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북동쪽으로 룩셈부르크·벨기에, 북서쪽으로 영국 해협, 서쪽으로 대서양과 비스케이 만, 남쪽으로 스페인·안도라·지중해, 동쪽으로 이탈리아·스위스·독일과 맞닿아 있고, 지중해의 코르시카 섬을 포함한다. 면적 543,965㎢, 인구 악 6천만명.전체국민의 3/4이 로마 가톨릭교도이지만 규칙적으로 성당에 다니는 신도는 소수에 불과하다고 한다.
개선문의 동서남북 4면은 10개의 부조로 장식 되었는데, 모두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군의 승리를 주제로 하고 있다.
1885년 위고의 장례식,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의 축하 퍼레이드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의 군화에 짓밟혀 치욕을 겪었으며, 1944년 드골 장군은 이곳에서 파리 해방을 선언했다고 한다
동쪽 샹젤리제 쪽의 '라 마르세이예즈'와 '1810년의 승리'이다. 나폴레옹은 개선문의 완성을 못보고 죽었으나, 1840년 그의 유해는 개선문 밑을 지나 엥발리드에 안장 되었다고 한다. 지금 까지도 파리 시민들의 애도의 꽃다발은 줄을 잇고.......
개선문으로 통하는 지하통로로 인도에서 차도밑을 지나 바로 개선문앞에 이른다
개선문까지는 레스토랑과 카페, 항공회사, 은행, 쇼핑 아케이드, 영화관 등이 늘어선 상젤리제 번화가에 세워져 있는 광고탑이 예술적으로 세워져 있다.
샹젤리제 거리는 샤를르 드골 에투왈 광장에서 방사선 모양으로 뻗은 12개의 거리 중 하나이며, 길이 1.9km, 너비 124m의 큰길이다. 파리를 대표하는 가장 번화한 거리로 양쪽에 플라타너스와 마로니에 가로수가 매우 아름답다.
루즈벨트 거리가 남북으로 나있고 마티뇽 거리, 몽테뉴 거리 등의 큰길이 교차하고 있으며 샹젤리제 거리에는 노상 카페와 아케이드가 많다. 점심으로는 그유명한 당팽이 요리를 멱었다..
크리스탕 디오르, 이브 생로랑, 랑뱅, 모라비토, 라코스테, 베네통 등의 부티크외에 레스토랑과 찻집도 들어서 있다. 클라리지 옆에는 엑세서리와 내의, 빽 등의 전문점이 들어서 있는 리도 아케이드가 있어, 화려한 장식으로 손님을 끌고 있다.
상젤리제 거리와 나란히 있는 가로수가 우거진 공원 같은 거리....걷고 싶은 충동이 그러나 시간이 없다.
파리에서 가장 큰 콩코드광장 동서길이 360m, 남북길이 210m의 직사각형이다. 동쪽은 튈르리 공원, 서쪽은 샹젤리제 대로에 이어지고 남쪽은 센 강의 콩코르드 다리를 지나 하원에 이르며, 북쪽은 루아얄가를 통해 마들렌 교회와 마주 보는 대단히 큰 광장이었다.
콩코르드 광정 중앙에는 높이 23m의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있다. 이 오벨리스크는 1829년 이집트의 모하마드 알리가 샤를르10세에게 기증한 것인데, BC 13세기에 람세스 2세가 건립한 룩소르 신전에 있었던 유물이다. 광장 주위에는 해군본부와 크리용 호텔, 미대사관 등이 있었다
샹제리제 동쪽 끝에 있는 이 광장은 루이 15세의 기마상을 설치하기 위해 18세기 후반에 조성되었다. 처음에는 '루이 15세 광장'이었으나, 프랑스 혁명 때는 '혁명 광장'으로 바뀌고 루이 15세의 기마상도 철거되는등 우여곡절이 많은 광장이라고 한다>
앵발리드는 지금 군사박물관으로서 사용된다. 앵발리드의 멋진 황금색의 돔 역시 바티칸의 산 피에뜨로 성당의 꾸뽈라에서 착안을 한 것이라 한다. 파리 중심에서 에펠탑 다음으로 눈에 잘 띄는 건물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악명 높은 '단두대'가 설치되어 1793-1795년 사이에 1343명이 처형되었다. 이들 중에는 루이 16세를 비롯하여,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 당통, 로베스피에르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1795년에 콩코르드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852년 도시계획에 의해 오늘날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대단히 큰 광장이다.
