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출발해서 6천m대의 히말라야의 봉우리를 오르고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 오는 등반 일정이 11일 만에 가능한 등반 대상지가 히말라야를 포함해서 전 세계에 몇 개나 될까? 고소적응이 잘 된 등반가가 아니라 일반적인 등산동호인들의 경우라면 그 수는 더욱 제한될 것이다.
2010년 8월에 12일의 일정으로 6천m대의 히말라야 만년설봉을 오르고 온 원정대가 있었다. 유라시아 트랙(대표 서기석)에서 주최한 원정대였고, 원정대를 이끈 사람은 당시 8천m급 히말라야 봉우리 11개를 무산소로 오른 김창호 대장이었다. 8천m 급 14좌 완등을 목표로 등반을 해 온 김창호 대장의 경우는 그렇다 치더라도 원정대원으로 참가한 대원들은 일반적인 등산동호인들로 조직된 원정대라서 그 결과에 적잖이 놀랐던 것이 사실이었다. 당시 대상지는 라닥의 주도 레(Leh)시내 외곽에 위치한 스톡캉리(Stock kangri; 6,150m)였다.
2015년 종로구상공회산악회(회장 임운종) 회원들로 구성된 11일 일정의 원정대가 목표로 한 봉우리 역시 6천m급의 히말라야 만년봉이었다. 12일이나 11일의 일정으로 가능한 6천m급 봉우리는 스톡캉리 뿐이었을까? 이번 원정대의 목표 역시 스톡캉리였다. 2010년보다 하루 짧은 11일의 일정으로…
임운종(58세) 원정대장을 비롯한 11명의 대원들로 구성된 <종로구상공회산악회 2015 인도 히말라야 스톡캉리(6,150m) 원정대>는 7월 31일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인도의 수도 델리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국내선 청사로 이동하여 레(Leh)행 비행기를 기다려야 했다. 5시간 가까이 연착한 에어 인디아로 인한 결과 호텔로 이동하여 잠깐 눈 붙일 겨를도 없이 레行 비행기를 기다리며 대기실 곳곳에 누워 쪽잠을 자야 했다.
국내선은 다행히 연착되지 않아 델리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라닥의 주도 레공항에 1시간 10분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증명서를 작성해서 제출하고 대원 모두 비자를 확인한 후 밖으로 나오자 현지대행사 직원인 라주(30세)가 대원들을 맞아 주었다. 준비된 트럭에 짐을 싣고 3대의 택시에 나눠 탄 후 호텔로 향했다.
호텔은 레 시내 맨 위쪽에 위치한 Radakh Palace Hotel로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어 좋긴 했지만 해발고도가 3,500m나 되어 고소적응을 해야 하는 대원들에게는 부담스런 위치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올라야 할 봉우리를 위해 레에 머물며 가능한 고소적응을 해야 하므로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레 공항에 도착해서 트럭에 짐을 싣고 있는 대원들. 가장 높은 해발 3,400m의 고도에 위치한 비행장이라고 한다>
11일의 일정에 6천m가 넘는 봉우리를 올라야 하는 데는 몇 가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원칙이 필요했다. 고소적응을 위한 원칙은 첫 째, 천천히 걷고(움직이고), 둘 째, 물을 많이 먹고, 셋 째, 숨을 깊게 쉬는 것이었다. 대원들보다 등반 경험이 조금 더 많은 필자에게 한국 출발 전부터 대원들이 고소적응 방법에 대해 물어올 때마다 위의 세 가지 외에 달리 얘기해 줄 것이 없었다. 레에 도착해서 한 가지 추가된 것이 있다면 ‘머리를 비롯한 보온’을 얘기해 준 것이 전부였다.
레에 머무르는 이틀 동안의 고소적응은 체모 곰파와 왕궁, 헤미스 곰파, 틱세이 곰파 등 사원 둘러보기로 조금은 지루한 일정이지만 절대 빨리 움직이지 말고 어슬렁거리면서 시간 보내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헤미스 곰파에 다녀오면서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들렸던 티베탄 식당에서 한가지 등반을 위해 조심해야 할 것이 추가되었는데, 미네랄 워터 외에 로컬워터가 묻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 상추, 오이 등을 주의하라는 것이었다. 주의에도 불구하고 샐러드 밑에 깔려 있는 상추로 쌈을 해 먹은 대원 두 명은 이후 설사로 고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고소적응은 레 시내 외곽의 언덕 위에 자리잡은 체모 곰파와 왕궁을 걷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틀 째 고소적응은 라닥에서 가장 유서깊은 헤미스 곰파를 다녀 오다가 틱세이 곰파를 들리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사진은 틱세이 곰파>
레의 날씨는 예전과 달리 오후만 되면 비가 내린다고 현지대행사 직원 라주가 얘기해 줬는데 아닌 게 아니라 오후가 되자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과 번개를 동반해 비가 내렸다. 짧은 일정의 원정대에게 비는 걱정거리임에 분명했다. 도착한 날도 비가 내렸고, 다음날에는 더 많이 내렸다. 스톡 캉리쪽의 상황은 어떨지 상상이 갔지만 애써 무시했다. 이번 원정대에게 주어진 조건이 이렇다면 받아들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상행 캬라반 첫날(8월 3일). 원래 계획은 만카르모(4,400m) 캠프까지 가는 것이었으나 캬라반 4시간만에 도착한 창마(4,000m) 캠프에서 멈춰야 했다. 언덕을 넘어서면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무거운 짐을 진 말들이 진창을 건너는 것이 위험하다며 창마에서 1박을 해야 한다고 했다. 말에 싣고 올라왔어야 할 짐이 늦어서 대원들은 비가 곧 내릴 것 같은 싸늘한 캠프 곳곳에서 3시간 동안 애타게 짐을 기다려야 했다.
