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韩国神学 한국신학 스크랩 신약신학 제 1강-김세윤
증인 추천 0 조회 3 09.06.24 11: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 강의는 전 총신대학신학대학원 교수였던 김세윤교수의 강의녹취한 내용입니다. 지금은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강의를 하십니다.



신약신학 제 1강-김세윤

신약신학 1에서는 공관복음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주로 연구한다. 그래서 거기에서는 예수께서 무엇을 가르쳤으며 어떻게 살았으며 십자가에 죽음과 부활이 어떻게 일어났으며 그것을 통해서 어떻게 기독교 신앙이 발생하게 되었는가? 이렇게 추구하는 것이 신약신학 1에 해당하고 신약신학 2는 사도들의 선포와 역사라고 해서 초대교회가 예수의 가르침과 부활을 통해서 어떻게 예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그에 대한 신앙을 복음으로 선포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선포에 대한 과정과 역사 등의 사도들의 선포와 역사라는 신약신학 2를 만든다. 여기에서는 바울의 선포와 선교과정, 요한 문서에 나타난 신학, 그 다음에 시간이 더 하락하면 신약중의 긴 책인 히브리서의 신학과 여타 베드로의 서신 등을 살펴보고 또 계시록을 살펴보자.
신약신학의 과제로부터 시작하겠다.

신약신학의 과제는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신앙이 다시 말하면 나사렛 예수라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그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자라는 신앙과 선포가(케리그마) 어떻게 발생하였는가? 와 무슨 의미를 갖는가를 규명하는 것이 신약신학의 과제이다. 그러기 때문에 신약신학의 과제는 모든 기독교 신학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약신학적인 근본이 없이 조직신학이 가능하지 않다. 교회사가 이야기될 수 없다. 기독교적인 실존이 또 논의될 수가 없다. 구약신학도 구약도 신약신학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보아야 한다. 구약은 신약의 성취로서 신약에 의해서 성취된 것으로써 구약은 신약에 대한 예비로써 보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과 구약책을 읽는 것이 다르다. 관점이 다르다. 그리고 해석하는 방법이 다르다. 왜 그러느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성취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이 성취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구약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약의 빛 아래 궁극적으로 완성된 계시 아래 예비계시인 구약을 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에 구약은 신약을 예비하는 책으로 또 교회사에 있어서 여러가지 발달된 신학들은 그것이 교회사나 교리사나 우리에게 전개되는 교리 조직신학들은 전부 신약신학의 재해석이요 적용이라고 볼 수있다. 그래서 신약신학이 모든 신학의 근본이요 출발점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구원사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신약신학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어떻게 신앙고백과 케리그마가 어떻게 생성되었으며 그것이 이루어졌으며 어떻게 발달했으며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가를 규명하는 것이 신약신학의 과제인데 그것은 그야말로 기독교 신학의 자장 근본된 과제라는 것이다.

이 신약신학의 과제를 규명할려고 할 때 우리에게 당장 수수께끼가 하나 발생한다. 그 수수께기가 무엇이냐 하면 어떻게 예루살렘 성 밖에서 무참히 그리고 아무 힘없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나사렛 예수를 태초부터 그러니까 창세전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적인 존재로서 인간이 되고 인류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 우편에 만유의 주로 온세상을 통치하는 주로 군림하는 분이라고 고백하게 되고 선포하게 되었는가? 하는 이것이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그런데 그것을 주후 20년 안팎에 그리고 신앙고백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사실 우리가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이 신앙고백은 예수의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직후에 생긴 것이다.
누가 대표적으로 빌2:6-11에 있는 찬송시를 읽어보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이 시를 대부부의 학자들은 바울이 가기 전의 교회에서 벌써 지어져 가지고 신앙고백하는 시를 바울에 의해 인용되었다고 본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고 바울의 의해서 지어졌다고 보는데 다수의 학자들은 이것이 바울 전에 이미 생성된 시라고 한다. 바울이 썼건 바울 전에 썼든지 간에 이 그리스도에 대한 찬송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원래 태초부터 하나님과 동등한 하나님의 형상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그 분이 인간이 되고 인간이 되어서 죽음의 몸이 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이셔서 자기 이름을 주고 주라는 이름을 주고 온 우주가 즉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은 천사들을 말하는데 땅에 있는 것들이나(사람들이나) 땅아래 있는 것들이나 그것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악령들이나 즉 온통 우주가 온통 우주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무릎을 꿇는 다는 말은 예배한다는 말이다. 주를 예배하고 주라 고백하게 했다. 어쨋든 바울이 ?든 바울 전에 교회가 썼든지 간에 이 신앙고백이 빌립보서가 언제 써졌는가? 연대가 부정확해요. 학설에 의하면 3가지로 나누어져요.

