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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 41번 게송
1법정역 - 2전재성역 – 3維祇難역(224년) – 4了參역(1953년) - 5pali본 – 6Fronsdal역 – 7인연담 – 8해설
아, 이 몸은 머지않아 땅 위에 누우리라 의식을 잃고 쓸모 없는 나무토막처럼 버려져 뒹굴 것이다.
아, 쓸모없는 나무조각처럼 의식 없이 버려진 채,
머지않아 이 몸은 땅 위에 눕혀지리라.
是身不久 還歸於地 神識已離 骨幹獨存
시신불구 환귀어지 신식이리 골간독존
此身實不久,當睡於地下,被棄無意識,無用如木屑
Aciraṁ vatayaṁ kāyo paṭhaviṁ adhisessati,
chuddho apetaviññāṇo, niratthaṁ va kaliṅgaraṁ.
Before long, alas, will this body lie on the earth, despised, bereft of consciousness, useless like a burnt faggot.
[인연담]
고약한 냄새가 나는 띳사 비구 이야기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승원에 계시던 어느 때, 띳사 비구가 몸에서 나오는 피고름이 썩는 샘새 때문에 홀로 떨어져 누워 있었던 일과 관련하여 게송 41번을 설법하였다.
사왓티의 한 젊은이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환희심을 내어 가정을 정리하고 상가에 들어와 비구가 되었다. 그런데 정진 수행 중 그의 몸에 부스럼이 생기더니 그것이 점점 커져서 몸 전체로 번져 갔다. 그리고 그 종기는 마침내 피고름이 되며 터져서 윗 가사와 안 가사를 모두 적셨고, 그것이 말라 붙자 거기에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그 비구의 병은 점점 더 심해져서 뼈의 마디마디가 풀려 움직일 수 없게까지 되어, 그는 피고름 위헤 홀로 뒹굴면서 대소변조차도 스스로 가릴 수가 없게끔 되었다. 이렇게 되자 비구들은 그를 간호하는 것을 그치고 아무도 뒷바라지를 해주지 않았고, 결국 그는 헛간 땅바닥에 버려졌다.
그럴 즈음 부처님은 아침 일찍이 신통력으로써 시방 세계를 두루 살펴 보시다가 헛간에 버려진 그 비구를 보시었다. 부처님은 그가 담마를 깨달을 때가 왔음을 아시고 간다꾸띠에서 나오시어 건물 주위를 거니시었다. 그리고 물 그릇을 준비하여 그 위에 물을 얹어 덥히시었다. 그리하여 물이 더워지자 부처님은 그 물을 가지고 환자 비구가 있는 헛간으로 가시어 비구를 치료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런 사실이 알려지자 주변 방사에서 비구들이 달려 나왔다. 그들은 한결같이 "부처님, 저희들이 이 비구를 치료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부처님이 들고 계신 물을 맏아서 환자 비구에게 다가갔다.
부처님은 직접 그 물을 비구의 몸에 뿌리시고 환자의 몸을 움직여서 윗가사가 몸과 분리되게 하였다. 그런 다음 피고름이 묻어 냄새가 나는 가사를 손수 빨래하시어 햇볕에 널으시었다. 그리고 나서 햇빛 아래로 비구를 나와 앉게 하시고 환자에게 직접 물을 끼얹어 목욕을 시키시었다. 그렇게 환자를 목욕시키는 동안 가사는 햇볕에 다 말랐다. 그동안 부처님께세는 환자의 몸을 닦아 내시고 윗 가사를 입히신 다음 아랫 가사를 벗기시어 역시 세탁을 하여 햇볕에 말리시었다. 그 사이 목욕을 하게되어 몸과 마음이 깨끗해진 비구는 매우 침착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조용히 침상에 누웠다.
이때 부처님은 그 비구의 침상 곁에 서서 이렇게 설법하였다.
"비구들이여, 너히는 마음이 몸을 떠나게 되면 너희의 육신은 아무 쓸모가 없어 마치 나무토막과 같이 흙바닥에 뒹굴 게 되느니라."
부처님의 이 게송 끝에 그 비구는 아라한과를 성취하였고, 곧 열반에 들었다.
[해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역겨운 냄새가 나는 비구를 간호하시는 부처님,
간호를 하고나서 법을 설하여 깨닫게하시는 부처님....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오래지 않아 이 몸 흙바닥에 버려지고
마음 또한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리.
그때 덧없는 이 몸은 실로
썩은 나무토막보다도 소용없으리.”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너의 죽음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이 삶을 어영부영 보내지말고 진정으로 살아내기 위함이다.
법구경 42번 게송
적과 적이 겨루고 원수끼리 물고 뜯으며 싸운다한들
못된 마음이 저지르는 해로움보다는 그래도 그 영향이 적을 것이다.
적이 적을 대하고 원적이 원적에게 대하는 것보다
잘못 지향된 마음이 자신을 대하는 것은 더욱 나쁘다.
心豫造處 往來無端 念無邪僻 自爲招惡
심예조처 왕래무단 염무사벽 자위초악
仇敵害仇敵,怨家對怨家,若心向邪行,惡業最為大。
Diso disaṁ yan-taṁ kayirā, verī vā pana verinaṁ –
micchāpaṇihitaṁ cittaṁ pāpiyo naṁ tato kare
Whatever an enemy may do to an enemy, whatever a hater may do to a hater, a wrongly directed mind will do us greater harm.
[인연담]
난다는 사왓티의 부호인 아나타삔디까의 소를 키우는 목동이었다. 그는 비록 남의 집 소를 쳐주는 목동이긴 했지만, 실은 자기 재산도 상당한 사람이었다. 난다는 가끔씩 기회 있을 때마다 아나타삔디까의 집에 들러, 그곳을 방문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곤 했다. 그러다가 신심이 난 그는 어느때 부처님을 자기 집으로 초청했는데, 부처님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그의 청을 거절하였다.
그로부터 얼마의 세월이 흐른 뒤 부처님은 난다가 바르게 불법을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시어 난다의 집을 스스로 방문하였다. 난다는 너무나 기뻐 부처님을 반갑게 맞이한 뒤 이레 동안 우유를 비롯하여 목장에서 나는 갖가지 음식으로 부처님을 극진히 공양했다.
부처님은 난다의 집에 오신 마지막 날 난다를 위한 설법을 하였다. 그러자 난다는 곧 예류과를 성취하였다. 그런 다음 부처님은 난다의 집을 떠나시었는데, 난다는 부처님의 발우를 받아 들고 부처님을 먼곳까지 배웅해 드린 다음 자기 집으로 향했다.
난다가 집으로 돌아온던 중에, 전생에 난다와 원한 관계를 맺고 태어난 사냥꾼이 난다에게 화살을 쏘아 난다를 죽였다.
그러자 부처님을 뒤따라가며 시중을 들던 비구들이 부처님게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난다 재가 신자는 부처님을 잘 공양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을 존경하여 먼 길까지 다라 나와 부처님을 배웅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그를 찾아가지 않으셨다면 그는 죽지 않았을 것이 아닙니까?"
부처님은 대답하였다.
"비구들이여, 여래가 난다를 찾아가든 찾아가지 않든, 또는그가 동서남북의 어느 곳에 있든, 그는 자기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피할 수가 없었느니라. 그리고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는 그가 행여 타락된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을까를 염려하도록 하여라. 도적이나 원수에 의해 죽는 것보다는 타락되고 집착된 마음과 삿된 견해를 가진 채 죽는 것이 더 큰 재앙이기 때문이니라."
[해설]
실로 부처님은 지혜로우시다.
“그가 동서남북의 어느 곳에 있든, 그는 자기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피할 수가 없었느니라. 너희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는 그가 행여 타락된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을까를 염려하도록 하여라. 도적이나 원수에 의해 죽는 것보다는 타락되고 집착된 마음과 삿된 견해를 가진 채 죽는 것이 더 큰 재앙이기 때문이니라."
사람들은 오래 살기를 원하지만은 사실 몇 년 더 사는게 무슨 의미가 있나? 어떤 마음으로 사는가에 따라서 짧은 인생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법,
전재성님은 ‘원적이 원적에게 대하는 것보다’라고 번역하였으나 일상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원수’라는 단어로 표현하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법구경 43번 게송
어머니나 아버지 또는 어느 친척이 베푸는 선보다도 바른 진리를 향한 마음이 우리에게 더욱 큰 선을 베푼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대하고 다른 친족이 대하는 것보다
올바로 지향된 마음이 자신을 대하는 것은 더욱 훌륭하다.
是意自造 非父母爲 可勉向正 爲福勿回
시의자조 비부모위 가면향정 위복물회
善非父母作,亦非他眷屬,若心向正行,善業最為大。
Na taṁ mātā pitā kayirā, aññe vā pi ca ñātakā,
sammāpaṇihitaṁ cittaṁ seyyaso naṁ tato kare.
Not a mother, not a father, nor any other relative will do so much; a well-directed mind will do us greater service.
[인연담]
두 아들의 어머니이자 다른 두 아들의 아버지였던 소레이야 비구 이야기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승원에 계시던 어느 때, 두 아들의 어머니이면서 동시에 다른 두 아들의 아버지이기도 했던 소레이야 비구와 관련하여 게송 43번을 설법하였다.
은행가의 아들 소레이야는 친한 친구들과 함께 수레를 타고 교외로 목욕을 나갔다가 마하깟짜야나 비구가 탁발을 하려고 시내로 들어오는 것을 보앗다. 그는 그때 이상하게도 "아, 저 비구가 나의 아내가 된다면! 또는, 내 아내가 저 비구처럼 희고 곱게 광명으로 빛나는 살결을 갖고 있다면"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의 이 같은 생각은 매우 강렬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그는 여자로 바뀌어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수레에서 뛰어내렸다. 그런데 그의 친구들와 수레를 모든 사람은 그가 뛰어내리는 것을 몰랐다. 그는 수레에서 뛰어내려 혼자서"도대체 이 무슨 꼴인가!"하고 외치며 숲속을 헤매고 돌아다녔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완전히 여자로 바뀌어 버렸다. 여인이 된 그는 장사꾼들을 따라 탁까실라로 향하는 수레를 탔다. 한편 소레이야의 친구들은 친구가 갑자기 없어진 것을 알고 이곳저곳을 찾아 헤매다가 끝내 찾지 못하고 집으로 뒤돌아가게 되었다. 소레이야의 가족들은 친구들에게 소레이야의 행방을 물었고, 친구들은 그가 목욕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것으로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자식을 잃은 소레이야의 부모는 큰 슬픔에 빠졌으며, 장례식까지 성대하게 마쳤다.
그러는 동안에 여자가 된 소레이야는 장사꾼들과 함께 탁까실라에 도착했는데, 아주 어여쁜 용모였기 때문에 함께 간 장사꾼들은 그녀를 그곳 은행가의 아들에게 소개시켰다. 그 결과 그녀는 은행가의 아들의 마음에 들어 결국 그와 결혼했다.
탁까실라 시의 은행가의 아들과 결혼한 그녀는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첫아들이 자라서 걸어다닐 정도가 되었을 때 둘째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 그녀는 두 아들을 두게 되었는데, 사왓티에는 그가 은행가의 아들일 때 낳은 두 아들이 있었으므로, 결국 네 아들의 어버이가 된 셈이었다.
그런던 어느 때 소레이야와 과거에 친구였던 사람이 장사를 하려고 오백 채의 수레에 짐을 잔뜩 싣고 탁까실라 지방으로 왔다. 이때 소레이야는 자기 집 이층 창가에 앉아 길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곧 자기의 옛 친구를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집안에 불러들여 친절하게 대접했다. 소레이야의 옛 친구는 자기가 잘 알지도 못하는 마나님으로부터 후대를 받고 의아해 했다. 그는 말했다.
"주인 마님, 마님은 저를 본 일도 없으신데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군요."
"아니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소. 당신은 사왓티에서 오신게 아닙니까?"
