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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충한 날씨에 오싹해지는 몸을 얼싸안고 연이는 머그컵에 커피 한 잔을 타고는 창가에 마주앉았다. 분명 봄이다. 헌데 유독 쌀쌀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디건을 걸치고도 부족하여 연이는 얇은 재킷 하나를 꺼내 어깨에 걸쳤다.
창밖은 금방 꽃망울을 터뜨릴 듯 하는 나뭇가지에 싸늘한 바람이 감겨들어 시샘을 하는 통에 꽃가지들은 꽃잎을 펴보지도 못한 채 기가 죽어 잔득 움츠려들었다. 시샘하는 봄추위 때문인지 허전했던 연이의 마음에는 더더욱 주름이 가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무덤덤하게 앉아있다. 연이는 오랜 기억의 창고 속에 가두어두었던 그 매정한 엄마가 다시 떠올랐다.
“엄마, 제발 나 두고 가지 마요.”
“엄마 인차 갔다 올게.”
“돈 필요 없어요. 엄마랑 살고 싶어요.”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던 엄마가 끝내 바짓가랑이에 매달린 아이를 내치고 문을 나선다. 문이 닫히고 어둠이 비실비실 실내에 비집고 들어오더니 이내 공간을 시꺼멓게 메워버렸다.
“나 좀 살려주세요. 엄마 엄마…… 제발 가지 마요.”
아이의 목소리가 점점 자지러지더니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메아리쳐 나왔다. 연이는 답답해지는 가슴을 치며 숨을 가쁘게 들이켰다.
눈앞의 남자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인 듯 보이는 여인이 함께 손을 잡고 가게에 들어선 것은 퇴근시간이 아득바득 다가오던 시간이었다.
문 앞에 걸어놓은 딸랑이가 딸랑 소리를 내며 손님이 안으로 들어선다는 신호를 보낸다.
“어서 오세요.”
연이는 반사적으로 일어서서 인사를 건네고 매대 쪽으로 종종걸음을 했다. 오렌지 컬러 외투에 흰색 목도리를 걸친 세련된 옷차림의 여인이 아들을 데리고 빵가게에 들어섰다. 여인은 가게 내부를 빠른 속도로 훑어보더니 창가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고 카라멜 마끼야또 한 잔을 시키고는 핸드폰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데리고 온 남자아이는 한 일여덟 살쯤 되어보였는데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가게 내부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마침 퇴근과 맞물린 시간이라 연이어 밀려드는 주문에 오프라인과 온라인 주문을 함께 소화를 하며 쉼 없이 일을 하는 동안 연이는 온몸이 물주머니처럼 흠뻑 젖어들었다.
손님들이 거의 빠지고 잠시 숨을 돌리는 타이밍에 연이는 습관적으로 창가 테이블 쪽을 바라보았다. 그 여인이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아들인 듯 보이는 아이가 옆에서 칭얼대고 있었다. 연이는 저도 몰래 발걸음을 그 테이블로 옮겼다.
“손님, 혹시 필요한 거 있으신가요?”
연이가 건네는 말에 여인은 그제야 말소리가 나는 쪽을 힐끗거리며 쳐다보았다.
“아니요”
상냥한 어투인데도 아예 대꾸조차도 하기 귀찮은 듯 한 마디 내뱉고는 시선을 다시 핸드폰에 고정했다.
초점 잃은 퀭한 여인의 눈빛에 연이는 갑자기 등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세련된 옷차림에 비해 창백한 얼굴은 지쳐있는 듯 많이 초췌해보였고 볼살이 빠져 튀어나온 광대뼈는 왠지 모르게 환자인 거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필요한 게 없다는 대답과 어긋나게 아이는 분명 떼를 쓰고 있는데 엄마라는 사람은 아예 관심 없는 듯 자신이 할일에만 정신을 몰두하고 있었다.
“아가야, 이모가 뭐 줄까?”
“배고파요.”
상냥한 연이의 어투에 아이는 대뜸 배를 어루만지며 이맛살을 찌푸린 채 대답을 했다.
“그렇구나. 잠시만 기다려. 이모가 빵 가져다줄게.”
“그냥 두세요. 어차피 좀 있다 약속 있어 친구네 집에 데려다 놓을 거니까 그때 먹이면 되요.”
아이 엄마가 귀찮다는 듯 성의 없이 대꾸를 했다. 아이가 배고프다면 뭐라도 챙겨 먹여할 텐데 엄마라는 사람이 별로 관심 없어하는 걸 보면서 연이는 더 이상 나서기가 무엇해서 카운터로 발걸음을 돌렸다. 허나 엄마에게 매달려 칭얼대는 아이가 눈에 밟혀 연이는 일하는 내내 저도 몰래 자꾸만 그 테이블로 눈길이 갔다. 서빙하는 아가씨에게 시켜 피자 두 조각을 무료로 테이블에 올려주었다. 큰 가게를 몇 개 운영하고 있는 연이에게 있어서 자주 이런 일이었다. 베푸는 사랑이 더욱 마음을 설레게 한다는 걸 깨닫고부터 연이는 자주 빵가게에서 만든 맛있는 빵들을 싸서 양로원이나 고아원을 찾아가곤 했었다.
그런 봉사를 다니게 된 데는 계기가 있었다. 오랜 결혼생활, 부부사이 금슬은 좋았지만 연이와 남편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하여 아이를 좋아하는 연이가 가끔씩 허무하게 느껴지는 마음을 그렇게 봉사활동으로 달래군 했던 것이다.
연이에게도 저 크기의 아이가 있었을 법도 했다. 돌이켜보면 아이가 생겼던 몇 년 전 그때는 참 세상물정을 잘 몰랐다.
“이번에 중절수술하면 다시는 임신의 가망이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새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마스크를 벗으며 하는 말이었다. 누구에게는 축복받은 사랑의 열매가 되겠지만 그때의 연이에게는 그게 아니었다.
전신마취제가 정맥주사를 통하여 싸늘하게 연이의 혈액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연이는 그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뽀송한 털이 파르르 날아갈 듯 한 예쁜 새끼오리 한 마리가 계단을 올라가다 목이 부러지는 꿈을 꾸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동녘이 희붐하게 밝아오는 아침이었다. 아랫배에 통증이 묵직하게 느껴져 연이는 간신히 입술을 깨물며 일어나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백발이 성성한 연이의 엄마가 침대 옆에 옹송그린 채 끄덕끄덕 졸고 있었다.