<상행 캬라반 둘째날 아침. 언덕위로 올라서자 처음 보는 풍광들이 펼쳐졌다>
<계속된 비로 개울 물이 불어나 신발을 벗고 건너야 했다. 얼음장 같이 차가운 물에 발이 금방 얼어붙을 것 같았다>
캬라반 둘 째날(8월 4일). 아침 일찍 셀파들과 현지 여행사직원들이 진창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올라갔다가 돌아왔다. 운행에는 문제가 없다고 알려준다. 어제 못 갔던 만큼 오늘 가야 할 거리가 만만치 않았기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진창이 된 개울을 건너 언덕을 향해 일렬로 걸었다. 오르막이 시작되는 초입 길가에 파랑색 글씨로 새겨진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No Pain, No Gain”. 천천히 언덕을 올라서자 기이한 풍경이 탄성을 울리게 한다. 마침 밤새 내리던 비도 그쳤다. 대원들은 처음 보는 풍경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 촬영에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바삐 오갔다.
강바닥으로 내려서자 진창으로 변해 있는 길을 조심스럽게 피해가며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다. 강바닥에는 여러 갈래의 황톳물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만카르모로 꺾어지는 개울을 건너기 위해서 신발을 벗어야 했다. 차가운 개울을 건너자 윗쪽에서 내려오는 여러 무리의 사람들과 원정대의 짐을 지고 내려오는 말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들이 왜 내려오는지 궁금했다. 등반을 잘 마치고 내려 오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로 내려 오고 있는 것인지?
라주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계속 내린 비와 스톡캉리의 많은 눈으로 등반을 단념하고 내려온다는 반갑지 않은 얘기였다. 유럽에서 온 팀의 젊은 여성산악인은 “허벅지까지 빠지는 가파른 설사면에서 악전고투 끝에 5,800m까지 진출했지만 눈이 많이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되돌아 섰다”면서 아쉬운 표정으로 말을 맺고는 “행운을 빈다”며 돌아서 내려갔다. 이런 얘기를 듣고 있는 임운종 원정대장과 대원들의 표정이 굳어져 보이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만카르모 캠프에서 도시락을 먹고 가파른 사면을 천천히 거슬러 올라 창마 캠프를 출발한지 8시간 만에 해발 5,050m의 베이스 캠프에 도착했다. 창마에서 얘기치 않게 1박을 해야 했지만 베이스 캠프 입성까지의 일정은 처음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에 세운 일정 계획과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베이스 캠프 도착 후 저녁식사는 닭백숙이 준비되었다. 네팔에서 초빙한 요리사 치링의 솜씨가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다>
김창호 대장의 14좌 완등 과정에서 요리사 역할을 했던 치링(33세)은 대원들의 입맛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바삐 움직였다. 식당 캠프가 차려진 후 빠른 준비 덕에 대원들은 배고픔의 시간을 줄일 수 있었고, 그의 손에서 만들어진 음식은 대원들의 입맛을 돋구기에 충분했다. 대원 각자 가져온 밑반찬 역시 입맛 돋우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B.C 도착 첫날 저녁은 잘 삶은 닭백숙과 맛있는 밑반찬들과 닭죽에 누룽지와 숭늉까지 남부럽지 않게 양껏 먹을 수 있었다.
8월 5일. 고소적응을 위한 예비일이다. 해발 5,050m의 고도에서 하룻밤을 자고 난 후의 고소적응 상태는 본 등반을 위해 중요한 것이라서 아침식사를 위해 모인 대원들의 상태파악을 했다. 구질구질하게 내리던 비가 그친 것도 다행이었지만 그리 나쁜 컨디션을 보이는 대원이 없어서 더욱 다행이었다. 혈중산소포화도 측정기로 대원들을 측정해 본 결과 수치가 그리 나쁘지 않다. 다만 머물러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게 문제다.
