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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判鈺日記>(1918~1947)를 중심으로-|
박경하
목 차 1. 머리말 2. 晉判鈺日記의 서지사항과 서술방식 3. 진판옥의 日常生活 4. 求職 및 面書記생활 5. 맺음말
1. 머리말
일제하 식민지 시기의 일상생활연구는 문학분야를 제외하고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일제의 식민정책과 경제수탈, 민족독립투쟁이라는 거대담론 속에서 민중들의 생활을 단순히 수탈과 착취의 대상으로 파악하였다. 일상생활을 다룰 때 공식영역과는 달리 일상생활을 사적영역으로 분류하여 흔히 직업과 교육, 노동의 세계가 누락된다. 따라서 일제시기 일상생활연구는 기존의 침략과 저항, 억압과 동화라는 이분법적 틀에서 벗어나 보다 중층적이고 다양한 양상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억압받고 수탈받는 민족이라는 상 이외에, 자기의 일상영역에서 조그만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삶을 누려 가는 민중의 삶의 이야기, 또는 유흥이나 행복의 범주가 존재하는 공간도 복원 재구성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상생활연구는 기존의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적 접근으로부터 벗어나 실재하는 주체성을 분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크게 한다. 일상생활연구를 위해서는 시각과 방법 이외에 자료에 대한 재규정이 필요하다. 일기나 메모, 각종 기념사진 등 공식적 영역 뒤에 숨어있는 진솔한 감상을 드러내는 것이 많이 활용되는데, 이는 공식적 자료와 연관하여 분석함으로써 새로운 해석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자료는 일제시기에 전북 임실군 임실면 성가리 262번지에 거주한 晉判鈺(1903년생-1950년 몰)이 보통학교 학생이던 16세(1918년)부터 45세(1947년)까지 기록한 일기이다. 진판옥의 집안은 소작농의 어려운 생활환경이어서 보통학교시절에는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였다. 1920년 고등보통학교 2년을 수료 후, 1921년 에는 교사를 꿈꾸고 사범과를 진학하려고 노력하나 낙방을 한다. 이 후 구직을 위해 애를 쓰고, 평상시에는 농사일을 하고 면사무소에서 일급을 받으며 임시직으로 근무를 하였다. 21세인 1923년에는 진학을 위해 고향 형이 있던 동경에 가나 월사금이 없어 학교는 포기하고, 막노동일로 전전하다가, 9월 1일 관동대지진을 동경에서 맞아, 일본 경찰에 의해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10월에 강제송환된다. 1925년 1월부터는 임실면 면사무소의 면서기로 1년 반 정도 근무를 한다. 이 후 1927년분이 낙질이 되어 어느 시기에 다시 면서기로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으나 1928년에는 정식으로 면서기로서 생활하고 있다. 진판옥의 학교생활 및 진학준비는 1918년과 1921년을, 경제생활과 물가는 1923년을, 구직은 1921년부터 1923년 동경생활을 포함하여 1924년까지를, 면서기의 공식적 활동은 1928년을, 여가생활의 독서 운동 연극관람 가정생활 등은 20년대 전체를 통해 살펴 보았다. 이 논문에서는 진판옥의 20대 삶을 통해 1920년대를 살았던 식민지하 조선 젊은이들의 희망과 갈등, 좌절, 행복 등의 일상생활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2. <晉判鈺日記>의 서지 사항과 서술방식
진판옥일기는 1918년부터 1947년까지의 30년간의 기록인데 1919년․1920년․1925년․1927년․1940년․1942년~1946년까지 9년치가 落帙이다. 1944년은 진판옥의 아들 晋洪畯(1932년~ ?)이 중학생이던 13살 때의 일기가 함께 남아 있다. 그리고 1924년분은 2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기책은 <표 1>에서 알 수 있듯이 다이어리는 크기는 보통 책 크기의 국판보다 약간 작은 형태에서부터 휴대용의 작은 포켓형이다.
다이어리의 맨앞에는 ‘勅語’와 ‘황실’ ‘황족'의 탄생일과 조선왕족의 탄생일이 순서대로 인쇄되어 있다. 조선왕족은 昌德宮 李王(御名 拓), 同 妃(尹氏), 同 王世子(御名 垠), 德壽宮 李太王(御名 熙), 李堈公, 李埈公, 李埈公 妃(金氏), 二男 改鎔을 싣고 있다. 그 다음으로 ‘日曜日大祝祭日表’가 있고, 다음 쪽에 ‘천황역대표’를 실었다. 일본에서 출판된 것이나 조선왕족을 싣어 ‘內鮮 一體’를 강조하고 있다. 이 다이어리의 부록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내용이 바뀌고 있다. 다이어리의 앞뒤에 인쇄된 내용은 출판사나 연도에 따라 약간의 다름이 있으나 대체로 대동소이하다. 1918년 다이어리의 부록의 목차는 ◎ 年代表 ◎ 本邦位置 ◎ 世界, 面積及人口 ◎ 各國大都會人口 ◎ 海軍管區表 ◎ 官公私立學校所在地 ◎ 各國貨幣度量衡彼我對照表 ◎ 通常郵便料金 ◎ 私製端書 ◎ 小包郵便料 ◎ 郵便並電信爲替料 ◎ 外國郵便並爲替料 순으로 되어 있다. 1936년 다이어리의 겉표지 안쪽 지도에는 일본 군대의 배치도가 일본 한국 만주지역에 표기되어 있다. 30년대 이후 총동원체제에서 일본의 정부 시책에 따라 내용들이 바뀌어 가고 있는 점을 보여 준다. 다이어리를 출판한 국민서원과 박문관은 동경에, 적선관과 국민출판사는 오오사까에 소재하였다. 일기의 글씨는 국한문 혼용으로 만년필과 연필로 기록하였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보통학교 때의 기록은 비교적 또박 또박 펜글씨로 기재하여 알기가 쉬우나 뒤로 갈수록 달필의 가는 흘림체이고, 점점 노필로 바뀌어 해독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종이가 부족한 경우는 다른 종이를 덧붙여 기록하였다. 그리고 기록한 내용을 일부 다시 기재 한 경우는 미리 쓴 글을 크게 X자로 지우고 그 위에 도장을 날인하였다. 거의 매일 일기를 썼으며, 가끔 밀린 며칠치를 한꺼번에 쓰거나 다음날에 쓰게 된 경우는 명시하였다. 진판옥의 일기 서술 내용은 날씨, 기상시간, 취침시간은 필수로 기록하고, 날씨는 晴․淡靑․半曇․晴․小雨․雨․灑雨․風․强風․雪 등으로 표기하였고, 날짜는 인쇄된 양력날짜 옆에 음력을 수기로 표기하였다. 재정출납은 맨 뒤의 금전출납부에 월별로 정리하였다. 식사 사항과 오간 장소, 만난 사람, 금전거래 사항, 편지 주고받은 것, 구입한 물건 값, 읽은 책명 등은 가능한 한 빠뜨리지 않고 기록한 것으로 판단된다. 물건 구매 시는 달걀 몇 개 산 것 까지 값을 적고 있고,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한 것까지 기록하였다. 사건 중 인상 깊었던 것에 대한 자세한 묘사나 감상이 간간히 들어 있으나 사회적 문제나 정황에 대한 소감은 언급을 잘 하고 있지 않다. 일례로 “조선이 의뢰성이 강해서 망하였다”는 글귀를 보았다고 언급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는 나타내지 않고 있다.
