해석하는 것은 그야말로 소설 입니다.
江東이라는 의미는 "長江의 동쪽"이라는 말이지요.
삼국이 대치하던 그 시기에는 楊子江이라는 용어는 등장하지 않았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즉, 楊子江이라는 용어는 東晉 이후에 만들어진 이름인 것입니다.
東晉 이전 의 역사 기록에서는 楊子江이라는 하천은 기록된 적이 없습니다.
현재 동아시아 역사는 孫吳의 영토를 지금의 揚子江 일대와 長江 일대 전부로 비정하고
孫吳의 도읍지를 武昌과 建業(지금의 난징) 이라고 주장 합니다.
武昌의 위치는 위 지도에서 보듯이 지금의 武漢 동남쪽 입니다.
또한 建業은 지금의 南京 입니다.
孫吳는 병력 5만을 징집 하기 어려운 작은 나라 입니다.
실제로 孫權의 吳나라 병력은 45,000여명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규모인 孫吳의 영토를 지금의 장강 남쪽 모두로 비정하고 역사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 하지만 長江(장강)과 揚子江(양자강)은 구분돼야 하는 것이며
長江의 역사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지금의 中共 사람들은 揚子江이라고 하면 잘 모릅니다.
소위 "江"이라는 용어는 6300km의 金沙江, 長江, 揚子江 모두를 의미하는 용어 입니다.
그 중에서 長江의 길이는 약 4000km라고 합니다.
필자 역시 이와 같은 江의 역사성을 몰랐을 때는 孫吳의 위치를 揚子江 일대라고 믿어 왔습니다.
하지만 孫吳의 실제 위치는 지금의 武漢 일대에 존재 했던 나라로 보입니다.
이것을 역사 공정에 의해 양자강 일대 까지 확대하여 역사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즉, 현재 동아시아 역사는 湖北省 일대의 일부분에 불과한 荊州를 위 지도와 같이 비정하며
楊子江 일대에 한정되는 楊州를 江蘇省과 浙江省 일대를 모두 楊州로 비정하는 것입니다.
楊州라는 땅은 梁州의 짝퉁 이름 입니다.
禹임금의 梁州는 燉煌의 동쪽 일대 였으나 漢武帝 이후 지금의 開封을 梁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開封을 大梁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동아시아 역사는 大梁을 대 놓고 梁州라고 하지 못하지요.
왜냐 하면 위 지도에서 보듯이 四川盆地와 漢中盆地 일대를 梁州로 비정하기 때문입니다.
즉, 西晉의 잔당들이 망명을 떠나 揚子江 일대에 나라를 세우면서
揚子江 일대를 漢字만 살짝 고쳐서 楊州라고 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揚子江 일대가 역사에 등장하는 시기는 東晉 때 부터 라는 것을 모르고
춘추 시대의 吳, 越과 孫吳를 揚子江일대의 나라로 해석하는 것은
揚子江의 역사가 西晉의 망명왕조인 東晉 때 부터 라는 것을 간과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古代 梁州에 존재 했던 山川의 이름을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면
대부분 지금의 揚子江 일대로 비정되어 나타 나는 이유인 것입니다.
揚子江이 역사의 기록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西晉이 "팔왕의 난"으로 317년 멸망을 하고
西晉의 사마씨 일족들이 長江을 따라 揚子江 일대로 망명을 떠나 오면서 부터 입니다.
위 지도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위키 백과가 발행하는 八王之亂에 관한 지도 입니다.
그러나 위 지도는 논리적인 헛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西晉의 首都는 洛陽이며 八王들은 西晉의 皇族들로 이루어진 8명의 王朝에 의한
洛陽을 방어하기 위한 일종의 首都警備軍團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中共은 西晉의 영토를 위와 같이 비정 합니다.
위 지도는 간단하게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西晉의 영토는 揚子江이 등장 할 수 없으며 산동반도 역시 등장할 수 없습니다.
