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힐링로드 74 금장대
경주 금장대는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찾아 힐링하는 보험 같은 곳이다. 시민들이나 관광객들이 산책을 하거나 크고 작은 문화행사를 열어 즐기고 휴식하는 공간이 되고 있다.
금장대는 형산강 지류인 서천과 북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정자다. 푸른 물결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365일 깊은 전설을 간직한 청소(淸沼) 앞의 작은 산봉우리에 금장대가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글을 읊던 정자로 유명하던 곳이 지금도 경주의 새로운 문화적 공간으로 쓰임새가 크다.
금장대는 뛰어난 주변 절경 때문에 신라시대 3기8괴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날아가는 기러기가 푸른 물과 깎아지른 절벽으로 절경을 펼쳐 반드시 앉았다 간다고 하여 금장낙안(金丈落雁)이라 불렀다.
풍경이 빼어나 옛 신라왕들이 이곳을 즐겨 찾은 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신라 제20대 자비왕 때 을화(乙花)라는 기생이 이곳에서 왕과 연희를 즐기는 도중 실수로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는 예기청소(藝妓淸沼)이기도 하다. 경주 출신 소설가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 배경으로 잘 알려지고 있다.
금장대에는 또 선사시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석장동암각화가 있어 문화유적지로도 지정되었다. 주변에 경주시가 금장대 정자를 복원하고, 생태습지 테마공원을 조성해 인기 있는 쉼터가 되고 있다. 국제펜클럽의 세계한글작가대회, 시낭송, 음악회 등 지역문인들이 크고 작은 문화행사를 개최하는 곳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평상시에는 시민들이 가볍게 산책길에 올라 쉬어가는 쉼터로도 인기다.
◆금장대
조선시대 선비 매계 조위는 금장대에서 ‘험준한 끊어진 벼랑에서 강을 굽어보나니/ 흥이 일어 올라가 저 먼 곳을 바라본다/ 고가는 연이어 이어졌고, 석수는 세워져 있는데,/ 은은한 푸른 산에 금오가 솟구쳐 있네/ 폐한 동산에 연기와 꽃이 어지러이 날리니 마음은 아프고/ 눈 아래 빈 성에는 탑묘만이 높구나/ 천지는 무정하지만, 어제와 같은데/ 인간은 하루살이와 조금도 다름이 없구나’라고 읊었다.
금장대는 조선시대 시인묵객들이 즐겨찾던 정자로 알려지고 있다. 2012년 발굴을 통해 정자를 복원하면서 새로운 문화의 터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금장대는 형산강이 흐르는 강변에 깎아지를 듯 솟은 절벽에 한옥형 정자로 지어졌다. 아름드리 28개의 배흘림식 기둥이 기와지붕을 바치고 서 있고, 2층 누각에 마루가 깔려있다. 마루에 앉으면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고, 동서남북으로 전망이 훤하게 트여 신선이 되는 듯한 기분을 느낄수 있다.
금장대는 예나 지금이나 문화예술인들의 공간으로 힐링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금장대 정자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해 토요일과 주말 오후에는 시민들이 음악회와 시낭송 등의 행사를 주관할 수 있는 문화예술공간으로 기능한다.
금장대에서 열린 첫공연으로 성건동의 풍물놀이에 이어 천년예술단(단장 김성애)의 대금 연주, 성악, 시 낭송, 하모니카 연주 등의 공연이 펼쳐졌다. 금장대 토요음악회는 10월까지 매월 둘째 주 토요일 오후 시민과 함께 대금을 비롯 10여 테마의 공연으로 전개된다.
경주예술의 전당에서 형산강을 건너 금장대를 잇는 다리가 생긴다. 경주시는 2016년 3월 관광명소인 금장대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월령보를 새로 고쳐 짓고 보 유지관리용 다리인 공도교를 만들기로 부산지방국토관리청과 합의했다.
부산국토관리청은 10월께 공사에 들어가 내년 연말까지 45억 원을 들여 월령보를 새로 놓고 공도교를 만든다. 공도교는 길이 239m, 폭 5m로 차는 다닐 수 없고 자전거나 사람만 다닐 수 있다.
