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 종사 십상(十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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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하늘을 우러러 기원하신 앙천기원상(仰天祈願相)
11세부터 사서를 공부하며 ‘대장부 세상에 나서 창생에게 유익을 주고 천하를 구원하는 큰 인물이 되어 보리라.’며 큰 원을 발하였던 정산종사는 14~5세 때 “해붕천리고상우(海鵬千里翶翔羽) 농학십년칩울신(籠鶴十年蟄鬱身)”의 시를 지었다. 이 시를 본 빙부(聘父) 여병규는 “아마도 자네는 나가서 큰 일 할 사람이지 집안 살림은 못하겠네.”하면서 칭찬 반 걱정 반의 표정이었다.
그 후 정산종사는 가슴에 맺혀 있는 우울과, 열릴 듯 열릴 듯하면서도 길이 아득한 이 수많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갈 것인가 하고 궁리한 끝에 옛 사람들처럼 정성껏 기도를 드리기로 작정하였다.
집 뒤 개울가에 크지는 않으나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15세 되던 해 겨울부터 그 앞에 작은 단을 차리고 거북의 목 부분 및 패인 자리에 촛불을 켜고 제물과 정화수를 올린 후 “송도군이 후일에 위대한 사업을 이뤄서 명전백세(珷百世)하게 하여 주시옵소서.”하고 하늘에 비는 기도를 쉬지 않고 여러 해를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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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스승을 찾아 이루신 심사해원상(尋師解願相)
정산종사는 18세 되던 해 처가족 중에 여처사(呂處士)라는 분이 가야산에서 수십 년간 수도하여 육정육갑(六丁六甲)을 부리는 도인이라는 말을 듣고 마음에 기뻐 만날 것을 결심하고 가야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가야산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정산종사는 그 곳에서 치성중인 증산교 계통의 수도자들의 상도(上道: 전라도)로 가라는 말을 따라 전라도로 향하게 된다.
전라도로 향한 정산은 증산교의 가르침을 받고자 증산의 사모님 즉 고씨부인(高氏夫人)을 만나고자 하였다. 하지만 당시 증산교단 절차에 따라 그 제자인 차경석(車京石)을 먼저 만나게 되었는데 인연이 아님을 깨닫고 증산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객망리로 향하여 고씨부인의 여동생인 선돌댁을 집으로 모시고 가게 된다. 선돌댁과 함께 올린 6개월여 동안의 치성에도 밝은 길을 찾지 못한 정산종사는 이 치성 기간에 간혹 눈을 감으면 원만한 용모의 큰 스승과 고요한 해변의 뻘땅에 빨간 행자가 있는 풍경이 눈앞에 떠올랐다고 한다.
선돌댁과 다시 전라도행을 결심한 정산종사는 1917년 모악산 대원사로 들어갔다. 대원사는 진묵대사가 지나갔던 곳이고, 증산이 도를 깨달은 성적지이다. 이곳에서 마음공부에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지내던 어느 날 이 절에 한 중년 부인이 찾아왔다. 그는 정읍 화해리에 사는 김해운 이었다.
김해운의 알선으로 정읍 화해리에서 지내시던 정산종사는 이 시기에 신통을 많이 부렸다 한다. 훗날 정산 종사는 이러한 이적에 대하여 “내가 그 때는 도를 몰랐기 때문에 부질없는 일이 나타났으며, 혹 때로 나도 모르는 가운데 이상한 자취가 있었을 따름이니라.”고 말했다.
그러던 중 1918년 4월 소태산 대종사는(이하 대종사) 제자 김성섭과 함께 만날 사람이 있다며 보행으로 무장·고창·흥덕을 거쳐 170리 거리인 정읍 화해리에 이르렀고, 김해운 집을 찾아 가서 대종사와 정산종사는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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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는 중앙으로 법을 이으신 중앙계법상(中央繼法相)
1918년 7월 대종사의 명을 받든 김성섭은 정산종사를 만나 영광으로 향하였다. 대종사는 정산종사를 옥녀봉 아래에 미리 마련한 토굴 속에 기거케 하고 밤에만 도실에 나와 여덟 단원과 함께 단란한 생활을 하게 하였다.