3. 진판옥의 일상생활
1) 학교생활
1918년은 학교생활의 기록이 대부분이다. 일기 속에 등장하는 수업과목은 주로 <국어> <산술> <조선어> <한문> <국어> <농업> <대일본역사> <미술> 등이다. 1911년 8월에 공포된 ‘조선교육령’에 따르면 4년제의 보통학교 교과목은 <수신> <국어> <조선어> <한문> <산술>을 필수과목으로 하였는데, 이와 과목이 일치하고, 진판옥이 이 해 4월에 졸업 예행연습을 하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봐서 오늘날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보통학교 4학년 졸업반으로 추정된다. 또 1921년 사범과에 응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사범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은 「조선교육령」에 따르면 4년제의 고등보통학교의 제2학년 과정을 수료한 자 또는 동등의 학력을 가진 자로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진판옥은 1918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1920년에는 고등보통학교 2년 과정을 마치고, 정확히는 1921년에 수업연한 1년의 ‘교원속성과’에 응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보통학교 <국어>시간에 교장선생이 軍兵에 대해 얘기하고 . <미술>시간에 일로전쟁에 대해 들은 이야기, 산술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나폴레옹 얘기, 太宗때부터 再嫁를 못하게 한 얘기, 러시아전쟁 등에 대해 수업시간에 들을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보통 학교수업이 끝나면 저녁에 복습소에 다니고, 학교에 돌아 와 기숙사에서 잤다. 기숙사에서 夜學을 하는 것을 보고 잤다는 기록에서 저녁에는 학교 기숙사에서 야학을 여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기에 따르면 1918년에는 신무천황제(4월 3일), 육군기념일(3월10일) 천장절을 공휴일로 지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공휴일에 대해서 조선총독부의 <구학부검정 및 인가 교과용도서에 대한 교수상의 주의>에 나타난 지침에 따르면
“일곱째, 축제일을 준수하도록 가르칠 것, 대일본 제국의 국민된 자는 제국의 축제일을 준수하여 국민된 성의를 표함은 당연한 義이며, 청년학도의 교육상에 있어서 그리고 일반 風敎상 중요한 관련을 갖는 것인즉 교직에 종사하는 자는 제국축제일의 의의를 알게 하여 교육상 소홀함이 없게 할 것.”
이라 하여 천황가에 대한 충성과 황국신민의 자질을 도야하기 위한 일제의 교육정책으로 공휴일을 이용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4월 3일에는 학교 숲에 나무 심기(1500수)를 하였고, 5월 2일에는 종두 예방주사를 돈을 안내서 못 맞고 있다. 5월 27일(월)에는 학교에서 담배검사를 하였다. 겨울인 12월 11일에는 가마니짜기 실습을 하였고, 12월 28일에는 성적을 통보받았다. 일기에는 5월 모친 사망 이후는 집안일 돕기에 바빠서 공부할 시간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 1918년 일기의 맨 뒤에는 학교 재학 이도리 성사리 신안리 친구들의 명단이 적혀 있고, 농업전문학교에 진학한 친구들을 부러워하고 있다. 진판옥은 고등보통학교 수료 후 면서기로 취업하기 전인 1924년까지는 대체적으로 진학을 하여 공부를 하려고 하는 필요성을 느끼고 서울이나 일본에서 유학하는 친구들에 대한 부러움을 나타낸다. 하지만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현실의 벽에 부딪쳐 포기하거나 후회를 반복하는 생활이었다.
2) 경제생활과 물가
진판옥은 형제가 2남 2여인 집안의 장남으로서 한편으로 求職을 하며, 일이 없을 때는 아버지를 도와 함께 농사를 지었는데 小作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921년 11월에 군청에 소작료를 납부하고 있다. 군청에 소작료를 납부하는 것으로 봐서 아마 郡소유의 驛屯土가 아닌가 한다. 조선시대에 驛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驛土와 역에 주둔하는 군대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屯土가 있었는데, 이 토지들은 조선시대에 公田이었으므로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시에 조선총독부 소속이 되었고 이 토지들을 군에서 관리하여, 이 토지들에 소작을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1924년 추수 후인 11월의 경제사정이 다음과 같다.
“7시경에 기상하였다. 엄벙덤벙 아침식사 후에는 곧 나락을 훑기 시작하였다. 오늘 종일에야 비로소 다 훑었다. 저녁식사 후 조금 있다가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였다. 죽도록 지은 나락, 소작료 6석 제하고 나면 겨우 5석쯤 남는다. 더불어 地稅는 어떻게 줄까, 작년 이른 봄부터가 문제이다. 일기를 쓰고 9시경에 취침하였다.”
“7시경에 기상하였다. 한 것 없이 아침식사 후 좌석도 불만족하고 해서 종일을 엄벙덤벙 허송하였다. 오늘부터는 점심도 廢하였다. 저녁식사 후에는 동생과 가정의 형편을 말하고 일기를 쓰고 곧 8시경에 취침하였다.”
