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읍의 남쪽으로 진도천(욕실천)이 흐른다. 읍의 동쪽에 있는 첨찰산(482미터)과 수리봉(388미터)에서 시작하여 성죽굴이나 가는굴을 거쳐서 흘러내려오는 물길이다. 진도읍의 들판을 넉넉히 적시며 흐르던 큰 개울이다. 남천교는 그 진도천(욕실천)을 건너는 다리이었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바닷물은 쌍정리까지 들고 나갔다. 그래서 진도읍성 남문의 이름이 ‘망해루望海樓’이었고, 바다를 바라볼 수 있었던 누각이었다. 고을 원님이 바닷물에 발목을 적시지 않고 진도 남쪽 의신면이나 남서쪽 임회면으로 가려면 남천교를 건너가야 했다.
1872년 조선 고종때 발간된 지방지도(규장각 소장)에는 진도 읍성을 중심으로 진도의 중요 마을의 위치와 가는 길과 거리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남천교는 진도 관아로부터 남쪽 5리 지점에 표시되어 있다. 그 남천교를 지나서 의신면 침계와 가단과 창포를 거쳐 금갑진으로 나아가는 30리 길을 굵게 그려 넣었다. 또한 남천교를 지나서, 서쪽으로 10리를 가서 대곡산 굴재를 넘어 임회면 중미실로 가고, 다시 봉상재를 넘어서 굴포와 남도진성으로 나아가는 읍성으로부터 40리 길도 마찬가지로 굵게 그려 넣었다. 두 길은 읍성에서 진도의 남부와 서남부로 나아가는 핵심 교통로이었던 것이다. 남천교를 지나가는 이러한 교통망은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가 1917년 측량하고 1918년 발간한 지도에도 마찬가지로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다. 1920년대 신작로가 만들어지고 자동차가 나타나기 전까지 여전히 진도의 중요한 길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2020년 11월 13일 진도예향신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남천교와 은파유필” 칼럼을 실었다. 오랜 연륜의 남천교가 헐린다는 것과, 그 남천교와 관련된 무정 정만조의 글과, 진도 사람들이 정월보름에 다리 밟기를 하였다는 내용이다. 헐리는 남천교는 1966년 6월에 준공된 시멘트 철골 다리라고 하였다. 칼럼을 읽다보니, 문득 남천교 다리가 무너져 내린 날과 그 뒤에 새 다리가 준공되던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오른다. 1965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던 시기였을 것이다. 연이은 폭우로 남천교가 무너졌고, 남천교를 건너서 학교를 오가던 사하 마을과 욕실 마을 친구들은 물이 불어난 진도천을 건너지 못하였다. 그래서 상류 쪽 동외리까지 올라가서 진도천을 건너오느라 지각을 하였다. 혹은 학교에 오지 못하기도 하였다. 며칠 후 나는 무너진 남천교를 구경하러 갔었다. 무너진 남천교는 개울 양편으로 큰 통나무를 걸쳐 만든 목조다리로 기억된다. 그 한쪽이 장마 비에 무너져 있었다. 의신면으로 가는 버스는 다리 옆으로 설치된 임시 자갈길로 간신히 진도천을 건너갔다. 그리고 다음 해에 지금 헐리는 남천교가 세워졌다. 옛 다리보다 더 길었고 개천 양쪽에 토사를 돋우어 더 높게 세워진 다리였다. 개통식을 하던 날에는 색종이 테이프 커팅이 있었고 농악 패 공연도 있었다. 1966년, 우리가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이다.
2018년에 나는 진도군 산림조합으로 건너가는 낡은 시멘트 다리에서 남천교 이름을 확인한 적이 있다. 남천교는 내 기억보다도 훨씬 짧고 노쇠한 모습이었다. 아! 저 다리위로 무거운 버스가 어떻게 다녔을까? 그 때 찍어둔 사진이 첨부된 남천교의 모습이다. 그것이 헐리는 남천교와 나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2022년 나는 1960년대를 회상하며 철마광장에서부터 쌍정리 남천교로 향하는 옛 길을 다시 찾아보았다. 지금 철마광장에서 터미널로 내려가는 직선 도로(남문로)는 1980년대에 새로 만들어진 도로이다. 우리 친구 58회 박윤정(영옥)네 진도약방이 헐리고 그 옆 중앙상회도 일부 헐리고, 58회 박윤창의 남동리 집도 헐리면서 직선으로 건설된 넓은 도로이다. 우리가 어릴 적 다니던 쌍정리로 내려가던 옛 길은, 지금의 큰 직선 도로 왼편(동쪽)으로 골목처럼 남아있다. 철마광장에서 보면, ‘오거리철물(옛 진도약방 일부일 듯)’과 ‘맘스터치 빌딩(옛 진흥식당)’ 사이로 남쪽으로 뚫려있는 길이다. 그 당시에도 버스가 가까스로 다닌 길이었지만, 지금은 더 좁아진 듯하다. 길을 따라 내려 오다보니 왼편으로 옛 진도상설시장 자리와 마주친다. 한동안 진도우체국으로 이용되더니, 지금은 빈 건물이 흉물스럽게 서있다. 옛 광주고속버스 정류장에는 ‘남문떡방아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옛 광주고속 정류소와 그 앞에 있던 상설 어시장(지금은 역시 텅빈 건물이다) 사이를 지나면, 통정리桶井里 마을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쌍정리雙井里는 일제 강점기에 통정리桶井里와 두정리斗井里 두 마을이 합쳐진 동네 이름이다. 통정리 초입에는 1960년대까지 미나리 광(미나리깡)이 있었다. 쌍정리 길은 예전 모습과 큰 변화가 없었다. 좌우 집들이 건물의 모습만 다소 달라졌다. 더 내려가니 음식점 ‘사랑방’이 나온다. 아마 여기부터 두정리斗井里라 불렸을 것이다. 또 50여 미터를 내려가니 ‘울금한정식’ 식당이 나온다. 그 앞은 삼거리이다.
