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84. 모든 사람이 다 죽을 것인가?
☞ 사망이 죄값으로 온 것으로 한번 죽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니 모든 사람이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롬6:23, 5:12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히9:27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음에 대한 기본적 이해
1) 의학적 측면
의학에서는 죽음을 인격적 과정이라기 보다는 단적으로 혹은 주로 생물학적 사건으로 취급하고 있다.
의학에서 죽음의 개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생체액 유동 기능의 불가역적 정지 (심장과 폐혈관의 기능정지)
(2) 육체로 부터의 영혼의 불가역적 이탈 (호흡기능 정지)
(3) 신체적 통합 능력의 불가역적 정지 (뇌기능의 정지)
(4) 사회적 상호 작용 능력의 불가역적 정지 (뇌피질사)
이러한 개념은 인간의 특성이 의식, 그리고 타인과의 상호 작용을 통한, 사회 환경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보는 견해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죽음은 인간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임상적으로는 심장 고동의 정지를 근거로, 사망하였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심장이 멈추었다고 하여 신체의 모든 세포가곧 죽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의학적 정의와 법률적 정의가 서로 다르다.
과학으로서의 의학은 아직 인간의 죽음에 대해 일치된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 의학 협회의 '죽음의 정의 연구 위원회'는 1983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죽음의 정의는 심장 기능 및 호흡 기능과 뇌반사의 불가역적 정지 또는 소실을 죽음이라 정의 한다."
이상과 같이 의학에서는 죽음을 비인격적인 과정으로 보며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의미라든가 인간적인 죽음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죽음을 비인격적 현상으로 본다는 것은 마치 우리가 매일같이 신문지상에 나타난, 모르는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를 접할 때 느끼는 것과 같은, 전혀 인간적인 뜻이 담겨지지 않은 단순한 현상으로 취급하는 태도를 말한다.
오늘날 의학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인간의 생물학적 죽음을 얼마동안 지연시킬 수 있다는 것 뿐이다.
생명을 연장시키고자 하는 의학적 노력은 은연중 다음과 같은 태도를 형성해 왔다.
곧 의학은 살아 있는 사람을 다루지 죽은 사람과는 상관이 없으며, 어떤 의미에서 죽음은 의학적 노력의 패배로 간주된다.
여기에서 죽음을 부정하는 태도를 볼 수 있다.
2) 법학적 측면
법학에서는 죽음의 의미나 가치보다는 죽음의 책임을 묻는다.
그러므로 자연사(natural death) 보다는 외부의 자극(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인)에 의한 죽음, 즉 살인을 논하게 된다.
법에서는 살인죄(Totung, Homicide: 사람을 살해하는 것을 내용으로하는 범죄)의 테두리 안에서 인간의 죽음을 바라본다.
"사람의 생명은 생활의 기본이므로 법률은 이를 보호하고 이를 침해하는 행위에 대하여 엄벌로 임하는 이유가 있다.
형법상에 있어서 '살해'는 고의로 사람의 생명을 자연적인 죽음의 시기에 앞서 단절하는 것인 반면, '과실치사'는 단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살해는 그 수단 방법에 불문한다.
예를 들면 작위에 의하건, 무작위에 의하건,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유형적이건, 무형적이건 어느 경우에도 불문한다.
한편 과실치사죄는 죽음의 결과발생이 과실로 인함을 말한다.
사람의 죽음의 기준에 관해서는 형법학에서 몇 가지 간단한 이론을 제기한다.
첫째, 호흡이 종지한 시점을 택하는 호흡 종지설.
둘째, 심장의 박동이 종지한 시점을 택하는 맥박 종지설.
셋째, 최근의 심장이식 수술이 개발됨에 따라 뇌의 장기사를 개체의 죽음으로 보는 경우이다.
이는 뇌파의 일정기간 정지로서 뇌사를 판정하려는 뇌파 종지설이다.
법학자인 진발호 교수는 아울러 "현재의 의학수준으로서는 뇌파의 완전 정지상태를 확정할 수 있는 일반적으로 승인된 신뢰할 만한 방법이 없으므로 뇌전파 정지설을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라고 볼 때 맥박 종지설이 타당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나라의 법에서는 맥박 정지를 죽음의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사실과 의학계의 죽음 기준의 과학적인 연구의 발전과 기준 설정에 깊은 이해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블랙 법률사전(Black`s Law Dictionary)에서는 "죽음은 생명이 끝나는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며, 심박동과 호흡이 정지하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는다.
생명의 정지, 존재의 끝남, 의사들이 정의한 바로는 혈액순환의 완전한 정지, 그리고 그에 따른 호흡이나 맥박과 같은 생물적 생명 기능의 정지"라고 정의한다.
이런 정의는 죽음에 대한 전통적 기준으로 뇌기능에 의한 죽음 판단에 대항하는 법 개념이다.
