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박영규 지음
들녘
제1대 태종실록
1. 조선개국 이전의 이성계
2. 역성혁명을 통한 조선의 개국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
1388년 이성계는 명의 요동을 공략하기 위해 압록강 하류에 있는 위하도에 진을 치고 있다가 말머리를 돌려 개경을 공격했다. 개경을 함락시킨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명령한 최영을 축출하고 우왕을 폐위시켜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5만 대군이 위화도에 당도한 것은 5월이었다. 그들은 위화도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강을 건너 요동성을 공략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고려 대군이 강을 건널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장마가 시작되어 압록강 물이 엄청나게 불어났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성계는 요동성을 공격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우왕에게 요동 정벌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불가론’으로,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할 염려가 있으며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우왕과 최영이 이성계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요동 정벌을 독촉하자 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논의한 뒤 개경을 향해 회군을 단행한다.
개경으로 진격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최영 군대와 접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여 최영을 고봉현으로 유배시키고 우왕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보낸다. 그리고 조민수의 주장에 따라 창왕을 옹립한다.
고려왕조의 최후
공양왕은 즉위하자마자 폐위된 우와 창을 죽인다. 또한 창왕을 옹립했던 조민수는 대사헌 조준에게 탄핵되어 창녕으로 귀양가게 된다. 이로써 이성계 일파는 고려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창왕이 폐출되었을 때 조정 중신들 중에는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자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들의 권고를 사양하고 공양왕을 세웠다. 그런데 마지막 정적이던 조민수가 실각하자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은 가속화되었고, 마침내 3년 뒤인 1392년 7월, 이성계는 조준, 정도전,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에 힘입어 왕으로 등극하고 전왕을 공양군으로 강등시켜 원주에 유배시킨다.
이로써 고려 왕실은 34왕 474년으로 막을 내렸고,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은 원주, 간성, 삼척 등을 떠돌다가 2년 후인 1394년 이성계의 명에 의해 처형되었다.
3. 조선 태조로서의 이성계
(1335-1408, 재위 기간 1392년 7월-1398년 9월, 6년 2개월)
1392년 4월 공양왕의 스승이자 수문하시중으로 있던 정몽주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방원의 사주로 살해되자, 이성계는 마침내 그해 7월에 공양왕을 내쫓고 정도전, 조준,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를 받아 고려 국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즉위 초에는 고려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의장과 법제도 등도 고려의 것을 유지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차차 새 왕조의 기틀이 갖추어지자 정도전, 조준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호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이듬해 3월 명의 양해를 얻어 국호를 ‘조선’으로 확정지었다.
이성계는 국호를 개정한 후 수도를 옮기기로 결정하고 무학과 정도전으로 하여금 새로운 땅을 물색토록 한 뒤에 무학의 의견에 따라 한양을 새 수도로 삼는다.
1393년 9월에 시작된 궁궐 건립 공사는 1396년 9월까지 계속되었으며, 미처 궁궐이 완성되지 않은 1394년 10월에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이성계는 개국 후 법제 정비를 서둘러, 1394년에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비롯한 각종 법전이 편찬되었다. 또한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숭유 억불 정책을 시행하여 서울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전국의 사찰을 폐하는 등 억불 정책을 병행하였다.
와병 중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이성계는 몹시 상심한 나머지 그해 9월에 둘째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그 2년 뒤인 1400년, 방원이 동복형인 방간의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오르자 태조 이성계는 태상왕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방원에게 옥새를 넘겨주지 않은 채 소요산으로 떠났다가 다시 함주(함흥)에 머물렀다. 이때 방원이 문안을 위해 차사를 보내면 그때마다 죽여버려 ‘함흥차사’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방원에 대한 태조의 증오가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5.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게 된 배정
이처럼 ‘화령’과 ‘조선’이라는 두 이름이 결정되자 이성계는 1392년 11월 예문관학사 한상질을 다시 명나라에 파견하여 조선과 화령 둘 중에서 하나를 국호로 택해줄 것을 청하였다. 이때 주문사로 중국에 파견된 한상질은 수양대군을 왕위에 올려 공신이 된 한명회의 조부였다. 그는 국호 개정의 논의가 있자 주문사를 자청하여 1392년 11월 명나라로 떠나 이듬해 2월에 ‘조선’이라는 국호를 결정받고 돌아왔다.
조선이라는 국호의 결정과 관련하여 조선과 명의 입장은 사뭇 달랐다. 조선 측에서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문화와 전통을 동시에 계승한다는 의도였지만, 명은 기자조선을 의식하고 조선이라는 국호에 쾌히 동의했던 것이다. 즉 『논어』에 등장하는 은나라의 현인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하여 백성을 교화시켰으며, 이에 주나라가 기자를 조선의 제후에 봉하였다는 『한서지리지』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명의 주원장은 조선이라는 이름이 중국의 제후국임을 뜻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7. 조선 개국을 이끈 사람들
새 왕조를 꿈꾸는 혁명가들
이때 공민왕파에 속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이성계와 최영이었다. 하지만 이들 반원 세력은 다시 둘로 나뉘어졌다. 이성계는 근본적으로 변방 세력이었기에 언제나 전쟁터로 내몰렸으며, 최영은 중앙의 권력을 잡고 있었다. 이는 곧 조정의 주변 세력과 고려왕조를 중심으로 한 중앙 세력으로 구별될 수 있다. 이 주변 세력에는 이른바 성리학 이념에 바탕을 둔 개혁론자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중앙 세력에는 왕족을 비롯한 훈구 세력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양대 세력은 요동성 공략에 대한 이견으로 갈등이 절정에 이르렀고 이 때문에 이성계 일파는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중앙 세력의 수장인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위한다.
하지만 이들 개혁론자들은 다시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고 새로운 왕조를 주창해야 한다는 역성혁명론자들과,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성리학 사상을 중심으로 고려를 개혁해야 한다는 고려개혁론자들로 나눠진다. 역성혁명론의 대표격은 정도전이었고, 고려개혁론의 대표격은 정몽주였다. 이들은 모두 이색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지만 대립은 결국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역성혁명론자들의 승리로 끝난다. 이렇게 해서 세운 나라가 곧 조선이었다.
역성혁명론을 실천한 정도전
조선의 개국은 정도전의 역성혁명론의 실천임과 동시에 그가 염원하던 유교적 왕도 정치의 실습장이었다. 정도전은 꿈에도 그리던 새 왕조 주창에 성공하자 성리학적 이념에 바탕을 둔 왕도 정치의 실현을 위해 매진했다. 우선 『조선경국전』을 편찬해 새로운 법제도의 틀을 닦았으며, 도읍을 옮겨 새 왕조의 면모를 높였고, 『경제문감』을 저술하여 재상, 대간, 수령, 무관의 직책을 확립했다. 또한 명의 공물 요구가 거세지자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군량미 확보, 진법 훈련, 사병 혁파 등을 적극 추진해 병권 집중운동을 펼쳐나간다.
이러한 하부 조직에 대한 개혁 작업뿐 아니라 『경제문감별집』을 저술해 왕이 나아갈 길을 밝혔으며, 『불씨잡변』을 저술하여 숭유억불 정책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정도전은 자신을 한나라의 장량에 비유하며 조선의 개국에 자신의 공이 가장 컸음을 공공연하게 자랑하곤 했다. 그리고 한고조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해 한나라를 세웠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해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했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지나친 자부심이 결국 그의 죽음을 자초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조선에 끼친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역성혁명이론에 입각해 이성계로 하여금 조선을 개국하게 했고, 한 나라의 근본이 되는 법제를 확립하고, 민심을 수습키 위해 천도를 단행했다. 그뿐 아니라 조선의 개국 이념인 유교사상을 사회 속에 확립시켰고,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 정치를 내세워 왕의 바른 길을 가르쳤다. 또한 명의 공물 요구가 지나치자 요동 정벌론으로 맞서며 정치적 독립을 실행했고, 병권 집중화운동으로 군권을 안정시켰다.
장수를 군왕으로 이끈 무학
무학은 원에서 돌아온 뒤 나옹스님을 찾았다. 그때 나옹은 공민왕의 왕사로 봉직하고 있었다. 나옹은 무학을 전법제자로 삼았지만 나옹의 제자들은 이를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옹은 문도들의 반대로 그에게 의발을 전수하지도 못하고 전법제자임을 알리는 시를 한 수 지어준다.
나옹의 제자들이 무학을 배척했던 것은 우선 무학이 천민 출신이라는 것이었고, 다음으로는 보수적인 자신들의 성향 때문에 무학의 선진적인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학은 공양왕의 왕사 책봉도 받아들이지 않고 나옹의 곁을 떠나 오랫동안 토굴에서 수도 생활에만 전념했다.
하지만 이성계를 만난 뒤부터 그의 삶은 달라진다. 무학은 새로운 왕국의 건설을 꿈꾸는 혁명가임과 동시에 새 왕조의 군왕이 될 이성계의 충실한 인도자가 된다. 사실 그가 이성계를 만난 경위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조선 중기 휴정이 지은 『석왕사기』에 따르면 이성계가 그를 찾아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무학은 천문지리와 음양도참설에 밝았고, 파자점과 해몽술에 능했던 모양이다. 그를 찾아온 이성계가 문(問)자를 짚어보이자 어느 쪽으로 보나 군(君)이라고 하며 그가 장차 임금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는가 하면, 꿈에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왔다는 이성계의 말을 듣고 그것은 임금 왕(王)자라고 하여 후에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무학은 태조의 왕사로 있으면서, 조선의 안정을 위해 새로운 왕도를 정하는 일과 왕궁을 건축하는 일에 가담하는 등 노년의 거의 전부를 조선의 건설에 쏟았다.
