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주요인물
김선궁(金宣弓) 신라 김씨 원조이신 대보공(大輔公)의 30세손이며 신라 김씨 왕세대의 마지막 왕손인 체의(體誼)의 아들로 신라 46대 문성대왕(文聖大王)의 8세손으로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상해를 입힌 자의 목을 베고 처벌을 자청하여 투옥된 후 조정에 의해 효자라고 석방, 표창까지 받았다. 공은 일찍이 웅재대략의 자질을 보였으나 경순대왕이 나라를 기울여 고려에 양국함으로써 그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 건국에 많은 역할을 맡아 공훈을 세웠다. 이에 고려개국벽상공신 삼중대광문하시중이 되었고 선주백(善州伯)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순충(順忠)이다. 그 뒤 3대왕 정종(定宗)때에 대승(大丞)에 추증되었으니 바로 일선김씨(一善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공은 약간 15세에 고려태조 왕건의 원정군에 종군하여 큰 공을 세우니 명장으로서의 위명을 날리게 되었고 왕건태조가 어궁을 하사하였으며 공의 이름까지 선궁(宣弓)이라 고쳐부르게 하였다. 공의 자손들이 대대로 선산 봉하루지(鳳下樓址)에 살게 됨으로써 선산(善山)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으니 현재의 선산군선산면완전동(善山郡善山面莞田洞) 군청사와 그 주변 일대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까지도 공의 유허비각 및 화수정(花樹亭)의 대지 1천여 평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김달상(金達祥)
공은 순충공(順忠公) 선궁(宣弓)의 12세 우간의대부 우문관직제학 지제고 봉익대부(右諫議大夫右文館直提學知制誥奉翊大夫) 우류(右류)의 3남이다. 1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1347(충목왕3)년 대에 정치도갑의 정치관(整治官), 공민왕 5년에서 12년 때에 경상도제찰사(현경상남북도를 합한 도지사), 추밀원 승선, 밀직사 좌대언등 여러 관직을 거치고 흥왕사 변란 1363년(공민왕 12)년 때 토적한 공으로 이해 윤3월 을유에 부시피난 1등공신(扶侍避難一等功臣)이 되고 또 1361(공민왕 10년)에 홍건적 10여만이 침구하여 압록강을 건너와 아군이 나아가 싸웠으나 방어진이 크게 무너져 복주(福州:지금의 경북 안동)로 왕이 몽진할 때 호종한 공록을 삼아 같은 날에 호종1등 공신(扈從一等功臣)이 되었다. 1364년(공민왕 13)년 좌정언(左正言) 김제안(金薺顔)이 왕께 간언(諫言)한 것을 류노(謬怒)하여 하옥을 명 하였으나 밀직부사(密直副使)로서 공의 충의로운 진언으로 파직으로 끝나게 하였다. 이해 전주(銓注)를 담당한 공은 상사인 판밀직사사 오인택의 두 아들 형제를 전주(銓注)를 하지 않고 승진시킨 사건으로 옥천에 유배되었다가 곧 물러나와 한양윤이 되고 1365(공민왕 14)년 4월 신축에 양광도 도순문사, 4월 갑진에 화의군(和義君)으로 봉해지고 1366(공민왕 15)년 요승신돈(妖僧辛돈)이 왕과 가까움을 기회로 횡포가 심함을 통분한 우정언 이존오(李存吾)가 나라를 그르친 신돈의 죄를 극론상소하니 왕이 크게 노하여 순군옥하여 국문을 조명(詔命)함에 당시 동지밀직사사로서 3인(이춘부, 김란, 이색)의 재신과 함께 너그럽게 조사처리하여 죽임을 면하게 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시켰다. (이존오는 장사감무직에 있으면서 아름다운 이 사실을 기록하였기에 오늘에 전하고 있다)
공은 왕에게는 충절을 부하에는 정의로 인덕을 베풀었다. 이해 4월에 금위제조관(禁衛提調官)을 겸직으로 지밀직사사에 올랐으나 1368(공민왕 17)년 9월 병진에 공민왕이 왕위에 오른날부터 입시(入侍)한 최후에 남은 서령군(瑞寧君) 유숙(柳淑)과 그리고 공의 2남 좌대언 군정(君鼎)과 함께 신돈에 의해 1시에 모해당하였다.(신돈은 1371(공민왕 20)년 모반대역의 형벌로 죽임을 받았다)
김군정(金君鼎)
공은 충숙왕4(1336)년에 화의군(和義君) 달상(達祥)의 2남으로 출생하여 국자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선덕랑(宣德郞)직에서 1360(공민왕 9)년 신경동당시(新京東堂試)에 급제(정몽주, 문익점, 이존오와 동방)하여 원외랑(員外郞)이 되고 홍건적의 침입으로 1361(공민왕 10)년 11월 당시 왕이 복주(지금의 경북안동)으로 몽진할 때 호종한 공록으로 1363(공민왕 12)년 윤3월 을유에 호종일등공신(扈從一等功臣)이 되면서 전의부령(典醫副令)에 오르고 의영고부사(義盈庫副使)를 거쳐 1365(공민왕 14)년 5얼에 좌대언에 이르고 충의와 문학으로 세상에 널리 이름이 높았으며 왕을 호종한 명시가 오늘에 전해 오고 있다. 공은 애석하게도 32세에 신돈(辛돈)에 의해 정쟁(政爭)으로 부고(父考)와 같이 화를 당하였다.