따라서 사람의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법률 정의는 생명에서의 이탈(departure from life), 육신적 삶의 정지(cessation of his physical life)라고 말할 수 있으며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혈액 순환의 완전한 정지(total stoppage of the circulation of blood)와 호흡이나 맥박과 같은 생명기능의 정지이다.
이와같이 죽음에 대한 법적 이해는 죽음을 과정(process)으로 보기 보다는 어떤 시간의 순간에 일어나는 사건(event)으로 보고 있다.
3) 철학적 측면
의학에서 죽음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철학과 형이상학에서도 이 죽음의 문제를 문제삼는 것을 소홀히 하고 회피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 서양에서는 죽음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고조되었으며, 일반대학 철학과에는 '죽음과 죽는다는 것(death and dying)'이라는 과목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죽음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문제로는 죽음의 공포(the fear of death)라는 문제가 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5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죽음에 대해서는 죽음이 괴로울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를 두고 있으나 죽음 그 자체는 절대로 괴로움이 될 수 없다는 에피쿠로스(기원전 341-270)의 주장이며,
둘째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려면 죽음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스토아 철학자들의 주장이며,
세째는 인간은 절대로 죽음을 정확히 알거나 직시할 수 없다는 스피노자(1632-1677)의 견해이며,
네째는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죽음을 가지고 온다는 입장이며,
다섯째는 죽음 자체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쇼펜하우어(1788-1860)의 주장이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인간은 구체적인 삶과 지금 있는 '현존재' 또는 '실존'에 부쩍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실존철학은 실존을 그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지금 여기 인간을 문제삼고 있다.
'죽음의 문제'는 이제 인간이 간단히 처리해 버린다거나 또는 피해 버릴 수 있는 문제로서가 아니라 그 문제와 진지하게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로 대두하게 된다.
현대철학은 크게 현상학, 실존주의, 분석철학, 실용주의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현상학과 실존주의는 주로 유럽에서 성행하여 대륙철학이라고 부르고, 분석철학과 실용주의는 영국과 미국에서 성행하여 영미철학이라고 부른다.
죽음에 관해서 영미철학보다는 대륙철학이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 중에서도 실존철학은 죽음을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실존철학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하이데거(Heidegger)는 존재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은 신의 존재와 내세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더라도 죽음을 직시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같은 실존철학주의자인 샤르트르(Sartre)는 어떤 의미도 죽음에서 쁹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영미철학에서는 죽음의 문제를 그리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경향이 있으나, 분석철학의 대표자 중의 하나인, 종교언어를 윤리적으로 해석한 필립스에 의하면, 죽음의 공포는 내세를 현세에 실현시킴으로써 '영원한 술어'로 표현된 영광(?)을 누릴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전통적인 기독교 입장에 서서 이상의 입장들을 자신의 '종말론적 해석'으로 비판한 힉(John H. Hick)은 비록 그 내세는 미래 증명적이긴 하지만, 우리가 - 비록 희미할 수 밖에 없겠지만 - 실제로 내세를 가정하지 않는 한 죽음의 의미를 발견 할 수 없다고 했다.
http://blog.daum.net/mikelondon/144
죽음에 대한 신학적 이해
들어가며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종말론은 조직신학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해 왔다. 종말론이 단지 신학의 부록 정도로 취급된 것이다. 그러던 중 19세기 말 요하네스 바이스와 알베르트 슈바이처 이후, 기독교의 종말론적 지평이 새롭게 열렸다. 종말론이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부활과 관련된 가장 핵심적인 주제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에 의하면,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종말론이 아닌 기독교는,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다. 위르겐 몰트만은 “기독교는 단지 부록에서만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종말론이며, 종말론은 애초부터 기독교 교리의 한 부분일 수 없고, 오히려 모든 기독교의 설교와 기독교의 실존 및, 모든 교회의 특징이 종말론적인 방향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신약성경의 ‘마지막’(텔로스)이라는 단어1)
1. 삶 가운데 가득한 죽음의 현실