그런데 빌립보서가 가령 50년대 말쯤 쓰여졌다거자 아니면 60년대 초쯤 기록되었다면 십자가에 예수가 못박힌 것이 30년이다. AD30년 그러면 빌립보서가 60년에 기록되었다면 불과 30년 사이에 이러한 엄청난 신앙고백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울 전에 교회가 이미 지었다면 이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빌2:6-11에 나오는 이 신앙고백의 내용은 바울이 우리에게 남겨준 제일 첫 편지이다. 많은 학자들의 대상이나 전승이라고 본다.  그런데 한 48,9년에 쓴 책이다. 내 스승인 FF Bruce는 항상 주장하기를 갈라디아서가 제일 먼저 쓴 편지라고 본다. 그것은 무려 48년 쯤 기록 되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런 편지에 벌써 빌 2:6-11에 까지 담긴 신앙고백이 예수가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이 되고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하고 만유의 주로 높임받은 분이다라고 하는 신앙고백이 나타난다구요. 그러니까 아무리 짧게 잡아도 십자가에 못박힌 지 불과 십수년 사이에 이러한 엄청난 신앙고백이 일어났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가 주다라는 신앙고백을 하기 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사람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고백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바울이 편지를 이때에 썼지만 빌2:6-11의 이러한 신앙고백은 기록한 때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주 과학적이고 안전하게 나사렛 예수가 예루살렘 성 밖에서 무참히 십자가에 처형된 불과 몇 년 사이에 기껏해야 불과 몇 년 사이에 그가 태초부터 계셨던 창세전부터 계셨던 신적인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하시고 부활 후 만유의 주로 하나님 우편에 높임바 된 군림하게 된 분이다라 하는 것이다. 이게 수수께끼이다.

어째서 그런 신앙고백이 가능하냐 하는 것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종교사학파들은 헬라문화권에서 특히 헬레니즘세계에서도 동부 oriental section에서는 통치자를 신격화한다든가 물론 이적을 행하고 돌아다니는 마술사를 신격화 한다든가 그래서 거기에 이름을 붙인 것이 소위 θοις αυηε(devine man)이라고 하였는데 보통 사람과는 다른 ‘신적인 사람’ 이라고 하여 신격화하였다고 종교사학파들이 얼마전까지만 해도 또 통치자 가령 알렉산더나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를 신격화한다든가 특히 동방에서 통치자를 신격화하는 것이 있고 또는 자연의 변화나 움직임의 배후에는 신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겨울에 식물이 다 죽는다. 그 다음에 생명이 다시 올라온다. 그래서 이러한 자연의 변화가 왜 이러나는가? 그것은 자연신이 있는데 그 신이 죽고 다시 부활해서 움직이는 이러한 cycle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세라피스라든가 하는 신비 종교가 자연신들을 숭상하는 그런 종교들이 나타났다. 거기서 그런 신들을 바라고 고백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옛날 헬라사상에 특히 동방에 이렇게 보통 사람을 신격화하고 하는 그런 종교적인 배경에 비추어서 예수가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이 나올 수 있었다고 설명할려고 하였다.

그래서 이런 신앙이 전부 이 원래 팔레스타인의 유대교의 전승을 받은 배경을 가지고 있는 팔레스타인의 유대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는데 바울을 필두로 헬라세계에 기독교가 전파되므로 헬라종교적인 이러한 배경아래서 헬라종교적인 신화들을 예수님에게 이제 덮어 씌워서 예수가 바로 이러한 ‘신적인 존재’라고 말하는 신앙고백이 나왔다고 이렇게 설명하려고 하였다.

최근에는 덜 그렇지만 지금도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였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신화를 많이 만들어 낸 것으로 우리가 믿는 고대 사회에서도 셀라사회에서도 동방사회에서도 어떤 사람들이 그랬는가? 막강한 사람들이다. 통치자들이었다. 승리자들이었다. 전쟁영웅들이 신격화되었다. 요새말로 하면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십자가에 무참히 죽은 그러니까 로마 사람들의 눈에 보면 아주 무참히 반란군의 대표로 십자가에 처형된 식민지의 노예 중의 하나가 율법의 눈으로 볼 때는 신 21:23에 근거해서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니까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은 예수, 로마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무참히 아무 의미 없이 하잘 것 없이 죽은 노예와 비슷한 죽음, 유대 신학의 관점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신 21:23의 말대로 하나님이 저주를 선언 받은 가운데 죽은 예수를 이렇게 신격화하는 그런 예는 없다. 그런 예는 고대에도 없다. 현대에도 없다.

그러면 현대에는 어떤 사람을 우상화하는가? 막강한 사람이다. 아무 힘없는 사람을 그렇데 높이고 존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게 수수께끼이다.