西晉의 영토에 山東半圖가 포함 돼서는 안되는 이유는 238년 司馬懿(사마의)는 公孫淵을 정벌하고
16세 이상의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철군 했다 라는 분명한 역사가 존재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公孫燕의 위치가 지금의 동아시아 역사 주장대로 遼東半島 일대 였다 라면
遼東半島가 西晉의 영토일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석을 해도 西晉의 영토는 위 지도 일수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논리의 헛점은 羯(갈)이라는 일개 유목민족을 산서성 일대로 비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으로 해석되는 현재의 역사 해석으로도 羌, 羯, 氐라는 유목민족은
지금의 타림분지 일대의 유목민족들 입니다.
五胡는 모두 東胡라고 불리우는 鮮卑族일 뿐이며 이시기의 鮮卑는
모두 타림분지 일대의 유목민족들 입니다.
匈奴와 東胡의 구분은 東胡는 타림분지 동쪽 일대의 유목민족이며, 匈奴는 타림분지 서쪽 일대의 유목민족인 것이며
東胡의 서쪽이 오리지날 匈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五胡라는 低, 羌, 羯이라는 유목민족은 그 자체가 胡이며 匈奴 일 뿐입니다.
즉, 匈奴=東胡=鮮卑인 것입니다.
東胡는 동쪽 흉노를 의미 하는 용어 입니다.
즉, 五胡十六國 시대란 長安의 서쪽 유목민족인 五胡에 의해 長安이 유린 되는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소위 八王이란 西晉의 司馬氏 왕조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사마씨의 친인천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首都警備軍團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왕조 입니다.
즉, 西晉의 國都인 洛陽을 지키기 위해 사마씨 一族으로 구성된
洛陽을 방어 하기 위한, 洛陽에서 가까운 땅에 존재하던 왕조들 입니다.
西晉 末, 西晉을 위협하는 세력은 五胡 뿐입니다.
요동군벌 公孫淵을 괴멸 시켰기 때문에 西晉을 위협하는 세력은 靑海湖 일대의 유목민족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靑海湖 일대의 유목민족으로 부터 洛陽을 방어 하기 위한 팔왕의 왕조가
위 지도 처럼 수천리 밖에 존재 한다면 洛陽이 방어가 되겠습니까?
논리적으로는 말도 안되는 역사를 위 지도와 같이 해석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중공 역사가 가지고 있는 역사 공정에 의한 것이기 때문 입니다.
왜냐하면 楊州, 荊州, 益州라는 땅을 장강과 양자강 남쪽까지로 비정해 놓았으니
어쩔 수 없이 팔왕들의 위치 역시 옮겨서 해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西晉의 영토는 남쪽으로는 절대로 淮水(회수)를 넘을 수 없으며 북쪽으로는 산서성 남부 일대를 넘을 수 없습니다.
遼東의 진짜 위치는 산서성 남부 일대 입니다.
西晉의 서쪽 영토는 현재 야바위 역사 해석 때문에 그 범위가 어디 까지 였는지 정확히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西晉(266年2月4日-316年12月11日)의 멸망은 낙양을 지키고 있던
서진의 왕족들인 팔왕들의 반란에 의해 분열되고 멸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 시기 타림분지의 유목민족들은 以夷制夷에 의해 각 부족들이 반목하던 시기였는데
西晉이 분열을 하면서 後漢과 曹魏 그리고 司馬氏의 西晉에 의해 숨죽이던
유목민족들이 다시 역사의 주인공이 될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 하는 것입니다.
즉, 五胡의 東進 입니다.
西晉이 있던 中原은 유목민족들이 저마다 春秋戰國時代의 지역 정서를 이용하기 위하여
전국시대의 나라의 나라 이름으로 나라를 일으키는 것이 五胡에 의한 16國의 난립이지요.
五胡들이 저마다 나라를 세우면서 秦, 趙, 魏, 燕, 이라는 나라 이름을 쓰는 이유가
五胡들은 모두 秦, 趙, 魏, 燕의 후예들이기 때문 입니다.
五胡十六國의 영토는西晉의 영토로 한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魏, 蜀, 吳의 三國時代는 아직 五胡十六國 시대가 등장하기 이전 입니다.
