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明洞聖堂, 1898년)
국내 최초의 고딕 양식 가톨릭 성당이자 한국 천주교회에서 가장 상징적인 성당.
군부독재 시절 향린교회, 성공회 서울대성당과 함께 민주화 운동의 성지였던 곳, 한국 민주화 운동의 최후의 보루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길 74(명동2가 1-1)에 자리한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이다. 주보성인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無染始胎)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당의 정식 명칭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대성당' 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이고, 줄여서 '명동대성당', '명동성당'으로 부른다. 1898년에 건립된 유서 깊은 유적지로 사적 제258호에 지정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영광과 희생, 부끄러움의 역사를 함께 지닌 묘한 곳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7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의 성지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명동성당에서는 1976년 3.1 민주 구국선언이 발표됐고 특히 그 유명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1971년 성탄 자정미사 강론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조작을 폭로했던 1987년 5.18 7주기 추모미사가 거행됐고 6월 항쟁 당시에는 대학생 농성단의 은신처로 역할을 다했으며 6월 항쟁 이후에는 항쟁 희생자들을 기리는 각종 미사들이 집전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부역했던 흑역사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1911년 제8대 서울대교구장이던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가 신민회와 안명근 야고보를 조선총독부에 밀고한 대가로 총독부로부터 명동성당 주위의 부지를 하사받은 적이 있다. 이게 그 유명한 105인 사건. 그리고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 15일에 (황국) 국위선양 평화미사를 거행하고 황군 위문금을 모금한 흑역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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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열사 의거비
그렇다고 20세기 초 무조건 흑역사만 있는 장소는 아니어서, 한일합방 직전인 1909년 12월 22일에는 정치인 이재명 말고 이재명 열사가 벨기에 국왕이자 콩고의 대학살자 레오폴드 2세의 추도미사에 참석하고 빠져나오던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을 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패크리. 이때 이완용이 죽었다면 역사가 묘하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1984년 명동성당은 성당 건립 이래 가장 큰 손님을 맞는다. 바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다.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대회 및 103위 시성식을 주례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교황은 행사 당일인 5월 6일 대회장에 가기에 앞서 오전 8시 명동성당을 방문했다. 교황은 성당 오른편에 있는 명례방 집회 그림과 한국 천주교 창립 주역인 이벽 세례자 요한ㆍ이승훈 베드로ㆍ김범우 토마스 성화, 교황 방한 기념 부조를 축복했다. 이어 제대 앞에 마련된 장궤틀에 무릎을 꿇고 한국 교회와 한민족을 위한 기도를 바쳤다.
2002년에는 성당 내부 기둥에 벽걸이 TV를 설치해, 제대에서 거행되는 전례를 성당 어디에서나 볼 수 있도록 했다. 기둥 때문에 가려진 제대를 보지 못하며 전례에 참례하는 불편함이 사라졌다.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성의교정, 성신교정의 신입생들의 입학식이 매년 이곳에서 거행된다. 정식 명칭도 정확하게는 입학식이 아닌 입학 미사다.
사실 명동의 최동단이기 때문에 명동역보다 을지로3가역이 가깝다. 명동에서 올 때는 오르막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걸어오는 경우라면 을지로3가역에서 내려서 오는 편이 더 낫다. 을지로1가 쪽이라면 CGV 명동점이 있는 눈스퀘어에서 우리은행 명동금융센터 방향으로 직진해도 나온다.
명동역에서 올 경우에는 8번 출구와 가까이 있는 옛 계성여자고등학교 후문 쪽으로 와서 옆길을 이용하면 빠르게 갈 수 있다. 그 길로 가다보면 '명동성당 지름길' 이라며 간단한 안내 표시도 나온다.
서울에 체류하는 영어권 외국인 신자들을 위한 영어 미사도 거행한다. 영어 미사는 주일 오전 9시에 대성당에서 봉헌된다.
성당이 있는 명동 언덕은 한국 천주교에서 상당히 중요한 곳으로,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 토마스의 집이 있던 곳으로 '명례방'이라 불렸던 곳이다. 이곳은 한국에서 처음 천주교 예식이 거행된 장소이기도 하다.