김 주(金 澍)
자는 택부(澤夫)며 호는 농암(籠巖)으로 1365(공민왕 14)년에 선산에서 태어났으며 일찍이 독서당곡(독서당곡)이라고 하는 도개면농암촌(桃開面籠巖村)에서 수학하여 우왕(禑王) 때에 등제하였다. 여러 벼슬ㅇㄹ 거쳐 공양왕(恭讓王) 때인 28세에 예의판서로 하절사(賀節使)가 되어 남경을 다녀오던 중 압록강에서 역성 혁명으로 조선이 개국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공은 3일동안 통곡하고 부인에게 서찰을 보내어 "충신은 불사이군이니 내 만약 강을 건너면 몸둘 곳이 없을 것이오. 이미 부인이 잉태하였음을 알고 있으니 만약 아들을 얻으면 이름을 양수(揚燧)라 하고 딸을 얻으면 명덕(命德)이라 하시오. 또한 내 조복과 신발을 신물(信物)로 보내니 부인이 유명을 달리 할 때 이 물건들을 합장하여 우리 부부의 묘를 하고, 내가 강을 떠나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는 날을 나의 기일로 할 것이며 결코 지문묘갈(誌文墓碣)을 쓰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공은 표연히 중국으로 되돌아가니 중국의 명태조는 공의 높은 절의에 감동하여 본국에서와 같은 예부상서의 벼슬을 제수했으나 끝내 받지 않고 평생 형초(荊楚)땅에 숨어살았다. 그러나 명태조는 특명으로 종신토록 예부상서의 록을 지급하게 하였다. 후세에 그 높은 덕을 추모하여 선산군도계면 월림동(月林洞)에 월암서원(月岩書院)을 창건하여 공을 배향하였으며 1694년(숙종 20)년에 상의(尙義)라 사액하였다. 1798년(정조 22)년에는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부조지명(不조之命)까지 내리고 왕은 친히 내격묘(來格廟)란 묘호와 함께 제문을 지어 좌승지 이익운(李益運)으로 하여금 치제케하였다. 월암서원 외에도 안동 고죽서원(孤竹書院)·양산 송산서원(松山書院)·고창 운곡서원(雲谷書院)·곡산 동진사(東津祠)에서 향사하고 있다.
朝鮮王朝實錄
□명종18(1563)년 9월 27일(임인)
동지중추부사 김주(金澍)가 졸했다. 주의 자(字)는 응림(應霖)이고 안동(安東) 사람이다. 종계 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주청사에 충당되어 북경에 가서 예부에 청하여 제지(帝旨)를 받아냈는데 그 길로 옥하관(玉河館)에서 졸하니 상이 그에게 주청한 공이 있다 하여 예조판서를 특증(特贈)했다. 문장에 능하여 동류들의 추중하는 바가 되었다.
김 제(金 濟)
호는 백암(白巖) 원로(元老)의 아들이요, 민부의랑(民部議郞) 우의(右誼)의 손자로 농암(籠巖) 주(澍)의 백씨(伯氏)다. 공양왕 때 조봉랑(朝奉郞)이 되고, 1390(공양왕 3)년 통훈대부 지평해군사(通訓大夫知平海軍事)에 올랐다. 그때 나이 31세로 이성계가 고려를 찬탈한 소식을 듣고 군청벽에다 해상시(海上詩)를 지어붙이고, 바다로 나아가 통곡하고 이름을 제해(濟海)라 고쳤으며, 갈대 삿갓을 쓰고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간 후 그 마친 바를 알지 못한다.
공이 동해로 들어간 날이 1392년 12월 22일인데 계씨 농암공(籠巖公)이 압록강에서 부인에게 서찰을 보낸 날짜와 우연이도 같다하였다. 공을 추모하기 위해 안동 고죽산(苦竹山)아래에 사우를 세우고 농암공과 같이 모시고 묘호(廟號)를 쌍절(雙節), 원호(院號)를 고죽(苦竹)이라 하였다. 증이조참의(贈吏曺參義) 정묘조(正廟朝) 때 충개(忠介)라 시호하였다.
김가행(金可行)
공은 좌대언(左代言) 군정(君鼎)의 2남이고 지밀직사사 화의군 달상(達祥)의 손자이며 백암(白巖) 제(濟)와 농암(籠巖) 주(澍)의 재당질이다.
어려서 부친과 조부가 정쟁(政爭)으로 괴승 신돈(辛돈)에 의해 모해당하고 가산이 적몰되는 참변을 겪고 자랐으며 어려움속에서도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과거에 급제하여 동래현령으로 있으면서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왕권을 찬탈하여 이씨조선을 건국하는 대역을 지켜보고 고려왕조를 부흥하고자 왕강(王康), 박위(朴위), 박중질(朴仲質), 왕화(王和), 왕거(王거), 김유의(金由義), 이흥무(李興茂), 중 석능(釋能) 등과 함께 반역모의 한 것이 발각되어 1394(태조 3)년 1월 16일 순군옥하고 조사하게하여 같은 해 3월13일 남평군(南平君) 왕화(王和)와 영평군(鈴平君) 왕거(王거), 그리고 박중질(朴仲質), 김유의(金由義), 이흥무(李興茂) 중 석능(釋能) 등과 함께 참형당하였다. 공의 역모사건은 태조 개국 이래 최대의 옥사였고 고려 최후의 충열 순절의 충신임이 역사적으로 자명(自明)하여 빛날 것이다. 뒷날 이조판서에 추증되어 후손이 많이 살고 있는 경남 거창군 가조면 대초리에 공의 손자인 수양(粹讓)의 취수정(醉睡亭) 경내에 문학박사 이선근(李瑄根)이 찬한 신도비가 세워있다.