20세기 말,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오늘날의 세계를 ‘전지구적 위험사회’라고 보았다. 오늘날은 한마디로 총체적 죽음의 위기 속에 있는 시대이다. 죽음은 인간의 보편적 현상이기 이전에, 모든 나라의 모든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현대는 과학 기술이 발달한 만큼, 과거에 없었던 원전 방사능 유출 위험과, 유전자 조작 식품의 증가, 지구 온난화가 발생하고, 교통의 발달과 함께 에이즈, 사스, 조류독감이 전 세계로 신속히 확산되고 있다. 이미 911 뉴욕 참사에서도 보았듯이, 인구가 과도하게 밀집된 지역에서는 지진, 해일, 테러 등과 같은 재난이나 사고에 대해서도, 과거와는 다른 메가톤급의 참사가 발생한다. 우리의 삶 가운데에는 죽음의 현실이 가득하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캄보디아 여객기 추락으로 탑승자 22명 전원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통해 전달되는 죽음은, 실재가 아닌 타자화 된 변형적 이미지로 다가올 뿐, 우리는 죽음에 대해 매우 무감각한 시대를 살고 있다. 각종 영화와 컴퓨터 게임 속에서 엔터테인화 된 살상 장면들이 이를 부추기고 있다. 죽음을 가족 내의 사건으로 경험하는 사람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대가족이 함께 살 때에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쉽게 경험했다. 그러나 핵가족으로 사는 우리 시대는 친척들의 죽음도 자주 경험하지 못한다. 임종의 장소도 거의 병원이다. 가족들 주위에 둘러싸여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마감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일이 되었다. 그런 환경에서 내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자주 상기되지 않는다. 그렇게 살다가 갑자기 마주치게 되는 죽음의 선고 소식은, 우리를 당혹케 한다. 우리의 질문은 우리가 내일 또는 내년에 무엇을 할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내일이나 내년이 과연 남아 있을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약 4:13 - 14) 13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어떤 의미에서 갑자기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죽음은 예고된 죽음이다. 죽음은 이미 거기에 있었다. 우리가 보지 않았을 뿐이다. 개인적인 종말론은 겉보기에 한 개인의 끝으로 보이는 죽음에 대한 신앙의 응답에 관한 성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2. 죽음의 정의
의학적으로 죽음에 대한 판정을 내리는 전통적인 기준은 일반적으로 심폐사였다. 그런데 오늘날 인공심폐소생술의 발달로 심폐사의 시점을 정확히 판단하기가 어려워졌다. 인공호흡기를 이용하여 호흡을 유지시키면 심장박동, 맥박, 혈압, 체온 등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뇌사의 개념이 나오게 되었다. 뇌사란 뇌의 기능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어 회복 불가능한 상태를 말하는데, 우리나라는 2000년 2월 9일부터 뇌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뇌사에는 전뇌사, 대뇌사, 뇌간사가 있다.2) 그러나 뇌사는 이론적으로 확고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직까지 뇌의 모든 기능에 대한 정확한 해부학적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죽음이란 인체의 각 세포의 죽음을 기준으로 하는 세포사이다. 그러나 무덤 속에 들어간 사체에서도 머리카락이나 손톱이 자라나는 경우가 있으므로, 세포사를 죽음의 기준으로 삼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이처럼 죽음에 관해 고찰할 때 부딪히는 문제는, 의학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죽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죽음의 신비는 생물학적 차원에 있어서조차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동시에 우리는 단순히 하나의 피조물로서 죽는 것이 아니라, 인격체로서 죽는다.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죽음으로 인하여 초래되는, ‘의미의 위기’에 직면한다. 죽음은 진정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아니면 죽음은 하나의 부조리한 자연 현상에 불과한 것일까?
3. 죽음에 대한 논의
어차피 알 수 없는 죽음의 문제보다, 현실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철학이 있다. 일찍이 공자는 제자 자로가 죽음에 대해서 물었을 때 “우리가 삶을 알지 못하거늘 어떻게 죽음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스피노자는 “철학자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명상이 아니라 삶에 대한 명상에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철학 가운데에는 죽음이 중요하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죽음의 수련으로 보았고, 키케로는 죽음에 대한 대비라고 생각했으며, 몽테뉴는 죽는 것을 배우는 것이 철학이라고 여겼다. 급기야 쇼펜하우어는 죽음 없이는 철학하는 것이 어렵다고까지 말했다. 장 켈레비츠는 죽음을 자신의 죽음과 가까운 사람의 죽음, 그리고 타자의 죽음으로 나누어 각각 일인칭, 이인칭, 삼인칭 죽음으로 구분했다. 그에 의하면 오늘날 대중매체를 통해 접하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은 거의 대부분 나와 무관한 삼인칭 죽음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은 생명과 더불어 시작된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죽음이 시작된다. 이렇게 볼 때, 삶과 죽음은 서로 동반자 관계에 있다. 따라서 이런 동반자 관계에 있는 죽음은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라고 보는 입장도 있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고, 소크라테스는 “죽음은 아무 감각도 없는 깊은 수면 상태이거나, 또는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가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플라톤에게 있어서 이데아 사상으로 나타났다. 세네카는 인간의 삶을 연극에서의 한 역할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죽음을 동반자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사람들은 결코 죽음을 반기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그것은 공포였고, 하이데거에게 있어서는 불안이었다. 쇼펜하우어는 더없이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조차도, 죽음만은 마다한다고 말했다. 그러기에 자살예찬론자로 알려진 그조차 72세까지 장수한 게 아닌가?
