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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하고싶은 산 스크랩 부산 해안7백리( 마지막 구간) 서부권3. 가덕도 둘레길
지나던 객꾼 추천 0 조회 294 10.10.14 10:43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가덕도, 부산에서 제일 큰섬이었으나 이제 연륙교가 놓임으로서 육지가 된 섬입니다.  영도의 약 1.6배 크기로 해안절경과 숲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신항을 필두로 거가대교며 각종 개발계획이 난무하면서  섬이 쑥대밭처럼 되고 있습니다.  용원에서 배를 타고 들어갈 때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현지민들의 생각은 또 달랐습니다.  섬은 지도에서 보듯 남북으로 길고 동서가 짧은 형태로 신어신맥 또는 낙남정맥의 말단부로 459m의 연대봉烟臺峰을 비롯 삼박봉311m , 매봉357m 이 전체 산줄기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여 섬의 동쪽은 경사가 심한 반면 서쪽은 완만하여 사람들이 오래전서부터 살았습니다.  하지만 문헌으로 전해진 시기는 세종 이후이며 경상도지리지에 "김해의 가덕도는 수로로 부터 10리에 있으나 왜구로 말미암아 황폐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866년(고종3) '웅천현읍지' 도서島嶼 조에 가덕도를 언급하면서 웅천현 소속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1544년(중동 39) 가덕진加德鎭과 천성만호진天城萬戶鎭을 설치하였으나 임진왜란 후 두 진을 안골포로 이전했다 다시 복귀(1656년<효종4>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1859년(철종10) 현디시 군제개편에 따라 두 곳의 진이 폐지가 되며 1989년 의창근 천가면에서  부산직할시로 편입, 오늘에 이르게 됩니다.

 지금의 지도와는 정반대의 위치, 그러니까 그림이 꺼꾸로 되어 있는데 한양 중심의 관점에서 가덕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성곽 내부에 객사客舍와 아사衙舍, 좌청,우청,이청,사령청,집사청,창고 등을 비롯하여 동서남북 문을 기입해넣고 있습니다.  1872년 군현지도(규장각 소장)로 가덕진을 그린 지도입니다. 서쪽의 붉은 색은 천성진으로 통하는 길입니다.  

 7년 간의 전쟁인 임진왜란 당시 (1592.4~1598.11) 낙동강 하구를 비롯한 인근 지역 대부분이 왜군의 세력권 내에 있으며 군수 병참가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구포와 가덕도, 가락동 , 죽도, 안골포, 웅천 등에 남아있는 왜성은 그 흔적입니다.    

 신항과 가덕을 잇는 330m의 눌차교 입구입니다. 

 하단에서 오는 58번 버스가 이곳을 오가는 유일한 대중교통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가덕사람들은 육지로의 진출을 염원(?)했지만,  이런 모습이 그분들이 원했던 그림일까 생각하면 우울해집니다.  

 선창에서 눌차로 들어가기 전 거가대교의 상판이 눌차 국수봉을 우회하고 있습니다.  태풍 매미가 이곳을 할키고 지나갔을 때 섬은 아연할 정도로 엉망이었지만, 시방 일대에 벌어지고 있는 개발바람은 초특급태풍  매미를 우습게 합니다.  개발로 인한 상처가 아물기 위한 시간은 얼마나 될까 ? 자꾸만 회의가 몰려 들었습니다.

 불과 20년 안짝에 수천수만년 일대의 땅과 해안이 몸살을 앓습니다.  전대미문의 소용돌이입니다. 자연과 사람이 다같이 병들었습니다.

 240m쯤 되는 천가교를 걷습니다.  눌차에 사는 후배 말로는 1995년인가 96년에 놓였다고 합니다.  눌차에는 외눌과 내눌마을이 있고 국수봉138m 넘어 항월마을과 정거마을이 진우도를 건너다 보고 있습니다.

 외눌 마을 골목길입니다.

 당산나무에 스피커가 설치되어 마을소식을 나누기도 합니다.

 눌차에서 흔히 보이는 창고입니다.  용도는 양파보관 창고였다 합니다.

 골목을 돌아다니며 '오래된 흔적들'을 찾아 봅니다.

 부엌쪽 창인데 특이하게 양철로 덧문을 해달았습니다.  유리가 보편적인 건축재로 쓰이기전 모습입니다.