김효정(金孝貞)
자는 경부(敬夫)며 호는 주촌(注村)으로 여말순절신 백암 제(濟)의 손자로 1399(정종 원년)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402(태종 2)년 17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사인지제교 겸 춘추관기주관이 되었다. 1427(세종 9)년에 중시에 급제하여 필선이 되고 통정대부 좌사간겸 춘추관지제교에 올랐다. 집현전 직제학을 끝으로 향리인 선산에서 낙향하였다. 그러나 소명으로 친히 공을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하고 이어 경상·함경도 관찰사에 제수하였다. 그후에 이·호·예 3조 판서 및 지경연사세자우빈객·오위도총부도총관 겸 양관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성절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세종의 명에 의해 성리학군서(性理學群書)의 발문을 지었으며 팔로명승루기(八路名勝樓記)를 찬하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김숙자(金叔滋)
자는 자배(子培)며 원래 초명은 자(滋)라 하였으나 사마시에 합격하고 숙(叔)자를 앞에 붙여 썼으며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이다. 1414(태종 14)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세종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개녕현감·사재감부정·성균관부정·성균관사예 등을 지내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내놓고 밀양으로 낙향,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뒤에 중정대부예문관직제학 겸 춘추관기주관에 증직되고 1489(성종 20)년 자헌대부호조판서 겸 지춘추관사가 가증되었으며 선산 낙봉서원(洛蜂書院)에 배향되었다. 1845(헌종 11)년에는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사 양관 대제학 성균관제주 오위도총부도총관이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공은 일찍이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로부터 학맥을 이어받아 조선조에 성리학의 불씨를 살려낸 분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김 교(金 嶠)
자는 국보(國寶)이며 어릴때부터 무예에 뛰어났으며 15세에 생원진사에 나아가고 1450(세종 32) 무과에 급제하고 7년 후에는 중시에 급제하였다. 훈련원판관을 지내고 부호군이 되어 1460(세조 6)년 신숙주(申叔舟)의 종사관으로 모련위(毛憐衛) 토벌에 공을 세워 종성절제사·길주목사·경원부사·충청도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467(세조 13)년 만포 절제사로 있을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출정하여 공을 세워 적개공신 일등에 책록되고 오림군(烏林君)에 봉해졌다. 이어 회령도호부사·함경도병마절도사를 거쳐 지중추부사가 되어 선산군(善山君)으로 개봉되었다. 1479(성종 10)년 건주야인(建州野人)을 토벌할 때는 부원수로 출정하여 공을 세워 명황제로부터 은대(銀帶)를 하사받았으며 평안도관찰사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양양(良襄)이다.
朝鮮王朝實錄
□성종11(1480)년 12월 19일(갑자)
평안도 관찰사 김교(金嶠)가 졸하니, 철조·조제·예장을 예(例)대로 하였다. 김교는 자(字)가 고경(高卿)인데, 선산인(善山人)으로 판예빈시사 김시로(金時露)의 아들이다. 어릴 때 궁마(弓馬)를 닦아 경오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또 정축년에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훈련원 판관에 초배되었다. 그리고 여러번 천전(遷轉)하여 부호군이 되어서는 신숙주를 따라 모련위(毛憐衛)를 정토한 공으로 사복시 윤에 초배되고, 통정 대부의 품계에 올랐으며 종성절제사·길주 목사·경원 부사·충청도 수군 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정해년에 이시애(李施愛)가 모반하여 가선 대부 경원 부사를 제수받고 원수(元帥)를 따라 정토하려 갔을 때 군이 북청(北靑)에 이르니, 여러 장수가 이미 결진(結陣)하고 았었다. 김교는 적장이 밤에 와서 공격할 것이라는 것을 듣고 진(陳)을 옮겨서 마을을 의지하여 목책을 설치하고 기다릴 것을 청하니, 여러 장수들이 그대로 따랐다. 그날 밤 적이 과연 진영을 내습하였는데, 김교의 책략에 힘입어 패하지 않고 이시애를 주살하게 되니, 책훈으로 정충 출기 포의 적개 공신호를 내리고, 자헌 대부를 가자하였으며, 오림군(烏林君)에 봉하였다. 얼마 있지 아니하여 회령 도호부사로 옮겼다가 북도 절도사로 승직되었으며, 체대(遞代)되어 지중추부사가 되고, 선산군으로 개봉되었다. 주상께서 즉위하여 순성 명량 좌리 공신의 호를 내리고, 외방으로 나아가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를 삼았다가, 체대하여 돌아오게 해서 중추부 지사를 제수하였다. 그리고 옮겨서 공조 판서를 제수하였다가, 외직으로 나가 영안남도 절도사를 삼았다. 또 평안도 절도사가 되었을 때 건주 야인이 여러번 중국을 침범하니,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군사를 청하였다. 임금이 김교를 부원수로 삼아 보내었는데, 이기고 돌아오니, 정헌대부를 가자하였으며, 황제가 은으로 폐물을 내려 주었다. 곧 평안도 관찰사를 제수받고 졸하니, 나이 53세였다. 시호(諡號)가 양양(良襄)인데, 온량(溫良)하여 악(樂)을 좋아하는 것이 양(良)이고, 무신으로서 공로(
功勞)가 있는 것이 양(襄)이다. 김교의 아우 김숭(金嵩)·김찬·김아(金峨)·김호(金岵) 등이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해마다 그 어머니에게 쌀 20석(碩)씩을 내려 주니, 사람들이 영예롭게 여겼다.
