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2일 인천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하는데 하루 종일 걸렸다. 시간을 넉넉하게 잡았지만 서울역에서 인천국제여객터미널에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조바심이 들었지만 간신히 도착하였다. 미리 도착한 일단의 선생님들과 답사진행 스태프들이 친절하게 출국을 도와주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인천항을 출발하였고 저녁을 먹은 후 세미나실에 모여서 ‘장보고’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과 동영상으로 이번 답사여행의 성격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날씨가 흐려서 뱃길이 걱정되었지만 잔잔한 파도 덕분에 전국에서 모인 선생님들이지만 연령별로 룸메이트가 정해져 있어 비슷한 연령대의 선생님과 여러 가지 정보를 교환하는 재미도 쏠쏠하였다.
둘째 날이지만 중국에서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산둥성 석도항에서 입국 수속을 마치고 3대의 버스에 나눠타고 답사를 위한 출발을 하였다. 한국의 날씨와는 다르게 조금 흐렸지만 답사를 하기에는 좋은 날이었다. 첫 답사지로 성산두로 향했다. 성산두는 중국에서 제일 먼저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예전부터 태양신이 사는 곳이라고 하여 여러 황제들이 순행을 하였는데, 특히 진시황이 이곳에 세차레나 찾아왔다 가면서 그와 관련된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중국의 전 총서기인 호요방이 이곳에 와서 육지의 끝 즉 하늘이 끝나는 곳이라는 뜻을 담아 ‘친진무두’라는 휘호를 남겼지만 성산두는 올해 호운각으로 이름이 바뀌어서 오시는 손님들에게 복과 행운을 주는 곳이어서 그런지 기념촬영을 하는 사람들과 복전함에 복전을 넣고 있는 사람들로 붐볐다. 진시황과 이사, 서복의 동상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진시황 사당으로 향했다. 진시황 사당 안에는 시황전과 해신을 모신 일주사 천후궁이 있는데 천후궁은 북송 초기에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가 숨진 28세의 여인을 기리려고 세운 사당이라고 했다. 다음 장소를 이동하는 버스 속에서 장일규 교수님의 신라시대 불교가 발달한 원인과 불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 불상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항마촉지인의 석가모니불상, 전생의 부처님, 미륵불, 약사여래불, 법을 상징하는 비로자나불, 서방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불, 지장불, 관세음보살, 사자를 타고 다니는 문수보살(지혜상징), 코끼리를 타고 다니는 보현보살(실천상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 평소에 잘 몰랐던 불상의 차이점을 알 수 있었다. 대웅전의 석가모니불, 약사불과 태양문양이 새겨진 화려한 일광보살 붉은색(태양), 달 문양이 새겨진 월광보살(달), 관세음보살(부처님) 대세지보살(정병)의 차이점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있었다. 비로자나불은 옆에 부처님이나 보살을 모시지 않아도 되며, 지장보살(긴 지팡이와 육환장을 지님)을 식별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해주셨다. 중국에서 많이 모시는 불상은 석가모니불과 관세음보살이다. 중국의 관세음보살은 서있는 관세음보살이 많고 한국은 보관을 쓴 관세음보살상이 많으며 일본은 천수천안관세음보살상이 많다. 각 나라마다 구원의 내용이 다르므로 관세음보살상이 다르다고 했다. 영성에서 위해로 가는 길에 한국의 기업간판이 눈의 띄었고 넓은 땅에서 자라고 있는 옥수수, 포도, 복숭아의 엄청난 경작에 혀를 내둘렀다. 위해는 명나라 때인 1398년 일본 해적의 침략에 대비한 방어정책에 따라 군사 기지인 위소를 설치하면서 위해라고 불렸으나 청나라때 위소를 폐지한 뒤에도 여전히 위해로 불려 현재에 이른다고 했다. 위해는 예부터 지금까지 교통의 요지로 자리하면서 최근에는 우리나라 기업이 많이 진출한 곳이기도 했다.