하지만 조선의 중심 세력은 성리학자였고, 그것은 곧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정치로 이어졌다. 무학은 이런 현실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소임이 끝났음을 알고 조용히 왕사직을 물러나 수행에만 전념하다가 1405년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것이 조선 개국의 주체이면서도 전혀 그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았던 유일한 인물, 무학의 선택이었다.
8. 『태조실록』 편찬 경위
『태조실록』은 태조가 즉위한 1392년 7월17일부터 1398년 12월말까지 약 6년 6개월간에 있었던 정치, 외교, 국방,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이 연월일 순에 따라 편년체로 기술되어 있다. 태조는 ‘제1차 왕자의 난’ 직후인 1398년 9월 5일에 정종에게 양위하였기에 그의 재위 기간은 실제로 이때까지지만, 『태조실록』에는 그 해 말까지를 수록 범위로 잡고 있다.
제2대 정종실록
1. 태조의 세자 책봉과 왕자들의 반발
태조는 첫째부인 한씨 소생의 장성한 왕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강씨 소생인 여덟째아들 방석을 세자에 책봉했다. 1392년 8월, 그때 방석의 나이 불과 11세였다. 혈기왕성했던 한씨 소생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처사에 분개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1392년 7월, 태조가 조선을 개국하고 한 달 뒤에 소년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을 때 장남 방우의 나이는 이미 불혹을 바라보는 39세였고, 방석의 세자 책봉에 대해 가장 불만이 많았던 정안군 방원의 나이는 26세였다. 방원은 맏형인 방우를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태조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방원은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에게 개경의 최영 부대를 쳐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정몽주를 살해해 개국 반대 세력을 제거했는가 하면, 왕대비 안씨를 강압하여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등위시킨 주인공이었다. 따라서 공적을 따진다면 세자 자리는 당연히 방원에게 돌아가야 했지만, 조선 개국 후 그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왕후 강씨와 정도전 등 개혁파의 배척으로 군권을 상실하고 개국 공신 책록에서도 제외당하는 굴욕을 맛보아야 했다. 그런 가운데 세자 자리마저 강비의 소생인 방석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2. 제1차 왕자의 난
1398년 무인년 8월 25일, 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 왕자들이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 반대파 세력을 불의에 습격하여 살해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동복형 방번을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제1차 왕자의 난’ ‘방원의 난’ 또는 ‘무인정사’, ‘정도전의 난’이라고 한다.
조선 건국 이후 개국 공신들의 지위는 급격히 상승되었다. 1392년 의흥삼군부 설치를 계기로 하여 정도전을 중심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병권 집중운동과 중앙 집권화정책은 권력 구조면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개국 공신 중에서 정도전의 지위가 크게 부상되었고 여타의 훈신과 왕실 세력 그리고 개국 핵심 세력인 무장 세력들은 정치 일선에서 소외되기 시작했다.
정도전의 이러한 정치관은 신권 중심의 왕정이라는 점에서 왕족들에게는 대단히 위협적인 내용이었다. 이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게다가 정도전은 세자 방석과 왕후 강씨를 끼고 있었다.
조선 개국 이후 방원은 정치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지만 정계 복귀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중 1396년 최대의 난적이자 세자 방석과 정도전의 배후 세력인 강비가 병으로 죽자 방원의 정계 복귀 노력은 한층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그간 꾸준히 병권 집중운동을 벌여오던 정도전 일파는 1398년 이른바 진법 훈련 강화를 내세우며 왕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방원과 정도전의 대립은 불가피해졌다. 정도전은 왕족들이 사병을 통수하고 있는 한 병권이 정부로 모아질 수 없다고 보았고, 방원은 사병을 잃을 경우 완전히 힘을 빼앗기고 말 처지였다. 말하자면 사병은 방원의 마지막 보루였던 셈이고, 정도전은 사병만 해체하면 정적의 기세를 완전히 제거하는 셈이었다.
3. 정종의 등극과 퇴위
(1357-1419, 재위기간 1398년 9월-1400년 11월, 2년 2개월)
1399년 3월에는 집현전을 설치하여 장서와 경적의 강론을 담당하게 했으며, 5월에는 태조 때 완성된 『향약제생집성방』을 편찬하였고, 이듬해 6월에는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노비의 변속을 관리했다.
정종은 재위시에 정무보다는 격구 등의 오락에 탐닉했는데 이는 그 나름의 보신책이었다. 이런 보신책 덕분에 정종은 방원과의 우애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14여년 11월 마침내 방원에게 왕좌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상왕으로 물러나는 것은 그와 그의 정비 정안왕후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목숨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사에는 정종에게 왕위를 내주라고 권고한 사람은 정안왕후 김씨라고 한다. 김씨는 정종이 왕위를 더 오래 유지하고 있다가는 방원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자리에서 정종에게 그만 물러날 것을 권고했고, 정종 역시 그녀의 생각과 같았기에 권고받은 바로 다음날 왕위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그만큼 정종과 정안왕후는 잠자리에서조차 죽음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동생 방원을 두려워했는데, 이는 실권없는 왕과 왕후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제3대 태종실록
1. 제2차 왕자의 난과 방원의 세제 책봉
‘제2차 왕자의 난’으로 방원에 대한 반대 세력은 거의 소멸되었고 방원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견고해졌다. 결과적으로 방간의 난은 방원의 왕위 계승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난이 평정된 뒤 조정 내의 방원 세력은 방원의 왕위 계승권 확보를 위해 전력을 쏟았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방원의 심복 하륜의 주청으로 정종은 상왕 태조의 허락을 얻어 1400년 2월에 방원을 세제로 책봉하고 이어 11월에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와 같이 ‘제2차 왕자의 난’은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왕자들 간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세력 판도는 물론 사회적인 영향력도 없었다. 오히려 모든 권력이 방원에게 집중되면서 왕권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2. 태종의 등극과 조선의 개혁작업
(1367-1422 재위 기간 1400년 11월-1418년 8월, 17년 10개월)
방원은 세제로 책봉되자 병권을 장악하고 동시에 중앙 집권의 틀을 다져나갔다. 그 일환으로 사병을 혁파하고 군사를 삼군부로 집중시켰으며,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쳐 정무를 담당하게 했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쳐 군정을 맡도록 했다.
이처럼 방원은 세제 시절에 이미 왕권 안정책을 마련하고 고려 정치 문화의 잔재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정무와 군정을 분리시켰으며, 권문세가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비변정도감을 실시해 노비의 변속을 관리하기도 했다. 그리고 1400년 11월 마침내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왕으로 등극하자 왕권 강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에 한층 박차를 가했다. 한편으로는 중앙 제도와 지방 제도를 정비하여 고려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고, 군사 제도를 정비해 국방을 강화하고 토지, 조세 제도의 정비를 통해 국가 재정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세제 시절에 이미 손댄 바 있던 노비 제도를 새롭게 정비하고, 신문고 등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자유롭게 청원케 하는 등 새로운 사회 정책을 실시하여 민심을 수습하였다.
태종은 교육과 과거 제도 정착에도 역점을 두었다. 개국 당시 유학자들은 대부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거나 죽임을 당했는데, 이는 대명외교에 어려움을 초래했고 조선의 앞날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권근을 책임자로 하여 유학과 경학에 밝은 자를 엄선해 성균관과 오부의 학생들을 맡겼으며, 기술 교육을 위해 10학을 설치하고 제조를 두었다.
대외 정책 또한 안정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명에 대해서는 상국의 예를 갖춰 조공을 하는 대신 서적, 약재, 역서 등을 수입하여 실리를 취하는 동시에 변방을 안정시켰다. 왜인에 대해서는 왜인범죄논결법을 마련해 왜인들의 범죄 행위를 다스렸고, 부산포와 내이포에 도박소를 두어 왜인의 무역을 합법화 시키고 왜인들의 병비 정탐을 감시했다.
이 밖에도 수도를 개성에서 다시 한양으로 옮겼으며, 선원록을 정비하여 비 태조계를 왕위 계승에서 제외시켰고, 호구법을 제정하고 호패법을 실시하여 호구와 인구를 파악하였다.
태종은 정비 원경왕후를 비롯 12명의 아내에게서 12남 17녀를 두었다. 그의 능은 헌릉으로 현재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소재하고 있다. 헌릉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이 함께 조성되어 있는 쌍릉이다.
3. 태종의 가족들
원경왕후 민씨(1365-1420)
민씨는 4남 4녀를 낳았으며 양녕, 효령, 충녕, 성녕 등의 왕자들과 정순, 경정, 경안, 정선 등의 공주가 그녀의 소생이다.
그녀의 능은 헌릉으로, 태종의 묘와 함께 쌍을 이루며 현재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효령대군(1396-1486)
그는 효성과 우애가 지극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여섯 왕을 거치며 91세까지 살았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여섯 왕의 연고존친으로서 극진한 존경과 대우를 받았으나, 불교를 숭상하고 선가에 적을 두면서 많은 불사를 주관하였기 때문에 유생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왕들의 보호 아래 꾸준히 불교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시호는 정효이다.
4. 태종 시대의 주요 5대 사건
거북선 개발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문헌상에 나타난 것은 『태종실록』부터이다.