김지경(金之慶)
자는 유후(裕後)며 호는 송파(松坡)로 세종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경질(景質)이다.
朝鮮王朝實錄
□성종16(1485)년 7월 8일(병진)
행 부호군 김지경(金之慶)이 졸(卒)하니, 철조·사부·조제를 관례대로 하였다. 김지경의 자(字)는 유후(裕後)이며, 선산(善山) 사람이니, 증(贈) 호조 판서 김지(金地)의 아들이다. 정통(正統) 기미년에 21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에 교서관 교감에 제수되고, 경신년에 집현전 정자에 선보되었다. 임술년에 저작랑으로 오르고 예문관 검열로 옮겼다가 봉교·한성참군에 이르렀다. 사헌부 감찰·사간원 정언, 이조의 좌랑·정랑을 거쳐, 사헌부 장령이 되어서는 여러 번 소(疎)를 올려 극간하여서 환관(宦官)의 봉군(封君)을 파(罷)하였으며, 의정부 검상으로 옮겼다. 갑술년에 지사간원사로 발탁되어서 제수되고, 집현전 직제학으로 옮겼다. 이때에 세조가 회간왕을 봉하여 세자(世子)로 삼았는데, 뽑혀서 우보덕이 되었으며, 어버이가 늙었음을 이유로 걸군(乞郡)하여서 성주 목사에 임명되었다. 성화(成化) 을유년에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고 얼마 안되어 첨지중추부사로서 강원도 관찰사를 겸하였으며, 여러 번 벼슬을 옮겨 예문관 부제학에 이르렀다. 신묘년에 가선 대부에 특별히 올랐고, 수사헌부 대사헌으로 좌의정 김국광(金國光)의 탐오하고 망상한 일을 탄핵하여 재상의 지위를 해면하게 하였으며, 호조와 공조의 참판으로 누차 옮겼다. 을미년에는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외방(外方)으로 나가고, 정유년에 조정으로 들어와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갑진년에 가정 대부를 더하여 곧 개성부 유수에 임명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였는데, 나이 67세였다. 시호(諡號)를 경질(景質)이라고 하였으니, 의(義)를 펴고 곧은 일을 행하는 것을 경(景)이라하고, 성실하여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것을 질(質)이라 한다. 김지경은 일을 처리함이 바르고 상세하였으니, 그 관직(官職)에 임하여서는 부지런하고 삼가면서 노고하였고, 그 대간직(臺諫職)에 있어서는 일을 당하면 감히 말하였으며 조금도 사의(邪意)를 두어 아첨하는 일이 없었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타고난 성품이 강직(剛直)하고, 강개(慷慨)하여 절조(節操)가 있었으며, 일에 임하여서는 실지에 힘쓰고 겉치레를 꾸미지 아니하여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하였다.】
김종직(金宗直)
자는 효관(孝관) 또는 계온(季溫)이며 호는 점필재(점畢齋)로 1453(단종 원년)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9(세조 5)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자·교리·경상도병마평사 등을 지내고 성종초에 이르러 경연관·함양군수·선산부사를 거쳐 응교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다. 이어 도승지 이조참판·동지경연사·한성부윤·공조참판을 지내고 형조판서·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공은 학문이 뛰어나 영남학파의 종조가 되었고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공의 문인들이 관직에 많이 등용되었다. 공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史草)에 올렸던 것이 원인이 되어 1498(연산군 4)년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공은 길재로부터 부친인 숙자(叔滋)의 학통을 이어받아 우리나라의 유학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것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증수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朝鮮王朝實錄
□ 성종23(1492)년 8월 19일(정사)