위해에서 점심을 먹은 후 버스를 타고 봉래에 도착하였다. 산둥반도 최북단에 자리한 항구도시로 옛날 바다 가운데 신선들이 살았다는 전설 속의 산인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 등이 있었다고 한다. 한무제가 30여 차례 순행을 할 때 이곳에 신선이 살았던 산을 보고자 하였지만 보이지 않자 경관이 수려하다고 하여 ‘봉래’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당나라때 잠시 봉래진으로 불렸다가 등주로 바꿔 불렸다. 봉래의 북쪽 해안가에는 옛 등주항이 있었다. 이곳은 요동반도의 끝에서 발해만을 지나 산둥반도로 이어진 여러 섬, 곧 묘도군도의 끝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예부터 한반도의 연안을 따라 북상하였던 배들이 요동반도 끝에서 묘도군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봉래까지 자주 오갔고 산둥성에 자리한 여러 항구 가운데 한반도와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대표적인 곳이다. 중국의 4대 이름난 누각으로 불리는 봉래각은 2층 건물로 8명의 신선이 이 곳에서 술을 마시다가 바다를 건너는 놀이를 즐겼다는 이야기를 토대로 ‘팔선취주’라고 이름 붙인 조각상이 있었다. 때문에 이곳은 ‘중국 도교의 성지’로 알려져 있으며 누각의 북쪽에는 넓은 바다와 함께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바닷가의 경관이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장엄하게 펼쳐져 있었고, 송나라의 문호 소동파가 쓴 주련이 보관된 소공사에 들어가서 소동파의 글을 감상하였지만 뜻을 몰라 아쉬워하면서 소공사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봉래각 아래의 바닷가에는 등주항의 흔적과 함께 명나라때 척계광이 해군을 훈련시켰던 수성이 절벽을 따라 길게 바다로 이어져 있어, 바닷가의 경치에 운치를 더해 주었다. 개인이 지었다는 중국전통양식을 따라서 오랜기간에 걸쳐 지은 아름다운 건물의 호텔이 있었고, 그 옆에는 모래사장에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서 마치 우리나라 동해바다에 온 느낌이 들었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등주고선박물관으로 들어갔다. 통나무배, 용선, 차륜선, 모래선 등 여러 배들의 모형과 화약이 발명되기 전에 돌을 뿌리는데 사용되었던 포석기가 있었고, 특히 1984년에 발견된 원나라 때 선박이 5:1의 비례로 복원 전시되어 있었다. 2005년 7월에 발굴된 고려선박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는 현재 발굴된 고려선박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평가받는다고 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에도 계속 황해를 건너는 횡단 및 사단항로와 함께 연근해를 따라 가는 북방항로가 같이 이용되었음을 고려할 때 신라선 이래 고려선은 계속 발전한 것으로 보였다. 봉래에서 저녁을 먹은 후 유방으로 향했다. 유방은 산동성 중동부에있는 도시로, 산둥반도와 호남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역사도시와 수공업 도시로 매년 수천만의 여행객이 찾고 있다고 한다. 특히 양가부 민속촌은 ‘중국 연의 고향’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연의 도시’답게 가로등에 상징적인 ‘나비연 문양‘이 네온사인이 반짝이며 밤을 밝히고 있었다. 유방의 부화호텔에 여장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셋째 날이 밝았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답사단 일행은 치박에 있는 고차박물관으로 견학을 갔다. 중국 최고의 차마(車馬)유적으로 임치구 제릉진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 박물관은 1990년에 임치에서 제남을 거쳐 청도로 가는 고속도로 공사를 하다가 대규모의 순장 마차들이 있는 흙으로 된 봉분을 발견하여 1991년부터 1994년까지 박물관을 건립하였는데, 특이한 것은 박물관이 고속도로 밑에서 자리하고 있었다. 유물이 발굴된 그 장소를 원형 그대로 복원한다는 의미에서 반대의 의견도 많았지만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고 고속도로 밑에다 박물관을 건립하였다고 했다. 박물관은 춘추차마전시관과 중국고차진열관으로 나뉘어 있다. 고차진열관에는 후이차마갱(後李車馬坑)에서 출토된 여러 차량과 임치 지구에서 출토된 고대 차량을 복원한 차량, 그리고 전국에서 출토된 여러 고대차량의 복원 모형이 진열되어 있었다. 황하 유역은 주나라 때부터 춘추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주요 전쟁터였기 때문에 지세가 넓고 평탄하여 전차전에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전차병은 4마리의 말이 마차 한 대를 끄는 ‘일승(一乘)’의 규모였는데, 이곳에서 출토된 마차는 일승의 모습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 박물관은 임치 주변에서 벌어진 전차전의 모습과 함께 중국 고차의 다양한 모습을 한 곳에서 이해할 수 있는 중국 제일의 고차박물관이라고 했다.
