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제14회 천강문학상 수필부문 당선작] 윤미영 서은영 오금자
■대상
탁설, 공空을 깨우다
바람을 기다린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발밑을 살핀다. 제자리에서 돌아서지도 벗어나지도 않는다. 하안거 동안거가 끝나고 수행 스님이 돌아와도 하늘 언저리에 고요히 빗금만 긋는다. 바람이 오면 바람이 치는 대로 소릿결을 만든다.
능선을 넘어온 산바람은 길을 내지 않는다. 모양도 빛깔도 없다. 사물에 부딪혔을 때 길을 보여주고 소리를 듣게 한다.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이 바람을 맞이하여 응답한다. 산빛을 담아 청아한 음색을 울린다 하여 풍령風鈴, 풍탁風鐸이라 불리는 풍경이, 서기瑞氣 감도는 하늘에 얹혀 묵언 수행 중인 사찰을 깨운다.
풍경 안에는 물고기 모양의 단단한 금속이 달려 있다. '탁설鐸舌'이다. '목탁의 혀'라는 두 글자가 '탁'치는 듯, 얇은 혀가 경종을 울리는 듯, 작은 몸이 벽을 깨듯 내는 소리라 하여 종어성鐘魚聲이다. 수행자가, 잘 때에도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처럼 항상 깨어 있으라는 의미가 침묵을 뒤집어쓴 듯하다.
사찰에 가면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경내에는 법구경이 있고, 산문 밖에는 물소리, 바람 소리, 새소리, 낙엽 지는 소리도 법어로 들린다. 법고는 축생을, 범종은 중생의 영혼을, 날짐승을 깨우는 목어와 운판과 경쇠다. 법고를 두드리는 스님의 뒷모습을 보노라면 '마음 심心'을 수없이 그리며 번뇌를 끊어 내려 하는지, 심장 박동마저 고요해진다. 새벽 예불 때 목탁은 잠든 천지 만물을 깨우고 중생을 미혹에서 깨운다. 범종각에서 속이 훤한 목어가 '너도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한 속을 파내어 비우라.'며 엄포를 놓는다.
절간 곳곳의 소리를 허투루 들을 게 아니다. 목탁 소리와 어우러지는 법음구法音具가 죽비와 같아서 사찰을 찾는 이들의 불성을 일깨운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경배하는 마음 자세도 달라진다. 불성을 깨우는 소리가 중생에게 경更을 치는 것이 아닐는지.
‘경을 치다’는 꾸지람이나 나무람을 들을 때 쓰이는 말이다. 조선시대에 밤 시간을 알리는 방법으로 경更에는 북을 치고, 점點에는 꽹과리를 쳤다고 한다. 자정인 삼경에는 북을 스물여덟 번을 쳐서 도성의 사대문을 걸고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했다. 돌아다니다 걸리면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오경에 풀려났으므로 경을 치르고 나왔다는 말이 생겼다. 풍경에도 그런 경책이 있을 터이다.
사람 사이에도 경을 쳐야 할 때가 있다. 몇 년 전, 친구에 대한 글을 써서 절연하다시피 한 아픈 경험이 있다. 그녀는 허리병을 앓다가 수술 후 외출할 때마다 휠체어에 의지했다. 그 무렵 내가 글쓰기 공부를 시작하면서 친구가 겪은 고통에 대해 쓴 글이 화근이었다. 친구는 자신의 사연이 글이 되어 떠도는 것이 불쾌하다며 소식을 끊고 이사를 가버렸다. 일말의 용기를 주려던 것이 심리적 거리만 넓히고 말았다. 글도 세 치 혀가 되는 걸 절감했다.