예루살렘의 성 밖에서 그렇게도 처참하게 죽은 나사렛 예수를 그가 죽은지 불과 몇 년 만에 연대를 보여준 바와 같이...이런 엄청난 신앙고백이 일어날 수가 있었느냐? 그 말 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선포로 세상을 뒤집어 놓을 수가 있었는가? 그러므로 이게 수수께끼이다.
지금도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일부에서는 그 사람들이 제일 진보적인 신학을 하는 것이 사실인데 이런 것을 보면 그러나 이 사람들이 제일 뒤떨어진 사람들이다. 지금도 이런 카테고리에 의해서 이 문제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20세기 초에 종교사학파들 중에 몇 사람이 헬라문서나 동방문서를 조사해 보았을 대 헬라의 신화나 종교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무엇인가?

그 사람들은 신과 인간과의 차이가 별로 없다. 헬라 종교나 신화에 있어서 이 신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보다 조금 더 크고 인간보다 조금 힘이 센 자이다. 그 외에는 인간과 똑같다. 정욕도 인간과 똑같고 성취한 것도, 서로 미워하는 것도 인간하고 똑같다. 그래서 헬라 종교의 특징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신과 인간과의 차이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왠만하면 인간을 신격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신과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가 별로 없으니까.

우리 성경적인 전통은 하나님과 인간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런데 이 헬라 전통은 그와 반대이다. 신과 인간과의 차이가 별로 없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이 인간을 신격화하는 것은 아주 쉽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한대로 무슨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든지 무슨 마술을 잘 하는 자들이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신적인 인간이라고 주장하면 그렇게 대우를 받으면서 돌아다녔다.

그런데 그 영향을 받은 즉 헬라적인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은 헬라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 즉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자기들의 역사 가운데 위대한 사람들, 모세, 엘리야든가 이렇게 많은 이적을 행할 수 있었던 위대한 사람들을 이러한 카테고리로 신적인 인간이라는 카테고리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런 헬라 전승이나 헬라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전승에 비추어서 예수가 분명히 이적을 행한 모양인데 병자도 낫게 하는 그런 일을 행한 모양인데 그러기 때문에 예수를 예수의 추종자들이 헬라 사람들이나 헬라 사람들의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도 보통 신적인 인간이라 했는데 예수를 그렇게 신적인 인간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이 우리 복음서 중에 가장 잘 나타난 것이 마가복음이라고 그렇게 주장한다. 한동안 많은 학자들이 그러하였다. 그런데 지금도 그런 친구들이 더러 있다.
그래서 마가복음의 기독론은 순전히 이렇게 예수를 이적을 행하고 다니고 있는 ‘신적인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를 신적인 인간으로 보기 시작한데서부터 더 발달된 신앙고백이 아까 이야기한 예수가 태초에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 신적인 존재로서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한 그러한 신앙고백으로 케리그마로 발전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신적인 인간의 카테고리 즉 종교사학적인 카테고리에 호소해서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였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도 간과한 것이 하나가 있다. 아까 이야기한대로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은 자가 어떻게 신적인 인간으로 신앙고백이 되겠는가? 아까 이야기한대로 예수가 생전에 이적을 행하고 그럴 때에 서로 신적인 인간으로 존경을 받고 추종을 받았다 한들 그가 십자가에서 무참히 죽어서 그의 가장 제자들까지 도망가는 세상에 그를 다시 십자가에 죽은 후에 ‘신적인 인간’으로 우대하고 존경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주로서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로서 신앙고백했다는 것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그런데 이 사람들이 간과한 또 한가지 점이 무엇이냐 하면 이 ‘신적인 인간’이라는 이 말이 고대 문서에 안 나온다. 이것은 독일인인 Bieer가 지어낸 말이다. 20세기 초에....

물론 고대 문서 거기에 ‘신적인 인간’이라는 카테고리가 없다. 이적을 행하고 무슨 알쏭달쏭한 가르침을 행하는 사람을 ‘신적인 존재’로 존경하는 그런 정도의 전통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를 무슨 ‘신적인 인간’이라는 칭호를 붙였다든가 그런 사람들에게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붙였다든가 그런 역사는 없다.

그래서 최근에 좀 더 분명히 조사해가지고 이런 방법에 의거해서 아까의 수수께끼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다. 1950-60년대에 이것이 풍미하였는데 세계 신학계를 지배하였었다면 지금은 멀리 도망가 버렸다. 지금은 조금 뒤떨어진 녀석들이 자꾸 그런다구.
그래서 우리에게 수수께끼가 그대로 남아 있다. 예루살렘 성밖에서 무참히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를 불과 십자가 처형 후 몇 년 사이에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적인 존재’로서 인간이 되고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하시고 만유의 주로 군림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선포하고 있느냐 말인가? 이것인 신약신학의 중심문제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신약신학의 내용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까지만 해도 종교사학파들은 이 신앙고백이 부활에서 왔다고 하였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체험이 어떤 것인가는 따질 것 없고 우선 예수의 추종자들이 예수가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서 부활했다고 믿고 그 체험을 했다고 주장을 했는데 그러기 때문에 그 체험이후에 예수가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요, 주요... 등으로 고백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아까 말한 것을 정리해서 말하면 시점으로 말하면