유럽에서 가장 웅장하고 역사적인 광장 중 하나인 콩코드 1755년 왕실 건축가인 자크앵가브리엘은 왕의 요청을 받아 이 광장을 설계하였다고 한다. 루이16세가 1793년 1월21일 이곳에서 목이 잘렸던 곳이라고도 한다.
정면에 보이는 저 곳이 꽤 유명한 크리용 호텔인데, 하루 사용료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금액이 든다고 한다.
개방형 2층 버스가 관광객을 태우고 콩코드 광장을........나도 타고 파리시내를 일주하였으면..
콩코드광장 모퉁이 세느강 다리에서........저 멀리 파리의 명물 에펠탑이 보인다.
광장옆을 아름다운 세느강이..... 무수히 많은 관광객을 태우고 오늘도 유유히 강물을 가르고........
콩코드 광장에서 바라본 세느강의 유람선......강변의 아름다움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개선문 앞에 서서 일직선으로 뻗은 거리와 콩코르드 광장을 지나 카루젤 개선문을 바라보는 경치는 훌륭하다. 1889년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 박람회를 계획하면서 이에 적합한 기념물의 설계안을 공모했다. 100여 점의 설계안이 제출되었으나, 100주년 기념위원회는 유명한 교량기술자 귀스타브 에펠의 설계안을 채택했다. 높이 300m의 노출격자형 철구조를 세우려는 에펠의 구상은 경이와 회의를 불러 일으켰으며 미적 측면에서도 적지 않은 반대를 받았다고 한다. 에펠탑은 1930년 뉴욕의 크라이슬러 빌딩이 완공될 때 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로 자리를 지켰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건설목적 : 1889년 프랑스대혁명 100주년 기념 만국박람회
건설기간 : 1887년 1월 28일부터 25개월간
건 설 자 : 귀스타프 에펠(GUSTAVE EIFFEL: 1832-1923)
높 이 : 320.755 미터(안테나 포함)
무 게 : 7175톤
공식적으로 처음 오른 사람 : 에두아르(EDOUARD) 7세와 그 가족 (1889년 6월 10일)
에펠은 "에펠탑이 있음으로 해서 프랑스는 3백 미터 높이의 깃대에 국기를 휘날릴 수 있는 유일한 국가가 될 것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한다. 과연 그의 말대로 에펠탑은 미국의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이 건설된 1931년까지 근 40 여년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 각광을 받았고, 프랑스인들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889년 프랑스 최고의 영예로 간주되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 하였다고 한다. 구조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에펠탑을 밑에서 촬영 했다.
먼저 곡선을 따라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에서 내려 직선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로 바꾸어 타야 한다. 위 사진은 3층에서 내려다 본 세느강변과 파리시내 전경
곡선을 따라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미국의 오티스 엘리베이터회사에서 설계한 유리 승강기로, 에펠탑을 세계 최고의 관광 명소 가운데 하나로 부각 시켰다고 한다.
에펠탑은 1889년에 열린 파리 박람회를 위해 지어진 임시 구조물이며 전세계 최고 높이 였고 자유의 여신상 건축에 참여했던 귀스타프 에펠이 설계하여 한동안 라디오 방송용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재료가 철로 되어 있어 날씨에 따라 높이가 달라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주야간 모두 관광객이 많은곳으로 관람을 하기 위해서는 엘리베이터나 계단투어를 할 수 있다. 에펠탑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강 건너편에 샤이요 궁이 보인다.
에펠탑 꼭데기에서 파리시내를 배경으로 하고
에펠탑에서 바라본 파리 시내, 멀리 고층 건물군이 보인다.
에펠탑 꼭대기층에 설치 되어 있는 에펠과 발명가 에디슨의 밀랍인형이 있다.