김범우 토마스는 자신의 집에서 이승훈 베드로, 정약전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고 자체적으로 공소예절을 드렸다. 포도청 당국이 이를 적발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명문가 자제라서 적당히 훈방 조치했지만, 김범우는 중인 계급이라 고문을 받고 귀양을 가다가 사망했다. 이후 프랑스와의 수교가 체결된 해인 1886년부터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고 나서 새로 성당을 짓기 시작한 것이 이 명동성당이다.
건축 당시에도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조정에서는 "명동성당의 언덕 아래에 왕실의 어진을 모시는 영희전(永禧殿)이 있어서 풍수상 곤란하다"며 반대해서 건축이 지연되었다. 또한 성당을 짓는 실무 기술자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왔는데,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이 기술자들이 중국으로 귀국해버려서 지연되는 일도 있었다.
위의 영희전 문제로 지연된 것에 대한 야사가 하나 있다. 성당 건설의 총책임자인 파리 외방전교회 외젠 코스트(Eugene Coste) 신부가 해결을 위해 조정과 담판을 벌이면서, 영희전 뒤에 건물을 지으면 안 된다는 명문화된 근거를 요구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해당 조항이 있는 문건을 제시했다. 그런데 코스트 신부는 문건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영희전의 제사를 지내는 방법을 적은 부분과 건축 금지 조항을 적은 부분의 쓴 먹의 흔적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금지 조항의 글씨에 침을 발라 문지르자 글씨가 번졌다. 조정 측이 고의로 글자를 덧붙여서 조작한게 들통난 것. 그럼에도 조정에선 뜻을 굽히지 않아서, 프랑스 공사가 직접 교섭한 끝에야 건립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한국에 있는 고딕식 성당으로는 가장 큰 규모다. 본당의 높이는 23m, 탑의 최고 높이는 45m다. 중림동 약현성당을 설계한 코스트(Coste) 신부가 후에 명동성당을 설계하였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재정지원을 받아 1898년에 완성하였다. 구조적, 양식적으로 약현성당과 유사한 편. 약현성당에 대한 이해 벽돌로 쌓은 교회이기도 하다. 20여종의 벽돌과 붉은색, 회색을 섞어 지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각종 민간 쇠붙이 생필품이나 철로 등과 마찬가지로 군수품으로 쓴다며 종탑의 종을 공출당할 뻔했고, 6.25 전쟁 때는 성당 전체가 폭격으로 날아갈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1947년과 1973년, 2009년에 보수공사가 있었다.
비교적 고딕 양식에 충실하지만 전형적이라고 하기는 힘든데, 전형적인 고딕 성당과는 조금 다른 점이 보이기 때문이다. 평면 구성은 여느 고딕 성당처럼 십자가의 형상이지만, 십자가의 양 날개 부분인 트란셉트(transcept, 교차랑/익랑)가 짧기 때문에 완전하지는 않다. 엄밀하게 말하면 직사각형에 가까운 셈. 입구를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중앙의 통로에서 천장이 높은 곳은 네이브(nave, 신랑/중랑)라고 하며, 좌우의 낮은 통로는 아일(aisle, 측랑)이라고 하는데, 아일의 폭이 트란셉트에 맞먹는다.
실내 천장에 리브볼트(Ribbed vault)를 사용한 점은 고딕양식에 충실한 점이지만, 전형적인 고딕 성당은 석재로 되어 있는 반면 명동성당의 리브볼트와 종탑 지붕은 하중을 줄이기 위해 목구조로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석재 리브볼트가 기둥을 좌우로 밀어내는 힘을 감당하기 위한 구조물인 플라잉 버트레스(Flying Buttress)가 명동성당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성당이 건설되면서 발생했던 붕괴 사고 때문에 원 설계안보다 기둥이 굵고 작은 창을 가지게 되어, 고딕보다는 그 이전의 육중한 양식인 로마네스크적인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네이버에서 명동성당을 검색하면 어린이 청소년을 담당했던 모 보좌신부가 연관검색어로 뜬다. 그 이유는 이 신부가 신자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한 극강 동안이었기 때문. 강론에서도 본인이 동안이라는 걸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으며, 사진을 올려라!! 심지어는 어떤 외국인 부부는 미사 도중에 이 신부가 지나가는 것을 보더니 "So cute"(...)라고 말한 것을 신부 본인이 강론 중에 직접 언급하며, 본격 '글로벌 귀요미'에 등극했다고 자화자찬하였다.