필자는 孫吳라는 나라가 진정으로 존재 했는가에 대하여 懷疑的으로 바라 봅니다.
孫吳가 존재 했다고 해도 孫吳는 양자강 유역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적벽대전의 역사는 소설속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적벽대전은 曺魏의 28만 병력과 孫吳의 병력 약 4만 5천과 劉蜀의 병력 1만5천여 병력의 연합군이
장강 일대에서 208年七月~208年十一月 사이에 벌였다 라는 전쟁입니다,
그런데 孫吳의 建國은 229年5月23日이며 滅亡은 280年5月1日 이라고 합니다.
적벽대전이 끝난 시점이 208년 11월이라면 건국되지도 않은 孫吳가
11년 전에 적벽대전을 치루었다는 말이 되지요?!
삼국시대 까지(3세기 초)의 揚子江 河口는 아직 개발이 안된 미개발지역이며
西晉 멸망 이후 서진의 사마씨 일족들이 망명을 떠나오기 이전에는
나라가 존재하지 않은 지역이 라는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長江일대에 존재 했다 라는 吳나라는 무엇일 까요?
사실 孫吳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형성된 나라인지 분명하지 않으며
신기루와 같은 나라 입니다.
吳나라가 존재 했다면 吳나라의 위치는 지금의 武漢 일대일 가능성이 큽니다.
소설 삼국지연의 에서는 孫吳가 뿌리 깊은 역사를 간직한 나라 처럼 묘사 되지만
孫堅은 後漢 末, 지방 군벌 정도 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 孫吳의 영토는
倭의 위치와 교집합 입니다.
만약 孫吳가 실제로 존재 했다면 孫吳=倭國일 가능성이 큽니다.
현재 동아시아 역사는 春秋時代 吳와 越나라를 양자강 남부 일대로 비정하고 역사를 해석 합니다.
그러나 吳나라는 江蘇省 북쪽이며 淮水의 북쪽이며 산동반도 남부 일대에 존재 했던 나라이며
越나라는 강소성 중북부 일대이며 淮水의 남쪽에 존재 했던 나라입니다.
즉, 吳越同舟의 무대는 淮水 입니다.
吳, 越을 양자강 남부 일대로 해석하는 이유는 여가 공정에 의한 것입니다
지금의 漢族과 古代의 漢族은 전혀 다릅니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방위를 色으로 구분을 했습니다.
북쪽은 검은 색, 동쪽은 청색, 서쪽은 백색, 그리고 남쪽은 붉은 색 입니다.
중국 대륙의 南과 北을 구분(남방 한계선)하는 것은 淮水(회수) 입니다.
지금의 중국 사람들이 붉은 색이라면 죽고 못사는 이유는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의 漢族은 淮水의 남쪽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의 한족은 오호십육국 시대에 망명을 떠나온 西晉 사람들과
倭人들로 추정되는 남방계 민족들의 혼혈종들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淮水의 남쪽 사람들과 淮水의 북쪽 사람들의 언어와 풍습과 외모가 확연히 다른 이유 입니다.
하지만 古代 오리지날 漢族은 淮水의 북쪽 사람들인 華夏族 입니다.
역사가 짧은 남방계 종족이 한족의 이름을 차용하여 사용 하고 있을 뿐이며
中華人民共和國의 오리지널 漢族은 少數民族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혼동하는 이유가 古代의 中國(the middle kindom)이라는 이름과
지금의 中華人民共和國의 약칭인 中國이라는 이름을 혼동하기 때문이지요.
고대의 中國이란 唐나라를 지칭하는 용어 입니다.
대륙의 역사에서 진정한 帝國은 唐나라가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長江의 남쪽을 江南이라하는 것이며 장강의 동쪽(양자강의 서쪽)을
江東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것입니다.
江南은 벼농사의 발상지이며 소위 "야요이(弥生時代)" 문명의 발상지 라는 것은
지금의 일본 역사도 인정하는 부분 입니다.