 그리고 돌담입니다.

 이곳 주민들의 주수입원인 굴종패 조가비입니다. 쉽게 말하면 여기에다 굴씨를 부착하여 일정 정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지방으로 판매하는 것입니다.

 동선새바지 가는 길입니다. 내눌마을 끝집에서 약 500m 가량 이어져 있습니다.

 매봉과 연대봉이 귀를 쫑긋 세운 채 남해를 바라다 보고 있습니다.  눌차만은 또 매립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멀리 다대포와 솔섬과 몰운대가 신기루처럼 보입니다.  육계도陸繫島인 몰운대가 예전처럼 몰운도로 보입니다. 좌측 산비일에 계단식으로 들어선 다대5지구와 롯테케슬을 이 그림에서 지우고 싶습니다.  

 생교동 입구 소나무집입니다. 우측으로 가면 천가동으로 가고 좌측은 동선항과 기도원 방향입니다.

 동선항에서 바라 본 하구와 그 너머 백양산자락입니다.

 동선항 입구 옛집을 만났습니다.  돌담으로 바람을 막고 키낮은 처마에 마루며 창호문이 반가웠습니다.  갯가 일을 하시는 분이 시시는 듯 목장화와 해녀복이 있습니다.

 아마도 초가 삼칸 집인듯 한데 부억은 양철로 으측 창문은 시멘으로 개조한듯 합니다. 요즘 이런집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진 찍기도 죄송스러워 조심스레 셔터를 눌렀습니다.  

 창고로 쓰는 듯한 곳인데 논약분무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약간의 밭작물도 심어 가꾸는 것 같습니다.

 동산항을 지나 기도원 들머리입니다.  누군가 길을 냈다는 소리를 전해들었지만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습니다.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이길의 용도가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몇 해 전만 해도 잘 가야 리어카 한대 겨우 들어갈 수 있었던 소로였는데,  혹시나 신공항을 대비한 길딱기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동선새바지 길 역시 몇 해 전에 비해 그 폭이 대폭 확장된 듯 했습니다.  부산의 마지막 자연해안도 이렇게 길이 열였습니다.  단순히 길 걷기만의 용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몰운대와 쥐섬입니다.  대항새바지에 이르기 까지 쥐섬과 물운대의 간격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무식하게 깍아냈습니다. 여름 장마나 태풍의 내습이 끼칠 영향을 생각해 봅니다. 

길을 내기 전 기도원 가는 길입니다.                             출처:다음 지도                                                                                            

뒤돌아보니  국수봉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우중한 하늘도 제법 걷혀 시계도 좋습니다.

 기도원 못미쳐 장대에 낫을 달아 자연산 미역을 채취하는 분을 만났습니다. 준비한 다라이 한 가덕입니다.   

 굽이치는 길 끝에 어음포가 보입니다.  간사한 마음입니다. 이 자락에서 좀전에 무식한 길내기에 대해 비난한지 얼마라고 이 모퉁이가 보여주는 풍광에 반해 좋니 안좋니 간언을 합니다.    

 몰운대와 쥐섬 두번째 포착지점입니다.

 기도원 입구입니다.  예전 모습 그대로 입니다.  가덕 산행을 하는 산꾼들도 이곳을 지나면 더이상 길이 없음을 알고 출입하지 않고 내버려 둔 그들만의 공간입니다.

 기도원은 제법 넓은 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도원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저 역시 생각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좀 거부감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네이버 지식창에 저와 같은 의문을 가진 사람이 더러 있어 질문을 하고 거기 답변이 있는데    "기도원은 오갈데 없는사람 먹여주고 재워주는곳이 아니라 하느님께 기도하는 곳입니다 " 라는 것과 함께 "기도원은 성도 중직자, 사역자(전도사 목사님)들이 영적 에너지와 갈급함을 채우는곳 입니다. " 라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이비를 조심하라는 답변 밑에 이런 선전성 답변도 잇었습니다. "

정말 좋은 기도원 추천할까요?? 00에 있는 00기도원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이구요. 이 기도원에 와서 기도하면 응답안되는 것이 없답니다. 엄청난 기적이 있죠...^^아픈 사람은 병고침  그리고 직장이나 가정의 문제 있는 사람은 해결을 다 받는다죠. 이런 말이 있어요..