①부활 이후 그게 일어났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일어났느냐?는 아까 이야기한대로

 

②헬레니즘의 종교 즉 혼합종교의 영향으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아까 이야기한대로 신비종교나 신적인 인간이나 통치자를 신격화하는 그런 전통이나 또는 영지주의의 구원자 신화등의 여러가지 신화. 종교와 신화들이 막 뒤섞인 것이 당시 헬라종교의 현상이었는데 이런 현상의 영향으로 이런 종교에서 유행하는 신화를 예수가 부활했으므로 예수에게 적용해서 예수가 바로 주다.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가 바로 마지막 아담이다 등의 신앙고백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게 무슨 소리냐?
아까 이야기한대로

 

③기독교의 제 1단계는 초기에는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의 추종자들 예수가 활동할 때의 제자들을 중심으로한 유대 기독교와 이런 영향에 의해서 예수가 신적인 존재이었다. 주라고 고백하는 헬라 기독교로 확연히 구별된다는 것이다.
               -------------------+---------------------
                        유대기독교             헬라기독교
그런데 이것은 2개의 별개의 신앙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유대 기독교는 예수가 메시야다. 예수가 주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그런 고백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고 부활했다는 그런 신앙고백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대 기독교는 예수가 종말의 선지자로서 종말을 선포한 분으로 종말의 구원자로 그리고 심판자로 자기 아닌 사람의 아들, 그 인자, 그 사람의 아들로 선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 기독교는 종말에 와서 세상을 심판하고 예수의 추종자들을 구원할 인자, 그 사람의 아들을 기다리는 것이 그들의 신앙의 내용이었다고 그 선포의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이 기독교가 헬라 세계로 넘어가면서 예수가 메시야다. 예수가 주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고 부활하였다는 등의 신앙고백과 케리그마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형성되었느냐? 바로 이러한 헬라종교들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되니까 예수가 자연히 예배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헬라기독교와 유대 기독교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헬라 기독교의 대표자가 누구냐? 바울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에 신약성경에 서신들 이후로 나오는 이 기독교 신앙 그 후 지난 1900년간의 우리가 이어받은 기독교의 창시자는 누구인가? 바울이다. 예수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초기의 기독교, 유대 기독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바울이 첫 기독교의 창시자이다. 예수가 아니라.....
이렇게 지금까지 해석하여 왔다.

대표적인 예로 불투만이 이런 신학을 전개하여 왔다. 이러한 관점은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도대체 헬라종교들을 어떻게 예수에게 뒤집어씌울 수가 있었느냐? 십자가에 무참히 죽은 예수에게 어떻게 영웅이나 전쟁에 승리한 사람에게 신격으로 하는 헬라종교의 신화를 예수에게 적용할 수 있느냐를 전에 문제 삼았었다. 또한 신적인 인간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것도 앞서 언급하였다. 그게 한가지 문제이다. 설령 신적인 인간이라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패배자인 예수에게 그런 신화들을 적용해서 이런 신앙고백이 일어날 수있었냐 하는것도 또 하나의 문제이다.

이제 우리가 또 하나 문제 삼을 것은 시점 즉 부활이라는 것에 비롯되어서 이런 신앙고백이 나왔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왜 그러느냐 하면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가 메시야다. 예수가 주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창출할 힘이 없다. 부활이라는 사건 그 자체로서는 예수가 메시야다 예수가 주다. 예수가 하나니의 아들이라는 등의 신앙고백과 선포를 창출해낼 힘이 없다. 왜그러느냐 하면 종교사학적으로 보면 부활은 배경이 없다. 그런 신앙고백을 뒷받침할 만한 배경이 없다. 이게 무슨소리냐 하면 구약과 유대교 전승에만약 메시야는 죽고 부활한다는 사상이 있었다면 그러면 예수가 부활했다 그러므로 예수가 부활했으므로 부활자가 예수 이르모 예수가 메시야다라는 아주 간단한 논리가 성립될 것이다.

그래서 부활이라는 것에서 예수가 메시야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성경과 유대교의 전승에 메시야는 죽고 부활한다는 사상이 없다면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구약성경과 유대교에 예수가 부활한다는 사상이 어디 있는가? 그러니 이런 사람들이 헬라 종교의 영향을 받아서 신앙고백을 하였다는 것은 당치 않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 당시의 상황이 복잡해서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은 아람어를 모어로 쓰고 헬라어를 조금 아는 정도이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랍비 학교에서 헬라어를 가르쳤다고 하면 거기서 예수님도 헬라어를 조금 알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면 헬라지방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어디에 있겠는가? 이래서 불투만의 제자들은 사실 불투만도 그것을 조금 암시는 했지만 F.Hahn 이나 W.Kramer같은 사람들은 그래서 기독교의 발전단계를 3단계로 나누었다.
팔레스탄인 유대 기독교→헬라 유대 기독교→헬라 이방인 기독교

그것은 팔레스타인 유대 기독교 그 다음에 헬라 세계에 사는 유대인들 사이에 형성된 기독교 그 다음에 헬라에 사는 이방인 기독교로 3단계로 나누었다. 그래서 여기 헬라 이방인 기독교에 와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주라는 신앙고백이 발전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문제가 있다. 이렇게 3등분해도....