하지만 2012년 인사발령에 따라 이 신부는 명동성당을 떠났다. 한 술 더 떠서 다른 성당에 계시다가 아예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기 때문에 이제는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다.
근처에 버스정류장이 하나 있는데 랜드마크로서의 상징성도 더 높지만 그 정류장을 코앞에 끼고 있는 중앙극장에게 그 정류소 명칭을 내주었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극장 문서 참조.
토요일 저녁 6시, 7시 미사는 주일 미사로 진행된다. 이 중 7시 미사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사용한다. 원래 라틴어 미사였는데 미사를 집전하시던 신부님이 다른 곳으로 가는 바람에 미사를 드릴 수가 없어서 이렇게 바뀌었다.
한국 최초의 본당인 만큼 사실상 속인적 본당으로 간주되어 신자들의 거주지와 상관없이 교적이 2만 개 넘게 소속되어 있으며, 1년에 한두 번 정도 모집하는 평범한 본당들과 달리, 2월과 8월을 제외하면 매월 예비신자 교리반을 모집한다. 사실 예비신자 교리반 이수는 꼭 거주지 관할 본당이 아니어도 큰 문제가 없긴 하다. 영세 받고나서 주소지 관할 본당으로 교적을 옮기면 되니까. 천주교 군종교구 신병교육대 성당 급의 영세율을 나타낸다. 그리고 견진성사 교리반도 1년에 2회(상반기, 하반기) 모집한다.
• 대성전이 사제서품식도 하지 못할 정도로 매우 협소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제 서품자가 최소 수십 명이라 손님을 모실 곳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대교구 사제서품은 대부분 잠실실내체육관, 올림픽공원에서 열린다(…) 그래서 2011년부터 총 4단계에 걸친 대대적인 종합개선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중. 주교 1명 서품이나 수도회 서품식은 가끔 명동성당에서 열린다.
• 현재 장궤틀이 없다. 참고로 장궤란 무릎을 꿇는 예절이고, 미사 중에는 거양성체 등 성찬 전례 때 행한다. 다른 나라 천주교회들과는 달리, 유독 한국 천주교는 새로 짓는 성당은 물론이고 기존 성당에 있던 장궤틀도 없애고 있는 추세다. 신자 수에 비해서 성당 규모가 작다 보니, 좌석 수를 늘리기 위해 많은 면적을 차지하는 장궤틀을 아예 없애 버린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사실 현재 많은 한국인 가톨릭 신자들은 장궤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 새로 짓는 성당에는 아예 장궤틀이 없는 경우가 많고, 상징적으로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성당에 장궤틀이 없다는 점에서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중림동 성당이나 혜화동 성당처럼 장궤틀을 뜯어내지 않고 계속 사용하는 곳도 있고, 이문동 성당처럼 새로 지으면서 장궤틀을 갖추는 곳도 있다.
명동성당에 있는 성물방은 가톨릭출판사 및 기타 업체에서 관리하고 있다. 대성당 옆 건물에 있는 성물방 하나와 가톨릭회관 1층에 있는 성물방 하나는 가톨릭출판사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나머지 성물방들은 기타 업체, 출판사에서 운영하고 있다. 미사 직후에 잠깐 성당 평신도 봉사자들이 운영하는 평범한 동네 성당 성물방과 다르게, 이쪽은 별도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카드 결제 가능.
6. 주변 시설
6.1.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서울관구 본원
성당 뒤편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서울관구 본원이 있다. 1696년 프랑스에서 루이 쇼베 신부에 의해 창설되어 1888년 한국에 진출한 수도회로, 한국 가톨릭에서 (남녀 수도회 통틀어) 제일 오래된 수도회이다. 프랑스인 수녀 2명과 중국인 수련수녀 2명이 입국하여, 오늘날의 거대한 수도회로 성장했다.