태종실록의 태종 13년에 보면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가 해전 연습을 하는 모양을 보았다’라는 구절이 있다. 또 태종 15년에는 좌대언 탁신이 ‘거북선의 전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더라도 적이 해칠 수 없으니 결승의 양책이라 할 수 있으며, 거듭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로 갖추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가 기록되어 있다.
신문고 설치
신문고는 시정을 살피고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유롭게 청원할 수 있도록 한 제도였다.
태종은 훈신과 재상이 중심이 된 정치를 극복하고 백성의 안정된 삶을 통한 국가의 안정과 국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를 구현하려고 했다. 신문고는 태종의 이런 정치사상의 일환으로 시행된 제도이며, 1401년 8월 송나라의 등문고를 본따 설치되었다.
한양으로 다시 천도
태종대에는 이 사건들 외에도 호구법을 제정하여 호패법을 실시하였으며, 포백세와 호포세를 폐지했고, 환자 치료를 위해 처음으로 동녀를 선발하여 부 인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또한 십학을 설치하고 사부학당을 건립했으며, 『동국사략』을 편찬하고 『고려사』를 개수했다.
제4대 세종실록
1. 폐위되는 양녕과 세자로 책봉되는 충녕
태종의 양녕에 대한 불신감은 급기야 세자를 폐하는 극단적인 조치로 나타났다. 1418년에 일어난 이 폐세자 사건이 곧 네 번째 선위 파동으로, 이때 황희 등 조정 대신들 중 일부는 폐세자를 반대하다가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양녕이 1404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14년 만에 폐위된 것은 순전히 태종의 뜻이었다.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업적과 안정된 왕권을 양녕이 제대로 이어나갈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양녕의 폐세자 사건과 관련하여 야사에는 실록의 기록과는 다른 이야기가 전해온다. 양녕은 태종의 마음이 충녕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고의적으로 왕세자에게 걸맞지 않는 행동을 일삼아 태종의 진노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또 일설에는 양녕이 부왕 태종과 모후가 충녕에게 세자 자리를 내어줄 방안을 모색하는 소리를 엿듣고 그때부터 미치광이 짓을 했다는 말도 있다.
어쨌든 양녕은 자신의 스승이 처음 오는 날 그 앞에서 개 짖는 시늉을 했는가 하면, 공부 시간에도 동궁 뜰에 새덫을 만들어 새잡기에만 열중했고, 또 조정의 하례에 참석하기 싫어 꾀병을 부리기도 했다. 이 밖에도 양녕의 광태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급기야는 궁궐을 월장해 기생을 찾는가 하면 남의 집 소실을 낚아채기도 했다고 한다.
2. 세종의 왕도 정치와 조선의 영화
(1397-1450, 재위 기간 1418년 8월-1450년 2월, 31년 6개월)
태종은 ‘충녕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여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면서 세자에 책봉했다. 이처럼 태종은 충녕의 학문과 능력을 높게 평가하였기 때문에 일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충녕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교 정치와 찬란한 민족 문화를 꽃피웠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 모범이 되는 성군으로 기록되었다.
세종 대는 태종이 이룩해놓은 왕권의 안정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기틀을 확립한 시기였다.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 사업이 이루어져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훈민정음의 보급, 농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 의약 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민족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다져나갔다.
세종 시대의 권력 구조나 정치적 양상은 세종 19년(1437년)을 분수령으로 두 시기로 구분된다. 세종은 이때를 전후하여 국가 기강의 중심이었던 육조직계제를 의정부서사제로 변혁하여 왕에게 집중되어 있던 국사를 의정부로 넘기는 한편, 세자로 하여금 서무를 재결하도록 하는 등 이전에 비해 더욱 유연한 정치를 펼쳐나갔다 또 언관과 언론에 대한 왕의 태도도 이전에 비해 훨씬 부드러워 졌으며, 이들에 대한 탄압이나 징계는 거의 없어졌다.
이와 같은 정치적 분위기는 일차적으로 유교 정치의 진전에 의한 것이었다. 집현전을 통하여 배출된 많은 유학자들에 의해 유교적 제도의 정리가 가능했고 편찬 사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면서 유교 정치의 기반이 안정되었다. 그래서 강력한 왕권 중심의 정치 형태인 육조직계제에서 의정부서사제로 이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 체제의 변화는 한편으로는 세종의 건강 문제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세종은 젊은 시절부터 소갈증(당뇨병)을 앓고 있었기에 정무가 과다한 육조직계제는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종 3년(1421년) 3월에 확대, 개편된 집현전은 단순한 학문적 사업만을 위한 기관이 아니라 인재의 양성과 새로운 문화의 정착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세종은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 그리고 이를 지속하기 위한 정책적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에 따라 집현전은 젊고 유망한 학자들이 채용되었고, 그들에게는 여러 가지 특전 이 주어졌다.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생활비를 지원하는가 하면 집현전에 소속된 관원은 경연관, 서연관, 시관, 사관 등의 직책을 겸하였고, 중국의 옛 제도를 연구하거나 각종 편찬 사업에 동원되기도 했다. 세종은 이들 관원 중에 학술에만 몸담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다른 관직에 이직시키지 않고 집현전에만 10년 또는 20년씩 머물도록 해주었다.
집현전 인재들은 주로 책 편찬 사업과 훈민정음 연구 사업에 투여되었다. 그리하여 민간에서 쓰던 고어와 외국의 언어를 연구하여 훈민정음 체계를 완성 했으며, 『농사직설』을 비롯한 실용 서적과 역사, 법률, 지리, 문학, 유교, 어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학문적 성과는 과학 기술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이 설치되어 ‘혼천의’ 같은 천체 관측 기계를 만들었으며, 해시계인 앙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 세계 최초의 강우량 계측기인 측우기 등을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세종 대가 이와 같은 빛나는 유산과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을 훌륭하게 보필한 신하들과 학자들의 노력도 간과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도 세종이 이들의 보필을 수용할 만한 인격과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유교와 유교 정치에 대한 깊은 소양, 다양하고 깊은 학문적 성취와 탐구력, 역사와 문화에 대한 통찰력과 판단력, 중국 문화에 경도되지 않는 주체성과 독창성, 의지를 관철시키는 추진력과 신념, 백성과 신하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인간애 등을 고루 간직했던 세종의 뛰어난 인성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학문적 업적을 일구어내는 구심체였다.
천부적인 능력과 뛰어난 인성 그리고 넓은 덕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의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기틀을 닦아놓은 세종은 1450년 2월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3. 세종의 가족들
소헌왕후 심씨(1395-1446)
소헌왕후 심씨는 1446년 52세로 죽었으며, 그녀의 능은 영릉으로 세종이 승하한 뒤 합장하여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 되었다.
세종은 조선의 역대 왕들 중에 아들을 가장 많이 둔 왕이었다. 18명의 아들 중에 정비 심씨의 소생이 8명, 영빈 강씨의 소생이 화의 1명, 신빈 김씨의 소생이 계양, 의창, 밀성, 익현, 영해, 담양 등 6명, 혜빈 양씨의 소생이 한남, 수춘, 영풍 등 3명이었다. 이들 중 소헌왕후 소생인 향과 수양은 등극하여 문종과 세조의 묘호를 얻는다. 이들 중 향과 수양은 문종, 세조 편에서 다루기로 하고 정비 소생의 나머지 여섯 아들의 삶을 아래에 약술한다.
안평대군(1418-1453)
1452년 단종이 즉위한 후, 수양대군은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오고 난 뒤 황표정사를 폐지하였다. 안평은 이에 반발하여 황표정사 회복에 주력했으나 이듬해 계유정난으로 황보인, 김종서 등이 살해된 뒤 자신도 강화도로 귀양갔다가 교동으로 옮긴 후 36세를 일기로 사사되었다.
안평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 서, 화 모두에 능해 삼절이라 불리었고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명성을 떨쳤다. 그의 서풍은 원나라의 문인인 조맹부에게서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개성을 강조해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조선 전기에는 그의 서풍이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4. 천문학 발전을 통한 조선의 과학 혁명
다른 나라의 해시계가 단순히 시간만을 알 수 있게 해준 데 반해 앙부일구는 바늘의 그림자 끝만 따라가면 시간과 절기를 동시에 알게 해주는 다기능 시계였다. 또한 앙부일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구로 된 해시계였다. 앙부일구가 반구로 된 점에 착안해서 그 제작 과정을 연구해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가 발견되는데, 그것은 당시 사람들이 해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해시계는 이처럼 조선의 시계 문화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다주었지만 기능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해시계는 해의 그림자를 통해 시간과 절기를 알게 해주는 것이었기에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이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시계가 물시계였다.
물시계로는 자격루와 옥루가 있었다.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게 하는 자동시보장치가 달린 이 물시계는 일종의 자명종이다. 1434년 세종의 명을 받아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고안한 자격루는 시, 경, 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종, 북, 정을 쳐서 시간을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1437년에는 장영실이 독자적으로 천상시계인 옥루를 발명해 경복궁 천추전 서쪽에 흠경각을 지어 설치했다. 옥루는 중국 송, 원 시대의 모든 자동시계와, 중국에 전해진 아라비아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한 끝에 고안한 독창적인 것으로서 당시의 중국이나 아라비아의 것보다도 뛰어났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해시계, 물시계와 더불어 천문학의 발전으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뜻깊은 발명품은 측우기였다. 측우기는 1441년에 발명되어 조선시대의 관상감과 각 도의 감영 등에서 강우량 측정용으로 쓰인 관측장비로, 현대적인 강우량 계측기에 해당된다. 이는 갈릴레오의 온도계 발명이나, 토리첼리의 수은기압계 발명보다 200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기상 관측 장비였다. 측우기의 발명으로 조선은 새로운 강우량 측정 제도를 마련할 수 있었고, 이를 농업에 응용하게 되어 농업상학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룩하였다. 이 측우기의 발명으로 정확한 강우량을 파악할 수 있게 되어 홍수 예방에도 도움이 되었다.