아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주다라는 신앙고백이 빌 2:6-11에 나오는 예수에 대한 찬송시를 근거로 해서 소급해 올라가보니까 AD30년 직후에 일어났다고 하였다. 그런데 언제 이러한 3단계를 거칠 시간이 있겠는가? 가령 AD40년에 빌2:6-11에 담은 찬송시가 나올 수 있었다고 하자. 그러면 예수의 십자가에 못박힘과 이 때와는  그 기간이 불과 10년이다. 그 기간에 기독교의 선교가 이렇게 발달하였는가? 이렇게 3단계를 거칠 정도로 발달하였는가? 기독교의 선교가 이렇게 3단계를 거칠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가 목사노릇을 하고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내 보내 안디옥 교회를 헬라 이방인 교회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헬라파 유대교라고 볼 수 있다. 왜? 바울과 바나바가 목사이었다. 거기에 교회의 구성도 유대인들로 주로 구성되어 있고 헬라인들도 조금 끼어 있었음직 하나 중요한 사실은 신학적인 leadership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다 유대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런식으로도 해결이 안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이 안되는 것이다. 단지 예수를 종말론을 선포한 선지자로만 보고 종말에 예수가 선포한 그 인자 그 사람의 아들을 심판자로 구원자로 보고 믿고 소개한 것이 유대 기독교라면 어떻게 그 기독교가 그러면 예수가 바로 메시야요 심판자라는 신앙으로 둔갑할 수가 있겠는가? 이 전황을 설명할 수 가 없다.

그래서 이것도 논리적인 도약이 있다. 비약이 있다. 이것도 그래서 가능하지가 않다.
이런 저런 이유로 지금까지의 종교사학파들 또 불트만과 그의 학파들이 그 사람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어려가지로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려고 제시한 것들이 다 가당치가 않다. 그래서 그 수수께기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남아 있다. 어떻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못박힌지 불과 몇년 사이에 이런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하고 만유에 군림하도록 하나님 우편에 높임바 된 주라고 고백하게 되었느냐?

그 수수께끼를 조금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런 말도 된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가 그가 죽고 죽은 후에는 선포의 대상이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사도들의 선포는 하나님 나라가 거의 안 나온다. 사도들은 예수를 선포하였다. 그 예수의 특별히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하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가 주다. 예수가 메시야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

그래서 아까 이야기한 수수께끼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예수가 그가 죽은 후 선포의 대상이 되었느냐? 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역사적인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주로 선포한 역사적인 예수가 사도들의 신앙고백과 선포한 메시야, 그리스도와는 무슨 관계가 있느냐?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역사적인 예수가 사도들이 그리스도라고 부른 것과 연결이 되느냐? 다시 말하면 역사적인 예수가 이른바 믿음의 그리스도,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연결이 되느냐?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이것을 해결할려고 할 때에 이제까지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종교사학파의 영향을 받은 여러 학자들이 해결하려고 했던 방법을 간단히 요약하였는데 모두 다 가당치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헬라의 종교학적인 것도 가당치가 않고 아까 이야기한대로 부활이라는 그 애매한 사건에 호소한 것도 가당치가 않다. 그러면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에 무슨 실마리 수수께끼를 풀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라는 가설이 성립이 된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자세히 공부를 해야 되는데 공부할 때에 항상 수수께끼인 신약신학의 과제를 염두에 두고 해야 한다.
도대체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에 그가 주다 그가 메시야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이 나올만한 무슨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을 우리가 살펴보아야 한다.