정산종사는 낮에는 토굴 속에서 그 동안 대종사가 설한 「최초법어」와『법의대전』등을 무수히 읽어 다 외우고 저축조합 문서를 열람하며 대종사와 여덟 단원들이 진행하여 온 자취를 살피고 밤이 되면 대종사를 모시고 여덟 단원들과 함께 공부와 사업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종사는 숙겁의 법연을 맞이하기 위하여 3년을 기다리며 중앙을 비워놨다가 정산종사를 앉히고 아심여심(我心汝心) 여심아심(汝心我心)이며 이젠 우리 회상의 일은 끝났다 하고 만대 정법을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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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는 봉래에서 교법제정을 도우신 봉래조법상(蓬萊助法相)
대종사의 명을 받들어 봉래산 월명암에 찾아간 정산종사는 백학명스님의 상좌로 들어가 도리를 다하면서 앞으로 대종사가 들어와 진행할 여러 가지 분야에 대해 깊이 연구하였다. 그러나 ‘불경은 보지 말라’고 한 대종사의 말에 경상까지도 외면하고 보지 않았다.
1919년 대종사는 봉래산에 들어와 실상사 옆에 석두암을 짓고 첫 살림을 시작하게 되는데 대종사는 아래 초당에 있고 정산종사는 위의 월명암에 머물면서 스승님을 뵙고 싶고 연구한 바를 보고도 드릴 겸 4㎞거리를 2년 동안 일주일이나 열흘 간격으로 밤중에 험한 길을 내리고 올랐다.
이 시기 대종사는 교법의 초안을 제정하여 1920년 새 회상의 교강을 발표하게 되었으니 정산 종사는 제법(製法) 하는 대종사를 도와드리는 상수(上首) 역할을 한 것이었다.
다섯째는 초기교단의 교화 인연을 맺어 주신 초도교화상(初度敎化相)
1922년 대종사는 정산종사에게 어디든 발걸음 내키는 대로 가보라고 하였다. 하지만 가다가 전주는 들르지 말고 가라고 한 말에 정산종사는 전주 방향은 돌아보지도 않고 갔다. 그렇게 가던 중 정산종사는 한 스님을 만나 길동무를 하게 되었고 그 스님과 함께 도착한 곳이 진안 만덕산이었다.
이 만덕산에서 정산종사는 최도화를 만나게 되는데 이 한 인연으로 인해 최도화는 박사시화, 전삼삼, 노덕송옥, 이청춘, 성성원, 등을 인도하게 되고, 박사시화는 아우 박공명선, 이동진화 등을 인도하였으며, 전삼삼은 아들 전음광 등, 노덕송옥은 손자 김대거 등, 성성원은 신정의 등, 박공명선은 이공주 등, 정형섭은 아들 박장식, 딸 박효진 등을 인도하게 되었다.
만덕산에서 정산종사가 연원을 단 하나의 법등이 진안·전주·서울·남원 ·진양 등지에 바로 연하여 밝혀지게 되었는데 이 인물들은 그 지역의 교세 발전은 물론 교단의 뿌리가 되는 방언 공사 때의 부채정리, 봉래정서 건축, 영광 구간도실 이축, 총부 건설 등에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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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는 개벽시대 주세불의 법을 이으신 개벽계성상(開闢繼聖相)
1943년 6월 1일 열반에 든 대종사의 장례 행사를 마치고 6월 7일 총부에서 열린 중긴 간부 회의에서 후계 종법사 선정에 관한 의논이 있었다. 이 때 박장식의 발의로 수위단 중앙단원인 정산종사를 종법사로 추대하고 전 참석자가 찬동하여 정산종사를 후계 종법사로 봉대할 것을 가결하였다.