박물관 견학을 마치고 태안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진도 나가기를 좋아하시는 장일규 교수님의 우리나라 역사 강의가 시작되었다. 고대 우리나라 역사의 탄생 신화부터 건국과 정치이념을 나라별로 예를 들어 쉽게 설명해 주셨다. 우리나라 건국 역사를 신화별로 살펴보면 고조선의 신화는 왕실중심 문화, 고구려 귀족중심, 백제는 왕실중심, 신라는 건국신화는 귀족중심의 문화다. 신화는 나라가 쇠퇴할 때 쯤 등장한다. 신화에는 그 나라 전역사가 담겨있기 때문에 그 나라가 쇠퇴할 때 등장하며 나라마다 지역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나라마다 토착성이 다르게 발전한다. 신라는 특히 토착성이 강하기 때문에 경주에 천년동안 수도를 정하고 나라가 망해도 고려에 가서 귀족들이 자기들의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토착적인 신라문화가 고려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신라는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차돈의 순교 후 8년이 지난 다음 불교가 공인된 데는 귀족들에 의해서 반발되다가 신라 귀족들이 불교를 믿으면서 불교가 공인되었음과 화랑도(국선)들이 (미륵선화) 미륵불을 받아들이고 사후에도 귀족들은 현실의 기득권과 내생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믿음 때문에 토착과 불교가 발전되었다고 들었다. 신라는 김춘추가 유교를 배워올 당시 신라는 백제와 전쟁을 하였고 고구려는 당과 맞서고 있는 국제적인 정세를 이용하여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치게 되는 그 당시의 국제적인 질서를 실감나게 설명하시는 이야기를 듣고 그 당시의 국제사회의 흐름을 짐작해보면서 우리역사 알기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 들었다. 신라가 당과 연합을 하게 되면서 자연히 당의 정치 체제인 유교를 통한 정치제도를 나라에 정착시켰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 역사는 항상 토착과 공존, 조화의 원리에 의해서 발전되어 나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점심을 먹은 후 태안에 있는 태산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케이블카 타는 곳으로 이동했다. 현지 가이드가 태산에 얽힌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황제의 사위가 9품의 벼슬인데 태산에 가서 봉선제를 지낸 후 5품을 벼슬을 올려주고 나니 철없는 어린 사위가 5품 관복을 입고 다니다가 황제의 눈에 띄어 황제가 “왜 그런 옷을 입고 다니냐?”고 묻자 어린 사위는 대답을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데 그 옆의 신하가 “태산의 힘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뒤로부터 장인은‘태산’으로 장모는 ‘태수’로 부른다는 일화가 있다고 했다. 차례를 기다려 케이블카를 타고 태산으로 올라갔다. 초등학교 시절 배운 양사언의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하는 시조가 생각났다. 케이블카에서 밖을 내다보니 발밑에는 크고 작은 계곡과 멀리 보이는 작은 산과 구름을 보니 태산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지만 그리 높지는 않았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태산의 넓이가 커기 때문에 ‘태산’이라고 부른다는 설명에 수긍이 갔다. 태산은 중국의 5대 명산 중의 하나다. 해발 1545m로 산둥성에서 가장 높은 산이고 제남과 태안 등 4개 지역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중국 사람들은 전국시대 이후에 중국 전역을 아우르는 5곳의 산을 ‘오악’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중악은 하남성의 숭산, 북악은 산서성의 항산, 남악은 호남성의 형산, 북악은 섬서성의 화산, 태산이 동악이다. 이 태산을 특히 오악지장, 오악독존이라고 하여 천하제일의 명산으로 꼽는다고 하였다. 