"그렇습니다만‥‥‥."
"그러면 묻겟소이다만, 아무아무 은행가를 아시지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 그분의 가족들은 모두 편안하신가요?"
"예, 모두들 편하십니다. 그런데, 마님은 어떻게 그분들을 아십니까?"
"잘 알 일이 있지요. 그런데 그 은행가에게는 아들이 있었지요?"
소레이야의 친구는 말했다.
"마님, 그분의 아들에 대해서라면 말도 꺼내지 말아 주십시오. 그는 어느날 친구들과 함께 목욕을 하러 가다가 갑자기 행방 불명이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방으로 그를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의 부모님은 큰 슬픔에 빠졌고, 결국 장례식까지 치렀습니다."
여인이 된 소레이야가 말했다.
"내가 바로 그 소레이야라네."
"뭐라구요?"
소레이야의 친구는 매우 당황하여
"지금 뭐하고 하셨습니까? 저리 가십쇼 ! 마님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나는 소레이야의 친구였습니다. 맹세코 그는 남자였지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그렇네만, 어찌 됐든 내가 바로 소레이야라네."
"정 그렇게 우기신다면 묻겠습니다만, 그때 남자였던 사람이 지금은 여자가 된 이 불가사의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잘 생각해 보게나. 그때 자네는 탁발을 나가시는 마하낏짜야나 비구를 보았던 게 생각나나?"
"예, 저도 그때 그분을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군. 바로 그때 소레이야였던 나는 이상하게도 그분이 나의 아내였으면, 또는 내 아내가 저 분과 같이 고운 피부를 가진 여자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남자에서 여자로 바뀌기 시작했던 걸세. 그래서 당황하여 누구에게도 이 괴이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수레에서 뛰어 내렸던 거야."
소레이야는 친구에게 자기의 기구한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친구는 그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는 큰 실수를 했네. 왜 그때 내게 그 말을 해주지 않았나? 자네는 마땅히 마하깟짜야나 비구님께 용서를 구했어야 마땅했네."
소레이야는 많은 음식이 준비하여 마하깟짜야나 비구를 집에 도착했다. 은행가의 아들(소레이야의 남편)은 준비된 장소에 비구를 안내하고 각종 진귀한 음식을 대접했다. 그렇게 대접이 끝나고 나서 소레이야 옛 친구는 소레이야를 데리고 나와 비구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게 한 뒤 말했다,
"비구님, 제 벗의 허물을 널리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비구님, 이 여인은 과거에 저와 아주 친했던 남자 친구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비구님을 뵙고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게 되엇는데, 그러자마자 여자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제발 이 불행한 사람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에 비구가 말했다.
"그랬군요. 어서 일어나시오. 나는 그대를 용서하오."
비구가 이렇게 용서를 선언하자, 소레이야의 몸은 곧 남자로 회복되었따. 그렇게 소레이야가 다시 남자로 바뀌자 탁까실라 은행가의 아들이자 소레이야의 남편은 그에게 말했다. "착한 친구여, 당신은 전에 두 아들의 어머니였고, 나는 두 아들의 아버지엿고. 당신이 여자였을 때나 지금 남자가 되어서나 당신이 그들의 어버인 것은 변함이 없소. 그러니 당신은 나와 함께 이 집에서 살아갑시다."
그러나 소레이야는 고개를 저었다.
"친구여, 나는 한 생을 살아가면서 몸이 바뀌는 업 때문에 두 성(性)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남자였고, 다음에는 여자였다가, 이제는 다시 남자가 된 것입니다. 처음에 나는 두 아들의 아버지였고, 다음에 나는 두 아들의 어머니였습니다. 착한 친구여, 당신은 그 같은 우여곡절 겪은 나에게 그런 말씀은 말아 주십시오. 나느 이제 다시는 가정 생활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저 비구님을 따라 비구가 되고 싶습니다. 여기 두 아들은 당신이 잘 키워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고나서 소레이야는 마하깟짜야나 비구에게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 마하깟짜야냐 비구는 소레이야를 비구로 만들어 사왓티로 떠났는데, 사왓티에서 그는 소레이야 비구라고 불리었다.
사왓티 성 내에 소레이야 비구의 이야기가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은 놀랍고 신기하게 생각하여 그에게 묻곤 하였다.
"비구님, 비구님에 대해 들리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사실입니까 ?"
"그렇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비구님이 처음에는 두 아들의 아버지였고, 나중에는 다른 두 아들의 어머니였었다는 게 사실이었군요. 그러면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중 어느 쪽의 아들에게 더 애정이 느껴지던가요 ?"
"두 쪽 다 애정이 가지만, 굳이 구분한다면 어머니였을 적의 아들에게 더 애정이 갑니다."
방문객들은 연방 이런 질문을 해댔고, 소레아야 비구는 항상 어머니였을 적의 아들에게 더 애정이 간다고 대답했다.
그러는 중 소레이야 비구는 수행이 더 깊어져 갔다. 그는 대중의 관심의 표적에서 벗어나 조용하게 혼자 있고 싶어졌다. 그는 혼자 앉아 있으면서, 또는 서 있거나 누워 있거나 간에, 자기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검정과 생각 들이 어떻게 일어나며 또 사라지는지를 예의 주시했다. 그 결과 그는 사마디를 성취했고, 마침내 아라한이 될 수 있었다. 그런 다음부터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은 전과 달라졌다. 이제 그는 어느 쪽의 아들에게 더 애정이 가느냐는 질문을 받게 되면,
"나는 어느 쪽의 아들에게도 애정이 가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런 소레이야 비구의 변화를 알 게 된 비구들이 부처님께 이런 사실을 말씀드렸다.
"부처님, 소레이야 비구는 진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전에는 항상 "나는 어머니였을 적에 갖게 된 두 아들에 대해서 더 많은 애정을 느낀다" 고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어느쪽의 아들에게도 애정을 느낄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말했다.
"비구들이여, 나의 아들 소레이야는 결코 헛된 말을 하고 있지 않느니라. 그의 마음이 바른 길에 들어서게 되자 그는 진실을 보고 진실을 말하게 된 것이니라.
마음을 바르게 인도하는 진리를 깨달은 수행자는 모든 생명에게 두루 애정을 베풀어 주게 되는 법이며, 이런 참된 애정은 결코 한두 사람의 아버지나 어머니의 범주를 넘어서느니라. 그리하여 그는 몇 사람의 어버이에서, 이제는 많은 중생의 어버이가 된 것이니, 그가 전의 자녀들에게 유별 난 애정을 느끼지 않게 된 것은 실로 당연하니라."
그리고 부처님은 다음 게송을 읊었다.
어머니도 할 수 없고 아버지도 할 수 없으며
그 어떤 친지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다.
오직 바르게 인도되는 마음만이
모든 이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다.
[해설]
이 이야기만으로도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어도 될 만큼 특이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현재 마음 먹은대로 즉각적으로 과보를 받은 경우일 것이다. 신구의(身口意) 삼업중에서 의업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할 때 예를 들기 어랴웠는데 소래이야비구의 이야기는 의업의 중요성에 대한 예로서 적합하다. 그리고 수행자는 모든 생명에게 자비를 가진자라서 아버지나 어머니의 범주를 넘어서야 한다는 가르침을 다시 새긴다.
법구경 44번 45번 게송
참된 수행자는 이 대지를 정복하고 천상과 지옥을 정복할 수 있다. 진실한 수행자만이 진리의 말씀을 엮을 수 있다. 솜씨있는 이가 고운 꽃을 꾸미듯이
학인이 이 땅과 이 야마의 왕국과 이 천상계와 인간계를 정복하리라.
화환을 만드는 자가 꽃을 따 모으듯,학인이 잘 설해진 진리의 말씀을 따 모으리.
學者擇地 捨鑑取天 善說法句 能採德華
학자택지 사감취천 선설법구 능채덕화
四五 有學克地界,閻魔界天界,有學說法句,如巧匠採花 。
Sekho paṭhaviṁ vicessati
yamalokañ-ca imaṁ sadevakaṁ.
Sekho dhammapadaṁ sudesitaṁ
kusalo puppham-ivappacessati
The disciple will conquer this world and this world of Yama with its gods. The disciple will find out the well-taught path of virtue even as a skilled person finds out the (right) flower.
[인연담]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승원에 계시던 어느 때, 오백 명의 비구들과 관련하여 게송 44번과 45번을 설법하였다.
어느 날 저녁 때 부처님을 모시고 지방을 여행하고 돌아온 오백 명의 비구들이 법당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자기들이 지나온 마을과 길에서 보고 경험했던 것들을 놓고, 마을마다 무엇이 어떻게 달랐으며, 재배하는 농작물들이 지방의 토질에 따라 어떻게 달랐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길들이 어떻게 부드러웠고, 어떻게 거칠었으며, 어떻게 넓었고, 어떻게 좁았는지도 말했다.
비구들이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부처님께서 오시어 물었다.
"비구들이여, 저희들은 이러저러한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했다.
"비구들이여, 너희들이 지금 나누고 있는 것들은 단지 토질과 길의 겉의 이야기에 불과하니라. 너희들은 그런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몸 안의 토질과 길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그것들을 청정하게 하기 위해 힘써야 하느니라."
그리고 부처님은 다음의 게송 두 편을 읊었다.
어느 누가 있어 흙의 요소를 야마천과 인간과 천상 세계를 바르게 이해할 것인가 ? 누가 있어 잘 설해진 드높은 담마를 잘 실천하여 분별할 것인가 ? 마치 정원사가 꽃을 고르듯이.
여기 수행하는 제자가 이 흙의 요소를,
야마천과 인간과 천상 세계를 바르게 이해하리라.
여기 수행하는 제자가 잘 설해진
드높은 담마를 잘 실천하여 분별하리라,
마치 정원사가 꽃을 고르듯이.
[해설]
인연담을 통해서 번역하자면 학인(Sekho)이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수행자 혹은 진실한 수행자라고 번역하는 것이 문맥에 맞을 듯하다. 부처님은 여행을 하면서 아름다운 풍경만을 본 수행자들에게 진정한 여행은 너의 내면을 여행하는 것이다.라고 타이르신다. 언제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고구정녕하지만 늘 가르침에 못미친다.
법구경 46번 게송
이 몸은 물거품 같고 아지랑이 같다고 깨달은 사람은 악마의 꽃화살을 꺾어 버리고 저승의 염라왕과도 만나지 않으리라.
이 몸은 물거품과 같다고 알고 아지랑이와 같다고 깨닫는 님은
악마의 꽃들을 잘라버리고 죽음의 왕의 시야를 넘어서리라.
觀身如沫 幻法野馬 斷魔華敷 不覩死生
관신여말 환법야마 단마화부 불도사생
四六 知此身如泡,覺悟是幻法,折魔羅花箭,越死王所見。
Pheṇūpamaṁ kāyam-imaṁ viditvā,
marīcidhammaṁ abhisambudhāno,
chetvāna Mārassa papupphakāni,
adassanaṁ Maccurājassa gacche.
Knowing that this body is like froth, knowing that it is of the nature of a mirage, breaking the flowery shafts of Mara, he will go where the king of death will not see him.
[인연담]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승원에 계시던 때, 한 비구가 자기의 몸을 아지랑이로 생각하고 마음을 집중시킨 일과 관련하여 게송 46번을 설법하였다.
한 비구가 부처님으로부터 정진 수행에 관한 설법을 듣고 수행 주제를 받아 수행을 하기 위해 숲에 들어가 온갖 노력을 다해 열심히 수행했지만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초조해진 그는 혼자 생각했다.
"이것은 아마도 내가 부처님으로부터 받은 수행 주제가 내게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부처님께 가서 내게 적합한 수행 주제를 다시 받아 와야겠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이 계시는 곳을 향해 떠났다. 그는 길을 가다가 멀리서 아지랑이가 아른거리는 것을 보았고, 곧 그렇게 생각했다.