농사에서 11석을 소출하여 6석을 소작료로 주면, 남은 5석으로는 地稅를 줄 여유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이후는 점심을 못 먹는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작년 봄부터가 문제이다라는 것으로 보아 작년 봄 춘궁기에 빚을 진 것으로 사료된다. 일제는 1920년대부터 산미증산계획에 따라 수탈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농민들은 농토를 일본인에게 빼앗기고 영세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이들 소작은 생산량의 2분의 1에 달하는 고율의 소작료를 물어야 했는데 진판옥은 생산량의 50%를 넘는 소작료를 납부하고 있다. 진판옥은 가정의 이렇게 어려운 형편에서 아버지의 권유로 1925년 초 부터는 면서기로 들어간다. 다음의 1924년 12월 28일 일기에서 그 정황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원수의 家庭때문에 將來의 希望, 主義를 못 쫓는구나. 원수의 가정이 아니라 내가 아니면 이 가정이 죽어지는구나 하는 悲慘을 차마 인정상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혼자 타는 속 불덩이와 같다. 아, 나는 부엌아기를 주먹으로 치면서 決心하였다. 늦다마는 2年 同限만 집안 일을 볼 수밖에 없다. 그 同限은 次次 ○은 없지만 면서기라도 하여 아니 벌 수 없다. 그래야겠다. 면서기라도 하다 벌어서 2년 同限은 돈만 알고 집만 알아 내가 장가갈 때의 빚이나 갚고 가사정리나 大綱하여 家庭之事는 全部 弟에게 다 맡기고 나는 그때부터 한 번 뛰어야겠다. 뛰는 것만이 나의 希望目的은 아니다만 첫째 希望을 달성하려면 家庭과는 등져야겠다. 아, 나는 이를 결심하였다. 한참 앉았다가 기름이 없어 등잔불이 꺼졌다. 人生의 運命이란 꼭 저것과 같다. 어두운 방에서 한참을 공상하다가 8시반경에 취침하였다.”
진판옥은 원래 사범학교에 진학할 꿈이었으나, 그 꿈이 깨어지고, 서울, 일본 동경 등지에 가서 온갖 고생을 하였다. 그럼에도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도회지로 나갈 희망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집안의 어려운 경제에 가족을 위해 내키지 않는 면서기로 들어가고자 결심을 한 것이다. 사실 면서기의 월급은 21원으로 당시 물가로 볼 때 그리 높은 편이 아니어서, 진판옥은 면서기 생활 내내 빚을 지며 어려운 생활을 한다. 그리고 당시 일본과 한국에서 사회주의 열풍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 친구가 사회주의를 하려면 사회학과를 나와야 한다는 조언을 진판옥에게 하기도 한다. 다음의 기록은 1926년 당시 조선 민중의 처참한 삶을 사실적으로 보여 준다.
“徐徐히 心審풀이로 이야기를 하며 들구경을 하는데 흘작 누릇한 베들은 잘도 덜 되었다. 하나 다 지은 穀物今番 0雨에 被害도 적지 않겠다. 띄엄 띄엄 洞里라는게 되어 오개백여 있는 우막사리 草家는 마치 무엇 같을고? 文明國에 比하면 무엇으로도 比例할 수 없겠네. 그 속 무껇여들고 나는 OO사람이라 名目를 가진 인간은 참 저것이 인간이랄까 싶으다. 아~ 절로 寒心이 든다. 그러구러하여 가는 妹家宅에는 ○心이였다. 머잘 것 없는 살림 무더구나 風俗制度가 다른 村習의 그의 生活은 들어서자 어설프게도 여전히 구즈렁 하였고 찬바람은 휘불어 내게로 오는것 같다. 게다가 나의 누님아-사랑하는 한 엄미, 아비의 탯줄을 받고 生存여낸 나의 누님은 아-츨엽다. 지금 먹을 것이 없어서 익지도 않은 논밭이로나 싹을 훑으러 갔다고 없구나. 낯도 씻지 않고 아랫도리 벗은 어린이는 낯설어 누구 왔다고 逃亡하여 버린 저것이 얼마나 家政의 敎育이 없이 자라난 탓인가! 오 한참 후 누님은 치마라고 할까 말까한 다 떨어진 걸 입고 커다란 바구니에다 풋나락 하나를 가득히 훑어가지고 들어오며 멀건 눈물을 감추는 듯한 視線으로 쳐다보며 왔느냐 반가워하며 糧食이 떨어져 이것을 훑트러 갔다 왔다하시며… 옛날의 한 집안에 한 어머니, 한 부모 슬하에서 놀던 일만이 그러워졌으며 아~세상도 어찌하면 그렇단 말인고. 기울어져가는 태양빛 속 하늘을 우러러 恨嘆을 마치 못이였다. 아, 그 나락 한 바구니를 다 훑으며 여자의 손이 얼마나 아팠을고? 그 마음이 얼마나 怨洞스러웠으리! 별로 그리 할 말도 없다. 오래 후에 점심 후는 한참 있다가 또 오겠습니다 잘 계시고 여가 있으면 한번오세요 하고 인사를 마친 후 돌아오며 夕陽에 집에 돌아왔다.”
진판옥은 앞서의 일기에서 면서기를 2년만 하겠다고 하였는데, 1926년 9월에 면서기를 그만 두고 집의 농사일을 하고 있다. 이 때에 동생과 함께 시집을 가서 고생하는 누님을 찾아 나선다. 방문한 누님은 족보에 따르면 장년인 晉明淑으로 1896년생이니 진판옥보다 7살 손위이다.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양식이 떨어져 풋나락을 훑으려 나간 누님을 보고 애잔해 하는 내용이다. 위의 글은 1920년대 全般의 농촌살림의 어려운 상황을 보여 주고 있다. 1920년대 초반부터 일제는 자기들이 필요한 만큼의 쌀을 증산량과 관계없이 수탈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다. 한국의 농민들은 쌀을 증산하고도 그 증산량 이상을 빼앗기게 되어 굶주림을 면치 못하였다. 일제는 1920년은 생산량의 14%를 일본으로 수출하였고, 1924년에는 37%이고, 이 글이 쓰인 1926년에는 38%로 가장 많은 쌀이 수탈되는 상황이었다. 위의 내용은 당시 한국 농촌 전반의 비참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증언이라 할 것이다. 농사일은 면서기 직업을 가져서도 하고 있다. 보통 3월에는 뽕잎을 재배하고, 5월에는 모내기를 하고, 6월에는 보리타작 등 밭일을 하며 馬鈴薯 순을 따고, 제초, 모종을 한다. 7월에는 논에 물을 대고, 8월은 고추 참외를 따고, 8월 말부터 9월에는 내내 논에서 새 쫓기를 한다. 