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앞둔 지난 주말, 안동에 있는 선영에 가서 벌초를 했다. 벌초 때 챙겨 가는 것 중에 까꾸리가 있다. 까꾸리는 내가 난생처음 손에 잡아 본 농기구라 유달리 정감을 자아낸다. 아래는 연전에 끄적여 본 까꾸리에 얽힌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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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꾸리의 추억
지난 봄 고모님이 서울 오셨을 때 까꾸리를 하나 사다 주셨다. 달포 전 풍산 성묘 때 잔디 위에 덮인 가랑잎을 빗자루로 쓰는 모습을 보시고 "까꾸리로 하면 좋을 텐데" 하시더니, 예천읍에서 이천 원을 주고 사셨단다. 초록색 플라스틱 까꾸린데 튼실하게 만든 제품이다.
'까꾸리'는 '갈퀴'의 경상도 방언이다. 방언이지만 어릴 때부터 들어서 그런지 갈퀴보다는 더 정감이 가고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 싶다. 다음 성묘 때 가져가려고 베란다 구석에 세워 놓은 이 까꾸리를 볼 때면, 반 세기 전 어린 시절이 아련히 떠오르며 아름다운 추억에 잠긴다. 비록 대나무 살로 만든 그 때의 까꾸리는 아니지만.
까꾸리를 처음 본 것은 열 살 때였다. 그러니까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 서울서 피란 와 고모님이 사시는 예천 은풍골 서사 마을에 임시 정착했을 때다. 마을 뒷산 아래 고모님댁 사과나무 과수원이 있었고, 그 과수원 바로 앞 초가에 방 한 칸을 얻어 살았다.
양식이랑 땔감 등 모든 것을 고모님댁 신세를 지고 있었는데, 바로 뒷산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 가랑잎을 긁어 모으면 땔감에 다소 보탬이 되리라 싶어 열 살 소년은 가랑잎을 긁어 모을 까꾸리와 가랑잎을 담을 가마니 두어 장을 끌고 뒷산으로 갔다. 산이라야 정상까지 수십 미터 정도의 별로 높지 않고 경사가 좀 급한 야산인데, 산 아래서 중턱까지 키 큰 참나무가 들어섰고 그 윗쪽은 소년의 허리 아래에 도는 잔솔이 산등성이까지 떨기나무처럼 듬성듬성 붙어 있었다.
참나무가 들어선 중턱 아래 비탈은 골이 져서 가랑잎이 수북했다. 까꾸리를 들고 가랑잎을 밟으며 중턱까지 기어올라오는 소년의 부스럭대는 소리에 잔솔포기 아래 숨어 있던 회색털 산토끼가 놀라서 산등성이 쪽으로 줄달음친다. 산토끼를 쫓아가 보고도 싶었지만 서울에서 갓 내려온 어린 소년은 마을 뒷산인데도 왠지 혼자서 산등성이에 오르기가 두려웠다.
산 중턱에서 골짜기를 내려오면서 까꾸리로 가랑잎을 긁어 내렸다. 융단폭격하듯이 가랑잎을 한 잎이라도 남길세라 골짜기 아래로 알뜰하게 긁어 내렸다. 잠간 사이에 가랑잎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부픗한 가랑잎 더미를 보니 흐믓하고 재미가 났다. 가랑잎을 가마니에 쑤셔 넣었다. 가마니 속에 발을 넣고 꾹꾹 다져가며 넣었다.
가랑잎 땔감은 무척 헤프다. 아궁이에 넣으면 불길 속에 금세 사라져 뒤를 대기가 바쁘다. 사실 마을에서 땔감으로 가랑잎을 해서 때는 집은 없었다. 산골이라서 일손만 있으면 갈비(솔가리), 소깝(솔가지), 삭다리(삭정이), 고주배기(썩은 등걸), 장작 따위 좋은 땔감을 쉬 구할 수 있었다.
한번은 갈비를 한 짐 하려고 또래 아이들과 함께 동네 청년들을 따라 난생 처음 지게를 지고 나섰다. 고모님댁에 있는 지게 중 가장 작은 지게를 져도 키가 작아 지겟다리가 땅에 닿을락말락이다. 다른 사람은 바소구리(발채) 없는 알지게를 졌지만, 서울 소년은 갈비 짐 꾸리기에 자신이 없어 지게에 바소구리를 얹었다. 물론 까꾸리와 함께.
마을 앞길을 북쪽으로 좀 올라가면 은풍골을 흐르는 개울을 만난다. 지도에 보니 지금은 이 개울 건널목에 이름도 예쁜 은계교라는 다리가 놓였는데 그 때는 징검돌다리였다. 이 징검다리를 건너지 않고 장고개 가는 왼쪽 논둑길을 온 길만큼 가면 키 큰 솔숲이 있었다. 그 숲 안쪽을 보면 하도 울창하여 하늘이 안 보이고 어두컴컴하고 무시무시했다.