철학자들의 논의와는 달리, 일상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3)
1)부정
이는 생을 마감할 정도로 질병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오게 되는 최초의 반응들이다. 의사로부터 말기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대개는 “선생님 지금 그 말은 농담이지요?”라며 믿지 않으려 한다.
2)분노
이 단계에서 환자는 자주 짜증을 내고, 까다로워지고, 적대적이 된다. 하나님은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생기게 하는가? 그리고 왜 하필이면 지금이란 말인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하며 절규한다. 지금까지 진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의사들, 자신을 제대로 대해 주지 않은 가족을 향해 분노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노는 사실 죽음 자체를 향한 분노이다.
3)타협
분노를 경험한 말기 환자는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은 후회를 경험한다. “이럴 줄 알았다면 다르게 살았을 텐데...” 이 단계의 환자는 죽음을 지연시킬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진지하게 묻는다. 의사나 신에게, 한번만 살려주면 이제부터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겠다는 애원과 협상을 한다.
4)절망
절망은 수용과정이 사실상 시작되었다는 신호이다. 퀴블러 로스는 이 단계를 예비적 비탄, 죽음의 임박을 예상한 슬픔이라고 언급했다. 이때는 미래에 대한 모든 희망을 상실하고, 모든 회복의 가능성을 체념한 상태이다.
5)수용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깨끗하게 받아들인다. 이 상태에서 환자는 가까운 가족들, 보통은 아내나 남편, 자식들과 함께 있고 싶어 한다. 죽어가는 자식들은 부모와 함께 있고 싶어 한다. 환자들은 이 시기에 온정적이고, 돌봐주며, 수용해 주는 누군가가 있기를 원한다.
죽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항상 이 다섯 단계를 거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연령, 성, 인종, 민족, 사회적 환경, 성격, 종교 등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 한 연구에 의하면 독실한 그리스도인은 죽음에 대한 불안이 덜하다고 한다. 그래서 알폰스 데켄은 죽음의 여섯 번째 단계로 ‘기대와 희망’을 이야기 한다. 이는 죽음을 인생의 파멸로 보는 것이 아니라, 죽음 너머에 존재하는 부활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바라보는 기독교 신앙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성서는 죽음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4. 죽음에 대한 성서적 이해
1)구약성서 : 모호한 것으로서의 죽음
히브리인들은 인간의 삶에 커다란 가치를 두었다. 그들은 많은 자손을 두고 풍요롭게 오래 사는 삶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들 중의 하나로 보았다(시 128편). 천수를 다하고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인들에게 베풀어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들 중의 하나였다. 생명에 대한 이러한 강력한 긍정과는 대조적으로, 히브리인들은 동시에 죽음에 대한 모호한 태도를 공유하였다. 그들은 죽음을 악, 또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힘으로 보았다.4) 구약의 저자들은 죽은 자들이 있는 장소를 가리키기 위하여 스올(음부)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스올에 내려간 자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소망할 수 없다.5) 그러나 구약의 공동체는 사망과 스올의 세력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스올은 하나님이 아시는 범위 너머에 있지 않다.6) 그러므로 하나님은 의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자기 앞으로 데려오실 수 있다. 포로 시대 동안에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히브리인들의 소망은, 종말론적인 부활에 대한 기대로 이어졌다.7)
2)신약성서 : 죽음을 직면했을 때의 소망
신약성서는 하나님의 권능이 나사렛 예수를 죽은 자들부터 일으킨 사건8)9)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특히 바울에게서 두드러졌다. 바울사도는 죽음과 죄를 직접적으로 연결시켰다. 죽음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고10)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여전히 우리의 최후의 원수이다(고전 15:26). 죽음은 우리의 죽을 몸이 죽지 않음을 덧입을 때에야 비로소 극복될 것이다. 그 때에는 하나님이 죽음을 우리의 실존으로부터 추방하실 것이다.12) 신약성서의 기자들은 예수의 부활로 인해 죽음을 상대화시킬 수 있었다. 죽음은 여전히 원수로 남아 있긴 하지만, 이제 이미 예수에 의해서 정복당한 원수이다. 이런 이유로 장차 죽을 것이라는 전망과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더 이상 우리에게 두려움이 되지 못한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죽음을 이기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데, 그것은 장차 우리가 죽음을 이기는 것으로써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서는 죽음이 신자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갈라놓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한다.13) 이런 식으로 상대화된 죽음은 더 이상 인간에게 가장 큰 비극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죽음은 더 이상 모호하지 않다. 죽음은 죄와 결부된 악한 대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최대의 원수이다. 그렇지만 이 원수는 원칙적으로 패배당한 적이다.
