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최초 고구리의 위치를 산동반도 泰山의 서남쪽인 南四湖 일대로 비정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樂浪朝鮮과 깊은 관련이 있는 沛水의 沛라는 地名이 대부분 지금의 南四湖 일대에서 나타나며
주몽의 鄒牟王의 鄒라는 땅이 남사호 동북쪽에 존재 하기 때문이 였습니다.
이 뿐 아니라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모두 지금의 산동 반도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 였습니다.
《遼史地理志》
舜以青州越海,又分為營州,則遼東本為青州矣。
순임금이 바다 건너를 나누어 영주라 했는데,
즉, 요동은 본래 청주라 한다.
《禹貢錐指》
然自朝鮮以至日照皆青也,所遺多矣。
그러함으로 조선은 청주에 두루 미친다.
《晉書地理志》
舜以青州越海,又分為營州,則遼東本為青州矣。
순임금은 바다 건너 청주를 거느렸으며, 또한 영주로 나누었다.
즉, 요동의 근본은 청주인 것이다.
즉, 현재 동아시아 青州=산동반도 라는 역사 프레임을 믿은 결과 입니다.
그러나 산동반도는 遼東 일 수 없다 라는 것을 알고는 고대 요동의 위치를 찿아 헤맬수 밖에 없었으며
결국 고대 遼東의 위치는 산서성 서남쪽이라는 결론으로 약 20년 이상을 樂浪朝鮮의 위치와
고구리의 위치를 지금의 산서성 서남쪽으로 비정하고 역사를 해석해 왔습니다.
그동안 모든 역사 기록을 산서성 서남쪽으로 고정하고 해석해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산서성 서남쪽이 아닌 것으로 의심되며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기록은 무시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山海經》과 《括地志》를 번역하고 난 이후의 동아시아 역사는 고조선의 위치와 고구리의 위치
그리고 초기 백제, 초기신라의 위치가 지금의 사천분지 또는 그 북쪽인 황하 상류의 동쪽 일대가 분명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동안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안되어 무시했던 기록들도 논리적인 설명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처음 부터 지금 까지 필자와 함께 하신 분들은 필자의 지명이동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 지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필자는 역사를 해석함에 있어서 고정관념은 철저하게 배척해야 한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최근 필자는 모든 역사 기록이 고조선과 고구리의 위치가 황하의 상류 일대 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음에도
이것을 부정하려는 경향을 보여 왔습니다.
모든 기록들이 朝鮮이라는 땅을 지금의 靑海湖 일대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춘추시대의 모든 나라들은 모두 西域에 존재 했음을 알고 서도 그 일부인 燕나라와 齊나라와 魯나라를
지금의 관중평원 동쪽으로 해석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眞番朝鮮과 樂浪朝鮮 그리고 고구리의 위치를 지금의 산서성 서남쪽으로 고정 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燕昭王 때에 眞番朝鮮을 병탄하는 역사 기록과 한무제의 樂浪朝鮮 정벌과정과 隨, 唐과 고구리의 전쟁의 기록들이
지금의 관중 평원에서 일어 날 수 없다 라는 것과 고조선과 고구리의 위치가 지금의 관중 평원일 수 없다
라는 고정관념에 따른 것입니다.
소위 역사 해석의 아집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애서 부정하려고 했던 眞番朝鮮, 樂浪朝鮮, 고구리의 위치가 지금의 隴西의 일부분인 황하 상류 동쪽 일대라는
정황과 기록이 계속 등장하기 때문에 이제는 또 다시 眞番朝鮮, 樂浪朝鮮, 고구리의 위치를 고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만들어 진 것입니다.
사실 지금에 이르러서 보니까 산서성 서남쪽으로 비정되었던 眞番朝鮮, 樂浪朝鮮, 고구리 해석은
논리적으로도 모순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 였다 라는 것을 이제와서 실토 합니다.
왜냐 하면 고구리와 隨, 唐의 국경은 遼水 라는 하천인데 산서성 서남쪽에서는
遼水로 보일만한 하천이 존재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고구리의 위치가 산서성 서남쪽이라면 고구리와 隨, 唐과의 전쟁 기록에는 반드시
戰艦이 등장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구리의 위치가 산서성 서남쪽이라면 어떤 경우리도 隨, 唐軍은 배를 타고 渡河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무제가 樂浪朝鮮을 정벌하는 과정의 기록에는 戰艦이 무수히 존재 하지만 隨, 唐 때에는 戰艦의 기록이 제한적입니다.
또한 樂浪朝鮮이 존재 하던 시기에는 지금의 관중평원 역시 靑州에 속하는 것입니다.