꼭대기 층에는 우리 대한민국 서울과 북한의 평양 등....각나라의 국기, 도시와의 방향과 거리가 표시 되어 있다.
1985년부터는 야간에 조명을 비추어 더욱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게 되었다고 한다. 매 정시에 시작해서 5분 동안은 빛이 반짝거리는 에펠탑을 볼 수 있다. 이 때 시각이 밤 11시 였던 듯, 유람선 앞에서 '발광'하는 에펠탑을 보고 환호성 속에 우리들은 넋이 나갔다. 이 환상적인 5분이 끝나면 에펠탑은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다. 조명술이 정말 뛰어나다.
에펠탑은 대혁명 100주년 기념 만국 박람회를 위해 3개의 층으로 되어 있는 이 탑의 높이는 317미터로서 탑의 정상에서 바라보는 파리의 전경은 매우 아름답다. 이 철탑에는 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789개의 계단이 만들어졌다고......
화가들은 에펠탑을 그림의 소재로 삼기 시작했으며 에펠탑을 배경으로 하는 각종 음악과 문학 작품들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수명이 고작 20년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처음 에펠탑을 건설한 회사가 이 장소를 빌려쓰는 조건이 20년 이었다. 그에 따라 1910년 에펠탑은 해체의 위기에 봉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마침 기술이 진보하여 무선통신이 탄생하여 에펠탑을 구제하는데 일조했다. 에펠탑 정상에 무선 안테나가 설치되고 이로 인하여 대서양을 넘나드는 전파들을 쏘아댈 수 있었으니 에펠탑을 함부로 헐어버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이후 에펠탑은 새로운 통신기술이 발명될 때마다 각종 첨단 장비로 무장하게 되었다. 1918년에는 라디오 방송을 위한 장치가 설치되었고 1957년에는 텔레비젼 안테나가 설치되었으며 현재는 기상관측 장비와 항공운항 장비까지 가세되어 있다고한다. - 야간 유람선 투어 중 -
세느강 유람선에서 야간 투어중 바라본 루브르박물관
세느강 야간 투어 중 유람선에서 본 노틀담 대성당
세느강 유람선을 타고 야경을 즐기며 에펠탑 쪽에서 유턴할 때 보이는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미국인회에서 프랑스에 기증한 것인데,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1/4로 축소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도 구경 거리다.
세느강 건너편 샤이요궁 쪽에서 촬영한 것 이다.x-text/html; charset=iso-8859-1" style="HEIGHT: 0px; WIDTH: 0px" autostart="true" loop="-1"> 에펠탑을 세운 귀스타프 에펠은 이 탑을 세우기 전에 철도교를 수없이 건설한 기술자였다고 한다. 에펠탑은 아치 구조에 탑을 올려 놓은 형상을 쉽게 알 수 있다. 이것은 곧 가로로 놓인 철교를 세로로 바꾸어 놓은 것과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다시말해에펠탑은 다리를 놓는 구조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아무튼 예술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했던 파리의 시민들은 혹평을 하였으나, 어쨌든 철의 시대의 막을 올리는 기념비가 되었고 세계의 명물 중에 하나가 되었다는 가이드의 설명.....
노틀담 파리라는 뮤지컬이나 노틀담에 곱추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노틀담성당에 한번쯤은 가보는 꿈을 꿔 보았을 것 이다. 파리에서 에펠탑 보다 노틀담 성당이 더 보고 싶었기 때문에 투어 버스에서 내리자 마자 거의 뛰어 가는 속도로 가기 시작했다. 저 멀리 노틀담 성당이 보이기 시작했다.
노틀담이란 성모 마리아를 가르키는 말로서 실제로 이 성당은 성모 마리아를 위해 지어진 프랑스 최초의 고딕 성당이라고 한다.
