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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주특전사령관(팔짱)이 참모와 전두환 제1공수여단장에게 보고를 받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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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주사령관 휘하지휘관접견 전두환 1공수여단장과 노태우 9공수여단장이 배석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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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정병주 장군의 '자살'당시의 신문기사.>
하지만 유족들은 다음과 같은 근거로 자살이 아닌 타살가능성을 제시했다.
◎ 정병주는 1983년에 천주교에 입문, 영세를 받았고 (세례명 요아킴), 독재정권 종식을 위해 명동성당의 미사에 빠짐없이 참석할 정도로 독실한 천주교인으로 살았던 그가 자살을 할 리가 없다는 점.
◎ 당뇨를 앓긴 했지만, 자주 산책을 하고, 대중목욕탕을 애용하는 등 건강과 삶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는 점.
◎ 평소 사소한 일도 기록을 남기는 성품인 정병주가 유서 한 장 없이 자살할 사람이 아니란 점
◎ 빚보증문제도 집이 근저당만 잡혔을 뿐, 생계에 직접적인 변화가 온 건 아니란 점
훗날, 1995년 장태완이 TV 인터뷰를 통해 '같은 군인으로서 정병주씨는 결코 자살할 사람이 아니다'고 주장했고, 이때문에 정병주의 죽음에 관한 의문이 풀릴 듯 했지만, 아직까지도 정병주의 죽음에 관해선 말이 많다. (유족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병주는 87년의 12.12 관련 발언 때문에 타살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이 또한 추측일 뿐,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장태완은 이와 관련해서, 정병주가 12.12 쿠데타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시사저널'에 보낸 편지를 공개한 적이 있었다. '오늘 장장군댁을 방문한 후, 보다 튼튼하게 살아보겠다고 보신탕집을 찾아 두꺼비(소주) 두마리를 잡아먹고 편지를 씁니다.'로 시작되는 이 편지는 시종 역사의 증인임을 명심하고 건강을 지키자는 당부와, 진상 규명을 위한 자료 수집 진척 정도, 애로 사항 등을 담고 있었다. 주목할 점은 그 편지에 남아있는 끝에 있는 구절인데, '목적하는 바가 성사될 때까지는, 보안에 유의하고 자료 수집에 열중합시다. 이 편지는 보시고 소각하십시오'라고 쓰여있었다. 정병주가 상당한 위협 의식을 느끼긴 했지만, 그날의 진상을 알리려는데 적극 나섰음을 암시해준다.
현재 故 정병주 前 특전사령관의 묘는 국립묘지에 있다. 하지만 다른 장성급 인사의 묘비와 좀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비문(碑文)이 한 글자도 없다는 점. 이에 대한 이유는 유족들의 설명이 답이 될 듯 하다.
훗날 故 정병주 장군의 미망인인 강남희 여사와, 장남 정승환은, 5.18 특별법 제정에 부쳐 '기다린 보람이 있어 고인의 비문을 만들 수 있게 . 역사의 진실이 밝혀진다면 아버님도 지하에서나마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군인이였던 그의 행적을 담은 좋은 비문을 만들겠다'라고 했는데, 지금은 어찌됬을지 모르겠다. (당 역사연구소는, 이 자리를 빌어 고인의 비문이 새겨졌기를 기원한다.)
출 생 지 : 경상북도 영주
종 교 : 천주교
특이사항 : 12.12 당시 특전사령부 사령관
[경력 사항]
1949년 : 육군사관학교 9기
1950년 : 1연대 소대장
1964년 : 6사단 참모장
1967년 : 공수단장
1974년 : 소장 승진, 대통령 경호실 차장
1975년 : 특전사령부 사령관
1979년 : 12.12 사태당시 직속 부하에 의해 총상
1980년 1월 20일 : 육군소장으로 강제예편
백 비
우리 조상들은 죽어서도 불의에 저항했다. 수양대군이 쿠데타로 정권 을 잡자 부제학으로 있던 조상치는 영천으로 낙향, 두문불출하고 종신토록 왕궁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살았다. 죽기전에 다듬지 않은 허술한 돌멩이로 자신의 무덤앞에 세울 비석 하나를 만들어 놓았는데 「노산조 포인 조상치지묘」라 새겨져 있었을 뿐이다.