"저 아지랑이는 더운 여름날이면 먼 데서 보면 실제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보면 실체를 잡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마음이라는 것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인연적 결과이지 불변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런 생각이 들자 곧 마음을 거기에 집중하며 길을 걸어갔다. 그러다가 그는 도중에 매우 덥고 피곤하여 아찌라와띠 강에서 목욕을 했다. 그는 목욕을 마치고 폭포 옆의 나무 밑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폭포에서는 많은 물거품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물거품은 물이 떨어지는 힘에 의해서 일어나 잠시 머무는 듯했지만 곧 새로운 물에 의해서 깨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그는 이번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도 저 물거품 같은 것이다. 태어나는 것은 물거품이 일어나는 것과 같고, 죽는 것은 물거품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는 물거품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주제로 하여 정진 수행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 부처님은 제따와나 승원의 간다꾸띠에 계시면서 광명과 함께 그 비구 가까이에 모습을 나투시어 이렇게 말했다.
"비구여, 그와 같으니라. 인간이란 마치 아지랑이 같고 물거품 같은 존재니라. 물거품이 일어나고 사라지듯이 인간도 태어났다가 사라지느니라." 그리고 부처님은 다음 게송을 읊었다.
몸이 물거품처럼 허무하고
마음이 아지랑이처럼 실체 없음을 깨닫는다면
그는 능히 꽃대 같은 감각적 쾌락의 화살을 꺾으리니
죽음의 왕도 그를 보지 못한다.
[해설]
물거품 아지랑이 파초등을 보고 실체없음을 깨닫는 것은 부처님이나 수행자들이 직접 경험했던 사실이다. 보고 듣는 모든 것이 공부거리라는 이야기가 실감된다. 일반적으로 오온에 실체가 없음을 비유하는 것으로 포말 경(S22:95)에서처럼 다섯가지 비유를 든다.
“물질은 포말덩이와 같고 느낌은 물거품과 같고
인식은 아지랑이와 같고 심리현상들은 파초와 같으며
알음알이는 요술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는 밝혔다.”
이 다섯가지 비유중에서 파초는 유일한 식물이다. 스님들이 늘 파초를 보면서 실체가 없음을 떠올리라는 뜻에서 전통적으로 법당앞에 파초를 심는다. 이러한 뜻이 잊혀지고 있어서인지 요즈음에는 법당앞에 파초를 보기가 힘들다.
법구경 47번 게송
1법정역 - 2전재성역 – 3維祇難역(224년) – 4了參역(1953년) - 5pali본 – 6Fronsdal역 – 7인연담 – 8해설
꽃을 꺾는 일에만 팔려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람은 죽음의 신이 앗아 간다. 잠든 마을을 홍수가 휩쓸어 가듯이.
오로지 꽃들을 따는데 사람이 마음을 빼앗기면,
격류가 잠든 마을을 휩쓸어 가듯,악마가 그를 잡아간다.
如有採花 專意不散 村睡水漂 爲死所牽
여유채화 전의불산 촌수수표 위사소견
採集諸花已,其人心愛著,死神捉將去,如瀑流睡村
Pupphāni heva pacinantaṁ byāsattamanasaṁ naraṁ,
suttaṁ gāmaṁ mahogho va, maccu ādāya gacchati.
Death carries off a man who is gathering (life’s) flowers, whose mind is distracted, even as a flood carries off a sleeping village.
[인연담]
꼬살라국의 빠세나디 왕은 까삘라왓투에 사신을 보내어 사끼야족의 공주를 자기 왕비로 삼겠다고 제의했다. 이 요청을 받은 사끼야 족 사람들은 회의를 열고 마하나마 왕과 노예 사이에 태어난, 아주 예쁜 와사바캇띠야를 공주로 만들어서 빠세나디 왕에게 보냈다.
왕은 즉시 그녀를 왕비로 책봉하고 오백 명의 궁녀들로 하여금 왕비를 보호하도록 했다. 그리고 왕비는 곧 아들을 낳았는데, 왕은 아들의 이름을 사끼야 족에서 받아와 위두다바(Vidudabha)라고 지었다. 위두다바는 그렇게 왕자가 되었는데,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외가집인 까삘라왓투를 방문하였다. 위두다바는 자기가 묵었던 방을 청소하던 궁녀들에게 자신이 마하나마 왕과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라는 것을 듣게 되었다. 위두다바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소리쳤다.
"더러운 사끼야 족 놈들 ! 내가 만약 왕권을 잡으면 사끼야 족 놈들을 모두 말살하고 그 놈들의 피로 내가 앉았던 그 자리를 씻으리라 !"
위두다바는 이렇게 사왓티에 돌아왔고, 이 사실은 빠세나디 왕에게도 전해졌다. 왕도 사끼야 족에 대해 대단히 화를 냈고, 왕비와 위두다바의 지위를 박탈하여 노예로 삼아 버렸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다음 왕은 저간의 사정을 모두 부처님께 사뢰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했다.
"대왕이여, 사끼야 족이 왕에게 한 행위는 참으로 옳지 않은 것이었소. 그들이 왕에게 딸을 시집보내려면 대왕의 신분에 맞는 배필을 보냈어야 마땅했소. 그러나 대왕이여, 여래는 와사바캇띠야가 분명 마하나마 왕의 딸이기도 한 만큼 귀족의 피를 받은 여인이라고 말하고 싶소. 그의 어머니 쪽이 누구였든 간에 아버지 쪽은 왕족이 아니오 ? 그리고 위두다바로 말하더라도 또한 왕의 아들임이 분명하오. 자식들의 혈통은 아버지로부터 이어지는 것이 아니겠소 ? 그들의 신분을 노예로 만든 것은 재고해야 할 것이오."
이에 빠세나디 왕은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와사바캇띠야와 위두다바의 신분을 예전대로 회복시켜 주었다.
왕이 된 위두다바는 지난날 사끼야 족에게서 당한 모욕을 상기하며 군대를 일으켜 사끼야 족을 멸망시키려고 진군해 나갔다.
부처님은 사끼야 족들이 파멸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을 아시고 사끼야 족을 보호하여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석양 무렵에 허공을 날아 까삘라왓투 근처로 가시었다. 그때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던 위두다바는 아주 큰 반얀나무 그늘 아래 서 있다가 부처님을 보았다. 그는 곧 가까이에 다가와 부처님께 머리를 땅에 대고 인사를 올린 뒤 여쭈었다.
"부처님, 이 더운 날씨에 왜 이렇게 그늘이 엷은 곳에 앉아 계십니까 ? 저쪽에 그늘이 좋은 반얀나무가 있으니 그곳으로 가서 앉으시지요."
부처님께서 말했다.
"대왕이여, 여래에 대해 상관하지 마시오. 내 종족의 그늘이 나를 시원하게 해주고 있소."
위두다바는 곧 부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하였다.
"부처님께서 이곳에 계시는 것은 사끼야 족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부처님께 머리를 조아려 인사를 드린 다음 군대를 이끌고 사왓티로 돌아갔다. 얼마가 지나서 위두다바 왕은 두 번째로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부처님은 같은 장소에 앉으셔서 위두다바를 제지하시었기 때문에 군대를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사끼야 족을 치러 갔고, 이때에도 부처님이 이를 막아내시었다. 부처님은 이 같은 방법으로 당신의 모국을 세 번이나 지키시었으나, 사실은 이 또한 임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네 번째로 위두다바가 군대를 이끌고 사끼야 족을 치러 가자 부처님은 사끼야 족의 업을 읽으시고 더 이상 그들을 보호하지 않고 그냥 승원에 남아 계시었다.
위두다바는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사끼야 족을 공격했다. 위두다바는결국 자기가 어릴 때 앉았던 자리(우유와 물로 바닥을 씻으며 궁녀가 자신을 노예의 자식이라고 비웃던)를 맹세했던 말 그대로 사끼야 족의 피로 씻을 수 있었다. 그렇게 복수를 한 다음 그의 군대는 철수하여 아찌라와띠 강변에 천막을 치고 야영을 하기로 했다. 밤이 되자 이상스럽게도 많은 개미들이 떼를 지어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밤중에 강의 상류에서 큰 폭우가 내려 순식간에 강물이 불었다. 강가 모래밭에서 잠자던 수천 명의 병사들과 위두다바는 급류에 휩쓸려가 버림으로써 물고기와 거북이의 밥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부처님은 당신의 출신 종족이 멸망한 것과, 위두다바를 비롯한 많은 병사들이 물에 휩쓸려 가 버린 두 비참한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 말했다.
"너희들은 홍수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위두다바의 일을 계기로 다시금 느꼈으리라. 거센 홍수가 잠자는 마을을 휩쓸어 가듯이 죽음이라는 이름의 홍수 또한 감각적인 쾌락에 잡착해 있는 중생들을 휩쓸어 가느니라." 그리고 부처님은 게송을 읊었다.
[해설]
이 게송은 석가족의 멸망과 관련되어 있다. 마하나마가 왕과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소녀를 공주라고 속여서 꼬살라국에 신부로 보내면서 사끼야족의 멸망은 시작되었다. 부처님이 드물게 직접 세 번이나 말렸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석가족은 멸망했다. 석가족을 멸망시킨 위두다바왕도 강변에서 홍수에 쓸려 내려가 죽었다. 업의 과보는 부처님이라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왓티에 가면 꼭 들리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와찌라와띠강이다. 그 강변에 서면 강을 건너려다 남편과 아들 세명을 잃고 미치광이가 되어 나체로 떠돌다가 부처님을 만난 빠따짜라이야기(113번게송)도 떠 오른다. 아찌라와티 강은 홍수피해가 잦았는데 어느해 홍수피해를 입어 딸과 농토를 하룻밤사이에 잃고 슬퍼하는 농부의 이야기가 수따니빠따에 나온다. 지금도 홍수가 나면 강변의 마을과 논이 형채가 없이 사라져서 홍수가 지나간 뒤에는 마을사람끼리 서로 자기 논이라고 우기는 다툼이 일어나곤 한다고 한다.
부처님은 자주 다섯 개의 강을 열거하면서 설법하셨다. “강가, 야무나, 아찌라와띠, 사라부, 마히 같은 큰 강들은 모두 동쪽으로 흐르고 동쪽으로 향하고 동쪽으로 들어가듯이 팔정도를 실천하면 그는 열반으로 흐르고 열반으로 향하고 열반으로 들어간다.”(S45:120)
법구경 48번 게송
1법정역 - 2전재성역 – 3維祇難역(224년) – 4了參역(1953년) - 5pali본 – 6Fronsdal역 – 7인연담 – 8해설
꽃을 꺾는 일에만 팔려 마음에 끈질긴 집착을 가지고 욕망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은 마침내 죽음의 악마에게 정복당한다.
오로지 꽃들을 따는데 사람이 마음을 빼앗기면,
욕망이 채워지기 전에 악마가 그를 지배한다.
如有採花 專意不散 欲意無厭 爲窮所困
유채화 전의불산 욕의무염 위궁소곤
採集諸花已,其人心愛著,貪欲無厭足,實為死魔伏。
Pupphāni heva pacinantaṁ byāsattamanasaṁ naraṁ,
atittaṁ yeva kāmesu Antako kurute vasaṁ.
Death overpowers a man even while he is gathering (life’s) flowers and whose mind is distracted even before he is satiated in his pleasures.
[인연담]
어느 때 33천에서 한 사람이 꽃다발과 꽃 목걸이를 만들기 위해 즐거운 동산으로 갔다. 그때 거기에서는 일천 명의 선녀들이 꽃목걸이를 만들고 있었는데, 그중 오백 명은 나무에 올라가 꽃을 땄고, 다른 오백 명은 밑에서 그녀들이 던진 꽃을 주워서 목걸이 따위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한 선녀가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가 순식간에 사라져서 사왓티의 어느 집에 사람의 아기로 태어나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빠띠뿌지까라고 지어졌으며, 태어날 때부터 과거 전생을 기억하는 능력이 있어서 자신이 전생에 천상에서 꽃목걸이를 만드는 말라바리의 아내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빠띠뿌지까는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한 다음 그녀는 비구들에게 아침 저녁으로, 그리고 초하루 보름마다 공양을 올렸는데, 그때마다 그녀가 올린 한결같은 발원은 천상의 남편과 다시 만나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비구들은 그녀의 간절한 발원을 익히 아는 터여서 그녀를 남편을 존경하는 여인(빠띠뿌지까)이라고 불렀다.