노틀담 대성당은 파리의 발상지인 시테섬의 동쪽끝에 있는 파리의 상징적 건물이기도 하다. 1163년 모리스파리 주교가 첫 주춧돌을 놓은지 182년만에 완성되었다. 노틀담 대성당은 파리를 해방시킨 샤를 7세의 감사 예배로부터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800여년 동안 프랑스의 모든 역사를 지켜본 현장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세느강변에서 바라 본 노틀담 대성당-
이 성당은 완공 이래 수리와 개조를 계속했는데 1804년 나폴레옹의 대관식 때에도 수리용 장막을 친 상태에서 대관식을했고. 지금도 파리 대주교가 이곳에 산다. 프랑스 카톨릭 신앙의 중심. 고딕 건축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고 한다.
1830년대 비올레르 뒤끄에 의해 복원되어 원전보다 아름다운 고딕의 웅장함을 보여 주고 있다. 노틀담 성당 내부에는 조각상들이 많은데 성경의 내용을 주제로한 것 이라고 한다. 남쪽과 북쪽에는 4색 스테인드글라스 장미창이 아주 유명하다고 한다.
중세 불어에서 성모마리아를 의미하는 성모 마리아에게 바쳐진 이 사원은 1163년 건설이 시작되어 프랑스 역사의 중요한 현장이며. 1455년 쟌 다르끄의 복원 재판이 있었고,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이 있었던 장소라고 한다.
정면에서 보는 좌, 우의 균형이 일품이며, 건물의 외벽에 조각된 여러 부조와 내부의 장미의 창이 볼 만하다. 높이 69m 의 탑 위에서 보는 파리 전망도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 중에 하나라 할 수 있다.
빗물을 모으는 물 받이와 빗물이 흘러 내리는 곳의 모양도 예술적이다.
성당 내부 벽면에는 성모 마리아상 등이 조각 되어 있다.
미사 때 연주되는 파이프 오르간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수준이라고 한다. 건물 한쪽으로 대성당에 관한 자료를 전시한 박물관이 있다. 마사를 드리기 위해 모인 사람들........분위기 엄숙....
노틀담성당 외부를 한바퀴 돌고 그늘에서 쉬고 체력적으로 보완을 해서 성당안으로 들어간다. 성당안으로 들어가니 날씨가 더워도 성당안은 마치 에어콘을 켜 놓은것처럼 시원하기만하다. 노틀담 성당은 미사를 드리는 성당이지만 관광객들이 신도보다 더 많이 방문하는 곳인 것 같다
장엄한 노틀담 성당 내부를 둘러 보고 성당 입구에서. 다음은 몽마르뜨언덕으로
파리 몽마르뜨 언덕 위에 위치한 사크레케르 대성당은 1876년 착공하여 40년 만인 1914년에 완공한 것으로 파리의 대주교 기베르에 의해서 건축이 추진되었으며 건축가 우트리오와 몽마르뜨에 살고 있던 백여명에 가까운 예술가들이 합심하여 건축한 성당 매우 웅장하다.
사크레케르 대성당의 건축비는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하였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계단을 이용해 성당에 도착하면 왼쪽이 그유명한 몽마르뜨 언덕으로 무명화가와 노상 카페가 줄지어 있다.
몽마르뜨 언덕위 파리에서 제일 높은 곳이다. 이곳에서는 파리 시내가 한눈에...........
파리에서 제일 높은 고지라고 하는 몽마르뜨 언덕, 그 곳에서 바라본 파리 전경의 일부.....온통 시내가 박물관이다
실내 장식품 따위를 파는 가게 이름으로도 유명하고 빵집 이름으로도 몇번 봤을 듯한 그 몽마르뜨 언덕이다
언덕위의 거리 악사, 몽마르뜨 언덕
계단 올라가는곳 밑에는 흑인들이 동양인들 붙잡고 손가락에 얄구진 실타래를 묶고는 10유로를 달라고 한다. 안주면 걷어 찬다고 하니 조심해야 한다
무명 화가들이 관광객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화폭에 담고 있는 곳, 몽마르트 언덕
언덕위에 카페들 커피, 와인 등을 판다.........이것도 구경거리다.