오전 11시경, 대원들은 안전벨트와 등반 슈즈를 착용하고 5,200m의 언덕 위까지 운행 연습 겸 고소적응을 하고 돌아왔다. 다행히 오후 들어 날씨가 더 맑아졌다. 저녁 무렵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유럽에서 온 팀과 인도 육군 팀의 대원 여러 명이 정상 등정을 했다고 하는 긍정적인 소식이 라주를 통해 들었다. 인도 육군 팀은 탈진으로 구조대가 출동해서 밤늦게 내려 왔다. 중요한 것은 루트상에 눈이 많다고는 해도 정상까지 루트가 뚫렸다는 사실이다.
<빙하가 시작되는 곳에서 장비를 착용하고 기념 촬영>
<깊은 눈을 헤치며 설사면을 등반 중인 대원들>
<안부를 향해 사면을 횡단 중인 대원들>
<5,800m 안부에서 정상을 향해 등반 중인 자일 파티>
<정상으로 올라서는 대원들>
<정상에 선 종로구상공회 산악회 스톡캉리 원정대원들. 가운데가 임운종 대장님>
<정선영 대원(우측)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저녁 무렵 단효진 대원(50세)의 혈중산소포화도 수치가 40%SpO2까지 떨어졌다. 산소를 사용해야 했다. 한 밤중에 대원들이 스톡캉리를 등반 하기 위해 출발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다지 반가운 일은 아니었지만 염려하는 대원들에게 괜찮다고 오히려 위로해 주는 단 대원의 마음 씀씀이에 팀워크가 좋은 팀과 함께 등반을 하게 된 것을 감사히 생각했다.
8월 6일. 밤 1시경 쿡 치링이 끓여 준 죽을 먹고 2시가 막 넘어설 즈음 베이스 캠프를 출발했다. 어두운 사면을 올라서서 스톡캉리가 있는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 설원이 시작되는 곳에 도착했을 때 먼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상태가 안 좋아 하산을 결정한 이복자(여, 55세) 대원을 라주와 함께 내려 보냈다. 빙하를 중간쯤 건널 때까지 들려오는 아 복자 대원의 울음소리의 의미는 정상으로 향하는 대원들 모두 비슷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산소포화도측정 중인 인근영 등반대장>
첫 사면을 올라선 후 돌무더기에 앉아 간식을 먹고는 정상에서 뻗어 내린 설사면 우측으로 고도를 높였다. 해가 설사면에 들면서 대원들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느려졌다. 고도를 올리면서 더딘 발걸음과 함께 갈증이 심하게 몰려왔다. 전날 푹 쉬고 잔 덕분에 졸립지는 않았다. 설사면 중간에서 좌측으로 눈사태가 난 곳을 건너 해발 5,800m의 안부로 올라섰다. 시간은 벌써 9시간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정상까지 350m의 비교적 가팔라 보이는 암설릉 뿐이었다.
갈증과 피로가 겹친 대원들에게는 갈등의 시간과 함께 마지막 간식시간이 주어졌다. 휴식이 끝나기 전에 컨디션이 좋아 보이던 김정민(여, 58세) 대원과 박기명(54세) 대원이 하산을 결정했다.남은 7명의 대원과 필자와 셀파 등 12명의 대원은 2개의 자일파티에 몸을 묶고 정상을 향한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좌측의 경사는 점점 세져 갔고, 우측의 설사면도 무시할 수 없는 경사라서 한치의 방심도 허용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더 날카로운 릿지로 이어져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2시간 30분 정도 무거운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움직일 즈음 앞쪽의 자일파티가 정상에 도착하는 것을 본 순간 힘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길게 늘어섰던 두 개의 자일 파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속속 정상에 올라섰고, 맨 후미에 있던 클라이밍 셀파와 함께 필자가 정상에 올라섰을 때 대원들은 정상등정의 환희와 함께 얼싸 안고 기쁨을 나누었다. 베이스 캠프를 출발한지 12시간 만에 이룬 등정인 만큼 대원들의 기쁨도 컸다.
정상의식 후 지친 몸으로 하산을 조심스럽게 이어갔다. 급경사면을 가로질러 빨리 내려가자는 나의 제안에 클라이밍 셀파는 위험하다며 올라온 길을 그대로 내려가자고 했다. 지친 대원들의 발걸음은 더뎠다. 가끔씩 자일 파티 중간의 대원이 사타구니까지 눈 속 깊이 빠지면 뒤따르던 대원이 내려가 도와줘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정말 길고도 지루한 하산길이었다. 첫 휴식을 취했던 돌무더기를 지날 때는 날이 어두워진 후였다.