이곳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용두리로 나아가고, 똑바로 나가면 남천교이다. 남천교로 가는 길 좌우로는 모두 논이었다. 그 논이었던 자리에 ‘태평모텔’이 들어서있고, 동서로 큰 길이 뚫려 있고, 큰길을 건너서 ‘신호등회관’이 서있다. 신호등회관의 왼쪽으로 난 작은 길이 예전부터 있던 남천교 가는 길로 짐작된다. 그 길을 따라 200여 미터를 가니, ‘진도전남병원’과 ‘메디팜 영진약국’이 나온다. 나는 남천교와 마주치게 되었다. 남천교 너머로 ‘진도군산림조합’과 멀리 남산이 보인다. 철마광장으로부터 대략 1키로 미터 지점이다. 지금은 1966년 건립된 시멘트 남천교는 사라졌고, 새로운 철제 다리 ‘남천3교’가 세워졌다. 위치도 조금 더 동쪽으로 올라갔다. 새 남천3교는 내게 낯설었다. “그래도 그 아래로 우리가 멱 감던 맑고 깨끗한 욕실천이 여전히 흐르고 있어..”라고, 나는 눈을 꾹 감고 중얼거렸다.
옛 사람들이 진도읍내 공용터미널에 내리면, 어디가 어디인지 어리둥절할 것이다. 진도읍내 남천교에서 고작굴까지 이르는 넓은 갯펄은, 1921년 남문포 제방이 완성되면서 간척지 논으로 변했다. 그로부터 70여년이 지난 1990년대에, 우리는 ‘바다를 메워 만든 간척지 논’에 도로를 내고, 시가지를 만들고, 천천히 굽어 흐르던 진도천을 시멘트 방벽 사이에 가두며 직선화하였다.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루었다. 아니다. ‘뽕밭이 바다가 된 것’이 아니라 ‘바다가 뽕밭’이 되었고, 다시 ‘시멘트 도시’가 된 것이다. 현대 토목기술은 무자비할 정도로 자연을 변화시킨다. 그나마 진도는 덜 변한 곳이다. 진도읍의 옛 모습을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가 우리일 것 같아서 친구들 이름을 떠올리면서 적어보았다.
(태허당)
*ps 2007년 진도군지 연대표에는, 1921년 남문포 제방이 완공되고 1926년 해창언(고작굴 제방)이 완공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남문포'는 읍내 쌍정리에서 고작굴에 이르는 만灣(Bay)를 지칭하고, '해창언'의 완공으로 매립지가 되었다고 본다. 참고로, 조선총독부가 1917년 측도하고 1918년 발간한 '5만분의1 지도'를 보면 이미 '해창언(고작굴)'의 물막이가 완공되어 있다. 한편, 진도읍 남동리에서 욕실천까지 이어진 도로 및 제방이 있었는데, 이는 해창언 매립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먼저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첫댓글 어릴 때를 그린 글인데. 세상이 너무 빨리 발전하다 보니. 이조시대, 구한말시대 모습을 적어 논 듯 합니다. 어렴풋이 그려지는 초창기 남천교는 기억에는 있지만 생각나지 않습니다, 2번째 만들어진 남천교 사진입니다. 2021년 7월 진도에 엄청난 비가 와서 진도군 농경지 대부분이 침수 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모습이 아마 조선시대 진도군 옛 지도에 그려진 모습 같았습니다. 조선시대때 지금 쌍정리 마을회관 근처에서 배를 탔고. 일제시대때 현 공용터미널 자리에서 배를 탔다고합니다 그래서 남문포 위치는 남동리에서 도살장(공용터미널 뒷편 옛길)위치를 말 할겁니다. 그 후로는 조각굴제방에서 배를 탔습니다. 좋은 글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