그리고 10월에 추수 및 깨 녹두 콩 호박 등을 거두었다. 11월에는 논에 가서 보리를 갈았다. 작물은 1924년의 일기에서 정리하면 주요작물로는 쌀, 콩, 팥, 깨, 호박, 고추 등이 있고, 밭일로는 보리, 콩, 벼, 팥, 호박, 고추, 흑임자, 깨, 녹두 등이고, 집에서는 소 돼지 토끼 등을 기른다. 1928년에는 면서기 생활을 하면서 가정이 안정되고 경제적 여유도 생겨, 자작농이 되었고, 소도 남에게 붙여서 사육한다. 소를 82원에 시장에 내다 팔게 되는데, 사육한 사람이 30원을 사육비로 요구하는 내용이 보인다. 20년대 전반기의 물가는 진판옥이 ‘22년 11월에 결혼을 하고, 한창 구직활동을 하던 1923년을 통계표화 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923년 4월부터 10월까지는 일본에 건너가 주로 동경에서 막노동으로 생활을 하게 된다. 한국에서의 물가와 일본에서의 일상생활용품에 대한 물가를 비교할 수가 있다. 여러 번 돈을 빌리는 내용이 등장하고, 어려운 형편에서도 아버지와 동생들에게도 생활비 등을 준다. 1월에는 면사무소에서 임시직으로 근무하면서 일급으로 31일에 23원 25전을 받고 있다. 하루에 약 75전정도이다. 3월분에는 일급이 90전이다. 아마 숙직 출장 등 업무에 따라 일급의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1941년에 정식 면서기가 상당한 대우를 받은 편인데 30원 정도를 받았다고 하니, 정식 면서기나 임시직이나 임금은 크게 차이나 나지는 않으나, 신분의 안정성이나 근무여건에서 임시직이 좀 더 열악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4월부터는 渡日하여 일본의 물가이다. 부산서 오까야마까지의 航船費, 양말, 수건, 칫솔, 치약, 비누, 연필, 이발, 목욕, 엽서, 우동, 호떡, 도시락, 우유, 차, 빵, 떡, 조 ․ 석반, 운동복, 편지지, 사전, 전차, 혁대, 잉크, 송곳, 가위, 집게 등등의 소소한 일상 생활용품 값을 알 수 있다. 목욕비는 우리나라에서는 15전이나, 동경에서는 4전으로 일본이 훨씬 싸다. 신원증명 및 민적등본 수수료가 나오는데, 이 같은 각종 수수료는 군과 면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진판옥은 일본에서 제일 먼저 ‘宣仁공제회’라는 곳에서 엿(飴)을 구입하여 엿장사를 하는데, 이문이 괜찮아 보인다. 7월 4일에는 ‘지까다비’를 구입하는데 이는 ‘地下足袋’로 막노동 시 신는 신발이다. 일본에서 구입하는 ‘요꼬후에’는 옆으로 부는 피리인 橫笛을 말하는 것 같고, ‘다비조메’ 등은 무엇을 말하는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노동 일당은 직종과 노동강도에 따라 다르나, 통상 하루 1원 50전에서 4원 정도를 받고 있다. 1928년의 물가를 살펴보면 면서기 월급은 21원이고, 야근 숙직비가 1원 80전, 출장비가 3원 60전, 여비는 8원 30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출장비와 여비는 어느 지역으로 나가는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또 축의금으로 1원, 조위금으로 50전을 내고 있다. 호적등본 한통의 수수료가 30전으로 당시의 물가에 비교할 때 상당한 비용으로 보여진다. 1인용 책상이 15원, 뱀장어 2마리에 50전, 린네루양복과 하리세루 양복 2벌 값이 13원 50전으로 양복 1벌 값이 면서기 월급의 30%를 차지한다. 30원과 100원을 빌린 돈의 이자(6리)로 7원 40전을 지출하고 있다. 면서기로서 월급과 숙직비 출장비 이외에는 특별한 별도의 수입이 없어서, 경제적으로 아는 사람으로부터 3부에서 6부까지의 이자로 돈을 빌려 동생들 혼사 준비를 하는 등 항상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3) 상장례 풍속
상장례 풍속은 진판옥이 16세인 1918년에 5월 21일에 모친이 사망하여 상장례를 치루는 데서 알 수 있다. 초상 첫날에는 20원으로 麻를 110자를 구입하고 있다. 그 전날 친척 아저씨 뻘 되는 晉在碩씨가 4원과 米 2말을 부주하여 그 은혜를 잊지 아니하고 내가 죽기 전에 갚기로 결심한다고 일기에 쓰고 있다.
이틀째에 염하는 모습을 다음의 기술에서 알 수 있다.
“4시반경에 일어나 아침 식사 후에 哭하고 한참 있다가 伯父氏, 仲父氏, 부친이 殮式을 하나 우리들은 곡하고 柩中에 넌 후에 곡한지라 棺中에 널 적에 관이 작아서 덜 손지라 생각해도 살아있는 사람이 저러면 아플터이나 죽었으니 아픈 것을 알까 생각함. 점심 후에 곡하고 있다가 저녁 후에 곡하고 있다가 봉사가 와서 정을 일으나 닭이 울드락 잘 일어 준지라 迷信일이지만 쳉이에다 가루를 담아 盲人 앞에 놓아두었으나 개발자구 되있으니 개 되었다 하더라.”
입관시에 관이 작았던 모양이다. 조선시대에는 사람이 죽어 殮을 한 뒤에 무당을 불러 길귀신을 내리는 굿을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징을 치며 점을 보는 독경쟁이를 불러서 死者가 어느 세상에 갔는가를 묻고 있다. ‘개’로 환생하였다는 점괘가 나온다.
“4시 반경에 일어나 아침 먹고 사자를 운반하고 나옴. 제상에 음식을 차려놓고 움. 사자를 상부소에다 넣고 간지라 울며 따라가나 好喪은 호상이나 내일을 생각하니 우습고도 절통하다. 묘자리가 하도 덜 좋으나 하는 수 업다. 공동 산이 없어지기 전에는 하는 수 없다 하고 있은지라 사자를 묻고 돌아와 기가 막히나 하는 수 없다. 점심 후에 놀다가 사자 살리는 수 없으니 가사 일을 돕고 공부나 잘하여 살아 있는 사람의 속을 안 썩히자고 결심하고 저녁 후에 삼부자가 사자있던 방에서 잠”
망자(1881~1918)가 38살에 돌아갔는데, 주위에서 好喪이라 한 모양이다. 또 공동선산에 묻었으나, 좋은 자리에 안치하지 못해 마음이 편치 않음을 토로하고 있다. 상례후 常食은 매일 올리지 않고 6월 23일, 7월 22일, 8월 7일, 9월 5일, 10월 13일에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사는 백부, 조부, 증조모 등 10분의 제사를 집에서 모시고 그 외의 제사는 仲父댁에서 지내고 있다.