3)부활을 통한 죽음의 극복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또한 그리스도와 합하여 부활함으로써 죽음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개인의 삶이 궁극적으로 부활을 통해 완성에 도달한다고 선언한다. 예수의 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생긴 상처들을 비롯한 식별 가능한 여러 유사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에게 즉시 인식될 수 없었다. 예수는 단순히 과거의 그의 지상적인 실존으로 회복된 것이 아니라 장차 도래할 세대의 생명으로 변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활의 특징-동일성과 차이성의 혼합-은 우리의 부활에서도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바울에 의하면 이 영광스러운 사건은 우리의 죽을 몸을 죽지 않는 것으로 변화시킬 것이고, 우리의 썩어질 것을 썩지 않을 것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욕된 것과 약한 것으로 뿌려진 것이 영광스러운 것과 강한 것으로 일으켜 세워질 것이다.14)
5. 죽음, 그 이후
그렇다면 과연 성서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이와 관련한 세 가지 신학적 입장을 간단히 소개한다.
1)육체와 영혼의 분리
이 입장에 따르면 개인은 죽음과 동시에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된다.15) 육체는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지만, 신자의 영혼은 낙원으로 올라가고(눅 23:43), 불신자의 영혼은 음부로 내려가, 최후 심판의 날이 오기까지 대기하는 중간기16)17) 그 이후에 신자들은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살게 되고, 불신자들은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입장은 왜 죽은 자의 영혼이 낙원이나 음부에 머물러야만 하는지, 그리고 낙원은 천국과, 음부는 지옥과 각각 어떻게 다른 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 입장은 인간의 본질로서의 영혼은 천국이나 지옥에서도 죽지 않고 불멸한다는 헬라철학의 영혼불멸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피조물로서의 영혼이 반드시 불멸해야 할 당위성은 없다. 불멸은 하나님의 속성이지 인간의 속성이 아니다.
2)잠자는 상태
성서는 인간의 몸과 영혼이 따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인간이 곧 몸이면서 동시에 영혼이라고 본다. 인간의 영이나 혼, 또는 생명이나 목숨을 뜻하는 구약성서의 ‘네페쉬’와 신약성서의 ‘프쉬케’는 모두 몸과 결합되어 있다. 육신과 영혼은 인간을 구성하는 두 부분이 아니라, 인간의 서로 다른 두 가지 양상이다. 인간은 영혼이며 또한 육체이고,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통일체로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의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전인적인 죽음이지, 결코 육체만의 죽음이 아니다. 인간은 전인적 죽음과 함께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 안에서 무의식, 무감각, 무관계성 상태를 경험한다. 성경은 이를 ‘잠자는 것’이라고 표현 한다.18) 잠자는 자들은 장차 역사의 종말의 날에, 하나님의 부활 능력에 의해서, 우주적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 바르트에 따르면 개인의 현재적 죽음의 때와 장차 도래하는 역사의 종말의 때는,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 안에서 간극이 없는 동일한 시간이다. 하나님 안에서 하루는 천년과 같고 천년은 하루와 같기 때문이다(벧후 3:8). 그러나 우리는 잠자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말하는 지에 대해 알 길이 없다.
3)즉각적인 부활
이는 부활이 개인의 사후, 중간기와 같은 대기 상태를 거친, 먼 훗날 역사의 끝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 곧바로 일어난다는 주장이다. 고후 5:1-8에서 바울은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면”, 즉 죽음에서 즉각적으로 하늘의 육체를 얻게 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한편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 16:22-24)에 나타난 음부에서의 고통은 지극히 육체적인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낙원을 죽은 영혼이 거주하는 침침한 거처나 땅 속의 어떤 장소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눅 23:43에서 십자가의 오른편의 강도가 들어가게 될 낙원은 역사의 마지막이 아닌, 즉각적인 죽음에서 일어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상의 성경본문은 엄밀히 말해, 사후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기록된 본문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의 강력한 표현이거나(바울), 사실보도 보다는 비유의 맥락을 중요시해야 하는 본문(나사로와 부자), 그리고 죽음조차 믿음 안에 거하는 자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강조하는 본문(오른편 강도)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언제 부활하게 되는가? 죽음 이후 낙원에서 대기하거나, 무감각 속에 잠자는 시기를 거친 후, 역사의 종말과 함께 부활하는가? 아니면 죽음과 동시에 즉각적인 부활을 하게 되는가? 성서의 저자들은 죽은 자들의 상태에 관하여서는 오직 개략적인 내용만을 제공해 줄 뿐이다. 이처럼 성서가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우리가 상상은 할 수 있지만, 지나지게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천국의 삼층천을 목격한 사도 바울조차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에 대해 언급을 회피했다(고후 12:4). 사후 세계의 문제는 현세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뜻에 순종하며 사랑하는 일에 힘쓰는 것과 무관하게 영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런 점에서 죽음 이후의 세계는 죽음 이전의 현실 세계와 직결된다.