풍경 속 탁설이 사람의 입속 혀처럼 군다. 입 안에서 혀가 갖가지 말을 만들듯, 탁설은 바람이 치는 대로 다른 소릿결을 만든다. 혀가 들어가는 속담 중에 '더운 죽에 혀 데기'는 대단치 않은 일에 낭패를 보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경우다. ‘혀에는 뼈가 없어도 사람의 뼈를 부순다’의 의미는, 혀가 단단한 뼈를 부술 만큼 위세를 지녔음을 경고한다. 풍경 속의 쇳고리가 겉쇠를 칠 때마다 내는 소리는 듣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베란다에 대나무로 만든 풍경을 걸었다. 앞산 너머 해풍이 건너오거나 뒷산의 바람이 다가오면 신호를 보낸다.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대숲에 있는 것처럼 가슴이 서걱거린다. 마음을 수시로 살피며 우유부단하다 싶으면 경을 쳐서 당겨주고, 매몰차다 싶으면 풀어준다. 빈틈없이 채워진 마음자리가 비워지고 맑아진다. 풍경이 제 몸을 치면서 좋은 기운을 집 안으로 들이고 악귀는 내모는 벽사수나 다름없다.
바람결에 스님의 선방에서 보았던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글귀가 묻어난다. ‘발밑을 살펴보라’는 말 속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마음을 더 쓰고 자신을 돌아보라는 뜻이 담겨 있다. 호젓한 절간에서 풍경을 유심히 올려다보는 이는 조고각하를 실행하는 사람이다. 그를 알지 못하나 지긋한 미소에서, 진중한 음성에서 기품이 우러난다. 인생의 연륜이 빚어내는 신뢰감과 반추하는 낯빛에 화색이 돈다.
탁설이 부딪힌다. 바람이 운다. 소리 없이 자취 없이 흐르던 바람이 마침내 소리 내어 운다. 가람을 오가며 들었던 법문 중에 '소리를 듣고 도를 깨친다'는 문성오도聞聲悟道가 있다. 풍경의 진언 같아서 들을수록 먹먹해진다. 옛 선비들은 '경敬'자를 해낭에 넣거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흐트러지기 쉬운 마음을 챙겼다 한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일상에서 의미 있는 글자 한 자쯤 심중에 지닌다면 마음의 소리가 느긋해질 것이다. 서걱거림이 어느새 가라앉는다.
마음이 탁설만큼 가벼우면 무탈할까. 천지간 한 점 풍경에 묻고 싶어진다. '살면서 늘 마음의 거리를 살펴라. 인연에 따라 서로 의존해서 살아라.'는 조언을 해 줄 법하다. 허공에 있어도 발밑이 두렵지 않은 자. 움츠리는 기색 없이 사붓이 주위를 추스르는 자. 찰나에 스칠 바람 같은 연緣을 알고 자연에 순응하는 법을 익힌 수행자의 모습이 저럴까.
풍경 속 쇠고리가 경쇠를 친다. 비었다고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다. 공간 가득 세상 만물의 숨소리를 품었다. 탁설은 숨의 진동에 따라, 아우르고 다독이고 스미듯 변화무쌍한 울림을 준다. 울림이 사람마다 다르게 와 닿는다면 진리를 통해서 깨치는 마음자리의 차이일 것이다.
굳게 닫힌 법당 문을 연다. 쇠고리와 마른 공기가 부딪쳐 바람을 일으키는 소리를 가만히 비집고 절을 올린다. 고개를 드니 법당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이 더욱 초연하다. 탁설이 벽을 친다.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산중에 파문을 일으키는 저 푸른 음성. 공空을 깨운다.
윤미영_수필과비평등단. 제15회 포항소재문학작품현상공모 최우수상. 수필집 <틈새비밀> <타투>
■우수상
그늘의 내력
그늘에 들어선다. 산책로를 덮고 펼쳐진 산그늘을 걷는다. 별스러울 것도 없지만 산이 생겨난 이래로 만들어진 깊이이니 태곳적 그늘이라 할 만하다. 등 뒤에서 언제나 나를 따르던 평생의 그림자도 어느새 산그늘이 품은 태고의 것이 되어버린 느낌이 든다. 얼마나 더 걸어 들어가면 나도 저 거대한 원시의 깊이에 가닿을 수 있을까. 내게 흘러들어 나를 이룬 것 가운데 태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산기슭을 따라 둘레길이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 그늘을 품고 숲 사이로 길게 이어진다. 지난 계절도 그 이전의 세월도 쌓였는지 숲길이 짙다. 햇볕을 땅속까지 끌고 들어간 나무들이 빛을 삼킨 뒤 그 나머지를 다시 땅 위로 밀어낸 자국, 날마다 달아나는 햇살과 움켜쥐려 안달인 어둠의 중립지대, 하늘을 만져보고 싶었던 나무의 간절함이 잎이라면 어둠이 머물던 자리에 잎이 내려놓은 햇살의 기억, 이 모두가 그늘을 이루는 셈이다. 기억은 누구의 몸에 머무르던지 오래도록 따스함을 간직하고 그늘로 여문다. 가지가 부려놓는 그늘이 한낮을 떠받치고 있다.