4) 여가생활
진판옥의 여가생활 중에서 독서 범위는 비교적 폭 넓은 것으로 보인다. 1921년에는 <홍길동전> <郭芙蓉傳> <산술필수>, 1922년에는 <장한몽> 박씨전 <명사십리> <사총몽> 추월색 <시문독본> <설중송> <해당화><추월색>을 읽고 있다. 이런 대중용의 딱지본들에 대한 가격을 기록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봐서, 친구간에 돌려 보던 것이 아닌가 한다. 30년대의 증언에 의하면 보통 딱지본은 10전 정도 하나 한 5,6전이면 두 권을 살 수 있다고 한다. 1923년에는 이광수의 소설 <무정> 및 잡지를 보고 있다. 1923년 일본서 7월15일 <입신출세>를 구입하고, 1924년에는 천도교에서 발행한 <개벽> <매일신보> <조선일보>를 구독하고, 1926년 이광수의 <五道踏破記>, 1929년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의 준기관지적 성격을 띤 <朝鮮之光>을 보고 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본의 조선 언론에 대한 정책은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변화하면서, 한국인들에게도 신문지법에 의한 신문 잡지의 발행을 부분적으로 허용하여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민간신문이 창간 허가를 받게 되었다. 잡지는 신문지법에 의해 발행이 허용되지 않다가, 1920년 <개벽>,1922년 9월 <신천지>, <조선지광>, <신생활> <동명> 등이 허가 되었다. 이 중 <개벽> 등은 신문지법의 허가를 받게 됨에 따라 시사문제들을 다룰 수 있었다. 특히 <개벽>은 세계개조주의 사상의 전달자 역할을 하면서 대중 운동을 전개하였다. 진판옥이 한창 구직을 하러 다닐 때인 1924년에 일제의 동화정책의 전파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친일 기관지인<매일신보>를 읽고 있는데, 이는 당시 구장집에 배포하거나 유력자 집에서 구독하고 있던 신문을 빌려서 보았으리라 추정한다. 또 면서기를 하던 1929년에 좌파성향의 <朝鮮之光>을 읽고 있다. 1924년까지만 해도 진판옥은 사회주의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어떤 이념이나 정치적 성향에서가 아니라 신문물을 접하기 위한 방편에서 조선시대 군담소설에서부터 신소설 그리고 신문 잡지 등을 읽고 있으며, 식민지하의 20년대 당시 젊은이들의 광범위한 독서행태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1918년 중학생 시절에는 여가생활로 나무하기, 굿구경, 고기잡기, 새쫓기, 삼벗기기, 피뽑기 등을 한다. 특히 목욕을 자주 하고 있다. 학생시절에는 봄, 여름에 냇가에서 주로 목욕하나 이후에는 상업적 목욕탕이나 집에서 하고 있다. 일주일에 2~3회 정도 목욕을 하고 있다. 구직 중인 1922년에는 운동으로 축구, 庭球, 야구, 체조를 하고, 동네의 봉황산에 오르는 산보와 등산을 한다. 1923년 11월에 김소랑 일행의 신파극을 보고 있다. 판소리를 부르기 전 목을 푸는 단가인 片時春 공연을 보기도 한다. 1928년 일기에 보면 면서기를 할 때 ‘린네루 양복’과 ‘하리세루 양복’을 13원 50전에 사고, 양복바지를 4원 50전에 사는 것으로 봐서 양복이 상당히 보편화 되어 있는 것을 보여 준다. 1920년대 초 등장한 생활개선운동은 色服착용, 斷髮, 시간 엄수, 虛禮 폐지, 식사 개선, 의복 개량, 부엌 개량 등 일상의 거의 모든 부분에 파고들어 일상을 근대적으로 재편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생활개선운동으로 양복에 비추어 한복은 경제적이지 못하고 활동적이지 못한 것으로 비판되고, 실제 1920년대부터는 양복 수요가 급증하여 양복점 경영이 생활안정을 도모하는 인기 직종이 되었다. 부부사이는 직업 없이 농사일만 하던 1922년 11월에 크게 내키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강권으로 결혼을 하게 되는데, 결혼 첫날의 일기에 “부인될 사람이 상당한 지식이나 있으면 재미도 있고 재미있는 말도 청하면 대답도 하겠는 것을 지식이 들지 못하였으니까 재미없다."라고 소감을 쓰고 있다. 1926년부터는 가끔씩 아내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다. 면서기의 직장이 안정적이 되자, 27살인 1929년 일기에서 보면 처가와 가깝게 지내 자주 왕래하고 특히 처남과 사이가 좋아 자주 어울려 지내며, 여러 가지 일들을 의논한다. 가사 일을 많이 돕는 편이며, 가끔 본인이 직접 요리도 한다. 부인과의 잠자리를 주 1~2회 정도를 가지면서 부인과 담소도 많이 나누며 가정적이며 자상한 가장으로 비교적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4. 求職 및 面書記 生活
1) 구직하기
고등보통학교 2년 수료 후인 1921년 4월에는 사범학교 입학원서를 쓰기 위해 면사무소에서 민적등본을 떼고, 5월 7일에는 高等尋常小學校에서 <국어> <산술> <일본지리> <역사> <습자>의 시험을 치른다. 다음날에는 신체검사를 받았다. 21일에 전북신문에 합격자 발표가 났는데, 합격자 15명중 조선인이 4명이고 일본인 11명인데, 임실사람은 다 떨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완전한 정신을 가지고 공부를 하였다면 학교에 떨어지지 아니하였을 것을 공부를 하지 않아서 고등보통하교 사범과 시험에 낙방하였다. 한 것 없이 엄벙텀벙 세월을 보냈다.”고 후회하는 감상을 적고 있다. 진판옥이 20살인 1922년 4월 11일부터 25일에는 서울에 가 공부를 하려고 가출을 하여 친구를 찾아 갔다. 아래의 글은 이 과정에서의 어려운 처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잘 곳 찾아야 하기에 어느 부자를 찾아갔더니 부자 말이 부모 몰래 떠난 자는 재우지 않는다 하여… 떼를 쓰며 사정을 하였다.”(4월 13일) “날이 저물어 집안식구 생각이 나는데… 눈물이 앞을 가리었더라.”(4월 14일) “한강 철교를 지나는데 빠져 죽으라 하는 생각도 애절하였다.”(4월 16일) “금전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이름이 없는 것과 같다.”(4월 19일) “인근군이 내일 내려가라고 권하여 대었지만 사실 나의 큰 문제라 어찌 할 수 없더라.”(4월 17일)
