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3호,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by 알뜰수집가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소재지 :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가는 길 : 1, 4호선 이촌역에서 이어짐
1. 국보 제3호,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이 비는 신라의 24대 왕인 진흥왕이 세운 4기의 순수비 중 하나로, 북한산 일대를 신라의 영토로 편입한 뒤에 북한산에 세운
비입니다. '순수'란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님'을 의미하는 말이죠. 이 비석은 건립연대를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진흥왕이 북한산 일대를 영토로 편입한 시기를 바탕으로 555~568년 사이에 만들어졌을 거라는 추측이 많습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54cm이며 총 12행을 새겼습니다. 하지만 윗부분은 마멸되고 12행은 판독이 불가능합니다. 그 외에도
전체적으로 오랜 시간 풍파를 겪었기에 군데군데 해석이 불명확한 부분이 있죠. 또한 비석의 아랫부분은 아주 오래전에 깨저
떨어져나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외에도 뒷면에는 무수히 많은 총탄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6.25의 전란 속에서 진흥왕 순수
비도 다른 유물들처럼 총알을 맞고 훼손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으로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죠.
순수비 뒷면의 총탄 자국
2. 진흥왕 순수비의 내용은?
중간중간 마모가 되어 있지만 진흥왕 순수비의 내용을 해독하면 여러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진흥왕의 행차 사실과
진흥왕을 보좌한 대신들의 이름/직책이 써 있습니다. 또한 중요한 부분은 '도인'이라는 것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는 신라로
편입된 영토의 백성들을 교화하는 것과 관련되었죠. 이 덕분에 '당시 신라와 진흥왕이 영토 확장에만 주력한 것이 아니라
정복지의 백성들을 대하는 것에도 많은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는 삼국이 중원 지역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이던 때였습니다. 원래 백제의 영토였던 한강 지역은 이후 고구려의
영토로 넘어갔다가 나중에는 신라의 영토가 되었죠. 이렇게 중요한 지역이었기에 신라의 진흥왕은 영토로의 편입을 넘어서서
백성들의 신라화에도 신경을 썼던 모양입니다. 현재의 경기도 지역에서 신라 영토의 최북단 지역이었기에 이 순수비의 의의는
남다릅니다.
3. 추사 김정희의 노력
이 진흥왕 순수비의 옆면에는 다소 상관 없어 보이는 인물의 글이 있습니다. 바로 '추사 김정희'의 글입니다. 추사 김정희는
1816년에 김경연이라는 동료와 함께 이 진흥왕 순수비를 살펴보러 왔습니다. 그 이듬해에도 김정희는 순수비를 방문하여
68자를 해독하였죠.
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 丙子七月 金正喜 金敬淵來讀
-이것은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이다. 병자년 7월 김정희와 김경연이 와서 읽고 갔다
丁丑六月八日 金正喜 趙寅永同來 審定殘字六十八字
-정축년 6월 8일 김정희와 조인영이 함께 와서 식별 가능한 68자를 해독했다
또한 김정희는 후대에 진흥왕 순수비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는 '탁본'을 뜹니다. 이 탁본 덕분에 지금에 와서는
읽을 수 없는 부분도 읽을 수 있게 되었죠. 탁본 이후 세월이 흘러 풍화가 더 진행되었으니 김정희의 선택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위의 해석은 지금의 판독 기술과 당시 김정희의 탁본 자료를 바탕으로 해낼 수 있었던 겁니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탁본(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4.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진흥왕 순수비를 볼 수 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당연히 세월이 지남에 따라 진흥왕 순수비는 풍화 및 붕괴의 위험이 심각해졌습니다. 더군다나 이 순수비가
위치한 곳이 북한산 정상자락이었다는 걸 고려했을 때는 그 위험도가 훨씬 높았죠. 이를 고려하여 1986년에 국립중앙박물관
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안전하게 관리를 받고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숨겨진 노력 덕분에 오늘날 이 비의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었죠. 옛 조상들의 지혜가 후손에게 소중한 문화재를
전달해 준 셈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