당연히 한국 최초의 수녀를 배출해 낸 수도회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박황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수녀, 김해겸 마리아 쌘뽈 수녀이다. 원래 최초로 수녀원에 입회한 소녀들은 5명이었으나, 3명은 병으로 일찍 죽었다.
오늘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한국 가톨릭에서 제일 큰 규모의 수도회로, 2개의 관구(서울관구, 대구관구)에 1,000여 명의 수녀들이 있다. 본당, 교육, 병원, 사회복지 등등 다양한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으며, 명동성당의 수녀들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이다.
6.2. 옛 계성초등학교, 계성여자고등학교
성당 뒤편에 계성초등학교, 오른쪽에 계성여자중학교와 계성여자고등학교가 있었다. 교문이며 건물이 주변 건물과 비슷하게 생겨서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 보호색 학교법인 가톨릭학원 소속으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서울관구에서 위탁운영하는 학교들이다. (교장이 수녀이고, 교사들 중에도 수녀들이 있다.) 이 가운데 계성여자중학교는 1980년대에 폐교되었다.
계성여자고등학교는 축제날과 졸업식날, 1년에 2번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특히, 축제날에는 본격적인 축제 시작 전 아침에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이 미사가 끝나면 교내 시상식이 있었다. 신성한 명동성당에서 와글와글 떠드는 여고생들과, 그녀들을 진압하기 위한 고함소리가 난무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하지만 도심 공동화 문제로 학생 수가 급감하는 문제가 발생해서, 2016학년도부터 성북구 길음동 길음뉴타운으로 계성여자고등학교를 이전했다. 이전 후에는 남녀공학으로 바뀌었으며, 교명도 계성고등학교로 변경되었다. 그 때문에 명동성당에서 하는 졸업식은 1997년생을 끝으로 영영 없어졌다.
계성초등학교는, 2006년 2월 서울 최고 부촌 중 한 곳인 서초구 반포동 신반포역 인근으로 이전했다. 이전 후 숭의초등학교, 영훈초등학교나 근처의 서울교육대학교부설초등학교처럼 상당히 선호도 높은 초등학교로 변모했으나, 촌지 사건 등 여러모로 뒤숭숭해진 듯.
계성여자고등학교도 기존의 아가씨 학교(?) 이미지를 잃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많다. 학교가 이전한 지금, 건물은 비워져 있으며, 명동성당 3단계 개발사업 때 리모델링 후 천주교 서울대교구 업무시설로 쓰일 예정으로 있다.
6.3. 가톨릭회관(옛 명동성모병원)
명동성당 입구 쪽에 자리잡은 가톨릭회관은, 원래 여의도성모병원의 전신인 명동성모병원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강남성모병원이 서울성모병원으로 엄청난 규모로 확장하기 전에는 그냥 성모병원으로 불렸으며, 가톨릭중앙의료원(CMC)의 모태가 되는 병원이였다. 1986년에 여의도로 이사를 갔고, 이후 병원 건물은 가톨릭회관으로 리모델링 되었다.
회관에는 각종 가톨릭 단체들이 입주해 있고, 우리 농산물을 판매하는 가게도 있다. 1층과 2층에는 성물 및 신앙서적들을 판매하는 곳도 정말 많으며,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성물점도 많다. 베네딕토회, 예수의 성모 수녀회, 스승 예수의 제자 수녀회에서 성물점을 운영하고 있다.
동네 성당 성물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 뿐 아니라 성작, 성반, 성합, 성광, 감실 등도 있다. 또한 사제들이 입는 제의, 수단, 클러지 셔츠 등도 판매하고 있다. 다만, 당연히, 일반인이 옷가게에서 옷 사듯이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구입할 수는 없다. 그 외에 바오로 딸 서원도 있고, 까말돌리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전통 약방도 있다.