천문관측대,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 세계 과학사에 빛나는 이와 같은 업적들은 세종의 뛰어난 지도력 없이는 탄생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학문은 물론이고 기술적인 측면에도 지대한 관심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세종은 측우기의 제작에 왕세자를 직접 참여시키는 열성을 보였는가 하면, 출신 성분에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학자와 기술자를 등용하기도 했다.
5. 세종 시대를 빛낸 사람들
희대의 명재상 황희와 맹사성
조선사를 통틀어 황희와 맹사성에 비견할 만한 뛰어난 재상이 또 있을까. 이들은 세종 대의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융성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왕이 아무리 뛰어난 자질과 인성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 왕을 보필하고 이끌어줄 신하가 없다면 왕도 정치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세종 시대는 세종이라는 마부와 황희와 맹사성이라는 두마리 말이 끌고가는 쌍두마차에 비유할 수 있다. 이들은 둘 다 철저한 선비이자 뛰어난 재상이었고 관리의 모범이 되는 청백리였다.
1363년에 개성에서 태어난 황희는 불과 14세 때 음보로 복안궁녹사가 되었고, 21세에 사미시에, 23세에 진사시에, 4년 뒤인 1389년 27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에는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충청도 온양 출신인 맹사성 역시 27세가 되던 해인 1386년에 처음으로 문과 을과에 급제해 관직에 올랐다. 맹사성은 1360년 태생이므로 황희보다는 세 살이 많고 관직에도 3년 먼저 올랐다.
황희는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였지만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후 태조와 태종의 신임을 받으며 성장을 거듭했다. 실록에 의하면 태종은 ‘황희는 공신은 아니지만 공신 대접을 하였고,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하였고, 하루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할 정도로 특별히 그를 신임했다. 그는 태종 시절에 이미 이조판서에 올라 있었다.
맹사성 역시 조선 왕조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었다. 황희가 고려 망국 후에 은거한 것과는 달리 맹사성은 태조로부터 예조의랑직을 제수받는 등 관직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승진을 거듭해 1408년에는 사헌부 수장 대사헌의 직책에 올랐다.
황희가 분명하고 정확하고 강직했다면,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럽고 섬세했다. 또한 황희가 학자적 인물이었다면 맹사성은 예술가적 인물이었다. 그래서 황희는 주로 병조, 이조 등 과단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고, 맹사성은 예조, 공조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다. 이들의 이러한 다른 일면은 세종의 왕도 정치 구현에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세종은 부드러움이 필요한 부분은 맹사성에게 맡기고, 정확성이 요구되는 부분은 황희에게 맡겼다. 따라서 황희는 변방의 안정을 위해 육진을 개척하고 사군을 설치하는 데 관여하기도 했고,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이에 반해 맹사성은 음률에 정통해서 악공을 가르치거나, 시험 감독관이 되어 과거 응시자들의 문학적, 학문적 소양을 점검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 그러나 맡은 역할과 성격을 떠나 곧고 청렴하며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것만큼은 두 사람의 공통점이었다.
과학혁명의 주창자 장영실
장영실은 발탁된 뒤 곧장 중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아마 세종의 정책에 따른 기술 학도들의 견문 유학이었을 것이다. 중국에서 유학중 장영실은 천문기기에 대한 식견을 가지게 되었고 귀국해서는 궁중 기술자로 본격적인 기술 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뛰어난 능력 덕분으로 이미 세종 5년에 노비 신분에서 면천되었으며, 상의원별좌라는 직책도 부여받았다.
중국 유학에서 돌아온 후 그가 가장 먼저 만든 것은 물시계였다. 이는 중국 것을 본 따 만든 것으로 완전한 자동 물시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물시계의 개발로 그는 정5품 벼슬에 올랐고 이후 본격적인 천문학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다.
이 자격루는 장영실이 김빈과 함께 만든 것으로 중국과 아라비아의 것을 비교 연구하여 새로이 고안한 것이었다. 장영실은 자격루를 만든 공로로 대호군으로 승진하였고, 이에 보답하기 위해 다시 태양 모양을 본떠 만든 천상시계와 물시계인 옥루를 만들어 궁중에 바쳤다. 이 옥루 역시 완전한 자동시 계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보적인 발명품이었다.
장영실은 해시계, 물시계의 제작 이외에도 금속활자 주조 사업에도 참여해 조선시대의 활판인쇄술의 대명사인 갑인자와 그 인쇄기를 완성했다.
이처럼 장영실은 과학 발전에 일생을 바친 조선시대 최고의 기술과학자였다. 천체의 원리뿐 아니라 자연 동력의 원리에도 밝았으며, 기계 제작에도 뛰어난 면모를 과시하며 세종시대의 찬란한 과학혁명을 이끌어낸 선구자였다. 하지만 그의 노후 삶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고 있지 않다. 다만 『동국여지승람』에 ‘아산의 명신’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노년을 아산에서 보내다가 거기서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농사직설』을 집필한 정초
한편 변호문의 도움을 받아 정초가 쓴 『농사직설』은 그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세종은 당시 농사법의 개량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농민들을 지도할 수 있는 실용 농서가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 중국의 농서인 『농상집요』, 『사시찬요』 등과 우리나라 농서인 『본국경험방』이 있긴 했지만 그 책으로 농민들을 계몽하기에는 무리였다. 내용이 구체적이지 못하고 농업 방식에서도 뒤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농사직설』은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한 책이었다.
『농사직설』은 무엇보다도 곡식 재배에 중점을 둔 농서였다. 곡식 재배에 필요한 수리, 기상, 지세 등의 환경 조건도 상세히 기술하여 농민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곡식을 재배하면 유리한지를 알 수 있게 했다. 정초는 이 책을 짓기 위해 실제로 각 도 농민들의 재배법을 확인하는 한편, 농민들의 경험담을 기술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책은 세종의 명에 의해 편찬되어 각 도의 감사와 주, 부, 군, 현 및 장안의 2품 이상 관리들이 모두 소장하게 되었다.
이후 『농사직설』은 판을 거듭하며 조선 농업의 기본서로 자리매김했으며, 성종 때 간행된 내사본은 일본으로 전달돼 일본 농업의 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 뒤에도 『산림경제』, 『임원경제지』 등 기타 여러 농서에 그 내용이 인용되기도 했다.
대마도를 정벌한 이종무와 육진을 개척한 김종서
튼튼한 국방력 없이 국가의 안녕을 기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종 시대의 영화 역시 예외는 아니다.
세종 시대의 국방을 담당하였던 대표적인 인물은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의 노략질을 일소시킨 이종무와, 육진을 개척하여 변방의 안정을 정착시킨 김종서였다. 이들 두 사람은 서로 30년의 격차를 두고서 이종무는 세종 전반기, 김종서는 후반기의 국방을 도맡았다.
이종무는 1360년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던 그는 1381년 아버지와 함께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한 공으로 무인으로 등용되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왜구 격퇴에 앞장섰으며, ‘제2차 왕자의 난’ 때에는 방원의 편에 가담하여 방간의 군사를 괴멸시킴으로써 좌명공신 4등에 녹훈되었다. 이후 그는 좌군절제사, 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세종 즉위 다음해인 1419년에는 삼군도체찰사에 올랐다. 이 해 5월 왜선 39척이 비인현에 침입하여 병선을 불태우고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조정은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공략하기로 결정하고, 이종무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이종무가 휘하에 9명의 절제사를 거느리고 정벌길에 오른 것은 한 달 뒤인 1419년 6월 19일이었다. 이때 동원된 병선은 모두 227척, 군사는 1만7천여 명이었고, 식량은 65일분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종무 부대는 이튿날 대마도에 진입하여, 129척의 선박을 노획하여 쓸 만한 20여 척만 남기고 모두 불태웠으며, 가호 약 2천 호를 소각하고, 적군의 수급 114급을 참수했다. 정벌 과정에서 좌군절제사 박실이 이끄는 부대가 복병을 만나 한때 고전하기도 했으나 왜구측의 평화협정 제의로 그 해 7월 3일 거제도로 철군했다.
김종서는 이종무보다 30년 뒤인 1390년에 태어났다. 이종무가 고려 망국 세대라면 김종서는 이른바 조선 개국 세대였던 셈이다. 흔히 무신으로 알려져 있는 김종서는 16세 되던 해인 149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415년에는 상서원직장을 지냈으며 태종실록 편찬을 주관한 세종 시대의 대표적인 문신이었다. 이후 광주판관, 이조정랑 등을 거쳐 1433년 함길도 도관찰사로 육진 개척에 투입된 그는 약 10년 가까이 육진 개척에 전념하여 두만강을 국경으로 확정짓는 성과를 올렸다.
김종서의 육진 개척은 서북 방면의 사군 설치와 아울러 세종의 훌륭한 업적의 하나로 평가된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는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으로 북계를 확정할 수 있었고, 고려시대 이후 끊임없이 계속되던 여진족의 내침으로부터 한동안 벗어날 수 있었다.