우리는 성경 가운데 사후 세계에 대해 가장 많이 언급한 요한계시록이, 실상은 가장 현실적인 책임을 알아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1세기 말 로마의 핍박으로 고난당하고, 생명이 위협받는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의 도피할 것을 권하는 책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끝까지 용기를 잃지 말고,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며, 미래의 희망에 굳게 서 있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사도 요한에 의해 기록된 책이다. 종말론에 대한 건강한 관심은 언제나 현재에 대한 영향력 있는 실천으로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살아 있을 때, 특히 죽음과 거리가 멀다고 여겨지는 젊은 청년 시절에, 죽음을 묵상하는 것은 삶에 큰 유익이 된다. 전도서 12장 1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생명에 대해 가장 자만하기 쉬운 청년의 때에 오히려 창조자의 부르심의 때, 즉 죽음의 때가 내게도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을 사는 비결이다.
6. 죽음, 하나님의 선물
죽음이 결코 먼 미래의 일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죽음은 단지 회피하거나 배제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의 죽음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기독교 신앙의 깊은 의미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죽음이 비극적인 것만은 아니며, 그 가운데에는 분명, 하나님의 은혜가 포함되어 있다. 헨리 나웬은 죽음을 통해 맛볼 수 있는 여러 축복들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의 한 책 제목을 『죽음, 가장 큰 선물』(Our Greast Gift)이라고 붙인 바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안에서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선물들은 과연 무엇인가?
첫째, 죽음은 시간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우리의 삶이 끝나리라는 생각이 반드시 우리를 허무주의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죽음에 대한 깨달음은 우리로 하여금, 주어진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명한다. 지금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이 순간들은 흘러가는 강물처럼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들이다.
둘째,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소중한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먼저 행할 것을 명한다. 모든 것이 살아 있는 동안 잠시 주어진 것에 불과지만, 시간도 예외가 아니다. 나는 단 1분 1초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시간을 늘리지도 못한다. 퀴블러 로스에 의하면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더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 더 많은 일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느라 정작 하고 싶은 일, 그리고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한다. 그레고리 스톡이 쓴 『질문의 책』(The Book of Question)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기록되어 있다. “만일 당신에게 5분의 시간이 남아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그리고 이 질문 밑에 몇 줄의 여백들 둔 뒤에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런데 왜 그 일을 지금 하지 않는가?”
셋째, 죽음은 우리를 무감각에서 건져준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누가 죽어도, 마음의 아픔을 느끼지 않는 무감각하고 비정한 사회가 되었다. 그러나 그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될 때, 우리의 느낌과 반응은 사뭇 달라진다.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 모리 슈워츠 교수는 자신이 루 게릭 병으로 죽어가는 고통을 당하고 보니,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이전보다 더욱 가깝게 느껴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TV에서 죄 없이 총에 맞아 죽어가는 보스니아 사태의 희생자들을 보면서, 마치 자기가 당한 일처럼 분노하며 울었다. 이 책의 저자인 미치 앨봄은 모리의 이런 말에 큰 충격을 받는다. 자신은 언론계에서 일하면서 죽음의 현장에 관한 기사를 많이 다루었고, 장례식에도 수없이 많이 참석했지만,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의식은 우리의 무감각을 깨워준다.
넷째, 죽음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으며, 예외가 없다. 죽음 앞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 세상에서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랐던 빈부의 차이도, 학력의 차이도, 외모의 차이도, 죽음 앞에서는 결코 유세를 부리지 못한다. 심지어 사람의 죽음과 짐승의 죽음도 결국은 다를 바가 없다.
마치며
침묵 속에서의 기도와 노동을, 삶의 지침으로 삼아온 중세 시토 수도회 수사들은 서로에 대한 인사말 대신 “죽음을 기억하라”(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을 사용하도록 했다고 한다. 죽음은 예측치 못한 때에 온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보다는 조금 일찍 온다.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는 이는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종종 죽음이 부조리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참새 한 마리조차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떨어지지 않는다(마 10:29).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신다(눅 12:7).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도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와 권능을 대신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겨 간 것(요 5:24)을 믿는다. 성도들에게는, 죽음조차 삶의 한 부분이다. 오히려 죽음을 하나님의 선물로 생각함으로써, 성도들은 자신의 삶을 더욱 값지게 살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모든 것이 희미할 뿐이다. 그러나 역사의 마지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영원한 부활의 영광 속에서, 생명과 죽음의 모든 비밀을 분명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김균진, 죽음의 신학, 대한기독교서회, 2002.
김명용, 이 시대의 바른 기독교 사상,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1.
김영선, 생명과 죽음, 다산글방 2002.
미치 앨봄, 공경희 역,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세종서적, 1998.
성종현, 신약성서의 중심주제들,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8.
스탠리 그렌즈, 조직신학,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엘리자베스 퀴불러 로스 / 데이비드 케슬러, 인생수업, 이레, 2006.
장경철, 생애 최고의 선물, 낮은울타리, 2000.
정동호 외, 철학, 죽음을 말하다, 산해, 2004.