공부하러 서울에 갔으나 돈이 없어 고생하고 학습소에 등록도 못하고 한강에 떨어질 생각까지 하다가 결국은 귀향하게 된다. 20년대 초반 당시의 조선 젊은이의 꿈이 현실의 벽에 부딪치는 절망감을 여실히 보여 준다. 1922년 9월에 면사무소에서 임시직으로 근무를 한다. 하는 일은 주로 서류 및 창고 정리라든가, 글을 베끼는 일을 주로 하였다. 1922년 11월 19일 일기에 “저녁 후 ‘靑年團 勞動夜學 兼 臨時總會’”에 출석하였다는 내용에서 이 야학은 단순 문맹자를 위한 야학이 아니고, 자강운동차원의 야학운동으로서의 노동봉사를 하는 성격의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동년 9월 5일자 동아일보에 임실군 운남면 모범청년회 16명의 회원이 학교를 지어 주었다는 기사가 보이는데, 이와 같은 역할을 하는 단체가 아닌가 한다. 일기에서는 이 야학의 기능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어서 다만 추정할 뿐이다. 1923년에는 4월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岡山學里에 있는 학교에 가서 <국어> <작문> <산술> 시험을 쳐서 합격자 21인 중 15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등록금이 70여 엔이라는 말에 포기하고 동경에서 막노동을 하게 된다. 4월 13일에는 선인공제회에서 엿을 사서 엿장사를 하고, 5월 7일에는 약방 급료가 박하다고 거절당한다. 5월 8일에는 요리집에 찾아 가니 새벽 일이 4, 5시에 시작하여 저녁 9시 끝난다고 하여 야학을 다닐 수 없어서 포기한다. 5월15일부터 6월 11일까지 우유배달을 하고, 6월 16일부터 6월 25일까지 <내일신문사>에 보증금을 맡기고 신문배달을 한다. 6월 29일에는 광고를 보고 긴자에 있는 암곡상회에 가니 보증인 필요하다고 하여 포기한다. 7월 4일부터 건축장에서 하루 2원의 막노동을 하고, 7월 20일부터 신전구 시역소 공수부에서 물구루마를 끌고 물주는 일을 한다. 7월 31일은 허리를 다쳐서 쉬고, 8월 11일에는 해변가에 거름주는 일을 한다. 8월 27일에는 일을 하다 장대한 일본인들에게 얻어 맞고 일본 감독에게 말하니 도리어 일본인 편을 들어서 일을 그만 둔다. 그리고 9월 1일 관동대지진을 동경에서 겪게 되는 과정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김용선씨가 업혀서 왔더라. 그래서 몸을 어루만져주고 겨우 정신을 차린 후 조금 있더니 지진이 일어나더라. 그래서 집이 무너질 것 같아 뛰어나오니 집이 무너져버렸다. 한 몇 분쯤 하여 또 한 번 지진이 있었다. 시내로 가자 죽은 사람들을 끌어내고 있었다. 돌아왔는데 형세가 참 위험하더라 그래 이제피난을 하기 시작하였다. 불이 나서 공중에 가득하였는데 공중을 보다가 눈을 데었다. 눈물을 흘리고 비볐다. 해일도 일었다. 가져온 것 없이 몸 하나만 남았다. 밥 한 술씩 먹고 잠을 잤다.”
소위 關東大地震은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에 사가미만을 진앙지로 발생했던 큰 지진이다. 관동 지진은 5분 간격으로 강도 7.8 리히터의 세 차례의 지진이 있었다. 위의 일기에서 김용선이 업혀 왔다는 시각이 11시 58분 첫 번째 지진인 것으로 보인다, 이 후 2번 더 지진이 발생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지진 후 관동 지역은 총체적인 혼란에 빠졌다. 정부 조직이 마비되었으며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시간은 11시 58분은 점심시간이 임박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이날 도쿄를 비롯한 지진피해지역에서는 화재가 발생하였다.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각 가정집과 요식업소에서 불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지진이 발생하면서 불이 대부분 목재건물인 피해지역 건물들을 불태우며 널리 퍼져나갔다. 지진 발생 이틀 후의 일기를 보면
“9월 3일(월) 피난을 떠나기로 하였다. 군부대가 한인들을 害한다기에 죽을 한 그릇씩 먹고 주인과 작별하고 品川便으로 출발하였다. 전차에다가 광고를 붙였다. 일본인이 머리에 퇴머리를 하고 가라고 했다. 노병춘을 방문하였는데 아직도 안 왔다고 하기에 전차역쪽으로 막 나가니 일본인이 막아서서 인종구별을 하더니 조선인이라고 하였더니 경찰서를 가자고 하였다. 가던 중에 보니 거리에서 창든 놈, 몽둥이를 든 사람, 여러 가지 연장을 들고 사람에게 겁을 주더라. 경찰서로 가니 나 혼자만이 아니라 여러 동포가 있더라. 거기서 동포한테 듣다. 조선인이 이 기회에 활동을 하자고. 술들을 먹고 우물에 약을 타고 불을 지르고 한 일이 있었다하고 조선사람 2천명이 총칼을 들고 동경으로 향하고 온다는 말이 있어서 조선인은 경찰서에서 잡아가둔다고 하였다.”
“경찰서에서 점심에 주먹밥 한덩이를 받아서 먹고 있는데 갑갑하고 분함이 컸지만 참았다. 동포들이 잡혀오고 있었다. 저녁에도 현미밥을 얻어먹고 잠을 자는데 잠이 올리가 없었다.” 피난을 가다가 아마 민간인으로 구성된 自警團의 검열을 받아 경찰서로 연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를 증언한 관동대지진의 기록에 따르면, 경찰서에 하달한 것 중에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내용은 일부 신문에 보도되었고 보도내용에 의해 더욱더 내용이 과격해진 유언비어들이 신문에 다시 실림으로서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 약탈을 하며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있다”라는 헛소문이 각지에 나돌기 시작했는데, 위의 일기의 내용과 일치한다. 9월 3일에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후 조선총독부 출장소를 거쳐 10월 2일 동경을 출발하여 시모노세끼를 거쳐 10월 7일에 부산에 도착함으로써, 동경에서의 구직생활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20년대에 취업을 하기 위하여 일본에 건너가는 조선인 수는 1920년에는 4,211명이나, 1928년에는 90,622명으로 급증하게 된다. 당시 ‘제국 신민’으로 간주되었던 조선인이 일거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 ‘실업구제 토목사업’ 등에 취직을 하는 것은 당연하였으나, 특히 1929년 ‘세계공황’이후 조선 노동자가 일본인의 실업문제를 증대시키는 위협적인 존재라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조선 노동자들의 渡日 유출을 막기 위해 1930년대에는 조선총독부는 ‘窮民救濟事業’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많은 조선의 농촌 청년들은 1920년대 초부터 취업을 위해 서울 등 도회지로 나가 많은 수가 도시빈민층이 되거나, 도일하여 재일 조선노동자들이 되었다. 진판옥도 이러한 배경에서 구직을 위해 上京하기도 하였고, 渡日하였다. 강제 귀국 후 농사일을 하다가, 경제적 곤궁함에 어쩔 수 없이, 1925년 초부터 면서기로 근무를 하게 된다.