빠띠뿌지까는 때때로 승원에 나와서 강당을 청소하고 비구 대중들이 마실 물을 준비하기도 하는 등 비구들에게 바치는 정성이 대단했다. 그래서 비구들은 공양할 물건이 있으면 그녀로 하여금 공양하게 하며 여러 가지로 배려해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 빠띠뿌지까는 임신을 하여 아기를 낳았고, 그 아기가 걸을 만하게 되었을 때 또 아기를 낳는 식으로 하여 모두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녀는 비구들에게 공양을 올리며 다섯 가지 계를 받아 지니고 법문을 받들어 잘 실천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갑자기 병을 앓더니 곧 죽어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죽자마자 예전의 33천상세계에 다시 태어났다. 그녀가 천상에 돌아와 보니, 자기가 인간계에 태어났다가 다시 천상으로 돌아오는 동안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천상의 선녀들은 여전히 꽃목걸이를 만들고 있었다. 아직도 천상의 하루는 다 지나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꽃목거리를 만드는 말라바리가 그녀를 보고 물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당신을 볼 수 없었는데, 도대체 그동안 어디에 갔다 온 거요 ?"
"저는 잠시 천상을 떠나 있었습니다."
"아니, 지금 뭐라고 말했소 ?"
"저는 잠시 천상을 떠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낭군님."
"그랬소 ? 그래서 어디에 태어났었소 ?"
"사왓티의 한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얼마 동안 거기에 머물러 있었소 ?"
"어머니의 태중에서 열 달, 태어나서 열여섯 살이 되어 결혼했고, 그 뒤 아들 넷을 낳을 동안이었습니다. 저는 인간으로 있는 동안 비구 비구들께 공양을 오리면서 다시 천상의 남편에게 태어나고 싶다고 발원했습니다."
"그랬소 ? 그래 그곳 사람들의 수명은 대체로 얼마나 됩디까 ?"
"길 게 잡아도 단지 백 년 정도 될 뿐입니다."
"아, 참으로 짧은 수명이로군 !"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묻겠소. 그렇게 짧은 기간을 사는 사바세계의 사람들은 어떠하였소 ? 그들은 태어나 살아가는 동안 잠이나 자며 주의력 없이 보내던가요 ? 아니면 수행자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주의력을 유지하면서 열심히 자신을 살피던가요 ?"
"낭군이시여, 그들은 대체로 정신없이 살고 있습니다. 마치 자기들의 수명이 한 없이 길어서 죽음이란 자기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아내의 말을 듣고 나서 꽃목걸이를 만드는 천인은 말했다.
"당신의 말대로 인간이 단지 백 년밖에는 살지 못한다면 그들은 잠이나 자면서 정신을 딴 데 빼앗겨는 안 될 것이오. 그래가지고서야 어떻게 해탈을 성취할 수 있겠소 ? 인간의 백 년은 천상의 하룻밤 하루낮에 지나지 않는 것, 천상인의 수명을 인간의 햇수로 계산하면 무려 삼천육백 만 년이나 되오. 그렇거늘 그런 곳에 살면서 정신을 차리지 않고 방탕하다면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소."
한편, 그 다음날 비구들은 마을로 탁발을 나갔는데, 마을 회관은 아무도 청소하지 않은 채 더럽혀져 있었고, 앉을 자리와 물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비구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매일같이 탁발 준비를 하던 부지런한 빠띠뿌지까 부인은 어디 있습니까 ?"
마을 사람 하나가 대답했다.
"그녀는 어제 비구님들을 공양한 다음 한낮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아직 법안을 갖추지 못한 비구들은 그녀의 친절했던 봉사에 아쉬움을 느끼며 눈물까지 보였다. 그렇지만 아라한이 된 비구들만은 의연하게 감정을 다스리고 있었다.
비구들은 아침 공양을 마치고 승원으로 돌아와 부처님께 사뢰었다.
"부처님이시여, 매우 활동적인 성품으로 오직 남편만을 생각하던 여인, 저희들을 위해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가리지 않았으며, 자기의 모든 공덕을 남편에게 희생하던 여인이 죽었습니다. 그녀는 어디에 태어났습니까 ?"
"비구들이여,그녀는 자기 남편에게로 돌아갔느니라."
비구들이 의아해하여 여쭈었다.
"부처님, 그녀는 남편과 함께 죽은 것이 아닙니다."
"비구들이여, 그녀가 발원했던 남편이란 인간으로서 만난, 살아 있는 그 남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느니라. 그녀는 꽃목걸이로 천상을 장식하는 천인의 아내였으며, 그녀가 공덕을 회향했던 것은 그 남편이었는니라. 이제 그녀는 다시 옛 남편에게로 돌아간 것이니라."
그리고 부처님은 천상세계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이에 비구들이
"부처님이시여, 그 말씀이 사실입니까 ? 그렇다면 인생이란 참으로 짧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빠띠뿌지까의 경우로 보더라도 그녀는 아침에 공양을 올리고 저녁 때는 병이 들어 곧 죽은 것입니다."
"그러하니라. 비구들이여, 이 생명이란 그렇게 짧고 무상한 것이니라. 사람들이 채 감각적인 쾌락에 만족하기도 전에 죽음은 그들을 덮치느니라."
그리고 게송을 읊었다.
아름다운 꽃을 찾아 헤매이듯
마음이 감각적 쾌락에 빠져 있는 자를
죽음은 먼저 앗아 가 버린다,
그가 쾌락에 채 만족하기도 전에.
[해설]
선녀가 이 세상에 태어나 아이를 네명낳고 다시 천상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에서 언 듯 ‘선녀와 나뭇꾼’이야기가 오버랩되었다. 백년도 못사는 인간들이 천년의 걱정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뭣이 중한디?’를 지체없이 물어야 하리라.
천녀는 죽었다가 다시 33천상세계에 다시 태어났는데 죽은 그날 꽃목걸이를 만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천녀는 화생(化生)으로 태어나되 갓난이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인 천녀의 모습그대로 화생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법구경 49번 게송
꽃의 향기와 빛깔을 다치지 않고 꿀만을 따가는 꿀벌처럼 지혜로운 성자는 그와 같이 마을에서 마을로 걸식을 해야 한다.
색깔과 향기를 지닌 꽃은 꿀벌이 건드리지 않고
오직 꿀만 따서 나르듯,성자는 마을에서 유행 한다.
如蜂集華 不嬉色香 但取味去 仁入聚然
여봉집화 불희색향 단취미거 인입취연
牟尼入村落,譬如蜂採華,不壞色與香,但取其蜜去。
Yathā pi bhamaro pupphaṁ vaṇṇagandhaṁ aheṭhayaṁ
paḷeti rasam-ādāya, evaṁ gāme munī care.
Even as bee gathers honey from a flower and departs without injuring the flower or its colour or scent, so let a sage dwell in his village.
[인연담]
인색한 부자 꼬시야 이야기
라자가하에서 멀지 않은 작게리라는 도시에 꼬시야라는 인색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기름 한 방울이라도 남에게 주지 않았고, 자기가 기름을 쓸 일이 있을 때에는 풀잎 끝에 조금 적셔서 쓸 정도의 지독한 노랭이었다. 그는 제법 큰 재산을 모으긴 했으나 그 재산이 자기에게나 자녀들에게나 아무런 이익과 행복을 준 것이 없었다. 어느 날 꼬시야는 왕의 부름을 받아 왕궁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시장기가 느껴졌다. 이때 길가에서 어떤 사람이 차빠띠에 카레를 얹어서 맛있게 먹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꼬시야는 그것을 보자 자기도 얼른 가서 차빠띠를 만들어 저 사람처럼 맛있게 먹고 싶은 생각이 매우 강렬했다. 그러나 이내 그는 "집에 가서 식구들이 보는 데서 차빠띠를 만들어 먹겠다고 하면 온집안 식구들이 다먹고 싶어 야단일 것이다. 그러다 보면 많은 쌀과 다른 재료들이 들 게 아닌가. 나 혼자서만 만들어 먹는 것이 좋으리라"하고 마음을 정했다. 꼬시야는 집에 도착해서 맨윗층 옥상으로 올라가서 철판 아래에 불을 지피고 차빠띠를 굽기 시작했다.
이날 아침 부처님은 마하목갈라나 비구를 부르시어 이렇게 말했다.
"목갈라나여, 저 작게리라는 도시에 아주 인색한 부자가 살고 있느니라. 그는 잘 구운 차빠띠를 먹기를 원하면서 누가 볼까 두려워하여 자기 집 7층에 올라가서 베푸는 일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를 가르치고, 그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가 준비한 모든 음식을 이곳으로 옮겨 오너라. 여래는 오백 비구들과 함께 이곳에 앉아 그 차빠띠로 공양할 것이니라."
이에 마하목갈라나 비구는 곧 신통력으로써 순식간에 작게리로 가서 꼬시야의 집 창가에 선 채로 꼬시야와 그의 아내를 바라보았다. 꼬시야는 비구가 나타나자 매우 당황했다.
"이 같은 일이 있을까 두려워 옥상까지 올라온 것인데 저 비구는 이곳까지 따라와서 창가에 서 있구나."
화가 잔뜩 난 그는 볼멘 목소리로 비구에게 퍼부었다.
"비구여, 그렇게 허공에 매달려서 내게 뭘 얻어 가려는 거요? 나는 당신이 설사 허공으로 난 길을 왔다갔다할 수 있다고 해도 내게서 아무것도 얻어 가지는 못할 거요 !"
그러자 목갈라나 비구는 그의 말대로 허공에 길을 내고는 왔다갔다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꼬시야는 다시
"거기서 왔다갔다해서 뭘 어쩌겠다는 거요? 당신이 설사 허공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는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을 거요."
그러자 비구는 그의 말대로 허공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는 것이 아닌가. 꼬시야는 다시 말했다.
그러자 꼬시야가 다시 말했다.
"설사 비구께서 연기로 이 방을 가득 채운다고 해도 아무것도 얻어 가지는 못할 거요."
그러자 목갈라나 비구는 연기를 내뿜어 집 전체에 연기가 가득해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꼬시야는 연기 때문에 눈이 따가워져서 마치 바늘에 눈을 찔린 것 같았다. 그는 갑자기 집 전체에 불이 붙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목갈라나 비구에게 제발 그만두어 달라고 빌고 싶었지만 정작 그의 입에서 나온다는 소리는
"흥 ! 비구님이 설사 이 집을 몽땅 태운다고 해도 나는지지 않겠소 !"
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겁은 나는 것이어서 얼른 아내에게 말했다.
"저 비구는 집념이 강해서 무엇이든 얻지 않고는 떠나지 않을 것 같구려. 그러니 차빠띠를 아주 적게 구어서 작은 것을 하나 주어 보내도록 하지."
이렇게 말한 다음 그는 아내를 시켜 반죽을 조금 떼어 철판 위에 놓았는데, 이상하게도 큰 차빠띠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자 꼬시야는 신경질을 내며 아내는 손이 커서 탈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이번에는 자기가 직접 반죽을 조금 떼어 철판에 올려 놓았지만 역시 큰 차빠띠로 변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는 수 없이 바구니에서 제일 작은 차빠띠 하나를 골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것이 다른 것들과 엉겨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꼬시야의 몸에서는 점차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꼬시야는 이제 차빠디를 먹고 싶은 마음조차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그는 아예 포기한 마음이 되어 아내에게 내뱉았다.
"여보, 그걸 바구니째 몽땅 저 비구에게 줘 버리구려."