남방계 한족의 나라인 중화인민공화국의 실질적 문영은 長江文明입니다.
이와 같은 분명한 역사를 도외시하고 역사를 해석하기 때문에 동아시아 역사가 복잡해 보일 뿐입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중심 종족은 長江일대의 倭人들로 추정되는 農耕民族이며
이들 농경민족이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실질적 주인입니다.
고대 역사에서 倭國이란 일본열도가 아닌 장강 일대의
벼농사를 경작하던 倭人들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倭人들이 위 그림과 같이 이동하였다면 이동 경로에 倭人들의 흔적을 남겻을 것입니다.
倭人들이 한반도를 경유하여 일본 열도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한반도에도 정착하엿을 것입니다.
즉, 한반도에도 倭人들의 혈통이 존재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동한 倭人들이 최존적으로 정착한 땅이 한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의 남부 지역인 큐슈 일대인 것입니다.
지금의 일본이 가야는 일본이며 가야가 한반도 남부를 다스렸다
라는 임나일본부 라고 억지 주장을 하는 근거 입니다.
한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의 남부 지역인 큐슈 일대는 倭人들의 나라 였다 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倭人들이 지금의 일본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倭人들이 한반도의 우리와 일본열도의 先住民族 가운데 하나 라는 것은 분명 합니다.
한반도의 우리는 유목민족과 倭人들의 혼혈종이며 유목민족의 혈통이
지금의 일본 보다 더 많이 섞여 있을 뿐입니다.
우리를 단일민족이라는 단일민족 사관은 진짜 역사 왜곡이며
식민사관에 의거한 역사 해석일 뿐입니다.
"적벽대전"이 일어 났다는 지역은 장강 즉 강의 중류 지역이며
江東(강동)이란 장강의 동쪽 즉 장강이 끝나고 양자강이 시작되는
江蘇省의 서쪽일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세상의 하천 가운데 黃河와 淮水를 제외한 모든 하천을 江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결론적으로 중화 인민공화국의 장강 문명의 패러다임이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인 것이지요.
즉 , 고대에는 黃河文明이 세상을 지배 했다면 江南이 개발되기 시작하는 싯점인
五胡十六國 시대 이후의 동아시아는 長江文明이 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韓半島와 滿洲 일대의 하천 이름이 江이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五胡十六國 이후에 한반도와 滿洲가 실질적으로 역사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지금의 난징이 손오의 도읍지라면 조조는 어찌하여 강의 하류로
바로 진격을 해야 함에도 강을 거슬러서 적벽으로 쳐들어 갔던 것일까요?
소설 三國志演義 에서는 조조의 병력을 100만이라고 뻥을 치지만
조조의 실제 병력은 26만~28만 정도라고 하지요.
만약 지금의 난징이 孫吳의 都邑地 였다면 아마도 28만의 병력을 움직였던 조조는
병력을 나누어 일부는 周瑜의 수군을 적벽에 묶어 두고 나머지 병력으로
揚子江으로 내려가서 텅텅 비어 있을 孫吳의 도읍지를 마음껏 유린 할 수 있는데
대단한 지략가인 曹操는 어찌하여 赤壁에 모든 병력을 all in 했던 것일까요?
즉, 이것은 孫吳의 도읍지가 지금의 南京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조조의 진격 루트는 지금의 漢水를 따라 하류로 내려 갔던 것이며
한수의 하류는 長江의 본류를 만나는 것이고 장강을 따라 내려 가면
吳의 都邑地라고 비정하는 南京(난징)이 나타 납니다.
즉 孫吳의 도읍지는 적벽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야 하는 것이지요.
지금의 동양 역사학은 江東을 양자강 일대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江東이란 長江의 동쪽 일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揚子江은 江東의 동쪽 입니다.
또 하나의 모순은 지금의 揚子江 일대는 西晉이 멸망한 후
西晉의 司馬氏 일족들이 망명을 떠나오면서 부터 개발되는 지역 입니다.