출장을 간 남편은 중절수술을 하겠다는 연이의 입장을 전해들은 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연이의 남편이 사업을 한다 치고 대출을 당겨쓰는 바람에 통장의 잔고는 먼지밖에 털리는 게 없었다. 그런데다 근 20년 만에 나타난 엄마라는 사람은 모진 세월 바람에 찢기고 나부끼는 너덜너덜한 깃발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연이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어디에서 사기를 당했는지 빚을 한가득 짊어지고 나타난 엄마의 모습에 연이는 무릎이 꺾이는 것 같았다.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연이는 가슴속으로부터 울컥하는 감정이 일었다. 어렸을 적 학부모회를 할 때 늘 예쁜 엄마 자랑을 했던 생각이 났다.
엄마는 예쁜 분홍입술에 싸구려 분을 발랐지만 뽀송한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 세련된 옷차림을 하고 학부모회에 참석하였는데 친구들은 연이 엄마의 주위를 기웃거리며 부러워하는 눈빛을 보내곤 했었다. 그런 친구들의 눈빛에 연이는 어깨가 으쓱했다. 헌데 그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빠가 세상을 뜨고 출국바람이 불어치면서 너도나도 고향을 떠나기 시작하자 그 바람이 연이네 집에도 불어들어 엄마는 고향과 멀리 떨어진 곳에 가 일을 하면서 주말에만 고향에 왔다가곤 했다.
어린나이에 엄마랑 떨어지는 게 너무 싫었던 연이는 엄마가 왔다 갈 때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눈물을 떨어트리곤 했다. 엄마도 눈물을 씹어 삼키며 바짓가랑이에 붙은 연이를 겨우 떼어내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곳에 갇혀 두려움에 떨던 그때, 그 일들이 트라우마처럼 연이의 기억속에 고스란히 남아 한적할 때면 거미처럼 엉금엉금 기어 나와 연이를 징그럽게 괴롭혔다.
그렇게 예뻤던 엄마가 이제는 귀밑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되어있었다. 예뻤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처량하게 앉아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연이는 코끝이 시큰거려 엄마가 앉아있는 쪽을 등진 채 돌아누웠었다.
아이를 떠올릴 때면 연이는 어김없이 엄마를 떠올렸고, 그 기억은 곧바로 엄마에 대한 증오로 이어졌다. 그때 사기를 당해 빚을 잔뜩 진 엄마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아이를 낳아 키웠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땅거미가 어둑어둑 지고 퇴근할 때가 되었는데도 남자아이의 엄마는 돌아올 염을 하지 않았다. 아이는 테이블에 앉았다 섰다를 반복하며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다. 연락해서 아이를 데려가라고 해야 할 텐데 아이가 엄마의 전화번호를 기억해내지 못할뿐더러 엄마가 금방 갔다 올 테니 꼭 기다리라고 했다면서 아이는 테이블을 떠날 염을 하지 않았다.
빵가게 직원들을 먼저 퇴근시키고 연이는 그 아이와 함께 가게 안에서 아이엄마를 기다리기로 했다.
찌뿌드드한 날씨가 하루 종일 지속되더니 굵은 비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꺼멓게 몰려오는 먹장구름에 아이가 점점 불안한 듯 테이블을 떠나 연이 곁에 바짝 붙어 섰다.
매장 안에서 팔다 남은 빵을 꺼내 레인지에 넣고 데웠다. 이 시간이면 아이도 많이 배가 고플 테고 연이 역시 굶주린 배가 꼬르륵 소리를 연발하며 자꾸 뭔가를 먹어줘야 한다고 부지런히 신호를 보내고 있다. 아이에게는 키위주스 한 잔을 갈아 건네준 뒤 자신은 커피포트에서 커피 한 잔을 뽑고는 테이블에 아이와 마주앉아 빵조각으로 끼니를 에우기로 했다.
“몇 살이야?”
“여섯 살.”
“집은 어디니? 이모가 데려다줄까?” 아이는 고개를 흔들다가 뭔가를 이야기하려는 듯이 입을 오물거리더니 이내 입을 다문 채 테이블 위에 데운 빵조각으로 손을 부지런히 가져갔다.
“천천히 먹어. 체하겠다.”
연이는 아귀아귀 씹어 먹는 그 아이의 등을 살살 쓸어주며 조용히 웃었다. 배가 많이 고팠는지 데운 빵조각을 다 먹고도 아이는 성에 차지 않는지 매장에 남은 몇 개의 빵조각에 눈이 가 있었다. 많이 허기졌나보다 생각을 하며 연이는 남은 빵조각까지 다 데워 아이의 출출한 배를 달래주었다.
머루처럼 새까만 눈동자, 오뚝한 콧날, 진한 눈썹과 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아이는 얼핏 보기에도 어디에서 많이 마주친 적 있어 보이는 똘망똘망하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연이와 눈길이 마주치면 바로 해맑은 웃음으로 맞받아치고 손을 저어 친근함을 표하는 인상이 한두 번 해본 폼이 아니었다. 엄마 따라 여러 군데를 다니며 눈칫밥을 먹는데 익숙한 듯 보였다.
그때 중절수술을 하지 않았더라면 연이와 남편사이에도 남편을 쏙 빼닮은 큰 아들이 있지 않을까 연이는 생각했다.
연이는 그 아이를 보면서 그 노오랗고 뽀송한 오리 태몽을 꾸게 했던 뱃속의 아이를 떠올려보았다. 그때 의사가 분명 수술을 하게 되면 다시 임신하기 어려울 거라며 모를 박았었는데 미련해서 그 말을 흘려들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해도 돌이킬 수가 없었다. 그사이 몇 번이나 시험관 시술을 했지만 번마다 실패했고 시험관 시술을 하면서 겪은 고통을 이야기하려면 속에 든 쓴물마저 다 토해낼 거 같은 울렁거림에 연이는 몸서리가 났다.
자정이 거의 되는 시각에도 아이의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는 기다리다 지쳤는지 테이블에 옹송그리고 앉아 잠이 들었다. 연이는 얇은 가디건을 벗어 아이의 몸에 덮어주고 자신도 아이의 옆에 옹크리고 앉았다.