까말돌리 수도회의 약방에서는 일반 약국과 같은 의약품을 파는 건 아니고, 보습제, 영양크림, 핸드크림 등등을 판다. 본래 까말돌리 수도회는 오래 전부터 약초를 이용해 약품, 화장품, 식료품, 와인 등을 만들어 환자를 돌보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등의 일을 해왔다. 시중에서도 '유럽 수도자들이 만든 까말돌리 화장품' 등의 문구로 광고하며 화장품을 파는데, 까말돌리 수도회와 관련이 있는 업체인지는 의문. 위의 관련 기사를 읽어보니, 까말돌리 수도회와 관련 없는 업체에서 까말돌리 화장품을 멋대로 파는 듯하다.
우연인지 재미있게도, 까말돌리 수도회와 한국 천주교 사이에는 인연이 있다. 1831년 9월 9일 조선을 북경교구에서 분리시켜 조선대목구(現 천주교 서울대교구)를 설정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까말돌리 수도회 수사 출신이라는 것.
7. 명동성당 개발계획
정확한 명칭은 명동성당 특별계획구역 세부개발계획. 명동성당을 비롯하여 종교, 역사, 문화, 건축적으로 의미 있는 건축물들이 밀집한 이 지역을 체계적으로 재단장해, 명동 관광특구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추진하는 사업이다. 이 계획은 2029년까지 20년간 총 4단계로 진행되게 되어있다.
2015년 1월까지 진행되었었던 1단계 사업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업무공간으로 활용되는 교구청 신관이 지하4층~지상10층으로 증축되었고, 초기 명동성당의 경사로가 복원되었으며 주차장 등으로 쓰이던 상당 진입부가 광장으로 조성되었고, 대신 교구청 신관 지하에 주차공간이 새로 만들어졌다. 그로 인해 차량으로 인해 혼잡해보이던 명동성당 진입부 부분이 상당히 깔끔하게 바뀌었다. 암튼 공사 전 우려했던 것에 비해 반응은 좋은 편으로, 교구 사무 공간이 증축되고 지하 상가가 새로 생겼다. 사실 상가라고는 하나 내부가 광장처럼 넓고, 서점과 카페 위주로 입점하여 고즈넉한 분위기이다.
그러나 1단계 공사가 진행되면서 역시나 이런저런 문제점이 발생했는데 이에 대해 시공사인 대우건설에서 서울대교구와 협의없이 공사 진행의 편의를 위해 진행하다 생긴 문제라며 사과를 하기도 했다.
현재는 2단계 사업단계로 교구청 신관이전으로 여유공간이 생긴 교구청 별관 수선이 이뤄지고 있으며 3단계는 계성여자고등학교의 이전으로 생긴 빈 공간에 교구 업무타운 조성과 대강당 증축 등이 추진된다. 마지막 4단계는 60년대 지어진 가톨릭회관 하부 일부를 수선하고 교육관을 철거하게 된다. 그 이후 선교센터를 구축하고 수선한 가톨릭회관 하부 필로티에 쌈지공원이 생길 예정으로 있다.
7.2. 비판과 견해
• 명동성당 재개발 공사로 변화된 양상에 대해 "관광객들, 젊은이들 사진 찍고, 커피 마시고, 벤치에 앉아서 데이트하기 좋은 그런 곳이 되버렸다. 이게 신성함과 경건함을 추구하는 성당으로서 바람직한 모습일까?"와 같은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천주교 신자들도 많은 편.
• 명동성당의 상가 조성은 명동 지역의 유난히 높은 땅값과 임대료에 대해 호시탐탐 눈독을 들였던 교구 고위성직자들의 염치없는 돈 욕심에 의한 큰 착오와 실수로, 이러한 상업 시설의 설치로 인해 명동성당의 '성지' 라는 정체성은 이제 표면상에만 남은 것일 뿐 실상 관광지로 전락해버린 결과를 낳고 말았다는 의견도 있다. 극단적인 의견으로는 성지를 팔아 돈을 버는 추악한 짓이라는 의견도 있다.
• 재개발 공사 완료 이후 명동성당만 세속적으로 변한 게 아니라 사목 내용도 변하고 있다고 한다. 복음 전파는 뒷전이고 본격적으로 문화 예술을 전파하겠다며 허구헌 날 음악회를 열어대고 행사를 치르는 바람에, 정작 진지하게 신앙 생활하는 신자들은 발걸음을 돌리고 있다.