즉, 지금의 양자강 일대는 三國時代에는 역사에 등장 할 수 없는 지역이며
南京이 孫吳의 도읍지라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또 하나는 孫吳의 종족 정체를 알 수 있는 분명한 기록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시기 孫吳가 있던 지역은 "야요이"라고 하는
倭의 위치와 孫吳의 위치가 정확하게 겹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孫吳의 종족 정체는 倭人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 하나의 아이러니는 적벽대전은 208年七月—208年十一月 사이에 일어 났다고 하지요
그런데 孫吳의 建國과 滅亡은 229年5月23日-280年5月1日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적벽대전이 끝난 시점이 208년 11월이라면 건국되지도 않은 孫吳가
적벽대전을 치루었다는 말이 되지요?!
진정으로 孫吳는 존재했던 나라이며 적벽대전이라는 전쟁은 존재 했었던 것일 까요?
하지만 소설이 되었든 정사가 되었든 적벽대전 당시 孫吳의 병력과
劉備의 병력을 다 합쳐서 5만~6만이라고 합니다.
孫吳의 병력은 4만5천명 정도이며 劉備의 병력이 1만 5천명 정도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동아시아 역사가 주장하듯이 위 지도와 같이
저렇게 넓은 오나라의 영토 안에서 국가의 운명을 가를 전투에
어찌 하여 병력이 손오는 고작 5~6만 밖에 동원을 못했을까요?
이 대목에서 가장 분명한 오류는 장강의 범위이며
손오의 江東은 長江의 범주를 벗어 나서는 안된다는 의미 입니다.
강의 상류는 金沙江, 강의 중류는 長江, 그리고 강의 하류는 揚子江이였으며
강의 2/3는 長江이라는 사실을 간과 하고 역사를 해석한 결과 이지요.
즉, 지금의 동아시아에서는 長江과 揚子江을 동일시 하지만
揚子江은 지금의 江蘇省에 인접한 범위만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公孫燕의 遼東 위치
자 또 하나의 역사 해석의 거짓은 曹操가
"우리는 아직 幷州와 冀州, 淸州, 幽州가 건재 하다"
라고 말한 대목에도 있습니다.
현재 동양 역사가 말하는 정주, 기주, 청주, 유주의 지도를 볼까요?
箕州의 위치는 지금의 北京을 포함하는 河北 일대로 비정하여 그리고 있으며
遼河의 東北쪽이 幽州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위 지도는 근본적으로 중국 역사가 모두 거짓일수 밖에 없는
치명적인 근거를 제시해주는 지도 입니다.
즉, 중국 역사는 유사가 시작될 때 부터 중국의 모든 지역을
중국의 영토로 시작 되엇다 라는 自家撞着적 역사 지도인 것입니다.
위 지도는 堯임금이 천하를 가지런히 하여 소위 천하구주를 만들었다는
夏나라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을 그린 지도 입니다.
즉, 천하구주의 범위는 夏나라 범주를 벗어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중국의 고대 지명들은 堯임금이 정한 이름을 변함 없이
그 지역에 적용하여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을 간과 하면 안됩니다.
따라서 천하구주는 夏나라 범위 안에 존재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堯임금의 苗裔인 公孫度가 營州라는 땅을
山東半島에 적용하여 설치한 것일 뿐입니다.
청주는 산동반도이며 산동반도는 역사적으로 절대로 曹魏의 영토일수 없는 것입니다.
청주는 公孫淵 때 曹操의 아들인 曺睿 때인 238년 司馬懿에 의해 멸망 당합니다.
사마의는 公孫燕의 16세 이상의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요동을 멀고 지키기 어려워 撤收를 합니다.
따라서 曹魏는 존속 기간 동안 靑州(태산의 서쪽)를 영토화 한적이 없습니다.
위 지도는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주장하는 三國時代 지도 입니다.
산동반도는 물론 한반도 북쪽 까지 曹魏의 영토로 그리는 것입니다.
曹魏의 건국은220年12月11日이며 멸망은 266年2月4日 이라고 합니다.