스콧 래/폴 콕스, 김상득 역, 생명윤리학, 살림, 2004.
알폰소 데켄, 용진선 역, 마지막까지 그대 곁에, 성서와 함께, 2002.
알폰스 데켄, 오진탁 역,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궁리, 2002.
울리히 벡, 황성태 역, 위험사회, 새물결, 1997.
헨리 나웬, 죽음, 가장 큰 선물, 홍성사, 1998.
1) 계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2) ①전뇌사 : 뇌의 모든 기능이 불가역적으로 소실된 상태, 비록 생명보조 장치에 의해 심장박동이 유지되고 있다 하더라도, 이를 죽음의 상태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 ②대뇌사 : 대뇌의 기능이 상실되는 것만으로도 뇌사로 판정해야 한다는 입장. 그러나 이 경우에는 소위 식물인간상태(PVS : Persistent vegetative state)까지도 사망으로 인정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③뇌간사 : 호흡, 순환 대사기능과 체온조절 등 생명유지의 필수 기능을 수행하는 뇌간이 불가역적 상태에 빠진 경우. 뇌사를 인정하게 된 배경에는 고비용의 심폐소생술, 연명치료 문제와 장기이식 등의 실용적이 이유 등이 있다.
3)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1926-2004) : 취리히 대학에서 정신 의학을 공부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정신과 진료와 상담을 했다. 세계 최초로 호스피스 운동을 의료계에 불러일으켰으며, 말기 환자들을 인터뷰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죽음의 순간, On Death and Dying>은 그녀를 ‘죽음’ 분야 세계 최고 전문가로 만들었다. 죽음이 가져다주는 삶의 지혜를 소개한 그녀의 책 <인생수업>이 최근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4) 시 89:48)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그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셀라)
5) 시 6: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6) 시 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7) 단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8) 고전 6: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9) 히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0)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1)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12)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13) 롬 8:38 - 39)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14) 고전 15:42 - 43) 42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43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15)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16) 이는 가톨릭이 말하는 연옥과 다르다. 연옥설은 성경과 무관하게 1336년 교황 베네딕트 12세의 교서를 통하여 가톨릭의 공식적인 교리가 되었다. 연옥설에 의하면 죽음의 순간까지 하나님을 거부한 자는 지옥에 가지만 예수를 믿고 죽은 자들은 죄의 용서를 받는다. 그러나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완전히 정화하기 위하여 연옥의 불 속에 정화되어야 한다. 연옥설은 살아 있는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드리는 중보기도 또는 헌물을 통하여 정화의 과정이 빨리 끝날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주장한다.
17) 살전 4:16 - 17)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고전 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고전 15: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aekhan2&logNo=120039781935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019 기독교생명대학 봄 학술세미나가 23일 저녁 한양대학병원 3층 강당에서 개최됐다.
‘나의듦과 죽음의 준비’라는 주제로 개최된 이날 세미나에선 박상은 원장이 좌장을 맡고 함준수 교수(전 한양대학병원장,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대표), 엄주희 교수(국가생명윤리연구원), 최화숙 교수(전 이화여대)가 발표하고 홍순철 교수(고려대), 이명진 소장(성산생명윤리연구소), 이상원 교수(총신대)가 각각 토론했다.
죽음에 대하여
함준수 교수는 “현재 여러 나라에서 판례나 법으로 엄격한 요건 아래 존엄사와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다. 이는 고령화 사회로 변하고 있는 우리 사회적 측면에서 매우 현실적 문제로 특별히 가족들 간의 윤리적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며 “지난 2009년 서울 지방법원이 식물인간 상태에 있는 노인에게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는 최종 판결을 내리며 논란이 됐다. 이를 계기로 정부는 관련 제도를 마련하기 시작했고, 보건복지부는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세부 내용을 규정한 시행령 및 시행규칙 제정안을 마련했다. 이제 연명의료결정법이 본격 법제화될 예정”이라고 했다.
이어 “연명의료결정법은 환자와 가족 모두에게 큰 고통만 안겨주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자연적인 죽음을 받아들이는, 즉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면서 죽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지만, 본 목적과 다르게 남용될 수 있음으로 ‘무의미한 진료의 중단’에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경우에 한해 허용되어야 한다”며 “진정한 생명의 존엄성을 인식하는 의사라면 죽음에 임박한 모든 단계의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끝으로 “의학적으로 임사체험(Near Death Experience)을 경험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사랑했는지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했는지 두 가지 질문을 만나는 것이었다”며 “죽음에 대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다. 한 번 죽음은 정해진 것(히 9:27)이고 돌아가는 것(시 90:3)이다. 죽음을 준비하는 지혜는 사랑(요13:1)이다. 그리고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다(계14:13). 그러므로 죽음은 마지막으로 전도하는 기회이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스도인의 웰다잉과 연명의료결정제도
엄주희 박사는 “오늘날 사람들은 되도록 죽음을 외면하고 회피하려 하지만, 죽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그렇게 낯설지 않은 삶의 과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죽음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고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통로이자, 먼저 천국에 가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죽음은 오히려 반갑고도 기대할 만한 것이 된다”고 했다.