8.1. 1995년 한국통신 파업 사태
사상 최초로 명동성당에 경찰이 진입해 한국통신 노조원들을 체포한 사건이다. '민주화'로 정권을 얻은 김영삼 정권이 전두환도 진입하지 못하던 명동성당에 진입한 셈이다. 이후 2000년에도 명동성당 농성은 경찰이 진입해 해산됨으로서 명동성당은 농성장소로 사용되는 빈도가 줄어들게 된다.
8.2. 명동성당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 사건
명동성당에서 다년간 근무했던 비정규직 청소노동자와 경비원들 수 명을 일방적으로 해고했다가 언론에 떡하니 보도되어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
비정규직 고용불안이 사회의 주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가운데 사회적 약자를 돌본다고 표방하는 종교기관의 이중적인 모습은 세간에 의아함과 더불어 실망감을 안겼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돌보는 곳이 성당이라면서요. 엄동설한에 왜 해고하는 지 설명도 없이 쫓아낼 수가 있어요? 용역업체 소속이었지만 명동성당에서 일한 거잖아요. 그런데 한 마디 사과도 없이…양의 탈을 쓴 늑대 같아요.” (명동성당 전 경비노동자)”
이 노동자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바로 근처에 머물고 있는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에게 선처를 호소하는 서신을 보냈으나 만나주긴커녕 아무런 답변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뚜렷한 이유 없이 짤린 것도 억울한데 편지마저 씹히다니… 정말 서러운 경우다.)
교구 성직자들은 강론 등의 메시지에서 대화의 필요성과 소통의 중요성을 자주 강조하고 역설하지만, 이처럼 분명히 듣고도 대답이 아닌 회피하고 함구하는 경우가 많다. 조금이라도 불편한 상황, 불리한 진술을 요할 때 특히 그렇다.
명동성당 측은 “직접고용으로 고용 주체가 바뀌었기 때문에 새로 직원을 모집한 것”이라며 “기존 경비원들이 해고됐다기 보다 새로운 구직자들에게 기회를 준 것이라고 보면 된다. 무조건 기존 경비원들을 수용해야 할 의무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며 고용절차와 관련하여 발생한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김수환 추기경이라면 해고했을까?"라며 단순 행정상의 문제가 아닌 교회 지도자의 리더십 부재를 문제의 원인으로 꼽는 비평도 제기되었다.
이번 사건은 ‘박애’를 외치는 교회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박해’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으며, 성당 측의 책임회피성 태도는 가난한 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교회가 이윤을 최고 가치로 생각하는 기업처럼 노동자를 대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게 하였다. 기존 노동자들이 교적이 없어서, 교파가 달라서 고용 심사조차 제한된 이 사건은 두 가지 견해로 볼 수있다. 교적이 없다면 가톨릭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려고 시도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것이다. 성당이 세워지고 존재하는 이유가 복음을 전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성사를 거행하기 위함이지 다른 이해득실과 타산에 그 목적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종교에 따른 차이를 두는 것이 뭐가 문제냐는 시각이다. 이러한 문제는 왕왕 벌어지는 일로 미션스쿨과 같은 종교적 목적을 가진 시설에서 종교에 따른 차이를 두는 것은 해당 운영단체에 있어서는 당연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종교적 자유를 요구한다고 보기도 한다.
해고된 청소노동자들의 용역 공백을 메우기 위함인지, 이 일로부터 몇 달 후 명동성당에 <봉사뱅크>가 생겼다. 이 아이디어를 착안하여 도입한 주임신부는 "피정하는 마음으로 한 3시간 정도 잡초를 뽑아보거나, 담배 꽁초 약 스무 개를 주워보거나, 성당을 자기 집처럼 여겨 화장실 휴지를 교체해보라." 는 등의 말로 도입 취지를 설명했다.
최악의 인권 유린 사태인 대구 희망원 사건의 해결과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자 장애계 인사들이 명동성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에게 면담을 요청하였다. 대구 희망원에 대한 대구광역시의 지원 예산이 횡령되어 대구대교구 사목공제회에 불법 비자금으로 빠져나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마당에 이 사태를 대구대교구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라는 것은 공범에게 범죄 수사를 맡기는 것과 다름 없으며 사태의 심각성은 한국 천주교 전체의 신뢰에도 직결되는 것이라 지역교구만의 일로 치부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한국 천주교의 상징적 대표 기관을 방문한 것이다.