숲의 그늘이 앉은 자리에 이끼가 무성하다. 이끼는 숲의 물기를 모아 연둣빛 솜으로 부풀리는 그늘의 다른 이름. 아주 조금의 햇살로 그늘을 느리게 데운다. 녹음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듯 이끼가 바위틈 사이로 조용히 뿌리를 옮긴다. 이끼에 다다른 달팽이가 홀연히 떨어지는 산벚꽃잎을 올려다보며 온순한 맨발을 쉬듯이 때론 바닥에 납작 엎디어 눅진한 때를 건너온 사람에게 기꺼이 푹신한 자리가 되어 미끄덩한 발바닥을 씻게 한다. 그늘이 몸을 갖는다면 이끼이지 않을까.
그늘은 바닥 이상의 높이를 가진 적이 없다. 부피가 전부일 뿐 무게를 갖지 않으니 무엇인들 밟아 보았겠는가. 나무가 발밑을 들춰봐도 바닥을 떠나지 않는 그늘은 비가 오면 제 몸도 사라지고 만다. 솟구치기 위해 그늘은 고작 옹벽에 기대어 일어서지만 결국 한 겹일 뿐 두께를 갖지 못한다. 움직일 수는 있어도 일어서거나 달아날 수 없는 게 그늘이다. 바닥을 전전해야 했던 골목의 시절은 내게 그런 그늘이었다. 나는 흐린 날의 눅눅한 지푸라기 같았고 가난 탓이라는 말로는 다 내색할 수 없었다. 바닥에 가까웠으며 희미해서 사라질 것 같았다. 기어오를 옹벽을 찾아 사방을 더듬는 담쟁이처럼 분주했으나 멈춘 듯 보였다. 나는 부피 이전의 홑겹에 가까웠고 그늘보다는 얼룩에 가까웠다.
새벽을 달려온 봉고 승합차가 토하듯 사람들을 부려놓으면 한 바가지 오물을 뒤집어쓴 듯한 사람들이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흐린 불빛 속, 쉼 없이 돌아가는 공업용 재봉틀에는 가늘어서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은 실이 알록달록한 천을 박음질하기 바빴다. 뭉치를 이루고 쌓인 옷에 늘어진 실밥을 따거나 가지런히 단추를 채우노라면 내 그늘까지 딸려드는 것 같았다. 차라리 옷을 포장하던 상자 속으로 개켜져 토막잠이라도 잤으면 싶었다. 꿈 많던 대학 신입생 티를 벗지도 못한 첫 여름방학 아르바이트였다.
한 철만 하는 짧은 일었지만 가정 형편은 고스란히 피곤한 얼굴로 옮겨놓아 짙은 그늘이 되었다. 분홍색 티셔츠를 입고 하늘색 모자를 써 봐도 그늘은 지워지지 않았다. 한껏 밝아 보이려던 치장이 어두운 낯빛을 강조할 뿐, 2학기 등록금은 마련되지 않았다. 남동생을 업고 집 안 구석구석을 걸레질하기 바빴던 맏이의 그늘이 여전히 쫓아와 짙고 길게 나를 다그치던 시절이었다.
내 몸에도 그늘이 숱하게 많았다. 눈물은 그늘의 표시인지도 모른다. 그늘의 부속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지나치게 자주 울었다. 눈물겹지 않은 곳이 없어서, 빨랫줄에 널어놓은 빨래에 물방울이 맺힌 것만 보아도 옷소매를 적시곤 했다. 축축한 마음은 다리 달린 생물처럼 온 데를 다녀서, 책상 뒤편에서 잃어버린 양말 한 짝을 찾아냈을 때 왜 눈물이 났는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게 내가 속한 그늘의 짓이라 둘러댔다.