이렇게 해서 그는 마음에도 없는 공양을 올리게 되었는데, 마하목갈라나 비구는 부처님이 이르신 대로 그들의 공양 공덕을 칭찬해 준 다음 담마에 대해 자세하게 설해 주었다.
그런데 꼬시야는 비구의 설법을 듣자 신비롭게도 마음의 눈이 활짝 열렸다. 그는 크게 기뻐서 태도까지 변하여 비구에게 말했다.
"비구님, 여기 이 의자에 앉으셔서 차빠띠를 들도록 하시지요."
그러자 목갈라나 비구가 대답했다.
"꼬시야 장자여, 지금 정각자 부처님은 승원에서 이 차빠띠를 기다리고 계시오." 마하목갈라나 비구는 순식간에 꼬시야의 집 계단을 연장시켜서 끝 부분을 승원 입구와 잇닿도록 해놓았다. 그리고는 그들 부부를 데리고 승원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제따와나 승원에 온 꼬시야 부부는 음식을 준비했고, 곧 부처님께 공양 준비가 다 되었음을 사뢰었다. 이에 부처님은 식당으로 오시어 마련된 자리에 앉으시었다. 꼬시야 부부는 부처님의 발우에 음식을 담아 드리고 다른 오백 명의 비구들에게도 음식을 담아 드렸다. 그리고 공양이 끝나자 자기들도 배가 부르게 식사를 했는데, 이상하게도 음식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채 처음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승원의 모든 사람들과 주변의 거지들에게까지 음식을 나누어 줄 수 있었다. 그러고도 음식이 남자 비구들이 이런 사실을 부처님께 보고했는데, 부처님은
"아주 좋은 일이구나. 그러면 남은 음식은 승원 문 밖에다 버리도록 하여라"하고 이르시었다. 이로부터 그 장소는 "차빠띠의 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런 다음 꼬시야 부부는 부처님 옆에 매우 공손한 태도로 서 있었다. 부처님은 이들 부부의 공양 공덕을 칭찬해 주시는 한편 설법도 해주었다. 그러자 꼬시야 부부는 곧 법의 눈을 갖추게 되었다. 그들은 곧 부처님과 스님들을 공양한 다음 작별 인사를 하고 승원 문 밖에서 계단을 따라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 이후부터 자신들의 많은 재산을 진리에 합당하게 쓰기 시작했다. 그들의 재산은 불법을 펴는 데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비구들에게 부처님은 말했다.
"비구들이여, 재가 신자를 교화하려면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으며, 신심을 건드리지 않고, 그들의 재산에 손해도 끼치지 않으며, 마음에 피곤함이나 압박감을 느끼지도 않게 하여야 하느니라. 그렇게 여래의 덕과 지혜를 깨닫게 하되, 그것이 마치 벌이 꽃에서 꿀을 따지만 꽃의 향기나 모양을 해치지 않는 것과 같아야 하느니라. 여래의 아들 목갈라나 바로 그 같은 능력을 가졌느니라."
[해설]
이 이야기를 가지고 ‘작게리 노랭이 영감’이라는 동화를 만들면 재미있을 것이다. 먹을 것을 주지 않으려는 꼬시아와 신통력을 보여가며 꼬시아를 압박해가는 목갈라나의 대화가 무척 재미있다. 재가 신자를 상대할 때 그들의 자존심이나, 신심, 재산, 그리고 피곤함이나 압박감을 느끼지 않게 하여야 한다는 가르침은 요즘 스님들이 꼭 되새겨보아야 하는 가르침이다.
차짜띠를 부처님과 오백 명의 비구들에게 공양하고 남아서 다시 승원의 모든 사람들과 주변의 거지들에게까지 음식을 나누어 주었고 그래도 남아서 결국은 승원 문 밖에다 버렸다는 이야기에서 성경의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 떠오른다. 성경에서는 오천명정도가 먹었다는데 부처님과 짜빠띠를 먹은 사람도 그 정도가 될 것 같다. 다른 점은 이 신통력을 사용한 사람이 부처님이 아니라 제자 목갈라나 존자라는 점이다. 이제 성지순례때 기원정사에 들리게 되면 "차빠띠의 굴"이 생각날 것 같다.
법구경 50번 게송
1법정역 - 2전재성역 – 3維祇難역(224년) – 4了參역(1953년) - 5pali본 – 6Fronsdal역 – 7인연담 – 8해설
남의 허물을 보지 말라. 남이 했건 말았건 상관하지 말라.
다만 내 자신이 저지른 허물과 게으름만을 보라.
남들의 모순을,남들이 한 일과 하지 못한 일을 살피지 말고
오로지 자신의 한 일과 하지 못한 일을 살펴보라.
不務觀彼 作與不作 常自省身 知正不正
불무관피 작여부작 상자성신 지정부정
不觀他人過,不觀作不作,但觀自身行,作也與未作。
Na paresaṁ vilomāni, na paresaṁ katākataṁ
attano va avekkheyya, katāni akatāni ca.
Not the unworthy actions of others, not their (sinful) deeds of commission or omission, but one’s own deeds of commission and omission should one regard.
[인연담]
사왓티에 사는 한 여인은 나형 외도(裸形外道) 니간타의 제자 빠티까를 양자로 받아들여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웃 마을에 살고 있는 여인의 친구 하나가 가끔씩 제따와나 승원에 가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오곤 했는데, 그녀는 그때마다 연방 감탄과 찬사를 하곤 하는 것이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여인은 자기도 한번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빠티까에게 한 번 넌지시 운을 떼어 보았는데, 빠티까는 이에 반대하는 뜻을 보였다. 그 후로도 그녀는 친구로부터 계속해서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그때마다 빠티까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바티까의 견해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자 여인은 이렇게 선언했다.
"내가 너에게 이 일에 대해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할 까닭은 없다. 나는 부처님을 초청하여 그분의 설법을 듣겠다."
결심이 서자 여인은 먼저 어린 아들을 제따와나 승원으로 보냈다. 그런데 소년은 모슨 생각에선지 승원으로 가기 전에 먼저 빠티까를 찾아갔고, 빠티까는 여인의 아들에게 제따와나 승원에 가지 말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소년은 어머니의 꾸중이 두렵다면서 가야만 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빠티까가 후퇴하여 말했다.
"좋다, 정 그렇다면 가거라. 그러나 그 대신 네가 붓다를 초청하더라도 너희 집이 어딘지는 말해 주지 말아라. 그리고 너는 이 길로 갔다가 올 때는 다른 길로 오도록 해라. 그래서 네가 살고 있는 집을 헷갈리도록 하는거야, 알았지 ?“
소년은 그 말에 동의하고 부처님을 찾아가 내일 아침에 집을 방문해 주십사는 어머니의 청을 전했다. 그런데 나형 외도 빠티까의 짐작과는 다르게 부처님은 집을 찾는데 아무런 쟁애도 없으시었다. 부처님은 아침 일찍이 공양 받으실 집으로 곧장 오시었다. 부처님은 공양을 잘 드신 다음 그녀의 공양 공덕을 칭찬해 주었다. 그녀의 기쁨은 한껏 고양되었다. 이런 모든 경과를 뒷방에 숨은 니간타 수행자 빠티까가 다 보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뒷방에서 뛰어나오면서 여인에게 소리쳤다.
"당신은 더 이상 나와는 관계과 없소 ! 당신은 니간타 수행자인 나를 공양하면서 어떻게 이런 사람의 설법에 환희심을 낸단 말이오 ?"
빠티까는 흥분한 나머지 여인과 부처님에게 모욕적인 말을 퍼부었다.
그러자 여인은 마음이 흐트러져 더 이상 부처님의 설법에 마음을 집중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으신 채 말씀하셨다.
"그대는 여래의 설법을 듣는 데 마음을 고정시킬 수 없느냐 ?"
"부처님이시여, 저는 마음이 흐트려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잔잔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인이여, 정법을 배우는 자는 단지 자기 자신의 착한 일과 착하지 않은 업에만 집중시켜야 하느니라."
[해설]
남들의 허물을,보지말고 오로지 자신의 허물을 살펴보라.는 말씀을 들으니 가슴이 찔리는 부분이 있다. 종단의 제도개선을 위하고 승가의 자정능력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런저런 비판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게송을 핑계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비판기능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먼저 자신의 허물을 살피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공심을 가지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건강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발언하는 일을 계속해 나가야한다. 비판하는 것보다 더 자주 더 진솔하게 자신의 허물을 살피면서.
법구경 51번 52번게송
아무리 사랑스럽고 빛이 고울지라도 향기 없는 꽃이 있는 것처럼 실천이 따르지 않는 사람의 말은 표현은 그럴싸해도 알맹이가 없다.
어떤 꽃은 찬란하고 아름답더라도 향기가 없듯,
말이 잘 설해져도 실천이 없으면,열매가 없다.
如可意華 色好無香 工語如是 不行無得
여가의화 색호무향 공어여시 불행무득
猶如鮮妙花,色美而無香,如是說善語,彼不行無果。
Yathā pi ruciraṁ pupphaṁ vaṇṇavantaṁ agandhakaṁ,
evaṁ subhāsitā vācā aphalā hoti akubbato.
Like a beautiful flower, full of colour but without scent, are the well-spoken but fruitless words of him who does not act (as he professes to).
법구경 52번 게송
사랑스럽고 빛이 아름다우면서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 꽃이 있듯이 실천이 따르는 사람의 말은 그 메아리가 크게 울린다
끼 어떤 꽃은 찬란하고 아름답고 향기도 있듯,
말이 잘 설해지고 실천이 있으면,열매도 있다.
如可意華 色美且香 工語有行 必得其福
여가의화 색미차향 공어유행 필득기복
猶如鮮妙花,色美而芳香,如是說善語,彼實行有果。
Yathā pi ruciraṁ pupphaṁ vaṇṇavantaṁ sagandhakaṁ,
evaṁ subhāsitā vācā saphalā hoti pakubbato.
But like a beautiful flower full of colour and full of scent are the well-spoken and fruitful words of him who acts (as professes to).
[인연담]
어느날 빠세나디 왕은 할 수 없이 부처님께 다음과 같은 뜻을 사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저의 두 왕비인 말리까와 와사바캇띠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담마를 설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처님께서 말했다.
"여래가 정기적으로 어떤 한 장소에 간다는 것은 옳지 못하오."
"그러시다면 비구 스님들이라도 보내 주십시오."
그래서 부처님은 아난다 비구로 하여금 정기적으로 왕궁을 방문하여 왕비들을 가르치게 해주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아난다 비구에게 물었다.
"아난다여, 네 여자 신자들은 담마에 통달해 가고 있느냐, 어떠냐 ?"
"부처님이시여, 말리까 왕비가 열심히 배웁니다. 그녀는 배운 것을 잘 이해하고 실천에도 능숙합니다. 와사바깟띠야 왕비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말했다.
"아난다여, 어느 누구든지간에 담마를 신심있게 듣지도 않고 실천 수행도 없다면 그것은 비유컨대 모양은 아름다우나 향기가 없는 꽃과 같으니라. " 부처님은 다음 게송 두 편을 읊었다.
아름다우나 향기 없는 꽃이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 이익을 주지 못하듯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진 담마도
실천 수행치 않으면 아무 이익이 없다.
아름답고 향기도 높은 꽃이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 미와 향기를 주듯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진 담마를
실천 수행하면 많은 이익이 있다.
[해설]
아름답고 향기도 높은 꽃은 더러 볼수 있는데 지식과 실천을 갖춘 사람은 만나기 어렵다. 선지식이라 불리우는 분들도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 분들이 많아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불교TV나 불교방송에 나오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해서 훌륭한 분들인 것도 아니다. 방송국들도 자본에 종속되어 있기에 그렇치 않나 싶다. 언론의 기능을 상실해 버리고 기복불교를 부추기는 방송이나 언론이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낳을 것이다. 누구 누구를 탓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법구경 53번 게송
쌓아 올린 꽃 무더기에서 많은 꽃다발을 만들 수 있듯이 사람으로 태어났을 때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한다.