살아 있는 석고상...동상 처럼 꿈쩍 않고 서 있다가 관광객이 돈을 놓으면 여러가지 포즈도 취해 주고 사진 촬영에도 응해 준다
루브르 박물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등 세기의 걸작을 소장하고 있는, 정식 명칭은 Grand Louvre. 프랑스의 국립박물관 겸 미술관, 루브르 박물관이다. 파리에 있는 12세기 존엄왕 필리프 요새지 오른쪽 기슭에 지어진 커다란 궁전의 일부이다. 조각품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은 촬영금지로 아쉬움을 남기며 눈 요기만........1546년 예술품 수집가 프랑수아 1세가 이 낡은 성곽을 부수고 그 터에 새로운 왕궁인 루브르 궁전을 짓기 시작했으며 뒤이어 거의 모든 왕들이 증축해 왔다. 오늘날의 루브르 중 일부는 프랑수아 1세 때 건축가 피에르 레스코의 감독하에 완성되었는데, 이것이 현재의 카레궁 남서쪽 부분이며, 대부분의 루브르 건축 시설은 그 뒤 17세기 루이 13, 14세 때 추가 조성된 것이라 한다.
루이 13세 때 리슐리외 추기경이 왕을 위해 뛰어난 예술 작품들을 수집했고, 루이 14세와 그의 대신 마자랭 추기경은 영국 찰스 1세의 소장품을 포함한 훌륭한 예술품들을 수집했다. 건축가 클로드 페로와 루이르 보, 실내장식가이며 화가인 샤를르 브룅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루브르 왕궁 중 일부분을 설계했다. 1682년 루브르는 루이 14세가 베르사유로 왕실을 옮김에 따라 폐궁되고, 18세기 들어서 이곳을 공공박물관으로 쓰려는 움직임이 일었다고 한다. ---관광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프랑수와 1세는 이탈리아의 화가들을 끌어 들이기 위하여 필립 오귀스트의 요새였던 루브르궁에 르네상스관을 증축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라 조콩드(모나리자)를 비롯한 이탈리아 거장들의 작품을 수집하여 전시하였는데 이것이 루브르 박물관의 시작이었으며 소장품들을 대중에 공개하는 박물관이 된것은 1793년 대 혁명 때의 일이며 박물관에 가장 많은 기여를 한 나폴레옹 1세는 이탈리아와 이집트로부터 많은 귀중품을 가져다 이곳에 전시했으며 그의 조카 나폴레옹 3세가 이 박물관을 완공하였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오늘은 날씨가 흐려서 분수 주변에.......
루브르는 2개의 4각형 본관과 그것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2개의 커다란 정원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건물 복합체다. 분수들 중에서도 가장 큰 넵튠의 샘을 비롯해 테라스 앞의 라톤의 샘이 있고 녹색 융단이라고 하는 잔디밭을 지나 있는 아폴론의 샘은 뛰어난 예술품이라고 한다. 1980년대에 들어 루브르는 방문객들의 접근과 편의를 위해 대대적인 개축작업을 개시했다고 한다.
루브르에 들어 가자 마자 볼 수 있는 유리 피라밋, 역시 고전적 건축물 루브르와 초현실적인 유리 피라밋을 배치를 통해 개선문과 그랑다르쉬가 그렇듯....과거와 미래의 조화를 꾀하려는 프랑스인들의 의도가 엿보인다
루브르박물관 정원에 있는 기마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서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보려고 운집해 있었다. 그렇게 크지도 않은 이 작품은 커다란 방 한칸을 혼자 차지하고, 변하지 않는 아리송한 미소를 아직도 짓고 있었다. 넋을 잃고 한참 바라 보다가 돌아 나왔다. 나오는 길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보니 또 다른 다빈치의 작품이었다. 촬영을 하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발길을 돌렸다. ---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는 우리들 ---
미켈란젤로의 '포로'(죽어가는 노예) 라고 한다. 교황의 묘 앞에 세우기 위한 역작으로 육체에 맞서는 영혼의 투쟁을 상징한 것이다. 에로틱한 남성미를 보여 주는 것 같다. 웃옷을 걷어 올린 채 한 손은 올리고 다리는 수줍게 오므린 죽어가는 노예의 에로틱한 아름다움은 남성적 육체미와 여성적 관능미를 함께 보여 주는 느낌이다
그 유명한 사모트라케의 니케상 이다, 승리의 소식을 전하는 반가운 전령의 조각상이라 한다다. 가까이 다가서면 날개 깃털 사이로 바람소리가 요란하다. 푸른 하늘을 헤집으며 들썩이는 날갯짓을 보면 대리석으로 빚은 조형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니케의 높이는 2.45m. 머리와 두 팔은 떨어져 나가고 없다. 어디 있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다음은 베르사유 궁전으로..