지중추부사 김종직(金宗直)이 졸하였다. 철조하고 사부·사제를 전례와 같이 하였다. 김종직의 자(字)는 계온이고, 선산인(善山人)이며, 성균 사예 김숙자(金叔滋)의 아들이다. 경태(景泰) 계유년 문과에 합격하였다. 세조가 집현전을 없애고 글 잘하는 선비 10명을 선발하여 예문을 겸하게 할 적에 김종직이 형 김종석과 함께 선발되어 들어갔다. 성종[今上]이 즉위하고 집현전의 예에 의하여 예문관의 인원을 늘려서 문학하는 선비를 선발하여 충당시켜 모두 경연관을 겸하게 하였는데, 김종직이 수찬이 되었다. 그러나 어버이가 연로함으로 인하여 지방에 나아가 함양 군수가 되었다. 성화(成化) 을미년에 임기가 만료되자 승문원 참교에 제수되었고, 이어 어머니가 연로함을 인하여 사직하자 선산 부사에 제수되었다. 기해년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고, 삼년상을 마치고는 금사(金山) 촌야에 있었다. 임인년에 소명(召命)을 받고 홍문관 응교에 제수되었으며, 얼마 되지 아니하여 직제학에 초승하여 제수되고 부제학으로 승진되었으며,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고 좌부승지까지 이르렀으며 도승지에 발탁되어 제수되었다. 곧이어 가선 대부 이조 참판 겸 동지경연사에 승진되엇다. 당시 경연 당상은 다만 조강에 참여하여 모셨을 뿐이었는데, 임금이 특별히 김종직에게 명하여 진강하게 하고 이어 주강에 참여하게 하였다. 정미년에 전라도 감찰사로 나갔고, 홍치(弘治) 무신년에 공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며, 기유년에 자헌 대부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는데, 중풍(中風)의 마비 증세로 인하여 휴가를 주었으나 낫지 아니하므로 지중추부사로 옮겼다. 동래 온천에 목욕하기를 청하여 내려갔다가 이어 밀양(密陽)의 옛집으로 돌아가서 글을 올려 사직하였는데, 임금이 친히 불윤하는 비답을 지어서 하사하였다. 이때에 와서 졸하였다. 처음의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는데, 도덕이 높고 학문이 넓은 것을 '문(文)'이라 하고, 청렴하고 공정한 것이 '충(忠)'이다. 뒤에 대간의 논박으로 인하여 시호를 '문간(文簡)'으로 고쳤는데, 문학이 넓고 본 것이 많은
것이 '문(文)'이고 경(敬)에 거(居)하여 간소하게 행동함이 '간(簡)'이다. 김종직은 자호(自號)를 '점필재(점畢齋)'라고 하였으며, 저술한 글이 몇 권이 있다. 찬집(撰集)한 《청구풍아(靑丘風雅)》, 《동문수(東文粹)》가 세상에 행해지고 있다.
김종직의 도학사상
성종을 보필하여 성종서앧를 이룩하게 한 점필재(점畢齋) 김종직(김종직(1431~1492)의 도학의 의리사상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정몽주 이래의 도학의 학맥을 관류하여 보여주는 서책이다.
의(義)와 불의(不義)가 혼돈되고 '애국'하면 봉건잔재로만 생각하는, 사회기강이 무너져가는 시대에 《김종직 도학사상》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주고 있다.
정몽주에서 연원하여 길재)吉再)에게 그 정맥(正맥)이 이어져 김숙자(金叔滋)에 이르러 김종직(金宗直)에 전하여진 것이 우리나라 도학의 맥이다.
점필재(점畢齋) 문하에서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졌으니 위로는 공맹(孔孟)의 도에서 주자(朱子)에 이르던 도통에 접하고 아래로는 후학에 문을 열어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기본으로 하는 도학정치를 펴 영남사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점필재 도학의 학풍과 목표는 진덕(進德) 수업(修業)을 오직 독경(篤敬)하는 데 있다하고 제자들의 수양공부를 거경궁리(居敬窮理)에 두었던 것이다.
욕심[私利]을 버리는 것을 인간 윤리 생활의 최고 이상으로 삼고 의를 지키고 행하는 것을 생명으로 삼은 학문이었으며 공의(公義)에 충실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점필재 학문의 제1조라 밝히고 있다.
도학자이며 유학자인 김종직의 '의리사상'을 간추려 본다.
도통관념에 의하여 고수하려는 정통유학의 순수성 내지 춘추대의로서의 의리 혹은 절의를 찾는 가치지향의 색채가 강했었다. 따라서 유교의 보편적인 바탕은 윤리이지만 사람의 도리를 지키는 데는 의리라는 춘추대의가 필요했고 어떠한 유혹이나 방해도 극복 할 수 있는 정신적 용기와 불요불굴의 저항력을 필요로 하였다.
살신성인의 순교적 자세
의리란 인간세계를 도덕적으로 잘 다스려 이상의 세계로 만드는 사명감이었으며 이러한 점에서 사대부로 하여금 대의를 위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순교적 자세를 갖게 하는 힘을 발휘하게 했다.
다음의 관어대부(觀魚臺賦)는 알묘조장(알苗助長)의 비유를 들어 시의에 맞는 처세를 하는 천하의 정도인 '중'(中) 즉 의(義)에 따르는 생활을 해온 점필재 의리사상의 뿌리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옥장(玉帳)에서 병부(兵符)를 엄숙히 받자와 동녘으로 해변끝까지 왔네,
우격(羽檄)이 한창 빗발치듯 하는 때, 내 어찌 다른 것을 생각할 틈이 있으리,
혹시나 큰일에 계교를 헛되이 세월만 허비할까 두려워하네
누주(樓州) 성에 와 잠깐 쉬다가 선배(先輩)의 옛집을 찾았더니
그 옆에 한 대(臺)가 우뚝 솟아 적성(赤城)의 새벽 노을을 둘렀기로,
두 객(客)을 좇아 지점(指點)하니, 이 몸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타고 이 높은 곳에 올라온 듯
장자(莊子)가 제 어찌 고기를 안다 자랑하리.
맹자가 어찌 감히 물을 본다하리,
가파른 절벽에 기대어 멀리 바라보니 아득한 운도(雲濤)는 몇 리(里)가 되는고,
이윽고 회오리바람이 자자 포구의 연기가 멀리 일어나니,
해면(海面)이 쓸은 듯한데 풍경이 금시 달라진다.