보수주의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옛날 조금 구식으로 하는 사람들은 이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그냥 뭐 믿음으로 벌서 예수가 스스로 메시야이고 하나님의 아들이고 다 가르쳤다고 전제를 하여 버린다. 그래서 이게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이것은 역사적인 우리 복음서에 기록된 역사적인 사실과 위배된다. 우리가 자세히 보겠지만 복음서 어디에 예수가 내가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가? 주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과도 어긋나지만 그런 식으로 그렇게 전제해 버리면 예수의 진정한 선포의 징정한 의미 아주 중요한 의미를 우리가 헤아리지 못한다.
또 초대 교회가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가 주다 메시야다 그리고 그가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식의 신앙고백이 발생하는데 그렇게 해서 발생한 신앙고백의 진정한 깊은 의미를 헤아리지 못한다.
공관복음서들을 중심으로 복음서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그대로 자꾸 추궁해보아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요한복음의 문서를 일단 제외하고 나중에 그런 이야기를 하겠지만 요한복음은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신학적으로 해석해 놓은 책이다. 공관복음도 많은 신학적인 해석이 들어가 있지만 요한복음의 정도가 훨씬 더 많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있는 예수의 말씀들이라든가 행적을 자세히 분석을 하면 아주 굳건한 역사적인 토대위에 서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과격한 신학자들은 요한복음에 있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은 소설이라고 역사적인 사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설교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요한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적들을 자세히 분석하면 마치 양파껍질을 벗기듯이 신학적인 해석의 층이 여러개가 있는데 그 해석의 층을 하나씩 벗기면 아주 튼튼한 역사적인 기반에 서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역사적인 기반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고 역사적인 기반을 즉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신학적으로 해석한 층을  하나하나 관찰해보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아주 의미가 있다.
그 작업은 요한복음을 배울 때 하기로 하고 주로 우리가 신학적인 해석의 층이 비교적 적어서 우리가 역사적인 기초를 좀 더 쉽게 제거할 수 있는 공관복음에 주로 의존해서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고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공관복음에 보면 우리가 아까 이야기한대로 ‘내가 주다 내가 메시야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등의 이야기를 말하지 않는다. 한 것이 예외적으로 한두번 나오는데 그것을 보면 대개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가령 너희들이 나를 주여 주여 하면서 왜 내 말은 지키지 않느냐? 내가 과연 주다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막12:1-12절에 나오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서 간접적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말한다. 그러나 직접말하지 않는다. 포도원의 주인이 자기 종들을 보낸다. 그런데 포도원 농부들이 때려서 보내고 죽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누구를 보냅니까? 그의 아들을 보낸다. 그러기 때문에 그를 어떻게 하는가? 포도원 밖으로 데라고 가서 죽인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비유로 말한 것이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말한 것이 있다. 그러나 ‘내가 곧 그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둘다 의미가 있다. 간접적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말했다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자기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도 중요하다. 왜 그러냐? 그것도 생각해 봐야 한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예수께서 직접 자기가 메시야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주이다 라고 주장한 곳이 없다. 예수께서 그런 것을 피했다.

그런데 설령 예수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다 메시야고 하면 심지어 간접적으로라도 그렇게 지적하는 부분이 우리 복음서에 있다 해도 비판적인 학자들이 그런 것들이야말로 전부 예수의 부활 후 예수가 메시야다 주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등의 신앙고백이 형성한 교회가 자기들의 신앙의 내용을 담도록 만들어 내어서 그러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어서 예수의 입속에 넣어서 마치 예수가 한 것처럼 지어냈다고 주장을 할 것이 뻔하므로....

자 아까 읽은 막 12:1-12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서 예수가 분명히 간접적으로 그러나 상당히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그런 것들은 비판적인 학자들에 의하면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이미 가지고 있는 교회가 자기들의 신앙고백을 표현하는 이야기를 하나 지어가지고 예수의 입속에다 넣었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가 미리 한 것같이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사실은 예수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지난 19세기 말부터의 대전제가 하나 있다. 특히 W.Wrede부터 시작되는 대 전제가 하나 있는데 불트만에 와서 특별히 강력해 진다. 그것은 예수가 스스로를 메시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가 자신을 메시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한대로 부활이라는 사건을 체험한 제자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당치 않다.
왜? 부활이라는 사건 자체는 예수가 메시야라는 신앙을 생성할 힘이 없다. 왜? 예수가 메시야라는 전제가 구약성경과 유대교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브라데나 이른바 종교사학파를 대표한다는 불트만도 이런 종교사학적인 기본지식을 망각하였다.
그래서 예수가 자꾸 메시야였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부활이라는 사건을 체험한 제자들이 메시야라고 주장했다고 자꾸 주장한다.

그런데 그 전제 예수가 자기 스스로를 메시야라고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이 자유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상당한 부분에 이것이 역사해오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그 전제 아래에서 보면 이 복음서에 나온 모든 자료들은 예수가 스스로를 메시야인척, 하나님의 아들인척 한 그러한 자료들은 무조건 비역사적인 것, 진짜가 아닌 가짜 예수 말로써 누가 지어낸 것인가? 교회들이 부활후 교회가 소위 post-esater 교회가 지어낸 것이라고 주장하고 무엇하기 위해 지어냈는가? 자기들의 신앙고백을 담기 위해서 지어냈다고 한다.
지어내가지고 예수의 입속에 넣어서 예수가 가르친 양 지어냈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적인 학자들에 대행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자유주의 학자들에게 당신들은 자유주의니까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해야 하겠는가? 그것이 지금가지의 상당수의 보수주의학자들의 학문의 태도이었다. 그러면 신학할 필요도 없다.

