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부경수필 수요반 박순범
인생을 흔히 항해에 비유한다. 살아가노라면 태풍도 만나고 때로는 순풍도 만난다. 부모를 잘 만나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사람들은 신작로, 고속도로 같은 평탄한 인생길을 살아간다. 지도에도 없는 길을 걸어가야 했던 나 같은 사람은 출발도 늦고, 구불구불, 울퉁불퉁, 들쭉날쭉한 길을 빙빙 둘러가게 마련이다. 가다가 길이 아니라서 되돌아오기도 하다보면 피곤하고 부질없이 시간만 낭비하게 된다.
사람들은 제 각기 타고난 길이 있다. 새벽길을 나서야 먹고 사는 사람도 있고, 밤길을 걸어야 입에 겨우 풀칠을 하는 사람도 있다. 숯을 굽어서 먹고 사는 사람은 산길을 걸어야하고, 물길을 잘 알아야 물고기를 잡아 생업을 이어간다. 발길 가는 데로 정처 없이 걷는 나그네 길, 천리도 멀다 않고 임 찾아 가는 길, 세상풍파에 시달리다 못해 자포자기 하고 엎어지고 넘어지며 무작정 달려가는 눈길이나 빙판 길, 물정모르고 허장성세하면서 방향을 잃고 헤매는 사람의 꿈길도 있다.
내 사주팔자에는 온통 “길”로 칠갑이 되어 있는 듯하다. 어릴 때부터 길하고는 이골이 나 있었다. 내 고향은 6.25전쟁 직후 양민학살 사건이 일어난 거창군 신원면 덕산 청연마을이다. 첩첩산골이다. 내 나이 만 6세 4개월이 되던,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해발 약 1000 미터나 되는 감악산을 넘어 면 소재지의 신원초등학교를 다녔다. 누나 둘, 같은 마을에 사는 집안 형들과 함께 새벽 같이 집을 나가 가파른 산을 넘어 학교에 갔다가 수업이 끝나면 그 산을 다시 넘어 돌아왔다.
1학년은 수업이 일찍 끝난다. 귀가 길에는 늘 누나 둘과 나 셋뿐이었다. 산을 오르다가 헐레벌떡 숨이 차고 목이 마르면 돌무더기 사이에 흐르는 물을 망개나무 잎으로 떠 마셨다. 안개 자욱한 산 정상에서 가끔 산짐승을 만나 기겁초풍을 하는 때도 있었다. 기진맥진해서 바위에 걸터앉기를 몇 번이나 반복해야 집에 닿는다. 해방이 되기까지 4개월 동안 나는 한 마리 산토끼가 되어 사람 하나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길, 험준한 산길을 걸어야 했다.
유년시절 우리 집안은 끼니걱정은 안하고 살았지마는 그렇게 넉넉하지는 못했다. 나에 대한 선친의 교육열 하나만은 대단했다. 학교에 갔다 오면 파김치가 되는 나를 보고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박가 집성촌의 종손이기도 한 선친은 나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 온 종중어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전옥답을 헐값에 팔아버리고 서둘러 거창읍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새로 이사 온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 십리 길, 왕복 이십 리다. 산악등반에 숙달 된 나에게는 평탄한 신작로는 아무리 멀어도 새 발의 피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면서 공을 차기도 하고, 고무신을 하늘로 쳐 올리기도 했다. 고무신이 땅에 떨어질 때, 바로 놓이느냐, 엎어지느냐에 따라, 우리 집 솥 안에 들어있는 점심이 밥이냐, 감자냐, 하는 하루의 일진을 점치기도 하면서, 초중고등학교 시절 절반을 길에서 보냈다.
교사로 근무할 때도 학교가 시골벽지라서 하루에 사십 리, 오십 리를 걸어 다니는 것은 예사였다. 그 당시에는 버스가 다니기는 했어도 하루에 한두 번 정도 왕복을 했고, 버스는 시도 때도 없이 고장이 났다. 버스를 믿다가는 지각하기 일 수라서 엔간하면 걸어 다녔다. 차를 타느니 차라리 걸어다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출근길은 걷는 날이 많았고, 퇴근길도 그랬다. 새벽별 보고 출근을 했고, 달밤에 집에 도착하곤 했다.
군에 입대하면서부터 나와 길과의 인연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내가 복무하던 1107야전공병단은 강원도 원주에서 춘천까지, 춘천에서 경기도 마석까지 도로 아스팔트 포장공사를 담당하고 있었다. 먼저 도로 폭을 왕복 2차선으로 넓힌다. 높은 길은 절토를 하고 낮은 길은 성토를 한다. 암벽이 있으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를 한다. 다음은 도로에 자갈과 모래를 깔고 로라로 다진다. 그 위에 다시 아스팔트포장을 하게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도로 여러 구간에서 동시에 진행이 된다.
내가 작업 소대장이다. 군 노가다 십장이나 마찬가지다. 쓰리코트를 타고 수십 리에 걸쳐있는 도로 작업장을 하루에도 몇 번씩 다녀와 했다. 원주서 춘천 까지는, 차를 타고서 눈을 감고 있어도 내가 지금 어느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는지 훤하게 알았다. 도로의 구배나 도로의 회전반경 확정작업에 모두 내가 참여했기 때문이다.
내 얼굴은 햇볕에 검게 타서 구리 빛으로 변했고, 군 작업복은 온통 도로의 먼지로 범벅이 되었다. 뿌옇게 묻어 있는 작업복 먼지를 지휘봉으로 툴툴 털고, 늘 쓰고 다니던 라이방을 벗어야 일과가 종결 된다. 나의 하루는 신작로 길 위에서 시작해서 아스팔트 길 위에서 끝이 났다. 1961년부터 1964년 까지 4년을 하루같이 길 위에서 살았다. 나의 길은 험준한 산길에서부터 시작해서 탁 터진 아스팔트길 까지 고난도의 강행군 길이었다.
사람과 차들이 오가는 공간적인 길만을 어찌 길이라 하겠는가. 그 보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 지켜야 할 도리 역시 길임에 틀림이 없다. 인생길이 오히려 더 중요한 길이 아닐까. 나의 선고께서는 뇌졸중으로 1년간 고생하시다 94세에 돌아가셨다, 선비께서도 100세에 세상을 뜨셨다. 여형제들은 기동을 못하시는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자고 했어나 10년 동안 집에서 간병을 했다.
우리 집 사람과 내가 효부효자는 아니지마는 자식으로서의 기본적인 도리는 다 한 셈이다. 힘들기는 했어도 마음은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지금 생각하면 참 잘했다 싶다. 나는 5년간은 현역, 25년간은 예비역으로 국방의 의무도 다 했고, 56년간 지금까지 10원도 탈세하지 않고 세금도 꼬빡꼬빡 내고 있으니 국가에 대한 도리도 다 하고 있는 셈이다.
아직도 남아있는, 못 다한 도리가 있기는 하다. 남편 된 도리, 부모 된 도리, 친구 된 도리, 사람 된 도리다. 오늘날까지 나에게 주어진 험하고 좁은 길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왔듯이 앞으로도 이런 걸음걸이로 뚜벅뚜벅 내 길의 마지막 부분을 걸어가고 싶다. 마지막 길이 좋으면 지나온 길은 다 아름답다.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얼마나 남았을까. 나의 길가에 코스모스나 활짝 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