휘파람 길이 불고 밑을 굽어보니,
고기떼들 발랄하게 멋대로 즐기는 구나,
무리를 짓고 떼를 지어 노니는 모양,
가까운 근친에 비유할 바 아니로세,
창파에 넘실거리며 비늘을 날치는 모양,
풍뢰(風雷)에 변화하여 용(龍)이나 될 듯,
술가지를 더위잡고 긴 한숨 쉬노니,
저 고기들 다 편안히 잘사는구나,
옛성인(聖人)이 나는 솔개와 아울러 비유한 그 지리(至理)를 뉘라서 분명히 알꼬,
전에 배운 태극(太極)의 이 이치를 마음에 새겨서 버리지 말자.
돌아보니 두 객(客)은 우뚝히 서서 발돋우고 멀리 바라보누나,
술상을 벌여 놓고 잔을 서로 나누며 원리(原理)하나 예 있음을 깨달으면서
목옹(牧翁)에게 술 한잔 따르고 이 노래를 읊으니, 마치 해륙의 진미(珍味)를 안주로 먹는 듯,
서로 비추는 간담(肝단)이 초월처럼 멀지 않으니, 원컨대 우리 함께 명성(名誠)한 군자(君子)에게로 돌아가리라."
일상생활에서 실천궁행
점필재 학문의 경향은 자연이나 우주론적 이기(理氣)의 이론보다도 인간의 내면적인 성정(性情) 즉 마음의 수양과 도덕 가치의 문제를 일상생활에서 추구실천한 것이 특징이며 소학을 그대로 실천했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에도 관직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하여 점필재를 논박하기도 하였으나 성종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는 말을 보면
"성삼문 박팽년은 충신입니다"하여
성종의 얼굴빛이 변해지자
"불행히 또 변고가 있다면 신도 성삼문이나 박팽년과 같이 되겠습니다."
세조의 불의를 뇌리에 새긴 점필재의 충분(忠憤)을 알 수 있으며 도학의 의리사상의 일면을 미루어 살필 수 있게 해준다.
"적국(敵國)이 큰 멧돼지 처럼
우리 변강(邊疆)을 먹어오는데
용감한 화랑도(花郞徒)
나라 위해 몸을 바쳐 딴 생각 없었네
창을 메고 처자(妻子)와 영결하고
샘물 마시며 주먹밥을 먹다가
적군이 밤에 성루(城壘)를 무찌르니
의연(毅然)한 혼(魂)이 창 끝에 닿았구나.
양산(陽山)의 구름을 바라보니
우뚝우뚝, 무지개가 뻗쳤네
슬프다 네 장부여
그대들은 끝내 씩씩한 사나이
천추(千秋)의 귀웅(鬼雄)이 되어서 함께 제사술을 마시는 구나."
점필재 김종직이 김흠운(金歆運)과 그 부하들이 전장에서 싸워 죽은 일을 칭송한 양산가(陽山歌)에 붙인 시를 보아도 도학의 의리사상은 멀리 고대로 올라가서 신라의 화랑정신에 닿았으며, 조선조 사화(士禍)에서 보는 의리와 구한말 의병사상과도 일맥 상통한 것으로 도학의 의리사상이 조선조는 물론 한국민족사를 통하여 면면히 이어져 온 민족정기의 표상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사림 세력은 의리사상이라는 도학의 이념으로 뭉쳐진 학문집단인 동시에 유교정치실현에 대한 신념이 강하였기 때문에 사화(士禍)를 입더라도 살아남아 서원(書院)과 향교(鄕校) 향약(鄕約)을 토대로 계승 발전 조선조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점필재 도학(道學)의 의리사상에 대해 조광조가 중종에게 말하는 것을 보면 그 존재를 짐작케 한다.
"김종직 또한 유자(孺子)입니다. 그 때의 김굉필 같은 분이 비록 일시에 시행하지는 못했으나 근래 그 풍을 듣고 추모하는 자가 선행을 힘쓰는 것은 이 사람의 공이니 선인은 국가의 원기(元氣)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치사상이란 경세(經世;통치)의 근원이 객관적으로 천리(天理)에 있지만 시비(是非)를 가리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 있다."
이 경우 시비심(是非心)의 대변인 구실을 하는 층이 사대부이다.
선비정신은 나라의 원기
사대부는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집약한 민본적 위민정치(爲民政治)를 추구하는 의리(義理)의 본원에 해당한다. 이러한 뜻에서 '선비'를 나라의 원기(元氣)라 하며 구체적으로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의 사림층(士林層)을 시대적 양심의 본원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한 시대의 인재는 한번 나기가 드문 것이다. 백년을 지내야 하고 수십년을 길러야 한다. 점필재는 왕위찬탈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서 정몽주의 의리를 토양으로, 사대부의 의리관을 파괴하는 일체의 불법과 비리에 항거하여 춘추대의를 집약한 의리 정신을 구현할 거대한 잠재세력으로서 영남사람을 형성했으며 사실 특권층의 권귀화(權貴化)를 방지한 일면도 있다.
무오·갑자사화로 사림은 비참한 박해를 받아 대다수 선비들이 살해되었고 점필재의 의리사상은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로 이어졌으나 기묘사화로 사람의 원기가 끊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 전통에 잠재되어 있는 의리사상 선비의 비판정신은 역사의 새로운 국면에서는 고유의 소임을 저버린 일이 없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하기로는 순(舜)임금이나 도척(盜척)이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의(義)나 이(利)의 구분이 있으니 도척은 도척이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완용의 글씨가 명필이라 하여도 벽에 걸어두고 볼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 정신이 바로 감고계금(鑑古戒今)이라는 역사적 교훈에서 나타나는 불의(不義)를 미워하는 의리 사상이요 올바른 비판정신이다.