또한 劉蜀의 건국은 221년이며 멸망은 263년이라고 하지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는 이와 같은 소설적 역사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며
소위 삼국시대의 역사는 그야말로 소설일 뿐입니다.
曹操는 205년 원담을 멸망시키고, 206년 고간을 멸망시키고,
207년 오환 · 원상 연합군을 무찌르고 원상을 멸망시킴으로써
원소 일가의 세력권이던 기주, 청주, 병주, 유주를 손에 넣고
오환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켜 하남, 하북의 패권을 확립했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孫吳를 孫漢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孫權의 나라 이름은 吳임에도 불구 하고
손권의 나라 이름을 漢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의 중화인민공확국의
주류민족은 남방계 한족이며 이들 남방계 한족들은
劉邦의 漢나라를 계승한 것이며 중국 대륙 역사의
주류 민족으로 남기고자하는 열망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중국 역사에서 크게 부각될 이유가 없는
五胡十六國 시대의 짜투리 역사에 불과한 東晉에서 부터
東陳까지의 역사를 南北朝時代의 南朝라며 부각시키는 이유는
지금의 남방계 한족들의 역사 패러다임에서 비롯된 것일 뿐입니다.
이 때문에 孫吳를 孫漢이라는 무리한 역사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위, 촉, 오 삼국시대의 고구리 국왕은 中川王이며 중천왕 때에는 별다른 전란은 없었고
다만 曹魏의 군대와 梁貊(양맥)에서 한판 뜬 기록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梁貊의 梁이라는 한자는 春秋戰國時代의 魏나라가 도읍을
大梁(지금의 開封)으로 옮긴 후의 도읍지 이름이며
貊(맥)은 夫餘의 또 다른 이름인 한자와 합하여진 이름이며
大梁의 위치는 지금의 "河南省 開封(카이펑)"이라고 합니다.
즉, 梁이라는 漢字는 지금의 카이펑 지역을 표기 하기 위한 고유명사적 글자 입니다.
필자는 지금의 카이펑을 고구리의 遼東城으로 비정 합니다.
貊이라는 글자는 산동반도를 에워 싸고 있는 한반도 2배에 이르는
거대한 늪 지대인 沛澤(靑州) 입니다.
즉, 고구리의 中川王 때에 曹魏와 카이펑에서 한판 뜬 기록 이외에는
별 다른 기록이 안보이는데 이것은 이상 합니다.
만약 식민사관적으로 비정하는 고구리의 위치가 지금의 滿洲라면
大樑에서 한판 뜬 기록은 허구이거나 현재의 동아시아 역사가 허구 이거나
둘중 하나는 거짓 입니다.
또 하나는 百濟와 曺魏의 관계 입니다.
260년대의 백제왕은 古爾王(고이왕) 때라고 합니다.
다음은 식민사관적 고이왕때의 일에 관한 설명입니다.
"고이왕은 낙랑과 신라 그리고 말갈과 군사적으로 충돌하며 세력을 키워 갔으며
남옥저의 일부를 점령하고, 중국 대륙의 서진과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강원도 북부에 자리잡은 말갈(동예라고 불리는)족이 자주 침범해 왔는데,
고이왕대에는 말갈과도 우호관계가 조성되었다"고 하는 것이
식민사관적 역사의 설명입니다.
漢四郡의 後身인 낙랑, 대방과도 혼인을 통한 동맹관계를 형성했으며
재위 13년(246년) 魏나라가 낙랑군(樂浪軍)과 삭방(朔方)과 합공해
고구리와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서 낙랑군의 변방을 공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한나라와 낙랑군, 대방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帶方郡(대방군)을 선제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하게 한 사건의 배후에도
고이왕이 이끄는 백제의 힘이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상 하지 않습니까?
曹魏로 봐서는 고구리 보다도 백제가 훨신 더 위험한 나라가 아닌가요?
百濟라는 이름은 公孫燕이 멸망한 이후
위구태 이후의 이름라는 것을 간과하면 안됩니다.