꿈을 꾸었다. 망망한 바다에 떠있는 쪽배 한 쪽이 서서히 풍랑에 기울기 시작하더니 그대로 침몰을 해버렸다. 꿈에서도 숨이 막혀 몇 번 손을 허우적거리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깥은 가로등이 하나둘 꺼지고 먹물을 풀어놓은 듯 캄캄했다. 아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잠꼬대를 하면서 잠을 달게 자고 있었다.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찾아온 것은 그 이튿날이었다. 눈두덩이 팅팅 부은 채로 올백머리를 한 그 여자가 연이네 가게에 찾아든 건 땅거미가 어둑하게 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두꺼운 화장에 코를 찌르는 진한 향수냄새를 풍기는 여인이 휘청거리며 전날에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걸터앉았다. 아이는 하루 만에 만난 엄마의 등장에 반가워 바로 뛰어가 엄마의 볼을 싹싹 비비고 팔다리를 터치하며 친근한 스킨쉽을 하고 있었다. 반대로 엄마는 일에 지쳤는지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아이의 그런 친근함을 표하는 행동에도 표정은 그대로 무덤덤하게 변화가 없었다.
“어제 말씀도 없이 어디 가셨어요. 애가 엄마를 많이 찾았어요.”
애를 그렇게 떼놓고 갔으면 한 마디 안부라도 전할 법하겠는데 여인은 아예 포기한 듯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빵을 주문하는 손님들이 거의 빠지자 연이는 그제야 이마에 땀을 훔치며 겨우 카운터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테이블에 앉았던 아이의 엄마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물끄러미 벽 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여인이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던 그건 바로 가게 포스터 옆에 봉사활동을 하면서 찍은 연이의 사진 몇 장이였다.
한참동안 그러고 있던 여인이 이번에는 카운터를 향해 걸어오더니 굳어진 표정으로 지갑에서 백 원짜리 두 장을 꺼내 연이에게 불쑥 내밀었다.
“엊저녁 아이 봐준 수고비에요. 뭐 많지는 않지만 이 정도는 드려야 될 거 같아서.”
“아니요, 이럴려고 애 봐드린 거 절대 아니에요.”
솔직히 아무 이야기 없이 애를 빵가게에 남겨두고 사라졌다가 들어올 때도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건네지 않는 여인의 뻔뻔함에 연이는 비호감을 느꼈다. 거기에다 모든 걸 의례 그러하듯이 돈으로 계산하는 여인의 모습이 탐탁지 않아 아주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미간이 좁아진 연이를 쳐다보던 여인이 다시 지폐를 지갑 안에 구겨 넣었고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이야기 좀 하죠.”
고작 두 번 본 여인이 이야기를 좀 하자고 한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지 라는 고민을 하는 것도 잠깐 여인이 불문곡직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제가 아이 맡길 데가 없어요. 술집에서 일하거든요. 아시잖아요. 낮과 밤이 바뀐 거. 아이 아빠 없이 혼자서 애 키우는 게 벅차요.”
여인이 의자를 끌어다 카운터 옆에 대고 엉덩이를 붙였다. 이어 담배 한 대를 꺼내 다리를 꼬더니 불을 붙이고 입에 물었다. 다크써클이 뺨까지 내려 온데다가 마스카라까지 번진 눈은 초점을 잃었는지 정기가 없었다. 그 어떤 막연한 기대마저도 잃어버렸는지 하루살이라는 곤충을 방불케 하는 처량한 모습이었다. 담배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녀가 담담한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몇 번이고 목숨 줄을 끊을까 생각도 해봤는데 새끼가 뭔지……”
여인의 얼굴이 불빛에 더더욱 창백해보였다. 눈빛이 흐릿하던 여인이 눈앞의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이 기억속의 어떤 사람과 닮아있어 연이는 코끝이 시큰거림을 느꼈다.
여인이 눈길을 주고 있는 곳에서 아이가 종이접기를 하고 있었는데 아이는 엄마의 그 어떤 변화를 느끼지 못한 채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제법 활기차고 기분 좋은 모습이었다.
침묵이 한참동안 흘렀다. 결국 먼저 무거운 침묵을 깬 건 당돌한 그 여인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언니가 한두 달만 봐주면 안될까요?”
연이는 갑자기 말문이 턱하니 막혀오는 것 같아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시다시피 가게운영에 케이크 수업까지 병행하고 있어서 그건 좀……”
그 아이는 분명 연이와 아무 상관이 없는 아이고 이 여인은 고작 영업을 하면서 한두 번 봤을법한 손님일 뿐이었다. 그런데 아이를 맡아달라는 그 말에 왜 단호하게 거절을 하지 못한 채 이렇게 얼버무리는지 연이는 통 알 수 없었다. 호수처럼 맑은 아이의 눈빛에 간절함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고 싶었다.
“그럼 며칠만 맡깁시다.”
여인은 두툼한 인민폐 뭉치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호령하듯 툭 내뱉었다.
귀청을 째는 듯한 알람소리에 연이는 눈을 떴다. 옆에 아이가 쌔근쌔근 달게 잠을 자고 있었다. 살그머니 윗옷을 걸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아이가 손을 뻗어 목을 바싹 끌어안는다. 애기의 등을 토닥토닥 다독여 자리에 눕혀놓고 연이는 몸을 일으켰다.
아이를 맡긴 뒤 아이엄마의 소식이 단절된 지 열흘째다. 그날 그렇게 돈뭉치를 꺼내놓으며 애를 부탁하는 그 여인을 거절한 뒤로 연이는 오후 내도록 카운터에 죽치고 앉아있었다. 거절을 당한 뒤 체념을 한 듯 테이블에 앉아 무덤덤하게 커피를 홀짝거리던 여인이 사라진 것은 연이가 전화를 받고 거래처에 다녀온 사이였다.
첫 며칠은 아이를 집에다 데려다놓고 불편한 점이 없지 않았지만 바싹 다가붙어 살갑게 구는 아이 때문에 차차 빠른 속도로 적응을 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함께 밥을 먹고 한 침대에서 자고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과정에서 연이는 그 아이의 이름이 준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참 신기한 것은 준이라는 이름은 남편과 아들이 생긴다면 태명으로 짓자고 합의를 보았던 이름이었다.