이 정신이야말로 양산가(陽山歌)속에 나오는 '창을 메고 처자와 영결하고 샘물마시며 주먹밥 먹다가 나라 위해 몸바친 신라화랑 흠운(歆運)의 의리이며,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으려고 한 정몽주의 일편단심이며, 왕위찬탈을 반발로 영남사림을 형성한 점필재의 의리사상이며, 조의제문(弔義祭文)을 사책에 기록한 김일손(金馹孫)의 의리이다.
근본적인 의리는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속에 다 들어있다. 그러나 실천없는 유학은 대학 중용을 천백독(千百讀)했더라도 앵무새와 다를 것이 없다.
점필재의 도학은 진리를 이론에서 찾지 않고 일상생활의 실천궁행에서 찾았던 인간의 주체적 노력이었으며, 도학의 의리정신을 우리민족의 심저(心底)에 깊이 뿌리 내리게 하여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조선조 유학계열의 사림은 명분(名分)과 절조(節操)와 의리(義理)를 절대가치로 체득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는 생사를 넘어선 우국애민의 의리사상으로 역사적 소명에 헌신하여 왔다.
춘추대의에 대한 신념의 실천궁행이 의병운동에 이어 독립운동으로 발전해 왔으며 이러한 민족의식의 연원이 성종이후 4백년동안 그나름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온 점필재의 도학사상의 근본이념임을 이 책은 구석구석에서 보여주고 있다.(신학상 지음·영출판사 刊·신국판 550쪽)<박종목 기자>
김수양(金粹讓)
호는 취수정(醉睡亭), 화의군 달상(達祥)의 현손(玄孫)이고 고려순절신(高麗殉節臣) 가행(可行)의 손자이다. 1451(문종1)년에 출생하여 1492(성종23)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494(성종25)년에 통훈대부 보령현감(通訓大夫保寧縣監)이 되어 재임중(在任中)에 무오사화(戊午士禍)를 당하여서 문충공(文忠公) 점필재(점畢齋) 종직(宗直)의 사숙종인(私淑宗人)으로 세태를 개탄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남으로 낙향하는 도중 지쳐서 경남 거창군 가조현(加祚縣) 지금의 대초리(大楚里)에 복지(卜地)하여 허ㅘ산 은도동(花山 隱道洞)에 정각(亭閣)을 짓고 취수(醉睡)라 이름하고 은거(隱居)하였다.
그 후세가 1998년 5백년이다. 공은 소성(素性)이 청간중의(淸簡重義)하고 도학(道學)의 연원(淵源)을 천양(闡揚)하였다.
김응기(金應箕)
자는 백춘(伯春)이며 호는 병암(屛菴)이다. 지경(之慶)의 아들로서 나면서부터 치아가 돋았으며 총명이 남달랐을 뿐만 아니라 자라면서 침식을 잊고 독서에 전념하는 열의를 보였다.
1477(성종8)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삼관직을 지내고 홍문관 교리·전한·직제학으로 10여년 강연(講筵)에 전임하였다. 이어 승정원 동부승지·도승지를 거쳐 강원·경상·경기도 감사에 보임되고호조와 공조의 참판을 지내고 한성부윤과 이·예·병·형·공 등 5조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우의정과 좌의정에 올랐다. 공은 천문지리·산술에도 정통했으며 지병인 풍질을 앓으면서도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고 영중추부사를 마지막으로 돌아가시니 시호는 문대(文戴)이다. 왕은 공을 가리켜 '동방부자(東方夫子)'라는 어필을 내렸다.
朝鮮王朝實錄
□ 중종14(1519)년 6월 9일(신미)
영주추부사 김응기(金應箕) 졸하였다.
【사신은 논하다. 응기는 사람됨이 단정하고 묵직하며, 박학(博學)하여 천문·지리·산수(算數)의 학문을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동방(東方)의 성인이라 하였었다.】
김효원(金孝元)
화의군 달상(達祥)의 10세손으로 자는 인백(仁伯)이며 호는 성암(省菴)이다. 1504년(연산10)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다음 해에 알성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통정대부 영흥대도호부사와 함흥진관 병마도첨절제사를 역임하였다. 후에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사 춘추관 성균관사 예문관제학 세자좌부빈객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증직되었다.