즉, 백제라는 나라 이름은 238년 이전에는 존재 하지 않는 이름이며
238년 이후 부터 백제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조위가 백제를 공격한 사건은 없으며
이때의 어떤 기록도 백제는 보이지 않는 이유가 이때는
아직 백제라는 이름의 나라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38년 이전의 백제는 아직 東夫餘 라는나라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됩니다.
曹魏는 관구검을 보내 고구리를 肅愼의 경계에 까지 逃走 하도록 했다고 하지요.
이때의 동아시아 역사에서도 曹魏의 동쪽 키워드는 단연 公孫燕입니다.
238년 司馬懿(사마의)는 공손연을 토벌하고
16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죽이고 遼東에서 철수를 했다 라고 하지요.
왜 정벌에 성공하고 철수를 했는냐는 질문이 있다면
"그곳은 멀고 험하여 지키기 어려운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秦始皇이 한차례 遼東 정벌에 성공 했지만 진시황의 시대가
15년을 끝으로 짧은 역사가 끝났기 때문에 의미가 없습니다.
漢初에도 "요동은 멀고 지키기 어려워 遼塞를 쌓고 방비만 하였다" 라는 것입니다.
즉, 漢初에는 遼東땅은 漢나라의 영토가 아니 였다는 말이지요.
그 후 기원전 108년 漢武帝가 遼東 征伐과 樂浪 征伐에 성공을 했고
낙랑의 治所를 王儉城을 고쳐서 壤平이라고 했으며 壤平이 있는 땅을
高句麗縣이라고 하고 고구려현 아래 낙랑등 4군을 설치 했다는 것입니다.
王儉城의 위치는 지금의 開封으로 비정 됩니다.
바로 이곳을 司馬懿가 정벌을 하고 같은 이유로 지키지 못하고
15세 이상의 남자를 모두 죽이고 병력을 철수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고대 중원의 정복자들은 어찌하여
산동반도와 하남의 동쪽 지역을 정복하지 못햇을까요?
바로 "沛澤(패택)"이라는 거대한 늪 때문 입니다.
沛澤은 우리 역사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지명이지만
패택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의 동아시아 역사는 沛澤과 遼澤을 구분하려 애를 쓰지요.
왜냐하면 패택이라는 곳은 중국 하남성 일대에 존재하는 거대한 늪지대라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만약 요택이 패택이라면 자신들이 주장하는 동양 역사가 모두 뒤죽 박죽이 되기 때문 입니다.
이 때문에 패택에 관한 분명한 설명은 있지만 요택에 관한 분명한 설명이 없는 것이며
요택에 관한 설명은 遼史地理지의 맹신자들인 재야 사학자들의 설명 뿐입니다.
沛澤은 산서성 남쪽에서 부터 하남땅 북쪽 일대를 가로 질러 南四湖 까지 연결된
한반도의 두배에 이르는 거대한 늪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雨澤이라고도 합니다.
雨澤이란 황하의 하류 물줄기로 형성된 雨路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범람하는 황하의 물줄기가 예측할 수 없는 지역으로 흐르다가
범람이 멈추면 범란던 하천은 더 이상 흐르지 않고 고립 되어 생긴
빗길을 雨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雨澤을 浿水라고 하는 것이며 浿水는 절대로 하나일 수 없는 이유인 것입니다.
雨路란 河南일대가 큰 비만 오면 범람하는 황하의 물줄기가 바뀌어 생긴
그야 말로 황하의 물을 배출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생겨 나는 물길을 말하는 것이며
범람이 끝나는 때가 되면 또 다른 패수가 생겨 났던 것입니다.
고대 중원의 왕조가 河南의 동쪽과 山東半島와 江蘇省 일대를 넘보지 못햇던 이유가
바로 패택이라는 지형 때문이었으며 숲이 우거져서 들짐승들이 숨어 산다는
의미로 쓰이며 고대 중원의 왕조들은 죄수를 이곳에다가 流配(유배)를 보냈더랫지요.
京師로 부터 1천여리 빆은 "沛澤의 동쪽을 말하는 것"이며
다시는 돌아 오지 말고 沛澤에서 죽으라는 의미 입니다.