만약에 그렇게 하면 우리가 상당히 많은 중요한 것을 잃는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과 너의 주장이 맞는지 한번 검토해보자고 달라 붙어서 같이 논쟁하면 우리가 많은 것을 배운다. 그런데 그것을 포기해버리고 그냥 내 안전한 신앙의 울타리 안에서 안주할려고 하면 중요한 것을 많이 잃는다.
진짜 진정한 의미는 진리를 보수할려고 하면 이 사람들에게 겁없이 달려 들어서 진짜 너의 말이 맞는지 논쟁을 해보아야 한다. 이것이 진짜 복음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태도이다. 복음의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 그 복음을 자유주의자들이 비판한다해도 그것이 겁날것 없다. 이것이 진리인 것을 알면 그들과 맞상대하여 충분히 내가 믿는바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복음의 진리는 확신이 없을 때에 겁을 먹고 아예 손을 댈려고 하지 않는다. 담을 높이 쌓고서..이것은 엉터리 보수주의다. 그래서 보수주의 신학을 하려 하는 사람일수록 높이 담장을 쌓지 말고 자유주의자들이 한 90정도로 비판적으로 생각하면 보수주의자들은 한 250정도로 비판적으로 생각해서 1000정도로 이 사람들보다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너와 대화해서 네 말이 맞는가 보자 할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너 내 전제 나에게 같이 와서 이야기하면 안된다. 그 사람들은 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진리를 규명하려고 우리가 시도할려는 것은 우리가 그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150보 양보해서 너의 입장에서 한번 해보자. 네 말이 맞는지 해보자로 해야 한다. 그래야 토론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해서 우리 진리를 규명하면 이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다. 만약에 이 사람들의 입장을 전혀 무시하고 나의 이야기만 하면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입장에서서 그 사람의 주장하는 바를 사용하여 그 사람이 주장하는 것과 반대되는 진리를 도출해 냈을 때 그 사람을 굴복시킬 수가 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간접 기독론이라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①예수가 메시야다, 주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구절은 상당히 분명히 담고 있는 몇개가 안되는데 그 구절들을 일단 제외시킨다.
왜냐하면 예수가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으로 성육신했다고 전제하고 신앙고백을 전제하고 거기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려는 기독론을 직접 기독론이라고 하는데 여기의 문제는 중심과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것은 또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라고도 한다.
예수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육신해서 인간이 되어서 우리 죄를 위해 대속 죽음을 하신 메시야요 주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이렇게 위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인간이 된 분이라는 이렇게 기독론을 직접 기독론이라고도 하는데 예수의 신성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 직접 기독론 위로부터의 기독론에 있어서는 문제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의 성육신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다시 말하면 예수의 양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이것이 위로부터 기독론의 중심문제이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배운 조직신학의 기독론이 이렇다.
거기의 가장 중요한 과정이 성육신, 그리스도의 양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 인데 이제 이 기독론은 제쳐두라는 것이다. 이제는 간접 기독론을 사용한다.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메시야다. 라는 언급을 피했기 때문이고 또 현 신학하는 방법이 적어도 18세기의 역사주의적 영향을 받아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 역사적인 데이터, 역사적인 자료로부터의 결론을 유추해가는 신앙 고백하는 전제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구체적인 역사적인 자료 즉 그가 어떻게 생활했고 그가 어떻게 생각했느냐의 역사적인 자료에서 결론을 유추해가는 것이다.

그런 신학의 분위기에서 현대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예수가 간접적으로라도 자기가 메시야임을 하나님의 아들임을 지적하는 아까 이야기하는 그런 비유, 칭호들이 들어 있는 말들도 다 교회가 지어낸 것이라고 하므로 그렇지 않은 자료들, 예수가 초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담지 않은 자료들을 얼핏 보기에는 기독론과 아무 관계없는 자료들을 한번 살펴보므로 그런 자료들을 전부 점검 해서 결론을 귀납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것을 간접기독론,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라고 한다.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은 그 중심과제는 아까 이야기한 이 역사적인 인물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가 어떻게 해서 신앙고백의 대상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적인 존재라는 신앙고백이 나오게 되었는가를 규명하는 것이 간접 기독론의 과제이다.
어떻게 역사적인 예수가 신적인 존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이 나오게 되었느냐? 위로부터의 기독론이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양성을 설명하려는데 비해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은 어떻게 역사적인 예수가 신적인 존재로 인식이 되었느냐 이다.

그런데 간접 기독론에 있어서 방법이 하나가 있다. 그 방법을 소위 The principle of dissmilarity(비유사성의 원칙)이라고 한다.
독일어로는 Unableitbarkeit라고 한다. 유추할 수 없는 것, 무엇에서 끌어낼 수없는 것.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런 아주 비판주의적인 학자들이 소위 전승사 비판, 복음서나 신약연구의 하나의 방법론으로 양식사 비판이 있듯이 ‘전승사 비판’이 있는데 이것은 어떤 것이냐면 가령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이 전승사적으로 어떻게 발달해 가는 것을 규명하는 것이다.

