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이유, 십자가 위에서 부르는 노래, 진실해야 닮을 수 있다.
옷을 벗는 자유, 관계성 안에서 태어나는 성탄의 신비.
< 191124 - 191203. 미루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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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이유 - 미루나무 191124
작은형제회 - 말씀/ 삶 - 자유나눔 2019.11.24 23:21
이해할 수 없는 감동
씻어주는 상처
부드럽게 해주는 앎
하느님의 손길
하느님의 마음을 아는 표시
가슴 벅찬 슬픔
실핏줄까지 범람하는 피
용서받는 자유
깨달음의 신비
자비와 선의 전율
심연의 아름다움
하느님의 겸손하심
하느님의 가난하심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
가슴 태우는 아버지의 눈길
억제할 수 없는 기쁨
담을 수 없는 충만
다정하고 측은한 바람
말 없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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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위에서 부르는 노래 - 미루나무 191126
다가가기 쉽고
다정하고 겸손하며
끊임없이 환대해주려는 마음으로
내 것과 네 것의 경계를 넘어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드러나도록
한계가 없는 십자가들 속에서
기쁨의 노래를 슬프게 부른다.
여기저기 아프고
몸의 요구가 거세지는데
자유를 찾는 마음은
몸을 돌보라고 하지 않는다.
기력이 다하여 지치고
머리칼은 빠지고
뼈마디는 마디마다 신음하고
눈은 흐려지고
귀는 매미 우는 소리로 가득한데
정신만은 또렷하여
죽음의 형장으로 가면서
기쁨의 노래를 슬프게 부르나 보다.
슬픈 노래를 실컷 불러보자
십자가 위에서
그분도 그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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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해야 닮을 수 있다. - 미루나무 191126
진실해야 변화가 이루어진다.
하느님의 이미지가 깨달음 안에서 변화하면 나도 바뀌어야 한다.
그 변화의 과정이 진실할 때 하느님을 닮을 수 있다.
바닥이라는 진실과 수치라는 진실을 만나고
견딤과 기다림의 동기가 순수하고 진실할 때 눈이 열린다.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동기가 단순하고 진실할 때
집착하던 것들을 놓아주고 꼭대기에서 내려올 수 있다.
빛을 받아 빛이 되는 과정의 진실함
체험이라는 칼끝으로 베기 전에는 정직하기 어렵다.
칭찬과 평가의 흔적을 지니고는 진실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가난과
자신을 중심으로 만들려는 요구들을 의식적으로 성찰할 때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빛을 받아 조금씩 조금씩 주변을 밝힌다.
부정적 이미지를 고치려고 쏟아붓던 에너지를
긍정의 선물들을 확장하는 에너지로 바꾸는 지혜와
관계의 현장에서 발견하는 하느님은
예수님의 진실과 나의 진실이 만날 때 이루어진다.
사랑은 상대방을 패배자로 만들지 않고 협력자로 만들기에
사랑은 공격하지 않는다.
공격하는 사랑은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폭력을 저지른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자신이 가진 힘을 사용하시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진실함을 믿으셨기에 끝까지 견디시고 생명을 내어주셨다.
그래서 십자가는 진실함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오늘도 그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본다.
거짓과 가짜를 알아차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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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벗는 자유 (이미지 관리) - 미루나무 191128
지배할 필요도 굽신거릴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살려면
자신이 만들었거나 외부의 평가가 만들었거나
그 이미지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이미지에 잡착한 사람은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가까워질수록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다.
그분의 현존 안에서는 자신을 과장하거나 높일 수 없고
벌거벗은 상태를 상징하는 가난만이
그분의 현존 앞에서 온전히 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거짓 나, 꾸며낸 나, 높인 나를 포기하는 것이 가난이다.
하느님과 더불어 현존하기 위해서는
명료하고 투명하며 무력하고 연약함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남들이 붙여준 이름, 그것을 딱지로 여기기 때문이다.
딱지는 내가 아니다.
인정과 칭찬과 평가를 이미지로 만들고
거기에 집착할 때마다 관계 안에서 갈등과 마찰과 단절을 가져오게 된다.
오로지 남들의 평가에만 의존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찾지 않는다.
찾는다면 하느님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관리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이미지를 관리할 필요가 없다.
남들이 높여 준다고 해고 높아지지 않고
깎아내린다 해도 낮아지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 뿐이기 때문이다.
옷을 벗는 자유
마음이 깨끗한 사람
가난한 사람
정직한 사람
그들은 명료하게 지각하고 정확하게 반응함으로 딱지를 내 것으로 하지 않는다.
옷을 벗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알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 후반기 인생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라면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 안에서 가짜 나를 발견하고
외형만의 자신의 이미지를 떠나보내야 한다.
전반기 인생에서는 필요했을지 모르지만,
후반기 인생에서는 참된 내가 되는 것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연결된 삶은 불필요한 쓰레기를 과감하게 버리는 것과 관련이 있다.
죽음이라는 마지막 떠나보냄을 준비하려면
젊은 날의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내가 아니다.’
나는 하느님이 보시는 나요, 당신의 선하심을 닮은 나이며
선을 행함으로 창조하는 나이다.
이런 나는 하느님 안에 있는 나이다.
하느님 안에 있는 나는 없는 나이다.
하느님만 있고 나는 없다.
내가 없는 나야말로 하느님 안에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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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성 안에서 태어나는 성탄의 신비 - 미루나무 191203
용서 없는 삶은 하느님의 신비에 접근하기 어렵다.
신비에 접근하지 못하는 삶은 하느님을 잃고 방황하게 된다.
자기에게 갇혀 관계가 단절되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갇히면 인과응보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고
업적과 공로를 통해 보상을 기대하며
통제와 지배로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세상을 염두에 두고 연기하는 배우처럼 산다.
하느님의 신비에 접근하는 최상의 방법은 용서하는 일이다.
하느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은 용서하는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배운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성의 결과가 아니라
받은 사랑에 응답하는 결과로 용서하기 때문이다.
용서는 복음의 핵심주제 중의 하나이지만
늘 변두리로 밀려나 있거나 다음으로 미뤄져 있는 현실이다.
미뤄놓은 것은 해결되지 않은 채 삶의 끝까지 간다.
그러므로 용서 없는 진실은 복음을 발생시킬 수 없다.
용서의 핵심에는 선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
업적과 공로의 결과가 아니고 거저 받은 은총이며
친구요 연인이자 아버지이신 분의 겸손한 자비가
관계를 재설정하게 해주는 창조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최후의 순간에도 용서하면서 살리셨다.
기쁜 소식은 이익을 우선시하는 계산서를 만들지 않는 데서 나온다.
그래서 복음의 핵심에는 죽음이 있다.
이기심과 자기중심적인 체면과 자존심의 죽음이다.
용서받고 용서하지, 용서하고 용서받는 구조가 아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용서가 없이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이 용서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한다.”
우리는 너무나 많이 상처를 주고 폭력을 저질러왔다.
미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앙갚음의 칼을 내려놓게 하는 완전한 선물의 세상,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새 창조의 복음,
진리를 품은 현재가 용서하는 현재가 되는
관계성에서 태어나는 성탄의 신비,
육화의 신비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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