앞장 선 나무꾼 청년들도 무서워서 그런지 갈비가 많을 듯한 그 솔숲을 피해 오른쪽 야산으로 방향을 돌린다. 야산에는 소나무가 그리 크지 않고 잡목도 섞여 있고 잡풀도 있었다. 한나절 까꾸리로 발간 갈비를 끌어 모았다. 이제 나뭇짐을 꾸릴 차례다. 소년은 청년들이 갈비 짐 꾸리는 모습을 흥미있게 바라보았다.
알지게를 약 45도 경사진 비탈에 기대어 눞이고 지게 꽁무니에 달린 지게꼬리를 윗쪽으로 뻗어놓는다. 칡덩굴을 걷어 잎사귀를 치고 지게꼬리만한 길이로 자른 두 가닥을 지게꼬리 양 옆에 약 30센티 사이를 두고 나란히 늘어놓는다. 그리고 갈비 무더기 앞에 까꾸리 끄는 자세로 서서 오른발 앞에 삭다리나 생솔가지를 약 1미터 길이로 가로놓는다. 까꾸리로 갈비를 조금씩조금씩 발 앞 솔가지 쪽에 약 20센티 두께로 차곡차곡 붙인다. 간간이 삭다리나 생솔가지를 심으로 넣어가며 약 50센티 너비가 될 만큼 붙이면 직육면체(100×50×20)의 갈비 절편이 만들어진다. 까꾸리가 만든 예술(?) 작품이다.
눞여 놓은 지겟가지 위에 갈비 절편을 들어얹는다. 바늘 같은 발간 솔잎이 찍찍이처럼 서로 엉겨 붙어 갈비 절편은 치켜들어도 좀체 부서지지 않는다. 이런 절편을 여러 장 만들어 얹어 한 짐가량 되면 미리 깔아 놓았던 칡덩굴 두 가닥으로 갈비 짐 좌우 두 군데를 묶는다. 짐 가운데로 지게꼬리를 걸쳐 묶은 다음 지게를 세워 지겟작대기로 괴어 놓으면 끝이다. 지게뿔과 갈비 짐 사이에 세로로 찔러 꽂은 까꾸릿대는 승리(?)의 깃발인 양 멋있다.
소년은 청년들의 도움을 얻어 가며 작은 갈비 절편을 만들었지만 아무래도 허술하다. 갈비 절편을 몇 장 만들어 바소구리 위에 얹었다. 노련한 솜씨가 요구되는 칡덩굴 묶기는 생략하고, 삭다리와 솔가지로 갈비가 흩어지지 않게 덧붙이고 지게꼬리를 걸쳐 묶었다. 짐 꼬락서니가 까꾸리 깃발로 멋낼 형편은 못 되었다. 이제 하산할 차례다.
빈 지게를 지고 올 때와 달리 무거운 짐을 진 하산 길은 무척 어려웠다. 산비탈길을 내려올 때, 너무 긴 지겟다리가 땅에 걸리지 않도록 비탈을 안고 옆으로 서서 게걸음으로 내려오자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결국 비탈길에서 뒤로 한번, 논둑길에서 옆으로 한번 꼬라박고 나니 갈비 짐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런 일을 겪고 나서 다시는 갈비 하러 따라나서지 않았다.
얼마 후 풍산 설뭇 마을 할아버지댁으로 왔다. 풍산은 은풍골에 비해 땔감이나 식량 사정이 무척 좋지 않았다. 마을 주변의 산은 거의 민둥산이고 50년대 매년 연속되는 가뭄으로 산야가 메말랐다. 참나무 숲이 없으니 은풍골에선 거들떠보지도 않는 가랑잎은 아예 없고, 갈비는 풍산들을 지나 물(낙동강) 건너 아틈실의 암쇳골이나 황쇳골에 가야 겨우 한 짐 해 올 수 있었다. 왕복 삽십 리 길이나 되니 이 일은 청장년들의 몫이었다. 농사철에 바쁜 대목이 지나 좀 한가해지면 마을 청장년들은 떼를 지어 물 건너 아틈실로 갈비 하러 간다.
해거름에 마을 어귀 매재산 자락에 발간 갈비 나뭇짐이 일렬로 세워진 광경을 볼 수 있다. 아틈실에 갔던 나무꾼들이 설뭇 못둑을 방금 숨차게 올라와 나뭇짐을 세워 놓고 마지막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휴식을 마친 갈비 짐은 마을을 향해 일제히 움직인다. 까꾸리 깃발이 개선장군의 귀향을 알리듯 나뭇짐 위에서 너울너울 춤춘다. 나뭇짐은 외딴마, 골마, 바짓골을 거치면서 두어 짐씩 사라지더니 남은 두어 짐도 윗마를 마지막으로 사라진다. 이 무렵이면 집집마다 초가 지붕 위로 저녁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2006.11.13)
첫댓글 전형진14.09.07 04:12
비슷한 경험을 한 나로서는 옛날 이야기가 감명 깊습니다. 중학생 때 먼산 나무다니던 생각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