 

또한 복음서에 가령 마태 마가 누가가 있는데 공관복음 연구의 주된 학설은 마가 복음이 제일 먼저 쓰여졌다는 것인데 마태와 누가가 마가 복음과 Q라는 자료를 주로 써서 썼다는 것이다. 그러면 마가복음에는 마 8:27에는 주는 그리스도이니이다 인데 마16:16에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가 나오는데 이는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한 유명한 신앙고백이다.
그러면 비교해보면 소위 두 문서설이 옳은 것이라면 막 8:27을 보고 마태가 16:16을 쓴 것이다. 그러니까 마16:16이 전승사적으로 마가 후에 쓴 것이다.

②둘째는 전승사적으로 막 8:27을 발달시킨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이다. 그러면 마태는 마가가 말하는 그리스도라는 말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해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어떤 한 말씀이나 신학적인 사상이 어?게 전승사적으로 발달되어져 가고 재해석되어져 가는가를 규명하는 것이 전승사비판이다. 그런데 이 전승사 비판을 기독론에 적용할 때에 예수의 가르침이 진짜냐 아니면 가짜 즉 교회가 지어내 가지고 예수의 입에 넣은 것이냐를 구분하는 방법으로 비유사성의 원칙을 사용한다.
아까 이야기한대로 마16:16, 막8:27을 어는 것이 진짜인지 가려야 한다.  베드로가 진짜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까지 말했느냐 아니면 주는 그리스도요 가지만 했느냐? 마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생략해 버렸느냐 아니면 마태가 없었던 것을 덧붙였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면 진위를 구분할 때에 비유사성 원칙을 사용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면 예수의 말이라고 공관복음서들 중에 보고된 것들 중에 유대교의 가르침이나 관행과 달라야 하고 초대교회의 신앙고백과 관행과 다른 것만 진짜 예수의 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대교의 사상과 관행에서도 도출할 수 없고 초대교회의 사상과 관행에서도 도출할 수 없는 것만 예수의 진짜 말로 본다. 왜 그러느냐?

공관복음서에 예수의 말로 적어져 있는데 사실은 유대교의 가르침을 좀 되받아서 예수의 말이라
고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배제해야만 한다. 또 초대교회가 자기들의 신앙고백을 이야기로 지어가지고 예수의 입속에 넣어서 마치 예수가 한 것 같이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유대교의 관습이나 관행과 같은 것이나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나 관행이나 같은 것이나 같은 것이 복음서에 예수의 가르침이나 행동으로 적어져 있으면 일단 가짜로 본다.
그리고 유대교나 초대교회의 가르침이나 관행과 같지 않은 것만 예수의 진짜 말로 본다는 것이 비유사성의 원칙이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면 바로짓이다.

그러면 예수가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고 탈역사적인(비역사적) 인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유대인이었다. 유대말 아람어를 사용하고 좌우간 유대교적인 배경에서 성장한 예수가 한 가지도 이어받은 것이 없다는 것인가? 역사속에 사는 존재가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와 관습의 한가지도 이어받은 것이 없다는 말인가? 심지어 예수가 하나님을 믿은 것 까지도 가짜라고 해야할 것이 아니겠는가? 유대교에서 하나님을 믿었으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또 초대교회가 명백히 자기들이 예수의 제자들이라고 주장을 했는데 예수에게서 아무것도 안배웠다는 말인가? 초대 교회가 예수에게서 배워서 초대교회가 계속하는 것을 현대 학자들이 초대교회가 공관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행적과 비슷하므로 이것은예수가 안한 것이라고 할 수있는 것인가? 그러면 초대교회가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는 소리이다. 예수의 이 비유사성 원칙을 문자적으로 적용하지 못한다. 적용한다는 것은 예수를 탈역사적인 존재로 예수를 추상화해버리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유사성의 원칙이 상당히 유용할 때가 있다. 아주 조심스럽게 건설적으로 사용하면 아주 유용할 때가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의 독특성을 찾아 낼때에 아주 유용하게 사용된다.
누구나 독특성이 있다.

예수가 진짜로 우리가 신앙고백하는 것처럼 훌륭한 위대한 독특한 인물이였다면 독특성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 독특성을 어떻게 찾겠는가?
바로 이 방법을 사용하면 된다. 그래서 이 비유사성 원칙이 과격파들의 손에서 아주 파괴적으로 사용이 되어가지고 예수의 말씀의 진실됨을 거의 부인해버리는 방법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이것을 경계하고 조심해야 하지만 진짜로 바로 사용하면 아주 중요한 도구가 된다. 뭐하는데? 예수의 독특성을 찾아내는데에...
따라서 비유사성의 원칙에 의한 예수의 독특성을 잘 음미해보면 예수가 스스로를 과연 어떻게 이해하였는가?의 예수의 자기 이해를 규명할 수가 있다. 이렇게 규명해 나가는 것을 간접 기독론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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