‘뒤에 물러 누운 어둑어둑한 산, 앞으로 폭이 넓게 흐르는 검은 강물, 산마루로 들판으로 검은 강물 위로 모두 쏟아져 내릴 듯한 파아란 별들, 바야흐로 숨이 고비에 찬, 이슥한 밤중이다. 강가 모랫벌에 큰 차일을 치고, 차일 속엔 마을 여인들이 자욱이 앉아 무당의 시나위 가락에 취해 있다. 그녀들의 얼굴들은 분명히 슬픈 흥분과 새벽이 가까워 온 듯한 피곤에 젖어 있다. 무당은 바야흐로 청승에 자지러져 뼈도 살도 없는 혼령으로 화한 듯 가벼이 쾌잣자락을 날리며 돌아간다…….’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에 그려진 금장대의 풍경이다. 소설이나 옛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금장대 앞의 넷물은 폭이 넓고 모래사장이 제법 풍성했다. 지금은 강폭이사 제법 넓지만 모래사장은 거의 없어지고 경주시가 조성한 트레킹 로드와 축구장이 잔디로 덮여 있을 뿐이다.
◆금장낙안과 생태습지 산책로
신라시대로부터 경주에는 3가지의 신기한 것과 8가지 괴이한 것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3기로는 금척, 옥적, 화주 또는 성덕대왕신종을 꼽는다. 금척은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하늘의 천신에게서 받은 금으로 만들어진 자다. 금척으로 병든 사람을 재면 병이 낫고 죽은 사람을 재면 살아나는 신비한 자였다. 옥적은 신문왕이 이견대에서 해룡이 나타나 흑옥대를 바친 것이다. 이 피리를 불면 가뭄이나 홍수, 적군들이 쳐들어오거나 병도 모두 해소되었다고 전한다. 화주는 선덕여왕이 가지고 있었던 구슬인데 광선을 비추면 솜에 불이 붙었다고 전한다.
8괴는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남산부석,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는 문천도사, 움이 트면서 붉은 색을 띄는 계림황엽, 금장대 경치가 좋아 날아가던 기러기들이 반드시 내려서 쉬고 가던 금장낙안, 백률사 소나무는 베어도 순이 돋는다는 백률송순, 안압지의 뿌리가 없이 자라는 풀이 자란다는 압지부평, 나원리 오층석탑은 천년이 지나도 순백의 빛깔을 간직한다는 나원백탑, 불국사 다보탑만 비치고 석가탑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는 연못 불국영지 등이다.
3기8괴의 전설 중에 날아가던 기러기가 반드시 내려앉아 쉬어갈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를 가진 금장낙안이 있는 금장대 일원은 지금도 풍경이 좋다. 이러한 풍경을 감상하며 산책할 수 있게 생태습지 사이로 나무데크로 산책로를 조성했다. 산책로는 주차장에서 내려 습지 사이를 걸으면서 다양한 식물들의 생태계를 살펴볼 수 있게 했다. 또 강 건너 경주시가지 풍경과 하늘의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을 감상하기 좋게 길을 내었다. 천년 고목이 된 능수버들이 길게 가지를 늘어뜨린 습지의 풍광은 저절로 시인묵객이 되게 한다. 얕은 물에서 풀쩍 뛰어오르는 고기들의 물장난하는 장면과 소리, 매미소리, 풀벌레 울음, 야생화, 그늘과 단풍 등등이 자연 속으로 젖어들게 한다.
◆금장대 암각화
금장대가 자리한 절벽 중턱 바위에 암각화가 새겨져 있다. 이 암각화는 1994년 동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해서 발견 조사되었다. 경주 안심리와 포항 칠포리에 비해 이곳에서는 방패 모양이라고도 하는 검파형 외에 사람 얼굴, 돌칼, 돌화살촉, 꽃무늬, 도토리, 사람발자국, 짐승, 배 등 30여 점의 매우 다양한 그림이 보인다. 그림은 작은 편에 속하고 쪼아파기, 쪼고 갈아파기 같은 제작기법이 주로 사용되었다.