朝鮮王朝實錄
□ 선수23(1590)년 4월 1일(임신)
영흥 부사(永興府使) 김효원(金孝元)이 졸하였다. 효원은 통례원 통례(通禮院通禮)로서 전례대로 자급을 올려 영흥부사에 제수되었는데 1년이 지나서 고을에서 졸하였다. 효원은 벼슬살이에 있어서 청렴 결백하였고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정결하고민첩하게 하였으며 세 고을을 역임하였는데 치적이 모두 우수하였다. 젊었을 때 날렵하여 일을 좋아하였고 논의가 과격하였으므로 동류들이 두려워하여 모두 그의 밑에 있었는데 또한 이 때문에 여러 사람에게 원한을 사기도 하여 끝내 당파의 괴수라는 명목으로 죄를 얻어 외직에 보임되었다. 한직(閒職)에 있으면서 잘못을 반성하여 낮은 벼슬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고 시사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으며, 친구에게 보내는 서찰 내용에도 조정의 득실에 대해서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늘 탄식하면서 '당초 전조(銓曹)의 석상에서 발언한 한 마디 말은 단지 나라를 위해서 였는데 어찌 이토록 분란이 생길 줄이야 생각했으라. 나로서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하였다. 그의 부친이 영유 현령(永柔縣令)으로 있었는데 늘 문안갈 적마다 개성을 거쳐가게 되었다. 그런데 심의겸(沈義謙)이 유수(留守)로 있으면서 매우 다정스럽게 그를 영접하여 주자 효원도 그곳에서 하루 이틀 묵어가며 친구인 것처럼 즐겁게 지냈다. 그 후 효원이 안악 군수(安岳郡守)로 부임하여 관아에 좌기(坐起)했을 때 의겸의 부음(訃音)을 듣고서 눈물을 흘리면서 '나의 친구를 잃었구나'하고, 이틀간 좌기를 파하고 소식(素食)을 하였는데, 아마도 깊이 후회되는 바가 있어서일 것이다. 유성룡(柳成龍)은 일찍이 그의 위인에 대해 논하기를 '인백(仁伯)은 강방 정직(剛方正直)하니 의당 동류 중에서 제일인자가 될 것이다.'하였다. 당론(黨論)이 일어나게 된 것은 전조의 천망(薦望)에서 시작되어 대신들이 추감(推勘)한 데서 터진 것으로 야박스런 습속이 떠들어대며 서로 선동질한 것이지 이 두 사람이 각자 당파를 만들어 불화를 일으킨 데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효원의 아우 김신원(金信元)·김의원(金義元
)도 모두 명성이 있는 인물들이었고, 이들의 친구인 이성중(李誠中) 등의 논의 역시 완화(緩和)하여 처음과는 아주 달랐기 때문에 이발(李潑) 등은 이에 불만을 품고 자기들까지 떨어져 또 하나의 당파로 갈라졌다.
김이원(金履元)
초명은 신원(信元), 자는 수백(守伯)이며 호는 소암(素菴)이다. 성암공(省菴公)의 중씨(仲氏)로 1516(중종11)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523(중종 18)년에 알성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보국숭록대부 병조판서 겸 판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사·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도총관을 역임하였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경연홍문관 예문관 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에 추증되었다.
김의원(金義元)
자는 의백(宜伯), 호는 곤육재(困六齋)이다. 성암공 효원(孝元)의 계씨이다. 1528(중중23)년에 진사에 오르고 1531(중종 2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봉정대부 수제자시강원 보덕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을 역임하고 증 통정대부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겸 경영참찬관 춘추관수찬관에 올랐다.
김극건(金克鍵)
자는 여계(汝啓)로 1569년(선조 2)년에 났으며 통훈대부 통천군수·강릉진관병마첨절제사를 역임하고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을 지냈다.
김천일(金千鎰)
자는 백강(伯剛)이며 호는 송천(松川)으로 취수공 수양(粹讓)의 7세손이다. 1652(효종 3)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전적·직강·병조와 예조랑·감찰·예빈시정·지평·사예·춘추관 편수관 등 여러 벼슬을 지내고 통훈대부로 유곡승(幽谷丞)·자인 밒 함평 등 여러 고을의 현감과 풍기군수 3도 도사를 역임했다.
김세렴(金世濂)
자는 도원(道源)이며 호는 동명(東溟)으로 성암(省菴) 효원(孝元)의 손자이다. 1615(광해군 7)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다음해에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사간(司諫)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로 특진되고, 1638년 동부승지(同副承旨)·병조참지(兵曹參知)를 거쳐 병조·이조의 참의(參議)가 되었다. 안변 부사(安邊府使)로 있었다.《근사록(近思錄)》《소학(小學)》《성리자의(性理字義)》《독서록(讀書錄)》등을 간행하여 도민의 교화(敎化)에 힘썼다.
1645년 평안도 관찰사를 지내고, 대사헌 겸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거쳐 도승지(都承旨)로부터 호조판서에 승진되었다. 만년에는 경서(經書) 연구에 전심했고, 시문에 능했다.
여러 벼슬을 거쳐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을 지내고 세자부빈객을 역임하였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김진흥(金振興) 1621(광해군 13)~?
조선 서예가. 자는 흥지(興之)·대이(待而), 호는 송계(松溪) 1654년(효종5) 역과(譯科)에 급제, 전문 학관(篆文學官)이 되고, 뒤에 호군(護軍)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여이징(呂爾徵)을 따라 전서(篆書)·주서(주書)를 배우고, 명나라 주지번(朱之蕃)의 전결(篆訣)을 얻은 뒤 연마한 끝에 38체(體)에 통달하여 전서가(篆書家)로 이름을 떨쳤다. 《대학장구(大學章句)》《전해심경(篆海心鏡)》등을 지었는데, 송시열(宋時烈)·이단하(李端夏)·김만기(金萬基)·여성제(呂聖齊) 등이 서문(序文)·발문(跋文)을 지어 간행했다.
김석준(金奭準) 1831(순조 31)~1915.
서도가. 자는 희보(姬保), 호는 소당(小棠)·묵지도인(墨指道人), 북조풍(北朝風)의 예서(隸書)에 능했으며, 지두서(指頭書)에 뛰어났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