그 뒤 많은 나라가 건국되어 제왕이 이곳에서 하늘이 뜻을 받고 땅에 알리는 봉선(封禪)의식을 거행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태산의 정상은 옥황정인데 옥황정 주변에는 옥황상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옥황묘와 출산을 관장하는 여신 벽화원군을 모신 벽화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태산은 성스러우면서도 경관이 뛰어나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명승고적이 남아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가면서 절벽마다 비문을 새겨 천하제일의 석각 전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 가운데 한나라 무제가 세운 무자비(無字碑)와 당 현종이 봉선의식을 하면서 세운 기태산명비등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특히 당 현종의 기태산 명비는 금으로 도금이 되어 있어서 권력과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지면서도 역사의 흔적으로 연중 끊임없이 관광객이 몰려드는 관광특구가 되었다고 하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태산은 역대 황제들이 봉선제를 지낸 곳이며, 유교, 불교, 도교의 사상이 함께 어우려져 공존하는 장소이다 보니 중국사람들은 성지를 순례하는 마음으로 태산을 오른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군왕도 예부터 나라의 수호신이 산악에 거처한다는 산악신앙이 자리하여 중국과 같은 5곳의 성산이 숭배되어 왔다. 신라때부터 팔공산, 태백산, 지라산, 계룡산, 토함산이 중악, 북악, 남악, 서악, 동악의 ‘오악’으로 모셔졌다. 신라의 진흥왕은 한강 하류 일대를 점령하고 진흥왕 16년(555년)에 북한산을 순행했는데, 그 뒤에 북한산에서 봉선의식을 치르면서 ‘순수비’를 세워 놓았다고 한다. 더욱이 공자묘에도 많은 사람들이 와서 참배를 하고 가는 모습에서 중국인들의 뿌리 깊은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공자사당의 '만세사표(萬歲師表)'라는 편액이 가슴에 찡하게 다가왔다. 조선시대 성리학이 크게 발전하면서 선비의 기개를 태산에 비유한 양사언의 ‘태산이 높다 하되’를 시조 속에 담긴 그 시대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이해되었다. 공자가 태어난 곡부를 가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지만 언젠가 다시 곡부를 여행할 여지를 남겨두었다.
치박의 제도호텔에서 아침을 먹은 후 강태공사당으로 향했다. 강태공 사당은 보수공사가 한창 이어서 의관총만 보고 사당을 제대로 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강태공은 춘추시대의 오패 가운데 하나이자 전국시대의 칠웅 중의 하나로 산둥반도 일대를 장악했던 제나라의 시조이다. 이름은 강상, 여상으로 산둥성에서 태어났다. 평소에 집안을 돌보지 않고 늘 상념에 빠져 있었는데, 하루는 위수에서 낚시를 하다가 서백(뒤에 주나라 문왕)을 만났는데 인물됨을 알아본 서백을 도와 반란을 꾀하였고, 서백의 아들(뒤에 주나라 무왕)과 함게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우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때 ‘주나라 무왕의 아버지인 태공이 바랐던 인물이었다’고 하여 ‘강태공’으로 불렸다고 했다. 지금까지 낚시를 즐기는 사람을 강태공으로 부르는 줄 알았는데 이번 답사 여행으로 강태공의 이름에 대한 유래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강태공은 제나라의 시조가 되었고 주나라의 스승으로 숭상을 받았으며 139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주나라의 관례대로 처음 섬겼던 문왕과 무왕의 능묘 주변에 묻었다고 하지만 봉분이 없었던 탓에 현재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고 제나라의 수도였던 지금의 치박에 그가 썼던 모자와 옷을 묻은 높이 28m, 남북길이 50m, 동서길이 55m의 의관총이 남아있고 그 앞에 사당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공사중인 사당을 제대로 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현지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강태공이 130여개 성씨의 기원이라고 했다. 