육진 개척 후 김종서는 경상 3도순찰사, 의정부 우찬성 등을 거쳐 문종 대에는 좌의정에 올라 대단한 위세를 떨쳤지만, 1452년 단종 원년에 수양대군에 의해 살해되어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6. 『세종실록』 편찬 경위
이때 간행된 『세종실록』은 충주, 전주, 성주의 사고에 봉안되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본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으며, 이 사고본을 바탕으로 1603년부터 1606년에 걸쳐 『태종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각각 3부를 다시 간행하였다. 이 당시 최종 교정본을 포함하여 전주사고본과 함께 총 5부를 춘추관, 강화도 마니산,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 등에 보관했다. 그 뒤 이괄의 난, 병자호란 등의 난을 겪으면서 춘추관실록이 소실되고 일부 실록이 파괴되었으나 다시 복구하여 인조대 이후 실록은 정족산(강화도), 태백산, 적상산(전북 무주), 오대산 사고에 보관되었다. 그 뒤 일제 강점기인 1929년부터 1932년까지 경성제국대학에서 태백산본을 저본으로 하여 영인본을 만들었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55년부터 1958년까지 영인본을 보급하였다.
『세종실록』은 1권부터 127권까지는 편년체로 구성되어 있으나 128권에서 163권까지는 지(志)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구성을 하게 된 이유는 세종의 재위 기간이 길고 사료의 양이 방대하여 편년체로는 도저히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종 시대의 세계 약사
세종 시대에 중국의 명은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했으며, 유럽은 1419년 종교개혁 문제와 관련하여 신성로마제국에서 후스전쟁(보헤미안전쟁)이 발발한 이래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대부분의 국가들이 30년전쟁, 백년전쟁, 도시전쟁 등으로 전운에 휩싸여 있었다. 그 전란의 와중에서 프랑스의 잔다르크가 화형되었으며 독일에서는 1445년에 쿠텐베르크의 인쇄본이 간행되었다.
제5대 문종실록
1. 30년의 세자 생활과 8년의 섭정
세종은 우선 세자가 섭정을 하는 데 필요한 기관인 첨사원을 설치하교 그곳에 첨사, 동첨사 등의 관원을 두었다. 첨사원은 고려 때 동궁의 서무를 관장하는 기관이었던 첨사부 제도를 본 딴 것으로 이는 충렬왕 이후(1276년)에 폐지된 제도였다. 그런데 세종이 이 제도를 임시로 도입한 것은 세자가 섭정을 할 경우 승정원과 편전을 대신할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첨사원의 설치와 함께 세자 향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세자의 나이 29세 때였다. 세종은 이 섭정 기간 동안 세자로 하여금 왕처럼 남쪽을 향해 앉아 조회를 받도록 하는 한편, 모든 관원은 뜰아래에서 신하로 칭하도록 하였고, 또한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모든 서무는 세자의 결재를 받도록 했다.
세자 향은 1442년부터 1450년까지 8년간의 섭정을 통해 정치 실무를 익혔고, 여러 가지 치적들을 남기기도 했다. 때문에 세종 후반기의 정치 치적은 세자 향의 업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2. 문종의 짧은 치세와 왕권의 위축
(1414-1452, 재위기간 1450년 2월-1452년 5월, 2년 3개월)
이렇듯 언관의 언론이 활성화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언로를 더 넓히는 정책을 폈다. 그래서 6품 이상의 신하들에 대해서는 윤대(돌아가면서 왕을 만나는 것)를 허락해 벼슬이 낮은 신하들의 말에 대해서도 경청했다. 이와 같이 관대한 정책을 기본 통치 방향으로 설정한 문종은 우선적으로 『동국병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대학연의주석』 등을 편찬하게 했다. 이는 곧 문종이 역사와 병법을 정리해 사회 기반을 정착시키고 제도를 확립하려 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고려사』와『고려사절요』 등을 정리한 것은 단순한 전 왕조의 역사를 정리한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정치, 제도문화의 정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문종은 세자 시절부터 진법을 편찬하는 등 군정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런 연장선상에서 보면 『동국병감』의 편찬은 병법의 정비와 군정의 안정을 위한 조치였다 그는 즉위 초에 스스로 군제 개혁안을 마련해 총 12사로 분리돼 있던 군제를 5사로 집약시키고, 군제상의 세세한 부분들을 개선, 보완하기도 했다.
문종은 이렇듯 유연함과 강함을 곁들인 정책을 실시했으나, 건강 악화로 재위 2년 3개월 만에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야만 했다. 이때가 1452년 5월이었다.
문종은 어린 나이에 세자에 책봉되었기에 일찍 혼인했다. 그래서 첫 번째 빈궁으로 김씨, 두 번째로 봉씨가 있었으나 둘 다 과실이 있어 폐위되었다. 순빈 봉씨가 폐출되자 당시 양원에 진봉되어 있던 권전의 딸이 세자빈으로 정해졌는데 그녀가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다.
현덕왕후 권씨는 1441년 세자빈 시절에 단종을 낳고 3일 만에 죽었는데, 그녀의 원혼이 수양대군이 왕권을 찬탈한 후에 궁중에 나타나 그의 가족들을 괴롭혔다는 얘기가 전한다. 그래서 세조의 큰아들 덕종이 그녀의 원혼에 시달려 죽었으며, 세조 역시 꿈에서 그녀가 뱉은 침 때문에 피부병에 걸려 고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제6대 단종실록
1. 비운의 왕자 홍위
세종은 홍위를 무척 아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홍위를 세손으로 책봉한 그는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신숙주 등의 집현전 소장 학자들을 은밀히 불러 세손의 앞날을 부탁했다. 세종은 자신도 이미 병세가 악화돼 죽음을 얼마 앞두지 않은 처지였고 세자 향 역시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세종이 이런 간곡한 부탁을 한 것은 바로 혈기왕성한 자신의 아들들 때문이었다. 특히 둘째아들 수양은 어릴 때부터 야심이 크고 호기가 많은 인물이었다. 죽음을 앞둔 연로한 왕은 어린 세손이 그들 대군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갈 일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1450년,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하자 홍위는 세손에서 세자로 책봉된다. 그 때 홍위의 나이 열 살이었다.
조선 제5대 왕으로 등극한 문종은 세종이 예상한 것처럼 오래 살지 못하고 즉위 2년 3개월 만에 어린 세자를 부탁한다는 고명(임금이 신하에게 유언으로 뒷일을 부탁하는 일)을 남기고 병사하고 말았다. 이때 홍위의 나이 l2세였다.
2. 어린 단종의 즉위와 왕위를 찬탈하는 왕숙
(1441-1457, 재위 기간 1452년 5월-1455년 윤6월 3년 2개월)
문종과 현덕왕후 사이에 태어난 단종은 조부인 세종의 칭찬이 자자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명석했다. 세손 시절에는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들의 지도를 받았고, 왕세자로 책봉된 후에는 이개와 유성원이 그의 교육을 맡았다. 단종은 즉위하긴 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정사를 돌볼 수 없었기에 모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가 도맡아 했으며, 왕은 단지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 데 그쳤다. 인사 문제에서도 대신들은 황표정사 제도를 썼는데, 이는 조정에서 지명된 일부 신하들이 인사 대상자의 이름에 황색 점을 찍어 올리면 왕은 단지 그 점 위에 낙점을 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모든 정치권력은 문종의 유명을 받든 이른바 고명대신들인 황보인, 김종서 등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렇듯 왕권이 유명무실해지고 신권이 절대적인 위치에 이르자 세종의 아들들, 즉 왕족의 세력이 팽창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수양, 안평, 임영, 금성, 영웅 등의 왕숙들이 서서히 왕권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둘째인 수양과 셋째 안평은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이런 왕족간의 세력 다툼은 급기야 엄청난 피바람을 일으키고 만다.
수양대군은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수양은 문종이 죽자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정치권에 뛰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김종서, 황보인 등의 대신들이 안평대군 주변에 모여들자 그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신의 수하인 한명회, 권람 등의 계책에 따라 김종서를 피살하고 황보인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을 대궐로 불러들여 죽였다. 이들의 죄명은 안평대군을 추대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1456년 6월에 상왕 복위 사건이 일어나 상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 출신과 성승, 유응부 등 무신들이 사형당했으며, 이듬해 단종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457년 9월,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여 단종은 다시 서인으로 강봉되었고 한 달 뒤인 10월에 17세의 나이로 사사되었다.
단종의 부인은 송현수의 딸 정순왕후로 두 사람 사이엔 후사가 없었다. 단종은 1681년(숙종 7년)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에 단종으로 복위되었다. 그의 능은 장릉으로 강원도 영월에 있다.
3. 계유정난의 배경과 사건 분석
단종실록에는 이들 대신이 안평대군 등 종친뿐 아니라 혜빈 양씨, 환관 등과 모의하여 궁중에까지 세력을 펴는 한편, 황표정사를 통해 자신의 세력을 요직에 배치하여 붕당을 조성하고 끝내는 종실을 뒤엎고 수양대군에게 위협을 가한 것이 계유정난의 원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단종실록이 세조 때에 편찬된 점을 고려할 때 이 기록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황보인 등 고명대신들은 문종의 유지를 받들어 어린 왕을 보필하는 데 최선을 다했을 뿐, 붕당을 조성하려고 한 흔적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다만 대신들의 협의체인 의정부가 본래의 권한을 넘어서 왕권을 미약하게 만들었던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한 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왕은 손 하나 움직일 수 없는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백관은 의정부는 알았으나 군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한 지가 오래 됐다’고 했다. 또한 재상 중심 체제를 주장하던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도 김종서의 지나친 권력 증대에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이런 두 가지의 예는 곧 의정부가 권력을 남용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왕권이 완전히 땅에 떨어져 있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수양대군은 명에서 돌아온 l453년 4월에 신숙주를 막하에 끌어들이는 한편, 홍달손, 양정 등 심복 무사를 양성하기 시작했고 6개월 뒤에 드디어 거사를 감행했다.