남편은 장기출장을 가있는 상황이라 가끔씩 전화를 걸어왔는데 이번 달에 오더가 마무리되면 바로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경찰서에 신고하여 아이를 데려가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여인이 써놓고 간 쪽지가 있어서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개인 상황 때문에 잠시 어디 다녀와야 되니 며칠만 준이를 맡기고 간다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생면부지의 여자에게 아이를 맡기다니…… 여인이 한 행동은 기가 막혔지만 일에만 묻혀 적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연이인지라 곁에 데려온 아이가 싫지는 않았다.
아이는 엄마가 사라지는 일이 반복이 되어서 아무 느낌이 없는지, 아니면 눈치를 보는데 익숙해졌는지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아침에는 연이가 구워주는 토스트에 우유를 먹고 시간에 맞춰 씻고 옷을 바꿔 입고 통근차에 맞춰 유치원으로 향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스스럼없이 연이의 모든 일상생활에 녹아들었다. 아이가 하는 모든 행동들이 너무 자연스러워 가끔씩 연이는 준이만한 애가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연이를 자극하는 일이 벌어졌다.
유치원의 선생님이 호출 전화를 걸어온 것은 연이가 떡케이크수업을 진행하며 비지땀을 쏟고 있을 무렵이었다. 백설기는 이미 쪄내고 조색도 끝나고 이제 케익 위에 어레인지할 플라워만 짜면 되는데 준이가 사라졌다는 소식에 도저히 하던 일을 계속 진행할 수가 없었다. 헐레벌떡 가르쳐주는 주소대로 뛰어가 보니 원내 준이 자리는 텅 비어있었고 준이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너희 엄마는 바람둥이라지, 온 동네 휘젓고 다니는. 너 버리고 갔다.”
플라스틱 필통이 깨져 조각조각 너절하게 흩어졌다. 몽탕한 자투리 연필들이 산지사방 튕겨나가고 연필심이 끊겨 바닥이 온통 어지럽혀져 있었다. 연이는 그 자리에서 벌꺼덕 일어나 무작정 필통을 떨어뜨린 녀석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다. 입을 함부로 놀리는 그 녀석을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밟고 또 밟았다.
우리엄마는 아니야. 아니라고. 입 다물어, 입 다물라고.
그 녀석과 한편인 듯 보이는 무리가 달려들어 머리채를 잡고 연이의 손을 발로 밟는다. 주먹이 우박처럼 연이 몸 위로 쏟아졌다. 무작정 학교 석탄 창고에 숨어들었다. 어둑어둑한 창고는 축축한 석탄냄새 외에도 퀴퀴한 곰팡이냄새가 진동을 했지만 그걸 신경 쓸 사이가 없었다. 얼굴은 만 마리 정도 되는 벌에게 쏘인 듯 부을 대로 부어 화끈거리고 욱신거렸다.
“한 번만 더 말해봐. 죽여 버릴 거야.”
먹장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더니 마치 모든 불만투성이를 통 채로 삼켜버릴 것처럼 하늘땅이 꺼질 듯 우르릉거리며 우레가 울고 소낙비가 쫙쫙 쏟아졌다. 볏짚을 엮어 대충 지붕을 얹은 석탄 창고는 장대처럼 쏟아지는 비를 막아 줄만큼 튼튼하지는 못했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짭짤한 액체가 연이의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오랜 세월 속에 묻혀 녹이 쓴 듯한 기억 한 조각이 어디에선가 툭하고 튀어나와 연이를 괴롭혔다.
두 모자를 만나고부터 연이는 처음 겪는데도 어디에선가 본 듯한 데자뷰 현상을 자주 겪고 있어 두려워졌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숨을 고르느라 심호흡을 해보았다.
유치원을 몇 바퀴 샅샅이 훑은 뒤에야 연이는 어둑하고 침침한 원내 창고에서 준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준이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두덩이 퉁퉁 부어있었다. 준이의 눈빛을 보는 순간 연이는 알 수 없는 슬픔과 서러움이 몰려들어 자꾸만 목이 메어왔다. 애써 얼굴에 웃음을 피워 올리며 준이를 향해 팔을 벌리자 한참을 망설이던 준이가 더 이상 지탱하기가 어려웠는지 쓰러지듯 연이의 품안에 안겨들었다. 그렇게 연이의 품에 얼굴을 묻은 준이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준이를 연이 조용히 다독였다.
“이모가 잘 알아. 엄마는 돌아올 거야.”
한참을 흐느끼던 준이가 엄마가 돌아올 거라는 연이의 말에 고개를 들고 연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가을하늘처럼 맑고 깊은 준이의 눈에 슬픔이 그득 고여 있었다. 연이는 누구에게 홀리기라도 한듯 그윽한 눈동자를 주시했다.
“친구들이 우리 엄마보고 창녀라고 말했어요.”
연이는 그런 준이에게 넓은 품을 내어주고 어깨를 쓸어주며 마음껏 울게끔 그냥 내버려두었다. 사람에게 나눌 수 없는 게 있다면 이런 슬픔도 그중 하나다. 누가 아무리 위로를 잘한다 할지라도 그 상황이 아니라면 이해할 수도, 또 위로할 수도 없는 그런 아픔 같은 것이다.
연이는 무작정 준이를 끌고 백화점을 찾았다. 브랜드 아동복가게를 훑고 다니며 준이가 입을 수 있을만한 사이즈의 멋스러운 옷들을 골라 쇼핑백에 구겨 넣었다. 모성애는 엄마를 제외한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지만 엄마를 그리워하며 가슴 한 켠이 구멍이 났을 아이를 어떤 식으로 위로해주고 싶었다. 몸에 맞는 옷을 사 입히고 맛있는 걸 먹이고 애들이 제일 부러워할 케이크까지 대령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초라한 엄마가 있어 기죽는 아이가 아닌 멋진 엄마가 있는 남부럽지 않는 아이로 탈바꿈을 시키리라.
연이는 눈이 데꾼해서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준이의 손을 놓칠세라 꼬옥 잡고 발길을 다그쳤다. 아무 혈연관계가 없는 준이라는 아이한테 왜 이토록 신경을 기울이는지 알 수 없었다. 준이를 생각하면 그냥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잘해주고 싶었다. 어린 시절 상처받았던 아픈 자신에게 보상을 해주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준이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일어 이런 행동들을 하는 것인지 연이는 알 수 없었지만 그냥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을 뿐이라며 자신을 달랬다.