즉, 한무제와 수양제 그리고 당태종이 樂浪朝鮮과 고구리를 정벌하던 방향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遼水는 東西로 흐르는 하천일 가능성이 큰 것이며 위 지도의 大通河 또는 湟水가 遼水 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재 중공 역사는 大通河의 역사를 趙宋으로 부터 시작된다라고 해석을 하며 그 이상의 역사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즉, 현재 동아시아 역사는 지금의 청해호 일대인 隴西 일대에서 일어난 전쟁의 역사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隴西 일대에서 일어난 지명을 모두 동쪽으로 이동 했기 때문에
隴西 일대에서 일어난 전쟁의 역사는 존재 할 수 없는 구조인 것입니다.
고대 중국의 역사가 어떻게 날조 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은 오히려
고조선과 고구리등 우리 역사를 밝히는 것 보다는 더 쉽습니다.
고구리와 백제 신라의 역사는 모조리 고쳐지고 지워진 것이기 때문에 그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합니다.
즉, 정상적인 경로로는 우리 고대사를 절대로 밝힐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의 隴西 일대의 고대 지명들은 모두 동쪽으로 이동 되었기 때문에
지명으로는 고구리의 역사를 밝힐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날짜로 고구리의 위치는 산서성 서남쪽이 아니다 라는 것을 밝히며
오랫동안 필자의 글을 읽어 오신 분들에게 또 한번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첫댓글 중국의 기록된 역사에서 등장하는 나라는 황하 유역과는 무관한 지역이라 봐야 합니다
황하와 그 지류는 지금의 분하를 제외하고는 배를 띄우거나 배로 운행이 가능한 곳이 못됩니다
당과 수나라는 중국에 현존하는 운하중 가장 오래된 곳이 있는 양자강 주강이 흐르는 양자강 중하류 남쪽 산지에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이들이 세력을 통학하여 양자강과 한수 중류의 지금의 계림과 중경지역의 신라와 배로(당시 중국평원은 대부분 지금의 메콩강습지호수형태) 교류하며 신라보다 더 서쪽의 백제와 신라보다 중동북부의 고구려와 전쟁을 했다고 봅니다
특히 고구려가 위치한 지역은 봄이면 고산에서 눈과 얼음이 녹으면서 흙탕물이 하류로 흘러 비가 오지 안하도 갑자기 흙탕물홍수가 발생함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나라 이름은 양자강 중하류지역에서 존재했든 한족마을이나 작은 단위의 국가이름 이래고 추정합니다
이들 나라들의 흥망시기는 후대에 낙양 서안 등지에서 도굴이 횡행한 시기 이후에 연호붙이기로 나라와 연대를 만들며 마치 중국의 역사가 기원전 수천년부터 한자를 이용하고 나라의 이름과 황제의 년호를 사용하고 주변국들이 그 년호를 사용하며 속국으로 내려왔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중국의 가장 큰 두 수계인 황하와 양쯔강은 발원지는 티벳고원으로 비슷하지만 내용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비행기에서 양쯔강과 황하를 내려다보면 확실히 알수 있습니다
황하는 대부분의 수럄이 비가 아니라 겨울에 내린 눈이 녹아서 흐르며 중류의 사막지대와 하류(여기서 하류는 지금의 태항산맥지대)의 서안과 분하평지를 지나 협곡을 지나서 지금의 낙양 정주에서부터 거대한 퇴적삼각주를 만들며 강으로서의 흐름은 끝나고 거대한 늪지를 헝성한 강입니다
양쯔강은 황하와 반대로 봄 여름의 비와 7~9월의 폭우가 모여서 흐르는 강으로 지금의 양쯔강 중하류 동정호 일대에서 강으로서의 흐름은 끝나고 여름철이 다가오면 거대한 호수로 변하는 강입니다
그래서 고대 황하유역 문명과 양쯔강유역 문명은 지금의 중원대륙의 거대한 바다와 험준한산악으로 막혀 이질적인 문화를 만든 것입니다
이 두강의 문화와 역사가 교류가 활발하게 시작되는 시기는 아주 후대이며 그전엔 자연재해(지진ㆍ전염병ㆍ사막화)로 인한 주거지의 이동이 잦았다고 봐야 합니다.
특히 황하유역의 집단은 동쪽과 서쪽 산악지대로.
양쯔강 집단은 남쪽산지와 늪지개간 등으로 농지를 넓히며 벼농사 중심으로
중국의 양대수계
중국의 주요 고대문명지
황하유역 문명과 양쯔강유역 문명은 두 강의 차이만큼 아주 이질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