그는 우선 김종서를 제거했다. 당시 김종서는 병권을 쥐고 있었고, 조정 대신들의 구심체였기에 그를 제거하지 않고는 거사를 성공시키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 해 I0월 10일 밤 유숙, 양정, 어을운 등을 데리고 김종서를 찾아가 간계를 써서 그를 철퇴로 죽였으며, 영의정 황보인, 병조판서 조극관, 이조판서 민신, 우찬성 이양 등은 왕명을 핑계로 대궐로 불러들여 참살했다.
또한 친동생 안평대군을 붕당 모의의 주역으로 지목해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사사시켰다. 게다가 자신의 형제들 중 뜻을 달리했던 금성대군을 유배시켜서 죽였으며,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낸 후 다시 노산군으로, 그리고 서인으로 전락시켜 죽였다.
4. 단종 복위운동을 전개한 사람들
1445년 윤6월에 수양대군이 금성대군을 비롯한 종친들과 신하들을 귀양보내고 왕으로 등극하자 세종과 문종에게 특별한 신임을 받았던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의 문관들은 유응부, 성승 등의 무관들과 모의하여 상왕으로 물러앉은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은 책명사인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오겠다는 통보가 오자 유응부가 왕을 보호하는 별운검에 임명되면서 구체화되었다. 당시 세조는 명나라 책명사를 맞이하기 위하여 상왕 단종과 함께 창덕궁으로 가게 되어 있었는데, 바로 이 순간에 유응부가 세조를 살해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무위로 끝나고 만다. 세조가 별운검을 동반하고 연회장을 나서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한명회가 창덕궁 연회장이 너무 협소하여 당일에 별운검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세조가 이 의견을 받아들임으로써 암살 계획은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사에 참여하기로 한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이 사실을 알려 결국 단종 복위계획에 가담한 사람은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사실 이 단종 복위 사건의 정확한 주모자를 파악할 만한 자료는 아직 없다. 다만 김질이 고발할 때 성삼문에게 들은 말이라고 했고, 성삼문은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이 같이 모의하였다고 했다. 이에 더 추궁하자 유응부와 박정도 등도 이 계획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 박팽년 등과 이에 연루된 17인이 투옥되었다. 이들은 모두 옥이 일어난 지 7일 만인 6월 9일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이후 중종 때 이들 중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은 사육신으로 기록되었다.
제7대 세조실록
1. 수양대군의 정국 전복과 왕위 찬탈
김종서와 황보인을 위시한 고명대신들은 숙고 끝에 수양대군의 세력 팽창을 막기 위해 안평대군과 손을 잡았다. 안평은 육진을 개척할 때에 김종서와 함께 여진족을 토벌한 인물인데다가 조정의 대신들과도 비교적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학문과 문예에도 뛰어나 선비의 낭만적인 면모도 있었다. 말하자면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인 수양에 비해 왕권을 넘볼 확률이 적은 인물이라고 평가되었던 것이다.
고명대신이 안평과 손을 잡자 수양대군의 기세는 다시 위축되었다. 황표정사를 통해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그들이 자신과 견줄 만한 대표적인 왕족 세력인 안평대군과 힘을 합침으로써 그야말로 힘과 대의명분을 다 쥐게 된 까닭이다. 그래서 수양대군은 이에 대한 타계책을 모색하게 되고, 결국 고명대신들을 무력으로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수양의 이 거사는 집현전에서 『역대병요』의 음주를 함께 편찬하던 집현전 교리 권람을 막하로 끌어들이고, 이후 한명회, 홍윤성 등을 심복으로 삼고 본격적으로 힘을 확대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수양이 고명대신들을 제거한 것은 단종 즉위 이듬해인 1453년 10월이었다. 그는 이 거사를 단행하기 6개월 전에 사뭇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스스로 명나라에 사은사로 갈 것을 자청한 일이다. 1452년 9월에 명나라가 단종의 즉위를 인정한다는 고명을 보내오자 조정에서는 이에 감사한다는 말을 전한 사은사를 보내기로 했는데, 수양은 이 일이 종친의 의무임을 내세우면서 자신이 가야 한다고 우겼다. 하지만 수양의 수하들은 그를 만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양은 이 일을 강행한다.
그 후 명에서 돌아온 1453년 4월부터 수양의 거사 계획은 급진전된다. 수하에 신숙주를 끌여들였는가 하면, 김종서를 철퇴로 죽인 홍달손, 양정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무사들을 수하에 두고 본격적으로 무력을 양성한다. 따라서 이런 결과를 놓고 볼 때 수양의 명나라행은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즉 김종서 일파의 경계에서 벗어나 더 자유롭게 거사 계획을 짜는 한편, 그들의 경계를 늦추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정난에 성공한 수양은 친동생 안평을 강화도로 유배보냈다가, 다시 교동으로 보내 죽였다. 그리고 스스로 영의정부사, 영집현전, 내외전, 경연, 춘추, 서운관사, 겸판이병조, 내외병마도통사 등 여러 중직을 겸하여 병권과 정권을 독차지하고 거사에 직, 간접적으로 가담한 정인지, 권람, 한명회, 양정 등 자신을 포함한 43명을 정난공신에 책봉했다
수양에 의해 이렇듯 정난이 벌어졌을 때 집현전 학사출신들인 성삼문, 정인지, 최항, 신숙주, 하위지 등은 중립을 지켰거나 수양대군에게 동조했다. 이들은 비록 유교적 비전제 정치를 내세워 재상 중심 체제를 주장하고 있었으나, 의정부의 핵심인 김종서, 황보인 등의 세력이 지나치게 확대되고 있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이 때문에 수양 역시 이들을 애써 적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수양이 집권한 뒤에 집현전 학사출신들은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성삼문, 하위지 등은 수양이 왕위를 찬탈한 후 단종 복위를 기도하게 된다. 또한 당대 최고의 문인이자 학자인 김시습을 비롯 원호, 이맹전 등은 수양의 왕위 찬탈 소식을 접하자 스스로 관직을 내놓고 다시는 관직에 나오지 않는 등 수양의 왕위 찬탈에 대한 유생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단종 복위 사건을 주도한 성삼문, 하위지, 이개, 박팽년, 유성원, 유응부 등 여섯 사람에 대해 중종대의 사림파들은 왕을 위해 충절을 지킨 ‘사육신’으로 추앙했으며, 또한 이때 세조에게 한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단종을 위해 절의를 지킨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등을 사육신에 대칭하여 ‘생육신’으로 높여 불렀다. 이중 남효온은 사건 당시 불과 두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성장하여 세조의 부도덕한 찬탈 행위를 비난함으로써 생육신의 한 사람이 되었다.
2. 세조의 강권 정치와 문치의 후퇴
(1417-1468, 재위기간 1455년 윤6월-1468년 9월, 13년 3개월)
그는 친형 문종보다 3년 늦은 1417년에 세종과 소헌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유, 자는 수지였다. 어릴 때부터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뛰어났고, 친형 문종과는 딴판으로 무예에 능하고 성격이 대담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진양대군에 봉해졌다가, 1445년(세종 27년)에 수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대군 시절에는 세종의 명에 따라 궁정 내에 불당을 조성하고 승려 심미의 아우인 김수온과 함께 불서 번역을 관장했으며, 향악의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문종 2년인 1452년에 관습도감도제조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단종이 즉위하자 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다가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뒤, 1455년 윤6월 단종을 강압하여 왕위를 찬탈했으니 그가 곧 조선 제7대 왕 세조이다. 이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세조는 즉위한 뒤 단종을 상왕에 앉혔다. 하지만 이듬해 좌부승지 성삼문 등 이른바 사육신으로 불리는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이 단종 복위 사건을 계획한 것이 발각되자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해 영월에 유폐시킨다. 그리고 1457년 9월 자신의 동생 금성대군이 다시 한 번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그를 사사시키고, 단종도 관원을 시켜 죽였다.
세조는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한 뒤 왕권 강화 정책에 착수했다. 우선 일종의 내각제인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고 전제 왕권제에 가까운 육조직계제를 단행했고, 성삼문, 박팽년 등의 단종 복위 사건을 빌미로 세종 이후 대표적인 학자 배출소로 자리 잡았던 집현전을 폐지시키고, 정치 문제를 토론하고 대화하는 경연을 없앴으며, 그곳에 설치된 서적들을 모두 예문관으로 옮겨버렸다. 이 때문에 국정을 건의하고 규제하던 기관인 대간의 기능이 약화되고, 반면에 왕명을 출납하던 비서실인 승정원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승정원은 육조 기관의 사무 이외에 국가의 모든 중대 사무의 출납도 함께 관장하게 되었다.