이튿날 연이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케이크를 만들었다. 방앗간에서 금방 빻아온 쌀가루에 물주기를 해 얇은 채에 두 번 내리고 눈처럼 보드라운 가루로 백설기를 빚어 링에 넣고 뜨거운 김이 몰몰 나는 시루에 안쳤다. 어렸을 적 할머니가 해주던 시루떡이 생각났다. 시루떡은 까다로운 떡이라 떡을 안쳐놓고 소변을 보러 갔다 오면 떡시루가 물러앉아 떡이 설익게 된다는 소리도 할머니에게로부터 귀 따갑게 들어왔었다.
어린 시절 연이에게 있어서 할머니는 엄마 대신이었다. 할머니는 연이가 그토록 좋아하던 시루떡을 싫증나도록 먹게 해주었다. 그때 먹었던 시루떡은 할머니의 사랑이 가득 담겨있어서 꿀처럼 달콤했다. 엄마의 사랑이 그리울 때마다 연이는 할머니가 방금 쪄준 시루떡을 한입 가득 베어 물고 아귀아귀 씹어 삼켰는데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미련도 그렇게 꿀꺽 삼켜버렸다.
준이도 이 떡케이크를 먹으면서 엄마에 대한 기억을 통 채로 삼켜버릴 것이다. 음식을 크게 베어 물고 꾸역꾸역 삼키는 버릇은 그 누군가의 사랑을 갈구해서 그런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말이다.
옹기종기 컵설기를 쪄내고 앙금으로 플라워를 짜내는 동안 연이는 꾀죄죄하고 구질구질했던 엄마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엄마는 왜 그렇게 살아. 나는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연이가 부담이 된다고 할머니에게 봇짐처럼 밀어버린 뒤 엄마는 외국으로 떠났다. 공항으로 떠나기 전 낯선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연이를 외면하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렇게 예쁘던 엄마가 연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여 년이 지나서였다. 연이 앞에 나타난 생소한 아줌마가 엄마임을 확인한 그 순간, 연이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한 채 몸을 떨었다. 어린 시절 기억했던 꽃처럼 예쁜 엄마의 모습과는 전혀 매치되지 않는 얼굴에 주근깨로 가득 덮여 아주 꾀죄죄한 모습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엄마는 반신불수까지 앓고 있는 상황이라 다리까지 절룩거렸다.
“버리고 갔으면 좀 잘 살지 그랬어요. 그래서 행복했어요? 새끼 버리고 가서 행복했냐구요.”
오열하며 뱉어내고 싶었던 한 마디였지만 처음 보는 듯 생소한 아줌마의 모습에 그 가냘픈 비명마저도 대충 목구멍으로 삼켜버렸다.
그날 봤던 구질구질한 엄마의 모습은 마치 우렁이들에게 살점이 다 뜯기고 밀물 따라 둥둥 떠내려가는 소라껍질을 연상케 해서 더욱 수치스러웠다.
그때 연이는 결심을 했다. 자식이 생긴다면 절대 엄마 같은 엄마가 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연이에게는 그런 사근사근한 엄마가 될 권리와 책임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있는 컵설기를 케이크 박스에 담아 차 트렁크에 싣고 준이가 다니는 유치원으로 향했다. 준이에게 백화점에서 샀던 멋진 옷을 입히고 유치원 친구들이랑 함께 먹을 수 있는 간식거리들을 사 트렁크에 채워 넣었다. 어린 나이에 송곳에 찔려 피투성이가 되었을 그 아이의 마음을 생각하면 원하는 게 그 무엇이든지 다 채워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휴식시간에 맞춰 유치원에 들어서자 꼬마들이 줄레줄레 줄을 서서 준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러움과 기대에 가득 찬 눈빛이다. 연이는 컵케이크를 박스에서 꺼내 줄서있는 꼬마들의 손에 하나씩 나눠 주었다. 컵케이크를 받아 쥔 꼬마들이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이리저리 눈요기를 하더니 꽃이 아니라 음식이라는 걸 검증해보려는 듯 혀를 날름 내밀어 앙금 플라워를 핥아 맛을 보고 있었다.
얼굴이 밝아진 준이 모습에 연이도 덩달아 신이 났다. 문득 어떤 남자아이가 준이 곁으로 다가오더니 어깨를 툭 치며 귓속말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너네 엄마 맞아? 너네 엄마 뭐하는 사람이야?”
준이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연이의 눈치를 살피며 뭐라고 대답을 해야 되는지 망설이고 있는 걸 보니 그동안 눈치를 보며 살아온 기색이 역력했다.
“나 준이 엄마야. 이모가 빵가게를 하는데 우리 준이랑 가게 놀러올래? 이모가 맛있는 빵 만들어줄 수 있는데.”
그동안의 의혹이 실타래처럼 활 풀린 듯 연이의 요청에 그 아이가 활짝 웃으며 냉큼 대답을 했다.
“정말요? 빵 진짜 좋아하는데. 준아, 너네 엄마 짱이야 짱. 나 너네 가게 놀러가도 되는 거지?”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아이들이 엄지를 척 치켜들더니 환호를 질렀다. 그런 애들의 반응에 준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하게 밝아졌다.
“혹시 준이랑 어떤 관계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환호하는 애들을 뒤로한 채 유치원을 빠져나오는데 담임인 듯 보이는 유치원 선생님이 뒤를 따라 나오면서 연이에게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준이 이모입니다.”
잔뜩 의문을 품고 있던 눈빛이 그 대답에 시름이 놓이는 듯 많이 따뜻해져 있었다.
“그렇군요. 다행이에요. 준이 정말 밝은 아이인데…… 준이 어머님은 연락되시나요? 6개월 학비를 내시고 사라진 지 보름이 지났습니다.”
유치원의 선생님과 연락이 끊긴지도 보름이 지났다고 하니까 연이에게 준이를 데려다놓고 그 즉시로 연락두절 되고 사라졌다는 말이다. 어디로 증발이 됐는지, 왜 그래야 했는지, 준이는 어떻게 할 것인지 아무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6개월 학비를 냈다는 걸 봐서는 6개월 잠적할 계획이라는 걸까?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아이엄마의 행보였다.