그러나 장애계 대책위원회와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과의 면담은 성사되지 못했으며, 대책위원회가 전달하고자 한 '염수정 추기경 면담요청서'마저 전달되지 못하였다. 명동성당 측이 ‘본 성당(명동성당)은 유사 이래 면담요청서를 받은 적이 없다’며 과거에 이런 요청서를 받은 적이 없으므로 앞으로도 받지 않는다는 괴이한 논리의 입장을 표명하며 면담요청서의 접수 자체를 거부한 것이다.
심지어는 경찰 측에 시설보호요청을 하여 수십 명의 경찰력을 동원함으로써 장애인들이 명동성당에 출입하는 것 자체를 원천적으로 막았다. 야간 10시 30분까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하도록 되어있는 명동성당이 장애인들의 출입을 차단한 이런 조치는 비상식적이며 장애인 기본 인권에 대한 침해라는 비판을 야기했다.
대책위원회와 경찰은 명동성당 앞에서 약 20분간 대치하였으나 끝내 대책위원회는 면담요청서를 명동성당 입구에 부착하고, 발길을 돌렸다.
과거의 명동성당은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며 공권력의 침입을 제한하는 치외법권적 성지였으나, 현재의 명동성당은 이처럼 공권력에 의지하여 사회적 약자들의 출입을 제한하는 몰인정한 종교기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8.4. 희망원대책위의 명동성당 미사 기습시위 사건
가톨릭교회에서 37년간 수탁 운영했으며, 2010년 이후로는 6년간 309명의 수용인들이 사망한 최악의 인권 유린 사태 대구 희망원 사건에 대한 적극적인 해결 촉구와 더불어 사건을 은폐하려는 가톨릭교회의 폐쇄적 동향에 대해 규탄하는 기습시위가 명동성당의 미사 집전 중에 발생하여 파장을 일으켰다. 이 날 미사는 ‘프란치스코 교황 선출 기념 미사’로,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광주대교구)와 주한 교황대사를 중심으로 각 교구의 주교들이 한 데 모인 자리였다.
시위를 벌인 '희망원대책위'는 그간 수차례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타대오 주교와의 면담을 요청하였고 한국 천주교의 수장 격인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에게도 면담을 요청하였으며 주한 교황청대사관에도 서신을 보냈음에도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하자 이 같은 시위를 계획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설에서 죽어나갔습니다. 사람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천주교 재단이 운영하는 시설이었습니다. 천주교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동안 30번이 넘게 성명을 내고 15번이 넘게 기자회견을 하면서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외면합니까. 세상이 떠들썩했고, 천주교가 모르지 않을 것 아닙니까. 신부가 구속됐습니다. 책임감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면담요청서 하나 전달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가. 희망원 사건 터진 지 8개월이 지났지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대구대교구가 37년간 시설을 운영했다. 이건 대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천주교 전체의 문제이며 교단 전체의 반성이 필요한 문제다. 명동성당이 이래선 안 된다"
한국 천주교의 본산인 명동성당에서 미사 집전 중에 교회의 부조리한 행태를 질타하는 기습시위가 발생한 것만으로도 교계에 경종을 울릴 사안이나 시위를 진압·수습하는 과정에서 보인 성당 측의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대처 방식은 자비와 이웃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는 교회의 가르침에서 크게 엇나간 모습으로 부각되어 교회를 향한 대내외적 신뢰의 실추와 함께 참종교적 모습에 대해 의문부호를 남기게 하였다. 또한 불우한 이웃의 구제를 위한 ‘대화’를 원했으나, 성당에서 쫓겨나는 인권운동가들의 모습은 오늘날 교회가 이 사회에 남긴 또 하나의 상처가 되었다.