구김살을 감추기 위해 그늘을 끌고 부엌 위에 얹어있는 작고 낡은 다락방으로 숨어들곤 했다. 구석이 많아서 숨길 것도 찾을 것도 많은 거기엔 이상하게도 그늘이라곤 없었다. 다락방은 전부를 꿈으로 바꿔치기에도 그만이었다. 새것이라곤 없는, 낡아도 그럭저럭 허접해 보이지 않는 보따리 속엔 엄마의 볕 들던 날의 한때가 빨간 비로드 통치마로 여전히 환했다. 젖내 얼룩진 배냇저고리가 배시시 내 흉내로 웃고 있었다. 기억나지 않는 시간 속에 엎드려 있는 것만으로도 상상은 구김살 하나 없는 모습을 하고 슬금슬금 밝아졌다.
그림자가 그늘에 들어서면 그늘은 품는 것으로 그림자를 지울 줄 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작고 비좁은 그늘이다. 늘 어떤 그림자든 다 품지는 못한다. 손바닥과 손등이 하나의 손인 것처럼 그림자는 그늘이 되기도 하는 섭리를 생각해 본다.
어느덧 산그늘을 지나는 산책길이 끝나간다. 해를 등지고 걷는 내 앞으로 그림자이면서 그늘이기도 한 또 다른 내가 걸어가고 있다. 바닥의 상태에 따라 수시로 길이를 달리하면서 내 앞에서 내가 걷는다. 내 안에 웅크린 그늘을 꺼내 펼쳐 누군가를 쉬게 할 날이 오기도 할까. 그때 나는 아이가 아니라 웅숭깊은 그늘을 품은 거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깨닫는 일은 자신의 그림자를 다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등을 떠미는 빛의 응원을 받으며 그림자와 그늘의 사이이지 싶은 나를 따라 집으로 간다.
집도 그늘이다. 온기가 가득하고 내게서 비롯된 이들이 함께 산다. 지붕이 이룬 그늘을 유지하는 온기는 가족으로부터 온다. 시시때때로 모여 앉아 서로의 그늘을 재고 그 속에서 서로를 나눈다. 다독이는 손길, 따뜻한 응원, 격려와 축하, 함께 할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을 펼쳐 어디선가 묻어 든 얼룩을 씻는다. 이런 그늘을 누릴 수 있음은 그늘이 가진 역사 때문에 가능하다. 내게 그늘을 나눠준 부모들, 그들 어깨 뒤에 대를 이어 거슬러 오를 수 있는 그늘이란 흔한 말로는 담을 수 없는 숭고한 가치를 품는다.
새삼 내가 가진 그늘을 펼쳐본다. 또렷하진 않지만 어떤 형태가 어른댄다. 따뜻한 표정의 얼굴이 가득하다. 불편한 것이라 여겨 이제껏 그늘을 끌고 다녔구나. 그늘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이 결국 나라는 것도 알 것 같다. 산다는 건 저 혼자 우격다짐하는 게 아니라 제 그늘에 덧붙인 여러 그늘의 연대라는 걸 알겠다. 이제야 평생 입을 한 벌의 옷, 몸 밖의 몸을 마주한다. 그늘에 산다.
서은영_2023 전북도민 신춘문예 당선
■ 우수상
聖 숲 俗
오늘도 숲길을 걷는다. 마음이 공허한 날에는 숲으로 가서 우주의 소리를 들어본다. 숲은 빛과 어둠이 어울려 환호하며 나를 맞아준다. 빛의 움직임은 깊이 들어갈수록 어둠 속으로 잠긴다. 제 몸의 소리는 다 비우고 우주의 유성음으로 속을 가득 채운 채 웅성댄다. 흐느끼며 살아가는 삶처럼 숲은 여기저기서 서걱대며 연주를 한다. 나무와 새들과 바람 소리는 서로를 다독이며 합창을 이룬다. 어두운 밤하늘의 별들이 그들과 어울려질 때는 더욱 교교한 음과 색이 마음을 흔든다. 내 인생은 언제면 저런 득음과 채색의 경지에 이룰 수 있을지.