"00기도원은 돌을 들고 가면 금을 가지고 나온다." 그말의 뜻은 문제를 가지고 가면 해결을 받는다는 얘기죠.ㅋㅋ "

어쨌든 신앙의 갈급함을 채우는 곳이 기도원인가 봅니다.    

 몰운대와 쥐섬 세번째 포인트에서 잡은 풍경입니다.

 기도원을 빠져나와 강서구가 새로 길을 조성한 곳으로 향합니다.

 기도원 전경입니다.

 누릉령로 가는 계단입니다.

 낙동정맥의 말단 금정산맥의 전 줄기가 한 눈에 들어 옵니다.  금정, 백양, 고원견산, 승학산, 아미산, 몰운대

 누릉령 주변에서 돌미역을 채취합니다.

 

 멀리 대항새바지 옆 아동도가 보입니다.  동선항으로부터 1.5km 지점입니다. 

누룩령 해안이 내려다 보입니다.  아직 공사중인데 혼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첫번째  산불감시원과 몇 마디 나누었습니다. 1월 중순부터 이곳을 감시하고 있는데, 비싼 돈 들여 길 조성해 놓고 왜 차단하고 있냐는 민원이 제기되어 길을 열었다고 하더군요.   

 이정표가 세워져 있습니다. 대항새바지까지 3.4km 남았습니다.

 두 번째 산불 감시원을 만났습니다.  41년생 김영배씨와 50년생 김영배씨였습니다.  눌차와 선창에 거주하시는 분들인데, 일대의 야생동물 현황을 물었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동물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누릉령입니다.   

 갈석을 채굴하여 이곳 선착정에서 배로 옮겨 싫었다고 합니다.  한 10년 전 까지만 하더라도 매봉 자락에서 채굴했다고 합니다. 

 

 해안의 바위들이 특이한 빛입니다. 기도원부터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음포로 향합니다. 여기서 동선새바지로 가거나 생교동골 대항으로 가는 갈림길입니다. 

 누릉령에 대한 설명글입니다.

 여기에 몇 가구가 살았다 합니다.   

 

 

 

 

 

 세번째 만난 산불감시원 42년생 허영화 씨입니다.  송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외양포外洋浦 해안입니다. 원래는 대항大項의 바깥쪽 목덜미인 項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외항포였습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그들의 사령부를 주둔시킨 곳으로 지금도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해안 가장자리에는 방풍림을 식재했습니다. 

 지붕을 초록이며 파랑으로 단장하긴 했습니다만 벽과 창문틀은 일본식 군막사 그대로입니다.

 녹나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1904년 8월 일본은 그해 2월 강압에 의해 체결된 '한일의정서韓日義定書'의 협정에 따라 조선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경성,평양, 의주, 진해 등 5곳에 그들의 병영을 건설하고 군사를 주둔시킬 것을 결정했습니다.  이 조약을 빌미로 조선의 광대한 땅을 군용지로 수용하기 시작했는데, 외양포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요새포병대였습니다.  포병대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지역민의 저항이 있었습니다만 강제 진압하고, 가덕과  천성면의 군기고까지 습격하여 봉기를 차단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사실이 광무9년(1905, 명치38) 2월14일 내무대신 조병식이 외부대신 이하영에게 보낸 공문서에 기록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1905년 5월7일부로 외양포는 조선인 마을에서 일본군 포대진지로 변했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만주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그들의 무적함대인 발틱함대를 동북아시아로 진격시키는데 그때가 1904년 10월 중순이었습니다.  대한해협을 통해 귀항지인 불라디보스톡으로 가는 길목인 이곳 진해만에서 일본군 연합함대와 일전을 치루게 되는데 1905년 5월27일과 28일 사이의 일로써 이때 러시아는 고강도의 훈련으로 치밀한 대비를 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치욕스런 패배를 당하게 됩니다.  함선침몰 19척, 나포함선 15척, 벼원선 억류2척, 전사자 5천명, 사령관 로제스트 벤스키 중장을 포함한 6천 여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반면 일본군은 수뢰정 3척과 700여명 정동의 사상자를 냈을 뿐이었습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일제는 국제사회에서  조선 통치에 대한 권리를 부여받게 됩니다.      