세조는 대간과 의정부의 기능을 완전히 축소하고 승정원을 중심으로 국사를 운영했는데, 이 승정원과 육조를 모두 그의 심복들인 정난공신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외교통인 신숙주는 예조판서, 군사통인 한명회는 병조판서, 재무통인 조석문은 호조판서를 했는데, 이들은 동시에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에도 봉직하고 있었다. 또 이들 공신들은 현직에서 물러나도 부원군 자격으로 조정의 정무에 차여할 수 있도록 했다·
이와 같이 세조는 비서실 중심의 철저한 측근 정치를 펼쳤다. 이는 모든 정무를 세조 자신이 직접 처리하기 위함이었는데, 이 때문에 국왕의 좌우에서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의 힘은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로 1468년에 탄생한 것이 원상제였다. 이 제도는 세조의 말년에 와서 체력의 한계를 느껴 고안한 것인데, 왕이 지명한 삼중신(한명회, 신숙주, 구치관)이 승정원에 상시 출근해 왕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해서 결정하는 일종의 대리서무제였다.
세조가 세 중신에게 이런 부탁을 한 것은 이미 악화된 세조의 건강 때문이었다. 그는 원상제를 도입한 해인 1468년 9월에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는 그 다음날 죽었는데, 이는 세조가 왕권의 안정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였는지를 알게 해주는 부분이다.
세조는 즉위 기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만년에 가서는 단종의 어머니이자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려 아들 의경세자가 죽자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등 패륜을 범하기도 했다. 또한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나서부터 피부병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다는 이야기와 그 피부병을 고치려고 상원사를 찾았다가 문수동자에 의해 쾌유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3. 세조의 가족들
정희왕후 윤씨(1418-1483)
정희왕후는 판중추부사 윤번의 딸로 본관은 파평이다. 1418년 홍주군에서 태어나 1428년 가례를 행했으며, 처음에는 낙랑대부인으로 봉해졌다가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계유정난 당시 정보 누설로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그에게 용병을 결행하게 할 만큼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였다. 또 1468년 예종이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예종이 재위 1년 2개월 만에 죽자 요절한 맏아들(의경세자)의 둘째아들 자을산군(성종)을 그날로 즉위시켜 섭정을 하기도 했다.
예종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제안대군이 있긴 했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그녀는 왕위를 넘겨주지 않았으며, 덕종에게도 큰아들 월산대군이 있었으나 자을산군을 즉위시킨 것은 정희왕후 개인의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13세의 어린 자을산군을 대신해 무려 7년 동안 정사를 이끈 정희왕후는 섭정 기간 중에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성품을 마음껏 발휘하여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성종이 성년이 되자 섭정을 끝내고 1476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의경세자(1438-1457)
세조의 가족들은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많이 시달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의경세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죽기 전에 늘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혼령에 시달렸으며, 그 때문에 그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 21명의 승려가 경회루에서 공작재를 베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쾌유되지 못하고 병세가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이 때문에 세조는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파내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둘째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능은 경릉으로 현재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4. 세조의 무단정치를 수행한 사람들
수양의 ‘장량’ 한명회(1415-1487)
한명회가 없었다면 계유정난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로 그는 거사 국변에서 눈에 띄는 역할을 했다. 그는 1453년 계유정난 때 자신이 끌어들인 홍달손 등의 무사들로 하여금 김종서를 살해하게 했고 이른바 ‘생살부’를 작성해 조정 대신들의 생과 사를 갈라놓기도 했다.
정난 성공 후 그는 1등 공신에 올랐으며,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에 제수되었고, 1456년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사건을 좌절시킨 공으로 좌승지를 거쳐 승정원의 수장인 도승지에 올랐다. 이후 1457년에 이조판서,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고, 1459년에는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의 병권과 관할권을 가진 4도체찰사를 지냈다.
이렇게 그는 당시 역할이 강화된 승정원과 육소 변방 등에서 왕명출납권, 인사권, 병권 및 감찰권 등을 한손에 거머쥔 뒤 1463년 좌의정을 거쳐 l466년 영의정에 올랐다. 일개 궁직에 있던 그가 불과 l3년 만에 52세의 나이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정난에 가담했던 인물들과 친인척 관계를 맺음으로써 권력의 기반을 더욱 탄탄하게 다져나갔다. 우선 그는 세조와 사돈을 맺어 딸을 예종비로 만들었고, 나중에는 다른 딸을 성종비로 만들어 딸들을 2대에 걸쳐 왕후로 삼게 했다. 또한 집현전 학사 출신 중에 세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던 신숙주와도 인척 관계를 맺었으며, 자신의 친우인 권람과도 사돈 관계를 맺었다.
이시애의 난은 세조 집권기의 가장 큰 변란이었다. 즉위 이후 줄곧 왕위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던 세조는 이시애의 보고문을 믿고 일단 신숙주와 한명회를 옥에 가두고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세조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두 신하는 신문을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결국 혐의가 없음이 밝혀져 석방된다.
18년 세조가 죽자 한명회는 세조의 유지에 따라 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으로서 정사의 서무를 결재하였다. 그리고 1469년(예종 1년)에 다시 영의정에 복귀하였으며, 이 해에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이후 좌리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노년에도 부원군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하였으며, 대단한 권세를 누리다가 1487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세조의 ‘위징’ 신숙주(1417-1475)
신숙주는 1417년 태생으로 세조와는 동갑내기다. 공조참판을 지낸 신장이 그의 아버지이며, 어머니는 지성주사 정유의 딸이다. 그는 한명회와는 달리 일찍 관직에 나갔다. 22살이 되던 1438년 사마양시, 생원, 진사시 등에 합격했으며, 이듬에 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농시직장이 됐다. 이후 그는 집현전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이때 세종의 명을 받아 훈민정음 정리 작업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의 도움을 얻기 위해 성삼문과 함께 13차례나 요동을 다녀오기도 했는데,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였던 황찬이 그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할 정도로 대단히 총명한 인물이었다.
1447년 그는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집현전 응교가 되었고, 1451년 명나라 사신 예겸 등이 조선에 당도하자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동방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다. 이 해에 사헌부 장령, 집의를 거쳐 직제학에 오른다.
신숙주가 수양과 가까워진 것은 1452년 그와 함께 명나라를 다녀오면서부터이다. 당시 수양대군은 중국의 고명에 답하기 위해 사은사를 자청했는데, 신숙주는 이때 서장관으로 그를 수행했다. 이듬해 4월 조선으로 돌이온 뒤부터 둘 사이는 급격히 가까워졌고, 결국 수양의 거사에 신숙주는 간접 지원의 형태로 가담하게 되었다.
1455년 수양이 즉위한 뒤에 그는 예문관대제학이 되었고, 주문사로 명에 가서 새 왕의 고명을 청하고 인준을 받아옴으로써 세조는 명이 인정하는 공식적인 조선 제7대 왕이 된다.
이후 신숙주는 1456년엔 병조판서, 이듬해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오르고 1459년에는 좌의정에 오른다. 그리고 3년 뒤인 1462년 마침내 영의정부사직(영의정)에 제수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5. 『세조실록』 편찬 경위
사건의 발단은 사초를 거둘 때 사간의 이름을 기록하게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대간에서는 사초에 서명을 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서명을 할 경우 소신껏 쓸 수 없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사관들은 왕명에 따라 서명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민수는 사관 시절에 대신들에 대해 비판을 많이 가했던 것이 마음에 걸려 사초를 몇 군데 뜯어고쳤다. 이것이 발각되자 예종은 민수를 제주에 관노로 보내고 서명을 반대하던 사관 두 사람은 사형에 처하였다. 그 사건이 있은 후에도 실록 편찬은 계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예종이 죽고 성종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리고 2년 만인 1471년 12월 15일에 완성되어 성종이 찬진을 마쳤다.
이 편찬 작업에 참여한 주요 인물로는 영관사에 신숙주와 한명회, 감수에 강희맹과 양성지 등이었고, 58명이 실무를 담당했다.
제8대 예종실록
1. 정희왕후의 수렴청정과 예종의 짧은 재위
(1450-1469, 재위기간 1468년9월-1469년 11월, 1년 2개월)
이러한 두 가지 형태의 정치 보조를 바탕으로 예종의 1년 2개월 동안의 짧은 치세가 이루어졌다. 1468년에 유자광의 계략으로 ‘남이의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남이를 비롯하여 강순, 조경치, 변영수, 문효량, 고복로, 오치권, 박자하 등을 처형시켰으며, 이듬해에는 삼포에서 왜와의 개별 무역을 금지하였다. 또한 그 해 6월에는 각 도에 있는 둔전(병영에 예속된 전답)을 일반 농민이 경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9월에 최항 등이 『경국대전』을 찬진했으나 반포하지 못하고 20세를 일기로 세상을 폈다.
이처럼 예종은 14개월이라는 짧은 치세에다 정희왕후의 수렴청정과 원상들의 대리 서무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세조 때와 마찬가지로 언관들에 대한 왕의 태도는 강경했다. 언관들에게 강경했다는 것은 그만큼 왕권이 안정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은 곧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의 결과이기도 했는데, 다시 말해 왕권은 미약했지만 정희왕후의 힘은 강력했다는 뜻이다.
3. 예종 시대 최대의 옥사 ‘남이의 역모 사건’
재위 기간이 14개월밖에 안 된 예종 대에도 대대적인 숙정 작업이 있었다. 이 숙정 작업은 한명회, 신숙주 등의 승정원 원상 세력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등장한 신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남이, 강순의 역모 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으로 약 30명의 무인 관료가 죽고 그 가족들이 노비로 전락 했다.
이 사건의 주모자로 알려진 남이는 태종의 넷째딸 정선공주의 아들로서 무과를 통해 등용된 인물이다. 그는 세조 시대 최대의 위기를 몰고 온 이시애의 난(1467년)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이어서 건주야인을 토벌한 전공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하였고, 병권의 수장 병조판서에 올랐다.