“준이는 제가 잠시 데리고 있으니 통지사항 있으면 저한테 알려주시면 되겠습니다.”
유치원 선생님과 헤어져 집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연이는 머리 반쪽이 지끈거렸다. 선생님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친다.
“아이가 불안증세를 앓고 있습니다. 손톱눈을 물어뜯고 수업시간에도 집중이 잘 안됩니다. 언어도 또래 애들에 비해 어눌한 편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가 엄마를 많이 그리워합니다.”
선생님이 연이에게 아이가 그린 그림을 보여주었다. 눈부신 해살이 가득 찬 어떤 정원인 듯 보였는데 노란 해바라기 꽃이 만발한 작은 뜰 안에 어떤 남자아이가 엄마의 다리를 베고 평온하게 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그림이었다. 아이가 그린 엄마는 핑크색의 샤방한 원피스에 치렁치렁 길게 늘어뜨린 파마머리의 미인이었다.
그 그림을 보면서 연이는 아이에 대한 연민과 동정, 동질감 같은 것이 목구멍에서 울컥거렸고 그와 동시에 가슴 밑바닥의 분노와 서러움도 함께 솟구쳐 올랐다. 낳아서 책임도 지지 못할 거면서 왜 세상에 데리고 와 이 고생 시키냐고 미련한 여자들아. 눈앞에 아이의 엄마가 서있다면 가차 없이 주먹을 날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낳은 새끼를 키우지도 못하는 엄마도 엄마라고 아이는 그런 엄마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다.
차 뒷좌석에서 아이는 혼곤히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속에서 그토록 보고 싶었던 엄마를 만났는지 입을 오물거리더니 달콤하게 웃고 있었다.
아이와 그렇게 예상치 못했던 동거생활을 보낸 지 1달이란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연이는 바쁜 일상생활가운데 준이를 돌보는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케이크수업마다 수강생들이 북적여서 스케줄이 꽈악 차있었고 빵가게도 온오프 판매로 장사가 문전성시를 이루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 와중에도 연이는 준이라는 아이를 돌보는 일을 제일 우선으로 여겼다. 그렇게 최선을 다하는데도 아이는 가끔씩 음식을 크게 베어 물고 씹지도 않고 삼키는 행동을 버릇처럼 반복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엄마를 빨리 찾아야 했다.
준이 엄마라고 불리던 그 여자를 만나기 위해 그녀가 출근하던 룸살롱을 찾아간 적이 있는데 룸살롱은 이미 숙청운동으로 영업금지 딱지가 붙어있었다.
룸살롱 옆에 위치한 마트의 주인아줌마에게 대충 이야기를 얻어 들을 수 있었는데 준이네는 준이 외할머니와 엄마 세 식구였고 얼마 전 준이 외할머니가 암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셋이서 그래도 오붓하게 식사를 하는 모습을 목격했다는데 노인이 돌아간 뒤 아이의 엄마가 매일 술에 절어 살더라며 마트주인은 안타까워했다. 준이 엄마에 대해서는 그 마트에서도 1년 사시장철 짧은 미니스커트에 술에 절어 휘청이는 술집 여자로 기억을 하고 있었다. 준이 엄마 이야기가 나오자 마트주인은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면서 열을 올렸다.
“그럼, 젊은 여자 몸으로 사내아이 하나 키우려 해봐. 그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거든. 그래서 그 여자 남자가 많았다니까. 새끼가 뭔지…… 참 불쌍하기도 하지. 애 크면 뭐라고 받아들일까!”
한번은 똑같은 시간에 남자 둘이 준이네 집에 들이닥쳤는데 한쪽이 사람을 데리고 와 몽둥이로 다른 한 남자를 짐승 패듯이 팼고, 그때 준이 엄마도 얼굴이 팅팅 붓도록 맞았다는 낯 뜨거운 이야기도 서슴지 않았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말도 어눌하게 하고 어리숙해 보여도 똑똑한 아이였지. 엄마가 술을 많이 퍼먹은 날이면 어김없이 와서 술 깨는 약을 사갔다니까. 지금은 어디에 가서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지만 얼마나 눈칫밥을 먹었으면 애가 눈빛으로 말을 다해요. 쯧쯧…… 어미 잘못 만나서.”
준이 엄마라는 여인의 종적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엄마를 그토록 그리워하는 준이를 남겨두고 바람처럼 증발해버렸다. 하루에 수도 없이 돌아오겠지 라는 말을 반복하다가도 저녁에 자리에 누워 잠꼬대를 하며 엄마를 찾는 준이를 보면서 연이는 화가 나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가 갈릴 때마다 그 여인과 엄마의 모습이 기가 막히게 귀퉁이가 겹쳐지면서 온몸이 떨려오고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분노 비슷한 것이 치밀어 올랐다.
엄마도 연이가 엄마를 필요로 할 때 연이를 떠났다. 예쁜 용모를 빗대고 청춘을 팔아 연이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생활비를 꼬박꼬박 보내주었지만 그렇게 보고 싶다고 하면서도 한 번도 연이를 직접 보러 와주지 않았다.
사춘기에 진입하여 예민할 때에도, 그 흔한 졸업식에도, 청춘기에 진입하고 또 처음 남자친구가 생겼을 때에도 엄마의 모습은 그 어느 곳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엄마 대신 할머니가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주어 뿌리까지 흔들리지는 않았지만 시시각각 연이 곁에 엄마라는 존재가 필요할 때 엄마가 부재하여 연이에게는 큰 아픔이었다.
그래서일까 준이를 볼 때 가슴 한 켠이 자꾸 먹먹해졌다. 어렸을 적 엄마의 사랑을 갈구했던 자신의 그 모습과 준이의 모습이 겹쳐져 가슴이 알알해졌고 또 무능했던 엄마의 모습과 그 여인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스토리가 반복되어 더더욱 분노가 일었다.
그렇게 서서히 연이는 준이라는 아이와 점점 친근한 동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어들듯 준이도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점차 눈앞에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듯 크고 작은 문제들을 연이에게 터놓았고 또 말이 어눌하고 표현도 약간 조심스럽던 아이가 조금씩 활달해지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과일을 꼭 물어보고서야 손을 대던 준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스스럼없이 테이블 위 과일을 먹기도 하고 텔레비전도 켜서 시청하군 했다.