2) 면서기 생활
진판옥은 면서기 생활은 1922년 임시직으로부터 시작하여, 1922년, 1923년, 1924년까지 부정기적으로 근무한다. 1925년부터 1926년까지 1년 반 정도 계속 이어지다가 9월부터는 그만 두고 쉰다. 그러다가 1927년의 일기가 낙질이어서 1927년도부터 다시 면서기로 복귀하였는지는 미상이나 1928년도부터는 정식 직원으로서 안정적으로 면서기 일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제의 행정구획 ‘군면동리통폐합’ 조치는 1913년 1월의 각도 내무부장회의에서의 총독 의 지시 이래 1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총독부령 제111호로 '도의 위치, 관할구역 및 부 군의 명칭, 위치, 관할구역'을 정하고 1914년 3월과 4월에 전격 실시하였다. 그 결과 종래의 4,336개의 면이 2,522개로 통폐합되었다. 1917년 10월부터 시행된 제령(制令) 제1호 ‘면제’ 및 부령(府令) 제34호 ‘면제시행규칙’은 자치적 지역운영에 대신하여 식민지 행정지배의 체제를 완비하려는 일제의 1910년대 지방통치제도 정비과정의 한 귀결점을 이루는 것으로, 면을 행정지배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일제의 지방통치 정책에 대한 자료나 연구는 많지만 실제 식민 지방통치의 말단 조직인 면의 업무에 대한 구체적 내용에 대하여는 1930, 40년대 면서기로 근무한 3명의 증언을 녹취한 자료가 유일하다. 진판옥일기에서의 기록은 1920년대 면서기의 업무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일제하 1920년대의 면서기의 직무를 임시직이 아니라 정식 면서기로 활동하기 시작한 1928년 일기에서 면서기의 업무와 출장 내용을 <표 3>에 정리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1973년의 행정구역요람에 따르면 任實面 관할구역은 二道里 城街里 五亭里 杜谷里 渴馬里 甘城里 大谷里 程月里 里仁里 斗滿里 藏財里 新安里 玄谷里로 13개 里로 구성되어 있는데, 진판옥이 면서기로서 출장을 다닌 곳이 위의 동리와 일치하는 것으로 봐서, 근무지인 면사무소가 ‘임실면’임을 알게 해 준다. 임실군은 임실면을 포함해 12개 面으로 구성되어 있고, 임실면의 동으로 둔남면과 성수면, 남으로는 삼계면, 서로는 청운면, 북으로는 신평면과 접해 있다. 임실면 외에 삼계면, 둔남면의 출장 기록이 보인다. <표 3>에 따르면 면서기는 한달에 최소 6일에서 14일까지 출장을 다니고 있다. 출장업무에 동리의 구장이 함께 협조하여 업무를 추진한다. 대부분의 출장은 각종 세금을 직접 받으러 다니는 것이 가장 큰 업무인 것으로 판단된다. 구장제도는 1918년 토지조사사업의 종료와 때를 같이해 총 6만여 개의 동리가 28,000여 개로 통폐합하고, 그리고 면 아래의 동리에 無給職인 區長을 두었다. 종래 동리장은 마치 동리의 천한 심부름꾼과 같이 여겨져 일반적으로 이를 비하하는 풍습이 있고, 동리 내의 유력자는 이를 맡기를 즐겨하지 않는 상황이므로, 동리장이라는 명칭을 구장이라 칭하였다." <표 3>에서 면서기는 1월 6일부터 地稅를 징수하기 위한 심사에 착수하여 2월 중순까지 지세 징수에 쉴 날이 없었다고 적고 있다. 총독부의 歲入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지세는 조세증수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 일제는 이미 1908년 7월 한국정부로 하여금 「地稅徵收臺帳調製規定」(탁지부령 제19호)을 제정하여 대장을 정리하고 지세징수의 기초대장을 각 면별로 調製함으로써 토지파악에 착수하였다. 1918년 6월에는 土地臺帳과 地籍圖가 완비되어 토지조사사업이 종결되었으므로, 地稅令도 개정되었다. 즉 1914년의 지세령이 여전히 結數와 結價를 기준으로 하고 있었던 데 반하여, 개정된 地稅令은 종래의 과세표준인 전근대적 結制度를 폐지하고 토지수익을 기초로 하여 土地臺帳에 등록된 地價를 과세표준(地價의 13/1,000)으로 삼음으로써 자본주의적 수익세로서의 완성을 보았다. 1월 7일부터는 온돌개량을 독려하고, ‘溫突焚口盖代金’을 징수하고 있다. 온돌화구의 덮개를 공급하고 대금을 받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당시는 온돌 구들장의 개량, 개량 화구 등 다양한 온돌 개량론이 표출되었다. 온돌로 인한 빈번한 화재와 연료 낭비 등의 문제 때문에 일찍부터 온돌 개량에 관심을 기울여온 일제는 각 지역에 온돌개조기성회, 온돌개조계 등을 조직하고 강습회를 열어 개량 온돌을 보급하는 데 노력하였다. 주택 개량 문제에서 온돌은 특히 논쟁적이었는데, 초반에는 온돌이 '위생에 해로운 것'으로서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다가, 1930년대 건축 전문가들이 논쟁을 주도하는 가운데, 폐지보다는 개량론이 확산되었다. 1월 26일에 성가리반 조직을 통보 받고 참석하였다는 내용인데, 이 행사는 ‘전북임실청년동맹 임실지부 성가리반’을 설치하는 대회로 천도교종리원에서 18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것임을 동아일보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2월 하순부터는 酒稅를 걷으러 다니고 있다. 주세는 1909년 2월에 도입된 최초의 간접소비세로 새로운 稅目으로 파악할 수 있는 조세이다. 주세법(법률 제3호)은 自家用과 販賣用을 불문하고 제조소마다 정부의 면허를 받도록 하고 造石 數에 따라 과세하였다. 일제는 이를 통해 무면허제조자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주조업의 발전을 자극하여 증세하고자 하였다. 1919년에는 다시 일반주류의 세율을 인상하고 最低 石數를 증가(2石→5石)시켰다. 酒稅令은 이후에도 1920년, 1922년, 1927년(最低石數:20石)에 걸쳐 개정됨으로써 대중수탈적 성격을 강화시켜 나갔다. 그 결과 酒製造場 數는 1916년 13만여개소에서 1928년에는 약 2만여개소로 격감하여, 자급적 소비구조가 상품경제로 강제 편입되어 갔으며, 이에 따라 주세수입은 1917년 이후에는 1천 1백만원을 훨씬 상회하였다. 