숲은 성전이다. 숲은 푸르름으로 이루어진 가능성의 세계이다. 푸름은 무엇이든 생명을 만드는 심층이며, 어둠을 빛으로 밝히는 근원이다. 무엇인가를 살아나게 하는 유有, 무엇도 소진시길 수 없는 뿌리이다. 부패하고 훼손될 수 있지만, 결코 소멸되지 않으면서 거기서는 모든 것이 다시 시작한다. 삼라만상의 시원에시 생명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성스러운 윤회를 본다.
천년을 지탱해온 거목들이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는 숲속에 있으면 신선한 바람이 세상에 찌든 몸과 마음에 생기를 불러일으킨다, 나와 나무는 한 몸이 되어 서로 숨결을 주고받는다. 어둠의 숲속에서 새롭게 태어난 어린 새의 울음소리가 찌르륵 찌르륵 새어 나온다. 숲은 신성한 소리와 색채를 간직하며 온전한 생명의 세상을 이루고 있다.
숲은 저물어가며 아직도 오지 않은 누군가를 기다린다. 아카시나무, 소나무, 후박나무가 모두 하나로 어우러진다. 두견이, 직박구리, 부엉이가 한 가족이 되어 살아간다. 울고 웃으면서 추위와 비바람 속에서 서로 감싸주고 품어가면서 살아가는 곳이 숲이다. 숲에서 나는 성자가 된다. 숲으로 오는 사람은 모두 성자가 된다. 나무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세상의 잡다하고 쓸모없는 소리가 모두 사라진다.
숲으로 가보았는가. 몇백 년 묵은 아름드리나무들이 서 있는 숲에 가보라. 건장한 외모와 푸른 모음들, 이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 어머니의 품이다. 푸름을 통해 적층의 세월을 본다. 봄이 오는가 싶더니 세상은 연두색으로 변했다. 지난겨울의 잿빛을 물리치고 봄비가 내리고 산천에는 온통 연두가 밀려왔다. 연두는 어둠과 슬픔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위안의 색이다. 어둠을 넘어선 연두 덕분에 숲은 푸르게 물들기 시작한다. 연두의 시간에 살아 술렁이는 생명의 움직임을 만져본다. 나는 얼마나 살아야 저 연두와 초록의 시간을 함께 나눌 수 있을까.
숲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나무들이 함께 모여야 비로소 숲이 된다는 것을. 아무리 큰 나무라 해도 혼자서는 숲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혼자선 나무는 언제나 혼자일 뿐, 숲이 될 수 없었다. 나는 왜 세상에서 홀로 떠돌며 숲에 들어오지 못했던가. 진작부터 이곳으로 들어와 나무와 새들과 함께 걸으며 푸른 삶을 살지 못했던가. 수많은 잎이 우수수 몸을 떠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인가, 이별을 준비하는 애도인가. 숲에서도 만남과 이별이 있고 사랑과 중오가 있었다.
어디선가 새들이 우는 소리가 지구를 흔드는 굉음처럼 고요한 숲의 정적을 깨뜨린다. 나무의 깊은 침묵을 흔들어 깨우고, 풀잎 사이를 스치는 메아리는 단풍잎 선연한 계곡 따라 낮게 기어가다 숲속 깊은 곳으로 사라진다. 삶의 가치란 무엇인가. 나의 존재는 무엇이며 세상에 서 살아가는 생명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 숲속의 저들은 어떤 증오나 적의도 없이 모든 것을 서로에게 베풀어 준다. 아름다운 꽃을 피워 세상을 즐겁게 하고, 계절에 따라 온갖 열매를 맺어 나누어주고, 죽어서는 천년 주목이 되어 삶과 죽음의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곳에서는 누군가를 제압하기 위한 다툼도 살아남기 위한 배신도 없다. 시기도 질투도 없이 상조하고 공생하는 마음으로 송고하다. 누가 이곳을 다스리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모든 것이 평온하다. 숲에서는 소중하고 눈물겨운 순간을 위하여 바람 소리만이 서로를 위로하며 스쳐 지나간다. 모두 공존하며 평안한 삶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공양도 필요 없이 서로를 품어주는 자체가 바로 부처의 마음이다. 숲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의 가없는 공양과 헌신을 보면서 문득 삶의 길이 무엇인지를 배운다.