 일본군 포대터 입구에 세워진 '사령부발상지' 비석입니다. 뒷면에 명치11년(1936)6월에 세웠음을 암각하고 있습니다.

 포진지는 동서길이 약 20m 남북70m의 사각형으로 사방에 벽을 만들어 동북에는 시민트벽체를, 남서쪽은 흙으로 둘러쳐져 있습니다

 포는 두문씩 세곳을 설치했고 두문 사이 마다 이중벽으로 된 탄약고를 설치했는데 견고하기가 놀라울 정도입니다.

 탄약고 내부입니다.

 마을 곳곳에 보이는 우물터

 고개를 넘어 다시 대항으로 향합니다.  대항마을은 전통 숭어잡이인 육수장망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대항의'숭어잡이'는 16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전통 어로법으로  여섯 척의 배가 진을 치듯 타원형으로 그물을 바닥에 깔아 놓고 기다리다가 숭어 떼가 그물 속으로 들어오면 어로장의 구령에 맞추어 동시에 그물을 끌어올려 숭어를 잡는 방법입니다. 숭어가 있는 곳을 따라가지 않고, 숭어가 오기를 기다려 잡는 어법으로. 4월이 되면 숭어는 알을 낳으러 해안가 만으로 몰려드는데, 산란철이 되면 숭어는 눈에 콩깍지가 씌인 듯 반투명 물질이 덮여 수면 가까이 떠다닌다고 합니다. 그냥 낚시 바늘로 몇 번의 상하 운동 끝에 숭어를 걸러 잡는 숭어 훑치기 낚시가 가능한 것도 그 때문인데. 숭어 떼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 물빛이 불그스레해지고 이때. 산 위 망대에서 어로장은 그 물빛을 보고 '숭어 떼가 왔다'. '후려랏!'하고 어로장이 힘찬 고함을 지르면  선원들은 구령에 맞춰 그물을 당겨 숭어 떼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은 뒤 그물을 들어올리게 됩니다.  '밖목선 그물 조지라(모여라). 안목선 그물 조지라~!' 어로장은 계속 구령을 내려 지시를 하고, 넓게 퍼져있던 여섯척의 배들이 그물을 당기면서 점점 모여들면서  그물이 올려 한바탕 잔치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 순간  50㎝ 크기의 숭어들이 한꺼번에 튀어오르며 퍼덕이는 소리는 장관이라고 합니다. 가덕도 대항 숭어잡이는 2000년부터 지역 민속 축제로 지정, 매년 4월'가덕도 대항 숭어들이 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원래 가덕숭어는 낙동강에서 흘러 내리는 담수의 냄새를 ?아 이곳에 형성되는 먹이를 찾아 떼를 이루게 됩니다. 가덕도 등대가 있는 동두말에서 외양포 쪽 포구나무개-큰내끝-내동삼으로 이동하는데, 숭어들은 샛바람을 피해 섬의 남쪽바다로 넘어 온다고 합니다.  그 수가 많을 때 바다는 붉은색을 띄게 되는데, 망루에서 어로장이 지시를 내림으로서 조업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찰나라고 합니다. 20여초 만에 상황이 종료되는 순간적 판단이 요구되는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작업입니다. 

어로장이 되기 위해서는 어로장 일을 배우는 견습 어로장인 '조망助望'과 차석 어로장 과정인 '부망副<버금부>望' 과정을 통과한 '원망元<으뜸 원>望'이어야 합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숭어의 말귀를 알아듣고 물빛을 살필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숭어는 귀기 밝아 어로장의 명령이 떨어지기 까지는 숨소리를 죽인채 대기해야 합니다. '동의보감 東醫寶鑑'에서는 '수어秀魚'라하여 "숭어를 먹으면 위를 편하게 하고, 오장을 다스리며, 오래 먹으면 몸에 살이 붙고 튼튼해진다. 이 물고기는 진흙을 먹으므로 백약百藥에 어울린다' 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숭어는 겨울동안 바다에서 태어나 새끼시절 무리를 지어 다니며 연안으로 몰려와 플랑크톤을 섭취하면서 자라는데, 여름이면 성장이 빨라져 초가을 20cm급으로 자라다  수온이 내려가는 늦가을 바다로 내려가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크기에 따라 어린숭어는 '모쟁이' 또는 모치(毛峙:자산어보), 중간크기를 '남방' , 1kg 이상되는 것을 숭어라 합니다.