이러한 주세를 통한 수탈적 배경에서 민간에서 酒제조면허를 취소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7월 12일, 14일에는 ‘自家用 酒製造 免許 取消 效誘’라 하여 면서기가 면허취소를 막기 위하여 출장을 가고 있는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4월에는 戶稅를 징수하러 출장을 다니고 있다. 戶稅는 人頭稅로서 구한국시대에는 매년 일금 3냥이 봄․가을 2회로 나누어 과세되었는데, 1907년에는 매호 당 30전을 극빈자를 제외하고 부과하였다. 한편 서울 및 각 도청 각 군 등이 있는 시가지에는 호세가 면제되었으므로 1909년에는 법률 제2호 「家屋稅法」을 공고하고 1910년에는 서울을 포함하여 367개소에 실시하였다. 이 두 稅目은 토지 조사 사업으로 지방파악이 완료되는 1919년 3월 제령 제 3호에 의해 지방세로 전환되었다. 地稅, 印紙收入, 戶稅 등의 직접세는 1914년 이후 약 2천만원에 이를 정도로 증가하였고, 酒稅, 煙草稅, 關稅 등의 간접세 또한 크게 증가하였는데, 화폐경제의 진전으로 20년대에는 간접세가 조세수입의 5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증가하였다. 이와 같이 조세수입이 증가함에 따라 總督府의 稅入構成에서 식민지 사회에서 조달되는 經常部의 비중이 1930년에는 78%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이 되었다. 1910년대 이후 조세수입의 압도적 비중을 차지한 지세, 호세, 가옥세 등 直接稅는 그 가혹한 수탈성 때문에 농가경제의 몰락과 植民地 社會構成의 변화에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밖에 세금으로는 市場稅(2월 26일), 營業稅(5월 22일), 驛屯土貸付稅(9월 1일), 車輛稅(10월 14일) 등이 보이고 있다. 그 밖에 면서기 업무로는 경찰서에 출장부와 숙직부를 가지고 가서 조사를 받으며, <일반상식> 시험도 치루고 있다. 대민업무로 호적등본 등을 떼어주고 인지대를 걷으며, 도로수선 부역 등의 감독 및 독려, 旱害 ․ 寒害 상황 파악, 농번기 파종 등 농사일 독려, 창고 및 제반 문서정리, 고령자 독감예방주사 실시 등 세금수납에서부터 일상생활에서의 모든 일에 간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30년대 이후의 면의 조직 및 업무분장은 크게 서무계와 산업계로 나누어지고, 서무계에는 호적을 담당하는 호적계와 세금을 담당하는 재무계가 있었다. 그리고 산업계에는 통상 ‘보농’이라 불리는 보통농사계가 있어서 비료 식량 논농사를 담당하고, 밭농사를 담당하는田作系가 따로 있었다. 군에서는 課이나, 面에서는 係로 나뉘었다. 진판옥은 세금 징수와 농사일 등 면의 대부분의 일에 간여하는 것으로 보이나, 주로 세금업무를 담당하고 호적등본을 떼어 주기도 하는 것으로 볼 때, 서무계 소속으로 재무를 담당하고, 일손이 달릴시 보통농사의 업무를 집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진판옥은 면서기의 업무가 대단히 바쁜 것으로 기록하고는 있으나, 이러한 업무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크게 불편을 주는 것은 아닌 것 같고, 면서기 업무에 대한 개인적 감정은 기록을 하지 않고 있다.
5. 맺음말
이 논문에서는 1920년대 임실에 거주하였던 진판옥의 10대, 20대의 삶을 진판옥일기를 통해 학교생활 경제생활 여가활동 그리고 구직 및 면서기 생활로 재구성하여 살펴보았다. 진판옥은 1918년에는 보통학교를 다녔고, 고등보통학교 2년 수료 후인 1921년부터 사범과로 진학하여 교사로서의 꿈을 꾸지만, 진학에 실패하였다. 1922년에는 가출하여 서울에 올라오지만 냉혹한 현실에 절망하여 한강철교에 떨어질 자살을 생각하기도 하였다. 1923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진학 및 취업을 하려고 하나, 조선인에 대한 차별에 엿장사, 우유배달, 신문배달, 건설현장 막노동 등을 전전하다가 9월1일 관동대지진으로 일본 경찰에 구류되어 10월에 강제 송환된다. 귀국하여 고향에서 부친과 함께 농사일을 하나, 소작료를 납부하고 나면 생활비가 없어 하루에 두 끼도 겨우 먹는 경제 환경 속에서 부친의 强勸으로 1925년 초부터 내키지 않는 면서기 생활을 시작한다. 그 후 1년 반 만에 그만 두었다. 그 후 1928년에는 다시 면서기로 취업하였으나 남에게 빚을 지어야 할 정도로 여전히 경제생활은 어려우나, ‘20년대 초반 小作을 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自作農이 되었고, 비교적 안정된 가정생활을 하고 있다. 1928년의 면서기 생활을 통해서 일제통치의 對民 前哨 행정단위인 面에서의 직무를 살펴 보았다. 여기에서 일기의 내용이 기존에 연구된 일제의 식민 지방통치정책과 일치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일기를 통해 1920대 조선의 젊은이들이 미래에 대한 보다 나은 삶에 대한 꿈을 꾸지만, 어쩔 수 없는 가난 속에서 자기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갈등과 좌절을 경험하는 것을 생생하게 목도하게 된다. 기존에 우리는 일제시기의 면서기를 민을 착취하는 일제의 주구로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으나, 이 일기에서는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면서기를 직업으로 받아들이는 진판옥의 고뇌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는 1930년대 이후 ‘국민총동원체제’에서의 면서기의 역할과는 또 다를 수가 있으리라 사료된다. 진판옥의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삶은 稿를 달리하여 추후 비교 분석하고자 한다.
[주제어] 日記, 求職, 面書記, 物價, 稅金, 학교생활, 경제생활, 여가생활, 독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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