꽃들의 더미에서 많고 다양한 꽃다발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태어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많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이룰 수 있으리.
多集衆妙華 結鬘爲步瑤 有情積善根 後世轉殊勝
다집중묘화 결만위보요 유정적선근 후세전수승
如從諸花聚,得造眾花鬘,如是生為人,當作諸善事。
Yathā pi puppharāsimhā kayirā mālāguṇe bahū,
evaṁ jātena maccena kattabbaṁ kusalaṁ bahuṁ.
As many kinds of garlands can be made from a heap of flowers, so many good works should be achieved by a mortal when once he is born.
[인연담]
부처님께서 뿝빠라마 승원에 계시던 어느 때, 이 뿝바라마 승원을 승단에 시주한 여자 신자 위사카와 관련하여 게송 53번을 설법하였다.
위사카는 밧디야 지방의 큰 부호인 아버지 다난짜야와 어머니 수마나데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할아버지 멘다까람은 빔비사라 왕이 다스리는 마가다 국에서 다섯 손가란 안에 드는 큰 부자였다.
위사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부처님께서 밧디야 지방에 오시었다. 이때 부호 멘다까람은 손녀인 위사카와 손녀의 시녀 오백 명을 데리고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서 승원을 방문했다. 그는 부처님께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 부처님의 법문을 들었는데, 그때 멘다까람과 그의 손녀, 그리고 시녀들 모두가 예류과를 성취하였다.
위사카가 나이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역시 대단한 재산가인 사왓티에 사는 미라가(Miraga)의 아들 뿐나왓다나(Punnauaddhana)와 결혼했다. 그녀가 결혼하고 난 뒤의 어느 날이었다. 그녀의 시아버지인 미라가가 식사를 하고 있는데 비구 한 사람이 문 앞에 와서 탁발을 청했다. 그런데 늙은 미라가는 그 비구를 보자 몸을 집 안쪽으로 돌려 버렸다. 이 광경을 목격한 위사카는 그 비구에게 다가가 이렇게 용서를 청했다.
"대단히 죄송하오나 저의 시아버지는 식은 밥을 잡숫는 분이라 밥을 드릴 게 없습니다."
이 말은 시아버지 미라가의 귀에도 들렸기 때문에 그는 매우 노하여 위사카에게 당장 이 집을 나가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위사카는 자기가 시집올 때 데리고 온 여덟 명의 나이 많고 현명한 사람들을 불러 그들의 의견을 물었다. 그들은 위사카의 아버지가 상당한 재산과 함께 딸려 보낸 사람들로서, 만약에 위사카가 위기에 처하면 도와주라는 부탁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위사카와 함께 마라가에게 가서 전말을 따졌다.
마라가는 말했다.
"그때 나는 황금 사발에 우유 쌀죽을 먹고 있었소. 그런데 며느리는 우리 시아버지가 식은 밥이나 잡숫는 분이라고 말하지 않았겠소 ? 나는 이런 불경스런 언행을 하는 며느리를 참을 수가 없소. 그래서 며느리를 친정으로 보내려는거요."
여덟명의 현자들은 위사카에게 잘못이 없다고 판정하였다. 이에 용기를 얻은 위사카가 말했다.
"시아버님, 저는 마음속으로 부처님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담마를 믿고 실천하는 사람으로서 항상 비구 비구들을 공양하고 실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은 그것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만약 앞으로도 비구 비구들을 공양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친정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녀의 시아버지는 할 수 없이 며느리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러자 위사카는 곧 부처님과 비구들을 집으로 초청하였다. 그리고 공양 때가 되자 시어버지께서 직접 공양을 올리라고 부탁했는데, 나형 외도 니간타의 제자인 그는 응하지 않았다. 공양이 끝났을 때 위사카는 두 번째로 사람을 보내어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라고 시아버지에게 권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미라가도 응할 마음이 동했지만, 같이 있던 니간타 수행자가 그를 제지하는 바람에 설법회에 참석하지는 못했다.
미라가와 니간타는 병풍 뒤에 숨어서 설법을 듣기로 했다. 그 결과 미라가는 예류과를 성취하였다. 그렇게 되자 그는 부처님과 며느리 위사카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그래서 이후부터 그는 며느리를 어머니처럼 존경하여 위사카를 미라가마따(Miragamata미라가의 어머니鹿子母)라고 불렀다. 위사카는 열 명의 아들과 열 명의 딸을 낳았다.
위사카는 뿝빠라마 승원을 완공한 뒤 부처님과 비구 승단에 승원을 기증하는 의식을 봉행했다. 그런 다음 가족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내가 소원하던 바를 모두 다 이루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다."
이렇게 말한 뒤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게송을 읊으며 승원 주위를 돌고 또 돌았다. 부처님께서 말했다.
"비구들이여, 오늘은 위사카가 과거와 현재의 모든 원을 다 성취한 날이니라. 그녀는 지금 그 성취감 때문에 매우 만족하여 훌륭한 게송을 읊으며 승원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며, 정신이 이상해 진것이 아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다음 게송을 읊었다.
[해설]
“태어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많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번역하는 것은 ~해야한다(kattabbaṁ)는 의지가 드러나 있지 않다. 법정스님처럼 위사카의 거룩한 보시를 본받아 “사람으로 태어났을 때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한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위사카보살은 자이나교신도인 시아버지를 부처님제자가 되게 하였고 이로 인해서 시아버지 미라가의 어머니라는 미라가마따(Miragamata鹿子母)라 불리게 되었다. 그녀가 세운 동원정사(뿝빠라마鹿子母강당)에서 부처님은 6안거를 지내셨다. 지금도 기원정사 근처에 있는 동원정사터를 참배할 수 있는데 인도인 스님이 불사를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바람을 거스르는 참사람의 향기>
법구경 54번 55번게송
꽃향기는 바람을 거스르지 못한다. 전단도 타가라도 자스민도 마찬가지. 그러나 덕이 있는 사람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사방에 풍긴다.
꽃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지 못한다. 전단향도 따가라향도 말리까향도. 그러나 참사람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니 참사람의 향기는 모든 방향으로 퍼져간다.
花香不逆風 芙蓉梅檀香 德香逆風薰 德人徧聞香
화향불역풍 부용매단향 덕향역풍훈 덕인편문향
花香不逆風,栴檀多伽羅,末利香亦爾。德香逆風薰,彼正人之香,遍聞於諸方。
Na pupphagandho paṭivātam-eti,
na candanaṁ tagaramallikā vā,
satañ-ca gandho paṭivātam-eti,
sabbā disā sappuriso pavāyati.
The scent of flowers does not travel against the wind, nor that of sandalwood, nor of tagara* and mallika flowers, but the fragrance of good people travels even against the wind. A good man pervades every quarter. [Note: tagara: a plant from which scented powder is made. mallika: jasmine.]
법구경 55번 게송
전단과 타가라와 푸른 연꽃 그리고 바시키 등 여러가지 향기가 있지만 덕행의 향기가 가장 뛰어나다.
전단향, 따가라향, 웁빠라향 또는 밧씨키향이 있지만,
이러한 향기의 종류 가운데 계행의 향기야말로 최상이다.
栴檀多香 靑蓮芳花 雖曰是眞 不如戒香
전단다향 청연방화 수왈시진 불여계향
栴檀多伽羅,拔悉基青蓮,如是諸香中,戒香為最上。
Candanaṁ tagaraṁ vā pi, uppalaṁ atha vassikī,
etesaṁ gandhajātānaṁ sīlagandho anuttaro.
Sandalwood or tagara, a lotus flower or a vassiki* among these kinds of perfumes the perfume of virtue is unsurpassed. [Note: Vassiki: a variety of jasmine flower.]
[인연담]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승원에 계시던 어느 때, 아난다 비구의 질문과 관련하여 게송 54번과 55번을 설법하였다.
어느 날 저녁 아난다 비구는 정진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은 가장 훌륭한 향기를 지니고 계신다. 무릇 향기 중의 으뜸은 전단향과 꽃과 나무뿌리의 향기이다. 그런데 이런 물질적 향기들은 바람에 따라가면서 향기를 풍기게 마련이다. 그런데 혹 향기가 바람에 거슬러 올라가면서 풍길 수도 있는 것일까 ? 혹은 부처님의 향기는 어떨까 ?"
아난다 비구는 이런 생각 끝에 다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부처님께 가서 여쭙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비구는 부처님을 찾아가서 인사를 올린 다음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여기 세 가지의 향기는 바람을 따라 바람과 함게 퍼져 갑니다. 그것들은 곧 전단향과 꽃과 나무뿌리의 향기입니다. 그 향기들은 물질적인 것으로서 바람을 따라가며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람을 올라가는 향기도 있겠습니까 ?"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했다.
"아난다여, 향기에는 바람을 따라가기만 하는 것이 있고, 바람을 따라 가기도 하고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는 것이 있느니라.“
"그렇다면 부처님이시여, 어떤 향기가 바람을 따라가며, 어떤 향기가 바람을 따라가기도 하고 거슬러 가기도 합니까?“
"아난다여, 누구나 삼보를 의지하면서 오계를 지키고, 삼업을 청정히 하며, 남의 고통과 안타까움에 동참하여, 덕이 높아 정의롭게 살아가는 사람은 마침내 번뇌로부터 벗어나느니라. 그 명성의 향기는 능히 바람을 따라가기도 하고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면서 널리 퍼지게 되느니라."
[해설]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는 향기’를 가진 사람은 행복 할 것이다.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는 향기’를 가진 친구를 가진 사람도 행복할 것이다. 그런 친구가 되고 싶고 그런 친구를 가지고 싶다. 함석헌의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를 들어본다.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마하까싸빠존자를 공양하는 제석천>
법구경 56번 게송
타가라나 전단의 향기는 오히려 미미해서 대단치 않다. 덕행이 있는 사람의 향기는 최상의 것으로 하늘의 신들에게까지 퍼져 간다.
전단향과 따가라향과 같은 그 향기는 보잘것 없지만,
계행을 지닌 님의 높은 향기는 실로 천상계에까지 이른다.
華香氣微 不可謂眞 持戒之香 到天殊勝
화향기미 불가위진 지계지향 도천수승
栴檀多伽羅,此等香甚微。持戒者最上,香薰諸天間
Appamatto ayaṁ gandho yāyaṁ tagaracandanī,
yo ca sīlavataṁ gandho vāti devesu uttamo.
Little is the scent that comes from tagara or sandalwood, the perfume of those who possess virtue rises up to the gods as the highest.
[인연담]
부처님께서 웰루와나 승원에 계시던 어느 때, 마하까싸빠 비구와 관련하여 게송 56번을 설법하였다. 어느 때 마하까사빠 비구가 이레 동안의 멸진정(滅盡定)에서 나와 탁발을 하기 위해 라자가하의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거리로 나갔다. 멸진정에서 나온 수행자에게 맨 처음 공양을 올리면 크나큰 공덕이 되는 법인데, 비구는 이 공덕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천상의 삭까(제석천) 천왕이 이 사실을 알고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아내와 함께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는 곧 베짜는 가난하고 늙은 사람으로 변신하여 비구를 기다렸다. 이윽고 비구가 왔다. 변신한 삭까천왕은 곧 까싸빠 비구의 발우를 받아 들고 집으로 들어가 쌀밥과 카레를 담아 올렸다. 그 쌀밥과 카레에서 아주 좋은 향내가 은은하게 풍겨나왔다. 순간 비구는 가난한 집에서는 이렇게 향기로운 음식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다. 그래서 비구는 여인에게 자기 신분을 밝히라고 추궁했고, 결국 그 여인이 삭까 천왕이라는 것을 알아 냈다. 삭까 천왕은 자기는 멸진정에서 나오신 성자에게 공양을 올릴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일을 했노라고 고백했다. 그는 곧 자기 아내 수자따와 함께 천상으로 돌아갔다.