일찍 돌아오겠다던 남편은 오더건이 마무리가 되지 않았는지 귀가날짜를 미룬 덕분에 연이는 해석 필요 없이 꼬마 준이와 무리 없는 동거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아이 엄마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면 연이는 그냥 이대로 준이를 아들로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남편에게도 그렇게 이야기를 할 것이고 불임 때문에 속을 졸이던 상황이라 둘 사이 윤활제가 될 수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결심을 내리고 나니 납덩이를 올려놓은 듯 하던 묵직하던 가슴이 후련해졌다.
그렇게 준이와 무리 없는 생활에 적응해가고 준이를 키우겠다고 결심을 내렸던 그 찰나였다. 바람처럼 증발되어버렸던 그 여인이 몸을 휘청거리며 가게로 연이를 찾아왔다.
그날도 준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가게에 들어서는 길이었다. 낯익은 모습이 창가에 우두커니 앉아 퀭한 눈빛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이를 고작 두 번 본 사람에게 맡겨놓고 이렇게 1달 넘는 시간동안 잠적해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가 태연하게 가게에 찾아들어 아무 일 없다는 듯 퍼지르고 앉은 여인을 보니 알 수 없는 화가 꼭두밑까지 치밀어 올라 연이는 무작정 여인을 끌어냈다.
우악스레 끌고 가는 연이의 손을 뿌리칠 힘도 없다는 듯 여인은 사냥꾼에게 총 한 방 맞은 능청스러운 너구리마냥 질질 끌려나왔다. 어디 기댈 힘도 없는 듯 가냘픈 몸은 휘청거렸고 불어치는 바람에 여인의 머리카락이 흩날려 더더욱 초라하고 초췌해 보였다.
“아이가 물건이야? 뻐꾸기처럼 아무데나 툭 던질 거 같으면 왜 낳았어?”
언젠가 한 번 엄마에게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오랜 시간동안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말을 뱉어내는데 목소리마저 갈려 처량하게 들렸다.
그렇게 흥분한 연이의 모습에도 여인은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숙제를 다 못다 해온 어린 아이마냥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인은 그날에 봤던 모습처럼 역시 가슴골이 드러나고 새하얀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 있는 야릇한 미니 스커트차림이었다.
“아이를 생각해본 적 있어? 그 아이가 당신이 이 짓거리한다는 걸 알았을 때 어떤 느낌일 거 같아. 엄마면 엄마다운 인생을 살아. 왜 하필이면 그런 밑바닥 인생이야?”
아이를 입에 올리자 여인의 눈이 반짝였다.
“우리 준이 제가 한 번이라도……”
여인은 뒤의 말을 이으려다 무섭게 번뜩이는 연이의 눈빛에 쫄았는지 입속에 말을 우물거리며 삼켜버렸다.
“아이 보여 달라고? 양심이 있으면 그런 이야기 함부로 못하지.”
어디에서 들어봤던가? 많이 들어봤던 이야기 같은데…… 연이는 그런 생각을 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연이가 토해냈던 그 한 마디는 연이의 할머니가 엄마에게 했던 말이었다.
“네년이 양심이 있다면 새끼 보여 달라 말 못하지. 네년이 무슨 염치로.”
엄마가 낯선 남자와 외국으로 떠난 뒤 딱 한 번 연이 할머니를 찾아왔던 기억이 난다. 학교 갔다 집으로 향하는 길, 대문을 따고 집에 들어서려는데 난데없는 할머니의 호통소리에 깜짝 놀라 담장 뒤에 몸을 숨겼었다. 엄마인 듯 보이는 여자가 할머니가 치는 호통에 뭐라고 울며 애원을 하는 듯 보였는데 할머니는 매몰차게 뿌리치고 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내용을 들어보니 엄마에게는 연이를 만나면 안 될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도 그 비밀을 알고 있는 듯 했고 엄마와 연이의 만남을 극구 말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에게 한바탕 혼이 난 뒤 눈물을 씹어 삼키며 대문을 나서는 엄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나와 훔치고 또 훔쳤다. 그때 엄마에게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제발 준이 한 번만 보게 해주세요.”
여인의 눈빛이 다급해졌다. 애원하는 그 목소리에서 간절함을 읽을 수 있었다. 당시 연이의 엄마도 지금 이 여인과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또다시 묘하게 겹쳐지는 양상에 연이는 옅은 한숨을 뱉어내며 눈을 감았다.
“이 세상에 데려왔으면 책임을 져. 책임지고 싶어도 그 기회조차 없는 사람들 있다는 거 기억해.”
간신히 분노를 눅잦히고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연이는 여인에게 준이를 보여주기로 결심을 내렸다. 아니, 데려가게 하려 마음을 먹었다. 다시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 엄마 따라 보낼 생각이었다. 아이도 세상 눈치 보는데 익숙해져 내색을 하지 않고 있지만 엄마 노릇 잘 못하는 엄마라 할지라도 엄마가 그리운 건 분명하였다. 마치 그때 그 시절 연이가 엄마를 그리워했듯이 말이다.
그 여인과 함께 유치원에 준이를 데리러 갔다. 준이는 엄마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봄에 피는 살구꽃처럼 화사하게 얼굴이 활짝 펴있었다. 엄마를 얼싸안고 볼을 비비며 연신 애교를 부렸고 저녁을 먹고 난 뒤에도 두 모자는 좀처럼 떨어질 염을 하지 않았다.
준이가 그렸던 그림처럼 엄마 품에 파고드는 준이를 바라보며 연이는 알 수 없는 질투와 부러움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1달 동안 두터운 정을 쌓아왔고 준이에게 아낌없이 정성을 쏟아 부었지만 엄마가 나타나자 준이의 눈은 온통 엄마로 꽉 채워져 다른데 눈길을 줄 염을 하지 않는다.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하자 연이는 엷은 윗옷을 걸치고 베란다에 다가섰다. 초봄이라 하기에는 저녁공기가 많이 쌀쌀해 연이는 윗옷 옷깃을 조심스레 여미고 창가 테이블에 몸을 기댔다. 요즘 들어 봄을 타는지 옆구리가 자꾸만 허전해진 느낌이었다.
준이가 엄마 무릎에 누워 잠이 들자 여인은 조용히 연이에게 다가서며 말을 건넸다.