베르사유 궁전은 유럽 최고의 왕권을 자랑하는던 부르봉 왕조가 107년 동안 살았던 절대 군주 체재의 대표적 사적지다. 루이 13세가 사냥을 하고 휴식을 하며 지내던 공간이었는데 오늘날 이렇게 화려한 궁전으로 태어난 것은 루이 14세가 막강한 권력으로 50 년이라는 공사기간 동안 국민의 피와 땀으로 지었는데 이러한 사치와 향락으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게 됐고 부르봉 왕조는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왕실 성당(성 루이 성당)은 루이 15세, 16세, 18세와 샤를 10세의 결혼식이 있었던 곳으로 매일 13시에 미사가 있었으며 1710년에 완성된 이 성당은 천정에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을 알리는 벽화가 유명하다고 한다.
왕실 예배당의 천정 벽화 -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을 알리는 벽화, 천정은 모두 그림과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어 정말 화려하다.
파리 서남쪽 23km에 있는 절대주의 왕권의 영화를 상징하는 대궁전. '짐은 국가다' 라고 했던 루이 14세가 20년에 걸쳐 세운 궁으로 이후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앙트와네트가 호사를 누리다가 프랑스 대혁명으로 비운을 맞았다고 한다.
나폴레옹 대관식, 나폴레옹이 황후가 되는 조세핀에게 관을 씌워주는 장면이다. 나폴레옹이 이 그림을 그린 다비드에게 극찬을 했다고 한다. 이 나폴레옹 대관식과 똑 같은 진품 그림이 루브르 박물관이 있으며 이 그림은 복제품이라 한다.
공식 만찬을 위한 대기실에 걸려있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아이들" 그림 엘리자베트 비제 르 브룅이 그린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아이들" 그림은 오른쪽 벽면에 붙어 있고, 정면으로 줄이 쳐져 있어서 옆으로 밖에 는 촬영할수가 없었다. 다음방은 왕비의 친위대실, 대관식 방으로 예전에는 왕의 친위대실이었던 곳이란다. 여기에 그 유명한 앞에서
본 사진이 있는 방 즉, 루이 필립이 나폴레옹 1세의 영광을 나타낸 방으로 자크 루이 다비드의 "1804년 12월 2일,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 그림이 걸려있다.
태양왕 루이 14세때의 왕비 침실, 과거에 이 방은 왕실 전영 조산소 역할을 하던 곳으로 관습에 따라 가족 입회하에 출산이 진행 됐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많은 통로와 방에는 수 많은 조각상이........
이 방은 "거울의 방"이라고 하는 방인데 17개의 대형 거울과 17개의 창으로 되있는데 궁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이라 한다. 황홀하고 호사스러움이 극치를 이루는 이곳에서 가면무도회나 파티가 열렸었다고 하니 프랑스의 대혁명으로 부르봉 왕조는 몰락 할 만 하다.
베르사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궁전에서 약 5천 여명이 살았다고 하는데 장실이라는 왕의 개인화장실 뿐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휴대용 변기를 이용하거나 사람들의 눈을 피해 건물의 구석 벽이나 바닥 또는 정원의 풀숲이나 나무 밑을 이용했다고 한다. 소변 같은 배설물을 아주 더럽게 생각해서 이렇게 아름다운 건물에는 화장실 같은 것을 설치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베르사유 정원의 모습 프랑스 최고의 조경사가 설계했고 기하학적인 모양의 꽃밭과 아폴론의 분수가 볼만하다. 베르사유궁전에서 많은 그림을 보게 되는데 1700-1800년대 그림으로 보존도 잘 되 있고 그 시대의 사회상을 그림으로 볼 수 있게 잘 표현을 해 놓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