수양제가 고구리의 遼東城을 공격하기 위해 고구리로 들어 갔다가
거의 몰살된 곳이 이 거대한 늪지대인 沛澤인 것입니다.
당 태종은 고구리 공격하기 위해 패택으로 들어 갔을 때
수나라 병졸들의 시체가 넓으러져 있는 것을 보고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수나라 병졸들의 시체를 묻어 주라고 했던 것이며
고구리정벌에 실패하고 험한 沛澤을 의지하여
간신히 살아 돌아 갔던 것입니다.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이지만 北魏가 고구리 임금에게 諸侯의 작위를 내렸다는
以<璉>爲使持節〈督<營州>諸軍事·征東將軍·<高句驪王>·<樂浪公>.
라는 기록의 征東將軍이란 洛陽의 정동쪽의 군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征東이는 의미는 동쪽을 지키는 軍閥을 의미하는 것이며
洛陽의 정동쪽이 營州이며 樂浪이라는 의미의 기록인 것입니다.
後漢末의 영주란 중화사관적으로도 지금의 산동반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沛澤이라는 땅은 "貊"이라는 땅이며 이 貊이라는 한자는
沛澤에 숨어 사는 곰과 비슷한 무서운 짐승을 형상화한 글자이며
濊貊이라는 맥족의 땅이 패택의 땅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패택의 지형을 모르고서는 中原에서 가까운
山東半島와 河南의 동쪽 그리고 江蘇省 일대가 왜 오랫 동안
왜 中原의 邊方중의 邊方이 였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沛澤의 동쪽(낙랑조선)은 기원전 108년 漢武帝에게 정벌을 당하기 전에는
中原과 교통이 이루어 진적이 없는 지역 입니다.
이제 부터 司馬懿에게 토벌당하고 멸망에 이르는 公孫宴에 관해서 알아 봅시다.
요동 태수인 公孫淵(공손연)은 스스로 燕王이라 칭하지요.
연왕이란 춘추전국시대의 燕나라를 계승했음을 말하는 것이지요.
曹操는 스스로 魏王이라 했지요.
이때의 遼東이란 지금의 現代遼東인 遼東半島가 아니라
산서성과 泰山의 서쪽 일대의 古代遼東을 말하는 것입니다.
三國時代의 古代遼東을 나타내는 기록을 보지요.
238년 봄, 태위 司馬懿가 우금, 호준 등을 거느리고
보병과 기병 4만 명으로 토벌에 나섰으며 孤竹과 碣石을 지나
6월(음력)에는 遼水에 도달하였다고 합니다.
참고 : http://blog.daum.net/omye-mail/897/고죽국과 기자국의 위치
그렇다면 遼水의 위치는 沛澤 일대에 존재 했던 하천으로 보이며
司馬懿가 요동정벌을 단행하기 위해 지나간 곳은 고대 孤竹國이 있었다는
지금의 산서성 일대 였던 것을 알수 있으며 공손연의 영토는
태산의 서쪽(沛澤) 에서 부터 산동반도 일대이며 公孫燕의 治所는
遼東城이며 遼東城은 山東半島에 존재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식민사관적으로는 이때의 幽州(유주)를 지금의 현재요동(요동반도)로 비정을 하고
冀州를 지금의 河北 일대로 비정한 결과로 낙랑의 위치가 한반도 북부를 전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曹操의 동쪽 영역은 沛澤을 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曹魏의 영역을 지금의 河北省과 한반도 북쪽을 포함하고 山東半島와 河南의 동쪽과
江蘇省 까지 그린 지도는 거짓일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무한 일대의 孫吳를 長江 남쪽 모두로 그리는 것은 남방공정에 의한 것이며
지금의 사천성 일대의 蜀漢을 위 지도와 같이 비정하는 것은
서방공정에 의한 역사 설정 일 뿐입니다.
추정 컨데 소설 삼국지연의를 역사 지도로 구성하면 위 지도 정도가 되지 않을 까 추측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