중국은 예로부터 아버지가 나라를 세우면 아들들은 아버지와 다른 성을 써야했기 때문에 성씨가 그렇게 많아진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성씨 제도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고 보는데 삼국시대 이전에 중국식 성씨를 따라 점차 한자화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오늘날과 같은 다양한 성씨는 삼국통일 이후, 신라말 고려초 이후에 유력 세력이 중국의 유명성씨를 모방하면서 등장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제나라의 유물을 보관, 전시하고 있는 제나라 박물관은 제나라 황성 유적지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진나라 시황제가 쌓았다고 전하는 만리장성보다 먼저 건립된 제나라 장성을 본따 옛 성의 큰 성벽과 작은 성벽을 이은 모양으로 건립되어 있었다. 제나라에서 밀이 많이 생산되었는지 복원된 제나라 가옥의 구조는 우리나라 초가처럼 밀짚을 이용하여 집을 지었고,전시물 중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전투에서 소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일단 소를 이용하여 먼저 전투를 하여 인명의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그런 전법을 이용했다는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그 시대에도 나름대로 인명이 소중함을 아는 순간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나라는 피파에서 인정한 축구의 발원지라는 인증서가 전시된 모습을 보았다. 축구협회장의 사진과 함께 그 당시 사용하였던 축구공을 복원하여 전시한 모습에서 동양의 문화가 서구로 흘러가서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은 예를 보았다. 세계적으로 읽기는 병법서인 ‘손자병법’을 지은 손무의 동상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치인들의 모습을 동상으로 새겨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는 점이 특이했다. 고조선은 춘추시대 여러 나라의 하나였던 제나라와 관계를 맺었다. 제나라는 진나라에 멸망하고 진나라는 기원전 206년 한나라에 멸망하고 한 무제는 고조선을 공격하였는데 한 무제는 고조선으로 통하는 항로에 익숙했던 제나라 사람들을 수군으로 징발하여 고조선 침략에 나서게 했다고 한다. 고조선의 8조법이나 국정을 총괄하는 관직인 상(相)의 존재는 인재를 등용하고 법을 강조하였던 제나라 등 전국시대 여러 나라와의 관계 속에서 등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행은 순마갱으로 향했다. 순마갱은 제나라군주였던 경공의 묘지 안에 말을 순장한 묘이다. 말을 질서정연하게 묻은 모습을 보면서 살아있는 말을 저렇게 가지런히 눕히지는 못할 것이고 마취 내지는 기절시켜서 묻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 때 사용되었던 말로 6-7세기의 수말인 것을 밝혀졌다고 한다. 순장된 말의 밀도를 계산하면 약 600필의 말이 순장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왕을 위해서 사람이나 짐승의 목숨도 한낱 먼지에 지나지 않게 여겨졌던 그 시대가 참으로 무서울 뿐이다. 제나라 유물을 발굴하는 중에 주민들이 동물의 뼈를 가지고 와서 호랑이 뼈가 나온다는 신고를 받고 조사를 해보니 말뼈임이 밝혀졌다고 한다. 동서 서쪽의 길이는 70m 북쪽면의 길이는 75m이고 너비는 5m 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 초기사이에 조성된 것인데 경공이라는 사람이 말을 너무 좋아했는데, 그 사람이 일거라는 추측하기도 한다고 했다. 경공의 재상은 안영인데 얼마나 기지가 특출하던지 자기의 정적을 칼에 피한방울 묻히지 않고 제거하는 기지를 발휘한 인물이라는 평을 듣고 타고난 정치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마갱은 6~7세의 수말로 춘추전국시대 산둥성 일대를 지배하였던 세력의 규모를 보여주는 유적으로 약600필의 말이 순장된 것으로 보아 그 세력이 넓은 평원을 기반으로 막대한 경제적 기반을 갖추었고, 이를 통해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이면서 기병전의 핵심인 말을 순장할 만큼 강한 왕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공과 안영처럼 어느 시대나 명황제 뒤에는 명재상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사는 항상 토착과 대립, 공존과 조화, 실천이라는 흐름으로 이어졌다는 교수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우리나라 역사의 흐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신라는 전쟁 와중에도 신라 왕실은 당나라군에 담겨있는 유교적 정치 이념을 도입하여 관복제도를 정비하였으나, 귀족들은 왕실 정책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과 전쟁을 하는 동안에는 화랑(귀족)들은 귀족이지만 공인된 날짜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 귀족들은 힘이 너무 강하여 왕실은 왕권을 높이기 위해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이 감은사를 건립하였으며 통일 후 병권을 귀족이 장악하고 유교적 이념(본분 충실)을 적용하여 귀족을 제거하고 어렵던 민심을 원효, 의상을 이용하여 공과 실천이 강조된 통일신라의 화엄사상을 이용하여 어지럽던 민심을 다스리게 된다. 