방패형은 청동기시대 전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이 갖기를 원하는 여성들이 조각한 것으로 보이는 어린아이의 발자국, 수렵 나가기 전 동물이 잘 잡히기를 기원하면서 조각한 꽃 모양의 동물 발자국 등이 있다. 또 청동기시대의 조각기법대로 인물상 속에서 남성은 자신의 성기를 노출시키고 여성은 생식기만 조각되어 있어 다산과 생산물의 풍요를 기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풍화작용으로 희미하게 잘 드러나지 않아 암각화 앞에 설치된 그림판을 봐야 암각화의 그림형태를 겨우 짐작할 수 있다.
암각화는 1994년 경상북도기념물 제9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석조문화재다. 형산강변에 접한 금장대 수직절벽 윗부분에 있는데, 세로 9m, 가로 2m 되는 바위면에 추상적 도상(圖像)으로 음각되었다. 그림이 새겨진 바위면은 남쪽을 향하며 모두 6개면으로 꺾여 층단을 이루는데, 바위그림을 새기기 위해 수직면으로 다듬은 것으로 보인다.
금장대 정상부분에 통일신라시대의 석실고분군이 밀집해 있고, 바위그림 북서쪽 민묘 주변에 통일신라시대의 초석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어, 일대가 금장사지 또는 건물터로 추정된다. 주변에서 채집된 반달돌칼 조각은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고고미술사학과에서 보관하고 있다. 또 인근에서 발견된 ‘임신서기석’은 신라시대 화랑들이 학업에 충실할 것을 다짐하는 글이 분명하게 새겨져 있는데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금장대에 오르기 직전 벼랑에 새겨진 암각화 앞에 서면 동쪽으로는 경주예술의 전당과 시가지로 연결되는 북천, 남쪽으로는 형산강물이 굽이치고 강변도로와 동대교, 경주시외버스터미널로 이어지는 도로 등의 풍경이 계절, 시간대별로 아름다운 풍경을 선물한다.
◆홍도야 울지마라
금장대에 오르기 전에 넓은 주차장이 마련돼 있다. 작은 자갈돌이 깔린 주차장을 지나 개울을 넘어서면 아담한 공원이 보인다. 소공원 한편에 남쪽을 바라보며 ‘동도명기 홍도추모비’가 날렵한 바위에 추모글이 새겨진 채 서있다.
경주예술총연합회를 비롯한 경주의 문화예술인들이 2016년에 조선시대 정조 임금으로부터 ‘홍도’라는 별호를 받은 기생 홍도 최계옥의 생애를 기록한 추모비를 세운 것이다.
동도명기 홍도 최계옥(1778~1822년)은 음악과 시문 등에 뛰어난 천재예술인으로 후학 양성에도 전념한 인물이다. 최계옥은 죽은 뒤 경주시 도지동 산 18-7번지 일대에 안장됐다.
그후 30년이 지나고 철종 2년 경주의 풍류객과 교방의 악공, 기생들이 묘비를 건립해 묘지를 관리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경주지역 예술인들이 홍도의 묘를 관리했지만 묘역 일대가 코아루아파트 부지에 편입되면서 묘비는 사라지고 분묘는 무연고분묘로 처리돼 2005년 납골당에 안치됐다.
홍도 추모비에는 ‘임은 한 송이 붉게 핀 복숭아꽃이었다. 어두운 곳에 두어도 스스로 발광하는 구슬처럼 온갖 꽃들의 시샘이 따사로웠다. 세상의 풍랑은 거칠고 사나웠으나, 임은 한 시대의 한을 온몸으로 감싸 안은 채 고결한 삶을 잃지 않았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또 후진을 양성하고 마흔다섯살에 모든 재산을 이웃과 친지에게 나누어 주고 죽어 야산에 묻혔다는 등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제 홍도는 없다. 이 시간을 즐기고 풍미하려는 현 시대의 사람들이 시나브로 드나들며 지나간 일들을 훑어볼 뿐이다. 그들의 발걸음은 또 어떠한 흔적으로 남을지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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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금장대ㆍ조만간 다시 가봐야겠어요~~^^*
글을 복사해서 원문을 올려주시는건 힘드신가봅니다ㆍ
원문도 같이 올리겠습니다
사진을 따로 올리기가 불편해서요. ㅠ
원문과 사진 한두장 그렇게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