노산조라 함은 옛 임금의 신하이지 세조의 신하가 아님을 나타냄이고 포인이라고 했음은 망명하여 도망한 신하라는 뜻이니 죽어서까지도 세조 의 쿠데타에 저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산군의 악정을 간하다가 육 신을 찢기는 고문 끝에 유배길을 떠나던 홍언충은 노숙하면서 자신의 묘 비명을 짓고 있다. 연산조 때에는 유배지에 가면 사약을 내리는 것이 관 례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대명천하 햇빛이 비치는 나라에 남자의 성은 홍이요 이름은 언충이 며 반평생에 우활하고 옹졸함은 문자의 공이라 서른둘에 생을 마치니 명 은 어찌 그다지도 짧으며 뜻은 어찌나 그다지도 긴고. 옛 고을 무림에 무덤을 정하니 천추만세 후에 누가 이곳을 지날는지 반드시 이무덤을 가 리키며 슬퍼할 이가 있을 것이다」 했다.
퇴계 이황도 묘비명을 써 아들 준에게 주었는데, 전면에 「퇴도 만은 진성이공지묘」 라고 새겼을 뿐 벼슬도 품작도 신분도 이름도 없이 그저 아호와 본관만을 나타내는 겸허함을 보였던 것이다. 전라도 장성군 황룡 면 아곡리에 가면 명종때 명신 박수량의 무덤에 묘비가 서있는데 앞 뒤 에 아무런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은 백비다.
호조판서까지 역임한 그가 38년의 벼슬살이를 그만 두었을때 집 한채 도 없었을 만큼 청백했다. 그 청백을 죽어서까지도 지키려는 의도라기도 하고 죽을 즈음 세도의 폐해가 극심했던 때인지라 그 불의에 저항하기 위함이라고도 한다. 이같은 백비 레지스탕스는 선비정신의 구현으로 관 습이 돼 있었다.
국립묘지에 비석없는 무덤은 없다. 신원 확인이 안되었으면 무명용사 라는 비명의 비석이라도 서있다. 한데, 장군 묘역에 있는 한 무덤에는 누구의 무덤인지도 알 수가 없는 유일하게 비명이 없는 백비 하나가 서 있어 백비전통을 잇고 있다. 지금 법의 저울 위에 올려지고 있는 12·12 군부쿠데타 당시에 장태완 장군과 더불어 신군부측에 저항하다가 부하가 쏜 총탄에 총상을 입고 강제 전역당하여 암울하게 살다 의혹을 남기고 죽은 정병주장군의 묘비인 것이다.
참군인 정신을 구현하다가 불의에 희생당한 원한 사무친 영혼인지라 저항 수단으로서의 백비요,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비면에서 넘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는 백비이기도 하다.
비문 없는 묘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제1장군묘역 168호 육군 소장 정병주의 묘.
12.12 당시 신군부에 맞서다 직속 부하들에 의해 총상을 입고 강제 전역당했던 정병주 전특전사령관이 묻혀있는곳이다. 정씨는 89년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후 이곳에 안치됐다. 그러나 정씨의 묘비는 7년째 백지 상태로 남아 있다. 주변에 있는 다른 장군들의 묘비엔 동료 군인들이 헌사한 「추모의 글」이 빽빽이 새겨져 있다.
장씨의 묘가 무비문으로 남아 있는 것은 『명령을 생명으로 여기는 군 인들이 상관에게 총질을 하고도 버젓이 활보하는 세상에 고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는 유족들의 뜻에 따른 것. 그러나 5.18특별법 제정 발표 로 12.12와 5.18의 진실이 밝혀질 날이 다가오자 유족들은 가슴을 설레 며 비문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
장남 승환씨(40·한성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다린 보람이 있어 아버 님의 비문을 만들 수 있게 됐다』며 『역사의 진실이 밝혀진다면 아버님도 지하에서나마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망인 강남희 여사(64)는 연이은 충격을 받고 고혈압 증세를 보이는등 건강이 좋지 않 은 상태.