종법사위에 올라 대종사를 새 세상의 주세불로 높이 받드셨고, 한 게(偈)를 읊으니 “불보살은 함 없음에 근원하여 함 있음을 이루게 되고, 상 없는 자리에서 오롯한 상을 얻게 되며, 나를 잊은 자리에서 참된 나를 나타내고, 공을 위하는 데서 도리어 자기를 이루시나니라” 하고, 「有爲爲無爲 無相相固全 忘我眞我現 爲公反自成」이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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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는 전란 중에도 교단을 쉼없이 이끌어 주신 전란불휴상(戰亂不休相)
8·15 광복과 한국전쟁 등의 혼란한 시기 속에서도 재가·출가 전 교도의 희생 없이 무사히 회상을 이끌었다. 1945년부터 한국 전쟁이 끝났던 1953년까지 교단에서 행한 일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45년 - 전재동포 구호사업, 『건국론』 발간, 한글 보급 운동.
1946년 - 금강단 창립, 『금강 발행』, 유일학림 설립, 서울 보화원 설립, 서울 출장소 설립, 서울수도원, 서울교당, 동산수도원, 부산교당 불하받음.
1947년 - 교명 ‘원불교’ 선포.
1948년 - 재단법인 원불교 등록, 교헌 제정 반포, 전주 양로원 개원.
1949년 - 대종사 성탑 봉건, 원광사 설립, 기관지 『원광』발행.
1950년 - 금산 요양원 설립.
1951년 - 익산 보화원 설립, 원광중학교 설립, 원광대학교 설립.
1952년 - 신용 양로원 설립, 『예전』발간, 도양고등공민학교 설립.
1953년 - 제1대 성업봉찬대회 주재, 종법사 중임, 이리보육원 인수, 대종사 성비 건립, 고등선원 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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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째는 교서를 정비하신 교서정비상(敎書整備相)
정산종사는 회상을 이끌어 오며 원불교의 교서를 정비하게 되었는데 9대 교서 중 대종경과 정산종사법어, 세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교서 전반을 친감하여 준비하게 되었다. 이 때 정비된 교서는 『정전』,『대종경』,『불조요경』,『예전』,『세전』,『법어』,『원불교 교사』,『성가』,『교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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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째는 9년 동안의 큰 병환 중에도 자비로 제중하신 치병제중상(治病濟衆相)
정산종사가 1962년 열반에 들 때는 벌써 9년 대병(大病)의 내우외환을 겪고 있을 시기였다. 하지만 정산종사는 대종사의 일원대도를 시방세계에 전력하려는 원력은 더욱 컸고, 그 정성과 적공은 주소일념 뿐이니 마음 한 번 가라앉고 이마 한 번 찡그린 바가 없어 그 성자와 그 성심의 거룩함이 만인이 흠망한 바가 컸다.
또한 그러한 원력은 더욱 큰 자비심으로 발현이 되었다. 당시의 일화를 보면 정산종사는 자신을 위해 산 잉어를 약용으로 가져온 제자가 있었는데 이 잉어를 총부의 못에 놓아주라고 했던 적이 있고, 역시 약용으로 닭을 잡으려는 제자들에게 산 것으로는 약을 하지 말라고 흙을 친 적이 있었다. 정산종사의 자비 경륜이 잘 나타나 있는 법문이 있다. “어항을 치우라, 못에서 마음대로 헤엄침을 보리라. 화병을 치우라, 정원에 피어 있는 그대로를 보리라. 조롱(鳥籠)을 열어 주라, 숲에서 마음대로 날으는 것을 보리라.”
이런 시기에도 원광고등학교 설립, 3대선원 설립, 정관평 재방언 공사, 『대종경』편수위원회 발족, 정화사 설립, 『정전』수정, 『대종경』편수, 『세전』,『성가』,『교사』편찬 추진 등 교단 3대 사업인 교화, 교육, 자선기관을 설립하는 동시에 그 기초를 확립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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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째는 임인년에 열반하신 임인열반상(壬寅涅槃相)
1962년(壬寅年) 1월 24일 오전 9시 30분 정산종사는 열반에 들었다. 전날 게송을 전하였으니, “한 울안 한 이치에 한 집안 한 권속이 한 일터 한 일꾼으로 일원세계 건설하자.”라는 인류의 대 윤리를 제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