의상이 세운 부석사는 신라왕실의 엄청난 지원을 받아서 건립하게 되었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 나라의 국경이 있는 최전방인 곳에 의상을 중심으로 절을 건립하고 화엄종이 성행되었다. 의상은 진골출신이었으므로 원칙을 강조한 일면을 생활에서 엿볼 수 있는데 귀족이기 때문에 세수 후에도 물기를 닦지 않고 바람에 말렸다는 에피소드를 듣고 모두 웃을 수 있었다. 그러나 원효는 진골출신이 아님 육두품출신으로 서민들의 생활 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실천으로 꽃피웠다. 신라 신분은 경주출생 경주거주만이 골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신분제가 있으니까 하나의 효용성으로 묶어주었다. 신라도 유교와 불교가 대립되지만 왕이 되면 유교로 통치를 하게 되었다. 최치원을 그 시대 최고의 문장가이며 당나라에 가서 유교를 배워왔지만 신라사회에서는 불교를 알아야 했다고 한다. 최치원의 형이 해인사의 현준스님이었으므로 최치원은 유교와 불교를 아우를 수 있는 인물이었다고 하였다. 고려시대까지도 토착과 유불교의 대립이 없었다. 고려 최승로가 시무 28조를 내었지만 불교를 비판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라기보다는 국왕이 막대한 재산을 들여 왕실의 안위를 빌고 백성들의 생활고에 허덕이는 잘못된 상황을 비판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시대는 고려시대와는 다른 성리학적 이념으로 국가를 세웠으나 종교적 이념은 불교를 채택했음을 엿볼 수 있는 사례가 많았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왕족의 정당성은 알리는 용비어천가를 지었지만 이 글은 읽는 계층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모든 백성들이 알고 있는 석가모니 생애를 다룬 월인천강지곡을 지은 것과 중종의 어머니가 궁궐에서 굿을 하고난 후 전국에서 올라오는 상소에도 ‘효’의 실천덕목을 앞세운 점, 김시습의 활선, 허준의 동의보감,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여러 실학사상, 일제시대의 창씨개명, 개신교 전래의 여러 가지 격동기를 겪을 때 마다 우리 민족은 토착의 대립, 공존과 조화, 실천의 덕목으로 이런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을 해나왔는데 중심역할을 항상 ‘가족’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을 슬기롭게 이겨나갈 수 있었다는 교수님의 열강에 우리는 박수를 보냈다. 순마갱을 둘러본 후 청주박물관으로 향했다. 청주는 교통의 요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장보고의 유물이 많은 곳은 아니나 교통의 요지, 백제 신라의 사신이 파견되면 묘도군도를 올라가면 요동반도가 나오고 산둥반도에 내렸던 사신들이 거쳐 갔던 곳이다. 신라나 고구려에서 신라 사람들이 와서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신라소, 신라방, 신라원들이 있었던 곳으로 장보고가 중국에서 활동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곳이며 신라 사람들이 잡혀 있는 모습을 보고 서주 무녕군의 장교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당나라는 안록산의 난(양귀비)산동지방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산둥지역은 중요한 조세 수입원이었던 철광산과 소금의 산지이다. 고구려 유민을 동원하여 총지휘 평노절도사 부하인 이정기가 토착세력의 유지를 가지고 제나라를 세웠는데 55년 동안 지배를 하였다. 당이 제나라를 물리칠 힘이 없으므로 당의 황실을 이용한 여러 지방 세력을 이용하여 제나라를 치게하는데 서주세력의 서주 무녕군의 수하에 장보고가 있었다. 이정기는 고구려의 유민으로 산둥 일대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재당 신라인, 고구려인, 백제인을 아울러 당 황실에 대항한 반면, 장보고는 정치적 색채를 일절 내세우지 않은 채 이정기가 구축한 조직을 토대로 활발한 해상무역을 전개한 셈이었다. 