반면 이러한 기습시위에 대해 "뜻은 이해하겠는데, 거룩한 미사 중에 저렇게 하는 것은 방법론 측면에서 옳은 것이 아니었다"는 일각의 비판도 있다. 장례식등방해죄로 시위자 전원이 입건될 수 있는 사안이며 속세의 관점에서 봐도 엄연히 업무방해에 해당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국민의당 전국장애인위원회 정중규 베네딕토 위원장은 이를 두고 "사회의 기준도 못 따라가는 교회의 행태" 라 지적하며 개인 칼럼을 통해 "희망원 사태를 대구대교구의 개별 문제로 몰아가려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태도는 가톨릭 교계제도의 특성을 고려할지라도 비난 받아 마땅하다."고 밝혔다.
"예수의 주변은 늘 장애인들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명동성당은 찾아오는 장애인들조차 쫓아버렸다."
8.5. 명동성당 가톨릭 합창단 지휘자 성희롱 발언 사건
명동성당의 합창단 지휘자가 일반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적 비하 발언이 논란이 되어 성당 안팎으로 파장을 일으켰다.
합창 연습 중 평소에도 목소리를 예쁘게 낼 것을 요구하면서 “요즘은 술집에 나가는 여자들이 말투도 예쁘고 훨씬 고상한 것 같다. 반대로 술집 밖에 돌아다니는 일반 여성들은 훨씬 술집 여자 같다.”는 이분법적 폄하발언과 자신이 평소 성가대 지휘자 신분으로 접대 차 술집에 자주 다닌다고 자랑스럽게 밝힌 게 화근이었다.
공식석상에서의 발언으로는 적절하지 못함을 인지한 어느 합창단원이 지휘자에게 장문의 메일을 작성하여 주의해줄 것을 정중히 요청하였으나 지휘자가 “할 말 없어요.” 라고 단답하며 무시하자 사태가 커지게 되었다.
논란이 일자 합창단 지도신부가 해당 합창단원과 세 차례 면담을 하게 되었는데 지휘자에게 구두경고하겠다고 하면서도 당사자의 성적 수치심 등 정신적 피해에 대한 상담이나 위로는 없이 개인적인 발언을 전체적인 문제로 삼는 절차가 적절하지 못하였다고 거듭 질책하였고 공동체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몰아 합창단원에게 처분이 있을 것이며 납득하지 못하겠으면 그만두라고 으름장을 놓는 등 지도신부로서 사건의 공정한 중재와 갈등의 올바른 조정이 아닌 피해자의 입장만 억압한 결과를 도출하였고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는 데에 기여하였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지휘자는 해당 발언에 대해 실력향상을 위해 비유적인 예를 든 것이라고 반박하였고 사제의 권고를 받고 "소리를 이해시키려고 예를 들었던 말이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에 마음 상한 분들께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공식적으로 사과하였음을 언론사 인터뷰에서 밝혔다.
언론 보도를 통해 외부에도 알려지게 되자 지휘자 개인의 처신뿐만 아니라 종교적 비판으로도 확산되었는데 이에 합창단 지도신부가 내부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문제를 외부에 알려 물의를 일으켰다는 책임을 물어 문제를 제보한 합창단원을 강제휴단 조치하고 규정상 복단하기 어렵게 만들어(사실상 추방) 더 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지휘자 유임 보도 가해자는 남고 고발자는 쫒겨나고 유임된 지휘자에 대해서는 어떤 페널티가 주어졌는지 언론사에서 물었으나 합창단 지도신부는 "내부 일을 말씀드릴 이유가 없다."고 일축하였다.
논란이 한층 더 커지자 명동성당은 지휘자의 처분에 대해 재평가를 실시하였는데 한 달 정도의 기간동안 검토 후 이전과 같이 유임으로 결론지었다.
전·현직 합창단원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 및 후속 취재 내용에 따르면 합창단 내부적으로는 지휘자가 그만두는 방향으로 잠정 결정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주임신부가 결정을 뒤집어 지휘자가 유임되도록 하였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평소 지휘자가 주임신부의 비위를 잘 맞추며 꼬리를 잘 치고 온갖 감언이설과 권모술수로 사제의 마음에 들게 행동한 것이 유임 결정에 주요한 영향으로 작용한 것 같다.'는 증언이 나오며 전형적인 제 식구 감싸기식 인사 결정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