일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다 가신 아버지는 마지막 가는 길을 수목장樹木葬으로 선택했다. 꼿꼿하게 자식들을 위해 살아오신 아버지이지만 그의 더운 피가 흐르던 몸은 한 줌의 재가 되어 숲에 뿌려졌다, 숲속의 나무들은 이승과 저승 사이를 넘나들면서 흔들리고 있었다. 식은 재가 되어 숲에 뿌려지는 아버지의 마지막을 보면서 가족들은 오열했다. 하지만 나는 한 생존의 시작과 끝이 보여주는 뜨거운 소리와 빛을 보았다. 바람에 흔들라는 나무를 바라보면서 생과 사의 경계를 생각하는 동안 아버지의 생은 불귀의 바람 속으로 날아갔다. 어디로 가는지 그 끝을 알 수 없는 저녁 햇살 한 줌이 서산마루로 망연히 사라지고 있었다.
숲은 인간 세상과 다르지 않은 생존의 몸부림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부서진 다시 희망들이 다시 타오르고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 피어나는 곳이다. 덧없이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의 헐벗고 서러운 영혼들을 달래려고 온통 웅성댄다. 그렇지 않고서야 새와 벌레와 풀잎들이 어찌 저렇게 슬피 울어대겠는가. 낙엽을 안고 말라가는 겨울나무들, 하나둘 사라져가는 서러운 새들은 얼마나 한스러운 가슴을 지니고 있을까.
숲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면서도 가장 미워하는 새는 뻐꾸기이다, 뻐꾸기 울음소리는 숲속의 새들 울음 중에서도 가장 애절하다. 오늘도 저들의 울음소리는 처절하게 숲과 산으로 메아리쳐 간다. 자신의 사랑하는 새끼를 다른 둥지에 맡겨 놓고 부화하고 자라는 것을 보아야 하는 어미는 주변을 서성거리며 피 울음을 울 수밖에 없었다. 탁란托卵의 숲에서 뻐꾸기의 울음은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는 몸짓이며 절규이다. 인간에게서든 새에게서든 참으로 생의 시간은 길고도 아프다. 여름날 생존을 위한 배반의 소리는 숲속에서 깊게 메아리친다. 뻐꾹~! 뻐꾹~!
숲속 어딘가에서 다람쥐들이 겨울 준비를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사람들이 도토리를 모두 독차지해버리기 전에 그들도 긴 겨우살이를 준비해야 한다. 인간의 욕심에 맞서겠다는 듯 다람쥐들의 탐욕도 예사롭지 않다. 먹을 양보다 훨씬 많은 도토리를 한껏 모아 땅속에 숨겨 둔다. 아둔한 다람쥐들은 숨겨 둔 양식이 어디 있는지를 찾지 못한다. 자신이 못 먹을지언정 끝까지 손에 쥐고 있으려는 인간의 욕심과 다를 바 없다.
숲은 성스러운 곳이면서 세속적인 곳이다. 나를 일렁이게 하던 사랑의 순간도, 나를 사로잡던 모든 욕망도 시간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질 것이다. 마침내 나의 삶도 마른 낙엽처럼 탈색한 채 곧 흙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올 것이다. 숲을 두근거리고 수런거리게 한 것들이 모두 어디로 갔느냐는 물음은 숲을 향한 새로운 존재의 질문이다. 새들도 모두 떠나고 헐벗은 나무만 남았을 때도 나는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숲속에 있을 거다. 꽃이 피고 새가 울고 초록이 무성한 숲이 될 때까지 새로운 삶을 기다릴 것이다.
오금자_2020 수필과비평 신인상. 제5회 제주어문학상. 2023 수필과비평 올해의작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