장보고는 정치적 입장에서 당과 대항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 멸망의 길임을 이정기의 행적을 통해서 알았기 때문에 정치적 입장은 배제하고, 사람들의 생활에만 관심을 가짐으로써 활발한 해상무역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정기가 있었기 때문에 장보고는 이 지역의 네트워크를 빠른 시간에 구성할 수 있었고, 정치적 목적을 버리고 경제적이나 종교적 목적으로 묶을 수 있었다고 한다. 염장에 의해 살해된 장보고에 관한 것은 기록상에는 도태되었지만 지명이나 정치와 관련된 이름에서 장보고의 업적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청주박물관은 중국의 현급 박물관 가운데서 가장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고 한다. 특히 동한 의자손 옥벽과 전국옥인, 명나라 조병충의 전시권, 용흥사의 출토 유물을 주로 전시한 곳이라고 한다. 청주박물관에는 내가 보기에도 낯익은 불상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현재 전시되어 있는 유물은 ‘중국 건국 이래 최대의 불교문화재 발굴’이라고 불릴 만큼 전국에서도보기 드물게 진귀하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청주는 용흥사와 중국 4대 석굴의 하나인 타산, 운문산의 석굴조상에서 보듯이 일찍부터 불교가 융성하였으나 이정기 일가의 숭불 흔적은 확인할 수 없지만 용흥사는 산둥지역의 중심인 청주의 주요 사찰로 자리하였고, 신라의 불교사상과 미술이 크게 발전하면서 많은 유학승들이 당나라를 오갈 때 교통의 요지이자 행정의 중심지였던 신라원에는 당나라 불교 성지를 찾는 구법승이나 여행자를 위한 법당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확인되었다고 하였다. 청주박물관의 견학을 마치고 유방에서 점심을 먹은 후 5시간동안 버스를 타고 석도로 이동했다. 무더운 날씨에 잠깐씩 쉬어가는 고속휴게소에서 초시(슈퍼마켓)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재미도 쏠쏠하였다. 해바리기씨가 맛있더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일행 중 한분 선생님은 한꺼번에 몇 봉지를 사는 바람에 해바리기씨가 동이 났는데 숙소에 돌아와서 맛을 보니 생각보다 맛이 덜한 까닭에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그러나 선생님답게 학교에서 아이들과 수학시간에 학습교재로 쓸 거라는 이야기에 ‘천상 선생님’이라고 놀리기도 하였다.
이제 중국에서 마지막 날이다. 아침을 먹은 후 적산법화원과 장보고 기념관 견학을 위해서 출발하였다. 적산법화원 입구에서 단체사진 촬영을 하고 장보고 기념관으로 향해서 가는 길에 장보고 기념탑앞에서 설명을 들었다. 이 기념탑은 세계한민족협회 회장인 성신여대 최민자 교수가 한민족의 선각자 장보고 대사를 기념하기 위해 1994년에 세운 탑인데 김영삼대통령의 친필휘호로 ‘장보고기념탑’이라는 여섯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청해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한 후, 신라 사람들을 잡아다 파는 일은 없었다고 하였다. 해적이 신라에게 엄청난 피해는 끼쳤지만 청해진 설치 후 경기도 남쪽에 장성진을 설치하여 활발하게 해상무역을 하였다고 한다. 해적 소탕 후 해상무역을 하여 기업과 결합시킨 점이 오늘날 장보고를 벤치마킹하게 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 당시 (신라 상인들의 무역활동 ) 당의 수도 장안은 세계 경제, 정치의 중심이 중국으로 모이는 시기였다. 국제적인 도시로 외국인 6천여 명이 상주하며 무역을 했고, 페르시아계통(호인)이 주를 이루며 우리 생활에도 호떡, 호두 등의 산물은 이런 무역활동의 흔적이며 우리 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한다. 페르시아 상인들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출발하여 동남아시아를 거쳐 광조우를 (6개월 동안 배를 탐) 적재량이 육로실크로드 보다 엄청난 양의 물건을 실을 수 있었다고 한다. 배 한척은 낙타 2000마리에 해당하는 물건을 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선박에 물건을 실을 때 완충작용으로 곡식을 넣었다고 하였다. 물건을 운반하는 도중 곡식이 발아하여도 그 화학적인 작용에 의해 물건이 상하지 않았다고 하니 현대의 발달된 문명으로도 가늠하기 어려운 기술의 묘미에 더욱 흥미가 느껴진다. 