강여사는 5.18특별법제정소식에 오래 간만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남 편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게 됐다』며 『참군인이었던 남편의 행적을 담은 좋은 비문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정씨는 강제 전역당한후 당시의 악몽을 되새기며 우울증세를 보이다 89년3월 실종 1백30여일만에 경기도 고양군 산중턱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됐다. 승환씨는 『수사결과 아버지가 자살한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석연치않은 점이 많다』며 『아버지 죽음에 대한 진실도 밝혀져야 한다』고 말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
그는 12.12 군사반란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과 함께 진압군측에 서서 반란군에 대항하였던 대표적인 지휘관으로서 그는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달리 12.12 당시 이미 특전사를 지휘한지 5년이 넘은 시기여서 누구보다도 부대지휘에 자신이 있었고 전두환 소장의 격리작전에 의해 전두환 소장의 연희동 자택으로 유인되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납치소식을 접하고 원대복귀하여서도 전두환측에 의한 반란의 진압에 자신이 있었지만 누구보다도 아끼고 보호하던 직속부하인 제1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과 제3공수여단장인 최세창 준장 그리고 제5공수여단장인 장기오 준장 등 수도권에 있는 자신의 지휘하 4개 공수여단중 9공수여단장 윤흥기 준장을 제외하고 모두 전두환 소장측의 반란군에 가담하여 배신을 함으로서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으며 방금전에 지휘하며 부대장악을 지시하였던 직속부하인 최세창 준장의 3공수여단 제15대대 병력에 의해 총상까지 당하며 체포되고 말았던 것이다.
더욱이 제1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육사12기,하나회)은 그 여단장 선발과정에서도 정사령관의 도움을 받았으며 1978년 11월 충남 광천지역으로 침투한 3인조 무장공비 소탕작전의 실패(제1공수여단 지역으로 월북 도주)로 박 준장이 예편 직전에 놓였을 때도 정사령관이 그를 구출해 주기도 하는 등 그의 군인으로서의 은인이기도 하였으며 제5공수여단장 장기오 준장(육사12기,하나회)도 자신의 동기생 중 마지막으로 장군진급을 하는데 정사령관이 앞서서 도와 주었으며 정사령관에게 충성맹세까지 한 장성이었고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육사 13기)도 그가 특전사령부에 전입할 때 중령이어서 그후 줄곧 정사령관 밑에서 작전참모로 보직하였으며 대령 진급 및 준장진급 때에 정사령관의 도움을 크게 받았던 그의 심복부하라고도 할 수 있던 자들이었으니 특전사령관으로 5년동안 근속하면서 예하 지휘관과 참모들을 너무도 믿고 사랑한 결과가 배신으로 보답되었으니 그 분함이 얼마나 크고 원한에 사무쳤으리라.
하여튼 자신들의 은인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 총기를 사용까지 하여 살상케한 이들의 행태는 법적으로는 물론이고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 마땅하다.
결국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함께 12.12군사반란의 부당함을 증언하기 위하여 굿굿이 살아오다가 89년초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니 그의 사무친 원한을 푼 역사적인 12.12군사반란의 심판을 끝내 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정병주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육군소령
12.12군사반란 당시 군인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다가 반란군의 흉탄에 산하한 한 젊은 장교가 있으니 그가 바로 김오랑 소령인 것이다.
비록 진압군측의 주요 지휘관은 아니었지만 그 중 한명인 직속상관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끝까지 반란군으로부터 보호하다가 그들에 의해서 살해되고 말았던 것이다.
더욱이 그의 둘도 없이 절친한 친구인 제3공수여단 예하 15대대장인 박종규 중령의 병력에 의하여 살해되니 친구에 의해 죽임을 당한 셈이다.
사전에 반란군측의 특전사령부 기습공격 정보를 입수하고서도 자신의 위치를 사수하다 비명에 간 그이기에 비록 계급은 낮았으나 세인들은 높이 칭송하고 있다.
후에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그의 죽음 소식을 접하면서 모두들 배신을 하는 와중에서 유독 그를 목숨을 바침으로서 보좌하려 했던 부하의 잃음을 슬퍼하였다고 하니 이 비극적 사건은 세인들의 맘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것 같다