그리고 머리가 둥글고 비늘 중앙에 흑색 반점이 있는 것을 '참숭어' 몸에 연한 흑선이 세로로 그어져 있고 주둥이가 짧고 붉은 것을 가숭어라 하는데 가덕의 숭어는 참숭어입니다.  세계적으로는 17속 80종이 있고, 우리 연근해에는 2속 4종(숭어, 일숭어,가숭어, 등줄숭어)이 서식하고있습니다  

 육수장망에 동원되는 배는 노櫓가 둘 셋 있는 1.2톤짜리 무동력선 6척으로 밖목선(6명),안목선(4명),밖잔등(1명),안잔등(2명),밖귀잡이(3명),안귀잡이(3명)으로 배치가 이루어 집니다. 그믈의 크기는 길이 45~50발에 폭 38~40발 가량된다고 합니다. 봄 숭어는 육질이 좋아 맛이 좋은 반면 가을숭어는 씨알이 굵고 기름진 차이가 있습니다.    

 

 사진출처: http://kr.blog.yahoo.com/Waterview33  및 한국의 소리를 찾아서 에서

               

 연대봉입니다. 마치 엄지손가락을 세워 놓은듯 한데 거기 조개껍질이 묻어 나온다합니다.  그러니까 아주 오랜 옛날 하고도 옛날 이곳이 바다 밑이었다는 말인데,  한 번 확인해 볼입니다.   

 대항마을 길은 겨우 차 한대가 다닐 정도입니다.

 고개길을 걸어 천성으로 향합니다.  특별하게 보행자를 위한 안전장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전망은 두루 좋습니다. 다만 날이 저물고 있어 안타까을 따름입니다.  외양포에서 천성까지 약 4.7km입니다.  도로는 14굽이 정도 휘어집니다.  성토봉과 연대봉 사이 고개를 넘는 길입니다.

 거가대교로 볼품없이 망가지고 뜯겨져 나간 천수말이 눈을 아프게 합니다.  이전에 배를 타고 천수말을 돌때면 기암괴석이 울끈불끈 솟아 참 절경이 따로 없었습니다만  거가대교는 가차없습니다.  고개를 넘어서면 천성이 한눈에 들어 옵니다.  온통 도로공사로 까발려진 산자락과 마을은 어떤 아침을 만날 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든터가 이렇게나 엉망인데 마을주민들의 마음이사 어떨 것인지 안봐도 알입니다. 하지만 그도 나이든 분의 시선입니다.

 저무는 해가 마지막으로 기지개를 펴듯 햇살을 퍼주고 있습니다. 

 마을 가로등에 불이 들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길은 반듯하지만 막상 곁을 스치는 차들의 행진은 유쾌하지 않습니다.  애초 사람을 위한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58번 - 배차간격 33분
하단지하철역 → 광로주유소 → 을숙도휴게소 → 명지시장 → 명지새동네 → 진목 → 경일중학교입구 → 사취등 → 강서경찰서 → 순아동

→ 성산다리 → 녹산수협 → 녹산중학교 → 녹산 → 녹산농협 → 산양마을 → 성고개 → 송정 → (구)검문소 → 부산신항만  

 

생굴라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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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10.14 13:12

    첫댓글 눈으로 다 둘러 보았네 하지만 걸음으로 한번 가~보입시다 마

  • 10.10.14 15:05

    구경한번잘했어요..
    둘레길.. 좀더 가꾸면 예쁜길 될것같네요..
    객꾼님..좋은곳 소개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담에 가이드한번하셔서 울산방회원들께 직접소개 시켜주세요..

  • 10.10.14 15:46

    배꼽이 너무 많아 아쉽당...가자~!!

  • 10.10.14 16:59

    생굴라면 맛있것따~~~가보고싶네

  • 10.10.15 07:15

    아고 리얼하게 올리셨네요... 추억도 있고 .. 꼭함 댈고 가실거죠?

  • 10.10.18 12:29

    한번 가보고 싶네요... 둘래길~~ 멋있어요...!!

  • 11.08.21 11:15

    뒤 늦게 보았지만 아주 상세한 글입니다 저도 상생맨과 함께 가덕도 둘레길을 몆번 가보아서 더욱더 실감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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