장보고 기념관의 전시실로 들어가니 장보고가 당나라로 가게 된 배경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었으며, 당나라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각인 시켰던 주요 활약상과 무령군으로 이사의 반란 진압과정 및 무령군 소장에 오르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었다. 장보고 해상무역단의 10분의 1로 축소된 배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그 수가 어찌나 많았던지 바다에 줄을 지어 다녔다는 설명에 장보고해상무역단의 엄청난 규모를 실감하게 되었다. 장보고가 법화원을 세운 것을 재당 신라인들을 결집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법화원은 일 년 내내 경전을 강독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일본의 구법승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장보고에 대한 편지 내용과 그의 활약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신라에 돌아온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 무역망을 구축하고 점차 강대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자 자신에게 몸을 피신한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등극시킨 일화만 보더라도 그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지만 그를 경계하는 귀족 세력들의 영향력을 받아 841년에 암살당하고 10년 뒤인 851년에는 청해진도 강제로 폐쇄되는 내용의 전시물을 보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1명의 위대한 인물의 안타까운 퇴장에 마음이 아팠다. 법화원의 마당에 우뚝 서 있는 장보고 동상을 보면서 그 시대의 선각자이고 해상무역왕이었던 기념관 속의 인물로만 남지 말고 우리도 교육을 통한 새로운 장보고를 길러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민족을 네트워크로 묶어 우리나라를 세계 속의 문화, 해상, 경제의 중심역할을 할 수 있는 인재를 기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적산대주점에서 점심을 먹은 후 석도항으로 출발하여 출국수속을 마치고 승선을 한 후 하였다. 돌아오는 여정은 이미 ‘장보고’가 아주 친숙한 인물로 나에게 다가와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중학교 국사 선생님의 장보고에 대한 평이 새롭기 살아나면서 어린 시절 어느 누구도 주목하거나 언급해 주시지 않았던 인물을 소개해 주시면서 뛰어난 영웅을 잃었다고 안타까워하시던 국사 선생님의 은혜를 교직 30년이 넘어서 느낄 수 있었다. ‘가르치는 일’에 위대함을 느끼면서 나도 어떻게 아이들에게 장보고를 알게 해 줄 것인지 지금부터 고민을 해야겠다. 단순한 해상무역을 했던 사람이 아니라 그 당시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아우를 수 있었던 한 사람의 훌륭한 리더를 교육해야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번 여행을 있게 해준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와 동아일보, 국토해양부의 모든 관계자와 현대아산여행사 관계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특히 세분의 교수님들의 열띤 문답식 강의를 들으면서 한국사 전반의 흐름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제 바다는 그저 바라보고 아름답게만 여기는 바다는 아니다. 바다를 통해 ‘우리의 미래를 펼쳐나가는 출발점’의 개념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심하게 흔들리는 파도에 몸을 맡기면서 ‘장보고’를 탐구하는 알찬 여행의 기회를 준 모든 관계부처에 진심으로 감사함을 전한다. |
첫댓글 직찍 사진 해상왕 장보고 유적지 답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졸필의 기행문을 올립니다. 혹 참고하실 분 참고하세요.
잘 읽었습니다^^저도 기회가 되면 꼭 가보고 싶네요~ 갈 곳이 너무 많아요ㅎㅎ 향지월님, 다음 법회 때 뵈어요~
님의 답사길을 졸졸 따라 다니며 하는 공부 즐거웠습니다
향지월님
10월의 맑은 날 반야암에서 만날 수 있겠죠
이곳 공부방에서도 자주 만날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