이어 “때문에 이른바 의사조력자살, 안락사와 같이 즉각적이고 손쉬운 죽음의 방식을 택하는 것은 곤란하다. 두려워하는 사람들, 특히 사회적으로 약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두려움 가운데 방치되게 하거나 그들이 돌봄도 받지 못하고 죽음으로 내몰리게 해서도 안 된다”며 “즉각적인 죽음의 선택이나, 타자에 의한 죽음의 강요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선택이 아니”라고 했다.
특히 엄 박사는 “지난해 2월부터 우리나라에도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면서 임종기의 마지막 선택과 웰다잉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연명의료결정법에서 정하는 선택지는 임종기에 맞는 연명의료와 호스피스에 대한 선택”이라며 “이럴 때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한 신앙적 가치관에 기초하여 죽음에 관한 의사결정을 선택하고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시는 생명 중심의 선택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또 “죽음에 관한 성경적·기독교 윤리,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연명의료계획서, 호스피스완화의료와 같은 현행 연명의료결정제도의 내용들 이외에도, 세계 속에서의 사례들(end of life care), 죽음과 죽어감(death and dying) 에 대한 이해, 상실수업, 엔딩노트와 버킷리스트, 죽음 준비 교육 등으로 그리스도인의 웰다잉으로서 살펴볼 수 있다”며 실제 교회에서 있었던 ‘웰다잉 특강’ 후기의 긍정적 반응에 대해 전했다.
그러면서 “하늘나라에 가는데 순서가 없듯, 웰다잉에 대한 묵상은 노년의 삶에만 필요한 것도 아니고, 젊은이나 나이든 사람이나 누구나 매일의 삶을 믿음으로 잘 살아내는 과정에 있는 것”이라며 “모두가 믿음 안에서 이 땅에서 주어진 마지막 시간까지 주변 사람들에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웰다잉과 웰빙의 삶을 보여주는 모델들이 되기를 소망한다”고 전했다.
아름다운 죽음
최화숙 교수는 “임종의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예측하지 못한 사망의 경우, 예측 가능한 경과를 걸쳐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사망하는 경우, 특정 질병으로 주기적인 위기를 마주하다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경우다. 여기서 예측하지 못한 사망의경우가 30%”라며 “20년 넘는 시간 동안 말기 환자를 돌보며 임종과정에 독특한 변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작스래 돌아가시는 분이나 시간을 두고 돌아가시는 분이나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마치 필름, 파노라마가 돌아가듯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이다. 마치 심판대 앞에 서기 전 자신의 인생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것 같은 모습을 보았다”며 히브리서 9장 27절을 언급했다.
이어 최 교수는 “임종을 앞둔 환자들은 병원으로부터 해줄 것이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권유를 받는다. 그런데 집에 가면 가족들의 지식이 전무하니 대부분의 환자들이 방치된다. 이러한 이유로 19세기에서 20세기 종교계를 중심으로 호스피스가 시작됐다”며 “그러나 아쉽게도 국내 환자들이 호스피스 병동에 머무는 시간은 길어야 2주다. 삶을 마무리 하기 위해선 적어도 1개월의 여유가 필요하다. 그 미만이면 타인과의 새 관계를 맺을 여력이 없어 호스피스 케어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했다.
또 호스피스에 대해 “인간다움을 가지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신체적 증상, 통증을 조절하고 정신, 영적 문제를 해결하도록하는 토탈 케어, 초점이 다른 의료가 시작되는 것이다. 또 사별 관리 단계 까지를 호스피스 완화 의료라고 부른다”고 설명하면서 “죽음을 아름답게 맞이하기 위해선 본질적으로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생각해야하는 깊은 철학적 문제가 있다. 증상과 통증 조절보다 진짜 중요한 것은 정서적, 영적으로 삶을 돌아보고 이웃과 가족, 하나님과 화해하고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편 성산생명윤리연구소는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와 지난 3월부터 기독교생명대학을 개강했다. 성산생명윤리연구소는 성산 장기려 박사의 뜻을 기리는 의료인과 생명윤리 저문가들이 주축되어 1997년 설립됐으며,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낙태반대운동연합, 성산생명의료윤리연구소, 한국창조과학회, 한국기독간호사회, 한국기독의사회, 한국누가회, 한국호스피스협회 8개 단체를 주축으로 2001년 설립됐다. 기독교생명대학의 내년 봄 학술세미나는 5월 28일 저녁 7시 한양대병원 3층 강당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christiantoday.co.kr/news/322712
첫댓글 죽음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