부처님은 웰루나와 승원에 계시면서 삭까 천왕이 자기 아내와 함께 마하까사빠 비구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을 보시고 비구들에게 전해 주었다. 비구들은 어떻게 삭까 천왕이 마하까싸빠 비구가 멸진정에서 나오는 것을 알았는지 궁금해 하는 한편, 아무튼 그가 비구에게 공양을 올린 것은 그를 위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는데 그 의견 일치를 보았다. 부처님은 말했다.
"비구들이여, 수행이 높아서 여래의 아들 마하까싸빠와 같은 경지에 이르면 그 명성이 널리 퍼져 마침내 천상에까지 이르나니, 그리하여 천왕이 직접 내려와 공양을 올리기도 하느니라."
[해설]
마하까싸빠 비구가 멸진정에서 나와 그에게 공양하려는 천신의 이야기다. 법구경 118번 게송에서도 멸진정에서 나온 까싸빠존자가 옥수수를 튀기고 있는 소녀를 찾아가서 그녀가 공양을 올리게 함으로서 공덕을 짓게한다. 천신도 기회를 노리는 그 기회를 주려고 일부러 까싸빠존자가 그 소녀를 찾아간 것이다. 여기 56번 게송에서는 제석천이 베짜는 가난한 노인으로 변신하여 멸진정에서 나온 까사빠존자에게 공양을 올려 공덕을 지으려 한다. 인간들의 100년은 삼십삼천의 신들의 하루이다. 이렇게 인간에 비해 수명이 길고 신통력도 자유자재한 제석천도 공덕을 짓기를 원하고 있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먼저 그 사실을 안 것도 천신이었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는 사람들이 천신에 빌고 천신을 믿고 천신들의 나라(천국)에 가는 것을 제일 목표로 삼았지만 부처님이 세상에 나온 후로 천신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 공덕을 짓는 자가 되었다. 실제로 부처님과 까싸빠존자에게 공양을 올리면 실제로 공덕이 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불자들은 부처님의 사상을 자세히 소개하면서도 부처님과 제자들의 신통력은 잘 소개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대한불교조계종에서 편찬한 ‘부처님 생애’ ‘불교입문’등의 책에도 부처님의 신통력을 서술한 곳은 드물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신통력보다는 가르침에 더 초점을 맞추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전통이 되면서부터 부작용이 생겨났다. 몇몇 학자들이 부처님의 신통력은 후대에 부처님을 신격화하며 편집된 것이라고 주장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천신이 등장하는 것을 불교를 높이고 브라만교를 낯추려는 후대 불교인들의 편집이라거나 부처님을 신격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경전에 등장하는 물위를 걷고, 허공을 나르고, 허공에 가부좌하고, 여러 몸을 나투는 등의 육신통을 믿지 않으려한다, 그런 신통을 믿지 않는 것을 이성적인 사고라고 착각한다. 이러한 사람들 때문에라도 부처님의 신통력을 자세하게 소개할 필요가 있다.
<이시길리산에서 자살한 비구>
법구경 57번 게송
덕행을 온전히 지니고 게으름 없이 부지런하고 바른 지혜로
해탈한 사람은 악마도 가까이하지 못한다.
계행을 갖추고 방일을 여의고 올바른 지혜로 해탈한
그러한 님들의 길을 악마는 결코 발견하지 못한다.
戒具成就 行無放逸 定意度脫 長離魔道
계구성취 행무방일 정의도탈 장리마도
成就諸戒行,住於不放逸,正智解脫者,魔不知所趣。
Tesaṁ sampannasīlānaṁ, appamādavihārinaṁ,
sammad-aññāvimuttānaṁ, Māro maggaṁ na vindati.
Of those who possess these virtues, who live without thoughtlessness, who are freed by perfect knowledge, Mara the tempter never finds their way.
[인연담]
어느 때 고디까 비구는 마가다 국의 이시길리(Isigili) 산의 바위 위에 앉아서 부지런히 수행하고 있었다. 비구는 마음을 고요히 하여 내적 현상 관찰에 집중하는 위빠싸나를 열심히 닦고 있었는데, 비구가 일년 삼매를 성취하여 매우 깊은 수준에 이르렀을 때 병이 생겨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비구는 몸을 돌보지 않고 정진을 계속했다. 그러나 매번 병이 엄습하여 그 이상 나가지 못하는 것이 여섯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래서 그는 예리한 면도날로 자기 목을 그었다. 그 순간 비구는 모든 번뇌가 다하는 아라한과를 성취하였으며 동시에 죽고 말았다.
고디까 비구가 죽은 것을 안 죽음의 왕 마라는 그가 죽어서 어느 세계에 다시 태어났는지 알아보려 했지만 그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젊은 남자로 변신하여 부처님 앞에 나타나 고디까 비구가 어느 곳에 태어났는지 알려 달라고 청했다. 이에 부처님께서 대답하였다.
"마라여, 그대가 고디까가 태어난 곳을 알려고 하지만 그 같은 노력은 아무 소득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그는 아라한이 되어 모든 번뇌로부터 해탈하였고, 그래서 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니라. 마라여, 네가 가진 모든 힘과 능력을 다 동원하더라도 깨달은 이가 가는 곳을 찾아내지는 못하리라."
[해설]
고디까 경(S4:23)에는 더 자세하게 고디까의 죽은 모습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있다.
그때 세존께서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이시길리 산비탈의 검은 바위로 가셨다. 세존께서는 고디까 존자가 침상위에서 몸통이 뒤틀린 채 누워 있는 것을 보셨다. 그 무렵 자욱한 연기와 어둠의 소용돌이가 동쪽으로 움직이고 서쪽으로 움직이고 북쪽으로 움직이고 남쪽으로 움직이고 위로 움직이고 아래로 움직이고 간방위로 움직이고 있었다.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여기 자욱한 연기와 어둠의 소용돌이가 움직이는 것을 보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것은 사악한 미라가 ‘좋은 가문의 아들 고디까의 식(識)이는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라고 좋은 가문의 아들 고디까의 식(識)을 찾고 있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좋은 가문의 아들 고디까는 알음알이가 머물지 않고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역사적으로 부처님 직계 제자중에서는 3명이 자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왁깔리(S22:87) 비구와 고디까(S4:23)비구는 이시길리 산에서 자살했고, 찬나(S35:87) 비구는 영축산에서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그런데 붓다는 이들이 죽는 순간에 성자의 과위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자살했지만 비난받지 않는 자살이라는 뜻이다. 죽은 사람의 식(識)을 미라가 찾아다녔다는 것은 아라한이 되지 못한 사람의 식은 마라에 의해서 발각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49재를 하는 이유가된다. 이시길리 산은 고디까존자가 자살한 곳이고 니간타들이 고행을 하던 곳이고 목갈라나존자가 도적들에게 맞아 죽은 곳이기도 하다. 지난번 성지순례때 일행들과 이시길리 산을 둘러싼 성벽에 올라 이시길리 산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나라가 세계최고의 자살률이라고 하는데 출가자의 자살률도 문제가 심각하다. 어제도 어떤 노스님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종단이 스님들의 자살과 환속률에 관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가 자살을 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출가자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상황에서 종단은 이제라도 스님들의 자살률과 자살하는 이유를 파악하고 그 대책을 세우기 바란다.
<부처님 제자와 니간타 제자의 대결>
법구경 58번 59번게송
한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더미 속에서도 은은하게 향기를 뿜으며 연꽃이 피어오르듯이. 버려진 쓰레기처럼 눈먼 중생들 속에 있으면서도 바르게 깨달은 사람의 제자는 지혜로써 찬란히 빛나리라.
사거리에 버려진 쓰레기 더미 위에서
그곳에 맑고 향기롭고 사랑스런 홍련화가 피어나듯,
쓰레기와 같고 눈먼 일반사람 가운데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제자는 지혜로 밝게 빛난다.
如作田溝 近于大道 中生蓮花 香潔可意
여작전구 근우대도 중생연화 향결가의
有生死然 凡夫處邊 慧者樂出 爲佛弟子
유생사연 범부처변 혜자락출 위불제자
猶如糞穢聚,棄著於大道,蓮華生其中,香潔而悅意。
如是糞穢等,盲昧凡夫中,正覺者弟子,以智慧光照
Yathā saṅkāradhānasmiṁ ujjhitasmiṁ mahāpathe
padumaṁ tattha jāyetha, sucigandhaṁ manoramaṁ,
evaṁ saṅkārabhūtesu, andhabhūte puthujjane,
atirocati paññāya Sammāsambuddhasāvako.
Even so among those blinded mortals who are like rubbish the disciple of the truly enlightened Buddha shines with exceeding glory by his wisdom.
Just as on a heap of rubbish thrown upon the highway grows the lotus* sweetly fragrant and delighting the heart.
[인연담]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승원에 계시던 어느 때, 시리굿따와 가라하딘나와 관련하여 게송 58번과 59번을 설법하였다. 사왓티에 가까운 친구 사이인 시리굿따와 가라하딘나가 살고 있었다. 시리굿따는 부처님을 따르는 재가신자였고, 가라하딘나는 니간타나타뿟타의 신자였다. 가라하딘나는 시리굿따에게 말했다.
“우리스승 니간타는 실로 모르는 것이 없다네. 과거의 일, 현재의 일, 미래의 모든 일을 모두 알고 계시지. 또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도 다 알고 계신다네.”
"그래? 지금까지 나는 그런 위대한 스승이 계시다는 걸 몰랐네그려. 자넨 왜 진작에 그런 스승이 계시다는 걸 알려 주지 않았나 ? 난 그런 훌륭한 스승들을 우리집에 초청하여 공양을 올리고 싶네.“
이렇게 되어 시리굿따는 니간타들을 초청하기로 되었다. 시리굿따는그들을 초청해 놓고 다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이 집은 아주 컸고 이웃 집과 꽤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그는 이 공간에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대변과 소변을 잔뜩 채워 넣었다. 그런 다음 구덩이 양쪽 끝에 말뚝을 박아 줄을 매고 그 위는 하얀 천으로 덮어 두었다. 그리고 거기에 의자들을 여러개 놓되 의자의 앞다리는 웅덩이 앞에 놓이게 하고, 뒷다리는 천으로 덮은 구덩이 위에 살포시 얹어 두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의자에 앉으면 힘을 받지 못하는 의자가 뒷다리 쪽으로 쓰러지면서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웅덩이에 곤두박질하게끔 해두었다. 또 그는 큰 단지와 하앙리에 나뭇잎과 바나나 잎 등을 넣어 속에 채우고 그 위에 하얀 천을 덮어서 음식처럼 보이게 했다. 그리고 약간의 진짜 음식도 준비해 두었다.
이튿날 아침에 많은 니간타들이 왔다. 시리굿따는 니간타 수행자들을 준비된 장소로 안내했다. 그러자 그들은 주인의 안내에 따라 들어오더니 제각기 의자에 앉으려고 했다. 이때 시리굿따가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아직 앉으셔서는 안 됩니다."
"왜 그러오?"
"스승님들께서 저희 집에 오셨으면 저희 집 예절에 따라 주시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스승님들은 각기 준비된 의자 앞에 동시에 서 계시다가 동시에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시리굿따는 한 사람이 먼저 구덩이에 빠지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이 구덩이를 피할까봐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그것을 모르는 니간타들은 주인의 부탁이니 만큼 그러자고 했다. 이윽고 니간타들이 의자 앞에 줄을 지어 섰고, 시리굿따 하인은 때를 보아서 "자, 앉아 주시지요"하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니간타들은 의자의 뒷발이 기울어지는 것과 동시에 오물 구덩이 속으로 빠져 버렸다.