“언니,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연이가 차를 한 잔 내오는 동안 여인은 옷매무시를 가다듬더니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전에는 두꺼운 화장에 얼굴이 묻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이렇게 가까이 다가서 보니 청순하고 앳되 보이는 얼굴이었다. 어떻게 술집 일을 하게 되었고 또 어떻게 미혼모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빵가게에서 담배를 꼬나물고 핸드폰에 시선이 고정되었던 그 여자와 전혀 달라 보이는 다소곳한 분위기였다.
탁자 위에 메밀차가 노오란 컬러를 펴내면서 점점 우러나고 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메밀차 한 잔을 들이키며 여인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사랑해서 생긴 아이가 아니에요. 실수였죠. 바이어 접대 차 나온 술이 많이 취한 남자랑 말이에요. 왜 굳이 그 직업을 택했냐고 묻는다면 가난이 신물 나게 싫었던 거 같아요. 그리고 나를 버리고 간 엄마에게 복수하고 싶었어요. 술집에 적응하며 그 남자를 만났고 그 남자는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지만 아이가 없어서 괴로워했어요. 자주 만나서 서로 상처를 위로해 주다나니…… 그날은 많이 취했어요. 딱 한 번…… 정말 실수였어요. 준이에게 미안하지만 내 목숨 같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 남자는 아무것도 몰라요. 이 아이는 제가 원했던 거니까요.”
연이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누가 그랬던가. 상대방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은 자신이 받았던 상처를 내보이는 거라고.
엄마를 향했던 분노는 눈앞의 여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상하리만큼 차분하게 전분처럼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한 마디에 가슴이 짠해 연이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어 여인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얼마 전 미친 듯이 내게 구걸하고 애를 먹이던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뿌리가 휘청했죠. 살아갈 의욕을 잃었어요. 오랜 시간 동안 엄마를 지독하게 증오했어요. 버리고 갔다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나를 찾아왔으니까. 근데 돌아가신 뒤 알게 됐는데 사랑했더라고요. 그것도 미친 듯이…… 그건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었어요.”
여인은 특이하게 자신의 엄마와 아이를 매치시켜가며 연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하고 있었다.
서글프게 웃고 있는 여인의 표정에서 연이는 그 마음을 대충 읽을 수 있었다. 곁에 있을 때 잘하지 못한 자신에게 죄책감을 얹어 옥죄이는 듯 보였고 또 엄마처럼 아이에게 책임을 다하지 못해 증오를 받을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몇 번 만나보지도 못했고 또 친하지도 않은 사이임에도 자신에게 비밀을 털어놓는 걸 보면 여인은 연이에게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가장 좋은 치유법은 경청이라는 걸 잘 아는 연이였기에 여인이 말하는 걸 귀를 열고 묵묵히 들어주었다.
준이를 사이에 눕히고 두 여자의 토크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주절주절 인생사를 늘어놓던 여인이 가볍게 코를 골며 곯아떨어지자 연이도 눈을 감고 꿈나라로 향했다.
알람소리에 눈을 떠보니 여인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준이는 연이 목을 그러안고 달콤한 잠꼬대를 하고 있다. 여인이 누웠던 자리에는 이불이 네모반듯하게 포개져 있었고 봉투 하나와 옷인 듯 보이는 물건들이 한보따리 덩그렇게 놓여있었다.
여인이 사라졌다. 아이를 버려둔 채로 또 사라졌다. 연이의 심장이 또다시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연이는 손을 내밀어 비어있는 자리에 놓여있는 봉투를 허겁지겁 뜯었다. 봉투 안에는 여인이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들어놓은 사망보험과 종신보험내역서가 들어있었고 수익자는 아들 준이로 되어있었다. 밀려드는 불길한 예감에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꼬깃꼬깃 접혀있는 편지를 펼쳐 들었다.
“갑상선암이래요 제가. 이 글을 읽을 때면 제가 이미 멀리 떠났을 거에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마지막으로 준이 한 번 보고 가요.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언니 상처가 보였고 또 같은 상처가 있는 사람 만나서 위로가 되었어요. 그리고 준이를 잘 키울 수 있을 거라고 확신이 서서 마음이 놓여요. 준이에게 아픈 엄마로 기억되고 싶지 않아요. 우리 준이에게 언니는 상냥한 엄마랬어요. 스물일곱 살 길지 않았지만 준이와 언니는 하늘이 제게 주신 선물이었어요. 간직할게요. 그리고 갚을게요. 다음 생이 있다면……”
여인의 편지는 아주 짧고도 간단했다. 커다란 보따리 안에는 하루하루 커갈 아이를 위하여 밤을 패면서 떴을법한 사이즈가 각기 다른 세타가 열 벌이나 들어있었다. 편지 뒷면에는 준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그리고 알레르기반응이 일어나는 음식들이 상세하게 메모되어 있었는데 그 메모지에 눈길이 닿는 순간 연이는 현기증이 몰려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복숭아 알레르기, 천명에 한 명꼴로 갖고 있다는 알레르기 증상이다. 복숭아를 먹으면 입술이 부어오르고 온몸에 울긋불긋 바람꽃처럼 두드러기가 돋아 오르는, 준이가 갖고 있다는 그 과일 알레르기를 연이의 남편도 똑같이 앓고 있었다.
그제야 연이는 준이를 샤워시킬 때 귀 뒤에 볼록 튀어나온 돌기를 보며 저도 몰래 남편을 떠올리던 그때가 생각났다. 그리고 눈꼬리를 살짝 내리고 빙그레 웃던 모습이며 애교를 부리던 모습이며 심지어 엎드려 자던 그 모습까지 남편의 모습과 신통하게 닮아있어 너무 신기해 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비워지는 것을 느끼며 연이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원 앞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새 한 마리가 처량하게 울고 있다. 창밖에는 마침 정원을 개조 중인지 나무뿌리들이 땅 위로 드러나 얼기설기 뒤엉켜있다. 그리고 그 뿌리에 뒤엉킨 크고 작은 돌무더기들이 죽음을 기다리듯 꿈쩍 않고 널브러져 있다. 곳곳이 파인 웅덩이에 고였던 흙탕물이 온몸에 튕겨 뒤범벅이 된 듯한 느낌에 연이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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