<등정 후 하산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가고 있는 대원들>
<베이스 캠프를 철수하기 전, 전 대원과 스탭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다행히 지쳤던 대원들도 고도가 낮아지면서 컨디션이 좋아져서 어두운 계곡을 거슬러 베이스 캠프를 향해 잰걸음을 옮겼다. 뒤처진 대원들과 함께 움직이면서 대원들의 독려하는 임운종 대장의 리더십은 존경할 만한 것이었다. 그런 노력 끝에 등반을 시작한지 19시간만인 밤 9시 모든 대원이 베이스 캠프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대원들의 무사귀환을 확인한 후 갑자기 쏟아지는 피로감과 졸음에 텐트로 들어가자마자 잠에 빠져 들었다.
11일이라는 짧은 일정으로 6,150m의 스톡캉리를 오를 수 있었던 데는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첫 째 원정 출국 전 좋은 팀웍을 다지면서 줄기차게 실시한 훈련, 둘째, 대원들을 하나로 묶어 놓는 원정대장의 탁월한 리더십. 셋째, 필자의 조언에 적극 띠라서 고소적응을 잘 할 수 있었던 점 등이다. 무엇보다도 예상치 못했던 우중 상황이 우리팀의 등반을 앞두고 맑은 날씨로 변했다는 점은 하늘이 도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뜻을 가지고 최선을 다한 원정대에 내린 하늘의 선물이 아니었을까.
2015 인도 히말라야 스톡캉리 원정대는 11일의 짧은 일정에도 불구하고 12명의 대원 중 필자를 포함하여 8명의 대원과 4명의 셀파 등 총 12명이 정상 등정을 달성했다. 이로써 일반 등산동호인도 비교적 짧은 일정으로 6천m급 히말라야 만년설봉을 오를 수 있음을 보여 줬지만 위에서도 밝혔듯이 몇 가지 조건들을 충족해야만 가능한 등정이었음을 다시 한 번 밝혀두는 바이다.
[참고 자료: 기기 사진은 인터넷에서 찾으세요]
☞ 혈중산소포화도 측정기(%SpO2 측정기 일명 핑거테스트기)
혈중 산소포화도는 고소적응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스톡캉리 B.C의 고도가 5,050m라면 75±5%SpO2(이후 단위 생략)정도면 나쁘지 않다. 이 고도에서 50까지 떨어지면 뇌세포 손상이 나타나고, 30까지 떨어지면 사망한다고 한다. 평지에서는 98을 나타낸다. 고도가 높아지면 %SpO2가 떨어지게 되며 3,500m에서도 80을 넘어서고 있다. 고산병이 확실하게 나타나는 고도가 3,500m 부근이며 평지에서 80이면 응급조치를 받아야 할 정도로 위험한 수준이다.
올바른 사용방법
취침 후와 같이 안정상태를 유지할 때 측정(사실상 고소에서는 이런 상태로 측정이 쉽지 않다.)
측정이 시작되면 1분 이상 연속적으로 관찰 후 평균값을 측정값으로 한다.
햇볕을 피할 것.
손가락을 깨끗한 상태로 측정할 것.
손가락이 차갑지 않은 상태로 측정할 것.
측정 중 움직이지 않도록 할 것.
측정 중 심호흡을 하지 않고 평상 호흡을 할 것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내년엔 캐시미르로 휴가 같이 가시죠?
북알프스도 같이 가시구요~~~^^
@이치상 내년1월8일 코샤인쿤도트래킹15명 다녀와서요..
여름방학때 북알프스 일정보구요.....계획해볼께요..
@하상기 캐시미르는 7월 8월이 적기입니다.
저도 8월 15일부터는 영석형 수색원정대 참가로 7월 말을끼고 8일 일정으로 예정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느낌...수고하셨습니다.
고맙네. 그런 느낌이었다니. 월간산에 활자화되어 나오면 또 다른 맛이겠지.^^
운동 열심히~~~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에 감탄하고 모두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하는 것에 감탄하고 지칠줄 모르는 한국인의 의지에 또 한번 감탄합니다..모쪼록 안전하게 잘 다녀오신 것 축하드립니다. 저는 이제 고산은 가지 못할 것 같고 지금부터 전문적으로 한가지를 10년 이상 꾸준히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고 전문가가 되겠다는 다짐을 다시한번 하게 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캐시미르의 추억을 되살려 숨 안가쁜 트레킹은 꾸준히 가야지.
건강하게~~~^^
저렇케 행동할수있는 이들 모습 넘 좋네
항상 아쉬움에 묻혀있음.....
광식형 언젠가 어떤 계기가 있을거에요. 에이지락 알스퀘어드 잘 드시고, 몸 건강하게 만드시면
조만간 훌쩍 떠날수도 있습니다. 5일날 성민형도 1박 하신다니 5일날 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