하지만 1468년 세조가 죽자 그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노골적인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그들이 강희맹, 한계희 등의 훈구 대신들의 입을 통해 남이가 병조판서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비판하자, 예종은 그를 병조판서에서 해임하고 겸사복장직에 임명했다.
남이가 병조판서에서 겸사복장직을 물러났을 때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남이는 이 광경을 보면서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몰아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징조’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당시 병조참지로 있던 유자광이 이 말을 엿듣고 예종에게 남이가 역모를 꾀하려 한다고 고변해 그를 역신으로 몰아버린 것이다.
유자광은 서얼 출신으로 남이와 마찬가지로 이시애의 난에서 공을 세워 등용된 인물로 모사에 능하고 계략에 뛰어난 자였다. 그래서 자신과 함께 공을 세운 남이가 세조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 것을 시기하고 있다가 마침 남이가 병조에서 밀려나자 그를 완전히 제거해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유자광의 모함으로 졸지에 역모자로 전락한 남이는 즉시 의금부로 잡혀가 문초를 받았다. 이때 증인으로 나온 유자광은 남이가 ‘혜성의 출현은 신왕조가 나타날 징조로서 이때를 이용하여 왕이 창덕궁으로 옮기는 시간을 기다려 거사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진술했다. 유자광은 또 남이의 측근인 순장 민서도 남이의 집에서 북방 야인들에 대한 방어 계획을 논의할 때, ‘요즘 같은 천변은 반드시 간신이 일어날 징조이니 자신이 먼저 고변당할까 봐 두렵다’고 말하며 ‘그 간신은 한명회’라 했다고 덧붙여 진술했다.
남이의 기질과 경력으로 볼 때 이때의 역모 사건이 완전히 조작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세조의 총애를 받고 있었고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까지 오른 그가 예종이 즉위한 뒤 얼마 되지 않아 병조판서에서 밀려나자 울분이 컸을 것이다. 더구나 남이가 무인이었고 역모 사건 발각 당시에 가까이 지내던 영의정 강순을 비롯한 모든 인물들이 무인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한명회, 노사신 등의 훈구 대신들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역모 사건으로 인식되었지만, 그 이후 일부 야사에서는 유자광의 모함으로 날조된 옥사라고 규정하고 남이를 젊은 나이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영웅적 인물로 기술하고 있는 점이 주목 된다. 남이의 옥을 날조 사건으로 기록한 대표적인 책은 『연려실기술』인데, 여 기에서는 유자광의 계략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임진왜란 이후에 일부 야사에서 남이를 비극적 영웅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은 조선 중기의 무오사화, 갑자사화의 책임이 유자광에게 있다고 보는 시각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권선징악적인 가치관이 강한 조선 사학도들은 유자광을 참사를 획책하는 극악무도한 간신배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남이의 역모’는 단지 그 간신배 유자광의 날조극이라고 믿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남이는 순조 때 그의 후손 우의정 남공철의 상소에 의해 신원되었다. 남이의 무덤은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 남전리 산147번지에 있다.
제9대 성종 실록
1.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정치적 결탁을 통한 왕위 계승
정희왕후와 정치적 결탁을 한 사람은 한명회였다. 한명회는 당대 최고의 권력가인 동시에 당시에 바로 자을산군의 장인이기도 했다. 물론 신숙주, 구치관 등의 원상들도 이에 동조했을 것이다. 이는 정희왕후 입장에서도 크게 손해될 것이 없었다. 13세의 어린 자을산군이 왕이 되었을 경우 그녀는 수렴청정으로 왕권을 대신하게 될 것이고, 또한 그것이 왕권을 안정시키는 길이기도 했다.
사실 예종이 병약한 몸으로 왕위를 오래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들면서부터 정희왕후는 왕권 찬탈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세조의 유명을 받든 한명회를 비롯한 원상들과의 결탁이었다. 그 결탁 과정에서 그녀의 생각은 자신의 장자인 의경세자의 아들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한다는 것이었고, 한명회는 자을산군을 내세웠다. 논의 과정에서 정희왕후는 장손인 월산군을 지목했을 것이지만 한명회의 반대에 부딪쳐 자을산군으로 낙착을 보았다. 정희왕후와 권신들은 이러한 선택이 종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예종이 죽던 날 곧바로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혔다. 그리고 왕실 세력의 중심이었던 구성군을 유배시켰다.
2. 성종의 도학 정치와 조선의 태평성대
(1457-1494, 재위기간 1469년 11월-1494년 12월, 25년 1개월)
정희왕후에 의한 7년 동안의 섭정기에 있었던 주요 사건을 살펴보면, 우선 성종 즉위 직후인 l469년 12월에 호패법을 폐지하여 민간에 대한 관의 감시를 줄었던 것을 들 수 있다. 또 통치의 총체적 규범인 『경국대전』의 교정 작업을 완료했고, 2품 이상의 관원이 도성 밖에 거주하는 것을 금하여 조정 정책 결정의 신속성을 도모했다.
그리고 숭유억불 정책을 강화하여 불교의 장의 제도인 화장 풍습을 없애고, 도성 내에 염불소를 폐지하여 승려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였으며, 사대부 집안의 부녀가가 비구니가 되는 것도 금지했다. 한편 외촌 6촌 이내에는 결혼을 금하고, 사대부와 평민의 제사 이행에 차별을 두어 4대 명절에 이를 검사하였으며, 전국 교생에게 의무적으로 『삼강행실』을 강습케 하는 등 일련의 유교 문화 강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민간경제의 안정을 위해서는 고리대업을 하던 내수사의 장리소를 560개에서 235개로 줄였다. 각 도에 잠실을 하나씩 설치해 농잠업을 융성시켰으며 영안, 평안, 황해도에 대대적인 목화밭을 조성하고, 경상, 전라도에 뽕나무 종자를 재배케 하여 의류업의 발달을 촉진시키기도 했다.
성종의 세력 균형 정책은 1480년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확연히 드러났다. 고려말의 대표적 학자인 정몽주와 길재의 후손에게 녹을 주는 한편, 그들의 학맥을 잇는 사림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여 훈구 세력을 철저히 견제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진 사림 세력은 왕을 호위하는 근왕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세조 때의 공신이 주축이 된 훈구 세력은 정치 일선에서 조금씩 후퇴하였다. 성종은 훈신과 사림간의 세력 균형을 이룸으로써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또한 조선 중기 이후의 사림 정치의 기반을 조성했다
성종은 이런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도학 정치의 기틀을 잡아나갔다. 그 일환으로 불교에 대한 압박을 강화한 한편 성리학의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래서 1489년에는 향시에서 ‘불교를 믿어 재앙을 다스려야 한다’는 내용의 답안을 작성한 유생을 귀양보냈는가 하면, l492년에는 도승법을 혁파하고 승려를 엄하게 통제하였고, 일정 숫자의 사찰만을 남긴 채 전국 대부분의 사찰을 폐쇄하였다. 한편 성종은 성리학에 심취하여 도학적인 조예가 깊었으며, 경연을 통해 학자들과 자주 토론하고 학문과 교육을 장려했다. 그는 심지어 경학이나 강의에만 능해도 관리로 등용하거나 자신의 벗으로 삼기도 했다.
성종은 이와 같은 도학 정치사상에 입각하여 1475년에는 성균관에 존경각을 지어 경전을 소장하게 했으며, 양현고에 관심을 가져 학문연구를 후원하고, 1484년과 1489년에는 성균관과 향교에 학전(교육기관의 경비를 충당케 하기 위해 지급된 토지)과 서적을 나누어주어 관학을 진흥시키기도 했다. 또한 홍문관을 확충하고 용산 두모포에 독서당을 설치하여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고 독서 저술에 전념하게 하였다.
이 같은 정책은 편찬 사업을 융성시켰는데, 그 결과로 노사신 등의 『동국여지승람』과 서거정 등의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동문선』, 그리고 강희맹 등의 『오례의』, 성현 등의 『악학궤범』이 간행되는 등 다양한 서적이 쏟아져나왔다.
성종은 1479년 좌의정 윤필상을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건주야인들의 본거지를 정벌하였고, 1491년에는 함경도관찰사 허종을 도원수로 삼아 두만강 건너 ‘우디거’의 모든 부락을 정벌하였다. 이 결과 조선초부터 끊임없이 변방을 위협하던 야인 세력들을 완전히 소탕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이로써 성종은 태조 이후 닦아온 조선왕조의 전반적 체제를 완성시켰으며, 조선 백성들은 개국 이래 가장 태평성대한 세월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종 후기의 이런 부분적인 병폐는 옥에 묻은 티에 지나지 않았다. 고려로부터 조선 초까지 100여 년간에 걸쳐 반포된 여러 법전, 교지, 조례, 관례 등을 총망라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이 1485년에 완성되었고, 각종 문화 서적들을 편찬해 민간 생활의 질을 높였다. 또 성리학자들을 정계에 진출시켜 학문과 정치를 하나로 묶었으며, 조선의 정치 이념인 유교를 완전히 정착시켜 민간 교화에 성공했다. 게다가 변방의 야인을 토벌하여 전쟁의 위협을 없애고 남방의 왜구들은 외교적으로 관리하며 지배하였다. 이는 민생의 안정과 태평성대로 귀결되었다.
성종은 1494년 3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으며 능은 선릉으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과 함께 있다.
3. 성종의 가족들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1437-1504)
이후 1469년 11월 둘째아들 성종이 즉위하여 남편 의경세자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