시리굿따는 즉시 대문을 잠그게 하여 그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한편 하인들을 시켜 나오는 니간타들을 마구 두들겨패 주었다. 그러면서 "옳지! 당신들은 미래의 일을 잘도 하는군!"하고 야유했다. 그렇게 실컷 혼을 내 준 다음 인제는 됐다 싶을 때 시리굿따는 문을 열어 그들을 미끄럽게 해둔 길위에서 넘어지고 미끄러지는 일대 수모를 겪었다. 그들이 길 위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진풍경이었다. 니간타들은
"이놈! 네가 우리를 망신시키다니!"
하며 입으로만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가라하딘나가 부처님 일행을 자기집에 초청하였다. 부처님께서 비구 제자들을 거느리시고 가라하딘나의 집에 도착하였다. 가라하딘나는 부처님을 인도하여 정해진 자리로 안내 했다. 부처님은 가라하딘나의 요청대로 앞으로 나가시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오른쪽 발을 숯불을 덮고 있는 멍석 위에 내려 놓으시자 순간 수레바퀴 만한 연꽃이 그 자리에 피어나 숯불을 모두 덮어 버렸다. 부처님은 연꽃잎 위에 발을 놓으시며 앞으로 나아가 시어 부처님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조용히 앉으시었다. 그리고 다른 비구들도 부처님을 따라가 옆 자리에 앉았다. 이 광경을 본 가라하딘나는 놀라움으로 벌벌 떨며 부처님 앞에 달려가 엎드려 잘못을 빌었다.
"부처님이시여, 저의 의지처가 되어 주십시오!"
"무슨 뜻인가 ?"
"부처님이시여, 저는 저 공간에 숯불을 가득 채워 두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으로 하여금 그 속에 빠지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께서 앞으로 나아가시는 순간 그 위에서 연꽃이 피어난 것입니다.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가라하단나여, 너는 저 항아리와 단지 등을 가리키면서 저기에 많은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부처님, 그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그것들은 비어 있습니다."
"걱정할 것 없느니라. 어서 가서 음식을 담아 오도록 해라.“
가라하딘나는 의아해 하면서 항아리와 단지가 있는 곳으로 갔다. 거기에는 놀랍게도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가라하딘나는 이 같은 기적을 보고 부처님을 믿는 마음이 생기면서 기쁨과 행복감이 넘쳤다. 그는 음식들을 바친 다음 존경이 가득한 눈빛으로 부처님과 제자들이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공양이 끝난 뒤 부처님은 말했다.
"중생들은 지혜의 눈이 없기 때문에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 대한 공덕을 알지 못하느니라. 그들은 이런 지혜의 눈이 없으므로 눈먼 사람과 같으니라. 오직 현명한 사람만이 이런 진실을 아느니라."
[해설]
부처님제자 시리굿따와 니간타제자 가라하딘나의 대결은 사실상 부처님과 니간타의 대결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재미도 있고 중요한 의미도 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에서는 이 사건이 있었던 곳이 라자가하라고 소개되어 있다. 부처님에 대한 다른 종파의 시기와 도전은 일생동안 이어졌다. 사왓티의 망고나무숲에서 천불(千佛)화현(化現)을 보인 것도, 사왓티 기원정사에서 찐짜마나(176번게송)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처님의 아이를 임신했다며 모함을 한 것도, 니간타의 무리들이 순다리(306번게송)라는 여자를 죽여 놓고 기원정사 옆에 묻었던 사건도 모두 이교도가 부처님을 시기하고 모함하여 일어난 사건들이다.목갈라나 존자를 깡패를 동원하여 때려죽인 것도 니간타들이었다.
니간타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 니간타는 “과거의 일, 현재의 일, 미래의 모든 일을 모두 알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도 다 알고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또 일어나지 않을 것인지도 그분들은 모두 아는 일체지자(一切智者)”라고 말했다. 그런데 부처님의 일체지는 "부처님은 과거ㆍ현재ㆍ미래에 대해서 특정한 인물이나 사건을 숙고하고 나서 인간들이 생각과 사건을 안다.“는 것이다.
“왓차곳따여, ‘사문 고따마는 일체를 아는 자이고, 일체를 보는 자이다. 그는 완전한 앎과 봄을 선언하여 ‘나는 걸을 때도 서 있을 때도 잠잘 때도 깨어있을 때도 항상(satataṃ) 끊임없이(samitaṃ) 앎과 봄이 현전한다.’라고 말하는 그들은 내가 말한 대로 말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거짓으로 나를 헐뜯는 자이다.”(M71)
니간타들이 말하는 동시에 항상 안다는 것은 거짓이었다. 결과적으로 일체지자(一切智者)라고 선언한 니간타는 부처님의 제자 시리굿따가 파놓은 똥통에 빠져 망신을 당하였고 부처님은 가라하딘나의 계략에 속지 않고 불덩이 위를 걸으시자 수레바퀴 만한 연꽃이 피어나고 빈 항아리에 맛있는 음식을 가득 채우는 기적을 일으켰다. 그리고 시리굿따와 가라하딘나는 예류과를 얻었다. 부처님을 해치려던 가라하딘나까지 뜻밖에 예류자가 되었다. 부처님과는 악연도 축복이다.
<빠세나디 유부녀에게 홀리다>
법구경 60번 게송
잠 못 이루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지쳐 있는 나그네에게는 지척도 천리. 바른 진리를 깨닫지 못한 자에게는 윤회의 밤길이 아득하여라.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자에게 길은 멀다.
올바른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아득하다.
不寐夜長 疲倦道長 愚生死長 莫知正法
불매야장 피권도장 우생사장 막지정법
不眠者夜長,倦者由旬長,不明達正法 愚者輪迴長。
Dīghā jāgarato ratti, dīghaṁ santassa yojanaṁ,
dīgho bālānaṁ saṁsāro Saddhammaṁ avijānataṁ.
Long is the night to him who is awake, long is the yojana (a space of nine or twelve miles) to him who is weary; long is the chain of existence* to the foolish who do not know the true law. [Note: the chain of existence: samsara, chain of births and deaths which, goes on until we are freed from it by the knowledge of true law which leads to nirvana.]
[인연담]
어느 날 꼬살라 국왕 빠세나디는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서 코끼리 뿐다리까를 타고 위엄을 갖추어 태양의 운행 방향을 따라 시내를 돌고 있었다. 이때 그는 어떤 집의 이층에서 창가에 몸을 기대고 밖을 바라보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과 눈을 마주쳤는데, 그 여인은 왕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안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관리가 가서 알아보니 그 여자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 그랬지만 왕은 그녀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왕은 그 여자의 남편을 불러들였다.
왕의 부름을 받은 여인의 남편은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서 왕궁으로 가서 분부를 기다렸다.
"너는 1요자나 떨어진 강변에 가서 빨간 진흙과 흰색ㆍ푸른색의 연꽃을 구해가지고 오너라. 그것들을 가지고 너는 내일 저녁 내가 목욕을 하는 시간에 맞추어 되돌아와야 한다. 네가 시간을 어기거나 그걸 가지고 오지 못하면 너는 사형에 처해질 것이다."
한편, 그날 밤 빠세나디 왕은 여인에 대한 욕망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날이 밝으면 남편을 처형하고 여인을 왕궁으로 데리고 오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는 괴상한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사람이 쇳물을 끓는 큰 가마 속에 들어가서 내지르는 듯한 단말마의 비명이었다. 뜨거운 쇳물 안에 몸이 빠진 상태로 머리만 밖으로 나온 어떤 사람이 잠시 고통을 식히려 하나 금세 다시 쇳물 속으로 빠질 때 내지르는 지옥고의 비명이었던 것이다.
이 괴상한 소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 들려왔으므로 그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왕은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비몽사몽간에 어지러운 꿈을 꾸기도 했다. 그는 밤새도록 시달리느라고 긴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을 맞았다. 왕은 부인 말리까와 함께 부처님을 찾아가 그간의 이야기를 사뢰었다. 부처님은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대왕이여, 너무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것은 당신이 죽으리라는 조짐이 아니오. "
"부처님이시여, 그들이 무슨 짓을 했기에 그런 비명을 지르는 것입니까 ?"
왕은 부처님이 꿈을 해석해주는 말씀을 듣고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스스로 생각 했다.
"나는 참으로 아주 무서운 악행을 저지를 뻔했구나. 남의 아내를 욕심 내는 마음을 품음으로써 지난밤에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이 시간 이후부터 다시는 이런 생각을 품지 않으리라.“
그는 부처님께 자기의 소감을 사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어젯밤 저는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이 얼마나 긴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때 왕에 의해 죽을 뻔했던 여인의 남편이 그 옆에서 왕의 말을 듣고 있다가 이렇게 한마디했다.
"부처님이시여, 지금 왕은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이 얼마나 긴 것인지를 깨달았다고 말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피곤한 자에게 있어서 1요자나의 거리는 얼마나 먼 것인지를 깨달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두 사람의 말을 합쳐서 게송을 읊었다.
이 법문을 들은 빠세나디 왕은 희생하기 위해 잡아온 모든 생명들을 놓아 주었고, 성 내의 사람들은 말리까 왕비를 높이 찬탄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아내를 둔 사나이는 예류과를 성취하였다.
[해설]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자에게 길은 멀다. 올바른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아득하다.”는 가르침은 너무 유명한 가르침이고 내가 참 좋아하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윤회를 벗어나는 ‘올바른 가르침(Saddhamma)’은 무얼까? 세상에 윤회의 길을 벗어나는 가르침은 많치않다. 오히려 윤회를 원하거나 영생을 말함으로서 계속해서 존재에 집착하게 하는 가르침이 득세하고 있다. 고통의 원인인 감각적욕망에 대한 갈애(kāma tanhā), 존재에 대한 갈애(bhava tanhā), 단멸에 대한 갈애(vibhava tanhā)를 부추기면서도 자신들의 가르침을 ‘올바른 가르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천국에가서 영생을 한다는 것은 존재에 대한 갈애(bhava tanhā)를 인정하는 것이다. 상견(常見)이라고도 한다. 불교에서 그런단계를 예비단계의 가르침이라고한다.
불교에서도 보시와 도덕적인 생활을 실천하여 천상에 태어난다는 예비단계의 가르침이 있는데 그 단계에서는 이 3가지 갈애를 인정한다. 그러나 사성제를 꿰뚫는 높은 단계의 가르침에서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단멸에 대한 갈애를 소멸시키는 것이 목적이 된다. 바른 법(Saddhamma)을 안다는 것은 오온을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내 자아가 아니다.’라고 통찰하는 것이고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M28)는 설명처럼 연기법을 깨우치는 것이다. 연기법을 보는 자에게 영생이라는 생각, 천국에 대한 갈망은 사라진다.
세상 사람들중에는 농담처럼 내생에는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새로 태어나고 싶다는등의 소원을 말하는 이도 있다. 남자의 삶, 여자의 삶, 혹은 동물이 얼마나 괴롭게 사는지 모르고 피상적으로 알아서 생긴 망상이다. 불자들 가운데서도 천상에 태어나 오랫동안 즐거움을 맛보려는 이들이 있다. 윤회를 벗어나는 길은 아득하고 그렇게 매혹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대신에 천상에 태어나는 것은 희망을 주고 용기를 갖게한다. 천상에 태어나려면 보시를 하고 도덕적인 생활(十善業)을 하여 공덕을 지으면 된다. 수 많은 공덕중에서도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공덕이 가장 크다. 불자들이 천상에 태어나는(화생)것을 원한다면 그것도 칭찬 받아야하고 장려되어야 한다. 천상(天上)중에서도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꿈꾸는 것은 전통적으로 많은 불자들이 소원이었다. 그곳에서는 미륵보살이 계시고 고따마부처님도 그곳에 계시다가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하셨던 경허스님은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결사운동을 했었다. 경허선사가 지은 동수정혜동생도솔동성불과계(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契)에는 세세생생에 도반이 되어 함께 정혜를 닦아 함께 도솔천에 나되 한 사람이라도 따라오지 못한 이를 이끌어 주고자 했다. 경허의 깨달음만을 주장하는 현 풍토에서 경허의 도솔왕생결사는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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